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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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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민공(忠愍公)
임경업
林慶業
파일:임경업 초상.jpg
<colbgcolor=#a52a2a><colcolor=#fff> 출생 1594년 12월 13일
충청도 충주목 남변면 달천촌
(현 충청북도 충주시 달천동)[1]
사망 1646년 8월 1일 (향년 51세)
한성부
본관 평택 임씨
영백(英伯
고송(孤松)
시호 충민공(忠愍公)

1. 개요2. 영정 그림에 대해3. 생애
3.1. 초년3.2. 병자호란3.3. 반청복명 활동
3.3.1. 조청 연합 작전에 태업3.3.2. 명나라와 내통3.3.3. 명나라 망명 및 체포
3.4. 본국 송환 및 최후3.5. 죽음 직후 반응
4. 사후 평가 상승5. 평가
5.1. 전통적 평가5.2. 실제 행적에 대한 평가
6. 기타7.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조선무관이자 외교관이다. 명청교체기명나라를 위해 여러 활약을 벌였으나, 조선정쟁에 휘말려 사망했다.

2. 영정 그림에 대해

위의 그림은 현재 남아 있는 임경업 장군의 영정이다. 그런데 이 영정도 그림 주인공의 일생처럼 명나라조선의 교집합을 보여준다. 전언에 따르면, 1640년 숭정제가 임경업의 얼굴이 보고 싶다고 해서 명나라 화공이 조선에 와서 그려갔다고 한다. 당시는 임경업이 명나라와 짜고 가짜 전투를 했던 그 시기이다.

이때 화공이 2장을 그려서 한 장은 명나라로 가져가고, 한 장은 조선에 남기고 갔다고 전한다. 현재의 그림은 임경업 사후 다시 그려진 것이다. 우측에 기재된 <충민공 임장군 유상>이라는 표제도 그렇고, 그림체에 조선 후기의 특징과 명나라 화풍의 특징이 많이 묻어난다고 한다. 여담으로 흉배가 아주 특이하다. 이것은 인조 때에 공이 있다고 판단한 무신들에게 특별히 하사한 것으로, 본래 호랑이와 곰 등 동물을 주로 한 것과는 달리 구름과 방사형등 도상적 이미지가 강하다.

3. 생애

3.1. 초년

1594년 12월 13일 충청도 충주목 남변면 달천촌[2]에서 절충장군(折衝將軍)[3] 행(行) 충무위 부사직(忠武衛副司直)[4]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5]를 지낸 임황(林篁)의 7형제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전쟁놀이를 좋아했는데 하루는 아이들을 모아 놓고 군사놀이를 하는데 군기를 날리며 돌로 성을 쌓고 대전을 하는 도중 때마침 경주에 도임하는 윤진이라는 신임목사가 지나가다가 길을 막아 놨으므로 길을 피하라고 호령을 했다. 임경업은 사람이 성을 피하는 법이지 성이 사람을 피하는 도리가 있느냐 하였다. 이에 윤진 목사는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으로 짐작하고 길을 돌아갔다고 한다.

1620년 종9품 소농보 권관(小農堡權管), 1622년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1624년 정충신 휘하에서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 1등이 되었다. 이후 우림위장, 방답진 첨절제사 등을 지냈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좌영장으로 병력을 이끌고 강화도로 나갔으나 이미 화의가 성립된 후였다. 1628년 김류에게 선물을 보낸 것 때문에 탄핵을 받는다. 간원의 언급에 의하면 천얼(얼자) 출신이라고 한다.

1630년 평양 중군으로 검산성과 용골성을 수축하는 한편 평안도 철산군 가도에 주둔한 명나라 도독 유흥치의 군사를 감시해 준동을 막았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면 청군의 요동 공격을 막지 못하고 조선으로 탈출한 모문룡이 압록강의 가도에 주둔한 이래 그가 이끄는 '모군(毛軍)'은 청나라 견제를 위해 조선을 수탈하여 군자금을 마련했다. 인조반정으로 정통성이 취약했던 조선 조정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도움을 받은 점 때문에 강경한 대응을 할 수 없었다. 반면 청나라 입장에서는 배후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서 모문룡의 제거가 필요했다. 이는 2번에 걸친 호란의 배경이 되었다.

이후 모문룡은 원숭환에 의해 제거되지만 모군은 그대로 남아 진계성이 이어받았다가 진계성을 유흥치가 제거하고 그가 수장이 되어있던 상황이었다. 유흥치는 모문룡과 별다를 것 없던 인물로 1만의 조선 양민들을 죽여서 청군의 목이라 위장하여 명나라 본국에 보낸 자였으며 오히려 잔악한 양민 학살을 보다 못한 청군이 나서서 이들을 물리쳐 구해주기까지 했다고 한다.

1631년 산성을 수축하던 중 정묘호란으로 허약해진 군사력 등의 이유로 청천강 이북의 방어를 포기하려던 조정의 정책에 반감을 품고 청북인[6]들의 반발을 사주하였다는 이유로 탄핵받고 구금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1633년 청북 방어사 겸 영변부사로 백마산성과 의주성을 수축했다. 이 시기에 경중명과 공유덕 등 명나라의 장수들이 후금에 투항하려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의주부윤 윤진경과 함께 명나라 대도독에게 연락하여 합동 공격을 벌였는데, 이 공로로 명나라로부터 총병 벼슬을 받았다. 이 사건은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634년 의주부윤으로 청북 방어사를 겸임할 때 백마산성 수비에 자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조정에서 은 1천 냥과 비단 100필을 지원받았다. 이를 자본으로 삼아 중국 상인과 밀무역을 하여 자본을 축적하고 둔전을 유지하였으므로 공로를 인정받아 가선대부에 올랐다. 하지만 지나치게 이재를 축적하고 상층부에 뇌물을 제공하였다는 이유로 탄핵되어 파직당한다. 하지만 도원수 김자점의 적극적 요청으로 다시 가선대부가 되어 성곽 보수에 나선다.

임기응변에 능한 병사들을 뽑아 청나라인으로 변장시켜 청나라의 수도 심양에 잠입시켜서 첩보 활동도 벌였다는 일화도 있다.

3.2. 병자호란

병자년 정월, 임경업은 의주부윤으로 다시 임명되었다. 의주로 돌아온 이후 청나라의 침공이 임박한 것을 감지하고 2만 병력을 내려줄 것을 비변사에 건의했지만, 비변사는 오히려 의주에 배치되었던 부방(赴防)[7] 1600명을 안주로 이동시켜 청천강에서 저지선을 구축하려는 작전계획을 세웠다. 그나마 도원수 김자점이 의주를 지키려는 임경업의 의지를 높이 평가하여 지원했다.

그의 지원에 힘입어 기존의 부방군이 안주로 이동하는 대신 황해도의 부방군 2400명이 의주에 추가로 투입되었다. 이로써 당시 임경업이 거느린 병력은 의주의 장정 2300명과 황해도 부방군 2400명 그리고 기타 의주부 직속 아병(牙兵)과 인근 진보의 병력을 합쳐 5천 명에 달했다. 이제 임경업은 백마산성을 지키는 데 충분한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병자호란 당시 임경업 휘하에 고작 300~400명밖에 없었다.'는 설이 널리 퍼져 있지만, 이는 사료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의주부윤 임경업이 치계하였다.
"겨울 방비가 임박하여 산성의 수비가 매우 긴급합니다. 백마산성은 성첩이 847개이니, 성첩당 다섯 명으로 계산하면 4235명이 되는데, 4영(營)의 유격부대 각 100명과 중영(中營)의 유격부대 200명을 합치면 총 4835명이 됩니다. (후략)"
인조실록 인조 12년(1634) 9월 25일
김자점이 아뢰었다.
"임경업의 뜻은 올해 안에 백성들을 의주의 옛 성으로 들여보냈으면 하는데, 신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백마성으로 들어갔다가 완실(完實)해지기를 기다린 연후에 들어가서 지키고자 합니다. 지금 백마성으로 들어간 자가 1700호(戶)이고 옛 성에 들어간 자는 220호이니 경내의 장정을 총계하면 2300명입니다. 이것이 또한 우연한 것이겠습니까. 다만 부족한 것은 군기입니다.”
승정원일기 인조 13년(1635) 9월 18일
도원수(김자점)가 아뢰었다.
“백마산성에 입방할 군사로 현재 의주에 있는 자가 1600명인데, 이들 군사로 하여금 돌아와 안주를 지키게 하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만약 이 군사들을 모은다면 의주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중략) 정식으로 부방하는 남군(南軍) 2400명을 백마산성에 보태어 방어하게 하고 큰일을 감당할 수 있는 임경업으로 하여금 실패 없이 굳게 지켜 보전하도록 한다면 국사에 있어서도 다행일 것입니다.”
승정원일기 인조 14년(1636) 3월 4일
병자년(1636) 정월, 이에 장군(임경업)이 의주부윤으로 다시 임명되었다. 장군은 또 비국에 말하길 "오랑캐의 남목(南牧)할 기미가 이미 드러났으니, 바라건대 2만 병력을 얻어 막고자 합니다"라 하였다. 비국이 처음에 따르지 않다가, 장군이 이를 쟁론하자 억지로 이에 해서(海西)의 2천 병력을 허급(許給)하였다.
지호집 임장군전

임경업은 또한 사람을 모집해 압록강 이북에 있는 송골산(松鶻山)과 봉황산(鳳凰山)에 정찰조를 투입해 연락망을 설치했다. 이들은 밤이면 횃불을 들고 낮이면 총포를 쏘는 것으로 의주에 연락을 보냈으며, 일반적인 봉수신호 체계에 따라 아무런 일도 없으면 1거, 적의 움직임이 있으면 2거, 적이 국경을 넘으면 3거, 적과 접전이 벌어지면 4거, 적의 대군이 들을 뒤덮으면 5거를 보내도록 했다. 이 연락망은 의주에서 평안도를 종단하여 도원수 김자점이 있는 황해도 황주까지 곧장 연결되어 있었고, 병자호란 초기에도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또한 살림과 장비를 넉넉히 지급하고, 그 부모처자를 매어두되 양곡을 지급하며 여러 주둔지의 짚과 꼴을 산성으로 모두 수송했다. 이때 우역(牛疫)이 크게 번져서 각 주둔지의 가축이 수백 두가 폐사하기에 이르니, 모두 포(脯)로 만들어 저장하였다. 쌓아둔 섶이 산과 같아, 대개 초둔(草芚)으로 군량인 것처럼 하였다. 산성에 우물이 부족해 큰 못을 파서 물을 담아두고 물고기를 길렀다.

이때 조정에서 척화가 득세하여 신사(信使)를 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장군에게 심중(瀋中)으로 상관(象官)을 보내어 사신단이 장차 다다를 것임을 고하게 하니, 대개 오랑캐의 정세를 살피고자 하는 것이었다. 장군이 상관에게 경계하길 "사신단이 늦어졌으니 적병이 분명히 움직일 것이다. 만약 백마(白馬)의 일을 협박하여 묻는다면 너는 모름지기 대답하길 '여덟 장수가 각기 3영의 군사를 인솔하고 들어갔으며, 무기는 예리하고 군량은 풍족하여 수년을 버틸 수 있다. 성 안에 다시 한 커다란 못이 있어 어룡(魚龍)이 둥지 삼는 곳이라 한다'고 하라"고 하였다. 상관이 과연 통원보에서 오랑캐와 만났는데, 백마의 허실을 물으니 장군의 말과 같이 대답하였다.

12월에 봉황(鳳凰)ㆍ송골(松鶻) 봉수가 적병을 보고 2거(炬)를 올려 경보를 보고하니 이에 치계하여 아뢰었다. 원수 김자점(金自點)이 즉각 변란을 보고하지 않아서 대가가 창황하여 겨우 남한(南漢)에 들어갔다.

장군은 곧장 부민(府民)들이 백마성 안으로 이주하도록 명령하고, 몸소 전후(殿後)가 되어서 들어갔다. 또한 흰 천의 장막을 지어서 성 안을 잇대 가려 멀리서 바라보면 성첩이 흰 것처럼 하였으며, 매 성첩마다 돌덩이를 많이 쌓고, 모든 성중 남녀에게 함께 성첩을 지키게 하였다. 3첩마다 한 토우(土宇)를 지어 토우 안에는 술 몇 말을 담가두고, 군사들이 번갈아 쉴 때 마셔서 추위를 막게 하였다. 또한 우포(牛脯)를 나누어 보내니, 군중의 환성이 우레와 같았다.

오랑캐 군 선봉이 경내에 들어와 백마산성을 돌아보지 않고 곧장 경성으로 향했다. 장군이 사람을 시켜 묻길 "어찌 허다한 군병이 갑작스럽게 이웃나라에 들어와서는 변신(邊臣)에게 말하지도 않는가?"하니, 오랑캐는 답하길 "국왕과 정약(定約)해야 하니 변신이 간여할 바가 아니다"라 하고 말미암아 멀리 달려 나아갔다. 이윽고 대군이 들을 덮으며 뒤를 이었지만 끝내 백마산성을 범하는 자는 없었으니 그 준비가 있음을 알았음이다.

(오랑캐가) 남한산성에 나아가 포위하고 오랑캐 백여 기가 심중(瀋中)으로 돌아가 보고하니 장군이 병사를 거느리고 성을 내려와 압록강에서 추격하여 그 장수를 죽이고 사로잡힌 남녀 120여 인과 말 60여 필을 빼앗아 돌아왔다.

오랑캐 임금이 돌아가니, 조정의 명을 받들어 성을 나와서 서윤 홍익한(洪翼漢)이 압송되어 심(瀋)으로 들어가는 것을 전송하는데 차원(差員) 변대중(邊大中)이 결박한 것이 몹시 심했다. 장군이 나와 보고는 그 결박을 풀고, 손을 잡고 위로하길 "명공(明公)의 이 길은 참된 남자의 일입니다. 살아서는 천하에 칭송이 있고 죽어서는 죽백(竹帛)에 이름을 남기니, 다시 무엇을 한탄하겠습니까"라 하였다. 이에 여비를 넉넉히 부조하니 홍익한이 감탄하였다.
지호집 임장군전

이렇게 방비를 철저히 했다는 지호집의 이야기도 있지만, 청군은 전략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의주의 백마산성 공략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우회해 버렸다. 결과적으로 임경업은 병자호란 및 대청전선에서 거의 활약을 하지 못했다. 임경업은 전쟁기간 내내 백마산성에 주둔했지만, 청군의 보급로를 끊지 못했으며, 청군은 한성까지 파죽지세로 돌진하여 강화도를 함락시키고, 남한산성을 포위, 삼전도에서 인조의 항복을 받아낸다.[8]

청군은 삼전도 강화의 조건으로 조선의 왕자들[9]을 볼모로 삼아 심양으로 압송하고 있었는데, 강화가 맺어치고 이렇게 본국으로 철수하는 부대중에 청태종의 조카, 즉 누루하치의 손자인 요퇴(要魋)가 지휘하는 청군 300명을 공격해 포로로 잡혀가던 조선인들 120명을 구했다. 이것이 사료에 나온 임경업의 유일한 대청군공이다. 이것이 뻥튀기가 되어 요퇴를 참살했다는 기록이 나오기도 하지만, 임경업의 행적이 신화화되면서 나타난 전설일 터이다. 요퇴는 멀쩡히 살아서 그 이후에도 활동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누르하치는 아들만 13명이 넘거니와 손자는 더 많기 때문에, 임경업이 정말로 요퇴를 참살했더라도 요퇴는 중요한 인물은 아닐 것이다. 이런 전설은 삼전도의 치욕을 겪은 조선인들의 정신승리의 일종으로, 박씨전에서 병자호란 이후 철군하는 용골대를 임경업이 대패시켰다는 창작이 가미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3.3. 반청복명 활동

3.3.1. 조청 연합 작전에 태업

청나라는 병자호란 후 조선과 군신 관계가 되자 대명 작전에 조선의 원병을 요청하였다. 조선은 난색을 표했으나, 청나라에게 밉보이면 더욱 큰 곤혹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원병을 보냈다. 이런 작전에서 자주 조선군을 이끌고 참전했으나, 계속 청나라에 태업을 하면서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지 않는다.

1637년 청은 모문룡이 죽은 후에도 가도에 주둔하고 있던 명나라의 동강진을 토벌하기 위한 병력 요청을 했다. 임경업은 수군장으로 참전하지만 그가 지휘하는 조선군은 처음에 공세헤 소극적으로 대했다. 하지만 정벌군을 총 지휘한 마푸타가 경고하자 그제서야 조선군은 공세에 적극적으로 참전한다. 조청 연합군은 가도에 주둔한 명군 1만 명을 죽이고 명군의 지휘관 심세괴(沈世魁)를 사로잡았다.[10] 마푸타는 심세괴에게 항복을 권유했으나 거절하여 참해진다.

다시 의주로 돌아온 임경업은 의주의 물자가 불안해져서 방어가 어렵자 이번에도 심양에 상인들을 파견하여 밀무역을 시도하였다가 청에 발각되었다. 이를 전해들은 인조가 분노하여 평안도 철산으로 유배를 보내었다.

인조 16년(1638) 청군이 명의 금주를 공격하기 위하여 조선에 군대 파견을 요청하자, 조선은 이를 거절하였으나 병자호란 시기 항복 조건에 병력 파견이 있었으므로 다시 병력 파견이 결정되었다. 이 때 비변사에서는 유배를 가있던 임경업을 용서하여 조방장으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이에 병력 300명을 이끌고 심양으로 가서 병력 동원의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전투를 피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공로로 인조에게 말 한 필을 받고 의주 부윤을 거쳐서 평안 병사가 되었다.

3.3.2. 명나라와 내통

인조 18년(1640) 청은 명의 금주위를 공격하려는 의도에서 다시 조선에 병력 파견을 요청하였고, 임경업을 주사상장의 직위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이에 임경업은 최명길[11]과 함께 명의 수군 대도독 홍승주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후 임경업은 청군을 도운다는 명분으로 참전했으면서도 싸움도 벌이지 않고 가지고간 군량미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 이 문제로 청은 조선 정부와 명이 서로 짜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고, 소현세자는 이를 적극적으로 부인하였다. 이후 청은 임경업에게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하라고 종용했으나 임경업은 대부분의 병력은 조선으로 돌려보내고, 군량미는 모조리 파기, 여전히 명나라와 전투는 없었다. 결국 임경업은 마지막으로 배까지 버리고 청을 정탐하여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에 청은 명과 내통하였다는 심증을 가지고 조선에게 임경업을 파직하라고 요구했다. 조선은 청의 압박으로 임경업을 정월에 삭탈 관직하였다가 바로 12월이 되어서야 겨우 동지중추원부사에 임명하였다.

인조 20년(1642) 이런 전말이 결국 드러났다. 청의 금주위 공격이 성공하였고, 임경업과 내통하였던 홍승주가 청에 투항하면서 그간의 서찰들이 모두 청에게 전해진 것이다. 이런 확증을 잡고 청은 조선에 임경업과 최명길 등을 압송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후 조정은 형조판서 원두표에게 임경업을 청으로 압송할 것을 명령했다. 이때 잡히기 전에 좌의정 심기원에게 은과 승복, 칼을 받았다. 그리고 이 지원을 받은 것이 임경업의 사망 플래그가 되었다. 그는 압송 도중 금교역에서 탈출하여 미리 맡겨둔 승복을 걸치고 승려로 변장하여서 숨어지냈다. 이후 몇 차례 명나라로 망명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하였고, 이 과정을 의심한 청의 요청으로 조선 조정은 임경업의 가족들을 청나라로 압송했다.

3.3.3. 명나라 망명 및 체포

이후 해를 넘겨서 인조 21년(1643), 마침내 김자점의 종이었던 상인의 도움으로 배를 구하여 명나라로 갔다. 이 시기 명이 아직 잔존해 있었으므로 임경업을 명에 보내서 끈을 대려는 의도를 가진 세력은 많았고, 심기원과 마찬가지로 역시 임경업을 한 번 도와준 적이 있어서 끈이 있던 김자점도 예외는 아니었다.[12] 하지만 이건 결국 2번째 사망 플래그가 되었다.

명나라산동 반도에 도착했고, 등주 도독 황종예 휘하의 총병 마등고 휘하의 평로 장군으로 4만의 병사를 이끌었다고 하지만 4만의 병사를 이끌었다는 것은 출처 확인이 필요한 대목이다. 당시 이자성군과 교전했던 오삼계군이 5만, 군이 8만 가량이었으니, 도독 휘하의 총병 휘하의 평로 장군이 4만을 이끌었을 리가 없다.[13] 황종예가 4만을 이끌었고 그 부하인 마등고 휘하에 있었다고 한다면 어느 정도 말이 된다.

하지만 인조 22년(1644) 봄, 명나라에 도착하자마자 이자성이 북경을 점령하고 숭정제는 자살하면서 명나라가 멸망했다. 명나라의 대청 전선을 이끌던 오삼계는 기회를 봐서 결국 이민족 편인 청나라에 붙었다. 5월 27일 산해관에서 이자성군과 청나라 + 오삼계 연합군이 격돌했고, 이자성군은 참패했다. 북경을 점령한 청나라군은 무서운 속도로 화북 전역을 장악하고는 명나라 잔당들이 명나라 부흥 운동의 거점으로 삼은 남경을 공략했다.

산동 반도에 주둔하던 등주 도독 황종예도 남경으로 이동하였는데, 임경업은 요동 반도의 석성도에서 재기를 노렸다. 하지만 남명의 거점이었던 남경마저 함락되었고[14], 임경업을 보호하고 있었던 마등고마저 청에 투항했다. 그리고 1644년 조선 조정에서도 후원자 심기원의 옥사가 벌어지면서 임경업은 국제적 미아가 됐다. 임경업도 포기하고 귀국하려고 했지만, 부하였던 한사립의 밀고를 들은 전직 명군 출신 청나라 장수인 마홍주에게 1645년 잡혀서 청나라가 지배하는 북경으로 압송되었다.

이 시기 청은 예친왕 도르곤이 섭정왕으로 즉위하면서 대사면을 내렸기 때문에 죽음을 모면하고 북경의 사옥에 18개월 동안 투옥됐다.[15] 북경에 투옥될 당시에는 청나라가 명나라 통치기구를 접수하고 거기서 일하던 명나라 관원들을 포섭하여 자기네 측으로 일하게 하고, 자신들에 위험한 남명 장수들을 모두 처형할 때였다. 임경업을 풀어줬다는 것은 딱히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어쨌뜬 이렇게 청나라의 옥에서 석방되어 조선의 소환 요구에 인도되는 것으로 반청복명 투쟁은 끝났다.

3.4. 본국 송환 및 최후

앞서 언급한 것처럼 조선에서는 좌의정 심기원과 김자점의 정쟁이 벌어지던 참이었다. 심기원은 인조의 무능함에 실망해서 난을 도모했으나 결속이 약하고 단속을 안해서 결국 고변자가 생겼다. 고변자가 심기원의 난을 고변하자 김자점이 이 기회를 노려 심기원이 난을 일으키려 했다는 명목으로 심기원 일파를 모두 제거했다. 참고로 심기원은 거사를 도모할 때, 인조를 상왕으로 물러나게 하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추대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가만히 있어도 왕자리를 물려받는 세자가 굳이 반역을 하며 아버지를 폐위시키는 패륜을 저지를 수 없으니 방계 종친인 회은군 이덕인을 왕으로 옹립하기로 계획을 바꾸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인조가 소현세자를 경계하는 계기가 되었다.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이후에 인조는 세자를 봉림대군으로 교체하고, 민회빈 강씨를 사사하고 세자의 아들들을 유배보내는 조치를 취했다.

조정에서는 임경업 또한 심기원의 일파일 것이라고 여겼다. 당시 임경업은 북경에 투옥 중이었으므로 조선은 청에 그를 송환해줄 것을 요청했다. 송환된 임경업은 심기원의 반란에 가담한 죄와 국가를 배신한 죄 등에 대해 조사를 받았다. 명군과의 위전(僞戰)은 임경업의 독자적인 의도로 광해군 시기 강홍립과는 상황이 달랐고, 명나라 장수로 들어간 시기에는 철저하게 명나라 장수로 활동했다는 것 등이 주요 이유였다.

임경업은 역모에 가담한 적이 없다며 결백을 주장했지만 김자점을 비롯한 추관들 모두 그 발언을 믿지 않았다. 결국 임경업은 국문을 받던 중에 견디지 못해 장살(杖殺)당하여 사망했다. 오랜 세월 만리타향을 전전하다 청나라 감옥에 약 18개월 구금되고 다시 조선으로 압송되는 험난한 여정을 겪었는데, 거기서 곧바로 국문을 받기까지 했으니 몸이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때 임경업은 “조정에서는 이미 천하의 일이 안정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오늘 나를 죽인다면 반드시 후회가 있을 것”이라고 외쳤다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었다. 하지만 남명정성공만 남은 시점의 현실에서 임경업의 이 발상은 정세판단 미스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었다. 삼번의 난을 가정한다 한들 임경업이 살아있었다면 난 당시 나이는 아흔 살이 된다. 당시 조선에서 최명길 등 대부분의 인물들은 명나라가 완전히 멸망하기 전엔 남북조시대가 재현될 것이라 생각했다. 이는 명나라에 최명길 등이 협조하고 김자점과 심기원 등이 임경업을 통해서 명에 줄을 대려고 했던 것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남경이 함락당한 시점까지 가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정성공이나 남명의 힘으론 남북조시대 재현은 불가능하다. 이걸 알았기 때문에 김자점이 친청파로 돌아서고 조선에서 소중화 사상이 등장한 것이다. 이렇듯 임경업은 국제정세를 판단하는 능력은 모자랐지만 정쟁에 휘말려 무고하게 죽었음은 아쉬운 부분일 것이다.

임경업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청나라의 압력이 아니라 정쟁에 휘말려간 역모죄에 대한 추궁이었다.

3.5. 죽음 직후 반응

임경업이 죽었다는 보고를 듣고 인조는 이런 반응을 보였다.
그가 역적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 내가 그에게 알려주려 하였는데 틀렸구나. 그가 제법 장대하고 실하게 보이더니, 어찌 이렇게도 빨리 죽었단 말인가. 그리고 그는 담력이 커 국가가 믿고 의지할 만하였다. 그런데 도리어 흉악한 무리의 꾀임에 빠져 헛되이 죽고 말았으니, 애석할 뿐이다.

임경업이 죽은 이유에 대해, "김자점은 자신도 역모에 연루될까 두려워서, 고문을 가혹하게 하여 임경업을 죽여 그 입을 막았다."는 소문이 퍼졌다. 단순한 풍문으로 치부하기 힘든 것이, 임경업은 본래 김자점의 막하에 있었던 장수였기 때문이다. 국문 당시 "네가 심기원과 작당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심기원 일당이 네가 배를 타고 가는 날짜를 알았느냐?"는 물음에, 임경업은 "무금(無金)의 처(妻)에게 '사또에게 바로 아뢰기는 어려울지라도 선달(先達)에게 내가 들어간다는 뜻을 말하면 사또가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라고 증언했다. 선달은 김자점의 아들 김식, 사또는 김자점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또한 무금은 효원이라는 인물인데, 효원의 누나 매환은 김자점의 계집종이자 임경업의 첩이었다. 임경업의 말인즉, "김식이 효원의 처를 통해 승선 날짜를 알았으니, 자연히 김자점에게 전해줬을 것이고, 그러므로 심기원도 승선 날짜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이므로, "김자점 또한 심기원과 내통하고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했다.#

하지만 인조는 임경업의 발언을 묵살했고, 입에 올린 인물들 역시 어떤 조사도 받지 않았다. 김자점은 시종일관 임경업이 의심스럽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발언으로 인해 발생한 본인의 혐의에 대해서는, "무금의 처를 잡아와 신문하자."는 상당히 구차한 반응을 보였다. 후일 자점의 역옥 때, 이시백, 안방준 등이 직접 대죄하여 자신의 결백에 대해 정면돌파로 대응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 그래서 그의 사망에 김자점이 관련되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것이다.

물론 김자점이 심기원의 변에 가담했을 리는 없다. 다른 인물들의 공초 내용에서는 김자점의 혐의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정황을 종합해볼 때, 김자점은 임경업과의 인연을 이용해 명나라와 인맥을 만들기 위해, 심기원과 함께 그의 망명을 도운 것으로 보인다. 이때의 일이 김자점이 심기원과 접점이 있었던 마지막이며, 인조 또한 그 사실을 짐작했기 때문에 임경업의 발언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이다.

아무튼 이 당시 김자점이 한 말을 보면 조정의 분위기가 얼마나 바뀌었는지 알 수 있다.
사대(事大)는 반드시 성의껏 해야 합니다. 이번에 청나라가 경업을 보내주고 또 선량(船糧)을 감해 주었습니다. 따라서 신의 생각으로는, 국가에 일이 많지만 만일 절사(節使)를 통해 그 은혜에 사례한다면 소홀하게 될 듯하니 별도로 사신을 보내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사망 이후에도 심기원의 반란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여죄를 추궁하려는 시도도 있었으나, 이미 사망하였으므로 인조의 뜻에 따라서 심기원과의 연루는 불문으로 돌리고 망명한 죄만을 적용하여 처리하였다.

4. 사후 평가 상승

임경업은 역모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옥사했지만, 그의 죽음에 결정적 역할을 한 친청파 김자점이 역적으로 몰려 집안이 풍지박산 나면서, 그에 대한 평가는 역적에게 참소당한 충신으로 높아졌다. 게다가 조선의 전반적인 반청 분위기에서 재평가 시도가 끊이지 않았고, 결국 사후 50년 만에 숙종은 그를 옛 관직에 추서하고 충민공이란 시호를 내려 완전 복권되었다. 이와 함께 임경업을 모시기 위한 사당도 함께 세웠다.

민담을 모아놓은 <청성잡기>에 보면 임경업이 명나라로 망명하면서 기생 출신 애첩을 지인에게 맡겨두고 갔다고 한다. 나중에 효종북벌을 하려는데 임경업 같은 인물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임경업의 애첩[16]을 불러올려 "어찌하면 임경업 같은 이를 얻겠냐?"고 물었는데, 이 첩은 "설사 임경업 같은 이가 있어도 전하께서는 북벌을 하지 못할 것"이라 한다. 효종이 웃으며 "어찌 그리 생각하느냐?"고 묻자, 임경업의 첩은 "과거 병자호란 때, 봉림대군(= 효종)께서 능히 김경징을 베어 죽일 수 있었으나 그 간단한 일도 하지 않았거늘 하물며 북벌을 할 수 있겠냐?!"며 "이는 계집인 자신도 안다."고 대답했다. 효종은 무안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물론 당시 봉림대군이던 효종이 김경징을 자의로 참했으면, 효종은 인조의 분노를 샀을 것이다. 분노는 둘째 치고 사람을 죽이고 살릴 권한은 군주에게만 있다고 했으니... 물론 김경징의 병크를 보면 봉건대군이 이적행위를 해서 참했다고 최대한 변명하면 될 가능성나마 없는건 아니다. 인조는 김경징의 삽질이 드러난 상황에서도 반정 공신 김류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살리려고 했기 때문에. 결국 김류가 김경징이 죽어 마땅하다고 해서야 김경징이 사약을 먹고 죽었다. 봉림대군은 세자도 아니고 차자에 불과했기 때문에, 저 때 인조의 마음에서 엇나갔다면 조선 국왕 효종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외에도 인조에게는 인평대군이라는 대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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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내 완산 이씨[17]는 남편과 같이 청나라 감옥에 수감되었는데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청나라의 옥중에서 자살했다. 청나라에서는 아내의 명나라를 향한 충성심에 감동하여, 시신을 정중히 조선으로 돌려보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충렬사에 정렬비가 세워졌는데, 비의 이름은 대명충신 조선 임 장군 경업 처 정부인 완산 이씨 정렬비(大明忠臣 朝鮮 林 將軍 慶業 妻 貞夫人 完山 李氏 貞烈碑). 사진을 보면 대명(大明)의 대(大) 자가 다른 글자들보다 한 칸 위로 올라와 있는데, 이는 전통적인 한문 글쓰기에서 단어들에 경의를 표하는 방법이다.[18] 그러니까 비문 작성자는 '대명'이란 단어 자체에도 경의를 드러낸 것이다.

명나라를 향한 임경업과 그 아내 완산 이씨의 충성심을 기리기 위함이라면서, 꽤 오랫동안 조선이란 단어가 빠져 있었다. 뭐 충렬사를 관리하는 충주시의 디지털충주문화센터 홈페이지에서도 잘못 적혀 있었으니. 참고로 저 조선이란 것은 단순 출신지 이야기이기 때문에 대명충신 부분에는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다. 저 비석은 임경업을 복권한 숙종 때에 세워졌다.

다만 명나라에서 세운 것도 아니고, 숙종 때 조선에서 세운 비석에 마치 명나라의 속국을 자칭하는 것처럼 썼으니 이후 후손들이 보기에 영 기분이 좋진 않았을듯. 그래서인지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훗날 박정희 또한 '대명충신' 부분을 언짢게 여겨 정렬비는 보관하고, 정렬비의 내용만 한글로 새긴 비석을 따로 세울 것을 검토케 했다고 한다.#

5. 평가

5.1. 전통적 평가

사실 군사적인 무공보다는 외교에서 더 많은 족적을 남긴 인물이라 할 수 있는데, 횡의와 통교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대청 외교에서 군사 파견 문제를 놓고 계속 청나라를 오가면서 조선의 사신으로 일했고, 이후 명나라와의 밀외교도 최명길과 함께 맡아서 진행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계속 승진하여 서북지역의 지휘를 통솔한 것으로 봐서는 여러모로 조정에서 능력은 인정받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반청복명 공작은 삼전도의 치욕을 겪은 조선인들에게 많은 동감을 받아서 이후 그를 미화한 여러 민담이나 <임경업전>과 같은 군담소설이 나오는 계기가 되었다.

5.2. 실제 행적에 대한 평가

성리학에 기반한 소중화 사상, 병자호란삼전도의 치욕 때문에 생긴 숭 사상이 극심했던 조선 후기에는 매우 높이 평가되었지만, 실제 역사적 행적을 본다면 군사적으로나 외교적으로 조선에 크게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오로지 당시 조선인들의 심리에 깔린 숭명반청이라는 이념에 맞는 여러 행적 때문에 높이 높이 평가되었고, 그런 기대 섞인 평가는 그를 소재로 한 여러 민담이나 <임경업전>에서 볼 수 있다. 삼전도의 굴욕을 겪은 조선인들은 청나라에 대한 원한을 정신승리로 만회하기 위해서 <임경업전>이 저술되기에 이르렀고 이후 많은 야사가 추가되면서 비운의 명장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박씨전>이나 <임경업전>에서 나온 것처럼 청나라맹장용골대를 쳐부순 명장이라는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뚜렷한 군공도 세운바 없다. 임경업이 이괄의 난에서 여러 활약을 하여 1등 공신이 될 정도로 유능한 무신임엔 틀림 없지만, 유일한 대청 군공이라고 할 만한 것은 삼전도에서 강화가 맺어지고 철수하는 청나라군을 무단 공격하여 포로 100여 명을 구한 것이 전부이다.양규 호소인 이는 사실 왕자들이 볼모로 잡혀가는 상황에서 매우 모험적인 것이고, 굴욕적으로나마 맺었던 강화도 깰 수 있는 위험한 것이었다.

게다가 청나라가 그를 크게 위험한 인물로 생각한 것 같지도 않다. 만약 정말로 청나라에 위험하다 싶거나 청나라에 큰 타격을 준 대단한 군공을 세웠다면 청나라가 그를 가만두지 않았을 텐데, 청나라는 그를 성가신 존재로 생각하면서도 은근히 이용했다. 청나라는 원군으로 왔으면서도 명나라와 내통하면서 태업하거나 대륙에서 반청 공작을 벌이던 임경업을 직접 잡아 처벌하지 않고 조선 조정을 압박하는 구실로 삼았다. 병자호란 당시의 삼학사나 임경업이 잡힌 시기와 비슷하게 청나라 쪽으로 전향을 거부한 남명의 장수 포로들인 좌무제(左懋第), 진방언(陳邦彥), 김성(金聲) 등이 모두 청나라에 처형되었다. 따라서 청나라는 임경업을 크게 위험한 인물로 간주하지 않았음이 확실하다. 임경업의 태업 때문에 인조와 조선 조정, 청나라에 볼모로 있던 소현세자봉림대군의 입장이 난처해졌고 그들은 청나라의 재침을 막기 위해서 엄청 고생했다.

외교 면에서도 딱히 큰 업적을 세운 바 없다. 청나라과 여러 교섭을 담당하고, 뒤로 명나라와 내통하면서 여러 태업이나 지연 전술로 청나라을 골탕 먹였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청나라는 조선에 강력히 항의했고, 조선 조정은 상당히 난처해진 적이 많았다. 당대 조선 조정에서도 그의 태업을 좋지 않게 여겼음은 확실하다. 태업이 빌미가 되어 청나라에게 다시 침략을 받거나 무리한 요구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조선은 청나라로 소환할 수밖에 없었고, 임경업이 소환 도중 탈출하자 조선은 그 가족을 심양으로 압송해 청나라를 무마했다. 그리고 탈출 후 그가 중국에서 벌인 반청복명 활동에 대해서도 조정은 높이 여기기보다는 무모하게 돌출하는 행동으로 본 듯하다. 이는 그가 청나라에서 송환된 이후, 심기원의 역모 연루뿐만 아니라, 이런 활동도 죄상에 포함되었음을 근거로 들 수 있겠다.[19]

또한 그가 만주 지역에서 명나라군청군의 대결을 보고 청군의 동태를 정탐했음을 주된 활동으로 내세울 수 있겠다. 그러나 정탐 활동이 얼마나 명나라에 도움이 되었는지 알 수는 없다. 즉, 그가 청군의 동태를 정탐하고 명나라군에 알린 것은 확실하지만, 그 후에도 송산 전투에서 명나라가 대패하고 임경업과 내통하던 홍승주가 항복했다. 그러니까 청군은 그가 정탐을 하든 말든 줄곧 명나라에 대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결국 "정탐" 활동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명나라에 크게 도움이 되진 않았다.

그의 활동은 그렇다고 해도, 자국을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명나라에 맹목적으로 충성한 것은 당대에도 물음표를 받을 만한 일이었고, 현대에 와서는 높이 평가하기 힘들어졌다. 사실 성리학적 질서 속에서 명나라는 조선의 상국이었지만, 분명히 명나라와는 구분되는 나라였다. 조공 체제의 상국은 서양의 주국 - 봉국이나 일본의 막번 체제, 또는 연방 - 산하 공화국과는 다른 것인데, 현대 기준으로 보면 그는 이를 혼동하고 자신을 명나라인으로 착각하고 청나라의 재침을 불러 조선을 위험에 빠뜨릴 일을 자주 벌였다.

사실 이것은 당대의 사대부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가 악화되자 심지어 명나라를 엿 먹이기 위해 요동 정벌을 검토하던 조선 초기와는 달리, 조광조이래 원리주의적인 성리학이 국교가 된 조선 중기에서는 중국사대함은 종교와 같은 것으로 변했다. 광해군 대에도 신하들 중 '나라가 망해도 명나라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신하들이 있었다. 그런 이들은 심지어 "명나라 조정에 죄를 짓느니 차라리 성상(조선 국왕)께 죄를 짓는 게 낫다."라고 발언할 정도였다. 임경업뿐만 아니라 임경업의 아내까지도 청나라의 옥중에서 자진했을 때 "내 남편은 대명의 충신이요, 나는 그 충신의 아내다. 오랑캐의 옥중에서 욕을 보며 남편의 충절을 욕보일 수 있겠는가?"라고 말할 정도였다. 임경업을 포함한 당대의 사대부들은 조선의 안보보다는 오로지 명나라의 부흥이 더 관심사였다.[20]

하지만, 이미 명나라 말기에는 황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서 수많은 명나라 한족 신하들이 이미 이민족 편인 청나라에 귀순하고 있는 가운데 조선인으로 명나라에 목숨을 바쳐 충성을 바친 형편을 보면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 있겠고, 현대의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그의 한계라고 할 수 있겠다. 그의 비문에 적혀진 "대명충신" 운운하는 대목에 박정희를 포함한 많은 현대의 한국인이 동감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렇게 구체적인 그의 행적은 사실 국익에 도움이 별로 안 되었다. 그러나 당대의 백성들은 그의 이념미에 반했을 것이다. 조선 사람들이 보기에 명나라가 별 대가 없이 조선에 파병하여 조선을 구원했음은 사실이고[21], 이는 왕부터 백성까지 모두 기억했을 것이다.

임경업은 명나라의 임진왜란 원병 파명에 대한 고마움을 보답하고 싶었고, 그래서 명나라가 무너지는 중임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바쳐서라도 조선과 본인이 명나라에게 의리를 다하고 싶었을 것이다. 임경업의 인성과 무인의 진정한 사명감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를 본 당대인은 당장 눈 앞의 자신의 이익과 자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구걸하며 연명하는 다른 인물들에 비해 임경업은 신조를 내려놓지 않고 꿋꿋이 버틴 진정한 무인이라고 평가했을 것이다. 그의 행적의 실효성에 대해서는 의문을 받을만 하지만,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했던 이념미는 당대의 대중에게는 커다렇게 공감대를 형성했을 것이다. 이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지만 후대에 신의 위상을 갖게 된 관우악비와도 통하는 바가 있다.

또한 임경업을 모시는 충렬사에는 박정희의 기념식수가 존재하며 1977년 3월 충렬사를 성역화 하라는 박정희의 지시가 있었다.

6. 기타

  • 연평도에서는 임경업 장군각이라는 사당이 있고 임경업을 풍어의 신으로 모시기도 하였다. 연평도 지역의 설화에 따르면 병자호란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세자를 구하기 위해 청나라로 가던 중 선원들의 부식이 떨어지자 연평도에 배를 대고 안목과 당섬 사이의 얕은 바다에 가시나무를 촘촘히 박아서 썰물로 물이 빠져나갈 때 나무 빗살에 걸려서 못 빠져나간 조기를 잡는 어살법을 주민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22] 마실 물이 떨어져서 병사들이 "목말라 죽겠다"며 고통스러워하자 바닷가 한가운데에 배를 멈추게 하고는 그 자리에서 바닷물을 떠서 마시게 했는데 신기하게도 그 물이 조금도 소금기가 없는 민물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금도 섬에는 임경업 장군각에서 주민들이 출어에 앞서 풍어제를 지내는 관습이 있다고 한다.
  • 전라남도 순천시낙안읍성에서는 임경업이 읍성을 하룻밤 만에 쌓았다는 전설도 있다. 물론 전설은 전설일 뿐이고 낙안읍성이 현대의 석성으로 만들어진 것은 세종 시기이다. 단, 임경업이 낙안군수에 재직하던 시절 읍성을 고쳐서 개량한 적은 있는데 이것이 전설로 이어진 것.

7. 대중매체

  • 그를 주인공으로 한《임경업전》또는《임장군전》이라는 제목의 고전소설이 있다. 주인공 최치원이 사실상 비범한 도사로 신격화된《최고운전》과는 달리 해당 소설의 임경업은 전형적인 조선 영웅상으로 묘사된다. 최후에 김자점의 모함으로 죽는건 역사와 동일하나 판본에 따라 김자점이 보낸 자객에게 죽었다고 묘사되기도 하며, 김자점은 청나라로 도피하지 못하고 조선 정부에 붙잡혀 임경업을 죽게 한 대가로 참수형을 받고 일족도 멸족된다. 이때 집행인이 임경업의 세 아들들인데 각기 돌아가신 부친 임경업이 명나라 황제에게 받은 상방검, 이 토해낸 단검, 무과 급제할 때 상으로 받은 창 등 임경업이 생전 애용하던 무기로 처형을 집행한다.

    정조실록》에 기록된 이야기로 한 이야기꾼이 종로의 한 담배가게 앞에서 자리를 펴고《임경업전》을 읽어 주고 있었는데 김자점이 임경업을 모함해 죽이는 대목에서 이야기꾼이 연기를 엄청 실감나게 했다. 이에 이야기에 과몰입한 청중 1명이 담배 자를 때 쓰는 칼을 들고 이야기꾼 앞으로 뛰어나가 "네 이놈! 네놈이 바로 김자점이렷다!"라고 고함을 치면서 이야기꾼을 칼로 죽였다. 이 사건이 얼마나 황당했는지 당시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도 "살다살다 이야기가 실감난다고 사람 죽이는 일은 처음 들었네."라고 기막혀할 정도였다.
  • 네이버 웹툰 《칼부림》에서 등장하는데 영정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선 굵은 무인형 용모이다.

[1] 평안도 개천군(현 평안남도 개천시)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2] 현 충청북도 충주시 달천동[3] 정3품 무관의 품계[4] 종5품[5] 정3품[6] 청천강 이북 주민[7] 조선 시대 다른 지방의 병사가 서북 변경의 국경 지대에 파견되어 방위 임무를 맡은 일. - 출처: 두산백과[8] 애시당초 청군은 한양을 함락시켜 인조를 사로잡을 작정으로 수도만을 노리고 속전속결로 진군했다.[9] 소현세자, 봉림대군 및 그 가족들[10] 일부 역덕들은 임경업이 심세괴에게 미리 통고해서 명군의 피해를 최소화했다고 주장하지만, 심세괴가 사로잡히고 명군 만명은 몰살당했으며, 이로서 가도는 온전히 조선의 영토로 수복되었으니 (<조선왕조실록> 인조 16년{1638} 7월 12일자 첫 번째 기사)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결국 심세괴와 내통을 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가도에 주둔하던 명군은 피해를 최소화하기는커녕 전멸했다.[11] 병자호란 시기의 주화파.[12] 심기원과 김자점은 정치적으로는 적대관계였다.[13] 명청시대 군대 계급은 도독 > 총병 > 부장 > 참장 > 유격 > 도사 > 수비 > 천총 > 파총이다. 총병은 현재로 치면 사단장 정도로 보면 될 듯하다.[14] 이후 남경은 1657년 정성공군이 일시적으로 수복하지만, 정성공도 결국 대륙을 장악할 수 없어서 후퇴하였다.[15] 도르곤이 임경업을 자신의 수하로 두려 했으나 "신하가 어찌 두 임금을 섬기겠느냐?" 하며 거절하자 도르곤이 그 충정에 감명받아 사형을 면했다는 야사도 있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후 심양으로 끌려갔던 삼학사가 청조를 섬기라는 권유를 거절해 처형되었으므로 위 야사는 사실이 아닐 것이다. 물론 임경업은 마음에 들어서 살려줬을 수도 있다.[16] '사랑하는 '을 뜻한다.[17] 진안대군의 7세손[18] 보통은 '황제'라든가 '사직' 같은 단어가 이런 대우를 받았다.[19] 이것은 심기원의 정적이자 친청파인 김자점이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그런 면도 있다.[20] 다만 조선도 17세기 조정에서 명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라가 망했음에도 자결한 충신이 없는 것에 대해 인조가 탄식하자[23][24] 석윤이라는 자가 말하길, 황제가 임금답지 못하여 지조와 절개있는 자들이 떠나서 그런 일이라고 은근히 명나라를 디스하는 기록이 있으니 명나라를 그렇게까진 섬겼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출처[21] 물론 조선 사람이 느낀 바이고, 명나라 입장에선 당연히 자신의 국토에 전쟁의 불길이 옮겨붙지 않게 예방전쟁을 치렀다고 할 수 있다. 즉, 명나라가 단순히 조공국을 챙기려는 목적으로만 파병한 것은 아니다.[22] 어살법으로 조기를 잡았다는 안목 어장은 오늘날 연평면사무소가 자리한 마을의 앞바다로 당섬, 책섬, 작은 지리 등의 작은 섬들에 둘러싸여 호수처럼 얕고도 잔잔하다. 이 곳에서는 썰물 때 조개, , 낙지 등을 아이들과 함께 직접 잡아보는 갯벌 체험이 가능하다.


[23] 이민족왕조에 존속기간도 짧던 원나라마저 홍건적의 난으로 무너질때 한족 충신들이 자결한 기록이 있었으니 명나라는 자결한 충신이 없는 것은 충분히 탄식할만했다.[24] 반대로 명나라의 사대부들이 청나라에게 대거 항복한 사례는 있는데 청나라는 항복해 온 명나라 사대부들을 우대했다. 당장 이름이 높던 명나라의 학자이자 조정 대신이었던 전겸익도 한 때는 청나라에 맞섰으나, 남명의 수도인 남경이 함락되자 자진해서 청나라에 항복했고, 심지어 "이제 명나라는 더 이상 가망이 없으니 모두 청나라에 항복하라."는 글을 쓰면서 청나라에 적극 협조했다. 물론 그 대가로 전겸익은 청나라로부터 예부우시랑(오늘날의 교육부 차관)이라는 높은 벼슬까지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