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11 08:12:20

원두표


<colbgcolor=#c00d45,#94153e><colcolor=#f0ad73> 조선 정승
인조 ~ 경종
{{{#!wiki style="margin: 0 -10px -6px; min-height: calc(1.5em + 6px)"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좌의정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제141대

정창연
제142대

윤방
제143대

신흠
제144대

오윤겸
제145대

김류
제146대

이정구
제147대

김류
제148대

오윤겸
제149대

홍서봉
제150대

이성구
제151대

최명길
제152·153대

신경진
제154대

심열
제155대

심기원
제156대

김자점
제157대

홍서봉
제158대

심열
제159대

홍서봉
제160대

김자점
제161대

김상헌
제162대

이경석
제163대

남이웅
제164대

이경석
제165대

정태화
제166·167대

조익
제168대

이시백
제169대

김육
제170대

이시백
제171·172대

구인후
제173대

심지원
제174대

원두표
제175·176대

심지원
제175·176대

심지원
제177대

원두표
제178대

홍명하
제179·180대

허적
제181대

정치화
제182대

허적
제183대

정치화
제184대

송시열
제185대

김수항
제186대

이경억
제187대

송시열
제188대

정지화
제189대

김수항
제190대

정치화
제191대

김수항
제192대

권대운
제193대

민희
제194대

정지화
제195대

민정중
제196대

정지화
제197대

남구만
제198대

이단하
제199대

조사석
제200대

목내선
제201대

박세채
제202대

류상운
제203대

윤지선
제204대

최석정
제205대

서문중
제206대

이세백
제207대

이여
제208대

서종태
제209대

김창집
제210대

이유
제211대

이이명
제212·213대

서종태
제214·215대

김창집
제216대

서종태
제217대

이이명
제218·219대

김창집
제220대

이이명
제221대

권상하
{{{#!wiki style="margin: -16px -11px"
제222대

이건명
제223대

최규서
제224대

최석항
}}}
<colbgcolor=#c00d45,#94153e> 역대 정승
(태조-연산군 · 중종-광해군 · 인조-경종 · 영조-정조 · 순조-고종)
역대 영의정
(태조-연산군 · 중종-광해군 · 인조-경종 · 영조-정조 · 순조-고종)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우의정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제161대

윤방
제162대

신흠
제163대

오윤겸
제164대

김류
제165대

이정구
제166대

김상용
제167대

김류
제168대

김상용
제169대

홍서봉
제170대

이홍주
제171대

이성구
제172대

최명길
제173대

장유
제174대

신경진
제175대

심열
제176대

강석기
제177대

심기원
제178대

김자점
제179대

이경여
제180대

심열
제181대

서경우
제182대

심열
제183대

이경석
제184대

남이웅
제185대

이행원
제186대

남이웅
제187대

정태화
제188대

조익
제189대

김육
제190대

조익
제191대

이시백
제192대

한흥일
제193대

이시백
제194대

구인후
제195대

심지원
제196대

원두표
제197대

이후원
제198대

원두표
제199대

정유성
제200대

원두표
제201대

정유성
제202대

홍명하
제203대

허적
제204대

정치화
제205·206대

송시열
제207대

홍중보
제208대

송시열
제209대

김수항
제210대

이경억
제211대

김수흥
제212대

이완
제213대

정지화
제214대

김수항
제215대

권대운
제216대

허목
제217대

민희
제218대

오시수
제219대

민정중
제220대

이상진
제221대

김석주
제222대

남구만
제223대

정재숭
제224대

이단하
제225대

조사석
제226대

이숙
제227·228대

여성제
제229대

김덕원
제230대

민암
제231대

윤지완
제232대

류상운
제233대

신익상
제234대

윤지선
제235대

서문중
제236대

최석정
제237대

이세백
제238대

민진장
제239대

신완
제240대

김구
제241대

이유
제242대

서종태
제243대

김창집
제244대

이이명
제245대

서종태
제246대

윤증
제247대

김창집
제248대

조상우
제249대

김창집
제250대

김우항
제251대

이이명
제252대

권상하
제253대

조태채
제254대

이건명
{{{#!wiki style="margin: -16px -11px"
제255대

조태구
제256대

최석항
제257대

이광좌
}}}
<colbgcolor=#c00d45,#94153e> 역대 정승
(태조-연산군 · 중종-광해군 · 인조-경종 · 영조-정조 · 순조-고종)
역대 영의정
(태조-연산군 · 중종-광해군 · 인조-경종 · 영조-정조 · 순조-고종)
}}}}}}}}}}}}
원두표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정사공신(인조)
{{{#!wiki style="margin: -5px -11px; padding: 5px 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1623년 3월 13일 인조에 의해 책록
정사일등공신 (1등)
김류 이귀 김자점 심기원
신경진 이서 최명길 이흥립
구굉 심명세 }}}
{{{#!wiki style="margin: -32px -1px -11px"
정사이등공신 (2등)
이괄 김경징 신경인 이중로
이시백 이시방 장유 원두표
이해 신경유 박호립 장돈
구인후 장신 심기성
정사삼등공신 (3등)
박유명 한교 송영망 이항
최래길 신경식 구인기 조흡
이후원 홍진도 원우남 김원량
신준 노수원 유백증 박정
홍서봉 이의배 이기축 이원영
송시범 김득 홍효손 김연
유순익 한여복 홍진문 유구 }}}}}}}}}

서인
西人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사림파 [[틀:훈구파|{{{#000,#ddd ▲ 훈구파}}}]]
선조
(1575 ~ 1608)
박순 윤두수 고경명 성혼 심의겸
이이 정철 황윤길 조헌 송상현
광해군 - 인조
(1608 ~ 1649)
오윤겸 신흠 심지원 이경석 정태화
청서 공서
노서 소서
김장생 김상헌 김류 신경진 이귀
김집 이식 김자점 이시백 최명길
효종 - 현종
(1649 ~ 1674)
청서 소서 노서
산당 한당 낙당 원당
송준길 송시열 김육 김자점 원두표
숙종
(1674 ~ 1720)
강경파 온건파
송시열 민유중 김수항 윤증 남구만
김만기 김석주 김만중 박세채 최석정
노론 소론
조선의 붕당
(관학파 · 훈구파 · 사림파 · 동인 · 서인 · 남인 · 북인 · 소론 · 노론 · 개화당 · 수구파 · 정동파 · 위정척사파 · 급진개화파 · 온건개화파)
}}}}}}}}} ||
<colbgcolor=#c00d45,#94153e><colcolor=#f0ad73> 조선 정승
원평부원군(原平府院君) 충익공(忠翼公)
원두표
元斗杓
출생 1593년(선조 26)
사망 1664년(현종 5)
봉호 원평부원군(原平府院君)
시호 충익(忠翼)
본관 원주 원씨 (시중공파)
자건(子建)
탄수(灘叟), 탄옹(灘翁)
붕당 서인 (원당)
부모 부친 - 원유남(元裕男, 1561 ~ 1631)
모친 - 한극심(韓克諶)의 딸 청주 한씨
형제자매 2남 2녀 중 장남
[ 펼치기 · 접기 ]
남동생 - 원두추(元斗樞, 1604 ~ 1663)
여동생 - 해평 윤씨 윤우(尹堣)의 처
이복 여동생 - 동래 정씨 정지경(鄭之經)의 측실
부인 최동식(崔東式)의 딸 삭녕 최씨
자녀 7남 1녀
[ 펼치기 · 접기 ]
장남 - 원만석(元萬石, 1623 ~ 1667)
차남 - 원만리(元萬里, 1624 ~ 1672)[1]
3남 - 원만춘(元萬春, 1629 ~ 1697)
장녀 - 전주 이씨 이민서(李敏敍)의 처[2]
서자 - 원만동(元萬東)
서자 - 원만웅(元萬雄)
서자 - 원만령(元萬齡)
서자 - 원만적(元萬敵)

1. 개요2. 생애
2.1. 효종과 원두표
3. 가계4. 여담

[clearfix]

1. 개요

조선 중기의 관료로 인조조에 낙당, 한당, 산당과 함께 서인 4당의 한 축을 담당했던 원당의 영수였다.

임진왜란김화현 전투에서 순절한 원호의 손자이다.

2. 생애

임진왜란 발발 1년 후인 1593년 대대로 무인 가문이었던 집안에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정2품) 원유남(元裕男)의 아들로 태어났다. 박지계(朴知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인조반정에 참여했고, 공을 인정 받아 정사공신 2등에 책록되어 원평군에 책봉되었다. 1624년에는 이괄의 난을 진압하여 전주 부윤이 된 뒤, 나주 목사와 전라도 관찰사로 계속해서 승진했다. 병자호란 때는 어영부사로써 남한산성 방어의 담당자이기도 했다. 6년 뒤엔 형조판서로 승진한 뒤 강화부 유수와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공신인 만큼 공서(功西)의 일원으로서 청음 김상헌-김장생청서와 다투다 김자점과 사이가 안 좋았는지 분당해서 각각 김자점은 낙당(洛黨)의 영수, 원두표는 원당의 영수가 되었다.[3] 실록의 졸기에 따르면 인조가 죽은 직후 상소를 올려 권간의 죄를 논하는데, 사관은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김자점을 지목하는 것이며, 나중에 김자점이 역모를 꾸미다 죽은 것도 실제로는 원두표가 만들어낸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4] 이 시기에 임경업의 국문을 주창하기도 했다.

1649년엔 호조판서로 있다 파직당하고 2년 뒤 좌참찬좌찬성으로 다시 복귀하고 3년 뒤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때 김육대동법을 반대하기도 했지만, 김육이 역시나 밀었던 화폐(특히 동전) 사용에는 적극 찬성했다. 김자점이 죽고, 훨씬 그전에 김집, 송시열, 송준길은 낙향을 택해서 이시백과 함께 구신으로서 요직을 맡았다. 우의정좌의정에도 올랐다. 한편, 현종 즉위년에 터진 1차 예송논쟁 때 판중추부사로써 대신 중 한 명의 자격으로 허목의 입장을 지지했다.

효종 승하 당시에 내의원 최고책임자인 도제조였기 때문에 대간들의 탄핵을 받았으나 현종이 그 동안의 공이 크다고 해서 별다른 처벌은 받지 않았으며 계속 도제조를 겸하였다.[5] 1664년(현종 5년) 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다가[6] 얼마 못가 사망하였고[7] 현종은 3일 동안 조회를 열지 않고 원두표의 봉록을 3년까지 그대로 지급하기로 명하는 등 예우를 후하게 해줬다.[8]

남인이 편찬한 현종실록서인이 편찬한 현종개수실록 모두 전반적으로 평이 좋지 못한 편이다. 현종실록에서는 위에 링크된 졸기에서도 정승으로서의 업적이 없고 성품이 엉큼하고 시기심많고 거칠고 등의 표현이 있는 게 결정적이지만, 그 외에도 호남의 세수 부담을 줄이자는 의견에 반대해서 무산시킨 것에 대한 일에서도 임금에게 아부나 하고 백성은 돌볼 줄 모르는 불인(不仁)한 자라는 평을 하기도 하고[9], 엉망인 인재가 아첨한다고 해서 왕에게 추천한다고 해서 사욕을 채우고 하늘을 속인다라는 평을 듣질 않나[10], 이시방[11]의 졸기에서 이시방이 그래도 원두표처럼 범람하고 교활한 수단은 안써서 칭찬받았다라는 비교 기사로도 까인다.[12] 이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남인을 몰아낸 뒤의 현종개수실록에서는 위의 기사들에서 까이는 부분이 삭제되는 등 그나마 덜 까이는 편이지만, 졸기에서는 역시나 성격이 거칠고 오만하며, 정승으로의 업적은 없으나 그래도 집에서는 괜찮았다...는 평으로 무마하고 있다.[13]

2.1. 효종과 원두표

병조판서 재임 때부터 이완, 유혁연과 함께 효종의 국방력 강화 정책에 크게 힘쓴 인물 중 한 명이다. 1654년 그의 건의 덕에 영장(營將) 제도가 부활되었는데, 각 도에 위치한 지방군대 담당인 진영(鎭營)의 장을 영장 또는 진장(鎭將)이라고 한다. 정3품 당상관으로써 전국 8도에 46인+강화도에 5인, 합쳐서 총 51명이었으며 지방의 군비 확장 사업을 담당했다. 효종이 능 참배와 함께 열무식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였다.
“상께서 모든 유생들이 항상 답답하여 정사를 논할 사람이 없어 하시더니 여러 대신들을 살피던 중 오직 공만이 큰일을 책임질 만하다 하시고 마침내 군사의 일을 공에게 맡기고 도성의 보루마저 겸하여 관장토록 하시고는 때때로 혼자서 밀실에 불러 들여서 더러는 술을 권하시며 후원에서 조용히 일을 의논하시며 사관에게 명하사 이를 기록하지 말도록 하셨으며 표범 가죽으로 만든 갑옷과 패도를 하사하시니…”
원두표의 신도비문

3. 가계

  • 5대조 원중륙(元仲稑)
    • 고조부 원팽조(元彭祖), (1473년~1542년, 충청도 병마절도사)
      • 증조부 원송수(元松壽)
        • 조부 원호(元豪)
          • 부 원유남(元裕男)
            • 부인 삭녕 최씨
              • 장남 원만석(元萬石)
                • 손자 원몽은(元夢殷, 양자, 생부는 원만춘]
              • 차남 원만리(元萬里)
                • 손자 원몽린(元夢麟)
                • 손자 원몽익(元夢翼)
              • 삼남 원만춘(元萬春)
                • 손자 원몽정(元夢鼎)[14]
                • 손자 원몽은
              • 장녀
              • 사위 이민서(李敏敍)
              • 원만동(元萬東)
              • 원만웅(元萬雄)
              • 원만령(元萬齡)
              • 원만적(元萬敵)

4. 여담

  • 실록에서 검색해보면 특이한 사건이 하나 있는데, 1661년(현종 2년)에 현종이 아버지의 무덤인 영릉을 참배한 뒤 돌아오면서 돌곶(石串) 부근에서 금군(禁軍)의 활솜씨를 시험하게 됐는데, 갑작스런 명에 신하들이 다들 반대했으나 현종은 활쏘기를 강행시켰다. 그런데 이 화살 중 하나가 원두표의 옷에 맞아 팔에 상처를 입게 됐고, 결국 활쏘기는 중단되는 일이 있었다.[16]
  •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 원두표에 대한 전설 두 개가 실려있다.#
  • 인조반정 때의 야사맹꽁이 서당에 소개되었다. 귀양살이를 하는 오리정승 이원익을 찾아가 반정 사실을 알려야 해서 원두표가 찾아간다. 그러나 노정승을 역적으로 만드는지라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고 그날 밤 한방에서 자게 되는데 자기전 잠버릇이 고약하고 잠꼬대가 심함을 알리고 밤이 깊자 오리 정승의 몸에 발을 걸치고 정승이 잠들지 않은걸 알고 잠꼬대랍시고 반정 사실을 흘린다. 다음날 오리 정승은 원두표가 소생의 잠꼬대로 불편치 않았는지를 묻자 다른데 가서 그런 소리 말라고 하면서 찬동의 뜻을 전한다. 그러나 비밀이 슬금슬금 샜고 결국 망우리 고개에서 잡혀 혹독한 국문을 받지만 동지들을 불지 않았고 결국 사형이 집행되게 되었다. 그런데 하늘이 도운것인지 군관이 마지막 소원을 묻고 원두표는 내 손으로 술잔을 들고 마시고 싶다고 간청해 포박을 풀고 술을 마시다가 불시에 군졸들을 밀치고 강으로 뛰어들어 상류로 10리를 헤엄쳐 지금의 압구정에 이르러 어느 정자 밑에 들어가 잠을 청하는데 그 정자에 반정 동지들이 모여 그를 애도하는걸 듣고 동지들과 다시 합류한다.

[1] 장남은 원몽린(元夢鱗)으로, 효종의 6녀인 숙경공주의 부마가 되면서 흥평위(興平尉)에 봉해졌다.[2] 이관명(李觀命), 이건명의 모친.[3] 이로 인해서 김자점이 아들인 김정, 김식과 함께 난을 일으키려 할 때 원두표와 산당을 죽이려 했다고 실토했다.[4] 현종실록 8권, 현종 5년 6월 24일 을묘 5번째기사[5] 현종실록 1권, 현종 즉위년 5월 17일 정축 3번째기사[6] 현종실록 8권, 현종 5년 5월 1일 임술 3번째기사[7] 현종실록 8권, 현종 5년 6월 24일 을묘 5번째기사[8] 현종실록 9권, 현종 5년 10월 10일 무진 3번째기사[9] 현종실록 6권, 현종 4년 2월 12일 신해 4번째기사[10] 현종실록 6권, 현종 4년 1월 27일 병신 1번째기사[11] 이귀의 아들이자 이시백의 동생이다.[12] 현종실록 2권, 현종 1년 1월 16일 임신 2번째기사[13] 현종개수실록 11권, 현종 5년 6월 27일 무오 1번째기사[14] 증손녀가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다.[15] 숙종 말기에서 경종 초기까지 최고의 권력을 구가하던 노른 4대신의 1인인 그 사람 맞다.[16] 현종실록 4권, 현종 2년 8월 28일 갑술 1번째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