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7-22 15:45:12

부여태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16b6b, #008080 20%, #008080 80%, #016b6b); color: #fbe673;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fbe673> 제후왕 및 후작
우현왕 좌현왕 불사후 면중후
부여기 부여곤지 부여례 목간나
도한왕 아착왕 매로왕 불사후
저근 부여고 부여력 부여고
매라왕 벽중왕 불중후
사법명 찬수류 해예곤
섭정 비정통
전지왕 섭정 찬탈 비정통 비정통
부여훈해 부여설례 진이왕 부여태
부흥운동 대방군왕 (멸망이후)
제32대 국왕 대방군왕 대방군왕
풍왕 부여융 부여경
문헌 상 언급
음태귀수왕 덕좌왕 호왕 진왕
추존
태조 도모왕
}}}}}}}}}



<colbgcolor=#00A6A9><colcolor=gold>泰王
태왕
성씨 부여(扶餘)
태(泰)
부왕 의자왕(義慈王)
재위 기간 음력 660년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백제 의자왕의 둘째 아들이다. 백제멸망전 당시 사비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칭왕하고 나당연합군과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2. 생애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 웅진강 입구의 전투에서 당군에게, 황산벌 전투에서 신라군에게 패배해 수도 사비성 공격이 눈앞에 다가오자 부왕 의자왕과 태자 부여효는 좀 더 수비하기 좋은 북쪽 웅진성으로 피신했다. 이 때 부여태는 사비성에 남아서 떠난 아버지 대신 멋대로 백제왕을 자칭하며 사비성을 군사로 굳게 지켰다.

그러나 형 부여융과 조카 부여문사(태자 부여효의 아들) 등은 서로 논의하기를, 의자왕이 잠시 사비성을 떠났을 뿐인데, 부여태가 이렇게 멋대로 왕 행세를 했다간 나중에 당군이 물러나기라도 한다면 우리도 부여태에게 동조한 것으로 몰려 안전하지 못할 것이라 여겨 측근을 데리고 밧줄을 타며 사비성을 탈출했다. 부여태는 탈출하는 이들을 보고도 어쩔 수 없어 막지 못했다.

결국 몇 차례 나당연합군과의 전투가 있었고 당군 병사가 사비성에 뛰어올라와 깃발을 세우자 부여태는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후에 백제가 멸망한 뒤 당의 소정방은 의자왕과 왕족, 귀족, 백성들을 당나라로 끌고 갔고 부여태 역시 함께 끌려가 당에서 일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