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3 18:12:36

탕왕


상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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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16350> 상(商) 초대 왕
태조 | 대을
太祖 | 大乙
파일:탕(湯)임금_維基百科.jpg
묘호 태조(太祖) / 고조(高祖)
왕호 대을(大乙)
시호 태무왕(太武王) / 무왕(武王)
자(子)
리(履)
아버지 기종(夔宗) 주계(主癸) / 시계(示癸)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1589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1600년 ~ 기원전 1589년

1. 개요2. 일화3. 실체?

[clearfix]

1. 개요

湯王
중국 상(商)나라의 초대 국왕. 묘호는 태조(太祖)[1], 왕호는 대을(大乙), 휘는 리(履). 성탕(成湯), 성당(成唐) 등 여러 이칭으로도 불린다. 시호는 태무왕(太武王).[2] 아버지는 기종(夔宗) 시계(示癸).

명재상 이윤(伊尹)의 보좌로 명조(鳴條) 전투에서 대승하며 하(夏)나라폭군 걸왕(桀王)을 패사시켰다. 박(亳)에 수도를 정하고 상(商) 왕조를 건국했으며 제도를 정비했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설부터 탕왕까지 총 8번을 천도했다고 하며, 이후 제후 정벌에 나섰다. 그런데 갈의 우두머리인 갈백이 제사를 올리지 않자 갈을 정벌했으며, 걸왕이 황음한 짓을 계속 일삼자 제후인 곤오씨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에 탕이 제후들을 통솔해 곤오씨를 정벌한 후, 걸왕을 공격해 정벌했다. 이후 역법을 고쳤다고 전해지며, 그가 승하한 후 외병이 왕위에 올랐다.

2. 일화

서경》(書經) <탕서>(湯誓) 편에 따르면 '식언'(食言)이라는 고사성어가 바로 탕왕에게서 유래했다. 걸왕을 칠 때 박(亳) 땅의 백성들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공을 세운 자에게는 포상할 것을 약속하면서
"너희는 불신할 것 없다. 나는 (내가 뱉은) 말을 먹지 않는다."(爾無不信 朕不食言)
라고 한 것이다.

태을진인이 이 탕왕[3]과 태을구고천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하나라를 치기 전 명분과 군수 물자를 얻기 위해 일으킨 갈국(葛國) 정벌에 앞서 탕왕이 연설한 것을 기록한 <탕정>에서 탕은 천명을 강조한다. 갈국의 군주인 갈백(葛伯)이 포악무도하여 백성들을 착취하고, 하늘에 제사를 드리지 않자 먼저 하늘에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소와 양을 갈국에 보냈으나, 갈백은 이를 모두 잡아먹어버리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으며, 농사일을 도울 일꾼들을 보내고, 이들에게 새참을 주기 위해 소년을 보냈는데, 갈백은 상나라에서 온 일꾼들은 모두 노예로 삼아버리고, 소년은 죽여버리자 하늘의 명을 대신해 갈국을 정벌한다며 군사를 일으킨 것이다. 이후 하나라의 걸왕이 이를 문제삼자 이윤을 보내 조공을 바치게 하면서 이를 설명하는데, 걸왕은 아무 말도 못했고 훗날 걸을 정벌할 때도 마찬가지로 천명을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탕의 덕이 높은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탕이 교외에 나갔다가 사방에 그물을 쳐놓고 신에게
“천하 사방의 모든 것이 내 그물로 들어오게 하소서.”
라고 기원하는 사람을 만났다. 탕왕은 그 장면을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이렇게 그물을 펴 놓으면 숲 속의 짐승과 하늘의 새들이 모두 잡히고 말 것이니 너무도 잔혹하다.”
그리고 그물을 거두고 이렇게 기원하게 했다.
“가고자 하는 대로 가되, 하늘의 법도를 어기고 자기 스스로 그물에 걸리는 놈만 잡히게 하소서.”
이 이야기를 들은 제후들은
“탕의 덕망이 금수에까지 미치는구나.”
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이 일은 여러 제후국에 전해져 40여 개의 제후국이 탕에 승복했다고 한다. 이거만 보면 성군인데 왜 상나라는 인신공양 풍습이 이어졌을꼬

《서경》의 <중훼지고>(仲虺之誥) 편에 의하면, 걸을 정벌하고 천하를 도모한 이후 탕은 무력으로 천하를 정복한 점을 부끄럽게 여겼다고 한다. 그러자 본래 걸의 중신이었으나 상나라에 귀순한 재상 중훼(仲虺)가 탕에게
"하나라는 덕을 잃어 백성들이 진흙탕과 타오르는 숯불에 빠졌습니다."(有夏昏德 民墜塗炭)
라고 말했다. 오늘날에도 궁핍한 실정을 비판할 때 나오는 '도탄(도탄지고)' 혹은 '도탄에 빠지다'라는 표현은 여기서 나왔다.

3. 실체?

사실 현재 전해지는 주류 역사서의 내용과 달리, 1차 사료라 할 수 있는 갑골문에 따르면 탕왕이 하나라의 걸왕이나 그에 해당할 만한 강력한 세력을 무너뜨리고 상나라를 건국했다는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갑골문에서 탕왕은 그저 중흥의 군주로 묘사되며, 상나라는 삼황오제제곡 고신씨로부터 그 기원을 찾고 있다. 탕왕 자체는 실존 인물이라고 할만한 근거가 충분하지만, 전해 내려온 행적과 실제 행적은 별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주나라의 건국신화와 상나라 탕왕의 건국신화의 내용이 유사한 것을 감안했을 때, 상나라 멸망 이후 상나라 역사가 실전되고, 신화적인 국가인 하나라를 역사의 영역에 집어넣으면서 주나라의 건국신화를 차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상나라 문서 참고.

[1] 혹은 고조(高祖).[2] 혹은 무왕(武王).[3] 봉신방 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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