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4 09:37:08

안시성주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bgcolor=#000><colcolor=#fbe673> 전개 <colbgcolor=#fff,#191919>주필산 전투 · 안시성 전투 · 평양성 전투(661년) · 사수 전투 · 평양성 전투(668년)
관련 인물 <colbgcolor=#000> 고구려 보장왕 · 연개소문 · 연남생 · 연남건 · 연남산 · 안시성주
당나라 태종 · 고종 · 이세적 · 설인귀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bgcolor=#fff,#101010> 권 1
신라
김유신 ·
신라
장보고 (정연) ·
신라
침나 (소나) ·
고구려
부분노 ·
고구려
을지문덕 ·
고구려
안시성주 ·
백제
흑치상지 ·
고려
유금필 ·
고려
강감찬 ·
고려
양규 ·
고려
윤관
권 2
고려
오연총 ·
고려
김부식 ·
고려
조충 ·
고려
김취려 ·
고려
박서 (송문주) ·
고려
김경손 ·
고려
이자성
권 3
고려
김방경 ·
고려
한희유 ·
고려
원충갑 ·
고려
안우 (김득배 / 이방실) ·
고려
정세운 ·
고려
정지
권 4
고려
최영 ·
조선
이지란 ·
조선
최윤덕 ·
조선
이종생 ·
조선
어유소 ·
조선
이순신 ·
조선
권율
권 5
조선
곽재우 ·
조선
정문부 ·
조선
황진 ·
조선
휴정 (유정 / 영규) ·
조선
정기룡 ·
조선
김시민
권 6
조선
이정암 ·
조선
임중량 ·
조선
김덕령 ·
조선
정충신 ·
조선
김응하 (김응해) ·
조선
임경업 ·
조선
정봉수 ·
조선
류림 (류형)
참고 : 윗첨자의 경우에는 독립적인 열전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해당 인물의 열전 속에서 함께 설명되는 인물들이다. }}}}}}}}}
파일:양만춘 표준영정.jpg
표준영정
<colbgcolor=#191970> 직위 안시성주(安市城主)
이름 미상[1]
별명 양만춘(楊萬春 혹은 梁萬春)
1. 개요2. 이름에 대해3. 일생
3.1. 초기 일생3.2. 안시성 전투
3.2.1. 싸움의 서막3.2.2. 우주방어3.2.3. 토산을 빼앗다3.2.4. 승리
3.3. 전후의 삶
4. 평가5. 의문점
5.1. 이름5.2. 당 태종 애꾸눈설
6. 대중매체에서
6.1. 소설6.2. 드라마6.3. 영화

[clearfix]

1. 개요

고구려 후기 제28대 보장왕 시대의 장수.

645년 제1차 고구려-당 전쟁 때 일세의 영걸 당 태종 이세민이 이끌고 온 수만명의 대군을 요동안시성(安市城)에서 막아낸 명장으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당나라와의 전쟁시 안시성주의 활약은 대단해서 《삼국사기》나 그 외에 《구당서》를 비롯한 중국 사서에도 그의 전공이 자세히 실려 있다. 따라서 그가 실존 인물임은 분명하지만, 안시성주의 이름을 비롯한 신상이나 안시성 전투 이외의 기록은 모두 소실되어 현재 그의 일생을 추측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2. 이름에 대해

기록에 남은 그의 본명은 불명이다. 정사에 남겨진 이름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고, 따로 검증할 방법도 없는 상황이다. 정사에서는 '안시성주'라고 기술되어 있는데, 이는 '안시성의 주인, 성주(城主)'라는 직위로 이름이 아니다.

조선 시대 이후 세간에 불린 그의 이름인 '양만춘'(楊萬春 혹은 梁萬春)은 소설에 등장하는 이름이 와전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해당 소설은 명나라 시대의 소설가 종곡(鍾谷)[자(字)] 웅대목(熊大木)의 저술 《당서지전통속연의》(唐書志傳通俗演義)로 당 태종이 활약한 일대기를 소설로 각색한 작품이다. 중요한 부분인 고구려-당 전쟁 파트를 서술하면서 안시성을 지키던 성주를 절노부(絕奴部) 주수(主帥) 양만춘이라고 설정했다.[3] 그런데, 사람들이 이를 실존 인물의 이름으로 착각했고, 후대에 안시성 성주가 '양만춘'이라고 널리 알려졌다.

후대의 기록들은 이 소설 내용을 바탕으로 적은 것으로 추정된다. 대표적으로 조선 후기 유학자 송준길의 저서 《동춘당일기》, 박지원의 《열하일기》, 이익의 《성호사설》, 윤근수의 《월정만필》 등에서도 안시성주의 이름을 '양만춘'이라 밝혔다. 이는 모두 안시성 전투가 끝나고 1,000년 이상 지난 조선시대의 기록이고 해당 소설이 쓰인 이후 나온 기록들이라 정사가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오히려 안시성 전투와 더 가까운 시기인 고려 시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성주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아 애석하다고 썼다. 정사 기록에 '실전되었다'고 적힌 기록을 야사나 외국 소설에서 찾아내어 썼을 확률은 드물기 때문에 《당서지전통속연의》의 소설 내용이 와전된 것으로 보고 있다.

3. 일생

3.1. 초기 일생

안시성주의 일생에 대한 기록은 대단히 부족해서 그 정확한 출생시기와 출생지를 알 수 없다. 안시성주는 1차 여당전쟁 중 당 태종이 인용한 풍문을 통해 처음으로 역사 기록에 이름을 드러낸다.

642년, 고구려의 실권자였던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포함한 100여명을 살해하고, 영류왕의 조카를 보장왕으로 옹립한 후 스스로 대막리지의 지위에 올랐다.

당태종이 들은 소문에 의하면 안시성의 성주는 연개소문의 쿠데타에 불복하였고, 연개소문의 공격에도 성을 지켜내어 이후로도 계속 성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안시성주가 국정을 장악한 연개소문에게 대항했는지, 그랬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고구려-당 전쟁에서 당나라가 패한 것을 희석시키기 위해 고구려의 실권자인 연개소문과 그들이 대패한 안시성주가 대립했던 것을 과장했다고 보기도 하고, 연개소문 정권에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내부의 대립을 방증하는 사례로 여겨지기도 한다. 극단적인 경우, 역사학자 서영교는 이와 더불어 주필산 전투 당시 안시성과의 연계가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착안, 안시성을 독립국에 가까운 세력으로 상정하고, 연개소문 정권 사이에서의 알력을 원인으로 짐작하는 가설을 국방일보 연재물에 실은 바 있다. 물론 이에 대해 반박도 있다. 대립 자체가 존재하였는지에 대한 의문도 있고,[4] 또 대립했다고 해도 안시성주와 연개소문이 정치적으로 화해하거나, 하다 못해 당나라의 침공이 발생하자 개인 감정을 일단 덮고 고구려의 방위를 위해서 표면적으로라도 관계를 회복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정변 자체와 안시성 전투의 전개가 꼭 직접적으로 연관되었으리란 보장도 없다.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는 당시 고구려가 요동 세력과 평양 세력으로 양분되어 대립 중이었으며, 연개소문은 평양 세력이었고, 안시성주는 요동 세력이라 연개소문의 반란에 반발하여 대립한 것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했다.

3.2. 안시성 전투

3.2.1. 싸움의 서막

645년 3월, 당태종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살해하고 포악무도한 짓을 한 연개소문을 징벌한다는 명분으로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에 쳐들어왔다. 전쟁 초기에 당태종이 이끌던 당나라 군대는 요동성, 개모성, 백암성 등을 비롯한 요동 지방의 성 5~6개를 격파하며 마침내 안시성에 이르렀다.

고구려 조정에서는 안시성을 구원하고자 15만 대군을 고연수, 고혜진과 함께 파견시켰지만 당태종은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의 15만 대군을 격파하고 고연수와 고혜진이 항복함으로써 기세가 오른 상황이었다. 황제는 안시성 자체로도 상당히 험준한 요새인데다가 안시성주가 싸움에 능하고 병사들이 하나같이 정예병이기 때문에 함부로 치는 것 보다[5] 우선 남쪽의 건안성을 치는 것이 어떤지 주위 신하들에게 물었다. 건안성은 병력이 약한데다가 식량도 적으니까 불의에 나가 공격한다면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것. 당 태종도 처음에는 안시성을 공략할 의지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장군 이적이 나서며 북쪽의 안시성을 그냥 지나치면 나중에 요동성에서 출발하는 당군의 보급선을 유지하기가 힘들 것이라며 보급로를 끊어버리면 아군은 고립무원이니 마땅히 안시성을 먼저 함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들은 당태종이 마지못해 이적으로 하여금 안시성을 공격하도록 명하였다.[6]

3.2.2. 우주방어

당나라 군대는 고연수 등 항복한 사람들을 옹위하여 성 밑에서 안시성 내의 사람들을 불러 내었는데[7], 안시성 사람들은 꿈쩍도 하지 않고 북과 장구를 치면서 소리를 지르는 등 되려 도발하였다.[8] 이에 당 태종은 크게 분노했고, 이세적[9]도 몹시 약이 올라 성이 함락되면 모든 남자를 죽여버리겠다고 공언하였으나,[10] 되려 이건 안시성 주민들의 결사항전만 독려하는 결과가 되었다. 결국 이세적이 직접 성에 공격을 퍼부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성을 빼앗지 못하였다.

계속된 공격에도 안시성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군의 피해만 점점 늘어났을 뿐이었다. 당 태종을 따라 출전한 신하들은 "그냥 여기서 시간 낭비 말고 먼저 남쪽의 오골성을 친 다음에 바로 평양성으로 직공가죠."라고 청했다. 특히 안시성을 구원하러 왔다가 주필산에서 패전한 고구려 항장, 즉, 고연수고혜진이 가장 적극적이었다.[11] 그 논리는 오골성(烏骨城)의 성주는 늙었으니 쉽게 공략할 수 있을 테고, 오골성을 무너뜨리면 바로 평양을 타격할 수 있다는 것 이었다. 또한 장량의 병력이 있는 비사성에서 오골성까지 이틀이면 당도하므로, 힘을 합치면 오골성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 태종의 오른팔과 같았던 장손무기가 나서서 "천자께서 직접 하시는 정벌인데 함부로 움직여선 안된다. 지금 안시성을 포기하고 오골성으로 돌리면 분명 10만명의 적군이 우리 뒤를 칠 것이다.[12] 안시성과 건안성을 먼저 함락시켜야 한다 "라며 반발하자 안시성 공략을 계속하기로 결정이 났다.[13]

한편 당 태종은 안시성에서 밥 짓는 연기가 줄고 돼지를 잡는 소리가 나자 안시성주가 병사들을 잘 먹여서 야습을 하려 하는 것이라 여기고 대비하였다가 밤에 밧줄을 타고 내려온 고구려 병사 수십명을 무찌르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공성전에서는 실패의 연속. 안시성은 어떠한 흔들림의 징조도 보이지 않았다. 안시성에서 당군의 피해가 필요 이상으로 커지자 당 태종은 마침내 단순한 공성전을 포기하고, 장기전으로 전략을 변경한다.

3.2.3. 토산을 빼앗다

안시성에서 당군의 피해가 커지자 당태종을 따라 출전한 강하왕 이도종은 험준한 안시성 공략을 수월히 하기 위하여 으로 토산을 쌓았다. 그러자 안시성주는 근성을 발휘하여 똑같이 성을 높게 쌓아 막았다. 또한, 당나라 군사들이 토산 위로 올라가 충거와 포석으로 성벽과 망루를 무너뜨리려 하였지만 그때마다 안시성주가 나무로 만든 목책으로 무너진 틈을 막아버리고 반격을 가해서 이런 시도도 번번히 실패하였다.

아무리 공격해도 안시성이 무너지지 않자 당태종은 토산을 높이 쌓는 것이야말로 안시성을 함락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여겼다. 때문에 당 태종은 토산을 쌓던 이도종이 사고를 당해 발을 다치자 손수 침을 놓아 주며 보살펴주었고, 60일 동안에 인원을 500,000명이나 동원하여[14] 토산의 높이를 올릴 정도로 토산을 쌓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토산은 안시성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을 정도로 높아졌지만 전투 도중 토산이 갑자기 무너지면서 안시성 성벽을 덮쳐 성벽 일부가 무너져 토산과 안시성 사이에 연결 통로가 생겼다. 이 때 고구려군이 먼저 선수 쳐서 안시성에서 돌진, 토산으로 밀고 올라가 점거해버린다! 그리고 당나라군의 접근을 막기 위해 재빨리 통나무로 메우고 불을 질러 요새화해버림으로써 당군이 애써 조성한 토산은 한 순간에 안시성의 방어전을 더 유리하게 만들어주는 보루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유일한 희망이자 고생해서 기껏 만든 토산이 고구려군의 손에 넘어가자 당 태종은 참고 참았던 분노가 한순간에 폭발해 버렸다. 당 태종은 당시 사사로운 이유로 토산을 비운 하급 장교 부복애를 잡아서 토산을 빼앗긴 책임을 물어 참수하여 조리돌림하였다. 또한 죄를 인정하는 재종제 이도종에게도 처벌하지 않았으나 죽는 것이 마땅하나 살려주겠다며 분노를 표현한다. 그리고는 군사들을 보내 빼앗긴 토산을 되찾도록 하였으나 3일 동안의 맹공격에도 불구하고 고구려군의 거센 방어에 밀려 끝내 탈환에 실패하고 말았다.

3.2.4. 승리

당나라 군대가 안시성에서 발목이 묶여 내지로 진격하지 못하는 사이에 결국 겨울이 찾아오고 말았다. 차츰 강한 추위가 찾아왔으며, 과 풀이 얼어서 식수와 먹이를 구하기도 힘들게 되었을 뿐더러 설상가상으로 양식마저 떨어져 가고 있었다. 이는 공성측에 매우 불리한 조건. 게다가 몽골 고원의 강자인 투르크계 민족인 철륵(鐵勒)의 설연타가 당나라의 뒷통수를 때려버렸다.(자세한 내용은 삼국통일전쟁 참조)

퇴각을 결정한 것은 안시성에 발이 묶인 동안, 고구려군이 전열을 재정비해 반격할것이라는 우려, 후방의 보급로가 끊길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군이 안시성에 세달넘게 발이 묶인 교착상태인것을 안다면, 신성을 포함한 후방의 성들이 일제히 성문을 열고 나와 보급로를 공격하거나 후방을 공격하면 그 많은 당나라 군사들이 발이 묶여 오도가도 못할 판이었던 것이다.

버티다 못한 당태종은 결국 퇴각 명령을 내렸는데 안시성에서 전투가 일어난 지 무려 3개월 만이었으며, 그 때가 645년 9월이었다. 이리하여 안시성주는 마침내 중원을 통일한 희대의 영웅이었던 당 태종을 물리치고 대승을 거두는 영광을 얻었다.

당나라 군대가 퇴각하던 날에 안시성의 군사들은 모두 성 안으로 들어가서 자취를 감추었으나 안시성주는 직접 성에 올라 떠나가는 태종에게 절을 올리고 작별 인사를 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적국이지만 그래도 한 나라의 군주에게 나름 예를 갖추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15]

이를 지켜본 태종은 안시성주가 끝까지 성을 지켜낸 것을 가상하게 여겨 비단 100필을 성 앞에 남기고 갔으며 앞으로도 임금을 충실히 섬기도록 격려하였다.

그러나 퇴각하는 과정은 역경의 연속이었다. 당군이 고구려군의 후방 급습을 염려해 퇴각로로 선택한 것은 요하 하류의 거대한 늪지대인 요택으로, 당연히 발이 푹푹 빠지고 진형이 개판이 되었음은 물론 수많은 물자가 소실되었으며 무시무시한 추위에 병사들의 피해 역시 컸다. 이세민이 직접 자신의 수레를 밀며 퇴각해야 했을 정도라고 하니 피해를 어림잡아 짐작할 수 있다. 야사에 의하면 이때 고구려 군이 요택을 건너는 당군을 공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그만큼 당나라 군의 퇴각도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16] 결국 이세민은 고된 귀국길에 병을 얻어 얼마못가 병사하고 만다.

후술하겠지만 전투부터 당군의 피해가 엄청나다. 전사자만 수천에 대부분의 말이 소실되었고, 이세민이 요택을 건너 퇴각하면서 진흙탕에 빠진 자신의 수레를 직접 밀고갈 정도였다는 말을 보아서는 비단 100필을 줄 만한 여유 따위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17]

당나라 측 기록에 의하면 이 전쟁 기간 동안 당나라 군대의 피해는 군마 7,000~8,000필, 병사 1,000명 정도의 손실인데 전공은 고구려 군사 40,000명을 참살, 성 10개 함락, 포로 200,000명 노획, 군량 600,000석 확보 등 경이적인 교환비를 자랑하는 것처럼 기록해놓았다. 그러나 당시 정황으로 보면 신빙성은 없고 오히려 고구려측과 교전비가 바뀌는 것이 더 그럴듯하다.

결정적으로 이후 태종이 요택을 건너 퇴각하며 고구려 정벌을 후회한 것이나 당군의 처참한 상황 묘사 등을 보면 당군의 전력 손실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안시성에서의 전투는 그토록 치열했던 것이다.

3.3. 전후의 삶

당 태종으로부터 안시성을 지켜낸 후에 안시성주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당연히 언제, 어떻게 죽었는가도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안시성은 이후에도 종종 등장한다.

667년 9월, 당군이 다시 고구려를 침입해 당나라 장수 학처준이 안시성에 이르자 안시성에서 30,000명의 군사를 보내 당군을 습격했으나 학처준은 이를 격파했다. 또한 668년고구려가 멸망한 후, 이듬해 2월검모잠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부흥운동이 일어났을 당시에도 안시성 역시 이에 동조하여 당나라에 저항하기도 했다.

이후 671년 7월, 나당전쟁신라 방향으로 서서히 진격하던 당나라 장수 고간이 안시성을 쳐서 함락시켰다고 한다. 이 때 안시성에는 지난해인 670년에 죽었던 고구려 부흥군 지도자 검모잠의 남은 무리가 지키고 있었다고 하는데, 당 태종을 격퇴했던 그 안시성주가 이 때까지 안시성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26년이란 세월을 생각하면 이 때까지 성주로서 남아있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만 남아있었다면 이 때 죽었을 수도 있다. 다만 당 태종을 패퇴시켰던 안시성주 정도의 거물이 당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하거나 붙잡혔다면 그 사실이 당나라의 사서에 실려야 할 것인데,[18][19] 사서에는 그런 기록이 없으므로, 고간이 쳐들어왔을 때는 옛날의 그 안시성주는 이미 죽고 없었거나 혹은 안시성에 있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게다가 한 성의 성주로 전투를 지휘하려면 최소한 중년 나이는 되어야 할텐데, 당시 평균 수명을 생각하면 이미 26년이 지난 시점이라 죽거나 은퇴하고도 남을 세월이라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설령 살아있더라도 현역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높다.

4. 평가

唐太宗聖明, 不世岀之君. 除亂比於湯·武, 致理幾於成·康. 至於用兵之際, 岀竒無窮, 所向無敵.
당태종(唐太宗)은 성스럽고 밝았으며 세상에 다시는 나오지 않을 임금이다. 어지러움을 없앤 것은 탕왕(湯王), 무왕(武王)과 견주고, 이치를 다스린 것은 성왕(成王)이나 강왕(康王)과 견준다. 군가를 사용하는 재주는 끝이 없고 신통하니 늘 무적이었다.

而東征之㓛, 敗於安市, 則其城主可謂豪傑, 非常者矣.
그러나 동쪽을 정벌하는 데에 공력을 쏟을 때 안시성에서 패했다. 그 성주(城主)는 가히 호걸이며 범상치 않은[20] 자라 말할 수 있으리라.

而史失其姓名, 與揚子所云, “齊·魯大臣 史失其名.” 無異. 甚可惜也.
하지만 역사에서 그 이름을 잃어버리니, 양자(揚子)가 '멸망한 제나라노나라의 신하들은 역사에서 그 이름을 잃었다.'라는 것과 다를 바 없어 심히 애석하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김부식
그야말로 1차 고구려-당 전쟁 당시의 최고의 영웅이라고 하기에 손색이 없는 활약상을 보였다. 고구려 역사 전체로 봐도 고노자, 밀우, 유유, 을지문덕과 어깨를 나란히 할만한 구국영웅.

안시성은 견고하고 식량도 상당량 비축되어 있었기에 방어하기에는 유리한 곳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오합지졸을 당나라 군대라 부르는 것과 달리, 당시의 당나라 군대는 역대 중국사에서도 손에 꼽는 강군이었다.[21] 또한, 당시 안시성 공략에 나선 이들은 수없이 많은 중국의 군벌들을 무찌르고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당 태종, 당대에 당나라 최고의 명장 가운데 하나였던 이적, 그리고 황제의 오른팔 장손무기 등 능연각 공신들은 물론, 6부 상서 가운데 4명, 3공급, 각 위의 대장군급 등 쟁쟁한 인물들이 충출동한 막강하기 이를 데 없는 군대였다. 이런 먼치킨스러운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성을 굳게 지켜냈으니 비록 정체가 불명이긴 하지만 대단한 명장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당태종의 언급에 따르면 안시성주는 당나라 군대와 싸우기 이전에도 이미 연개소문이 보낸 군사로부터 성을 지켜냈다는 소문이 있었으니 보통 비범한 사람이 아니었을 것 같다.

또한 《삼국사기》의 <보장왕 본기>에서는 당 태종이 심복장수인 이적과 함께 안시성주에 대해 재능과 용기가 있다고 평가하는 대목을 보면 기록에 남지 않아서 그렇지 꽤나 유명했던 모양이다.

때문에 중국인들은 수나라당나라를 연이어 격퇴한 고구려에 대해 치를 떨기 시작했으며, 동아시아 일대에서는 안시성에서의 전투가 전설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수백년 뒤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은 당시 고려 태자였던 원종이 자신의 편에 서자 고려와 고구려를 동일시하면서[22] 직접
'당 태종도 굴복시키지 못한 나라의 태자가 나에게 직접 왔다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
라며 엄청 기뻐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다.

안시성주의 활약 덕분에 고구려는 물론 이후에 건국된 고려조선 모두 당 태종의 정벌군을 격퇴한 강국이라는 영광스러운 타이틀을 얻었으며, 후대의 한국인들도 이 대승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대표적인 예로 임진왜란 당시 류성룡선조가 국가에 훌륭한 장수가 필요하다고 하자 옛날에는 안시성주와 을지문덕이라는 뛰어난 장수가 있어 중국의 역사에도 찬미했다고 말한 기록이 있다.해당기사.

이 모든 것이 안시성주의 공이었으니 안시성주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는지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다. 대한민국 해군에서는 광개토대왕급 구축함 3번 함에 그의 이름[23]을 붙여 이 전투의 승리를 기리고 있다.

5. 의문점

5.1. 이름

안타깝게도 안시성주의 진짜 이름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안시성주에 대해 다룬 가장 오래된 사서라고 할 수 있는 《신/구당서》나 《삼국사기》 등에는 그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삼국사기》가 신라 쪽에 편 중되어 있어서 안시성주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뺐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신라 편중의 근거로 드는 분량 배분 문제도 애초에 신라의 존속기간이 고구려와 백제보다 2백 년은 더 기니까 분량이 고구려백제보다 좀 더 많은 게 당연하다. 이는 고구려와 백제는 전쟁으로 나라가 망했기 때문에 그 와중에 기록이 실전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임진왜란 중 전국 4개 사고에 보관 중이던 조선왕조실록이 그중 3개 사고 보관본이 소실되었다는 사례에서 이런 정황을 간접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 신라는 고려에 평화적으로 흡수되었으므로, 사료 소실이 상대적으로 적었을 것이다. 백제사서는 일본으로 도피한 후손들에 의해 일본서기에 인용되는 사례도 보이나, 고구려 사서는 그런 것도 없다.

삼국통일전쟁 이전 기간만 따지면 <고구려 본기>가 가장 많으며,[24] 삼국통일의 주역이자 김부식이 살았던 고려 시기에도 모든 아이들이 이름을 안다고 한 김유신조차도 남아있는 기록이 없어 역사서를 쓸 때 참조자료로 쓰지 않는 <행록>까지 참조한 사례도 있다.[25] 즉 고려시대까지 안시성주의 기록이 남아 있었고, 이를 김부식이 의도적으로 배제했을 확률은 없다. 무엇보다 《삼국사기》 <보장왕 본기>에서 서술자는 안시성주를 호걸로 고평가하며 그의 이름이 후대에 남지 않음을 매우 아쉬워하고 있다.

흔히 안시성주의 이름이 양만춘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실제 이름이 양만춘일 가능성은 상당히 낮다. 양만춘이라는 이름부터가 당대 삼국인의 이름과는 확실히 다르며, 오히려 조선시대에 쓰이는 이름과 비슷한 편이다.[26]

안시성주의 이름이 양만춘(楊萬春 혹은 梁萬春)이라는 설은 기록상으로 볼때 조선 시대부터 내려져오고 있다. 조선 선조 때의 문인인 윤근수[27]는 그의 저서인 《월정만필》에서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온 명나라 장수인 구정도의 말을 빌어서 중국인들이 《태종동정기》와 《당서연의》[28]에 안시성주의 이름을 '양만춘'이라 기록하였다고 했다. 이익은 '양만춘'이라는 이름이 하맹춘의 《여동서록》에 나온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여사초》(麗史抄) 등의 기록이 '양만춘' 이름의 출전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현존하는 문헌 중 '양만춘'이라는 이름이 최초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바로 위의 《당서지전통속연의》이다. 이 소설에서는 고구려 장수가 약 30명 가량 등장하며, 신성의 김정통(金精通), 황룡파(黃龍坡)의 구비(歐飛), 건안성에서 당군에게 사로잡히는 노한삼(盧漢三), 술법으로 바람과 비를 불러일으키는 속정한(束頂漢) 등이 있다. 《당서연의》보다 먼저 기록된 《여동서록》 등에서 그 실제를 찾으려는 시도도 있으나, 정말로 《여동서록》에 그런 내용이 있는지 확인된 바 없다. 또한 '양만춘'이라는 이름의 출처를 연구한 논문에서는 아예 《여동서록》을 신빙성이 없는 자료로 평가했다.

한편 조선 후기에 지어진 송준길의 《동춘당선생별집》과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는 윤근수가 전한 말을 그대로 따라서 안시성주의 이름을 양만춘이라 표기했고, 조선 말기의 현채가 쓴 국정교과서격의 책인 《신찬초등소학》(新纂初等小學)[29]이나, 박은식이 쓴 수필 등에 모두 楊萬春이라고 나와 있다.

어쨌든 이름의 유래와 상관없이 '양만춘'이란 이름 자체는 조선시대부터 근현대 한국인들에게까지 안시성주의 이름으로 여겨졌고, 이 양만춘이라는 이름은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대한민국 해군 광개토대왕급 구축함 3번함(DDH-973)의 함명은 상기 문헌들에 의해 전승되는 안시성주의 이름을 따서 양만춘함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되었다.

5.2. 당 태종 애꾸눈설

안시성 전투에서 당 태종이 한쪽 눈을 잃고 애꾸눈이 되었다는 기록은 한국의 야사에 전해져 내려온다. 14세기 고려말의 학자 이곡은 《가정집》(稼亭集)에서 당 태종이 눈에 화살을 맞고 도망쳤다고 밝히고 있고, 동시대의 학자이자 '삼은'(三隱) 중 한 명인 목은 이색은 다음과 같은 관련 시를 지었다.
謂是囊中一物耳
那知玄花落白羽
주머니 속 하나의 물건일 뿐인데
어찌 알았으랴? 흰 깃을 단 화살이 눈에 떨어지는 것을
이색(李穡),「정관을 읊다(詠貞觀)」#
15세기 조선의 사림파 학자 김종직은 이색의 시를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은 주석을 남겼다.
태종이 눈을 다친 일은 역사책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 이색이 중국 유학 중에 어찌 들은 바가 아니겠는가!
김종직『청구풍아(靑邱風雅)』 #
문인 김창업(金昌業)이 북경을 다녀오면서 쓴 노가재연행일기의 천산시(千山詩)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千秋大膽楊萬春
箭射叫髥落眸子
천추에 대담한 양만춘이
화살을 쏘아 규염(虯髥)의 눈알 빼었네
김창업(金昌業), 『노가재연행일기』「천산시(千山詩)」
다만, 화살을 눈에 맞는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나, 당 태종이 눈을 잃었다는 내용은 현전하는 정사에는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극적으로 좋은 소재기 때문에 한국 사극에 등장하는 당 태종은 결국 고구려에 왔다가 늘 한쪽 눈에 안대를 싸맨 채로 돌아간다. 그나마 현실적으로 묘사한 경우가 KBS 드라마 <대조영>의 안시성 전투 파트. 양만춘이 당 태종이 타고 있는 마차 곁의 깃대를 화살로 맞추었고, 그 깃대 꼭대기에 달린 창날이 당 태종 쪽으로 쓰러지면서 한 쪽 눈을 베인 것으로 묘사했다. SBS의 연개소문은 양만춘이 화살로 당 태종의 눈을 맞춘 것으로 묘사하였고, 당태종은 그걸 먹어버려 삼국지연의의 하후돈을 그대로 따라하였다.

6. 대중매체에서

중요한 전투의 지휘관인 만큼 고구려 말기를 다루는 드라마나 소설에 잘 등장한다. 매체에서 묘사할 때 '안시성주'라고만 할 수는 없고 캐릭터명이 있어야 하므로 대부분 '양만춘'이라는 세간의 이름을 따르고 있다.

6.1. 소설

  • 삼국통일기를 다룬 대표적인 소설 중 하나인 김정산의 《삼한지》에서도 등장하며, 실제 역사대로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에게 반대하여 무력 충돌까지 일으키나 연개소문은 오히려 양만춘을 잘 다독여 살려두었다가 당 태종을 막는 결전 병기로 써먹는다. 뛰어난 능력자로 묘사되는 것에 비해서 비중은 거의 공기에 가깝다. 작중 안시성에서 당나라 군대를 격퇴한 이후로는 어떻게 되었는지조차 일절 언급이 없다.

6.2. 드라마

  • KBS 드라마 <삼국기>에서는 임혁이 열연하였다.[30] 일찍이 연개소문을 모신 심복가문 출신이라는 설정이 추가되었으며, 주군의 집안이 멸문당하자 그 적자인 연개소문을 수십년간 찾아다니다 마침내 그와 만나게 되어 충실한 오른팔이 된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하는 정변은 끝까지 반대했고 이 때문에 내전 일보 직전까지 갔으나, 그를 직접 찾아간 연개소문의 설득에 의해 다시 마음을 돌리기도 했다. 안시성 전투 부분에서는 당연히 주인공급으로 나오고, 고구려 멸망 후에는 안시성의 대당 항전을 지휘하다가 성이 함락당한 후 대조영에게 고구려를 다시 세우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배우가 <대조영>에서 대조영의 아버지인 대중상으로 등장하는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부분.
  • 2006년 방영한 KBS 드라마 <대조영>에서는 임동진이 연기하였다. 연개소문 못지않은 지위를 가진 명장으로 그와는 둘도 없는 지기. 작중에선 연개소문이 고구려 중앙 정계의 실권자라면, 양만춘은 고구려 요동 지역의 총사령관 정도의 위치로 묘사한다. 또한 을지문덕의 후계자라는 설정도 붙어서 이세민이 안시성에서 고전을 면치 못함에도 수 양제의 원수를 갚겠다며 물러서지 않거나 적장인 설인귀도 양만춘을 높이 평가 했기에 양만춘이 암살 당했다는 사실을 들었을때 드디어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 있게되었다면서 엄청 좋아했다. 연개소문이 병으로 죽기 직전 당나라를 막는 방법을 두고 의견이 갈려서 내전 직전까지 갔지만 결국 오해를 풀고 양만춘의 방식으로 가는 것[31]으로 결론짓게 되었으며,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대막리지를 두고 싸운 끝에 연남생은 당나라로 도망가고 연남건이 스스로 대막리지를 포기하면서 고구려의 새 대막리지로 추대된다. 하지만 당나라를 절대 믿지 않는 양만춘의 방침이 마음에 안 든 부기원이 몰래 보낸 신흥과 이해고의 서찰을 보고 심복 사부구를 시켜서 양만춘을 몰래 죽여버리고 결국 그대로 3차 고당전쟁때 평양성까지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평양 전투에서 고구려는 망한다. 대조영에게는 일개 노비인 자신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보고 적극 지원해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이후로도 잘 챙겨주는 둘도 없는 은인. 양만춘 사후에도 복잡한 일이 닥치면 그를 모시는 사당에 들러 참배하는 장면이 몇 번 나오는데[32] 초상화는 배우 임동진의 모습을 그대로 그린 모습이다.
  • SBS 사극 <연개소문>에서도 중,후반부 등장하지만 연개소문이 1차 전쟁때 안시성으로 들어가 직접 전투를 지휘하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의 존재감이 약해졌다. 배우는 신동훈. 젊었을 때부터 남달랐으며, 무사대회에서 장원으로 화려하게 데뷔하였다. 온사문과 동기로 함께 장원으로 퉁쳐서 표현되었으나 활약 장면은 양만춘 중심이다. 임관 후에도 온사문은 간간히 패전하기도 하지만 양만춘은 굴욕자체가 없다. 수 양제의 1차 침공때 실전 데뷔를 한다. 전쟁 초반에는 강이식 부장으로 전쟁 후반에는 을지문덕의 부장으로 활약하며 알뜰하게 경험을 적립하였다. 중년 배우로 교체된 뒤에도 고구려 장수 빅3[33]의 필두로 존재감이 상당하다. 이때부터 강조되는 양만춘의 특징은 참군인. 연개소문 같이 정치적인 문제와는 엮임없이 군인으로서 국방과 명령에만 충실하는 모습을 보인다. 연개소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존재감이 있으나 드라마 특유의 연개소문 띄우기 때문에 안시성 전투의 지분을 상당수 빼앗겼다. 총지휘를 맡아야 할 연개소문이 최전방인 안시성으로 직접 들어가 선봉에 나서는 기괴한 전개가 이어졌기 때문[34] 최종화 고구려 멸망기까지 살아남아 안시성을 수비하나 이적이 "고구려의 수호신장 같은 귀신들하고 싸워 봐야 어떻게 이기겠느냐. 평양을 바로 공격하는 게 상책이다" 라는 대사를 읊을 때 등장하는 것이 마지막. 분위기상 수명이 다해 사망하거나 당군과의 전투에서 끝까지 싸우다 중과부적으로 전사할 것처럼 묘사된다.
  • KBS 2TV의 <칼과 꽃>에서는 주진모가 연기한 양문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영류왕 일파나 연개소문 일파와는 조정의 권력을 삼등분하고 있는 권세가로 묘사된다. 정치적인 성향 자체는 비둘기파인 영류왕과 매파인 연개소문 사이에 까어있는 중립파에 가깝다. 그의 성씨가 양만춘에게 따온 듯한 양씨이며, 작중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휘어잡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자 이에 반발하여 낙향했다는 묘사로 보아 안시성주가 모티브인 인물로 여겨진다. 이후 보장왕과 결탁하여 왕실의 권위를 되찾고자 하지만 계획이 탄로나는 바람에 살해당한다.

6.3. 영화

  • 2011년 개봉한 영화 <평양성>에서 고구려군 병사들에게 잠깐 언급된다. 병력수로 불리한 평양성 병사들이 안시성의 양만춘의 전술이랍시고 말한 것이 겨울이 올 때까지 버티는 것이라고 한다.
  • 2018년 개봉한 영화 <안시성>에서 주인공 양만춘 역을 조인성이 맡았다.


[1] 후술하듯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양만춘'은 창작된 이름이다.[자(字)] [3] 양만춘의 부하로 같은 절노부 소속의 추정국(鄒定國), 이좌승(李左升)이, 또 다른 장수로 관노부 주수 구비(毆飛), 그 부하인 기무(曁武), 장후손(張猴孫)이 등장한다. 추정국은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오골성주로 기록되기도 했다. 또한 요충지였던 건안성을 지키는 장수로 형제인 노한이(盧漢二), 노한삼(盧漢三), 그리고 술법사 속정한(束頂漢) 등의 총 30여 명의 고구려 장수가 등장한다. 구비는 관등이 양만춘과 동급으로 나온 걸로 보이나 성 밖에서 싸우다 전사해 끝까지 성을 지킨 건 양만춘이었던 것으로 나온다.[4] 다만 당태종이 영류왕의 복수를 명분으로 하고 전쟁을 일으킨 점을 볼때, 만약 실제로 안시성주가 쿠데타에 불복했다면 항복을 요구할 수도 있는 중요 정보였으므로 당태종의 귀까지 들어간 이런 정보가 오보였을 것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특히나 이 시점은 주필산 전투 직후였기 때문에 고연수, 고혜진을 비롯한 항복한 고구려군에게 소문을 확인해볼 수도 있었다.[5] 이 부분에서 안시성주와 연개소문의 대립에 관한 소문이 언급된다. 대략의 내용은 '연개소문도 안시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고 하더라'[6] 공격을 명하는 대목에서 "널 내 장수로 삼았으니 어찌 네 말을 듣지 않겠냐. 근데 지면 죽는다."라는 식의 투로 말하는 듯한 티가 팍팍난다.[7] 고연수의 이름이 언급되는 건 《구당서》의 기록[8] 기록에는 그냥 소리를 질렀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도발을 위해 욕설을 퍼부었을 가능성이 크다. 기록에 따라서는 이세민이 아버지 이연을 쫓아내고 형제들을 죽여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는 과거까지 들춰내어 욕을 했다고도 전해진다.[9] 당 태종 이세민의 즉위 이후 피휘때문에 이적으로도 불린다.[10] 이세적은 10대 중후반부터 도적패, 반란군 이끌고 다니던 사람이다. 최소한 전투에선 인정사정 없었을 것이다.[11] 이는 어서 빨리 당군이 승리해야 자신들의 가족이 무사하기 때문이었다.[12]신당서》에선 장손무기안시성의 병력만 100,000명이라고 주장했고 《자치통감》과 《삼국사기》에선 신성 + 건안성의 병력이 100,000명이라고 주장했다. 이병도의 경우 '《신당서》 기록은 중국애들이 뻥튀기 한 게 아니냐?' 라고 주석을 달아 의문을 제기했다. 단 주필산 전투에서의 전력손실이 생각보다 크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해당 병력이 안시성 내로 그대로 입성하여 당군의 주필산 전후 50일 공백기에 영향을 미쳤다 한다면 안시성 내 10만 대군설은 오히려 정황상 근거는 있는 편이다.[13] 위에 나온 이적의 주장이나 장손무기의 주장은 단순히 두 사람이 신중파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당나라 입장에서는 요충지를 우회해서 수도인 평양성을 바로 공격하는 작전을 펼쳤다가 완벽하게 박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14] 실제로 500,000명이 쌓은 것은 아니고 아마 몇 명의 병사들이 순번을 돌려가며 차례에 따라 쌓았을 것이다. 즉 '연인원' 개념일 가능성이 높다. 즉, 하루에 10,000명 씩 50일간 동원하면 연인원은 500,000명이다.[15] 신라의 장수인 도도 또한 백제성왕을 참수하기 전 그의 앞에 절을 하고 목을 벨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청한 바 있다.[16] 다만 650년대 고구려와 당나라의 주된 전쟁터가 요서의 초원지대였음을 생각해보면 마냥 야사만으로 치부하기도 뭣하다.[17] 비단 하사설은 조선 후기 청나라와 조선의 관계로 인해 조선 학자들이 지배를 받지 않고 강자였던 고구려를 재평가해서 생겨난 설이다. 당시 학자들은 고구려를 재평가하면서도 중국 황제에게 예를 갖추고, 을지문덕이 천륜을 거스른 수나라를 응징했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이는 정설이 아니므로 너무 신뢰하지 말 것을 권유한다.[18] 다른 예로 보장왕은 당나라에 항복한 뒤 당 태종의 능에 굳이 데려가서 사죄까지 시켰다.[19] 훗날의 이야기지만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일본도 진주목사 서예원을 죽인 후 전해 패배를 안겨준 김시민을 죽인 것으로 착각하고 목사를 죽였다고 보고한 바 있다.[20] 원문은 비상자(非常者)로, 평범하지 않고 특출난 인물이란 뜻이다. 이와 반대되는 평을 받은 사람은 같은 고구려 출신 두 반인자(叛人者)들.[21] 당 태종은 돌궐을 무찌르고 돌궐로부터 천가한이란 칭호를 얻었으며, 북방 유목민족들을 '기미 지배'라는 지배방식으로 다스렸다.[22] 사실 고구려가 고려라는 국호를 공식적으로 썼기 때문에 전근대 사람 대부분은 둘이 다른 나라라는 걸 인식하지 못하고 그 고구려가 계속 이어진 걸로 인식했다. 일례로 원에서 고려에게 너희 나라에선 재상을 막리지라 부른다지? 라는 질문을 해서 고려를 벙찌게 만든 적도 있다. 언젯적 얘기를 물론 애당초 고려에서도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며 국호도 그대로 썼고 실제로 고구려 유민들에게서 이어진 나라가 맞았기에 이런 것에 대해 딱히 부정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이후의 조선시대까지도 '우리가 해낸 일'이었다며 자랑으로 여겼다.[23] 정사에 정확한 이름이 확인되지 않았지만 가장 잘 알려진 별칭 정도가 되는 양만춘으로.[24] <고구려 본기> 10권, <신라 본기> 7권.[25] <김유신 열전>은 그의 손자가 쓴 <행록>의 10권 중 기이한 기록들을 빼고 추리고 추려서 모은 것이다.[26] 아주 다른 건 아니다. 한문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고구려에서는 초창기부터 태조대왕대의 우보 고복장(高福章) 같은 중국식 이름이 이미 등장하고 한문 문화가 완숙해지면서 삼국시대 후기 지배층들 사이에서는 우리가 아는 전형적인 한자 이름이 쓰이기 시작하고 있어서 후기 삼국왕들의 이름도 뜻을 신경쓴 한자식 이름이었다. 이외에도 고구려의 학자 이문진이나 사신 예실불, 동부욕살 겸 책성주 이타인 같은 이름도 있었으며 연개소문(연개금)의 아들들은 아예 돌림자까지 쓰고 있었다. 양만춘의 성씨인 양씨도 고구려 계통으로 추정되는 발해의 우성망족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설령 양만춘이 실제 안시성주의 이름이라고 해도 위화감이 없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피지배층이나 지방의 호족까지 포함하면 여전히 고유식 이름이 대세이긴 했고 후삼국시대까지도 그런 추세가 이어진다(대체로 한자 두 글자로 표기되었고 중국 사신의 방문기록에도 그냥 아예 성씨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후삼국시대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아는 한자식 이름이 제대로 정착한 건 고려시대에 들어서였다.[27] 임진왜란서인의 핵심 인사였던 윤두수의 동생이다.[28] 《당서지전통속연의》(唐書志傳通俗演義)의 줄임이다. 1553년 명나라 사람 웅종곡(웅대목)이 지은 소설이다.[29] 1909년 나왔으며 1913년까지 교과서로 사용됐다.[30] 후술된 똑같이 고구려-당전쟁 말기를 다룬 <대조영>에서는 대중상을 연기했다.[31] 연개소문은 무리한 당나라 정벌을, 양만춘은 요동 지역의 굳건한 수비를 우선으로 했다. 그래도 이 둘은 강경책을 주장했지만 귀족 대신들은 줄곧 당나라와 화친을 주장하면서 연개소문이 죽자 Round 2가 시작된다.[32] 심지어 발해 건국 직전 요동을 수복하고 나서도 양만춘의 사당에 참배했다.[33] 양만춘, 대걸중상, 온사문.[34] 그나마 이세민을 활로 저격하여 애꾸로 만드는 장면이 나오긴 했지만, 이것도 1~2화에서는 단순한 CG로 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