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5 08:34:26

신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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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제8대 국왕
신대왕 | 新大王
파일:산성하 전창 36호분 도면.jpg
신대왕릉으로 추정되는 산성하 전창 36호를 그린 도면.
<colbgcolor=#000000><colcolor=#fbe673> 출생
(음력)
89년
고구려 국내성
사망
(음력)
179년 12월 (향년 90세)
고구려 국내성
능묘 고국곡(故國谷)[1]
재위기간
(음력)
고구려 제8대 국왕
165년 10월 ~ 179년 12월 (14년 2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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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고(伯固) / 백구(伯句)
부모 부왕 태조대왕?[2] / 차대왕?[3] / 고재사?
형제 고궁?[4], 고수성, 고막근, 고막덕
동생 고인고?
왕후 고남무의 모후
왕자 태자 고남무
왕자 고발기[5], 고발기[6], 고연우[7], 고계수[8]
시호 신대왕(新大王) }}}}}}}}}
"크도다! 신대왕의 덕택이!"
大哉! 新大王之德澤也!
신대왕이 선정을 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사면령을 내리자 사람들이 기뻐 손뼉을 치며 외친 말.

1. 개요2. 생애3. 《삼국사기》 기록4. 대중매체에서5.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고구려의 제8대 군주. 휘는 백고 혹은 백구.

왕호 자체가 새로운 군주이다.

태조대왕과 신대왕의 관계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태조대왕의 이복동생으로, 정사 《삼국지》에는 태조대왕 궁의 서자로, 《후한서》에는 태조대왕 궁의 손자이자 차대왕 수성의 아들로 나온다. 신채호는 중국사서 기록이 더 현실적이라 보고 차대왕과 신대왕이 태조대왕의 서자라고 주장한 바 있으나, 이에 대한 현재 학계의 정설은 노태돈 교수의 지적대로 태조대왕의 방계 친척 동생이라는 것이다. 신대왕이 태조대왕의 아들이라면 설령 적자가 아닌 서자더라도 후일 고구려인들이 굳이 아들을 동생으로 고칠 이유가 없는 데다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조- 후반부와 -차대왕조-의 기사들은 지나칠 정도로 차대왕을 깎아내리고 있다. 따라서 신대왕은 아예 태조대왕의 직계 혈통이 아니며, 신대왕의 후손인 뒷 시기의 고구려 왕들이 자신들의 선조인 신대왕의 정통성을 높이기 위해 신대왕을 태조왕의 친동생으로 삽입하고 태조왕의 사망년도를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늦추며 -태조대왕조- 후반부에 장장 23년에 걸쳐 차대왕의 찬탈을 서술함으로써 차대왕을 깎아내렸다는 것이다. 《삼국사기》보다 수백년 앞선 중국 기록인 《후한서》에서는 태조대왕이 121년에 사망하고 뒤이어 수성이 즉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기에 여러모로 《삼국사기》기년은 정확도가 의심된다.

다만 신대왕 이후 고구려 임금들이 고주몽을 선조로 분명히 명시하고 있는 이상, 신대왕이 태조왕의 친동생이 아닌 방계 친척동생이더라도 촌수는 그렇게까지 멀지 않았을 개연성이 있다. 주몽-유리-재사-태조왕인데, 방계인 신대왕이 태조왕의 친척 동생이고 주몽의 후손이라면 태조왕의 6촌 동생이 된다. 다름아닌 신라의 소지 마립간도 내물 마립간의 장남 눌지 마립간의 장손이자 내물 마립간의 장증손이었으나, 내물 마립간의 차남 복호의 손자, 즉 6촌형인 지증왕의 자식 뻘일 정도로 나이차가 많이 났다. 현대 한국에서도 4촌인데 40살 가까이 차이나는 경우가 있는만큼 6촌 형제간인 태조왕과 신대왕의 나이 차가 40살인 경우는 충분히 개연성 있는 일이라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있는 외모 및 성격 기록에 따르면
"용모가 영특하며 성품이 어질고 너그러웠다."
고 기록하고 있다.#

2. 생애

삼국사기》에 따르면, 차대왕이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채 정적 제거에만 몰두하는 등 폭정을 일삼자 명림답부쿠데타를 일으켜 차대왕을 시해하고 그의 동생인 고백고를 임금으로 옹립하니 그가 바로 신대왕이었다고 한다.[9]

당시 중국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태조대왕이 죽고 차대왕이 즉위한 시점은 《삼국사기》의 146년보다 25년 이른 121년이다. 이에 따르면 차대왕의 재위 기간은 121년부터 165년까지 총 45년이 되며,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신대왕 세력이 어떤 이유로 차대왕의 재위 기간 중 약 24년을 태조대왕의 것으로 조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여러 나이 차를 감안한다면 차대왕의 출생연도는 113년쯤으로 추정되며, 신대왕은 차대왕의 아우가 아니라 현 한국 학계에서 주장하는 대로 차대왕의 방계 동생임이 유력하다.

삼국유사》 <왕력>에
'을사년(165년) 국조왕(태조왕)의 나이가 119세였는데 두 선왕(태조왕·차대왕)이 모두 신대왕에게 시해되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차대왕 시기에는 폭정을 피해 산골로 숨어 살았다가 명림답부가 차대왕을 시해하고 나서 그를 안심시킨 후 왕위에 올렸다고 한다. 아무래도 친척 형 차대왕에게 미움을 산 듯하다. 차대왕이 왕위에 욕심내자 신대왕이 은근히 간접적인 디스를 했던 적이 있었는데, 반대파에게 가혹한 차대왕이 이걸 그대로 넘어갈리가 없다고 판단했던 걸로 보인다. 왕위에 오른 나이가 《삼국사기》에서는 77세로 나오며 친척 형 차대왕처럼 매우 많은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신대왕이 사면령을 반포하다
과인은 외람되게도 왕의 친족으로 태어났지만 본디 임금으로서의 덕망이 없었다. 지난날 태조대왕께서 형제 사이에 우애 있는 정치를 부탁하였으나, 차대왕이 자손을 위해 물려준 계책을 자못 망가뜨렸다. 과인은 피해를 입을까 두렵고 안전하기가 어려워 여러 신료와 백성들을 떠나 멀리 도망해 숨었는데, 차대왕이 사망하였다는 흉흉한 소식을 듣기에 이르니 다만 마음이 꺾여 매우 슬플 뿐이었다. 어찌 백성들이 즐거이 받들고 여러 대신들이 즉위하라고 권할 줄 생각했겠는가? 그릇되게도 보잘것없는 몸으로 숭고한 자리에 있게 되니, 감히 편안할 겨를이 없는 것이 깊은 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도다. 마땅히 은덕을 베풀어 멀리 이르도록 하여 마침내 여러 사람과 더불어 스스로 새롭게 함으로써 나라 안에 대사면을 베풀 수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신대왕-

신대왕 시기 정치의 대부분은 국상에 오른 명림답부가 처리했는데, 왕은 명림답부를 신뢰했으며 그가 명재상이라 신대왕의 치세는 대체로 평안했던 것으로 사서는 기록한다. 명림답부가 죽은 이후의 고구려는 신대왕의 친정 체제로 돌입했으나 기록에는 특별한 정치적인 치적이 없는 것으로 나와 있다. 그래도 당시 고구려의 좌보와 우보를 합쳐, 최고 관직인 국상을 만든 걸 보면 후대에 끼친 영향이 아예 없는 건 아닌 듯하다. 재위 도중 후한과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뒀는데 그것이 좌원 전투이다. 명림답부가 죽은 이후 신대왕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승하하였고, 이후 장남 고남무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기록에 나오는 아들이 넷이나 되고 그중 둘이 왕이 되었으나 동생이 왕이 되는 바람에 형이 이에 동의하지 않아 형제 간 골육상쟁이 있었다.[10]

자식복이 영 애매한데 다섯 아들을 두었으나 첫째와 셋째는 왕위 계승에서 밀려나 적국으로 망명했고 그 중 하나는 아얘 군대까지 끌고왔다. 넷째는 왕위 계승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 그래도 둘째아들이 명군이고 막내도 개념인이라 자식농사를 완전히 말아먹지는 않았다.

3.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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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신대왕 본기>
一年冬十月 신대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一月 대사면을 행하고 명림답부국상으로 삼다.
三年秋九月 시조 사당에 제사를 지내다.
三年冬十月 졸본에서 돌아오다.
四年 현도에 속하기를 청하다.
五年 현도 태수 공손도를 도와 부산적을 정벌하다.
八年冬十一月 명림답부의 계책으로 후한의 군대를 물리치다.
十二年春一月 신하들이 태자 책립을 건의하다.
十二年春三月 남무를 태자로 삼다.
十四年冬十月 일식이 일어나다.
十五年秋九月 국상 명림답부가 죽다.
十五年冬十二月 신대왕이 붕어하다.

4. 대중매체에서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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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산성하 전창 36호 추정[2] 정사 《삼국지》[3] 《후한서》[4] 《삼국사기》[5] 장남. 그러나 기록상 모순이 보여 실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6] 3남.[7] 4남.[8] 5남.[9] 그러나 이는 삼국사기 기록만으로도 반박된다. 차대왕 시절에 태조왕 때부터 시작된 정복 사업은 더욱 박차를 가했고 한나라와 부여와의 쟁패에서 패배한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군주들이 흔히 그렇듯 군사적 능력은 만렙인데 정치력이나 친화력은 영 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10] 장자 계승 원칙은 선왕의 장자가 임금이 되는 게 원칙으로서 사실 고국천왕에게 아들이 없는 상황이라면 어차피 방계라는 점에선 똑같은 그 밑 동생 누가 계승하더라도 장자 계승 원칙을 어기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당연한 얘기로 동생에게 왕위를 빼앗긴 형이 기분 좋을리가 없어 분란이 발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