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30 20:41:30

수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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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d428b><colcolor=#fbe673>
금관가야 초대 국왕
世祖 首露王|세조 수로왕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1100029_STD.jpg
수로왕릉 숭정각에 봉안된 수로왕 영정
출생
(음력)
42년 3월 4일[1]
금관가야
(現 경상남도 김해시)
즉위
(음력)
42년 3월 16일
금관가야
(現 경상남도 김해시)
사망
(음력)
199년 3월 23일 (향년 157세)
금관가야
(現 경상남도 김해시)
능묘 수로왕릉(首露王陵)
재위기간
(음력)
초대 국왕
42년 3월 16일[2] ~ 199년 3월 23일 (15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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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d428b><colcolor=#fbe673> 본관 김해 김씨 / 뇌질(惱窒)[A]
수로(首露) / 청예(靑裔)
부모 부친 이비가
모친 정견모주
형제 6남 중 1남[4]
왕후 허황옥(삼국유사 한정)
자녀 10남 2녀[5]
종교 불교
신장 9척(2m 43cm)[6]
묘호 세조(世祖)[7]
태조(太祖)[8]
시호 수릉왕(首陵王)[9]
왕호 수로왕(首露王) }}}}}}}}}

1. 개요2. 생애
2.1. 출생2.2. 세력 확장
2.2.1. 탈해 이사금 대의 기록2.2.2. 파사 이사금 대의 기록2.2.3. 지마 이사금 대의 기록
2.3. 《삼국유사》에 인용된 《가락국기》2.4. 사후
3. 여담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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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락국(駕洛國)의 초대 국왕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10] 《김해 김씨 족보》에는 태조(太祖)로 서술되었으며, 기록상으로는 알 6개에서 태어난 가야의 왕들과 같이 키가 9척[11]이었다. 중국 후한시대 초기인 서기 42년가야건국했다. 그 이후 이야기는 삼국사기에는 나와있지않지만 삼국유사의 설화에서 아유타국의 공주라는 허황옥결혼했으며, 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 중 아들 둘은 허씨 성을 받고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되었는데 서기 199년까지 살았다고 한다. 아들은 금관국의 제2대 거등왕이었다.

2. 생애

2.1. 출생

가야 건국 신화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양쪽에서 모두 등장한다. 흔히 《삼국유사》에 수록된 <구지가>와 얽힌 6개의 신화로 유명하다. 서기 42년 김해 구지봉에 사람들이 모여 <구지가>를 부르며 을 추자 하늘에서 알 6개가 내려왔고, 알들 중 가장 먼저 깨어난 이가 김수로였으며, 나머지 알 5개에서 태어난 아이가 각자 나머지 가야의 왕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구지가> 문서 참조.

다른 출생 신화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최치원이 썼다는 《석이정전》을 인용했다고 하며 서술한 정견모주 전설이 있다. 여기서 김수로는 이비가의 아들로 이진아시와 형제였고, 이름이 뇌질청예(惱室靑裔)였다. 자세한 내용은 정견모주 문서 참조. 전자는 김해 금관국 중심, 후자는 후기 가야 체제에서 강국으로 떠오른 고령 대가야 중심적인 신화인 듯하다.

수로왕이 즉위한 지 1년이 지나 도읍을 정했는데 임시 궁궐 남쪽에 위치한 신답평(新畓平)을 둘러보더니 자리가 좋다면서 공사를 명령했다. 43년 3월 10일 궁궐 외곽의 성벽 공사가 종료되고, 44년 궁궐이 완성되자 그곳에서 정무를 보았다고 한다.

2.2. 세력 확장

2.2.1. 탈해 이사금 대의 기록

신라의 제4대 왕인 탈해 이사금과는 티격태격했는데 《삼국유사》가 인용한 《가락국기》에는 바다 건너에서 태어난 석탈해가 대뜸 수로왕에게 와서 "왕위를 계승하려고 합니다."라며 하자 기가 찬 수로왕이 "좋다 나와 마술 술법 배틀해서 이기면 내주마"라고 제안했고, 결국 수로왕이 이겨서 탈해는 신라로 갔다는 기록이 나와있고, 《삼국사기》에서는 알이 금관국의 바닷가에 도달했다가 신라로 도착해서 그곳에서 깨어났는데 알에서 태어난 애가 석탈해라고 기록하고 있어서 어린 시절 혹은 젊은 시절 금관국을 거쳐서 신라로 오게 된 듯 하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태어났는데, 그 나라는 왜국(倭國)의 동북쪽 1,000리 되는 곳에 있다. 앞서 그 나라 왕이 여국왕(女國王)의 딸을 맞아들여 아내로 삼았는데, 임신한 지 7년이 되어 큰 알을 낳았다. 그 왕이 말하기를 "사람으로서 알을 낳은 것은 상서롭지 못하니 마땅히 버려야 한다."고 하였다. 그 여자는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을 싸서 보물과 함께 궤짝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워 가는 대로 가게 맡겨두었다. 처음에 금관국(金官國)의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금관국 사람들이 그것을 괴이하게 여겨서 거두지 않았다. 다시 진한의 아진포(阿珍浦) 어구에 다다랐다.
ㅡ 《삼국사기》 <신라 본기>

훗날 탈해가 왕위에 오르고 가야국을 침범한 기록도 남아 있는데
二十一年 秋八月 阿湌 吉門與加耶兵 戰於黃山津口 獲一千餘級 以吉門爲波珍湌 賞功也
21년 가을 8월에 아찬 길문(吉門)이 가야(加耶) 군사와 황산진(黃山津) 어구에서 싸워 1,000여 명을 목베었으므로 길문을 파진찬으로 삼아 공로를 포상하였다

수로왕 25년(서기 77년)에 탈해 이사금이 아찬 길문에게 병력을 내주어 금관국을 치게 했고, 이를 막기 위해 병력을 황산진으로 보냈다.

2.2.2. 파사 이사금 대의 기록

十五年 春二月 加耶賊圍馬頭城 遣阿湌吉元 將騎一千擊走之
15년 봄 2월에 가야의 적(賊)이 마두성(馬頭城)을 포위하였으므로 아찬 길원을 보내 기병 1,000명을 이끌고 가서 공격하여 쫓았다.
十七年 九月 加耶人襲南鄙 遣加城主長世拒之 爲賊所殺 王怒率勇士五千 出戰敗之 虜獲甚多
17년 9월에 가야인이 남쪽 변경을 습격하였으므로 가성주(加城主) 장세(長世)를 보내 막게 하였으나 적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왕이 분노하여 용맹한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나가서 싸워 그들을 깨뜨렸는데, 사로잡거나 죽인 자가 매우 많았다.
十八年 春正月 擧兵欲伐加耶 其國主遣使請罪 乃止
18년 봄 정월에 군사를 일으켜 가야를 정벌하려고 하였으나, 그 나라 임금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으므로 그만두었다.
二十三年 秋八月 音汁伐國與悉直谷國爭疆 詣王請決 王難之 謂金官國首露王 年老多智識 召問之 首露立議 以所爭之地 屬音汁伐國 於是 王命六部 會饗首露王 五部皆以伊湌爲主 唯漢祇部 以位卑者主之 首露怒 命奴耽下里 殺漢祇部主保齊而歸
23년 가을 8월에 음즙벌국(音汁伐國)과 실직곡국(悉直谷國)이 강역을 다투다가, 을 찾아와 해결해 주기를 청하였다. 왕이 이를 어렵게 여겨 말하기를 "금관국(金官國) 수로왕(首露王)은 나이가 많고 지식이 많다."하고, 그를 불러 물었더니 수로가 의논하여 다투던 땅을 음즙벌국에 속하게 하였다. 이에 왕이 6부에 명하여 수로를 위한 연회에 모이게 하였는데, 5부는 모두 이찬으로서 접대 주인을 삼았으나 오직 한기부(漢祇部)만은 지위가 낮은 사람으로 주관하게 하였다. 수로가 노하여 종(奴) 탐하리(耽下里)에게 명하여 한기부의 우두머리 보제(保齊)를 죽이게 하고 돌아갔다.
二十七年 秋八月 命馬頭城主 伐加耶
27년 가을 8월에 마두성주(馬頭城主)에게 명하여 가야를 치게 하였다.

파사 이사금 23년의 기록에 따르면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나라들 간의 중재를 수로왕에게 부탁한 것인데, 음즙벌국실직곡국은 모두 김해와는 거리가 있는 경상북도 위쪽 지역의 소국들이다. 심지어 실직국강원도 동해시다. 이를 보아 수로왕은 고대 경상도 지역에서 나름 영향력이 있었던 듯 하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변한에 이 많이 나고, 한(韓), 예(濊), 왜(倭)가 모두 이를 가져다 썼다.'
는 부분에서 유추해, 철을 주변 지역에 파는 곳이 금관국이니까 저런 데 중재를 부탁할 만큼 영향력이 있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2.2.3. 지마 이사금 대의 기록

四年 春二月 加耶寇南邊 秋七月 親征加耶 帥步騎度黃山河 加耶人伏兵林薄以待之 王不覺直前 伏發圍數重 王揮軍奮擊 決圍而退
4년 봄 2월에 가야가 남쪽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가을 7월에 몸소 가야를 정벌하였는데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황산하(黃山河)를 건넜다. 가야인이 군사를 수풀 속에 숨겨두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왕이 깨닫지 못하고 똑바로 나아가니 복병이 일어나 몇 겹으로 에워쌌다. 왕이 군사를 지휘하여 분발하여 싸워 포위를 뚫고 퇴각하였다.
五年 秋八月 遣將侵加耶 王帥精兵一萬以繼之 加耶嬰城固守 會久雨 乃還
5년 가을 8월에 장수를 보내 가야를 침입케 하고 왕은 정예 군사 10,000명을 거느리고 뒤따랐다. 가야는 성에 들어앉아 굳게 지키고만 있었는데, 마침 오랫동안 비가 내렸으므로 되돌아 왔다.

2.3. 《삼국유사》에 인용된 《가락국기》

후한(後漢)의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 임인(壬寅) 3월 계욕일에 그들이 살고 있는 북쪽 귀지(龜旨)[12]에서 무엇을 부르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 백성 2~300명이 여기에 모였는데, 사람의 소리 같기는 하지만 그 모양을 숨기고 소리만 내서 말했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아홉 간(干) 등이 말했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그러자 또 말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
"귀지(龜旨)입니다."
또 말했다.
"하늘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였으므로 일부러 여기에 내려온 것이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되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겠다' 하고, 뛰면서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뛰놀게 될 것이다."
9간(九干)들은 이 말을 좇아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추다가 얼마 안 되어 우러러 쳐다보니 다만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서 땅에 닿아 있다. 그 노끈의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에 금으로 만든 상자가 싸여 있으므로 열어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 알 6개가 있었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여 함께 백배(百拜)하고 얼마 있다가 다시 싸안고 아도간(我刀干)의 집으로 돌아와 책상 위에 놓아 두고 여러 사람은 각기 흩어졌다.
이런 지 12시간이 지나, 그 이튿날 아침에 여러 사람들이 다시 모여서 그 합을 여니 6개의 알은 화해서 어린 아이가 되어 있는데 용모(容貌)가 매우 훤칠했다. 이들을 평상 위에 앉히고 여러 사람들이 절하고 하례(賀禮)하면서 극진히 공경했다. 이들은 나날이 자라서 10여 일이 지나니 키는 9척으로 은(殷)나라 천을(天乙, 탕왕)과 같고 얼굴은 용과 같아 한나라 고조와 같았다. 눈썹이 팔자로 채색이 나는 것은 당나라 와 같고, 눈동자가 겹으로 된 것은 우나라 과 같았다.

그가 그달 보름에 왕위(王位)에 오르니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해서 이름을 수로(首露)라고 했다. 혹은 수릉(首陵)[13]이라고도 했다. 나라 이름을 대가락(大駕洛)이라 하고 또 가야국(伽耶國)이라고도 하니 이는 곧 여섯 가야(伽耶) 중의 하나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가서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니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은 창해(滄海), 서북쪽은 지리산(地理山), 동북쪽은 가야산(伽耶山)이며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 그는 임시로 대궐을 세우게 하고 거처하면서 다만 질박(質朴)하고 검소하니 지붕에 이은 이엉을 자르지 않고, 흙으로 쌓은 계단은 겨우 3척이었다.
재위 2년 계묘(癸卯) 정월에 왕이 말하기를, "내가 서울을 정하려 한다" 하고는 이내 임시 궁궐의 남쪽 신답평(新沓坪)【이는 옛날부터 묵은 밭인데 새로 경작했기 때문에 신답평이라 했다. '답'자(沓字)는 속자(俗字)다】에 나가 사방의 산악(山嶽)을 바라보다가 좌•우 사람을 돌아보고 말한다.
"이 땅은 협소(狹小)하기가 여뀌(蓼) 잎과 같지만 수려(秀麗)하고 기이하여 가위 16나한(羅漢)이 살 만한 곳이다. 더구나 1에서 3을 이루고 그 3에서 7을 이루니 7성(聖)이 살 곳으로 가장 적합하다. 여기에 의탁하여 강토(疆土)를 개척해서 마침내 좋은 곳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
여기에 1,500보(步) 둘레의 성과 궁궐(宮闕)과 전당(殿堂) 및 여러 관청의 청사(廳舍)와 무기고(武器庫)와 곡식 창고를 지을 터를 마련한 뒤에 궁궐로 돌아왔다. 두루 나라 안의 장정과 공장(工匠)들을 불러 모아서 그달 20일에 성 쌓는 일을 시작하여 3월 10일에 공사를 끝냈다. 그 궁궐(宮闕)과 옥사(屋舍)는 농사일에 바쁘지 않은 틈을 이용하니 그해 10월에 비로소 시작해서 갑진(甲辰)년 2월에 완성되었다. 좋은 날을 가려서 새 궁으로 거동하여 모든 정사를 다스리고 여러 일도 부지런히 보살폈다.

이 때 갑자기 완하국(琓夏國) 함달왕(含達王)의 부인(夫人)이 아기를 배어 달이 차서 알을 낳으니, 그 알이 화해서 사람이 되어 이름을 탈해(脫解)라 했는데, 이 탈해가 바다를 좇아서 가락국에 왔다. 키가 3척이요 머리 둘레가 1척이나 되었다. 그는 기꺼이 대궐로 나가서 왕에게 말하기를,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소."
하니 왕이 대답했다.
"하늘이 나를 명해서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장차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려 함이니, 감히 하늘의 명(命)을 어겨 왕위를 남에게 줄 수도 없고, 또 우리 국민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탈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술법(術法)으로 겨뤄 보려는가?"
하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 잠깐 동안에 탈해가 변해서 매가 되니 왕은 변해서 독수리가 되고, 또 탈해가 변해서 참새가 되니 왕은 새매로 화하는데 그 변하는 것이 조금도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탈해가 본 모양으로 돌아오자 왕도 역시 전 모양이 되었다. 이에 탈해가 엎드려 항복한다.
"내가 술법을 겨루는 마당에 있어서 매가 독수리에게, 참새가 새매에게 잡히기를 면한 것은 대개 성인(聖人)께서 죽이기를 미워하는 어진 마음을 가진 때문입니다. 내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툼은 실로 어려울 것입니다."
탈해는 문득 왕께 하직하고 나가서 이웃 교외의 나루터에 이르러 중국에서 온 배가 대는 수로(水路)로 해서 갔다. 왕은 그가 머물러 있으면서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급히 수군(水軍) 500척을 보내서 쫓게 하니 탈해가 계림(鷄林)의 땅 안으로 달아나므로 수군은 모두 돌아왔다. 그러나 여기에 실린 기사(記事)는 신라의 것과는 많이 다르다.

건무(建武) 24년 무신(戊申)[14] 7월 27일에 9간(九干) 등이 조회할 때 말씀드렸다.
"대왕께서 강림(降臨)하신 후로 좋은 배필을 구하지 못하셨으니 신들 집에 있는 처녀 중에서 가장 예쁜 사람을 골라서 궁중에 들여보내어 대왕의 짝이 되게 하겠습니다."
그러자 왕이 말했다.
"내가 여기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일진대, 나에게 짝을 지어 왕후(王后)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령이 있을 것이니 경들은 염려 말라."
왕은 드디어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해서 경주(輕舟)와 준마(駿馬)를 가지고 망산도(望山島)[15]에 가서 서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에게 명하여 승점(乘岾)【망산도(望山島)는 서울 남쪽의 섬이요, 승점(乘岾)은 경기(京畿) 안에 있는 나라다.】으로 가게 했더니 갑자기 바다 서쪽에서 붉은 빛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북쪽을 바라보고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망산도에서 횃불을 올리니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려 뛰어오므로 신귀간은 이것을 바라보다 대궐로 달려와서 왕께 아뢰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여 이내 9간(九干) 등을 보내어 목연(木蓮)으로 만든 키를 갖추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가서 그들을 맞이하여 곧 모시고 대궐로 들어가려 하자 왕후가 말했다.
"나는 본래 너희들을 모르는 터인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따라갈 수 있겠느냐."
유천간 등이 돌아가서 왕후의 말을 전달하니 왕은 옳게 여겨 유사(有司)를 데리고 행차해서, 대궐 아래에서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산기슭에 장막을 쳐서 임시 궁전을 만들어 놓고 기다렸다. 왕후는 산 밖의 별포(別浦) 나루터에 배를 대고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쉬고, 입은 비단 바지를 벗어 산신령(山神靈)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이 밖에 대종(待從)한 잉신 두 사람의 이름은 신보(申輔)·조광(趙匡)이고, 그들의 아내 두 사람의 이름은 모정(慕貞)·모량(慕良)이라고 했으며, 데리고 온 노비까지 합해서 20여 명인데, 가지고 온 금수능라(錦繡綾羅)와 의상필단(衣裳疋緞)·금은주옥(金銀珠玉)과 구슬로 만든 패물들은 이루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왕후가 점점 왕이 계신 곳에 가까워 오니 왕은 나아가 맞아서 함께 장막 궁전으로 들어왔다. 잉신 이하 여러 사람들은 뜰 아래에서 뵙고 즉시 물러갔다. 왕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잉신 내외들을 안내하게 하고 말했다.
"사람마다 방 하나씩을 주어 편안히 머무르게 하고 그 이하 노비들은 한 방에 5명 ~ 6명씩 두어 편안히 있게 하라."
말을 마치고 난초로 만든 마실 것과 혜초(蕙草)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와 채색이 있는 자리에서 자게 하고, 심지어 옷과 비단과 보화까지도 주고 군인들을 많이 내어 보호하게 했다. 이에 왕이 왕후와 함께 침전(寢殿)에 드니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한다.
"저는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인데, 성(姓)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에 부왕과 모후(母后)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함께 하늘의 상제(上帝)를 뵈었는데, 상제께서는, 가락국의 왕 수로(首露)를 하늘이 내려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또 나라를 새로 다스리는 데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경들은 공주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 하라 하시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가셨다. 꿈을 깬 뒤에도 상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으로 떠나라'하셨습니다. 이에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蒸棗)를 찾고, 하늘로 가서 반도(蟠桃)를 찾아 이제 모양을 가다듬고 감히 용안(龍顔)을 가까이 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대답했다.
"나는 나면서부터 성스러워서 공주가 멀리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어서 신하들의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따르지 않았소. 그런데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오셨으니 이 몸에는 매우 다행한 일이오."
왕은 드디어 그와 혼인해서 함께 두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그들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내는 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라 이들에게 각각 살 10석과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8월 1일에 왕은 대궐로 돌아오는데 왕후와 한 수레를 타고, 잉신 내외도 역시 나란히 수레를 탔으며, 중국에서 나는 여러 가지 물건도 모두 수레에 싣고 천천히 대궐로 들어오니 이때 시간은 오정(午正)이 가까웠다. 왕후는 중궁(中宮)에 거처하고 잉신 내외와 그들의 사속(私屬)들은 비어 있는 두 집에 나누어 들게 하고, 나머지 따라온 자들도 20여 칸 되는 빈관(賓館) 한 채를 주어서 사람 수에 맞추어 구별해서 편안히 있게 했다. 그리고 날마다 물건을 풍부하게 주고, 그들이 싣고 온 보배로운 물건들은 내고(內庫)에 두어서 왕후의 사시(四時) 비용으로 쓰게 했다.

어느날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9간(九干)들은 여러 관리의 어른인데, 그 지위와 명칭이 모두 소인(小人)이나 농부들의 칭호이니 이것은 벼슬 높은 사람의 명칭이 못된다. 만일 외국 사람들이 듣는다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이리하여 아도(我刀)를 고쳐서 아궁(我躬)이라 하고, 여도(汝刀)를 고쳐서 여해(汝諧), 피도(彼刀)를 피장(彼藏), 오도(五刀)를 오상(五常)이라 하고, 유수(留水)와 유천(留天)의 이름은 윗 글자는 그대로 두고 아래 글자만 고쳐서 유공(留功)·유덕(留德)이라 하고 신천(神天)을 고쳐서 신도(神道), 오천(五天)을 고쳐서 오능(五能)이라 했다. 신귀(神鬼)의 음(音)은 바꾸지 않고 그 훈(訓)만 신귀(臣貴)라고 고쳤다. 또 계림(鷄林)의 직제(職制)를 취해서 각간(角干)·아질간(阿叱干)·급간(級干)의 품계를 두고, 그 아래의 관리는 주(周)나라 법과 한(漢)나라 제도를 가지고 나누어 정하니 이것은 옛 것을 고쳐서 새 것을 취하고, 관직(官職)을 나누어 설치하는 방법이다. 이에 비로소 나라를 다스리고 집을 정돈하며,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니 그 교화(敎化)는 엄숙하지 않아도 위엄이 서고, 그 정치는 엄하지 않아도 다스려졌다. 더구나 왕이 왕후와 함께 사는 것은 마치 하늘에게 땅이 있고, 해에게 달이 있고, 양(陽)에게 음(陰)이 있는 것과 같았으며 그 공은 도산(塗山)이 하(夏)를 돕고, 당원(唐媛)이 교씨(嬌氏)를 일으킨 것과 같았다. 그 해에 왕후는 곰을 얻는 꿈을 꾸고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다.

영제(靈帝) 중평(中平) 6년 기사(己巳)[16] 3월 1일에 왕후가 죽으니 나이는 156세였다. 온 나라 사람들은 땅이 꺼진 듯이 슬퍼하여 귀지봉(龜旨峰) 동북 언덕에 장사하고, 왕후가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던 은혜를 잊지 않으려 하여 처음 배에서 내리던 도두촌(渡頭村)을 주포촌(主浦村)이라 하고, 비단 바지를 벗은 높은 언덕을 능현(綾峴)이라 하고, 붉은 기가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했다. 잉신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와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 등은 이 나라에 온 지 30년 만에 각각 두 딸을 낳았는데 그들 내외는 12년을 지나 모두 죽었다. 그 밖의 노비의 무리들도 이 나라에 온 지 7~8년이 되는데도 자식을 낳지 못했으며, 오직 고향을 그리워하는 슬픔을 품고 모두 죽었으므로, 그들이 거처하던 빈관(賓館)은 텅 비고 아무도 없었다. 왕후가 죽자 왕은 매양 외로운 베개를 의지하여 몹시 슬퍼하다가 10년을 지난 헌제(獻帝) 입안(立安) 4년 기묘(己卯)[17] 3월 23일에 죽으니, 나이는 157세였다. 나라 사람들은 마치 부모를 잃은 듯 슬퍼하여 왕후가 죽던 때보다 더했다. 대궐 동북쪽 평지에 빈궁(殯宮)을 세우니 높이가 한 길이면 둘레가 300보(步)인데 거기에 장사를 지내고 이름을 수릉왕묘(首陵王廟)라고 했다.

2.4. 사후

금관가야는 532년 신라 제23대 법흥왕에게 멸망했다. 《가락국기》에 의하면, 수로왕에 대한 제사를 멸망한 후에도 계속하긴 했지만 더 이상 예전처럼 할 수는 없었고 다소 소홀해져 가끔 빠트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신라 제30대 문무왕 때인 661년에 조서를 내려 외가의 시조인 수로왕의 묘를 신라의 종묘에 합해서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이는 문무왕의 모친인 문명왕후김유신여동생이었으며, 김유신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이었던 구형왕의 증손자였기 때문이다. 즉 문무왕 역시 신라의 국왕이면서도 외가쪽으로 수로왕의 직계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묘 인근에 왕위전(王位田)을 만들고, 그 밭을 수로왕의 직계 후손이 맡게 해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

후삼국시대의 혼란기때는 호족소충자가 김해를 차지했는데, 소충자의 부하였던 영규(英規)와 준필(俊必)[18]이 수로왕의 제사권을 빼앗아 대신 지내려고 하다가 불길한 일이 계속되어 그만두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소충자 문서 참조. 결국 소충자는 명령을 거두고 금관가야 왕실의 후손이 다시 제사를 맡도록 넘겨주었다. 이후로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계속 제사가 이어졌다.

3. 여담

  • 가락국기에서는 나중에 신라 제4대 국왕이 되는 탈해 이사금과의 재밌는 설화가 있는데, 바로 탈해 이사금이 가락국의 왕위를 요구하는 설화이다. 탈해가 수로왕에게 왕위를 요구했다 도술 대결로 패배하고 신라로 도망갔다는 설화이다.
김수로 : "하늘이 나에게 명하여 왕위에 오르게 했고, 나는 장차 나라 안을 안정시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 하네. 나는 감히 천명(天命)을 어기어 왕위를 남에게 줄 수 없으니, 또 감히 우리나라와 백성을 당신에게 맡길 수도 없네."
석탈해 : "그렇다면 기술(奇術)로써 승부를 결정합시다."
김수로 : "좋네."||
  • 신라의 제후국 간의 다툼을 중재했다는 기록이 있다. 초기 가야의 위기나 고난들을 처리하거나 넘어가게 만들었고, 근방 국가들과 어떻게든 공존하면서 세력도 길렀다. 수로왕 생전에 신라를 공격한 적도 있었고, 신라 쪽에서도 소규모로 몇 번 가야를 침략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 제6대 지마 이사금때는 작정하고 쳐들어온 것만도 3번이었는데 전부 격퇴했다. 당시 신라군이 10,000명에 도달했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격파했다니 비범한 인물이다. 생전에 신라와 다툼이 있었는데 전부 승리하거나 전쟁에 지더라도 철의 영유권은 보전했다고 한다. 신라를 위협할 정도로 급속도로 성장시켰음은 수로왕 덕분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을 정도이다. 고대국가로 성장시키고 다음 기반을 만들어 놓았다고 하는데, 금관국의 구세주이자 전성기의 기반을 마련한 성군이자 명군이다. 경상남도 김해시 서상동에 김수로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수로왕릉이 있다.
  • 김수로라 기록되어 있지만 정황상 신라처럼 금관국도 수로왕 시절에는 성이 없었다가 후세대부터 김해 김씨를 사용한 것이 소급 적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즉 생전에는 그냥 '수로'였다는 것. 혁거세 거서간이 박혁거세라 불리지만 정황상 생전 혁거세가 성이 없었으리라 유력시되는 것과 같다.
  • 현대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금관국이 군장 사회를 넘어서 고대 국가로 변모한 시기는 3세기 중후반 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세력이 김해의 다른 세력들에게 명확한 우위를 점유하게 된 이후라고 한다. 그리고 파사 이사금은 고고학 연구와 일본서기 이주갑인상 연구 결과 4세기 초중반 재위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며, 3세기 중후반 금관국이 건국된 뒤 급성장해 4세기 중반까지 금관국이 사로국보다 한반도 내에서 외교적 위상이 높았다고 한다. 따라서 파사가 '나이가 많은' 수로왕에게 국제 분쟁 해결을 떠넘긴 것은 4세기 초반일 가능성이 높다.[19] 파사가 영토 분쟁 해결을 요청했을 당시 '나이가 많다'고 평했으니 157년은 당연히 아니지만 오래 재위했을 것이고, 고고학적 연대를 맞추면 3세기 중후반~4세기 초반까지 재위한 것으로 보인다.
    또 수로왕의 아들 거등왕의 대에 포상팔국의 난이 일어났다고 하는데, 포상팔국의 난에서 공격당한 나라가 금관국보다 안라국일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포상팔국의 난은 대체로 310년대~320년대에 일어난 일로 추정되므로[20] 4세기 초반에 수로왕에서 거등왕으로 왕위가 교체된 것으로 보인다.[21]
  • 탈해 이사금과 수로왕이 충돌했다는 기사와 달리, 수로왕이 실제로 싸운 석씨 왕은 탈해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석씨 왕조의 족보에 따르면 혁거세-남해-아효부인-구추-벌휴-골정-골정의 딸-아이혜부인-명원부인-흘해로 4세기 초반 흘해가 탄생하기까지 9대가 흘렀다.[22] 혁거세가 사로국을 건국한 건 고고학적으로 2세기 후반이기 때문에, 4세기 초반에 혁거세의 9대손이 태어난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탈해가 실존한 것이 맞을 경우 탈해는 3세기 초반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고고학적으로 사로국과 금관국이 팽창하며 충돌한 시기는 4세기 초반 이전으로 올라가지 않는다. 그리고 석씨 왕조의 왕들을 보면 탈해 외에 내해, 첨해, 흘해처럼 탈해와 이름이 비슷한 왕이 여럿 존재하기 때문에, 후대 신라에서 사서를 편찬하며 기년을 인상할 때 이들 중 하나를 탈해 시절로 인상해서 기록한 것으로 여겨진다. 사실 탈해 23년에 신라가 싸웠다는 금관국 왕이 수로왕이라 명확히 명시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신라와 금관국이 본격적으로 충돌한 4세기 초중반 시절 금관국의 왕이 수로왕이 아니라 아들 거등왕이나 손자 마품왕일 가능성도 그리 적지 않다.[23]
  • 신라와 금관국 양쪽 전승에서 모두 '수로왕'과 '탈해 이사금'의 분쟁을 강조한 것으로 보아, 금관국은 4세기 신라의 3왕성 중에서 석씨 왕조와 주로 전쟁한 것으로 보인다. 석씨 왕조 시조 전설에도 수로왕과의 분쟁을 기술한 것으로 보아, 석씨 왕조에게 있어서도 금관국과의 전쟁은 굉장히 인상적인 기억이었던 모양이다. 수로왕이 확실시되는 기록에서 수로왕과 직접적인 악연을 가진 건 박씨인 파사 이사금이기 때문에, 양국에 내려오는 수로왕과 탈해 이사금의 분쟁 전설은 4세기 금관국 왕들과 석씨 왕들의 전쟁을 이전 세대에 투영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석씨 왕조는 3세기 중후반에 처음 출몰했다는 가설도 있는데, 3세기 중후반 가설대로라면 석씨 족단이 동해 바다를 타고 내려와 처음 김해 일대로 갔다가 김해 대성동 고분군 세력이 김해 일대에서 주도권을 잡는 상황을 보고 정착을 포기해 다시 경주로 올라간 게 사실일 수도 있다. 신라 석씨 왕조와 금관국 모두 시조들의 충돌을 기이할 정도로 강조하기 때문에, 정말로 석씨 족단의 시조가 충돌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24]
  • 수로왕 157년-거등왕 54년-마품왕 32년-거질미왕 55년-이시품왕 61년-좌지왕 14년-취희왕 29년-질지왕 40년-겸지왕 29년-구형왕 11년 재위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고대 사회에서 157년, 54년, 55년, 61년 재위는 어떻게 봐도 매우 과장한 티가 나는 재위기간이다. 거기다 수로왕은 사서에서 오래 재위했다고 명확하게 명시된 이상, 반대로 아버지가 오래 재위해서 나이가 많을 때 재위했을 아들인 거등왕과 손자인 마품왕 중 1명은 재위기간이 짧아야 정상이다. 따라서 금관국 10명의 왕들 중 재위기간을 믿을 수 있는 건 11년 재위한 마지막 왕인 구형왕밖에 없다 봐도 무방하다.
    일단 금관국은 3세기 중후반(260년대~280년대)~532년 존속했기 때문에 250~270년 정도 존재했다 가정할 수 있고, 금관국이 멸망했을 당시 구형왕의 장남 세종이 성인이었으므로 건국부터 멸망까지 11대가 흘렀다고 가정할 수 있다.[25] 그래도 250~270년 동안 10명만 재위했다면 고구려처럼 고대 기준으로 왕들의 평균 재위기간이 제법 긴 편이었던 듯하다. 수로왕, 세종, 김유신이 모두 장수한 걸로 추정되기 때문에 장수 유전자로 오래 재위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게 아니면 누락된 왕들이 더 있을 수도 있다. 현존하는 금관국에 대한 기록은 구형왕의 후손이 멸망 이후에 남긴 것으로, 수로왕부터 구형왕까지 10명 10대가 정확히 지났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고대 사회에서 건국부터 멸망까지 10명 10대로 1대당 1명만 즉위하는 건 좀 부자연스러운 일이다.[26] 따라서 구형왕의 후손이 금관국 멸망 이후 계보를 기록할 때, 자신의 직계가 아닌 금관국 왕들을 누락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DNA 연구에 따르면 금관국 왕조는 조몬인 DNA가 30% 정도 나온다고 하며, 금관국 왕조에서 나타나는 남방계 유전자는 조몬인 유전자지 인도계 유전자가 아니라고 한다. 따라서 허황옥은 조몬인 DNA 비율이 높은 인물로 추정된다. 선사시대부터 원삼국시대 초기까지 조몬인들은 한반도 중남부에도 제법 많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 조몬인 DNA가 높은 인물일 수도 있고, 3세기 중후반은 일본 열도에서 야마토 왕권이 출몰한 시기이기도 하기 때문에 왜 출신일 수도 있다. 가야와 왜가 3세기부터 꽤 긴밀한 모습을 많이 보이는 걸 고려하면 스진 덴노계가 아니라도 일본 열도에서 배 타고 김해 일대로 건너온 일족 출신일 수도 있다. 당대 일본에는 스진 덴노계가 아니라도 여러 왕들이 복수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4. 관련 문서


[1] 《가락국기》는 계욕일(禊)이라고 기록했다. 음력 첫 사일(巳日)에는 액을 떨구어 버리는 의미로 목욕하고 물가에서 술을 마시는 풍습이 있었다. 그리고 음력 42년 3월 1일은 경인일이었다.[2] 《가락국기》는 3월 보름에 즉위했다(其於月望日即位也)고 기록했다. 음력 42년 3월의 보름은 16일이었으며, 율리우스력 4월 24일, 그레고리력 22일이었다.[A] 정견모주 전설에 나오는 ‘금관국왕 뇌질청예’가 수로왕과 동일하다고 볼 때.[4] 동생 김진아시, 김말로.[5] 장남 김거등[6] 삼국시대에 관한 기록에서 9척이라 나온다. 다른 각주에도 서술하지만 현재의 척은 일본이 개항 이후 피트를 척으로 번역한 것이 넘어온 것이다. 고대사의 1척은 거의 중국 전한시대의 1척인 22.5cm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7] 《삼국유사》에 인용된 《가락국기》의 기록이다. 다만, 묘호가 아니라 그냥 칭호였을 가능성도 있다.[8]김해 김씨 족보》 기록. 아마도 가야가 멸망하고 시간이 흘러 문중 내에서 추숭한 걸로 보인다.[9] 《삼국유사》에 인용된 《가락국기》의 기록.[10] 김해 김씨말고도 양천 허씨와 김해 허씨의 조상이기도 하다.[11] 한나라 때의 척은 22.5cm. 계산을 하면 203cm이다.[12] 원주: 이것은 산봉우리를 말함이니, 마치 10붕(十朋)이 엎드린 모양과도 같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13] 원주2: 수릉은 죽은 이후의 시호다.[14] 48년.[15] 부산광역시 강서구 송정동에 위치한 섬. 행정구역상 부산이지만 창원시 진해구 용원동 시가지와 붙어있다. 근처에 대한제국 순종때 허왕후 전설을 전하기 위해 만든 유주비각이 있다.[16] 189년.[17] 199년.[18] 굳이 수로왕의 제사를 빼앗아 지내려고 시도한 것으로 봐서 이들이 김해 김씨의 방계가 아닐었을까하는 추정이 있기도 하다.[19] 파사 23년에 일어난 일이라 되어 있지만 신라가 4세기 후반까지 기년 조작을 했음을 감안하면 23년이 아니라 3년에 일어난 일일 수도 있다.[20] 포상팔국의 난이 일어난 연대는 고고학적으로 4세기 초반에서 올라가지 않는다. 313년 낙랑군, 314년 대방군의 멸망이 포상팔국의 난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되고 일본서기 이주갑인상에서 석우로가 320년에 사망했다 기록되어 있으므로 310년대~320년대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21] 지마 대에는 금관국과 싸웠다고 나오지 '수로왕'이라 명확하게 명시되지 않기 때문에, 지마 4년과 5년에 지마와 싸운 금관국의 왕은 수로왕이 아닐 가능성이 적지 않다. 지마 이사금의 실제 재위기간은 4세기 중반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수로왕의 아들~증손자 대인 거등왕~거질미왕일 가능성이 높다.[22] 우로와 명원부인은 부계로는 6촌이지만 명원부인의 어머니 아이혜부인이 우로의 누이라서 모계로 3촌 조카다.[23] 수로왕이 석씨 왕과 싸운 게 맞다면 해당 석씨 왕은 첨해 이사금일 가능성이 높고, 수로왕이 아니라 거등왕이나 마품왕이 신라와 싸웠다면 4세기 초중반에 재위한 흘해 이사금일 가능성이 높다.[24] 이 경우 수로왕과 충돌한 석씨 족단의 시조는 세대를 역산하면 벌휴일 가능성이 높다.[25] 고대에는 1세대가 20년 정도로 간주되기 때문에 단순히 생각하면 12~13세대 정도 흘렀어야 정상인데, 전설에 따르면 허황옥은 수로왕이 건국하고 시간이 지난 뒤에 혼인했고, 멸망 당시 11대인 세종이 20세 전후로 추정됨을 고려하면, 수로왕과 거등왕이 당시 기준 조손뻘이라 1대가 더 벌어진 것일 수는 있다.[26] 금관국처럼 막 군장 사회에서 고대 국가로 변모한 경우, 건국 초기에는 형제 상속이나 조카 상속같은 방계 즉위가 여러 차례 일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