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e3ba62><colcolor=#683235> 군주의 묘호 태조 | 太祖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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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祖 | 創業之主(창업지주) - 나라를 세운 군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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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여 | 62명 한국 6명 중국 50명 월남 6명 | ||
관련 묘호 | 태종(太宗), 고조(高祖), 세조(世祖), 열조(烈祖), 시조(始祖), 성조(聖祖)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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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太祖태(太)
光啓于禩(광계우사) : 천대(千代)에 빛을 뿌리다
光啓于禩(광계우사) : 천대(千代)에 빛을 뿌리다
동아시아의 역대 왕조들에서 사용된 군주에게 올리는 묘호 중 하나.
2. 의미
묘호 중에서도 최고의 묘호다. 대개 한 국가를 창건한 창업군주나 실질적으로 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추존 군주의 경우 이 묘호를 받게 된다. 즉, 왕조국가판 국부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시호에 고(高), 문(文), 무(武), 성(聖), 신(神) 자가 들어간다. 비슷하게 창업군주에게 많이 붙이는 묘호로 고조(高祖)가 있는데, 태조보다 사용 빈도는 적다. 예법에 의하면 _천자가 천명을 받기 시작하거나_, _제후가 분봉을 받기 시작할 때_ 태조의 묘호를 받는다고 하는데, 달리 이해하자면 완전히 자수성가한 황제는 태조, 조상 대에 이미 제후로 책봉된 경우는 순서상 조상 쪽이 먼저 태조를 가져가므로 처음 칭제한 군주는 고조 혹은 다른 묘호에 그치는 것이다.[1]대체로 실제 재임한 황제 중에서 첫 번째 황제가 태조를 받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건국 이전에도 매우 큰 업적을 세운 조상이 있다면 가끔씩 추존황제가 태조가 되고 초대 황제가 다른 묘호를 받기도 한다.[2][3]
그리고 엄밀히 말해서는 왕조를 창건한 건국자는 거의 자동적으로 태조란 묘호가 붙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특히 오대십국시대나 오호십육국시대처럼 대혼란기에는 수많은 개국 인물들이 당당하게 태조란 묘호를 받기도 한다. 보통 이런 왕조의 경우 태조 다음이나 2, 3대 황제시절에 몇대 못 가서 국가가 멸망하는 경우가 많아서 태조 - x - 말제로 왕조가 끝나는 아스트랄의 극치를 보여준다.
창업 군주인 만큼 제왕으로서의 행적보다는 그 전에 입지를 다지던 과정의 행적이 더 눈에 띄는 경우가 많기에, 묘호보다는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가 흔하다. 한국의 경우 '고려 태조', '조선 태조'보다 각각 '왕건', '이성계'라 불리는 경향이 훨씬 많다. 중국도 마찬가지로 한태조, 위태조, 오태조, 진태조, 송태조, 원태조, 명태조, 청태조보다 유방, 조조, 손권, 사마소, 조광윤, 칭키즈 칸, 주원장, 누르하치라는 이름이 훨씬 익숙하고 더 자주 쓰인다.
3. 군주 목록
3.1. 한국사
<rowcolor=#683235> 성명 | 묘호 | 시호 | 재위 기간 | 비고 |
한국사 | ||||
<colbgcolor=#FFF6E8,#000> 고추모 (高鄒慕)[4] | 고구려태조 (高句麗太祖) | 중모왕 (中牟王) 도모대왕 (都慕大王) | B.C 37년 ~B.C 19년 | 고구려 초대 국왕[5], 백제 초대 국왕[6][7] |
백제태조 (百濟太祖) | ||||
고궁 (高宮) | 고구려태조 (高句麗太祖) | 태조대왕 (太祖大王) | 53년 ~ 146년 | 고구려 제6대 국왕[8] |
김수로 (金首露) | 금관가야태조 (金官伽倻太祖)[9] | 수로왕(首露王) | 42년 ~ 199년 | 금관가야 초대 국왕 삼국유사엔 세조(世祖)라 되어있음. |
김성한 (金星漢)[10] | 신라태조 (新羅太祖) | 성한왕 (星漢王) | 1세기 인물 | 삼국사기[11]에서 묘호만 언급. 금석문에서 묘호 및 시호가 나타나는 임금 |
왕건 (王建) | 고려태조 (高麗太祖) | 응운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신성대왕 (應運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神聖大王) | 918년 ~ 943년 | 고려 왕조 초대 국왕 |
이단 (李旦)[12] | 조선태조 (朝鮮太祖) | 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 (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 | 1392년 ~ 1398년 | 조선 왕조 초대 국왕 |
대한태조 (大韓太祖) | 대한제국 추존 황제 | |||
총 수여자 6명 |
3.1.1. 신라
태종 무열왕, 열조 원성왕과 더불어 신라 당대 기록에서 묘호가 전해지는 단 셋뿐인 신라 왕이다.[13] 원래 고대 중국에서는 묘호를 아무 군주한테나 올리지 않았다. 모든 군주에 묘호를 올리기 시작한 것은 당나라 때부터이고, 한반도의 경우 고려가 처음이다[14]. 아마 신라 역시 그런 관례에 따라 일부 업적이 큰 군주에게만 묘호를 올렸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누가 태조 묘호를 받았는지 언급이 없어 누가 태조인지는 여러 설이 있다.신라에 태조라고 부르는 왕(또는 추존왕)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근거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조에 '태조대왕'이라는 명칭이 등장하는 것과 진흥왕 순수비, 흥덕대왕묘비 파편, 김인문묘비 등의 신라 상대와 하대까지 여러 금석문에서 태조라는 왕을 거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라의 무열왕에게 태종이라는 묘호를 올렸다는 것은 그 이전 태조의 존재를 전제로 했다고 봐야 한다. 태조가 없는데 태종이 갑자기 등장할 수가 없으며, 태조라고 불리는 사람이 아예 없었는데 무열왕한테 묘호를 처음 올릴 것이라면 그를 태조라고 해야 하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태종이라고 했다는 건 태조가 따로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어차피 신라 때 만들어진 진흥왕 순수비에서 태조가 거론되니 태조라고 부르는 왕(또는 추존왕)이 있었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대체 누가 태조라고 불렸느냐를 확실히 알지 못한다는 것 뿐이고. 오늘날 당시의 역사를 적은 기록이 금석문들 외에는 전하지 않고[15] 남아있는 책 중 가장 오래된 삼국사기도 신라가 멸망하고 수백년이 지난 고려 중기 때 편찬된 것이라 자료의 한계로 빠진 정보들이 꽤 있다. 때문에 신라 당시에 누구를 태조라고 불렀는지 확실치 않다. 그래서 학자들 사이에 여러 설이 있는데 언급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 혁거세 거서간 - 신라 첫 군주. 그런데 가능성이 높지 않다. 박씨가 비록 왕위는 놓쳤다지만 주요 귀족으로 존재하는 상황에서 만약 박씨의 시조이기도 한 박혁거세의 권위를 함부로 드높이면 당시 왕위를 독점하고 있던 김씨 왕조의 정통성에는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아래 주석들도 참고할 것.
- 미추 이사금 - 신라 김씨의 첫 군주. 당시 신라는 박혁거세의 시조묘(始祖廟)와 별도로 김씨 세습을 강화하기 위해 신궁(神宮)을 두고 있었다. 따라서 김씨 왕조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박혁거세보다는 김씨 왕(추존왕 포함) 중에 누군가를 태조로 추봉하여 권위를 높이려 했을 가능성이 크다.# 미추 이사금을 태조로 추정하는 사람들은 태조가 최초의 군주에게 주로 붙인다는 점에서 김씨의 첫 군주인 그를 태조로 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 김알지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는 신라의 군주가 아니었지만 후대에 왕으로 추존하고 태조라는 묘호를 올렸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 김성한/김세한 - 김알지의 아들. 알에서 태어났다는 김알지는 김씨의 신성성을 강화하기 위해 신라 중기 이후에 만들어낸 인물이고 실질적 김씨의 시조는 김성한이라는 설도 있다.
- 석탈해 - 신라 첫 군주가 박혁거세가 아니라 석탈해로 보기도 한다. 오늘날 박씨와 김씨 중심의 신라사 기술 문제점을 지목하는 입장이다. 문경현에 따르면 신라에 박씨 왕은 없었다. 그리고 2국통일이며 남북국 시대다. 이근직에 따르면 경주 신라 왕릉은 7기만 주인을 알 수 있다. 오릉 및 삼릉은 통일신라(학계에서는 '대 신라'로 호칭)시대 귀족묘라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논지들로 석탈해를 국가 시조로 지목하는 것이다. 신라 태조는 후대에 추존된 왕이다. 시기에 따라 그 대상이 바뀌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3.1.2. 백제, 고구려
한국의 기록에는 전하지 않고, 일본의 사서인 《속일본기》에 백제의 태조가 도모왕이라고 기록돼 있다.[16] 고대에는 인명 표기가 통일되지 않은 채 여러 가지로 쓰였으므로 이 도모왕은 발음이 비슷한 고구려 시조 주몽(추모)일 가능성이 높다. 이상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온조왕이 유리왕에게 밀려나 이주하여 백제를 세운 뒤 동명왕을 모시는 사당을 지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기 때문에 백제 왕실이 주몽의 정통 후계자를 자처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백제는 고구려 왕을 비정통 또는 방계로 취급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주몽을 태조라고 높였을 가능성은 있다.당시 백제에서 왕들이 묘호를 안 썼는데 이상하지 않느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으나 고대에는 매우 중요한 업적을 세운 군주에게만 묘호를 올렸기 때문에 이렇게 특정 왕만 묘호를 받은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모든 군주에게 일일이 묘호를 올리기 시작한 건 당나라 때부터이며, 한반도 왕조 중에서는 고려가 최초이다[17]. 이런 기록이 사실이라면 고구려는 주몽을 태조라고 안 하고 다른 왕을 태조라고 추존했는데 반해 백제는 오히려 주몽을 태조라고 추존한 게 돼서 주목된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동명성왕을 태조로 추존했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신라본기 문무왕조에서 왕이 고구려 왕자 안승을 왕으로 봉할때 '태조 중모왕(太祖 中牟王)'이라는 이름을 언급한다. 시호 중 '중모(中牟)'는 위에서 적은 것처럼 주몽의 다른 표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를 볼때 주몽이 태조로 추존됐을 가능성 역시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태조대왕까지 태조가 둘인 셈인데 그의 시호는 어떻게 설명해야되는지 의문이 생긴다. 이에 태조대왕이 이후까지 이어지는 실질적인 고구려 왕조의 첫 임금이고 초기 기록이 윤색되었다는 왕계 교체설도 학계에서 제기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해씨 고구려설 문서 참고하십시오.
3.2. 중국사
<rowcolor=#683235> 성명 | 묘호 | 시호 | 재위 기간 | 비고 |
중국사 | ||||
<colbgcolor=#FFF6E8,#000> 자리 (子履) | 상태조 (商太祖) | 무왕 (武王) | BC 1600 ~ BC 1589 | 주무왕 추존 이칭 고조(高祖) |
유방 (劉邦) | 한태조 (漢太祖) | 고황제 (高皇帝) | BC 206 ~ BC 195 | (고조)[18] |
조조 (曹操) | 조위태조 (曹魏太祖) | 무황제 (武皇帝) | - | 조위문제 추존[19] |
손권 (孫權) | 동오태조 (東吳太祖) | 대황제 (大皇帝) | 229 ~ 252 | |
사마소 (司馬昭) | 서진태조 (西晉太祖) | 문황제 (文皇帝) | - | 서진세조 추존 |
유연 (劉淵) | 전조태조 (前趙太祖) | 광문황제 (光文皇帝) | 304 ~ 310 | |
모용황 (慕容皝) | 전연태조 (前燕太祖) | 문명황제 (文明皇帝) | 333 ~ 348 | |
풍발 (馮跋) | 북연태조 (北燕太祖) | 문성황제 (文成皇帝) | 409 ~ 430 | 2대 황제 |
장궤 (張軌) | 전량태조 (前涼太祖) | 무목왕 (武穆王) | - | 전량고조 추존 |
부홍 (苻洪) | 전진태조 (前秦太祖) | 혜무황제 (惠武皇帝) | - | 전진고조 추존 |
요장 (姚萇) | 후진태조 (後秦太祖) | 무소황제 (武昭皇帝) | 384~393 | |
석호 (石虎) | 후조태조 (後趙太祖) | 무황제 (武皇帝) | 334~349 | 3대 황제 |
여광 (呂光) | 후량태조 (後涼太祖) | 의무황제 (懿武皇帝) | 386~399 | |
이고 (李暠) | 서량태조 (西涼太祖) | 무소왕 (武昭王) | 400~417 | |
걸복치반 (乞伏熾磐) | 서진태조 (西秦太祖) | 문소왕 (文昭王) | 412~428 | 제3대 황제 |
저거몽손 (沮渠蒙遜) | 북량태조 (北涼太祖) | 무선왕 (武宣王) | 401~433 | 제2대 황제 |
혁련위진 (赫連衛辰) | 북하태조 (北夏太祖) | 환황제 (桓皇帝) | 359~391 | 하세조 추존 |
탁발울률 (拓跋鬱律) | 북위태조 (北魏太祖) | 평문황제 (平文皇帝) | 316~321 | 북위도무제 추존 |
탁발규 (拓跋珪) | 북위태조 (北魏太祖) | 도무황제 (道武皇帝) | 386~409 | 초대 황제 |
유의륭 (劉義隆) | 유송태조 (劉宋太祖) | 문황제 (文皇帝) | 424~ 453 | 제3대 황제 |
소도성 (蕭道成) | 남제태조 (南齊太祖) | 고황제 (高皇帝) | 479~482 | |
소순지 (蕭順之) | 남량태조 (南梁太祖) | 문황제 (文皇帝) | - | 남량고조 추존 |
진문찬 (陳文讚) | 남진태조 (南陳太祖) | 경황제 (景皇帝) | - | 남진고조 추존 |
고환 (高歡) | 북제태조 (北濟太祖) [20] | 헌무황제 (獻武皇帝) | - | 북제현조 추존 |
우문태 (宇文泰) | 북주태조 (北周太祖) | 문황제 (文皇帝) | - | 북주세종 추존 |
양충 (楊忠) | 수태조 (隋太祖) | 무원황제 (武元皇帝) | - | 수고조 추존 |
이호 (李虎) | 당태조 (唐太祖) | 경황제 (景皇帝) | - | 당고조 추존 |
무사확 (武士彠) | 무주태조 (武周太祖) | 무상효명고황제 (無上孝明高皇帝) | - | 무주성신황제 추존 |
전류 (錢鏐) | 오월태조 (吳越太祖) | 무숙왕 (武肅王) | 907 ~ 932 | |
주황 (朱晃) | 후량태조 (後梁太祖) | 신무원성효황제 (神武元聖孝皇帝) | 907~912 | |
이극용 (李克用) | 후당태조 (後唐太祖) | 무황제 (武皇帝) | - | 후당장종 추존 |
서온 (徐溫) | 남당태조 (南唐太祖)[21] | 무황제 (武皇帝)[22] | - | 남당열조 추존 |
곽위 (郭威) | 후주태조 (後周太祖) | 성신공숙문무효황제 (聖神恭肅文武孝皇帝) | 951~954 | |
왕심지 (王審知) | 민태조 (閩太祖) | 소무효황제 (昭武孝皇帝) | 909~925 | 민태종 추존 |
양행밀 (楊行密) | 남오태조 (南吳太祖) | 무황제 (武皇帝) | 902~905 | 남오예제 추존 |
유안인 (劉安仁) | 남한태조 (南漢太祖) | 문황제 (文皇帝) | - | 남한고조 추존 |
맹일 (孟佚) | 후촉태조 (後蜀太祖) | 효원황제 (孝元皇帝) | - | 후촉고조 추존 |
야율아보기 (耶律阿保機) | 요태조 (遼太祖) | 대성대명신열천황제 (大聖大明神烈天皇帝) | 907~926 | |
단사평 (段思平) | 대리태조 (大理太祖) | 성신문무황제 (聖神文武皇帝) | 937~944 | |
고지승 (高智昇) | 대중태조 (大中太祖) | 문융천우안방황제 (文戎天佑安邦皇帝) | - | 상치제 고승태 추존 |
조광윤 (趙匡胤) | 송태조 (宋太祖) | 계운입극영무예문신덕성공지명대효황제 (啓運立極英武睿文神德聖功至明大孝皇帝) | 960~976 | |
이계천 (李繼遷) | 서하태조 (西夏太祖) | 신무황제 (神武皇帝) | - | 서하경종 추존 |
완안아골타 (完顔阿骨打) | 금태조 (金太祖) | 응건흥운소덕정공인명장효대성무원황제 (應乾興運昭德定功仁明莊孝大聖武元皇帝) | 1115~1123 | |
패아지근철목진 (孛兒只斤鐵木眞) | 원태조 (元太祖) | 법천계운성무황제 (法天啓運聖武皇帝) | 1162~1227 | 초대 칸[23] 원세조 추존 |
명정 (明貞) | 명하태조 (明夏太祖) | 흠문소무황제 (欽文昭武皇帝) | 1363~1366 | |
주원장 (朱元璋) | 명태조 (明太祖) | 개천행도조기입극대성지신인문의무준덕성공고황제 (開天行道肇紀立極大聖至神仁文義武俊德成功高皇帝) | 1368~1398 | |
이계천 (李繼遷) | 순태조 (順太祖) | - | - | 이자성 추존 |
장아자 (張亞子) | 서태조 (西太祖) | 고황제 (高皇帝) | - | 장헌충 추존 |
애신각라노이합적 (愛新覺羅努爾哈赤) | 청태조 (淸太祖) |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 (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 1583~1626 | |
오삼계 (吳三桂) | 오주태조 (吳周太祖) | 개천달도동인극운통문신무고황제 (開天達道同仁極運通文神武高皇帝) | 1678~1678 |
3.3. 베트남사
성명 | 묘호 | 시호 | 재위 기간 | 비고 |
이공온 (李公蘊) | 이태조 (李太祖) | 신무황제 (神武皇帝) | 1010~1028 | 초대 황제 |
진승 (陳承) | 진태조 (陳太祖) | 개운입극홍인응도순진지덕신무성문수유지효황제 (開運立極弘仁應道純眞至德神武聖文垂裕至孝皇帝) | 1226 ~ 1234 | 진태종 추존 |
여리 (黎利) | 후여태조 (後黎太祖) | 통천계운성덕신공예문영무관명용지홍의지명대효고황제 (統天啓運聖德神功睿文英武寬明勇智弘義至明大孝高皇帝) | 1428~1433 | 초대 황제 |
막등용 (莫登庸) | 막태조 (莫太祖) | 인명고황제 (仁明高皇帝) | 1527 ~ 1529 | 초대 황제 |
완황 (阮潢) | 완태조 (阮太祖) | 조기수통흠명공의근의달리현응소우요령가유황제 (肇基垂統欽明恭懿謹義達理顯應昭祐耀靈嘉裕皇帝) | 1558~1613 | 1대 국왕 |
완문혜 (阮文惠) | 서산태조 (西山太祖) | 무황제 (武皇帝) | 1788~1792 | 초대 황제 |
4. 존령 태조(太祖)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황제가 자신의 1~6대조를 제사지낼 때, 6명의 조상 중에서 다른 5존령을 조율하는 조상을 말한다. 묘호와는 다른 직위의 개념이다. 태조의 묘역은 시간이 지나 촌수가 아득히 멀어져도 왕조가 멸망하지 않는 이상 절대 철거되지 않는다.4.1. 수상자
성명 | 지위 | 시호 | 재위 기간 | 비고 |
환온 (桓溫) | 환초태조 (桓楚太祖) | 선무황제 (宣武皇帝) | - | 초무도제 추존 |
고밀(高謐) | 북제태조 (北齊太祖) | 태위무정부군 (太慰武貞府君) | - | 북제 문선제 추존 |
5. 7대조
부계 혈족 관계 호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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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손 (6대손) | 잉손 (7대손) | 운손 (8대손) | 이손 (9대손) |
6대조 이상 | ||||||||
열조 (6대조) | 태조 (7대조) | 원조 (8대조) | 비조 (9대조) |
범례 | ||||||||
나 | 직계존비속 | 이촌 | 삼촌 | 사촌 | 오촌 | 육촌 | 칠촌 | 팔촌 |
이동에 따른 촌수 관계 | ↔: 2촌 관계 | ↕: 1촌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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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조의 할아버지로 자신을 기준으로 7세대 전 조상. 다른 말로 태조(太祖)라고도 한다.
쉽게말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아버지.
나와 유전 일치율은 0.78125%(1/128)이다. 그리고 이세대 조상부터는 100명이 넘어간다.
6. 기타
- 김해 김씨 족보에서는 금관가야 수로왕을 태조로 쓰고 있다. 물론 당시에 그랬다기보다는 후대에 김씨들이 추존한 것이지만, 중국식 묘호의 개념을 가야에 적용한다면 수로왕의 묘호는 태조가 되었을 게 확실하니 억지는 아니다.
- 한국사의 태조들은 유달리 유훈이 무시당하는 징크스가 있다. 왕건의 훈요 10조는 결국 대부분 지켜지지 못했고, 이성계는 유언으로 미리 고향에 묫자리를 둘 것을 부탁했지만 아들 태종은 이를 따르지 않고 한양 근처에 왕릉을 조성했다. 우스갯소리지만 김씨 조선 태조 소리를 듣는 김일성조차도 혁명렬사릉에 묻어달라는 유훈을 무시당하고 후계자인 김정일의 지시로 금수산태양궁전에서 엠버밍 처리되어 영구보존 중이다.
[1] 예외로 서진의 경우는 사마의가 고조, 아들인 사마소가 태조였는데 이는 사마의의 작위는 장남 사마사 쪽으로 전해졌고 서진의 기반이 되는 작위는 차남 사마소의 진공과 진왕 작위였기 때문에 이쪽이 태조를 가져간 것.[2] 예를 들어 조위와 서진은 각각 초대 위왕, 초대 진왕으로 책봉된 조조와 사마소에게 태조 묘호를 올렸고 초대 황제인 조비와 사마염은 세조 묘호를 받았다. 수나라와 당나라도 태조 묘호는 개창자 양견과 이연이 아닌 양견의 아버지이자 초대 수국공인 양충, 이연의 조부이자 초대 당국공인 이호가 받았으며 양견과 이연 본인은 고조 묘호를 받았다. 원나라도 태조 묘호는 몽골 제국의 건국자인 칭기즈 칸(태조 무황제)에게 올렸고 대원제국의 실질적 건국자이자 칭기즈 칸의 손자인 쿠빌라이 칸은 세조의 묘호를 받았었다. 즉 이런 경우에는 추존의 개념에 앞서 황실 계보 자체를 봉토를 받았거나 제국의 시초를 다진 조상에게로 소급 적용하는 의미도 포함된다.[3] 대개 태조의 뒤를 이어 등극하는 2대 군주는 태종이라고 묘호가 붙는 경우가 많다. 이는 보통 국가를 창건하는데 태조와 함께 큰 공을 세운 경우도 많고, 왕조의 창건자가 죽은 다음 국가의 질서를 재편할 때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물론 2대 군주가 다 그런 것은 아니므로 다른 묘호가 붙은 사례도 많다.[4] 흔히 알려진 동명성왕의 이름은 주몽인데 주몽은 삼국사기에서 나오고 추모는 삼국사기 뿐만 아니라 광개토대왕비에서도 나온다.[5] 신라 문무왕이 보장왕의 아들 안승을 왕으로 봉할때 '태조 중모왕'이 안승의 시조라고 언급하였다.[6] (일본 신찬성씨록 기준)온조의 친아버지[7] 시조 비류설에 따르면 주몽은 비류와 온조의 친아버지가 아닌 양아버지다. 친아버지는 북부여 해부루왕의 서손인 우태로 우태는 백제 시조 구태설에 나오는 구태와 동일 인물로 여겨진다.[8] 묘호가 아니라 시호일 가능성 있음[9] 김해 김씨 족보에 기록된 묘호이다.[10] 신라태조 성한의 존재는 족보 같은 신빙성 낮은 사료뿐만 아니라 흥덕왕릉비 파편 등 당대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김성한은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아들 김세한(金勢漢) 또는 김열한(金熱漢)으로 추정되는데 신라인들이 김알지의 아들 김세한을 신라의 태조로 추존했다는 얘기가 된다. 참고로 경주 김씨 족보와 삼국사기에 의하면 김알지는 아들이 하나밖에 없었으므로 김성한은 바로 이 김세한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11] 신라본기 신문왕조.[12] 본래 이름은 알다시피 이성계지만, 왕위에 오른 이후 피휘 시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 개명했다. 아침 단(旦)이 태조의 새 이름으로 채택된 것은 역시 아침을 의미하는 朝를 쓰는 조선(朝鮮)의 창업 군주이기 때문이다.[13] 신라 이후의 기록에서 묘호가 확인되는 것은 추존된 세조(世祖) 김알지(링크) 등 몇 명이 더 있으나, 이는 신라 멸망 후의 기록이라 신라 당시에 김알지를 세조로 추존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14] 단 원 간섭기 이후 한동안 중단됐다가 조선 건국 후 재개된다.[15] 신라의 관찬사서였던 국사는 소실됐어 전해지지 않는다.[16] 일본측 정사서인 속일본기 연력 8년조에 백제 왕족 후손들이 일본 칸무 덴노에게 자신의 조상의 내역을 보고하는 내용 중에 백제가 태조라는 묘호 사용한 것을 밝힌다. 다른 기록도 아니고 백제 왕족 출신 도래인들 입에서 나온 말이 기록된 것이다.[17] 원나라의 간섭을 받기 시작하면서 중단됐다가 조선이 건국되면서 부활하였다.[18] 시호인 고제(高帝)의 높임말이다.[19] 위나라 문제는 세조와 고조라는 두 가지 묘호를 갖고 있다.[20] 이후 고조(高祖)로 바뀌었다.[21] 이후 의조(義祖)로 변경되었다.[22] 이후 충무황제(忠武皇帝)로 변경되었다.[23] 몽골 제국의 초대 칸으로서 원나라의 명목상 건국자로 인정받아 원태조로 추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