徐有榘
(1764~1845)
1. 개요
조선 후기의 실학자. 본관은 대구 서씨, 자는 준평(準平), 호는 풍석(楓石), 시호는 문간(文簡).2. 생애
이조판서를 지낸 서호수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할아버지는 정조 시기 소론의 영수 서명선의 형 서명응이다.[1] 18세가 되었을 때 연암 박지원을 찾아가 학문을 사사했다. 1786년 23세에 진사시에 급제했고 1790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정약전, 김달순과 함께 초계문신으로 뽑혔다. 1795년 아들 서우보가 태어났고 순조 때 의주부윤, 대사성, 강화유수, 형조판서, 예조판서, 대사헌 등 여러 벼슬을 지내기도 했으나 1806년 숙부 서형수가 김달순의 옥사에 연루되면서 삭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체직되며 중앙 정계로부터 멀어진다. 이후 서유구는 농사를 지었고 서우보의 도움을 받으며 『임원경제지』를 저술하기 시작했다. 1827년 서우보가 먼저 세상을 떠난 후 1836년 74세에 수원유수로 임명되었다. 수원에서 매일 업무 기록을 남겨 『화영일록』이란 책을 썼다.1837년 고향 금릉(지금의 경기도 장단군 금릉리)에 있던 세간을 번계(지금의 서울특별시 강북구 번동)로 옮기고 벼슬을 그만두기 전이라 번계와 서울을 오가며 생활하다가 1839년 76세에 관직을 은퇴했으며 『임원경제지』를 임원 생활에 적용하고 시험해봤다. 1841년 두릉(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으로 거처를 옮긴 후 오비거사생광자표(五費居士生壙自表)를 집필했으며 1845년 두릉에서 82세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