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 말의 인물에 대한 내용은 송양(삼국지)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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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비류국 → 고구려 | |
작위 | 다물도주(多勿都主) → 다물후(多勿候) → 다물국왕(多勿國王) | |
봉토 | 다물도(多勿都) | |
성씨 | 송(松) | |
휘 | 양(讓) | |
딸 | 왕후 송씨 | |
생몰연도 | ? ~ ? | |
재위기간 | ? ~ 기원전 37년 |
1. 개요
고구려 초기의 인물이자 외척. 본래는 고구려와 이웃하고 있던 비류국의 군주였다.2. 생애
부여를 탈출해 졸본 땅에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이 비류수를 따라 나서서 비류국에 도착하였는데, 이때 동명성왕이 스스로를 '하늘의 자손'이라고 주장하자 심사가 뒤틀렸는지 먼저 시비를 걸었다.임금이 대답하였다.
“나는 천제의 아들로서 모처에 와서 도읍을 정하였다.”
이에 송양이 말하였다.
“우리는 여러 대에 걸쳐서 왕노릇을 하였고, 땅이 작아서 두 왕을 용납하기엔 부족하다. 그대는 도읍을 정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우리에게 부용(附庸)함이 어떠한가?”
임금은 그 말에 분노하여 그와 말다툼을 하다가 서로 활을 쏘아 재주를 겨루었는데, 송양은 대항할 수 없었다.
《삼국사기》 제13권 고구려본기 제1 시조 동명성왕
“나는 천제의 아들로서 모처에 와서 도읍을 정하였다.”
이에 송양이 말하였다.
“우리는 여러 대에 걸쳐서 왕노릇을 하였고, 땅이 작아서 두 왕을 용납하기엔 부족하다. 그대는 도읍을 정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우리에게 부용(附庸)함이 어떠한가?”
임금은 그 말에 분노하여 그와 말다툼을 하다가 서로 활을 쏘아 재주를 겨루었는데, 송양은 대항할 수 없었다.
《삼국사기》 제13권 고구려본기 제1 시조 동명성왕
송양의 말에 화가 난 동명성왕이 도전을 하여 활쏘기 등의 재주를 겨뤘다. 그러나 동명성왕의 본명인 '주몽'이 부여 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일 정도로 궁술이 뛰어났기 때문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결국 송양은 대결에서 지고나서 물러났고 한다.
과거 전승을 가감 없이 기록한 《구삼국사》[1]에는 어떤 대결을 했는지도 기록되어 있다. 송양은 사슴 그림을 그려놓고 100보 밖에서 활을 쏴 맞히려 했는데 사슴 배꼽에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힘겨워했다고 하며, 반면 동명성왕은 사람을 시켜 옥으로 만든 반지를 가져와 100보 밖에다 매달아 두고는 그걸 맞혀서 깨버렸다고 한다.
한편 구삼국사에는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은 전승이 하나 더 기록되어 있다. 본래 비류국은 고구려보다 오래 전에 건국되었기 때문에 궁궐이 오래되었는데, 그걸 가지고 자기들이 나라가 더 오래되었다고 뻐기자, 동명성왕이 부분노를 보내서 궁궐 대들보를 털어왔다고 한다. 이후 동명성왕이 흰 사슴(혹은 향기 나는 사슴)을 붙잡고 제물로 바치자 하늘에서 큰 비를 내려 비류국에 홍수가 났는데, 동명성왕이 비류국의 국민들을 구해주자 모두 고구려에 복속되었다고 전해진다.
후에 비류국의 땅은 되찾은 땅이라는 의미에서 '다물도(多勿都)'[2]라 이르게 되었고, '비류부'라는 이름으로 고구려에 편입된다.[3]
이후 동명성왕의 아들인 유리명왕에게 자신의 딸 왕후 송씨를 시집보냈는데, 불과 1년 만에 장남 도절태자를 낳고 죽었다. 그런데 유리명왕의 삼남인 대무신왕 역시 송양의 딸 소생이라고 하는데 이 기록과 나이가 맞지 않기 때문에 딸의 사망 기록이 잘못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대무신왕 시기에 우보로 임명된 송옥구가 그와 성이 같지만 송양과 연관이 있는지는 불명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연노부 단락을 쓴 노태돈 교수는 송양이 단지 소노를 다르게 쓴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차대왕의 태자인 고추안은 신대왕 즉위 이후 양국군(讓國君)에 봉해졌는데 연관이 있는지는 불명이다.
3. 창작물에서
사극 주몽의 등장인물로 박종관이 연기한다. 비류부의 수장으로, 졸본의 대표 꼰대(...) 역할을 하고, 한나라의 양정과 결탁하는 등 계루부의 소서노와 척을 지고 살지만 결국 마음을 고쳐먹고 주몽을 주군으로 받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