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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30년 1월 15일 (음력 1629년, 인조 7년 12월 3일) |
충청도 충주목 누암[1] (現 충청북도 충주시) | |
사망 | 1711년 5월 4일 (향년 81세) (음력 숙종 37년 3월 17일) |
경기 광주부 율현 (現 서울특별시 강남구 율현동) | |
재임기간 | 제139대 영의정 |
1687년 9월 1일 ~ 1688년 8월 9일 (음력 숙종 13년 7월 25일 ~ 숙종14년 7월 14일) | |
제143대 영의정 | |
1694년 4월 24일 ~ 1696년 9월 6일 (음력 숙종 20년 4월 1일 ~ 숙종 22년 8월 11일) | |
시호 | 문충(文忠) |
본관 | 의령 남씨[2] |
자 | 운로(雲路) |
호 | 약천(藥泉), 미재(美齋) |
붕당 | 서인 → 소론 |
부모 | 부친 - 남일성(南一星, 1611 ~ 1665) 모친 - 안동 권씨 권엽(權曗)의 딸 |
형제자매 | 여동생 - 반남 박씨 박세당의 처 사촌여동생[3] - 여흥 민씨 우의정 민진장(閔鎭長)[4]의 처 |
부인 | 동래 정씨 정칭(鄭偁)의 딸 |
자녀 | 슬하 4남 2녀 장녀 - 양주 조씨 조태상(趙泰相)의 처 장남 - 남학명(南鶴鳴) 차남(서자) - 남학성(南鶴聲) 3남(서자) - 남학청(南鶴淸) 4남(서자) - 남학정(南鶴貞) 차녀(서녀) - 이대곤의 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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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후기의 문관이자, 숙종 시대를 대표하는 명신이다.2. 생애
결성현(現 충청남도 홍성군 구항면)[5]에 살았으며, 송준길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651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56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이듬해(1657년) 정언이 되었다. 1660년 이조 정랑, 대사간(大司諫), 승지(承旨)를 거치고, 1668년 안변 부사와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하였고, 1674년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칭송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4년간 함경도 관찰사로 재임하고 중앙으로 돌아가자 지역민들이 생사당(살아있는 이를 위한 사당)을 지어 그를 칭송하였다고 전해진다.1679년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으나, 남인의 윤휴와 허적을 탄핵해서 유배되었다. 이듬해 경신환국으로 남인들이 실각하게 되자 도승지가 되었고, 대제학,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684년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1687년 영의정이 되었다. 그리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자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실각하자, 남구만 역시 강릉으로 유배되었다. 1694년 갑술환국이 일어나자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며, 1701년 희빈 장씨의 중형(重刑)을 주장하는 노론의 주장에 맞서 경형(輕刑)을 주장했으나 숙종이 희빈 장씨를 사사하자 충청도 아산현[6]으로 유배되었고, 이후 낙향했다.[7] 이후 갑술옥사로 재기하여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까지 지냈다. 사후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약천집(藥泉集)》이 있다.
그가 죽은 지 한참이 지난 영조 시절에 《천의소감》이란 책에서 그와 유상운을 매도하는 글귀가 실려서 영조가 "이 책을 당론을 위해 썼느냐?"라고 격노하여 다시는 당론을 입게 담지 않겠다는 반성문을 신하들에게 받아낸 일이 있었다.
3. 여담
- 안용복이 일본 에도 막부에게서 울릉도의 조선 영유를 확인받아 오는 쾌거를 이루었음에도 관리 사칭죄로 사형당할 상황에 처했을때 이는 벌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큰 상을 내릴 행위라고 안용복을 적극 옹호하여 유배형으로 감형하게 해주었다.[8]
-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로 시작하는 동창곡이 남구만의 작품으로 알려져 왔으나 대제학 이명한의 작품이라고 한다.# 하지만 남구만이 문장이 뛰어난 건 사실이어서 책문·반교문·묘지명 등을 많이 썼다.
- 그의 묘는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백옥대로 2140에 있다. 본디 그의 묘는 양주의 불암산 화접동에 있었는데, 뒤에 후손들이 용인시 모현읍 초부리로 이장했고, 1970년대 후반 묘역을 확장하면서 봉분에 네모난 지대석 기단을 둘렀다. 묘 앞에는 묘표와 망주석, 향로석 등이 있는데, 묘표석은 높이 90cm, 폭 67cm, 두께 35cm의 규모로 사각형 대좌 위에 몸돌을 올린 형태이다. 묘소 입구 도로변에는 1991년에 세운 신도비가 있다.
- 개그맨 남희석이 남구만의 11대손이다. 남희석의 고조부 남정량(南廷亮)이 남구만의 7대 종손인데, 남희석의 증조부 남달희(南達熙)가 남정량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 대에서 종가와 갈라지게 되었다.
- 개그맨 남희석의 얼굴에도 남구만 특유의 얼굴이 강하게 남아있는데, 비단 남희석 뿐만 아니라 다른 후손들도 비슷한 얼굴일 정도로 강력한 유전자를 자랑한다.
- 그가 기사환국 때 유배되었던 동해시의 약천마을[10]의 우물은 그의 송덕을 기리기 위한 우물이었는데, 이 곳에서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조명한 미제사건 동해 학습지 여교사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 우의정 시절 주강 중에 식년시의 개혁을 주장한 바가 있는데, 이 때 당시 상황에 대해 "식년시가 구송(암기시험)만 보니 시골에선 언문으로만 공부해서 급제하고도 서찰 하나 못 쓰는 애들이 수두룩해 삼사에 쓸 사람이 없어 난리다"라고 비판한 바가 있다.#[11]#[12]#[13]
시대를 앞서간 MZ 문해력 부족에 대한 예언?
4. 가계
10대조 남재는 조선 개국공신으로 영의정이었다.[14] 8대조 남지는 문종 때 좌의정이었다.그러나 계유정난 때 사돈인 안평대군의 죽음과 함께 잠시 권력을 잃었다가 손자대인 성종조에 다시 세력을 회복한 남지의 다른 후손들이나, 생육신 남효온의 족당(가까운 친척)이라는 이유로 현달한 관직에 못 오르다가 중종 때 대사헌·한성부판윤·형조판서 등을 지내면서 다시 집안을 일으켜세운 남효의(南孝義) 집안과는 달리 남구만의 집안은 후대로 내려오면서 한미해져, 남구만의 지위는 스스로 성취한 것이다. 남구만은 문장과 서화에 뛰어났다.
남구만은 본처인 동래 정씨와 4남 3녀를 두었는데 딸과 아들 2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10세 전에 조졸했다. 남구만 가문의 혼인 관계를 살펴 보면 노론과 소론의 주요 인물들이 두루 망라되어 있어 소론의 영수로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 조부 : 남식
- 아버지 : 현령 남일성
- 어머니 : 권씨 - 권엽의 딸
- 아내 : 동래 정씨 - 지평 정칭의 딸
- 딸 : 의령 남씨 - 조태상에게 출가
- 아들 : 남학명
- 며느리 : 전주 이씨 - 이민서[15]의 딸[16]
- 며느리 : 경주 이씨 - 백사 이항복의 증손녀이다. 이시현의 딸이다.
- 손자 : 남극관
- 손자 : 남처관
- 손자 : 남오관
- 손녀 : 의령 남씨 - 이창원에게 출가
- 손녀 : 의령 남씨 - 이광의에게 출가
- 측실 : 신원미상
- 아들 : 남학성
- 아들 : 남학청
- 아들 : 남학정
- 딸 : 의령 남씨 - 이대곤에게 출가
5. 대중매체
- 1988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인현왕후》 배우: 한인수
- 1995년 SBS 드라마 《장희빈》 배우: 한인수
- 2002년~2003년 KBS 드라마 《장희빈》 배우: 최상훈
- 2012년 tvN 드라마 《인현왕후의 남자》
6. 출처
[1] 모친이 출산과 육아를 위해 친정으로 돌아와 낳은 것으로, 부계 쪽에서 마련한 시골집은 결성현(現 충청남도 홍성군 구항면)에 있었다.[2] 충경공파(忠景公派)-간성공파(杆城公派)[3] 삼촌(작은 아버지)인 예조판서 남이성(南二星)의 장녀[4] 민유중의 형인 민정중의 외아들이자 인현왕후의 사촌오빠[5] 1914년 일제의 부군면 통폐합이 있기 전까지는 독립된 행정구역이었다. 그의 문집인 《약천집(藥泉集)》에는 외갓집인 충주 누암에서 태어나 세는나이 5살 때 한양으로 올라갔다가, 세는나이 10살 때 아버지가 은퇴하면서 결성 구산(龜山, 현 홍성군 구항면)에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6] 現 충청남도 아산시 북부 지역[7] 이 때 《동창이 밝았느냐》라는 유명한 시조를 썼다.[8] 다만 정확히 말하면 남구만 말고도 많은 이들이 안용복의 죄는 용서할만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결국은 관리를 사칭한 죄를 용서해주면 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와서 유배형에 처해진 것이다.[9] 참고로 남구만이 남인이라는 오해는 꼭 리그베다 위키 및 나무위키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전반적으로 널리 퍼진 오해로 보인다. 일례로, 2002년에 방송한 드라마 장희빈에서도 남구만은 남인이라 언급되며, 아예 남인의 영수라는 설정까지 붙어있었다. 다만 생전 장희빈을 포함, 남인 민암, 장희재 등에게 은전을 베풀 것을 고집하다가 소론 세력의 반발을 사 그들이 강경파 노론으로 전향하는 계기를 만들긴 했다.[10] 마을 이름도 남구만의 호인 약천에서 따왔다.[11] 원문이므로 참고 바람[12] 원문의 해석본이므로 참고 바람[13] 기록을 역동적으로 보고 싶다면 참고 바람[14] 개국공신 남은의 형이나, 개국 이후에는 행보가 갈려 무인정사에서 살아남았고 태종 때 영의정이 되었다.[15] 세종의 서자 밀성군의 후손[16] 남구만은 송시열의 제자 이민서와 교유가 깊었다. 남구만의 아들 남학명과 이민서의 딸이 혼인하여 친인척으로 맺어졌는데 이민서의 딸이 자녀 없이 조졸했다. 그래서 남구만의 아들 남학명은 이항복의 증손녀와 재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