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13 11:52:51

왜5왕

고대 일본 제국(諸國)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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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왜왕 기록
2.1. 찬(贊)2.2. 진(珍)2.3. 제(濟)2.4. 흥(興)2.5. 무(武)
2.5.1. 무(武) 웅략 천황2.5.2. 무(武)의 상표문과 임나일본부설 2.5.3. 가야 = 임나 ?
3. 일본 사서와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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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倭五王
중국 고대 사료에 등장하는 왜국의 왕. 남북조시대남조에 사신을 보낸 일본의 다섯 왕을 일컫는 말이다. 266년 히미코토요 관련 기록을 끝으로 일본은 140여 년 동안 중국 사서에 일절 등장하지 않다가, 413년 동진에 왜왕 찬이 사신을 보내면서 다시 출현하게 된다.[1]

2. 왜왕 기록

2.1. 찬(贊)

재위: 413년?~438년

421년에 유송에 사신을 보내는 것으로 처음 등장한다. 이후 425년, 430년 총 3차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413년 동진에 사신을 보낸 왕이 그와 동일인물일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나 확실하지 않다. 다만 413년의 조공기록은 고구려와 같이 입조한 정황이 사서에서 드러나며, 조공품 또한 고구려의 특산품이므로 광개토대왕백제 토벌 당시 사로잡은 왜구 혹은 야마토 조정의 관군 포로를 데려와 조공시키며[2] 자신의 국제적 입지와 정치적 위상을 높이는 데 활용했을 거란 설이 있다.[3] 이 학설이 사실이라면, 토요가 266년 조공한 이후로는 413년이 아닌 425년에 기록된 것이 중국과 통교한 첫 기록이다.

왜왕 리추 덴노로 비정하는 학설이 있다.

438년, 사망하여 왕위는 동생 진(珍)이 계승했다.

2.2. 진(珍)

재위: 438년~443년?

438년, 찬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다. 송에 사신을 보내 자신을 使持節(사지절)都督(도독)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왜, 백제, 신라, 임나, 진한, 모한)六國諸軍事(육국제군사)安東大將軍(안동대장군)倭國王(왜국왕)으로 자칭하고 이를 인정해 줄 것을 송에게 요청하나 거절당하고 안동장군[4][5][6] 왜국왕의 직위만 수여되었다. 이 내용은 왜가 한반도 남부 지역이 자신의 속국이라는 선전을 시도했으나, 당시 송은 백제와도 교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가 왜의 속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거부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어째서 왜왕 진(珍)이 이러한 무리한 주장을 송 측에 제기했는지는 의문의 영역이지만, 433년 전후로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성립된 나제동맹에 의해 백제와 왜 사이에 감정이 미묘하게 틀어진게 아닌가 싶다. 나제동맹의 성립으로 백제에게 용병을 파견하고 문물을 받아간 왜국이 자국의 유용가치가 하락했고, 또한 고구려에 대항해 형성된 백제 왜국 - 백제 신라 동맹에서 자신이 대고구려 전쟁의 주축을 담당하고 있다고 중국 측에 선전하기 위해 제군사직을 자칭한게 아닌가 추정하기도 한다.

한국 측 기록과 대조해보면, 여기서 얼마전인 433년~434년에 백제 비유왕이 신라 눌지 마립간에게 선물과 사신을 보내고 화친을 청해 나제동맹을 처음으로 성립한 것과 연관이 있다는 설이 있다. 왜국은 백제와는 친했어도 신라와는 대대로 원수지간처럼 싸워댔는데, 고구려 광개토대왕장수왕의 남침 압박이 심하니까 백제 혼자서는 도저히 안 되겠어서 백제 비유왕은 신라와 화친하려 했다. 여기에 왜국이 반발했고 438년에는 바다 건너 사정은 잘 모르는 중국에 백제가 왜국 아래라고 선전했다는 것이다.[7] 다만, 대놓고 문제 삼지는 않았는지 이후로도 백제와 왜국 사이가 더욱 악화되는 기록은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의 사후 왕위를 승계한 왜왕 제와의 관계는 불확실하다. 즉, 왕위를 찬탈했을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으나, 왜5왕은 사신 파견 기록만 남아있다고 봐도 무방해서 그저 추정만 가능할 뿐이다. 다만, 순전히 일본서기에 따르면 왜왕 진으로 추정되는 한제이 덴노는 왜왕 제로 추정되는 인교 덴노의 동복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애초에 사서를 짜집기 하거나 연대에 맞지 않게 실존인물들을 재구성하는 등 신뢰도가 떨어지는 사서이기 때문에, 실존인물이었다고, 중국 사서에서 교차검증되는 인물과 같다고 단정할 수 없다. 실제로 송서에서 확인 가능한 재위기간과 왜왕 진(珍)의 치세기는 동시대 사람이라고 할 수는 있으나 완벽히 겹치진 않는다.

2.3. 제(濟)

재위: 443년?~462년[8]

451년 사지절 도독 왜·신라·임나·가라[9] 진한·모한 육국제군사(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에 임명되고, 그의 신하 23인은 군(軍)과 군(郡)을 제수받았다. 읽어보면 앞에서 왜왕 진이 요구했던 이름과 비슷하지만 백제 하나만 빠진 버전이다. 이미 백제는 중국 남조와 황해를 건너 교류를 많이 하고 있었고 425년에 사지절 도독 진동대장군 백제제군사 직위를 받았기 때문에, 송에서도 일본이 주장한 칭호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신라와 가야 등은 중국과 거리가 너무 멀어 아직 교류가 많지 않았기에 중국 측에서 이게 진짜 왜왕의 관할 지역인지 뭔지 잘 몰랐고 이미 중국과 관계를 맺은 일본과의 관계를 우선시 여겼기 때문에 수락한 것이다.[10]

정확한 몰년을 알 수 없으나 아들인 왜왕 흥이 462년 송에 사신을 보내 직위를 승계한 것으로 보아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에서 나오는 유라쿠 천황을 무(武)라고 상정한다면, 제(濟)는 인교 덴노로 비정할 수 있으며, 인교 덴노는 생전에 성인병을 앓은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에서 의사를 파견해 그의 몸을 고쳤다고 하는데, 증상을 보면 거동이 불편하다고 하는 걸 보면 중풍이 아닌가 싶다. 선왕인 왜왕 진(珍) = 한제이 덴노가 맞다면, 일본서기에서는 그의 동복동생이 인교 덴노=제(濟)인 셈이다.

2.4. 흥(興)

재위: 462년~477년

송서의 기록에 따르면 왜왕 제의 세자(世子)로 기록하고 있다. 462년 송에 사신을 보내 직위를 승계받았다. 477년 사망하고 동생인 왜왕 무(武)가 왕위를 이었다. 안동장군 왜국왕의 직위를 제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선왕이 받았던 육국제군사의 칭호 또한 승계 받았는지에는 의문이 있다. 안코 덴노로 비정된다.

2.5. 무(武)

재위: 477년~?

왜왕 흥의 동생으로, 흥이 사망하자 사지절 도독 왜·백제[11]·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칠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이라고 자칭했다(...). 이듬해 스스로 개부의동삼사라는 문관1품 관직을 임시로 자칭하고 이를 인정해 줄 것을 송에 요청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백제는 빠지고 육국제군사로 수정해서 받게 된다. 이 역시 중국과 가까운 서해안에 영토가 없는 신라나 가야는 중국과 교류가 거의 없는 시절이었기 때문에 중국 측이 잘 몰라서, 일단 자기들도 잘 알고 확실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독립국 백제는 뺐고, 신라나 가야는 일본의 주장대로 넣어버리고 수락한 것이다. 다만 가야는 479년에 대가야 하지왕이 처음으로 중국에 사절단을 보내기 때문에[12] 적어도 가야가 왜국의 속국이 아니라는 것을 479년에는 중국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왜왕 무가 478년 중국 황실에 주장하며 보낸 국서는 이렇다.
順帝昇明二年, 遣使上表曰: 「封國偏遠, 作藩于 外, 自昔祖禰, 躬擐 甲冑, 跋涉山川, 不遑寧處. 東征毛人五十五國, 西服衆夷六十六國, 渡平海北九十五國, 王道融泰, 廓土遐畿, 累葉朝宗, 不愆于歲. 臣雖下愚, 忝胤先緒, 驅率所統, 歸崇天極, 道逕百濟, 裝治船舫, 而句驪無道, 圖欲見吞, 掠抄邊隸, 虔劉不已, 每致稽滯, 以失良風. 雖曰進路, 或通或不. 臣亡考濟實忿寇讎, 壅塞天路, 控弦百萬, 義聲感激, 方欲大擧, 奄喪父兄, 使垂成之功, 不獲一簣. 居在諒闇, 不動兵甲, 是以偃息未捷. 至今欲練甲治兵, 申父兄之志, 義士虎賁, 文武效功, 白刃交前, 亦所不顧. 若以帝德覆載, 摧此强敵, 克靖方難, 無替前功. 竊自假開府儀同三司, 其餘咸各假授, 以勸忠節.」 詔除武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

순제 승명 2년(478)에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기를, "봉해진 나라가 먼 곳에 치우쳐 있으며, 바깥에 번국을 이루고 있는데, 과거의 조상[13][14]으로부터 스스로 갑옷과 투구를 걸치고 산천을 누비느라 편안히 거처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동으로는 모인(毛人)55국을 정벌하였고, 서로는 (衆夷)66국을 복종시켰으며, 바다 건너 해북(海北) 95국을 평정하니,왕도는 화락하고 편안하며, 땅을 넓히고 왕기를 아득히 크게 하였으며, 여러 대에 걸쳐 조종(朝宗)하여, 해마다 어긋나는 일이 없었습니다. 신이 비록 아주 어리석으나 조상의 뒤를 이어 다스리는 곳을 이끌고 중국의 조정을 존중하고자 하였습니다. 가는 길이 백제를 거쳐야 하므로 큰 배를 준비하였는데, 구려(句驪)가 무도하여 (우리를) 집어삼키려 하고, 변방[15]의 속한 곳을 노략질하며 살육을 그치지 않으니, 매번 지체되어 좋은 바람을 놓치게 됩니다. 비록 길을 나서지만 혹은 통하고 혹은 통하지 못합니다. 신의 돌아가신 아버지 제(濟)가 실로 원수가 천로(天路)를 막는 것에 분노하니, 활을 쏘는 병사 100만이 의로운 소리에 감격하여 바야흐로 크게 일어나고자 하였으나, 갑자기 아버지와 형을 잃으니[16][17], 수성(垂成)의 공을 이루고자 하였으나 마지막 한 삼태기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상중에 있어 병사를 움직이지 못하고 쉬고 있었으므로 이기지 못하였습니다.[18] 지금에 이르러 갑옷과 무기를 잘 갖추어 부형의 뜻을 펼치고자 하니, 의롭고 용맹스러운 병사들이 문무로 공을 이루어, 번쩍이는 칼날이 눈앞에 닥쳐도 또한 눈을 딴 곳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만약 황제의 세상을 뒤덮는 덕으로써 이 강적을 무찔러 온갖 어려움을 극복한다면, 이전의 공을 바꾸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삼가 스스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가수(假授)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모두 각각 (적당한 관작을) 가수하여, 충절을 권유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조하여 무를 사지절, 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에 제수하였다.

마치 일본의 영토가 북으로는 한반도 남부까지 미치고 있으며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듯이 언플을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중국의 고구려 연구학자 왕건군은[19] 한국의 국내 학회에 참석해, 왜왕이 자칭한 작위는 지극히 개인적인 요구이며, 백제와 신라, 가야 등을 지배했다고 반복하는 것은 왜가 통치한 사실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당대에 한반도 남부에는 백제와 신라 임나가라만 존재했는데 가야와 임나를 별개 국가로 취급하는 것에 대해 지적했고, 이는 자신이 자칭해서 다스리는 나라의 실정도 제대로 모르고 요구한 것이라며 더 이상 논할 가치도 없다고 말했다.[20] 조선족 연구자 박진석 (朴眞奭) 또한 왜왕 무(武)가 송나라에 보낸 국서에서 조녜(), 즉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통일을 이룩한 것에 대해 언급하는데, 이 시기를 열도가 통일이 되고 중앙집권 체제를 이룬 것이라고 상정해봐도, 5세기 중반이므로 당대에는 한반도까지 진출할 여력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479년 남제고제가 진동대장군으로, 502년에 무제가 정동대장군으로 승격시켰다. 그런데 이 사례는 남제와 양이 건국을 맞아 주변국의 호의를 사기 위해 단체로 진봉시킨 것으로 보는 게 통설이다. 왜는 두 해 모두 남제와 양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없다. 즉, 해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그냥 해준 것이다. 게다가, 502년의 경우 이 해에 고구려 문자명왕 고운, 백제 동성왕 여대 등이 함께 책봉을 받는데, 정작 동성왕은 이미 죽고 없었다. 왜왕 무도 이때까지 살아있었을지부터 의문이다.

또한, 송의 국력을 주목해야 하는데, 당시 송의 국력은 이미 망국일로였기 때문에 선심성으로 실질적인 권한이 없는 벼슬을 사여했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2.5.1. 무(武) 웅략 천황

송나라에 보낸 왜왕 무(武)의 국서에는 고구려와 대치하고 국경을 맞댄다고 하여 이게 무슨 소린가 싶은데, 일본서기에 비슷한 시기에 이러한 기록이 있긴 하다. 비슷한 시기 왜왕 무(武)와 비슷한 행보를 보이는 인물이 일본서기에 있는데, 이를 근거로 웅략 천황이 왜왕 무(武)라고 보는 설이 있다.
아래는 일본서기의 내용들이다.

<일본서기 웅략 8년(464년 2월)>
於是, 新羅王, 夜聞高麗軍四面歌儛, 知賊盡入新羅地. 乃使人於任那王曰, 高麗王征伐我國. 當此之時, 若綴旒然. 國之危殆, 過於累卵. 命之脩短, 太所不計. 伏請救於日本府行軍元帥等.
이에 신라왕이 밤에 고구려군이 사방에서 춤추고 노래한다는 것을 듣고 적이 모두 신라 땅으로 들어온 것으로 알고, 이에 임나왕(任那王)에게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왕이 우리나라를 정벌하려 합니다. 이렇게 되니 흔들리는 깃발과 같이 불안합니다. 나라의 위태로움이 달걀을 쌓은 것보다 더하고 목숨의 길고 짧음을 심히 헤아릴 수 없는 바입니다. 엎드려 일본부(日本府)의 행군원수(行軍元帥) 등의 구원을 청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일본서기 웅략 8년(464년 2월)>
由是, 任那王勸膳臣斑鳩[斑鳩, 此云伊柯屢俄.]吉備臣小梨難波吉士赤目子, 往救新羅. 膳臣等, 未至營止. 高麗諸將, 未與膳臣等相戰皆怖. 膳臣等乃自力勞軍. 令軍中, 促爲攻具, 急進攻之. 與高麗相守十餘日. 乃夜鑿險, 爲地道, 悉過輜重, 設奇兵. 會明, 高麗謂膳臣等爲遁也. 悉軍來追. 乃縱奇兵, 步騎夾攻, 大破之. 二國之怨, 自此而生[言二國者, 高麗新羅也.]. 膳臣等謂新羅曰, 汝以至弱, 當至强. 官軍不救, 必爲所乘. 將成人地, 殆於此役. 自今以後, 豈背天朝也.
이로 인해 임나왕이 선신반구(膳臣斑鳩 카시하데노오미이카루가), 길비신소리(吉備臣小梨 키비노오미워나시), 난파길사적목자(難波吉士赤目子 나니하노키시아카메코)에게 신라를 구원하도록 권하였다. 선신(膳臣 카시하데노오미) 등은 군영을 설치하고 머무르는 데에는 이르지 않았으나,고구려의 여러 장수들은 선신 등과 싸우기도 전에 모두 두려워하였다. 선신 등은 직접 힘써 군대를 위로하고 나서 군사들에게 빨리 공격할 준비를 시켜 급히 진격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와 대치한 지 10여 일이 지나자, 밤에 험한 곳을 파서 땅굴을 만들어 군대의 무기와 식량을 모두 운반하고 매복병을 배치하였다. 새벽에 고구려는 선신 등이 달아났다고 생각하여 병력을 모두 이끌고 추격해왔다. 그러자 매복병을 풀고, 보병과 기병이 협공하여 크게 깨뜨렸다. 두 나라의 원한은 이로부터 생겼다[두 나라는 고구려와 신라를 말한다.]. 선신 등이 신라에게 “너희는 지극히 약한데도 지극히 강한 나라와 대적하였다. 관군(官軍)이 구하지 않았으면 반드시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이번 싸움에서 하마터면 나라를 빼앗길 뻔하였다. 지금부터는 어찌 천조(天朝)를 배반하겠는가!”라고 말하였다.

고국양왕 치세 이후로 신라는 고구려에게 복종하였는데, 신라에 주둔하던 고구려 병사가 피살되는 사건을 계기로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틀어지고 마침내 전쟁까지 하였다. 이에 신라 왕은 임나에 사신을 보내 일본부에게 지원을 요청한다. 그리고 464년에는 고구려를 패퇴시켰다고 나온다. 이듬해 465년 3월 기사에서는 마치 고구려가 왜국에게 공물을 바치는데, 신라가 이를 방해하기 때문에 정벌에 나섰다. 이후에는 신라와 전쟁 중에 오호토모노키미라는 일본 장수가 전사하고 패퇴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내용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마립간 5년 5월과 6년 2월 자로 기록된 것과 동일한 사건을 묘사했다고 추정한다. 5월에는 왜군 장수들간 내분 때문에 기대반숙녜(紀大磐宿禰;키노오히하노스쿠네)가 한자숙녜(韓子宿禰)와 반목하여 한자숙녜(韓子宿禰)[21]가 피살당하고 철수했다.

<삼국사기 462년 5월>
五年, 夏五月, 倭人襲破活開城, 虜人一千而去.
5년(462) 여름 5월에 왜인(倭人)이 활개성(活開城)을 습격해 깨뜨리고 1천 명을 사로잡아 갔다.

<삼국사기 463년 2월>
六年, 春二月, 倭人侵欿校勘 良城, 不克而去. 王命伐智·德智, 領兵伏候於路, 要擊大敗之. 王以倭人屢侵疆埸, 縁邊築二城.
6년(463) 봄 2월에 왜인(倭人)이 삽량성(歃良城)에 침입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이 벌지(伐智)와 덕지(德智)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중도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가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물리쳤다. 왕은 왜인들이 자주 영토를 침입하였으므로 변경에 두 성을 쌓았다.

또 479년의 기록에는,

<일본서기 웅략 23년(479)>
是歲, 百濟調賦, 益於常例. 筑紫安致臣馬飼臣等, 率船師以擊高麗.
이 해에 백제가 바친 조부(調賦)가 평소보다 많았다. 축자의 안치신(安致臣 아치노오미)과 마사신(馬飼臣 우마카히노오미)등이 선사(船師)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쳤다.

라고 나온다. 바로 앞의 기사에서는 (479년 4월) 개로왕이 죽고 말다왕(동성왕)을 일본에서 백제로 송환 시키며, 축자국 군인 500명을 함께 보내 호위하게 하였다는데, 이때 파견된 장군이 아치노오미와 우마카히노오미라는 학설이 있다.

재밌는 점은 비슷한 시기(472년)에 백제의 개로왕 또한 비슷한 편지를 북위에 보냈는데,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고구려 장수왕은 무도하고 포악하기 그지없어 고구려 백성들이 고통 받고 있다. [22] 사실은 그들은 남조와 내통하고 있으며 북조[23]를 능멸하고 있으니, 군사를 일으켜 쳐달라.

또한 북위 사신이 백제로 오던 중에 고구려군에게 살해당했다며 시신을 수습하고 관복과 기물을 거두어 북위에 증거라고 내밀어 보였다. 하지만 북위는 반응이 시큰둥했다. 이는 위서(魏書) 백제전과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는데 내용도 상당히 유사하다. 물론 시기적으로 보면 개로왕의 국서가 앞선 기록이다. 그래서 백제가 고구려에 적개심을 품은 것이 왜왕의 상표문을 위시하여 당대 왜국의 외교적 관념에 투영되지 않았느냐는 분석이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18년(472)>
十八年, 遣使朝魏, 上表曰, “臣立國東極, 犲狼隔路, 雖世承靈化, 莫由奉藩. 瞻望雲闕, 馳情罔極, 涼風微應. 伏惟皇帝陛下恊校勘 和天休, 不勝係仰之情. 謹遣私署冠軍將軍·駙馬都尉·弗斯侯·長史餘禮, 龍驤將軍·帯方太守·司馬張茂等, 投舫波阻, 搜徑玄津, 託命自然之㑮校勘 , 遣進萬一之誠. 兾校勘 神祗垂感, 皇靈洪覆, 克逹天庭, 宣暢臣志, 雖旦聞夕沒, 永無餘恨.” 又云, “臣與髙句麗, 源出扶餘, 先世之時, 篤崇舊款, 其祖釗軽廢鄰好, 親率士衆, 凌踐臣境. 臣祖湏整旅電邁, 應機馳擊, 矢石暫交, 梟斬釗首. 自爾已來, 莫敢南顧, 自馮氏數終, 餘燼奔竄, 醜類漸盛. 遂見凌逼. 構怨連禍三十餘載, 財殫力竭, 轉自孱踧. 若天慈曲矝校勘 , 逺及無外, 速遣一将, 来救臣國. 當奉送鄙校勘 女, 執箒校勘 後宫, 并遣子弟, 牧圉外厩, 尺壊匹夫, 不敢自有.” 又云, “今璉有罪, 國自魚肉, 大臣彊族, 戮殺無已. 罪盈惡積, 民庶崩離, 是滅之期, 假手之秋也. 且馬校勘 族士馬, 有鳥畜之戀, 樂浪諸郡, 懐首丘之心, 天威一舉, 有征無戰. 臣雖不敏, 志効畢力, 當率所綂, 承風響應. 且髙勾麗不義, 逆詐非一, 外慕隗囂藩卑之辝校勘 , 内懐凶禍豕突之行, 或南通劉氏, 或北約蠕蠕, 共相脣鹵校勘 , 謀凌王略. 昔唐堯至聖, 致罰丹水, 孟甞稱仁, 不捨塗詈. 㳙流之水, 冝早壅塞, 今若不取, 将貽後悔. 去庚辰年後, 臣西界小石山北國海中, 見屍十餘, 并得衣·噐·鞍·勒, 視之非髙勾麗之物. 後聞, 乃是王人来䧏臣國, 長虵校勘 隔路, 以沉校勘 于海. 雖未委當, 深懷憤恚. 昔宋戮申舟, 楚莊徒跣, 鷂撮放鳩, 信陵不食. 克敵立名, 羙校勘 隆無已. 夫以區區偏鄙, 猶慕萬代之信, 况陛下合氣天地, 勢傾山海, 豈令小竪跨塞天達.校勘 今上所得鞍, 一以實驗.” 顕祖以其僻逺冒險朝獻, 禮遇尤厚, 遣使者邵安, 與其使俱還. 詔曰, “得表聞之, 無恙其校勘 善.校勘 卿在東隅, 處五服之外, 不逺山海, 歸誠魏闕, 欣嘉至意, 用戢于懐. 朕承萬世之業, 君臨四海, 統御羣生, 今宇内清一, 八表歸義, 襁負而至者, 不可稱數. 風俗之和, 士馬之盛, 皆餘禮等親所聞見. 卿與髙句麗不穆, 屢致凌犯, 苟能順義, 守之以仁, 亦何憂於寇讎也. 前所遣使, 浮海以撫荒外之國, 從來積年, 往而不返, 存亡逹否, 未能審悉. 卿所送鞍, 比校校勘 舊乗, 非中國之物. 不可以疑似之事, 以生必然之過. 經略權要, 以具别旨.” 又詔曰, “知髙句麗阻疆, 侵軼卿上校勘, 修先君之舊㤪, 弃息民之大徳. 兵交累載, 難結荒邉. 使兼申胥之誠, 國有楚·越之急. 乃應展義扶微, 乗機電舉. 但以髙句麗稱藩先朝, 供職日久. 於彼雖有自昔之釁, 於國未有犯令之愆. 卿使命始通, 便求致伐, 尋討事㑹, 理亦未周. 故往年遣禮䓁至平壤, 欲驗其由狀. 然髙句麗奏請頻煩, 辭理俱詣, 行人不能抑其請, 司法無以成其責, 故聽其所啓, 詔禮等還. 若今復違旨, 則過咎校勘 益露, 後雖自陳, 無所逃罪, 然後興師討之, 於義爲得. 九夷之國, 丗居海外, 道暢則奉藩, 恵戢則保境. 故羈縻著於前典, 楛貢曠於歳時. 卿備陳彊弱之形, 具列徃代之迹, 俗殊事異, 擬况乖衷. 洪規大略, 其致猶在. 今中夏平一, 宇内無虞. 每欲陵威東極, 懸旌域表, 拯荒黎於偏方, 舒皇風於逺服. 良由髙句麗即叙, 未及卜征. 今若不從詔旨, 則卿之來謀, 載恊校勘 朕意, 元戎啓行, 將不云逺. 便可䂊率同興, 具以待事, 時遣報使, 速究彼情. 師舉之日, 卿爲郷導之首, 大捷之後, 又受元㓛之賞, 不亦善乎. 所獻錦布·海物, 雖不悉逹, 明卿至心. 今賜雜物如别.” 校勘 又詔璉護送安等. 安等至髙句麗, 璉稱昔與餘慶有讎, 不令東過, 安等於是皆還, 乃下詔切責之. 後使安等從東萊浮海, 賜餘慶璽書, 襃其誠節. 安等至海濵, 遇風飄蕩, 竟不逹而還. 王以麗人屢犯邊鄙, 上表乞師於魏, 不從. 王怨之, 遂絶朝貢.

[개로왕 재위] 18년(472), 위(魏)나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고 왕이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렸다.

"제가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으나, 이리와 승냥이 같은 고구려가 길을 막고 있으니, 비록 대대로 중국의 교화를 받았으나 번병(藩屛) 신하의 도리를 다할 수 없었습니다. 멀리 천자의 궁궐을 바라보면서 달려가고 싶은 생각은 끝이 없으나, 북쪽의 서늘한 바람으로 말미암아 대답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천명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니 존경하는 심정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삼가 본국의 관군장군(冠軍將軍) 부마도위(駙馬都尉) 불사후(弗斯侯) 장사(長史)여례(餘禮)와 용양장군(龍驤將軍) 대방태수(帶方太守) 사마(司馬) 장무(張茂) 등을 보내어 험한 파도에 배를 띄워 아득한 나루를 찾아, 목숨을 자연의 운명에 맡기면서 제 정성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내고자 하옵니다. 바라건대 천지신명이 감동하고 역대 황제의 신령이 크게 보호하여, 이들이 폐하의 거처에 도달하여 저의 뜻을 전하게 할 수 있다면, (그 소식을)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죽는다 하더라도 길이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표문에서 또한 말했다.

"저와 고구려는 조상이 모두 부여 출신이므로 선조 시대에는 고구려가 옛 정을 굳건히 존중하였는데, 그의 조상 쇠(釗)가 경솔하게 우호 관계를 깨뜨리고 직접 군사를 거느려 우리 국경을 침범하여 왔습니다. 우리 조상 수(須)가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 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공격하니 잠시 싸우다가 쇠의 머리를 베어 효시하였습니다. 이로부터 감히 남쪽을 돌아보지 못하다가 풍씨(馮氏) 의 운수가 다하여, 남은 사람들이 고구려로 도망해 온 이후로 추악한 무리가 차츰 세력을 쌓아 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우리를 무시하고 침략하게 되었습니다. 원한을 맺고 전화(戰禍)가 이어진 지 30여 년이 되었으니, 재정은 탕진되고 힘은 고갈되어 나라가 점점 쇠약해졌습니다. 만일 폐하의 인자한 생각이 먼 곳까지 빠짐없이 미친다면, 속히 장수를 보내 우리 나라를 구해 주소서. 그렇게 해준다면 저의 딸을 보내 후궁을 청소하게 하고, 자식과 아우를 보내 외양간에서 말을 기르게 하겠으며, 한 치의 땅, 한 명의 백성이라도 감히 저의 소유로 하지 않겠습니다."

표문에서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연(璉)은 죄를 지어 나라가 스스로 남에게 잡아 먹히게 되었고, 대신과 호족들을 살육하기를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의 죄악은 넘쳐나서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그들이 멸망할 시기로서 폐하의 힘을 빌릴 때입니다. 또한 풍족(馮族)의 군사와 군마는 집에서 키우는 새나 가축이 주인을 따르는 것 같은 심정을 가지고 있고, 낙랑의 여러 군은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니, 황제의 위엄이 한 번 움직여 토벌을 행한다면 전투가 벌어질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비록 명민하지는 않으나 힘을 다하여 우리 군사를 거느리고 위풍을 받들어 호응할 것입니다. 또한 고구려는 의롭지 못하여 반역하고 간계를 꾸미는 일이 많으니, 겉으로는 외효(隈囂)가 스스로 자신을 변방의 나라라고 낮추어 쓰던 말버릇을 본받으면서도, 속으로는 흉악한 화란과 행동을 꿈꾸면서, 남쪽으로는 유씨(劉氏)와 내통하기도 하고, 북쪽으로는 연연(蠕蠕)과 맹약을 맺어 강하게 결탁하기도 함으로써 폐하의 정책을 배반하려 하고 있습니다. 옛날 요 임금은 지극한 성인이었으나 단수(丹水)에서 전투를 하여 묘만(苗蠻)에 벌을 주었으며, 맹상군(孟嘗君)은 어질다고 소문이 났었으나 길가에서 남을 꾸짖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작게 흐르는 물도 일찍 막아야 하는 것이니, 지금 만약 고구려를 치지 않는다면 앞으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 경진년 후에 우리 나라 서쪽 경계의 소석산 북쪽 바다에서 10여 구의 시체를 보았고, 동시에 의복, 기물, 안장, 굴레 등을 얻었는데, 이를 살펴보니 고구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후에 들으니 이는 바로 황제의 사신이 우리 나라로 오다가 고구려가 길을 막았기에 바다에 빠진 것이라 합니다. 비록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매우 분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옛날 송(宋)나라가 신주(申舟)를 죽이니 초나라 장왕(莊王)이 맨발로 뛰어 나갔고, 새매가 풀어준 비둘기를 잡아 요리를 하니 신릉군(信陵君)이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적을 이기고 이름을 세우는 것은 대단히 아름답고 훌륭한 일입니다. 작은 변방도 오히려 만대의 신의를 생각하는데 하물며 폐하께서는 천지의 기를 모으고, 세력이 산과 바다를 기울일 수 있는데 어찌 고구려와 같은 애숭이로 하여금 황제의 길을 막게 합니까? 이제 북쪽 바다에서 얻었던 안장을 바쳐 증거로 삼고자 합니다."

현조(顯祖)가 백제의 사신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조공을 바쳤다 하여 융숭하게 예우하고, 사신 소안(邵安)으로 하여금 그들을 데리고 백제로 가게 하였다. 이때 조칙을 내려 말했다.

"글을 받고 아무 일 없이 지낸다는 말을 들으니 매우 기쁘다. 그대가 동쪽 한 구석, 오복(五服)의 밖에 있으면서 산과 바다를 멀리 여기지 않고 위나라 조정에 정성을 바치니, 그 지극한 뜻을 가상히 여겨 가슴 속에 기억해 두리라. 내가 만대에 누릴 위업을 계승하여 사해에 군림하면서 모든 백성들을 다스리니, 이제 나라는 깨끗이 통일되고 8방에서 귀순하기 위하여 어린 아이를 업고 이 땅에 이르는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평화로운 풍속과 성대한 군사는 여례 등이 직접 듣고 보았다. 그대는 고구려와 불화하여 여러 번 침범을 당하였지만 만일 정의를 따르고 어진 마음으로 방어할 수 있다면 원수에 대하여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이전에 사신을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 국경 밖의 먼 나라를 위무하게 하였으나, 그 후 여러 해가 되도록 돌아오지 않으니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또는 그곳에 도착했는지 도착하지 못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대가 보낸 안장을 예전 것과 비교하여 보니 중국의 산물이 아니었다. 의심되는 일을 사실로 단정하는 과오를 범할 수는 없는 일이다. 고구려를 침공할 계획은 별지에 상세히 밝힐 것이다."

이 조서에서 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도다. 즉, 고구려는 국토의 지세가 험하다는 사실을 믿고 그대의 국토를 침범하였으니, 이는 자기 선대 임금의 오랜 원한을 갚으려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는 큰 덕을 버린 것이다. 전쟁이 여러 해에 걸쳐 이어지니 변경을 단속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하여 사신은 신포서(申包胥)의 정성을 겸하게 되고 나라는 초(楚), 월(越)과 같이 위급하게 되었구나. 이제 마땅히 정의를 펴고 약자를 구하기 위하여 기회를 보아 번개처럼 공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선대로부터 번방의 신하로 자처하며 오랫동안 조공을 바쳐왔다. 그들 스스로는 비록 이전부터 잘못이 있었으나, 나에게는 명령을 위반한 죄를 지은 일이 없다.

그대가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와 그들을 곧 토벌하기를 요청하였으나, 사리를 검토해 보아도 토벌의 이유가 또한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난해에 예 등을 평양에 보내 고구려의 상황을 조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여러 번 주청하고 그 말이 사리에 모두 맞으니 우리 사신은 그들의 요청을 막을 수 없었고, 법관은 그들에게 죄명을 줄 만하지 못했던 바, 그들이 말하는 바를 들어 주고 예 등을 돌아오게 하였다. 만약 고구려가 이제 다시 명령을 어긴다면, 그들의 과오가 더욱 드러날 것이므로 뒷날 아무리 변명을 하더라도 죄를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니, 그렇게 된 연후에는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토벌하더라도 이치에 합당할 것이다.

모든 오랑캐 나라들은 대대로 바다 밖에 살면서, 왕도가 창성하면 번방 신하로서의 예절을 다하고, 은혜가 중단되면 자기의 영토를 지켜 왔다. 따라서 중국과 예속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예전의 법전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호시(楛矢)를 바치는 일은 세시에 그쳤다. 그대가 강약에 대한 형세를 말하였으며 지난 시대의 사실들을 모두 열거하였지만, 풍속이 다르고 사정이 변하여 무엇을 주려 하여도 나의 생각과 맞지 않는다. 우리의 너그러운 규범과 관대한 정책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이제 중국은 통일 평정되어 나라 안에 근심이 없다. 이에 따라 매번 동쪽 끝까지 위엄을 떨치고 국경 밖에 깃발을 휘날려 먼 나라의 굶주리는 백성을 구원하며, 먼 지방까지 황제의 위풍을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사실은 고구려가 그때마다 진정을 토로하였기 때문에 미처 토벌을 도모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그들이 나의 조칙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대의 계책이 나의 뜻과 맞으니 큰 군사가 토벌의 길을 떠나는 것도 장차 멀다고는 할 수 없다. 그대는 미리 군사를 정돈하여 함께 군사를 일으킬 수 있도록 준비할 것이며, 때에 맞추어 사신을 보내 그들의 실정을 즉시 알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 군사가 출동하는 날, 그대가 향도의 선두가 된다면 승리한 후에는 역시 가장 큰 공로로 상을 받게 될 것이니,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대가 바친 포백과 해산물은 비록 모두 도착하지는 않았으나, 그대의 지극한 성의는 잘 알겠도다. 이제 별지와 같이 내가 여러 가지 물품을 보내노라."

또한 고구려 왕 연(璉)에게 조서를 보내 안(安) 등을 백제로 보호하여 보내도록 하였다. 안 등이 고구려에 이르자 연이 예전에 여경(餘慶)과 원수를 진 일이 있다 하여, 그들을 동쪽으로 통과하지 못하게 하므로 안 등이 모두 돌아가니, 위나라에서는 곧 고구려 왕에게 조서를 내려 엄하게 꾸짖었다. 그 후에안 등으로 하여금 동래(東萊)를 출발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여경에게 조서를 주어 그의 정성과 절조를 표창하게 하였다. 그러나 안 등이 바닷가에 이르자 바람을 만나 표류하다가 끝내 백제에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은 고구려가 자주 변경을 침범한다 하여 위나라에 표문을 올려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위나라에서는 듣지 않았다. 왕이 이를 원망하여 마침내 조공을 중단하였다.
노중국 교수는 개로왕이 보낸 서신과 왜왕 무(武)가 보낸 서신을 작성한 식자층이 같은 집단으로, 개로왕이 장수왕에게 전사하고 망명간 이들에 의해 비슷한 내용의 서신이 써졌을거라고 추정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서신의 내용은 수많은 중국의 고전을 인용하고 있어서, 당대 일본에서 수용되고 있는 유교의 수준으로는 구현하기 어려운 문장이라고 말했다. 여담으로 백제 8성 중 목씨가 이 시기에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여긴다. 목씨는 개로왕이 아차산에 끌려가 참수당할 때 문주왕을 피신시키고 도왜하여 지원군을 요청한 집단으로 추정한다 [24]

묘하게도 왜왕 무(武)와 백제의 무령왕은 행보가 비슷하다. 선술했듯이 무령왕의 부왕인 개로왕이 작성한 국서는 왜왕 무(武)가 작성한 상표문과 너무 흡사하기에, 일부 학자들은 무령왕과 왜왕 무(武)는 동일인물이 아닐까 하는 추정한다. 만약 사실이라면 백제가 아닌 왜국이 고구려를 왜 저토록 미워할까 하는 의문을 납득시킬 수 있다.

무령왕은 일본 사가현에서 태어났다. 일본서기 유라쿠 천황 20년(475) 기록에는 개로왕 때 고구려가 공격해와 국왕, 대후, 왕자가 죽었다고 했으니, 왜왕 무(武)가 부형이 한꺼번에 죽어 상중이라고 한 기록과 일치한다. 무령왕도 죽어서 삼년상을 치렀으므로 무령왕이 무(武)가 맞는다면, 그도 부형을 위해서 삼년상을 치렀을 것이다. 이름 또한 비슷하다. 당시 중국 측에서 개로왕을 왜왕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백제가 근초고왕 시절에 왜의 기나이(畿內) 지방[25]에 진출해 일종의 분국(分國) 형태로 지배했던 것[26]이 계속 이어졌고 왜국의 지도자를 겸임하는 백제왕의 특성상 당시 중국에서 개로왕을 왜왕으로 인식했음이 이상하지 않나는 것이다.

게다가 일본 이나리야마(稻荷山) 고분에서 발굴된 철검에 씐 獲加多支鹵大王(획가다지로대왕)이란 명문도 한 가지 근거가 된다. 기존 학설에선 유랴쿠 덴노의 이름으로 추정했지만, 당시 왕족과 귀족을 막론하고 왜인의 이름 표기에 소금밭 로() 자를 사용한 사례가 없다는 점, 支의 일본 발음이 ki, ke 정도라는 점 등을 근거로 뒤쪽의 지로(支鹵)가 사실은 개로(蓋鹵)이고, 획가다지로대왕(獲加多支鹵大王)이란 개로왕을 가리키지 않을까 추정하는 일본 학자들이 꽤 된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된 친척들이 한꺼번에 죽었다는 점, 왜왕이 쓴 표문에서 당시 왜국과 역사적으로 별 관계도 없던 고구려를 (마치 백제 임금이라도 되는 양) 이상할 만큼 증오했다는 점, 둘 다 폭군이었다는 점이 개로왕과 유랴쿠 덴노의 행적 양측에서 서로 일치한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나아가 후대의 부레쓰 덴노 또한 비슷하게 폭군이었고 시호조차 비슷함을 근거로 유랴쿠 덴노와 동일인물이고 그 또한 개로왕을 모델로 한 인물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정하는 이들도 있다.[27]

2.5.2. 무(武)의 상표문과 임나일본부설

일본서기는 기본적으로 지방 국가 (가야 연합처럼 수장격의 나라가 있고 이를 중심으로 여러 나라가 혼재해 있었고, 주도국가에 협력하는 형태이다)에서 전해져 오는 구전을 집대성해서 후대에 기록한 것이다. 학자들은 일본의 통합[28] 시기는 5-6세기로 추정하는데. 일례로 왜5왕이 송나라에 보낸 국서를 보면 478년에 무(武)[29]가 자신의 조녜(祖禰)가 통합을 이룩 했다고 하는데, 이를 근거로 일본측에서는 4세기 [30] 말엽쯤에는 일본이 야마타이 국을 중심으로 질서가 정립되고, 그 지방 호족들을 통제하는 권력을 얻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일례로 왜왕의 신하들은 평서(平西)征虜(정로)冠軍(관군)輔國(보국)將軍(장군)이라는 직위에 임명되는데 이는 당연히왜왕이 사여받은 안동장군보다 등급이 낮은 직위들이다.[31] 이런 일련의 통합과정 이후 2~3세기가 흘러 7-8세기에서야 비로소 강력한 중앙집권을 구축하고 여러 혼재 되어 있던 지방의 구전을 정리해서 후대에 기록한 것으로 파악 되고 있다. 여담이지만 일본측에서는 광개토대왕릉비도 근거로 활용하여, 391년 즈음에 신라와 백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 할수 있었다는 것은 이미 일본열도가 통일이 4세기 말에 통일을 이룩한 근거라고 한다. 이에 대해 한일공동역사연구회 1기에서 노중국 교수와 일본 측 교수들이 토론에서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노중국 교수는 조녜(祖禰)가 중국의 오래된 용례(춘추좌씨전)와 연남생 묘지석의 원문을 따져가며 아버지와 할아버지대로 해석해서 일본이 통일 왕조를 이룩한 시기를 상대적으로 낮추어 봤고 [32], 일본 측에서는 조녜(祖禰)는 조상을 뜻하는 일반명사일 가능성이 크다고 해석했다. 어찌됐던, 본론으로 돌아와서 고구려와 백제, 신라, 가야 등이 등장하는 일본서기의 외교 관련 기사는 통일 왕조가 성립되기 이전의 일이므로, 통일 왕조에 의해 병합된 지방 국가들에서 전해오는 구전을 취합한 것으로 해석한다.

이것은 하마다 고사쿠 큐슈대 교수의 제2차 한일공동역사연구회에 투고한 논문에서 발췌한 일부이다.
일본서기 중에서 4세기에 상당하는 기사로 표현된 천황이나 일본은 4~5세기에 아직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천조의 칭호도 중국 남조로부터 책봉을 기본으로 하는 백제의 외교자세를 고려하면, 백제가 일본에 대해 주창하는 호칭으로 인정할 수 없으며, 이것도 8세기 초반의 일본서기를 편찬하기 전후의 천황의 왕건을 수식하는 용어다. 일본서기의 기록이 씨족 시조의 업적을 '이야기'화 하고 또 후세의 백제 관련 기록도 일본서기 편찬 시의 '지금'즉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율령국가의 성립과정에서 씨족 국가에 대한 기여를 현시하면서 '이야기화'가 계속 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야기'화가 전혀 가공의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의 기억'을 이야기 했던 점은 유의해야 한다.

이 밖에도 노중국 교수는 무(武)가 국서를 보낸 내용에 대해서도 일본학자들과 열띤 토론을 벌였는데, 주된 논쟁은 邊隸,海北 등의 표현이다. 이곳을 어디로 비정할 것인가를 두고 노중국 교수는 海北 큐슈의 북쪽으로 비정하고 邊隸는 백제가 아니라고 발언했지만, 일본측은 사실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邊隸는 백제 海北은 한반도로 보인다고 발언했다. 김태식 교수는 '구려(句驪)가 무도하여 (우리를) 삼키려고 한다'에서 목적어 '우리'는 왜국이 조공을 하기 위해 준비한 보물 등이 실어진 선박이지, 왜국이 아니라고 봤다. [33] 반면에 일본 측에서는 ‘우리’는 사실 여부는 차치 하고 왜왕 자신이 다스리는 혹은 주장하는 한반도의 영토라고 봤다. 한국 측은 왜왕의 상표문이 전혀 근거 없는 허세로 봤으며 일본 측도 왜왕의 과대망상, 혹은 그런 (한반도 남부를 통치한) 사실이 없다는 데는 동의는 하지만, 그것이 당대 왜왕의 인식 혹은 착각이었다는데 입을 모으고 있다. 즉, 아예 없는 사실을 지어낸 건 아니고 어느 정도 일정 정도의 실력을 한반도 남부에서 행사했다는 뜻이다. 외교사적 측면에서도 왜가 가야나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까지는 무리가 있다고 해석하지만, 고구려의 맞수 혹은 적수를 왜라고 생각하고 고구려에 대항할 때 왜국을 맹주라고 해석하는 측면이 많다.

2.5.3. 가야 = 임나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와 신라 유적에서 발견되는 가야의 용례는 가야 연합을 통칭하고 있으며, 전라남도 일부와 경상남도 일부에 존재하던 "국가"라는 일반명사 격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임나 가야의 용례는 일관되게 금관가야를 지칭하고 있으며 이는 임나 단독 표기에서도 동일하다. 그러나 일본서기와 일본의 당대 인식은 임나는 가야와 동일하며 이에 임나4현과 전라도 일대의 침미다례와 충북 일대를 더해서 통칭하는 명칭으로 수용된다.[34] 즉 가야 임나를 각기의 다른 나라로 취급해 6국,7국 제군사를 자칭한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당대의 일본의 인식에 의하면 가야와 임나는 똑같은 뜻이고 중복의 개념이기 때문에 6국은 5국이 되어야 하고, 7국이 6국이 되어야 뜻이 통한다. 만약 왜왕이 당대 한반도에서 통용되는 "임나" = 금관가야 + 나머지 가야 =연합의 통칭"을 지칭 했다고 해도, 일개 연합의 구성국과 연합체를 같은 항렬에 병기하고 있다는 시점에서 한계를 드러낸다. 또한 임나는 가야의 일부이므로 이 또한 중복되는 개념이다. 즉 당대 한반도에서 통용되는 개념이나 일본에서 통용되던 개념 어느쪽을 취해서 해석해도, 이상한 점이 많다. 또 왜왕은 이를 두고 황제에게 정정을 요구하지도 않고 후에는 아예 자기가 먼저 임나와 가야를 넣어 7국 제군사를 중국측에 먼저 제안한다. 이를 보면 왜왕이 허상뿐인 작위를 원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제일 적극적으로 반박한 일본사 연구자 김현구 교수 또한 임나는 가야의 일국일 뿐이라고 못 박았다.

3. 일본 사서와 비교

일본 학계에선 왜5왕을 일본 천황들에 비정하려고 하는데, 아직까지 확정되지 않고 논쟁이 지속 중이다. 그나마 금석문을 통해 왜왕 무를 유랴쿠 덴노로 비정하는 주장이 있으나 유랴쿠덴노 문서에서 보듯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다른 천황들도 시기에 맞춰서 비정하고 있다. 만일 무가 21대 유랴쿠 덴노라면 흥은 유랴쿠 덴노의 형인 20대 안코 덴노가 되며, 제는 19대 인교 덴노, 진은 18대 한제이 덴노, 찬은 17대 리추 덴노가 된다. 일단 송서에서 언급된 가계도 자체는 맞아떨어진다.


[1] 그러나 413년에 동진에 보낸 조공단은 진짜 왜국이 보냈냐에 대한 의문이 있다. 이것이 진짜 고구려가 왜구 혹은 왜국 관군을 사로잡아서 당시에 즉위하고 있던 왜왕의 명의로 된 사신으로 위장을 시킨 것이라면 히미코서진에 조공단을 파견한 이래로 421년이 중국과 맺은 최초 통교 기록이다. 후술할 내용을 참고.[2] 당대에는 중국이 분열되었고 남조 북조 스스로가 정통임을 주장하며 누가 멀리서 또 많은 제후국들을 입조시켜 조공을 받느냐를 두고 치열하게 경쟁했다.[3] 倭國獻貂皮人參, 詔賜細笙麝香. 양서(梁書)의 의희(義熙) 9년(413년)와 의희기거주(義熙起居注)를 참고하자.[4] 안동장군과 안동대장군은 다른 관직이다. 안동대장군을 자칭했지만 안동장군을 하사 받은 것이다.[5] 참고로 전지왕이 20여 년 전에 하사 받은 작위는 진동장군이므로 안동장군과 진동장군의 등급은 4단계 차이다. 진동장군(鎭東將軍), 중군장군(中軍將軍), 진군장군(鎭軍將軍), 무군장군(撫軍將軍), 안동장군(安東將軍) 순서다.[6] 제군사직 자체로도 백제왕의 관직인 장군호보다 한등급 아래의 직위라고 한다.[7] 이와 연관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일본서기에서는 비유왕을 실존 인물로 취급하지 않는다. 단순히 비유왕에 반대하는 백제 측 전승을 옮겨 적은 것인지, 아니면 선술했듯이 일본 측에서 비유왕을 백제왕으로 인정하지 않아서인지는 불확실하다.[8] 사망년도는 477년.[9] 임나와 가라. 혹은 가야는 같은 나라로써 광개토대왕 비석에도 임나가야라고 하나의 국가라고 지칭하지, 두 개의 나라라고 따로 구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육국이 아니라 오국이어야 하는데 이것이 중국 황실 측에서 대충 구색 맞추기로 인가 해줬다는 근거다.[10] 사실 백제도 신라가 자신들의 속국이라고 중국에 거짓말을 한 적이 있고 그게 양직공도에 기록돼 있다. 한반도 사정을 잘 모르는 중국에다가 서로 자기들 유리한 대로 주장하는 일은 고대 동아시아에서 꽤 자주 벌어지는 일이었다.[11] 정작 자신들은 항해술과 조선기술이 부족해서 백제를 통해 백제의 선박을 타고 교류하고 있으면서, 백제를 지배하고 있다고 선전하는건 덤이다.[12] 5세기 후반 대가야는 호남까지 영향력을 뻗어 관련 유적을 다수 남길 정도로 전성기를 구가했고, 중국에 사절단을 보낸 것도 본래 내륙 고령 세력인 대가야가 섬진강 유역을 장악해 가능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13] 혹은 조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통칭하는 명칭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노중국 교수의 견해이다[14] 노중국 교수는 춘추좌씨전의 용례를 들어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지칭하는 단어라 했고 실제로 조녜를 구글에서 중국어로 검색해보면, 고대에 사용된 돌아가신 부친을 뜻하는 말이라고 정의 되어있다[15] 정황상 백제로 의미가 통한다. 백제를 자신의 변방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백제사 전공 노중국 교수는 같은 상표문에서 백제를 백제라고 표현하고 있으니 이것은 백제가 아닌 왜의 지방를 뜻한다고 해석했다[16] 일본서기가 인용한 기사 중 비슷한 내용이 있지만 이 사건은 게이타이 덴노 치세인 531년에 일어났다. 이주갑인상은 실제 사건을 더 이른 시기로 당기는 것이지 더 뒤로 밀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둘은 다른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17] 묘하게도 상표문을 보낸 478년은 백제 개로왕과 그의 왕자들이 고구려에게 죽은 지 3년이 되는 해이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의하면 개로왕은 475년에 사망했다.[18] 고구려의 정복을 꾀했으나 실패했다는 뜻이다.[19] 일본측이 석회를 발라서 의도적으로 조작했다는 석회 도포 및 변조설을 적극적으로 반박한 학자이기 때문에 일본측에서는 자신들이 유리한 주장만 편집해서 이용, 곡해 하기도 한다.[20] 임나일본부설 목록에 첨부된 1차 한일공동역사연구회 5세기 노중국 교수의 논문 내용이다.[21] 소아만치(蘇我滿智)의 아들 소가노 카라코(蘇我韓子)이며 소가노 카라코(蘇我韓子) 아들은 소아고려(蘇我高麗)이다.[22] 개로왕이 고구려 출신 승려 도림의 거짓말에 속은 듯하다.[23] 실제로 고구려는 당대에 남조와 북조에 동시에 통교하며 양다리 외교를 했다.[24] 실제로 비근한 예로 신라를 보면 6세기 초까지 제대로된 문장을 한자로 기록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한자를 쓰긴 썼는데, 어순을 고대 신라어 그대로 사용했다고..그런데 신라는 왜국보다 훨씬 오래전에 한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5-6세기에 한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5세기 일본의 문서행정이나 문장력이라... 안 봐도 뻔하다.[25] 교토, 오사카, 나라를 아우르는 일본 지방을 가리키는 말로 우리나라로 치면 경기도에 해당한다. 여기서 현대 일본 문화가 탄생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참고로 하니하라 가즈로(埴原和郞)를 비롯한 많은 일본 학자들이 기나이 주민들이 한국인과 유전적 면을 포함한 많은 특성 상에서 유사하다고 끊임없이 지적했다.[26] 기나이의 중심부이자 고대 일본 문화의 정수가 탄생했던 아스카를 한자로 飛鳥, 明日香이라 읽는데, 이러한 단어들은 적어도 일본어로 훈독하면 절대 '아스카'라는 발음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한국어로 훈독하면 飛의 뜻은 '날다'이고 鳥의 뜻은 '새'이다. '날다'와 '새'는 중세 한국어 시절에도 그 형태가 '날다'와 '새'였으므로 고대 한국어에서도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아스카는 '날새' 정도로 풀이되며 한국어 화자라면 이를 明日香과 비교해서 쉽게 '날이 새다'라는 의미를 이끌어낼 수 있다. 또 '明日'은 예나 지금이나 '내일'이라는 뜻으로 쓰여 왔으며, 내일이 온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보면 '날이 새야', 다시 말하면 날이 밝아야 가능한 일이다. 또한 뒤의 '香'은 행정구역을 의미하는 한국어 단어 '고을'이라는 단어를 고대 일본어로 かをり(kawori) 또는 かをる(kaworu)라고 발음되는 '香'자를 가져와서 표기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고을은 중세 한국어에서는 'ㄱㆍ옳', 예일식 발음으로 전사하면 'kowolh'이었다. 또 아스카 또한 '아스'가 아침을 뜻하는 아사(朝)의 변형된 형태이고 '카'가 明日香의 香과 같이 고을이라는 말을 음역한 글자임을 알 수 있다. 정리하자면 '아침고을' 정도가 되겠다. 따라서 飛鳥나 明日香은 고대 일본어 화자가 아닌 고대 한국어 화자들이 지은 이름이며, 일본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백제의 영향력을 감안할 때 백제 멸망 이전, 기나이 지방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며 살아가던 사람들은 고대 한국인, 특히 백제인들이라 추정해 볼 수 있다.[27] 유랴쿠 덴노, 부레쓰 덴노 등을 포함한, 게이타이 덴노 이전의 덴노들은 실존 여부조차 불확실하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저자들이 이전부터 실존했던 어떤 지방의 대호족을 모델로 하여 가상의 덴노를 창작해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예를 들면 獲加多支鹵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호족이 고사기, 일본서기에서는 천황으로 묘사되었고, 獲加多支鹵 정도의 발음이 나는 고사기에서의 '若建'이나 일본서기에서의 '幼武' 등의 이름으로 표기되었던 것이 그 말이다. 또 위의 왜왕이나 이나리야마 철검에 기록된 대왕이라는 칭호도 사실 실제로 왕이 아닌데도 그렇게 인식되어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 수백 년 후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도 자신은 쇼군인데도 불구하고 명나라로부터 일본국왕(日本國王)이라 인정받았고 자신도 그렇게 칭했다.[28] 통일이라고 해봤자 가야 연맹의 연합 수준으로 지방 호족의 수장 정도격이고 강력한 중앙집권을 이룩했다고 볼 수 없다. 강력한 중앙집권을 이룩한 시기는 이보다 훨씬 후대이다.[29] 이러한 관념으로 왜5왕 중 한 명인 무(武)을 웅략천황에 비정하는 학설이 있다.[30] 祖禰라고 기록 되어있는데, 그 뜻을 조상이라고 파악하고 일본 측에서는 통합을 이룩한 시점을 3-4세대 정도 앞으로 당겨오는 거다.[31] 이는 백제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보이는데, 왕족이나 유력 호족들의 관직을 황제에게 요청해 왕 자신의 발 아래에 두고 충성을 요구하는 것이 보인다. 대표적 경우가 개로왕의 아들 부여곤지다. 이것을 사가제(私假制)적 질서 또는 가수제(假授制)적 질서라고 말한다. 자세한 내용은 제2차 한일공동역사연구회 하마다 고사쿠의 논문 315쪽을 참조.[32] 노중국 교수의 논지는 일본은 5세기 이르러 통일의 초석을 마련 했으므로,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고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된 왜군의 존재를 축소하려고 했고, 일본 측은 최대한 일본열도가 통일된 시기를 빠르게 잡아, 최대한 왜군의 영향력을 인정 받으려는 취지이다. 다만 원문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노중국 교수는 조부의 세대에 통일을 이룩한 것마저도 신빙성이 의심된다, 그러니깐 고고학적 연구도 수반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으므로, 상표문의 조예라는 용례는 차치하고서라도 왜왕 무가 허세를 부리고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이는 단지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하는 견지에서 일본 측과 토론을 이끌어가기 위한 취지의 발언으로 추정된다.[33] 왜국 자신들에게 당면한 위협은 조공을 하기 위한 보물선 등이 약탈 당하는 데 위험이 있다는 것이지, 고구려가 왜국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은 아니라고 해석하는 것이다[34] 현재에 와서는 이런 일본서기의 와전을 받아들여 통칭상 임나=가야라고 하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