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라의 무령왕에 대한 내용은 조무령왕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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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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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제25대 국왕 무령왕 | 武寧王 | |||
무령왕 정부표준영정 (2018년 김영화 作)[1] | |||
<colbgcolor=#008080><colcolor=#fbe673> 출생 (음력) | 461년 혹은 462년 6월 1일[2][3] | ||
왜국 쓰쿠시국 가카라섬 (現 일본국 사가현 카라츠시 가카라섬) | |||
사망 | 523년 6월 7일[A] (향년 60~61세)[5] | ||
백제 웅진성 (現 충청남도 공주시) | |||
장례 | 525년 9월 16일[6] | ||
백제 웅진성 (現 충청남도 공주시) | |||
능묘 | 무령왕릉(武寧王陵) | ||
재위기간 | 백제 제25대 국왕 | ||
501년 음력 11월 ~ 523년 6월 7일[A] (21년 7개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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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사마(斯麻)[8] / 사마(斯摩)[9] / 융(隆)[10] / 세마(嶋)[11] | ||
부모 | 부왕 개로왕 / 부여곤지 / 모후 개로왕의 부인[13] | ||
형제자매 | 5남 중 장남[14] | ||
왕후 | 왕대비 / 대부인 | ||
자녀 | 3남? 태자 순타태자, 부여명농[15] 왕자 부여사아[16] | ||
종교 | 불교 | ||
신장 | 190cm[17] | ||
시호 | 무령왕(武寧王) | ||
별호 | 사마왕(斯麻王)[18] | }}}}}}}}} |
무령왕릉 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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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제의 제25대 건길지.
2. 생애
2.1. 출생
전대 왕인 삼근왕과 손자인 위덕왕과 함께 생몰년이 알려진 몇 안 되는 백제 군주다. 《일본서기》에서 461년에 태어났다고 전하며, 실제로 무령왕릉 발굴 결과 523년에 사망할 당시 세는나이 혹은 연 나이로 62세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1년 이내의 오차로 교차검증까지 이루어졌다. 나머지 두 왕과 달리 생일과 기일까지 전해진다는 점에서 더욱 이례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즉위도 39~40세에 했으니 늦은 편이었지만 장수했다. 만약 동성왕 대신 바로 즉위했으면 44년을 재위할 수도 있었고, 그렇다면 재위 44년의 위덕왕과 맞먹는다.일본에서 태어났는데 조선의 현종, 대한민국의 이명박과 더불어 외국에서 태어난 몇 안 되는 한국사의 지도자이다. 동성왕이 개로왕의 동생인 부여곤지의 아들이며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다는 통설에 따른다면 동성왕의 출생이 부여곤지의 도왜 이후가 되므로 정황상 동성왕 역시 외국에서 태어났다고 봐야한다. 다만 무령왕은 일본 본토 출생은 아니고 중간에 기착했던 섬에서 태어났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개로왕의 아들이거나 부여곤지의 큰아들이다. 부여곤지가 왜국으로 파견나갈 때 임신한 개로왕의 부인을 데려갔고, 그때 낳은 아이가 사마, 즉 무령왕이었다고 전한다. 한때 거의 무시되었지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출생 연대와 《일본서기》에서 전하는 부여곤지의 왜국 파견 시기가 일치하고, 유사점이 보여 이를 지지하는 입장이 늘어났다.
《일본서기》 유랴쿠 덴노 5년(461년) 4월조에 따르면 개로왕은 아우인 부여곤지를 왜국에 사신으로 보낼 때 곤지의 간청에 따라 자신의 임신한 부인[19]을 곤지의 아내로 삼아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가는 도중 개로왕의 부인이자 부여곤지의 새 아내가 산기를 느껴 지금의 사가현 북쪽에 있는 섬인 카카라 섬에 정박하여 무령왕을 낳았다. 무령왕의 다른 이름 '사마왕(斯麻王)'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6월 병술 초하루에 임신한 부인이 카스리노키시(加須利君, 개로왕)의 말처럼 츠쿠시(筑紫)[20]의 카카라 섬(各羅島)[21]에서 아이를 낳았다. 그래서 아이 이름을 세마키시(嶋君)라 하였다. 이에 코니키시(軍君, 부여곤지)가 곧 배에 태워 세마키시를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이가 무령왕(武寧王)이다. 백제 사람들은 이 섬을 니리무세마(主島)라 불렀다.
《일본서기》 권14 유랴쿠 덴노 5년(461년) #
부여곤지가 일본으로 넘어가던 중 카카라 섬에 정박하여 무령왕을 낳았는데, 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사마왕'이라 나오기도 한다. 《일본서기》는 무령왕의 이름을 고대 일본어가 아닌 고대 한국어(백제어)를 그대로 옮겨 '세마키시(嶋君, 도군)'라고 전하였다.[22] 무령왕이 태어난 섬의 동굴에는 관련 설화가 전해지고 있기도 하다. 덧붙여서 서동요에 나오는 서동으로 추정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다.《일본서기》 권14 유랴쿠 덴노 5년(461년) #
사실 무령왕의 출신은 불분명하다. 무령왕이 개로왕의 아들이자 동성왕의 사촌 혹은 부여곤지의 아들이며 동성왕의 이복형이라는 것은 《일본서기》의 기록이고[23]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동성왕의 차남으로 기록되어 있다. 백제/왕조 문서에 있는 가계도나 한국사 교과서 등의 왕계표는 《삼국사기》 기록에 따른 것이라 일단 그렇게 표기되어 있다. 하지만 무령왕릉 발굴 결과 무령왕이 동성왕이나 삼근왕보다 나이가 많은 것으로 밝혀져서 현재는 《일본서기》(및 그에 인용된 벡제신찬)의 기록 쪽을 인정하고 있다. 다만 《일본서기》에서도 2가지 전승에 대해 어느 쪽이 맞는지 우리도 정확히는 모르겠다는 구절이 나오며[24] 동성왕은 문주왕의 아들이라는 가설도 있어서 적어도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이 아닌 건 확실하다는 것 외에는 무령왕과 동성왕의 혈연 관계가 정확히 어떠한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은 무령왕이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윤색의 결과라는 학설이 존재한다. 《일본서기》에서 두 가지 설을 언급하는 이유 또한 무령왕의 생물학적 친부로 추정되는 부여곤지의 후손이 전하는 전승과 무령왕의 아들 순타태자의 후손이 전하는 전승이 상충하기 때문이라는 학설이 있다.
2.2. 즉위
선왕 동성왕은 왕권 전제화 정책을 무리하게 시행한 탓에 반기를 든 위사좌평 백가에게 시해당하는 비운을 맞았는데, 동성왕의 반대파에 의해 추대된 무령왕이 즉위 이후 가장 먼저 한 일은 502년 1월에 한솔 해명에게 명하여 가림성에서 저항하던 백가를 토벌한 일이었다. 물론 무령왕 본인도 동성왕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신하가 군주를 살해한 일은 여전히 인륜을 저버린 행위이니, 무령왕 본인도 군주로서 백가의 행동이 좋게 보였을 리는 결코 없었을 것이다.의문스러운 것은 백가는 토벌군이 오자 저항도 하지 않고 그대로 항복한 뒤[25] 그대로 처형당했다는 점인데, 이 때문에 그의 배후에 누군가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일본서기》에서는 나라 사람들이 동성왕을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백가 혼자만의 소행이 아니라 어느 정도 모종의 합의나 지원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남래 귀족 세력 해씨(解氏)[26]와 연합하여 동성왕을 암살[27]했다는 학설이 있다. 실제로 무령왕의 재위기에는 동성왕 때와 달리 고구려 원정을 시도하며 한강 유역을 수복하기 위한 정책을 펼쳤다.
일각에서는 동성왕 암살의 배후가 무령왕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무령왕이 백가를 사주해 동성왕을 시해하고는 본인이 배후임을 감추기 위해 백가를 처단했다는 주장인데, 근거가 빈약하기 때문에 진실은 알 길이 없다. 부여곤지에게는 무령왕과 동성왕 외에도 3명의 아들이 더 있었고, 이들이 각각 사씨, 백씨, 연씨[28]와 혼인했다고 가정하면 동성왕이 3남의 외척이었던 사씨의 세력 기반인 사비성으로 천도를 계획해 3남을 왕태자로 책봉하자 이에 백가가 위기감을 느끼고 부여곤지의 4남을 즉위시키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으로 보인다.
2.3. 대외 정복 활동
503년 9월 고목성에 쳐들어온 위말갈을 물리쳤다. 이어 달솔 우영(優永)을 보내 군사 5,000명으로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29]을 공격했다. 507년 5월에는 고목성 남쪽에 2개의 책(柵)을 세우고 장령성(長嶺城)을 쌓았으며, 10월에 고구려의 장수 고로(高老)가 위말갈과 함께 쳐들어와 횡악(橫岳) 아래에 주둔하자 다시 격퇴시켰다. 512년 9월, 고구려가 가불성(加弗城)과 원산성(圓山城)을 점거하고 약탈을 일삼자 기병 3,000명을 이끌고 위천(葦川)의 북쪽으로 진출해 크게 무찔렀다. 523년 좌평 인우(因友)와 달솔 사오(沙烏)로 하여금 쌍현성(雙峴城)을 쌓도록 했다.고구려와의 전쟁을 통해 북방에서 세력 균형을 이룬 무령왕은 전라남도 지방의 침미다례 등 구 마한 세력을 크게 무너뜨렸고[30], 512년 12월에는 대가야 반파국의 세력 하에 있었던 상다리(上哆唎), 하다리(下哆唎), 사타(娑陀), 모루(牟婁) 등의 지역을 수중에 넣음으로써[31] 임실, 남원 방면에서 내륙 쪽으로 동진하고 섬진강 일대를 확보한 뒤 낙동강 서부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32] 더 나아가 513년 11월 5일에는 장군 저미문귀(姐彌文貴)와 주리즉이(州利卽爾)를 보내 역시 반파국의 세력권이었던 기문(己汶)과 대사(帶沙)까지 차지했다.[33]
무령왕은 새로 확보한 지역에 군령과 성주를 파견하여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으며, 전라도 동부 지역으로 진출을 시도하던 반파국은 이 시기 백제한테 밀려서 고립되는 위기에 처했다. 고대에는 교역이 농업 생산력만큼 국가의 명운을 좌지우지하는 사업이었기에, 섬진강을 통해서 광양만에 이르던 길을 고스란히 백제에게 빼앗기면서 어려움에 처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에는 이후로도 반파국이 이런 섬진강 유역 침입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방어 태세를 갖추는 모습을 보이지만 체급 차이로 인해 여의치 않았던 모양이다. 섬진강의 물산과 교통로 확보로 백제가 이후 신라와의 싸움에서 이 길을 이용해서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근간이 되기도 했다.
북쪽으로는 백제군이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까지 다시 진출했다는 설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 근거는 《삼국사기》의 무령왕 대 기록에 보이는 수곡성, 한산, 한수 이북 등의 명칭으로, 당시 백제의 영역과 한강 유역에 대한 지배권 여부에 대해서는 지금도 학계에서 논의 중에 있다. 고고학적으로는 이 시기 고구려가 한강 이남 지역을 빠르게 포기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이 때 고구려의 흥안태자가 경기도 고양시 북부 지역의 고봉산 관련 미녀 한씨 설화에서 등장하는 것[34]으로 보아 백제가 동성왕 - 무령왕 - 성왕 당시 고양시 일대까지 일시적으로 수복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령왕의 재위 말년에 해당하는 이 시기의 백제는 한강 이북까지 탈환하고 지배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안장왕이 한강 유역을 수복한 시기는 백제 성왕 재위 초기에 해당하며, 이후 성왕이 신라 진흥왕과 힘을 합쳐 재탈환한 것이 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중 동성왕~무령왕 대 기록에서 한강 유역 관련 지명이 자주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부여에서 갑자기 고구려식 온돌과 그릇 등이 출현하더니 곧 백제 영역 전반으로 빠르게 전파되는 양상이 관찰되는 것 또한 무령왕이 일시적으로 수복한 경기도 등지에서 고구려인들이나 고구려 문화를 익힌 옛 백제인들을 부여와 인근 지역에 사민한 결과로 추정된다.
즉 백제가 한강 유역을 영역화했는지는 아직 논의 중이지만, 적어도 백제군이 일시적으로나마 옛 위례성까지 치고 올라갔던 것은 거의 기정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 수곡성이 신계군의 옛 이름이라는 것을 근거로 무령왕 시절의 백제군이 개성을 비롯한 황해도 지역까지 치고 올라갔었다는 학설도 제기되고 있다. 백제 도읍 웅진성에서 신계까지 올라가려면 고양시 - 파주시 - 개성시 - 평산군 일대까지 모조리 다 백제의 세력권이었어야 한다는 해석이다.
2.4. 왕권 강화
무령왕은 즉위 후 동성왕을 시해한 귀족들을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양서》 〈백제전〉에 따르면 22개로 운영되던 담로에 부여씨 왕족을 보내 이들로 하여금 해당 지역을 통치하도록 하여 중앙집권적 질서 하에서 정치적 안정[35]을 이루었다. 부여씨 왕족을 지방 통치에 적극 이용하여 토목공사에 필요한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동원할 수 있게 되었고, 왕족은 경제적 기반을 확대시켜 나갔다. 최고 관등인 좌평제를 개편하여 신·구 세력을 통제했고, 직책이 없는 좌평이 등장했는데 이는 귀족 세력을 국왕 중심으로 서열화하고 국정을 책임있게 분담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었다.민생 안정에도 부단히 노력한 기록이 남아있다. 506년 3월에는 가뭄으로 인해 백성들이 굶주리자 창고를 열어 구휼하였고, 510년 1월에는 제방을 구축하며 유랑민들에게 농사를 권장하여 백성들의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고 농업 생산력을 증대시키고자 했다. 포학무도하다고 할 정도로 전제 군주적인 모습을 보여온 선왕 동성왕과는 꽤 대조적인 모습이다.
2.5. 외교
〈양직공도〉에 나타난 백제 사신의 용모.[36] |
무령왕은 대외 교류를 통해 백제의 문화 발전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무령왕은 512년 4월과 521년 11월에 남조의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친교 노선을 강화했다. 이때 동맹국이었던 신라의 사신을 양나라에 같이 데려갔는데, 신라는 진흥왕 이전까지 서해안에 항구가 없었으므로 중국 국가들과 직접적인 교류를 거의 하지 못했고[37], 사신단에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도 없었다. 이를 이용해 백제 사신은 신라가 백제의 속국 중 하나라고 양나라 황제에게 거짓말을 했으며, 호남 동부 주도권을 두고 백제와 다투던 대가야 반파국까지 백제의 부용국이라며 언론플레이를 시전했다.
실제로 530년대에 형주자사 소역이 편찬한 양직공도 제기에 백제의 부용국으로 기록된 소국들로는 반파(叛波), 탁(卓), 다라(多羅), 전라(前羅), 사라(斯羅), 지미(止迷), 마련(麻連), 상기문(上己文)[38], 하침라(下枕羅)가 있다. 마지막 4개국은 현재 학계에서 비정하는 국가가 맞다면[39] 당시 백제의 영향권 하에 있었음이 확실시되지만, 첫 5개국은 엄연한 독립국이었기[40] 때문에 본문에서 서술하였듯 백제의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 사신이 거짓말을 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외에도 표문에서 "여러 차례 고구려를 깨뜨려 비로소 우호를 맺었고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며 갱위강국(更爲强國)을 선언하기도 했다.
521년 양무제로부터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使持節都督 百濟諸軍事 寧東大將軍)'의 작호를 제수받았다. 이는 으레 나오는 명목상의 책봉 기록이지만 은근히 의미가 큰 기록이기도 하다. 양나라는 앞서 502년에 고구려 문자명왕을 '거기대장군', 무령왕을 '정동대장군'으로 봉했는데, 둘 중 고구려 쪽이 더 위계가 높았다. 그런데 520년 양나라는 고구려 안장왕을 '영동장군'에 책봉한 반면 이번에는 백제 무령왕을 그보다 더 높은 '영동대장군'으로 책봉한 것이다. 양나라가 백제의 위계를 고구려보다 높게 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름뿐인 관작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바다 건너 제3자인 양나라가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한때 위기에 몰렸던 백제가 무령왕 때쯤부터는 역전에 성공해 고구려의 위상을 뛰어넘고 있다고 본 것이다. 여기서 아이러니한 점은 무령왕보다 낮은 작호를 제수받은 안장왕이 백제의 우위를 뒤엎고 고구려의 전성기를 유지시킨 명군이라는 것. 무령왕의 아들인 성왕은 치세 초기 안장왕의 공격적인 대(對)백제 방면 확장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심지어 학계에서는 동성왕~무령왕 때 백제가 회복한 한강 유역을 다시 안장왕이 빼앗아갔다는 주장도 꽤 신빙성 있게 보고 있다.
한편 무령왕은 동쪽의 왜국과도 활발히 교류를 이어갔다. 505년 4월에는 왜국에 이미 보내진 마나군(麻那君)을 왕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아군(期我君)[41]으로 교체하여 부여씨 왕족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함으로써 정치를 안정시켰다. 또한 5세기 초의 아신왕처럼 유교를 가르치는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와 고안무(高安茂)를 각각 513년 6월과 516년 9월 왜국에 보내 백제의 선진 문화를 전해주기도 했다.
이렇게 양나라와 왜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과 외교 관계가 활발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 무령왕릉과 〈양직공도〉이다. 동아시아사와 한국사 시험에 잘 나오는 내용이기도 하다.
2.6. 사망
웅진백제 군주들 중 유일하게 천수를 누린 왕이자 전지왕 이래 오랜만에 자연사한 왕이었다. 웅진백제의 22대 문주왕(암살), 23대 삼근왕(암살 유력), 24대 동성왕(암살), 26대 성왕[42](관산성 전투에서 전사)은 모두 이렇게 암살되거나 전사했으며그 앞으로도 21대 개로왕(전사), 20대 비유왕(암살, 전사 유력), 19대 구이신왕(암살 유력) 등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한 사례가 많았으므로 무령왕은 아주 오랜만에 천수를 누린 백제 왕이었다.2.7. 무령왕릉
자세한 내용은 무령왕릉 문서 참고하십시오.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왕이었던 무령왕이 지금과 같이 유명해진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무령왕의 능이다. 무령왕릉은 백제 무덤 중 유일하게 주인이 확인된 왕릉이며, 도굴되지 않고 고스란히 출토된 금제 관장식 등의 호화로운 유물 덕에 급속히 유명해졌다.[43] '백제국왕대비(百濟國王大妃)'로 표현된 무령왕의 부인 역시 합장되어 발견되었다. 무령왕의 사망 3년 뒤인 526년 12월 사망하여 529년 2월 12일에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아쉽게도 성과 이름은 적혀있지 않아 알 수 없다. 무덤 양식은 양나라, 관은 왜국의 금송으로 제작되었다.
3. 논란
기록이 상대적으로 많이 남았지만 재위 초기의 기록과 수명에 부정합이 존재한다.3.1. 생년
무령왕의 사망에 대해서는 묘지석, 《일본서기》, 《삼국사기》가 모두 서기 523년 5월로 일치한다. 묘지석에 따르면 62세로 죽었고, 《일본서기》에 따르면 461년 6월 1일에 태어났다. 즉 461년에 태어나 523년에 62세로 죽었으므로, 이 나이는 연 나이로 계산된 것이 된다. 옛날 사람이니 당연히 세는나이를 썼을 것이리라고 생각하는 측에서는 생년을 462년(=523 - (62 - 1))으로 설정하고, 더 나아가 63세 생일이 되기 전에 죽었으므로 62세로 처리했다고 보기도 한다.3.2. 초기 기록
《삼국사기》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동성왕이 501년 12월 피습으로 인해 승하하고, 502년 1월에 무령왕이 백가를 죽이는 상황이 나온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 연표에서는 501년 동성왕이 사망하고 무령왕이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501년 12월 동성왕이 세상을 떠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44]《삼국사기》가 유월 칭원법[45]을 따른다고는 하나 이는 고구려에만 해당한다. 장수왕은 491년 12월에 승하했기 때문에 문자명왕 기록의 시작은 492년 1월이다. 그러나 백제 구이신왕은 427년 12월에 죽었는데 차기 왕인 비유왕의 원년이 427년이다. 신라의 경우도 다르지 않으며, 태종 무열왕이 661년 6월에 죽었으나 다음 왕인 문무왕의 기록은 661년 6월부터 원년으로 하여 시작한다. 동성왕이 501년 12월에 죽었기 때문에 《삼국사기》에 무령왕의 원년이 501년으로 기록된 것이다.
다만 비유왕은 원년의 기록이 없고 2년(428년)부터 기록이 시작되는 반면, 무령왕은 분명 원년이 501년 12월인데도 불구하고 501년 1월부터 시작되는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백가의 처형은 무령왕 2년(502)의 사건인데 모종의 원인으로 인해 기록에서 연도가 빠졌고, 후대에 이것이 2년이 아닌 원년으로 잘못 기록된 셈이다. 원년이 501년인 것은 변함이 없다.
《삼국사기》의 무령왕 대 기록을 기재된 순서대로 나열하면 원년 1월, 원년 11월, 2년 봄(1~3월), 2년 11월, 3년 9월, 3년 겨울(10~12월)이 된다. 원래 2년 1월에 일어난 백가의 처형이 1년 1월의 사건으로 잘못 기록되었음이 밝혀진 상황이다. 그러니 앞서 적은 4개의 기사를 1년씩 미루어서 무령왕 2, 3, 4년에 일어났다고 보면 참 편할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결정적인 오류를 발생시키니, 바로 대(對)고구려 전쟁 기록의 연도 문제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무령왕 원년 11월에 달솔 우영과 군사 5,000명을 보내 고구려의 수곡성을 습격했다고 되어 있다. 〈고구려본기〉에도 이 사건이 똑같이 나오는데, 그 시기가 문자명왕 12년(503년)이다. 또 무령왕 2년 11월에 고구려를 침공하는데, 〈고구려본기〉에는 동일한 사건이 문자명왕 11년(502년)조에 기록되어 있다. 무령왕 초기의 기록을 1년씩 뒤로 미룬다면, 동일한 두 기사가 서로 엇갈리게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 오류를 해결하는 방법은 대단히 간단하며 단순하다. 우선 무령왕 원년이 501년이며 백가의 토벌이 무령왕 2년에 있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여기서 무령왕 원년 11월로 기록된 수곡성 침공을 무령왕 3년 11월의 사건으로 수정하면 그 어떠한 모순도 발생하지 않는다. 《삼국사기》에서 기록한 순서를 기준으로 수곡성 침공 기사의 순서만 변경하면 6개 기사들의 순서를 올바르게 정립할 수 있다. 원문의 "정월 → 11월 → 2년 봄 → 11월 → 3년 9월 → 겨울"이라는 순서가 "2년 정월 →
지금까지 논한 내용을 정리하면 아래 표와 같다. 괄호 안의 숫자는 사건이 발생한 달에 해당한다.
서기 | 《삼국사기》 〈백제본기〉 (원본) | 《삼국사기》 〈백제본기〉 (수정본)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
501 | 동성왕 시해(12) 무령왕 즉위 원년 백가 토벌(1) 수곡성 침공(11) | 동성왕 시해(12) 무령왕 즉위 원년 | |
502 | 기근(봄) 고구려 변경 침공(11) | 백가 토벌(1) 기근(봄) 고구려 변경 침공(11) | 백제 변경 내침(11) |
503 | 말갈 마수책 침공(9) 물이 얼지 않음(겨울) | 말갈 마수책 침공(9) 수곡성 침공(11) 물이 얼지 않음(겨울) | 수곡성 내침(11) |
한편 《일본서기》에는 부레쓰 덴노 4년(502)에 말다왕(동성왕)이 시해되고 무령왕이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46] 501년 12월에 일어난 일을 전해 듣는 과정에서 착오가 발생한 것으로 보이나, 확실하지는 않다.
3.3. 스다하치만 신사 인물화상경
癸未年八月日十大王年男弟王在意柴沙加宮時斯麻念長寿遣開中費直穢人今州利二人等取白上同二百旱作此竟
계미년(443년 또는 503년) 8월 10일(日十)(?) 대왕년(大王年)(?), 남제왕(男弟王)이 오시사카궁(意柴沙加宮)에 있을 때 사마(斯麻)가 장수를 염원하여 카와치노 아타이(開中費直)와 예인(穢人) 금주리(今州利) 2명 등을 보내어 양질의 구리쇠 200한(旱)으로 이 거울을 만들었다.
현전하는 일본 금석문 중 와카야마현 하시모토시 스다하치만 신사(隅田八幡神社) 소재의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가 무령왕일 가능성이 있다는 설이 제기된 바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아예 "사실 무령왕의 남동생이 게이타이 덴노였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대표적인 경우가 아래의 김현구 교수이다. 문면에 등장하는 사마가 무령왕이라는 주장에는 반론이 많지 않지만, 게이타이 덴노가 무령왕의 동생이라는 김현구의 주장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한 편이다. 또한 홍성화의 경우 남제왕(男弟王)을 동성왕, 사마를 무령왕으로 비정하기도 했다. #계미년(443년 또는 503년) 8월 10일(日十)(?) 대왕년(大王年)(?), 남제왕(男弟王)이 오시사카궁(意柴沙加宮)에 있을 때 사마(斯麻)가 장수를 염원하여 카와치노 아타이(開中費直)와 예인(穢人) 금주리(今州利) 2명 등을 보내어 양질의 구리쇠 200한(旱)으로 이 거울을 만들었다.
논쟁의 중심은 '사마(斯麻)'의 표기 방식이다. 이 거울의 제작 연대인 계미년(癸未年)은 60으로 나누어 23이 남는 해이고, 유물의 특징을 고려하면 443년 또는 503년으로 추정된다. 무령왕은 461년생이므로, 사마(斯麻)가 무령왕이라고 주장하려면 이 거울은 503년에 제작되었어야 한다. 이 명문에서는 제작 경위와 관련된 인물로 대왕(大王)과 남제왕(男弟王), 사마(斯麻)가 등장하는데, 전근대 기준에서 일국의 국왕을 아무런 존칭 없이 이름만으로 부르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다. 이 금석문을 새겼을 인물이 당연히 왕족보다 지위가 낮았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47]
대표적으로 무령왕릉 지석에서도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고 하여 중국으로부터 받은 책봉호와 '왕'이라는 칭호를 붙여 쓰고 있다. 쉽게 말해 원래는 '문하심'이라고 써야 하는 것을 격식 다 치우고 쓴 격이다. 만약 이것이 성립하려면 '사마'가 '대왕' 또는 '남제왕'보다 하위 인물이거나, 무령왕을 '사마'라고 기록한 인물이 백제의 국왕 칭호를 신경쓰지 않는 외부 인물이어야만 자연스럽다. 백제가 일본 열도를 정복했다고 하면서 양자가 정치적으로 분가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김운회의 논지를 따르면 정작 백제가 게이타이 덴노의 하위 인사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48]
허나 후술할 권오영 서울대학교 교수가 말했듯이 오호도(男弟)은 게이타이 덴노가 왕위에 오르기 전의 본명이며, 사마(斯麻) 또한 무령왕의 본명이기 때문에 격식을 무시하고 동등한 입장에서 물건을 주고 받았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다만 이 경우 명문이 작성되었을 503년은 무령왕이 이미 왕위에 오른 후이기 때문에, 왕이나 대왕의 칭호가 누락된 까닭은 의문이다.
또한 진짜 무령왕의 친동생이 게이타이 덴노가 맞다면 거울 또한 사사로이 사여한 물건이기 때문에, 대왕의 칭호를 누락하고 격식을 버렸다고 해도 별로 문제는 없다. 4~5세기에 제작된 칠지도 후면에도 "왜왕 진(旨)을 위해 만들었다(爲倭王旨造)"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인물화상경의 문면이 특수한 경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어째서 《일본서기》에서 기록되어 있는 '남대적왕(男大迹王)'이라는 호칭 대신 '부제왕(孚弟王)'이라고 거론하며 다소 무례하게 기록했느냐는 의문점도 있지만, 문면 그대로 판독하면 외교 관례나 칭호에 대한 이의 제기는 부적절하다고 반론할 수 있다. 즉 무령왕과 게이타이 덴노가 사적으로 친하거나 형제 관계였다는 대전제를 깔고 문장을 판독하기 때문에 "청동거울을 주고 받은 인물이 무령왕과 게이타이 덴노가 아니다"라는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다.
덧붙여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청동 거울만 보더라도 '사마'가 누구를 지칭하는 호칭인지는 따져볼 껀덕지도 없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거울의 제작 시기는 503년이므로 게이타이 덴노의 즉위 년도인 506년과 맞지 않는다는 주장도 별로 설득력을 지니지 못한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연대에 크고 작은 오차가 많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게이타이 덴노는 즉위년에 있어 3년 정도의 오차가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유사역사학자로 악명 높은 김운회의 해석을 인용해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고 서술하는 경향이 있지만, 주류 사학자이자 일본사 연구자 김현구 또한 비슷한 추론을 했다는 점에서 인물화상경에서의 '사마'가 무령왕이라는 추론은 재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 권오영 서울대학교 교수도 인물화상경에서 '사마'가 무령왕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이 학자의 경우 김현구 교수처럼 무령왕의 동생이 게이타이 덴노라고 추정하지는 않았다. 최근에는 칠지도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주목받은 홍성화 교수 또한 사마를 무령왕으로 해석했는데, 그의 경우 남제왕(男弟王)을 동성왕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일본서기》에는 부레쓰 덴노가 죽고 후사가 없어서 적당한 사람을 찾다가 아버지가 16대 오진 덴노의 5대손이고, 어머니가 11대 스이닌 덴노의 7대손인 게이타이를 옹립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게이타이 덴노의 아버지의 5대조로 되어 있는 16대 오진 덴노는 제2왕조의 대왕('오오키미')이었고, 어머니의 7대조로 되어 있는 11대 스이닌 덴노는 제1왕조의 대왕이었다. 따라서 일부 학계에서는 게이타이 덴노의 출신이 불분명하므로 그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부모를 이전 두 왕조 대왕들의 자손으로 하는 계보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냈다고 보고 있다.[49] 게다가 게이타이 덴노의 '게이타이'라는 말 자체가 새로이 왕조를 계승했다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무령왕이 '남동생 왕'이라고 칭한 일본 천황이 게이타이 덴노가 틀림없다면 게이타이 덴노야말로 행방을 알 수 없는 곤지의 세 아들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p.190~191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p.190~191
"만약에 이 사마가 정말로 백제의 무령왕이라고 한다면 계체, 등극하기 전의 계체와 백제의 무령왕이 이미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요. 그렇다고 한다면 무령왕의 재위기간 그리고 계체천황의 재위기간 동안에 왜 이렇게 두 인물이 서로 긴밀하게 협조하고 백제와 왜 왕권의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는지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겠습니다."
권오영 서울대 교수
권오영 서울대 교수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왕이 계체(継体) 입니다. 근데 그 계체(継体)는 왕이 되기 전에 일본의 변두리에 작은 세력의 우두머리에 불과했어요. 근데 그 인물이 전체 일본의 왕이 되는 데에는 백제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어요. 그래서 스다하치만 신사에 거울이 모셔져 있는데, 일본 국보입니다. 저기 글씨가 씌여져 있어요. (중략) 이 거울에 나와있는 내용이 한일 학계의 수수께끼에요. 근데 분명한 것은 오호도(男弟)라는 인물은 계체(継体)가 왕이 되기 전 본명이에요. 사마는 무령왕의 본명이고... 그래서 게이타이가 왕이 되기 전에 무령왕과의 관계를 갖는 것이에요.
권오영 서울대 교수, 차이나는 클라스 2020년 6월 방영분 중
결국 이를 무령왕과 관련지으려면 이 유물이 백제와 정치적으로 완전히 구분된 일본 열도 내 정권의 유물임을 인정해야 하며, 이것이 고고학과 문헌을 통해 드러나는 국제 정세와도 들어맞는다는 주장이다.권오영 서울대 교수, 차이나는 클라스 2020년 6월 방영분 중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 명문에 의문점이 남지 않게 되는 것도 아니다. '오호도노 오키미(男弟王)'가 오시사카궁(意柴沙加宮)에 있었다고 해석하면 《일본서기》의 기록과 모순이 생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게이타이 덴노는 부레쓰 덴노가 폭정을 일삼던 기나이 지역이 아닌 에치젠에 머물고 있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일본서기》의 기년 오차를 근거로 503년에 이미 게이타이 덴노가 즉위했을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하지만, 통치자로 보이는 대왕과 게이타이 덴노여야 할 '오호도노 오키미'가 일단 다르게 표기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기년 조정을 하더라도 《일본서기》의 기술과 완전히 어긋난다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오시사카노오나카츠히메(忍坂大中姬)'라는 황후가 있었던 인교 덴노 시기를 《송서》 〈왜국전〉에 맞추어 443년 전후로 가정하고, 443년에 이 거울이 제작되었으며 사마의 혈통은 불명확하나 왜계 신료였을 것이라 보는 의견도 있으며[50] 이것이 503년설에 못지 않게 유력한 가설이다.[51] 게다가 아무리 외국인이라고 해도, 적성국도 아닌 동맹국의 왕을 존칭도 없이 그냥 쓰는 것은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다. 《일본서기》에서도 백제 부여씨 왕족이나 귀족들은 거의 꼬박꼬박 관등이나 존칭을 붙여준다. 한국에서는 무령왕과 어떻게든 관련짓는 것이 잘 팔리기 때문에 503년설만 TV와 언론에 노출되는 경향이 있으나, 443년설을 취할 경우 무령왕은 태어나기도 전이므로 당연히 이 명문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나 왜의 신료가 왜의 왕자인 오진 덴노의 손자를 위해 바친 물건이라는 설을 택하더라도, 백제에서 건너간 물건이 아니라는 주장을 할 때 논거로 사용한 칭호나 관례가 깡그리 누락되었다는 점을 똑같이 적용해서 반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남동생[弟]'은 다소 무례한 칭호가 될 수 있는데, 왜국의 '사마'라고 불리는 신료가 443년에 당대에 통용되던 호칭을 놔두고 구태여 '동생'이라고 부르며 왜국의 왕자에게 헌상했다는 것은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다. 게다가 와카야마현은 고대부터 백제와의 교류가 활발했던 지역으로, 무령왕릉 관에 사용된 목재가 이 와카야마현에서 자생하는 금송으로 밝혀졌다는 점을 근거로 무령왕이 사여했다는 설이 설득력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
덧붙여 이 명문에서 '남제왕(男弟王)'의 정확한 판독이 사실 '부제왕(孚弟王)'이라는 설, 일반적으로는 '10일'로 판독하는 '일십(日十)'과 '대왕(大王)'을 이어붙여 '일십대왕(日十大王)' 또는 '왈십대왕(曰十大王)'으로 해석하여 특정한 덴노의 이름과 맞추는 설이나 '일하(日下)'를 '초(草)'의 간자로 보아 5세기 중반의 인물인 오쿠사카 황자(大草香 皇子)에 대응시키는 설 등 여러 가설이 대립하여 아직 이 명문에 대해서는 일관된 의견이 없는 상태이다.
요약하자면 해당 인물화상경은 무령왕과 왜국 간의 외교와 관계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사료의 존재와 상관없이 무령왕이 왜국과의 동맹 관계를 이용해서 이득을 취했던 기민한 인물이었음이 《일본서기》를 통해 분명히 확인되므로, 만약 503년 무령왕설을 취한다면 이를 설명할 때 쓸 수 있는 자료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진짜 왜국의 신료가 제조한 청동거울이라면, 일본에서 현재까지 발견된 금석문 가운데 이나라야마 철검명[52]과 함께 일본이 자체적으로 만든 제일 오래된 유물 중 하나로서 일본에서도 그 무렵부터 한자를 대대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일단 일본 학계에서도 화상경은 백제의 무령왕이 보낸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유력한 학설이지만, 남제왕(男弟王)에 대한 표현은 의견이 분분하다. 대체적으로는 무령왕과 게이타이 덴노의 관계가 청동거울을 주고 받을 정도로 돈독했다는 정도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편이다. #
3.4. 왜왕 무(武)와의 유사성?
왜5왕중 한 명인 무(武)와의 유사성을 근거로 재야학계에서 같은 인물이라고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제가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으나 이리와 승냥이에게 길이 막히니, 비록 대대로 중국의 교화를 받았으나 번병 신하의 도리를 다할 수 없었습니다. (중략) 저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선대에는 우의를 매우 돈독히 하였는데, 그들의 선조인 쇠(釗)가 경솔하게 우호 관계를 깨뜨리고 직접 군사를 거느려 우리 국경을 침범하여 왔습니다. 우리 선조 수(須)가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처럼 달려가 기회를 타서 공격하여, 화살과 돌이 오간 지 잠깐만에 쇠의 머리를 베어 높이 매달았으니, 그 이후부터는 감히 남쪽을 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풍씨(馮氏)의 운수가 다하여 유민들이 고구려로 도망해 온 이후로 추악한 무리가 차츰 세력을 쌓아갔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우리를 무시하고 침략하게 되었습니다. 원한을 맺고 전화(戰禍)가 이어진 지 30여 년이 되었으니, 재정은 탕진되고 힘은 고갈되어 나라가 점점 쇠약해지고 있습니다. 만일 폐하의 인자한 생각이 먼 곳까지 빠짐없이 미친다면, 속히 장수를 보내 우리 나라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해준다면 저의 딸을 보내 후궁을 청소하게 하고, 자식과 아우를 보내 마굿간에서 말을 기르게 하겠으며, 한 치의 땅이나 한 명의 백성이라도 감히 저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연(璉)은 죄를 지어 나라가 스스로 남에게 잡아 먹히게 되었고, 대신과 호족들을 살육하기를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의 죄악은 넘쳐나서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그들이 멸망할 시기로써 폐하의 힘을 빌릴 때입니다. 또한 풍족(馮族)의 군사와 군마에게는 보금자리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고 낙랑 등 여러 군(郡)은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니, 황제의 위엄이 한번 움직여 토벌을 행한다면 전투가 벌어질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비록 명민하지는 않으나 힘을 다하여 우리 군사를 거느리고 위풍을 받들어 호응할 것입니다.
또한 고구려는 의롭지 못하여 반역하고 간계를 꾸미는 일이 많습니다. 겉으로는 외효(隗囂)[53]처럼 변방의 나라를 자칭하며 겸손하게 굴면서도, 속으로는 흉악한 짐승의 저돌적인 행위를 품고 있습니다. 남쪽으로는 유씨(劉氏)와 내통하기도 하고, 북쪽으로는 연연(蠕蠕)과 맹약하기도 하여 서로 강하게 결탁하면서 폐하의 정책을 배반하려 하고 있습니다.
옛날 요 임금은 지극한 성인이었으나 단수(丹水)에서 전투를 하여 묘만(苗蠻)에 벌을 주었으며, 맹상군(孟嘗君)은 어질다고 소문이 났으나 길가에서 남을 꾸짖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한 방울씩 새어나오는 물이라도 일찍 막아야 하는 것이니, 지금 만약 고구려를 치지 않는다면 앞으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 경진년 이후 우리 나라 서쪽 경계의 소석산 북쪽 바다에서 10여 구의 시체를 보았고, 동시에 옷과 기물, 안장, 굴레 등을 얻었는데, 이를 살펴보니 고구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후에 들으니 이는 바로 황제의 사신이 우리 나라로 오다가 뱀처럼 흉악한 것들이 길을 막았기에 바다에 빠진 것이라 합니다. 비록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매우 분하게 생각하였습니다.
472년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 中
무령왕의 부친인 개로왕은 고구려가 무도하며, 실제로는 남조 및 북조와 동시에 통교하며 북조를 능멸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도림에게 전해들은 말을 이야기하며 고구려의 백성들이 핍박받고 있다고 전하였다. 그런데 6년 후에 왜왕 무(武)에 의해 비슷한 서신이 남조에 보내졌다.그런데 풍씨(馮氏)의 운수가 다하여 유민들이 고구려로 도망해 온 이후로 추악한 무리가 차츰 세력을 쌓아갔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우리를 무시하고 침략하게 되었습니다. 원한을 맺고 전화(戰禍)가 이어진 지 30여 년이 되었으니, 재정은 탕진되고 힘은 고갈되어 나라가 점점 쇠약해지고 있습니다. 만일 폐하의 인자한 생각이 먼 곳까지 빠짐없이 미친다면, 속히 장수를 보내 우리 나라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해준다면 저의 딸을 보내 후궁을 청소하게 하고, 자식과 아우를 보내 마굿간에서 말을 기르게 하겠으며, 한 치의 땅이나 한 명의 백성이라도 감히 저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연(璉)은 죄를 지어 나라가 스스로 남에게 잡아 먹히게 되었고, 대신과 호족들을 살육하기를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의 죄악은 넘쳐나서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그들이 멸망할 시기로써 폐하의 힘을 빌릴 때입니다. 또한 풍족(馮族)의 군사와 군마에게는 보금자리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고 낙랑 등 여러 군(郡)은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니, 황제의 위엄이 한번 움직여 토벌을 행한다면 전투가 벌어질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비록 명민하지는 않으나 힘을 다하여 우리 군사를 거느리고 위풍을 받들어 호응할 것입니다.
또한 고구려는 의롭지 못하여 반역하고 간계를 꾸미는 일이 많습니다. 겉으로는 외효(隗囂)[53]처럼 변방의 나라를 자칭하며 겸손하게 굴면서도, 속으로는 흉악한 짐승의 저돌적인 행위를 품고 있습니다. 남쪽으로는 유씨(劉氏)와 내통하기도 하고, 북쪽으로는 연연(蠕蠕)과 맹약하기도 하여 서로 강하게 결탁하면서 폐하의 정책을 배반하려 하고 있습니다.
옛날 요 임금은 지극한 성인이었으나 단수(丹水)에서 전투를 하여 묘만(苗蠻)에 벌을 주었으며, 맹상군(孟嘗君)은 어질다고 소문이 났으나 길가에서 남을 꾸짖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한 방울씩 새어나오는 물이라도 일찍 막아야 하는 것이니, 지금 만약 고구려를 치지 않는다면 앞으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 경진년 이후 우리 나라 서쪽 경계의 소석산 북쪽 바다에서 10여 구의 시체를 보았고, 동시에 옷과 기물, 안장, 굴레 등을 얻었는데, 이를 살펴보니 고구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후에 들으니 이는 바로 황제의 사신이 우리 나라로 오다가 뱀처럼 흉악한 것들이 길을 막았기에 바다에 빠진 것이라 합니다. 비록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매우 분하게 생각하였습니다.
472년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 中
봉해진 나라가 먼 곳에 치우쳐 있으며 바깥에 번국을 이루고 있는데, 과거의 조상(祖禰)[54]으로부터 스스로 갑옷과 투구를 걸치고 산천을 누비느라 편안히 거처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동으로는 모인(毛人) 55국을 정벌하였고, 서로는 중이(衆夷) 66국을 복종시켰으며, 바다 건너 해북(海北) 95국을 평정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왕도는 화락하고 편안하며, 땅을 넓히고 왕기를 아득히 크게 하였을 뿐 아니라 여러 대에 걸쳐 조종(朝宗)하여 해마다 어긋나는 일이 없었습니다.
신이 비록 아주 어리석으나 조상의 뒤를 이어 다스리는 곳을 이끌고 중국의 조정을 존중하고자 하였습니다. 가는 길이 백제를 거쳐야 하므로 큰 배를 준비하였는데, 고구려가 무도하여 (우리를) 집어삼키려 하고, 변방[55]의 속한 곳을 노략질하며 살육을 그치지 않으니, 매번 지체되어 좋은 바람을 놓치게 됩니다. 비록 길을 나서지만 혹은 통하고 혹은 통하지 못합니다. 신의 돌아가신 아버지 제(濟)가 실로 원수가 천로(天路)를 막는 것에 분노하니, 활을 쏘는 병사 100만이 의로운 소리에 감격하여 바야흐로 크게 일어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아버지와 형을 잃으니[56], 수성(垂成)의 공을 이루고자 하였으나 마지막 한 삼태기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상중에 있어 병사를 움직이지 못하고 쉬고 있었으므로 이기지 못하였습니다.[57]
지금에 이르러 갑옷과 무기를 잘 갖추어 부형의 뜻을 펼치고자 하니, 의롭고 용맹스러운 병사들이 문무로 공을 이루어, 번쩍이는 칼날이 눈앞에 닥쳐도 또한 눈을 딴 곳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만약 황제의 세상을 뒤덮는 덕으로써 이 강적을 무찔러 온갖 어려움을 극복한다면, 이전의 공을 바꾸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삼가 스스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가수(假授)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모두 각각 (적당한 관작을) 가수하여 충절을 권유하였습니다.
478년 왜왕 무(武)가 유송에 보낸 국서 中
노중국 교수는 개로왕이 보낸 서신과 왜왕 무(武)가 보낸 서신을 작성한 식자층이 같은 집단으로, 개로왕이 장수왕에게 전사하고 왜국으로 망명한 이들에 의해 비슷한 내용의 서신이 써졌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서신의 내용은 수많은 중국의 고전을 인용하고 있어서, 당대 일본에서 수용되고 있는 유교의 수준으로는 구현하기 어려운 문장이라고 말했다.[58]신이 비록 아주 어리석으나 조상의 뒤를 이어 다스리는 곳을 이끌고 중국의 조정을 존중하고자 하였습니다. 가는 길이 백제를 거쳐야 하므로 큰 배를 준비하였는데, 고구려가 무도하여 (우리를) 집어삼키려 하고, 변방[55]의 속한 곳을 노략질하며 살육을 그치지 않으니, 매번 지체되어 좋은 바람을 놓치게 됩니다. 비록 길을 나서지만 혹은 통하고 혹은 통하지 못합니다. 신의 돌아가신 아버지 제(濟)가 실로 원수가 천로(天路)를 막는 것에 분노하니, 활을 쏘는 병사 100만이 의로운 소리에 감격하여 바야흐로 크게 일어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아버지와 형을 잃으니[56], 수성(垂成)의 공을 이루고자 하였으나 마지막 한 삼태기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상중에 있어 병사를 움직이지 못하고 쉬고 있었으므로 이기지 못하였습니다.[57]
지금에 이르러 갑옷과 무기를 잘 갖추어 부형의 뜻을 펼치고자 하니, 의롭고 용맹스러운 병사들이 문무로 공을 이루어, 번쩍이는 칼날이 눈앞에 닥쳐도 또한 눈을 딴 곳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만약 황제의 세상을 뒤덮는 덕으로써 이 강적을 무찔러 온갖 어려움을 극복한다면, 이전의 공을 바꾸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삼가 스스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가수(假授)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모두 각각 (적당한 관작을) 가수하여 충절을 권유하였습니다.
478년 왜왕 무(武)가 유송에 보낸 국서 中
여담으로 백제 대성팔족 중 목씨가 이 시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된다. 목씨는 개로왕이 아차산에 끌려가 참수당할 때 문주왕을 피신시키고 도왜하여 지원군을 요청한 집단으로 추정되는데 실제로도 목씨는 가야 원정을 통해 남방 일대에 근거지를 갖고 영향력을 행사하던 집단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일본과 통하는 대목에서 목씨의 영향이 없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묘하게도 왜왕 무(武)와 백제의 무령왕은 행보가 비슷하다. 그래서 재야학계에서는 무령왕과 왜왕 무(武)가 동일 인물이었을 것이라 추정하기도 하며, 바로 앞서 선술했듯이 무령왕의 부왕인 개로왕이 작성한 국서는 왜왕 무(武)가 작성한 상표문과 흡사한 점이 많다. 백제가 아닌 멀리 바다 건너 있는 왜국이 고구려에게 뜬금없이 저렇게 큰 적개심을 드러내는 이유도 납득시킬 수 있는 가설이다.
또한 무령왕은 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현재의 일본 사가현에서 태어났다. 《일본서기》 유랴쿠 덴노 20년(475년) 기록에는 개로왕 때 고구려가 공격해와 국왕과 대후 및 왕자가 죽었다고 했으니, 왜왕 무(武)가 언급한 "부형이 한꺼번에 죽어 상중에 있다"라는 기록과 일치한다. 무령왕 본인이 죽은 뒤에도 3년상이 치러졌으니, 무령왕과 무(武)가 동일 인물이라면 그도 부형을 위해서 3년상을 치렀을 것이다.
그러나 무령왕이 성인도 되기 전이었던 470년대 후반에 왜국의 왕위에 올랐다는 정황은 현전하는 그 어떠한 기록에서도 나오지 않으며 왜왕 무와의 유사성이라 언급되는 내용도 애매모호한 부분이 많으므로, 이러한 자의적 해석은 주류 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보통은 왜왕 무(武)가 유랴쿠 덴노의 이름인 와카타케루(幼武)를 축약 표기한 것이라 여겨 유랴쿠 덴노와 동일시하는 가설이 널리 지지받는다.
3.5. 무령왕의 생부는 누구인가?
《일본서기》에 의하면 부여곤지는 도왜하기 전에 개로왕에게 그의 첩을 달라고 요구하였는데, 당시 개로왕의 첩은 출산에 임박한 만삭 상태였기 때문에 개로왕은 "가는 길에 첩이 출산하면 어디에 있든지 배 한 척에 실어 백제로 돌려보내라"고 명하였다. 굳이 개로왕에게 만삭의 임산부를 달라고 요구해놓고서는, 출산 후 부인을 돌려달라는 개로왕의 명령을 받든 곤지의 부자연스러운 행동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실제로 일본서기에는 부여곤지가 개로왕에게 도왜하라고 명령을 받은 시기는 461년 4월이고, 6월 1일에 무령왕이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일단 이 시기에 부여곤지가 귀족들과 마찰을 빚고 있긴 했어도 백제 조정에서 상당한 실력을 쌓고 있었기에, 그가 개로왕 요구대로 순순히 도왜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큰 손해였음이 지적된다. 곤지의 정치적 입지와 활동 영역을 넓혀놓았던 장본인은 다름아닌 개로왕이었으므로, 능력만 이용해먹다가 귀족들과 갈등 좀 생겼다고 뒤도 제대로 안 봐주고 다른 나라로 보내버리는 이러한 행태는 당사자 입장에서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만삭에 출산을 앞둔 개로왕의 첩을 달라고 요청한 것은 곤지 본인이 왜국에 가기 싫다는 강력한 거부 의사를 밝힌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59] 그런데 부여곤지를 보내버리고자 하는 개로왕의 의지가 워낙 강한 탓에 곤지의 이 제안을 넙죽 받아버렸고, 곤지는 별 수 없이 가기 싫은 왜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무령왕이 정치적 목적으로 자기가 개로왕의 아들이라고 거짓말을 했다는 학설이 한국에서 대두되고 있으나, 곤지의 위상이 백제 왕실에서 생각보다 꽤 높은 편이었다는 것도 밝혀졌기 때문에[60] 무령왕이 굳이 본인의 출생에 대해 거짓말하고 다닐 이유가 없었다는 이의도 제기된 바 있다. 개로왕 때부터 활동하던 신하 및 귀족들이 무령왕 즉위 당시까지 대다수 살아있었음에도 그 거짓말에 대해 반발이 없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다. 다만 동성왕의 모친이 무령왕의 모친보다 신분이 높았을 개연성은 한일 학계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고 있기에[61], 무령왕의 친부가 곤지일 경우 무령왕의 왕위 계승성에 다소 흠집이 커지는 상황은 여전하긴 하다.
한편 다른 정황도 있다. 무령왕의 전임자인 동성왕은 고구려와 맞서 한강 유역을 회복하기보다는 본격적으로 남진 정책을 펼쳐, 전남 강진 일대와 제주도까지 영향력을 넓히려고 시도해왔다. 이에 한강 유역을 기반으로 한 호족[62]들이 불만을 품어 불화를 빚었던 호족들에게 암살당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동성왕을 암살한 백가가 무령왕이 즉위하자마자 반란을 일으켰고, 무령왕은 한강 유역을 본거지로 삼는 해씨(解氏) 귀족인 해명을 이용해 백가를 진압하고 제거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그럴듯한 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삼국사기》 501년 1월[63] 기사에서 "한산에서 두 호랑이가 싸웠다"라고 한 대목은 정말 의미심장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친부로 추정되는 부여곤지도 호족 출신 권신에게 암살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즉위한 무령왕은 곤지의 아들 동성왕과는 차별성을 강조해야 했고, 한성백제의 마지막을 장식한 개로왕의 혈통이라는 사실을 이용했을 수 있다는 해석도 있다. 《일본서기》 476년 겨울 기사에서도 개로왕이 참수당할 때 국왕과 태후, 왕자 등이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고 전하고 있으므로, 무령왕이 개로왕의 실제 아들일 리가 없다는 주장이다.
상술한 《일본서기》의 기록은 당시 한성에 있었던 개로왕의 가족들을 말하는 것이므로, 이것만을 가지고 무령왕이 개로왕의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는 반론도 있다. 그렇다 할지라도 무령왕이 정말 개로왕의 아들이 맞는데 한성에 살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차기 왕위 계승 순위에서 많이 벗어났다는 결정적인 증거로 작용하는 셈이다. 물론 이러한 정황들만으로 무령왕이 부여곤지의 아들이라 확답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당장 신라의 소지 마립간마저도 자기 아들을 임신한 여자를 데려오는 데 대단한 저항을 겪어야 했었던 사례가 있다.[64]
개로왕이 피살당했을 때 훗날 무령왕이 되는 부여사마의 나이는 15살로 당대에는 꽤나 장성한 나이였지만, 19살 때까지 문주왕~삼근왕 당시의 어수선한 정치적 상황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 와중에도 신변에 별 탈이 없었다는 것은 모친의 출신이 워낙 미천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반대로 해석하면 부여곤지의 친자였기 때문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전근대에 성인으로 받아들여진 15살의 나이에도 《일본서기》에서 전하는 개로왕과 그의 처자식들이 당한 참화[65]를 피할 수 있었던 점은 부여사마가 개로왕의 친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일본 학계에서는 무령왕이 개로왕의 친자라는 설이 우세하며, 한국 학계에서는 곤지의 아들이라는 설에 무게를 싣는다. 앞서 살펴보았듯 양쪽 모두 일리 있는 주장이기는 하다.
3.6. 일본어 사마(様)의 어원?
무령왕의 휘인 사마(斯麻)가 일본어의 존칭 사마(様)의 유래라는 설이 있으나, 근거는 빈약한 편이다. 이러한 설을 제기하는 측에서는 역사적으로 극존칭이었던 단어가 비칭화(卑稱化)된 경우가 많으며[66] 《일본서기》에서 무령왕이 태어난 곳이 니리무세마(主嶋)라고 하여 현대 한국어의 존칭접미사 님으로 이어지는 '니리무'와 연관짓고 있으므로 무령왕의 휘와 일본어 사마(様)의 연원이 같다고 주장한다.그러나 한자로도 뜻이 표기되어 있듯이 사마(斯麻)는 애당초 고대 한국어로 섬[嶋]을 가리키는 일반명사였으며, 오히려 일본어 시마(島)와의 연관성이 주목되고 있는 어휘이다. 게다가 현대 일본어 사마(様)의 경우 지시어인 '사'와 접미어인 '마'가 합쳐진 것에서 유래됐다고 이미 확증되어 있는 상태이다. 즉 '그쪽'을 완곡하게 이르다 보니 탄생한 표현인 것이다.[67] 사마(斯麻)의 당시 중고한어 발음인 /*siᴇ mˠa/와는 애초부터 모음이 다르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아울러 백제어 '니리무'에서 유래한 '님'의 경우 군주의 휘 같은 고유명사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며 처음부터 대명사 혹은 존칭접미사로 사용된 단어이다.[68] 위의 반론들을 종합하자면 무령왕의 휘인 사마(斯麻)는 당시 백제어로 섬을 뜻하는 '세마'에서 유래하였으며, 별개의 어원을 지니는 일본어의 존칭접미사 사마(様)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둘을 연관짓는 가설은 문법상으로도 기록상으로도 근거가 매우 부실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앞서 소개한 논란들은 주류 및 재야학계에서 논쟁거리로서 어느 정도 거론되는 반면, 이 가설만큼은 다루는 논문이 거의 없다시피하다.
4. 평가
백제의 중흥기를 이끈 명군이자 성군으로 평가받는다.[69]현재 대한민국 초중등교육 한국사에서는 22담로제 시행, 무령왕릉 정도가 언급되고 주로 성왕의 백제 중흥기 내용이 집중되지만 각종 사료를 교차검증한다면 이미 무령왕 시절 당시부터 백제가 웅진 시기의 혼란을 끝내고 상당히 그 힘을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혼란기를 끝낸 후 마한을 완전히 정복했으며, 문자명왕 말엽부터 쇠퇴의 기운을 보이던 고구려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70]에 나서 국위를 회복시켰다.
《동국통감》의 평가는 의리는 얻었으나, 백성들을 아들과 같이 여기는 도리를 잃고 전쟁을 일으킨 점은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무령(武寧)은 작가(芍加)를 베어 토적(討賊)의 의리는 얻었으나, 그러나 백성을 아들과 같이 여기는 도리를 잃어 능히 위로하여 오게 해서 안집(安集)시키지 못하고 적국(敵國)에 백성을 몰아넣게 하였으니, 전사(前史)에 ‘인자하고 관후(寬厚)하다.’고 일컬은 것은 어찌된 것입니까?"
5. 여담
- 한국사 관련 시험에서 악랄하게 출제된다면, '무열왕(통일신라 김춘추)'과 이름이 비슷하다는 사유로 혼선을 준다든지(ex. 무열왕릉), 그의 업적 중 하나인 '22담로 설치'를 두고 '(고려 성종 때) 최승로의 시무 28조'와 엮어 '최승로의 22담로'로 말장난을 하기도 한다. 고전적으로 변별력을 뒀던 부분이라 이제 수험생들도 잘 낚이지 않는 편.
- 《삼국사기》에 따르면 키가 8척이고 눈매가 그림과 같았으며 인망이 두터웠다고 한다. #[71] 키가 8척이면 한척(漢尺)으로도 190cm라는 뜻인데, 무령왕릉에서는 무령왕의 유해로 추정되는 뼛조각만이 몇 개 출토되어서 사실인지 확인할 수 없다. #
6. 대중매체에서
- 2013년작 MBC 드라마 〈제왕의 딸 수백향〉에서는 배우 이재룡[72]이 연기했다. 주인공 수백향의 아버지로 등장했는데 일본 황녀를 무령왕의 딸이라고 어림짐작한 역사 왜곡에 문제가 있었지만 드라마 자체는 재미가 있고 배우가 예상 외로 카리스마있는 연기를 잘 해내서 호평을 받았다.
7.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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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
{{{#!folding [ 열전(列傳) ]
}}} ||《삼국사기》 〈무령왕 본기〉
一年冬十一月 무령왕이 즉위하다
一年[73]春一月 백가가 가림성에서 반란을 일으키다
一年[74]冬十一月 달솔 우영을 보내 고구려의 수곡성을 공격하다
二年 백성들이 굶주리고 전염병이 일어나다
二年冬十一月 고구려의 변경을 공격하다
三年秋九月 말갈이 침입하여 마수책을 소각하다
三年 겨울에 물이 얼지 않다
六年 봄에 전염병이 유행하다
六年三月 봄에 비가 내리지 않아 백성이 굶주려 구제에 나서다
六年秋七月 말갈이 침입하여 고목성 함락하다
七年夏五月 장령성을 축조하여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다
七年冬十月 고구려와 말갈이 연대하여 침입하다
十年春一月 제방을 튼튼히 하고 농사를 짓도록 권장하다
十二年夏四月 양나라에 조공하다
十二年秋九月 고구려가 가불성을 습격하여 함락시키다
十六年春三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二十一年夏五月 홍수가 일어나다
二十一年秋八月 누리 떼가 곡식을 해쳐 백성들이 굶주리다
二十一年冬十一月 양에 사절을 파견하여 조공하다
二十一年冬十二月 양 고조가 조서를 보내 책명하다
二十二年秋九月 호산 벌판에서 사냥하다
二十二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다
二十三年春二月 한수 이북의 백성을 징발하여 쌍현성을 쌓다
二十三年春三月 한성에서 돌아오다
二十三年夏五月 무령왕이 죽다
백제 후기의 군주답게 초기 군주들에 비하면 기록이 많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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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문사 | 부여문선 | 부여덕장 | 부여사 | 부여창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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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례] 실재 혈통 기준 세로선(│) 부자, 부녀, 사위관계 가로선(─) 형제, 자매관계 | }}}}}}}}} |
[1] 복식은 《구당서》 〈동이열전〉에서 "백제의 왕은 소매가 큰 자주색 도포에 푸른 바지를 입고, 검은 비단관에 금꽃으로 장식하며, 흰 가죽띠를 두르고 까만 가죽신을 신는다"고 한 기록을 참고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금제 관식과 금귀걸이, 금은제 허리띠 꾸미개 등의 유물도 반영했다. 외모는 "키가 8척이고 눈매가 그림과 같았으며 인자하고 너그러웠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참고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비교적 최근인 2018년에 그려진 영정이다 보니 다른 표준영정에 비해 복식 고증이 잘 된 편이다. 비슷한 사례로는 삼국시대 찰갑과 환두대도를 준수하게 구현한 이사부의 표준영정이 있다.[2] 461년 음력 6월 1일은 양력 6월 25일(율리우스력 6월 24일)이며, 462년 음력 6월 1일은 양력 7월 14일(율리우스력 7월 13일)이다.[3] 461년 음력 6월 1일은 《일본서기》에 기록된 생년월일이다. # 무령왕릉 지석에 기록된 향년(62세)을 일반적인 세는나이로 가정하면 실제 생년은 462년이 되어 1년의 오차가 생기며, 연 나이로 가정하면 《일본서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A] 음력 5월 7일, 율리우스력 6월 5일[5]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는 523년 5월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으며, 정확한 날짜는 무령왕릉 지석에 나온다. 무령왕은 고려 이전 한국사의 군주들 중 출생년도 및 출생일과 사망일이 모두 정확히 알려진 유일한 왕이다.[6] 음력 8월 12일, 율리우스력 9월 14일[A] [8] 무령왕릉 지석 및 《일본서기》의 기록.[9] 《삼국사기》.[10] 《양서》.[11] 《일본서기》. 사마(斯麻)의 중고한어 발음인 /*siᴇ mˠa/에 보다 가까운 표기이기도 하다.[12] 《삼국사기》에 의하면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부여곤지의 손자에 해당하나, 《일본서기》에 의하면 무령왕은 개로왕의 아들로서 동성왕의 사촌이거나 부여곤지의 아들로서 동성왕의 이복형에 해당한다. 무령왕릉 지석의 발굴로 무령왕이 동성왕의 사촌인 삼근왕보다 나이가 많았다는 점이 드러나면서, 적어도 《삼국사기》의 가계 기록이 틀렸음은 확인되었다.[13]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14] 동생 부여모대[15] 《일본서기》의 기록으로, 《삼국사기》에는 태자가 되었다는 기록이 없다.[16] 《일본서기》. 아버지인 무령왕보다 먼저 죽어 즉위하지 못했다.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는 것 때문에 헤이안 시대를 연 간무 덴노의 어머니 타카노노 니이가사의 조상인 순타태자와 동일인물로 추정된다. 순타태자도 무령왕의 아들이기 때문이다.[17] 《삼국사기》에 신장이 8척이라 나온다. 다른 각주에도 서술하지만 현재의 척은 일본이 개항 이후 피트를 척으로 번역한 것이 넘어온 것이다. 고대사의 1척은 거의 후한의 1척(한척)인 23.7cm를 기준으로 한 것.[18] 무령왕릉 지석에서 무령왕의 본명을 그대로 사용하여 적은 왕호이다. 《일본서기》 부레쓰 덴노 4년(502년) 기사에서도 무령왕의 휘를 사마왕(斯麻王)이라고 하였다.[19] 원문에서는 '군부(君婦)'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20] 고대~중세 일본의 영제국(令制國)이었던 츠쿠시국(筑紫國)을 말하며, 현대의 후쿠오카현에도 그 지명의 흔적으로 치쿠시노시가 남아있다. 츠쿠시국은 해안까지 포괄하는 넓은 행정구역이었던 반면, 현대의 치쿠시노시는 내륙에만 걸쳐있다.[21] 현 사가현 카카라섬(加唐島). 한자 표기만 다르고 이름은 그대로이다. 원문에는 카카라노시마라 되어 있는데, 가운데의 노는 명사의 일부가 아니라 그냥 조사이다.[22] '키시'는 백제의 왕호로 잘 알려진 건길지의 길지(吉支)를 음차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세 한국어로 된 《광주천자문》에서도 임금 왕(王)의 훈을 '긔ᄌᆞ'라고 달았기 때문에, 해당 단어는 기자와의 연관성이 주목되기도 한다.[23] 부여곤지의 아들이며 동성왕의 이복형이라는 것은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신찬》의 기록이며, 개로왕의 아들이자 동성왕의 사촌이라는 전승은 《일본서기》의 다른 권에 실려 있다.[24] 일본서기도 사건이 있었던 당대보다 한참 후대에 편찬된 것이기 때문에 그때도 이미 전승이나 기록을 제대로 검증할 수가 없었다.[25] 이 과정에서 동성왕을 죽인 것은 잘못임을 알지만 그의 비행들을 차마 눈 뜨고 봐줄 수가 없었다고 해명했으나, 무령왕은 무시하고 그대로 처형하라는 명을 내렸다.[26] 한강 유역을 본거지로 하는 부여 출신의 귀족 세력이다.[27]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501년 1월 기사에서 "남산의 두 호랑이가 싸웠다"라고 한 기록이 동성왕과 무령왕 세력 간의 갈등과 정변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28] 모두 해씨를 비롯한 남래 귀족 세력과는 대척점에 있어, 웅진 일대를 본거지로 두는 신진 귀족들이었다.[29] 현재 북한 황해북도 신계군 일대.[30] 520년대에 제작된 양직공도 원본에서는 백제의 부용국들 중 하나로 침미다례로 추정되는 지미(止迷)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무령왕 대까지는 구 마한 세력이 아직 완전히 편입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31] 사타는 지금의 전라남도 순천, 모루는 광양, 그리고 상다리와 하다리의 경우 이들과 인접한 여수로 비정하는 게 학계의 일반적인 해석이다.[32] 《일본서기》 원문은 '백제가 일본한테 임나국의 상다리·하다리·사타·모루의 4현을 달라고 청했다'는 것인데, 이는 백제가 반파국의 세력권이었던 네 곳을 빼앗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고고학적으로도 5세기 호남 동부에서는 고령 대가야계 토기가 출토되고 있어 한동안 가야 세력권이었던 것이 확인되고 있다.[33] 기문은 이설이 다양하나 보통 전라북도 동부로 추정되고 있고 대사는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이다.[34] 《삼국사기》에도 기록된 이 설화에서는 무령왕 시기의 백제가 지금의 강화도인 혈성과 경기도 고양시인 개백현까지 태수를 두고 직접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35] 왕족을 지방에 보내 지역 통치권을 맡기는 것은 잘못하면 엄청난 독이 된다. 서진이 사마씨 황족을 봉작했다가 팔왕의 난으로 나라가 망한 사례만 보아도 알 수 있다.[36] 원본 그림이 전해지는 것은 아니며, 문서에 첨부된 이미지는 북송 대인 1077년경 모사된 남경박물관 소장본이다.[37] 내물 마립간 시절인 381년에 사신 위두를 전진에 파견한 적이 있기는 하나, 이 또한 고구려 사신단의 도움을 받은 것일 가능성이 높다.[38] 이는 양직공도의 실제 표기인 상사문(上巳文)을 오기로 판단하고 《일본서기》에 기록된 기문(己汶)에 맞추어 교감한 것인데, 이덕일 등 재야학계에서는 이 교감 작업을 진행한 국사편찬위원회가 식민사관에 찌들었다며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660년 백제 멸망 당시 사문현(巳汶縣)이라는 곳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본래 금물(今勿)이라고도 불렸다고 하므로 자음의 대응을 고려하면 기문현(己汶縣)으로 교감되어 《일본서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또한 관련 기록으로 가야 출신 음악가 우륵이 가야의 지명에서 이름을 본떠 작곡한 12곡 중 상기물(上奇物)과 하기물(下奇物)이 있으며, 중국 사서 《한원》에서도 백제의 남부에 섬진강으로 추정되는 기문하(基汶河)라는 강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기문'은 실제로 존재하는 지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39] 지미는 전라남도 영산강 유역, 마련은 전남 광양 혹은 장흥 일대, 상기문은 앞서 513년 백제가 병합한 전남 남원 및 전북 임실 일대, 하침라는 제주도 또는 전남 강진 일대로 추정된다. 전부 호남 지역에 위치한 지명이다.[40] 특히 5번째는 약 130년 후에 백제를 멸망시킨 외국이다(...).[41] 순타태자와 동일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의 후손인 타카노노 니이가사는 헤이안 시대를 개막시킨 간무 덴노의 모후였다.[42] 재위 중반에 웅진성에서 사비성으로 천도.[43] 1971년, 다른 무덤에선 오랜 세월 이어진 도굴을 전혀 안 당하고 발굴되어 무덤을 처음 열었을 때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고 한다. 무덤이 통째로 묻혔다가 배수로 공사 중에 발굴된 것이 이유인 듯하다.[44] 사냥터에서 백가가 보낸 자객에게 습격당했던 시기인 11월보다는 좀 나중의 일인데, 아무래도 중태에 빠졌다가 얼마 뒤 승하한 것으로 보인다.[45] 한 왕이 죽으면 그 다음 달부터 차기 왕의 치세로 세는 방식. 예컨대 선왕이 11월에 죽으면 그해 12월부터 원년이고, 선왕이 12월에 죽으면 이듬해 1월부터 원년이다.[46] "이 해에 백제의 말다왕이 무도하여 백성에게 포악한 짓을 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드디어 제거하고 도왕(嶋王)을 세웠다. 이를 무령왕이라고 한다."[47] 만약 김운회의 주장대로 일본 열도의 정권이 백제의 분가였다는 식으로 해석하려면 당연히 '대왕'이 무령왕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앞서 등장한 '대왕'을 존칭 없이 이름으로 재차 적었다는 것은 전혀 상식적이지 않다. 아예 처음부터 '사마대왕(斯麻大王)'이라고 썼다면 모를까.[48] 다만 이러한 논지는 상술한 김현구와 홍성화의 학설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학계에서는 문제시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49] 당시 《일본서기》의 기사에서는 《백제본기》를 인용하여 천황과 황자 및 태자가 한꺼번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그 당시 반란이 일어난 뒤 정당성 확보 차원에서 기록이 말살되었기 때문에 백제 사서의 기록을 차용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당시에 백제와 왜 두 국가 사이의 거리가 가까웠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물화상경을 주고받았다고 해도 이상한 것은 아니다.[50] 예를 들어 〈진구 황후기〉에서도 '시마 노 스쿠네(斯麻宿禰)'가 등장하는데, '스쿠네'는 카바네(姓)이므로 '시마(斯麻)'가 이름이다.[51] 물론 503년 설을 취하더라도 사마를 일본의 신료로 보는 데는 모순이 없다.[52] 사이타마에서 발굴되었으며, 471년 또는 531년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53] 신-후한 교체기의 참칭자다.[54] 노중국 교수의 견해에 따라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통칭하는 명칭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노중국 교수는 《춘추좌씨전》의 용례를 들어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지칭하는 단어라 했고, 실제로 '조미'라는 단어를 구글에서 중국어로 검색해보면 고대에 사용된 돌아가신 부친을 뜻하는 말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반면 일본 학계에서는 조상의 일반명사라고 주장했다.[55] 정황상 백제로 의미가 통한다. 백제를 자신의 변방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백제사 전공 노중국 교수는 같은 상표문에서 백제를 백제라고 표현하고 있으니, '변방'은 백제가 아닌 왜의 지방을 뜻한다고 해석했다.[56] 《일본서기》가 백제삼서를 인용한 기사 중 비슷한 내용이 있지만 이 사건은 게이타이 덴노 치세인 531년 일어났다. '이주갑인상'은 실제 사건을 더 이른 시기로 당기는 것이지 더 뒤로 밀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둘은 다른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 묘하게도 상표문이 보내진 년도인 478년은 개로왕과 그의 왕자들이 고구려 장수왕에 의해 죽은 년도의 3년째이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의하면 개로왕은 475년에 사망했다. 만 24~27개월의 3년상 기간 중에 국서가 보내진 것이다.[57] 고구려의 정복을 꾀했으나 실패했다는 뜻이다.[58] 비슷한 사례로 신라를 보면 6세기 초까지 제대로 된 한문을 구사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한자를 쓰긴 썼으나 어순을 고대 신라어에 맞추어 사용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포항 냉수리 신라비나 울진 봉평리 신라비 등 6세기 초의 신라 금석문에서 검증되는 내용이다. 그 신라보다도 늦게 한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왜국의 5세기 당시 문서 행정이나 문장력이라면 안 봐도 뻔하다.[59] 한성백제박물관 발간 백제사 시리즈 참조.[60] 개로왕 때부터 높이 평가받던 정치적인 능력과 왜국에서의 높은 위상 등의 정황이 각종 기록에서 나타난다. 한성백제박물관 백제사 시리즈 참조.[61] 일본서기에는 무령왕이 동성왕의 이복형이라고 기록 되어있다. 무령왕의 나이가 동성왕보다 많은데도 동성왕에게 왕위에서 밀린 이유는 모계 신분이 낮았기 때문일 것이다.[62] 남래 귀족 세력 해씨(解氏)와 진씨(眞氏)를 일컫는다. 이들은 공주와 충남 일대를 본거지로 두는 신진 귀족 세력인 사씨(沙氏), 연씨(燕氏)와 백씨(苩氏)와는 대척점에 있었다.[63] 동성왕이 암살당하기 불과 11개월 전이다.[64] 아예 소지 마립간은 이 일로 인해 지증왕과 그 측근 세력의 경계를 사서 피살당한 것 아니냐는 추측을 받고 있기도 하다.[65] 왕과 대후 및 왕자들이 모두 한꺼번에 죽었다고 전한다. 때문에 개로왕의 동생 문주왕이 즉위했다.[66] 일례로 본래 왕실의 일원을 높여 부르는 말이었던 '마노라'는 현재 아내를 허물없이 이르는 호칭 '마누라'가 되었으며, 종2품~정3품의 고위 관료를 칭하는 말이었던 '영감'은 현재 나이 많은 남자를 부르는 말이 되었다. 영어에서 '님', '귀하' 등을 뜻하는 서(Sir) 역시 전하, 폐하 혹은 합하 정도룰 뜻하는 sire에서 격이 낮추어진 것이다.[67] 실제로 사마(様)는 현대 일본어에서도 원래 어원대로 모양이나 상태를 가리키는 일반명사로도 사용되고 있다.[68] 서동요의 '善化公主主隱'이라는 구절을 '선화공주님은'이라고 해석한다면 당대에도 '님'이 존칭접미사로써도 사용되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69] 6세기 전후 전북 동부지역 가야세력과 신라의 관계에 대하여[70] 실제로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본기와 백제본기를 가리지 않고 동성왕 재위기인 494년부터 백제가 신라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고구려의 남진을 여러 차례 격퇴한 것으로 확인되고, 일부 기록에서는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까지 회복했다고 추측할 만한 기록도 나온다.[71] 무령왕의 선왕인 동성왕이 폭군 짓을 벌이다 피살되어 무령왕이 옹립된 것을 감안하면, 동성왕이 가진 악역 이미지와 대조되도록 집어넣은 띄워주기식 수사일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72] 2004년작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류성룡 역.[73] 실제로는 2년(502)의 일이다.[74] 실제로는 3년(503)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