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1 22:59:47

백제멸망전

파일: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png 신라의 대외 전쟁·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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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80><colcolor=#fbe673,#f9d537> 생애 및 활동 <colbgcolor=#fff,#1f2023>백제멸망전 | 백제부흥운동
가족 증조부 흑치문대 · 조부 흑치덕현 · 아버지 흑치사차
아들 흑치준 · 딸 낙랑군부인 흑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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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멸망전
百濟滅亡戰
Baekje–Tang War
<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시기
(음력)
660년 (의자왕 20년) 3월[1] ~ 660년 7월 18일 (양력 9월 1일)[2]
장소 웅진강, 황산벌, 사비성, 웅진성
원인 백제 내부의 혼란과 분열
교전국 <rowcolor=black> 신라-당 연합
(공세)
백제
(수세)
주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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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군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태종 무열왕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태자 김법민[3]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상대등 김유신[4]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장군 김흠순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좌장군 김품일[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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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독군 김문영[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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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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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tang_fel2.jpg 좌위장군 유백영[19]
파일:tang_fel2.jpg 행군장사 중서사인 양행의[20]
파일:tang_fel2.jpg 부총관 좌영군장군 김인문[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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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tang_fel2.jpg 좌효위낭장 유인원[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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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
파일:백제 군기.svg 의자왕[24]
파일:백제 군기.svg 은고부인[25]
파일:백제 군기.svg 부여융[26]
파일:백제 군기.svg 부여효[27]
파일:백제 군기.svg 부여태[28]
파일:백제 군기.svg 부여연◎[29]
파일:백제 군기.svg 부여풍[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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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백제 군기.svg 부여궁[32]
파일:백제 군기.svg 부여문사[33]

귀족
파일:백제 군기.svg 대좌평 사택천복[34]
파일:백제 군기.svg 좌평 각가◎[35]
파일:백제 군기.svg 좌평 의직[36]
파일:백제 군기.svg 좌평 충상[37]
파일:백제 군기.svg 좌평 국변성◎[38]
파일:백제 군기.svg 좌평 사택손등[39]
파일:백제 군기.svg 좌평 상영[40]
파일:백제 군기.svg 좌평 정무[41]
파일:백제 군기.svg 웅진성주 예식진
파일:백제 군기.svg 예군
파일:백제 군기.svg 진법자←[42]
파일:백제 군기.svg 난한←[43]
파일:백제 군기.svg 난무←[44]

무장
파일:백제 군기.svg 달솔 계백[45]
파일:백제 군기.svg 달솔 흑치상지[46]
파일:백제 군기.svg 별부장 사타상여[47]
파일:백제 군기.svg 은솔 귀실복신[48]
파일:백제 군기.svg 달솔 부여자신[49]

불명
파일:백제 군기.svg 달솔 자간←[50]
파일:백제 군기.svg 은솔 무수←[51]
파일:백제 군기.svg 은솔 인수←[52]
병력 연합군: 172,711명
- 김유신군: 50,000명
- 소정방군: 122,711명

전선: 1,900척
백제군: 15,000명 이상
- 계백군: 5,000명
- 사비성 군: 10,000명 이상
피해규모 피해 규모 불명 전사자: 14,980명
- 계백군: 4,980명
- 사비성군: 10,000명

포로: 12,963명
- 왕, 왕족, 관료: 93명
- 백성 12,870명
결과 신라-당 연합의 승리
영향 백제의 멸망
- 백제부흥운동 전개

1. 개요2. 전개
2.1. 웅진강 입구의 전투2.2. 황산벌 전투2.3. 사비 전투2.4. 의자왕의 웅진성 파천과 항복
3. 결과4. 관련 설화5. 같이보기

[clearfix]

1. 개요

백제멸망전()은 삼국통일전쟁의 일부로, 660년 음력 3월부터 660년 9월 1일(음력 7월 18일)까지 나당연합군백제 사이에서 일어난 백제 최후의 전쟁이다. 다만, 양측 간의 실질적인 교전은 음력 7월 9일부터 2주 사이에 벌어졌다.

전쟁의 역사적 배경 및 전후 상황에 대해서는 삼국통일전쟁 문서 참조.

2. 전개

2.1. 웅진강 입구의 전투

왕은 군사를 모아 웅진어귀를 막고 강가에 주둔시켰다. 소정방이 강 왼쪽 언덕으로 나와 산 위에 진을 치니 그들과 싸워서 아군이 크게 패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권6 의자왕 20년(660년)
百濟據熊津江口以拒之 定方進擊破之 百濟死者數千人 餘皆潰走
백제가 웅진강의 입구에 의지하여 방어했지만 소정방은 나아가 격파하였다. 백제 사람 수천 명이 죽고 나머지 무리는 무너져 달아났다.
자치통감》 권200, 660년 8월 기사

바다를 건너온 당나라의 13만 대군[53]은 먼저 덕적도에서 신라 태자 김법민과 만나 백제 협공 계획을 완성했고, 신라 육군이 백제의 동쪽에서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금강 하구를 통해 백제의 수도권으로 진격했다.

의자왕은 계백, 충상, 상영이 이끄는 군대를 황산으로 파견하는 한편 웅진강(현 금강) 지역 하구에도 군대를 배치했지만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에게 돌파당하게 되었다.[54]

2.2. 황산벌 전투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황산벌 전투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한편 황산으로 신라군을 막기 위해 파견된 계백, 충상, 상영 등이 이끄는 결사대 5천의 백제군은 김유신 등이 이끄는 신라군 5만과 맞붙게 되었다. 항목 참조.

결국 전력의 열세를 뒤집지 못하고 황산벌 전투에 참여한 백제군은 전멸했지만 신라군과 당나라군의 합류 전략을 하루 동안 지연시켜서 신라군과 당나라군 간 갈등이 발발하기도 했다.(독군 김문영 사건)

2.3. 사비 전투

王師乗潮, 舳艫銜尾進鼓而譟, 定方將歩騎, 直趍眞校勘 都城, 一舎止. 我軍悉衆拒之, 又敗, 死者萬餘人.

이때 당나라 군사는 조수가 밀려오는 기회를 타고 배를 잇대어 북을 치고 떠들면서 들어오고, 소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장 도성 30리 밖까지 와서 멈추었다. 우리 군사들이 모두 나가서 싸웠으나 다시 패배하여, 사망자가 1만여 명에 달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권6 의자왕 20년(660년)

웅진강 입구에서 당군의 저지가 실패하고 사비성으로부터 불과 30리 지역까지 당군이 진출하게 되었다. 백제는 최소 1만명 이상의 군대를 동원해서 당군을 공격했지만 사비 부근의 전투에서 대패했고 당군이 사비성까지 육박하자 의자왕은 패망을 직감하고 부여효와 함께 웅진성으로 도피하게 된다.

사비성에서는 의자왕의 3남인 부여태가 칭왕을 하면서 저항했지만 당나라군이 사비성에 깃발을 꽂자 하루만에 항복하였고 왕자 부여융, 좌평 사택천복 등도 신라군에게 항복했다.

다만 사비 부근에서 일어난 전투에서는 신라군의 활약에 대한 기록이 아예 없는 걸 보면 당나라군이 독자적으로 치렀을 가능성도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상기한 기록을 참조할때 당군이 비교적 수월하게 웅진강을 돌파한데 비해 신라군은 주력이 황산벌에서 하루 남짓하게 묶여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2.4. 의자왕의 웅진성 파천과 항복

660년 음력 7월 13일 밤 사비성에서 태자 부여효웅진성으로 파천하게 되었다. 하지만 웅진성에서도 버티지 못했고[55] 5일 뒤인 660년 음력 7월 18일에 북방령 겸 웅진성주 예식진이 반란을 일으켜 의자왕을 체포하고 당군에 항복했다.[56]

이미 당군과 신라군과의 전투로 인하여 2만에 달하는 전력을 상실한 데다가[57] 백제 왕족과 조정인사들이 사비성에서 항복한 점, 백제가 당을 회유했던 회유책 역시 실패했기 때문에 항복한 걸로 해석된다. 하지만 2000년대 당나라에서 예씨 묘지명들이 발굴되고,(예식진 참고) 2010년 예씨 집안의 가족묘가 발굴되었는데 손자인 예인수의 묘지에 조부가 의자왕을 잡아서 바쳤다고 적혀있어 배신으로 인해 멸망했다는 설이 현재는 힘을 얻고 있다. 이전부터 일부 학자들은 웅진성의 위치와 구조 등을 생각했을 때 아무리 병력이 적더라도 5일 만에 항복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었는데[58], 예식진의 반란 기록으로 이 의문이 해결된 것.

3. 결과

백제는 멸망하고 백제의 영역 대부분에는 웅진도독부가 설치되어 당나라에 의해 다스려지게 되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소정방이 당평제비로 불리는 글을 탑의 초층에 각석하면서 백제탑이 아닌 당의 승전탑으로 오인되기도 했었다.

항복하지 않았던 나머지 백제군들은 남잠성과 정현성 등을 점거해 버텼다고 한다. 좌평 정무는 군사를 모아 두시원악(전북 무주군으로 추정)으로 들어가 항전했다. 이어서 귀실복신, 도침, 흑치상지, 부여자신, 부여풍 등이 백제부흥운동을 대대적으로 일으켰고, 이들은 663년 백강 전투로 패망할 때까지 약 3년 동안 백제 영역의 일부를 점거한 채 나당 연합군과 지속적으로 교전했다.

백강 전투 패배 이후에도 664년 사비성에서 백제인들이 봉기를 일으켰으나 진압되었고, 668년 아마(阿麻)의 항복기사[59]을 보면 백제 멸망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저항했지만 백제의 부활로는 이어지지는 못했다. 얼마안가 나당전쟁이 발생해 웅진도독부가 축출당하면서 당이 세워놓은 부여융 정권 역시 백제 지역에서 쫓겨나게 된다. 결국 676년 기벌포 해전에서 당나라군이 패배한 뒤, 신라가 옛 백제 전역을 완전히 차지하게 된다.

200여년 뒤 백제의 국명을 딴 후백제가 건국되었고 고려 시대의 이연년 형제의 난 또한 백제 부흥을 표방한 점에서 여몽전쟁 이전인 고려시대 전반까지는 백제에 대한 의식이 남아있던 걸로 보여진다. 후백제와 백제부흥운동과의 연관성 문제에 대해서는 해당문서 참조.

한편 대야성 전투에서 백제 측에 붙었던 검일모척은 백제 멸망 후 신라군에게 붙잡혀 처형당했다.[60]

4. 관련 설화

百濟古記云 “扶餘城北角有大岩, 下臨江水. 相傳云義慈王與諸後宫知其未免, 相謂曰 ‘寧自盡不死於他人手’, 相率至此投江而死, 故俗云墮死岩斯.”
백제고기에 이르기를, "부여성 북쪽 모서리에 큰 바위가 있는데, (바위의) 아래는 강물과 만난다. 서로 전하여 내려오기를 의자왕과 여러 후궁들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서로 일컬어 말하기를 '차라리 자진을 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고 하여 서로 이끌고 이곳에 이르러 강에 몸을 던져 죽었으므로 속칭 타사암(墮死岩)이라 한다."
《삼국유사》 권1 기이 태종춘추공
삼국유사에 인용된 백제고기에는 낙화암 전설의 원형으로 보이는 타사암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다만 지역 전승을 차용한 것과 달리 의자왕은 금강에 투신하지 않고 당으로 끌려가서 사망했다.
호암사로부터 물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부소산(扶蘇山)에 이르면, 산에 한 괴상한 바위가 있어 강가에 걸터 앉아 있는데, 바위 위에 용을 낚던 흔적이 있다. 민간에 전하기를,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칠 때, 비ㆍ바람이 갑자기 닥쳐서, 흰말[白馬]로써 〈미끼를 삼아〉 용을 낚은 후 쳐 이겼으므로, 강을 백마(白馬), 바위를 조룡대(釣龍臺)라 하였다." 한다.
세종실록지리지》 충청도 공주목 부여
또한 소정방과 관련된 설화도 존재한다. 소정방이 백제를 침공할 때 비바람이 갑자기 닥치자, 조룡대에서 백마를 미끼로 삼아 용을 낚아챈 후 백제와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것. 금강어귀 혹은 사비성 근교 전투에서 당군이 백제군을 패배한 일화가 지역 전설로 남은듯하다.

5. 같이보기



[1] 양측 간의 실질적인 교전은 음력 7월 9일부터 벌어졌다.[2] 경신(庚申)년 갑신(甲申)월 정사(丁巳)일로, 그레고리력 660년 9월 1일 토요일은 음력으로 7월 18일, 율리우스력 8월 29일이다.[3] 당시에는 태자 신분으로 참전했다.[4] 전쟁 직전인 660년 음력 1월에 상대등으로 임명되었다.[5] 좌장군이라는 직책은 삼국사기황산벌 전투 기사에서 등장한다. #[6] 659년 음력 8월에 병부령으로 임명되었다.[7] 김품일의 아들. 황산벌 전투에서 전사했다.[8] 김유신의 조카이자 김흠순의 아들. 황산벌 전투에서 전사했다.[9] 당과 신라군의 합류가 늦어졌다는 이유로 처형당할 뻔했으나 김유신에게 만류되어 목숨을 건졌다.[10] 罽衿卒 宣服. 신라의 기병 부대 계금당(罽衿幢)을 이끌었다. 선복을 포함하여 이하의 신라 인물들은 모두 전후 논공행상에서 등장한다.[11] 軍師 豆迭.[12] 儒史知. 백제 정벌전에서 공을 세우고 전사했다.[13] 未知活. 백제 정벌전에서 공을 세우고 전사했다.[14] 寶弘伊. 백제 정벌전에서 공을 세우고 전사했다.[15] 屑儒. 백제 정벌전에서 공을 세우고 전사했다.[A] 삼국유사에서는 황산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기술되어 있다.[A] [18] 당나라 백제원정군인 신구도행군의 대총관(총지휘관)을 맡았다.[19] 劉伯英.[20] 梁行儀.[21] 신라의 왕자로, 당시 당의 볼모로 파견되어 있었다.[22] 董寶亮. 김유신과 소정방이 김문영 문제로 대립하자 소정방의 발을 밟고 신라군이 변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귀띔해주었다. 장자방한고제의 발을 밟고 귀띔해줬다는 일화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23] 소정방의 당군이 철수한 이후 당군 1만명을 이끌고 남아서 백제에 주둔했다.[24] 항복 이후 당나라로 끌려가 생을 마감했다.[25] 항복 이후 당나라로 끌려갔다.[26] 항복 이후 당으로 끌려갔지만 3년 뒤에 귀환해서 웅진도독 지위를 얻는다. 취리산 회맹에서 명목상 신라 문무왕과 동일한 위치가 되어 사비 부근의 지배를 얻어냈지만 나당전쟁으로 백제에서 축출당한다.[27] 백제 멸망 시에 태자라는 기록이 있어서 부여융과 충돌한다. 의자왕과 함께 당으로 끌려갔다.[28] 의자왕이 웅진성으로 도주하고 하루 만에 칭왕했다가 항복해버렸다(...).[29] 의자왕의 아들로 항복 후 당나라로 끌려갔다.[30] 멸망 당시 백제가 아닌 왜국에 체류하고 있었으나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하면서 백제로 귀국했다.[31] 유인궤의 상소문에서만 등장하는 백제 왕자. 백제부흥운동 붕괴 이후 왜국에 체류하고 있었으며 부여풍과 연계하려고 했다.[32] 의자왕의 서자. 다만 '궁(躬)'을 이름으로 볼지 부사로 볼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사비성 전투 직전 직접 좌평 6인과 함께 소정방에게 가서 죄를 빌었지만 내쳐졌다고 한다.[33] 의자왕의 손자이자 부여융 혹은 부여효의 아들. 부여융과 함께 사비성을 빠져나와 나당연합군에 항복했다.[34] 멸망 후 당나라로 끌려갔다.[35] 당나라 군에게 철수해달라는 글을 보냈지만 먹히지 않았다. 멸망 후 당나라로 끌려갔다.[36] 당군을 먼저 격파해야 한다는 계책을 낸 이후 행적 불명.[37] 황산벌 전투 이후 신라군에게 항복. 이후 신라군이 되어 백제부흥군과 싸운다. 신라 관등은 아찬.[38] 당나라로 끌려갔다.[39] 백제 멸망 후 당나라로 끌려갔다.[40] 황산벌 전투 이후 신라군에게 항복. 이후 신라군이 되어 백제부흥군과 싸운다. 신라 관등은 일길찬.[41] 백제 멸망 이후 두시원악에서 부흥운동을 주도한다.[42] 진법자묘지명에서 등장. 당군에 항복했다.[43] 난원경묘지명에서 등장. 난원경의 할아버지로, 멸망 후 웅진도독부 장사를 지냈다.[44] 난원경묘지명에서 등장. 난원경의 아버지로, 멸망 후 웅진도독부 지심주 제군사, 자사를 지냈다.[45] 황산벌 전투에서 전사.[46] 당군에게 항복. 이후 백제부흥운동에 재합류해서 활약했지만 백강 전투 이후 당군에 항복하게 된다.[47] 당군에게 항복. 흑치상지와 행적은 동일하다.[48]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 멸망 이후 백제부흥운동을 주도하며 좌평을 자처했다.[49]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 멸망 이후 부흥운동을 주도하며 좌평을 자처했다.[50] 自簡. 전쟁 종료 후 신라의 논공행상에서 등장한다. 신라에 항복해 공을 세웠으나 구체적 내용은 알 수 없다. 신라군이 되어 661년 옹산성의 백제부흥군을 토벌했다. 신라 관등은 일길찬.[51] 武守. 전쟁 종료 후 신라의 논공행상에서 등장한다. 신라에 항복해 공을 세웠으나 구체적 행적은 알 수 없다. 신라 관등은 대나마.[52] 仁守. 전쟁 종료 후 신라의 논공행상에서 등장한다. 신라에 항복해 공을 세웠으나 구체적 행적은 알 수 없다. 신라 관등은 대나마.[53] 삼국유사에서는 향기(鄕記)를 인용해 당군이 12만 2711명, 배는 1천 9백 척이라고 기록하였다.[54] 신채호조선상고사에서는 의직이 백강 어귀에서 당군에게 저항하다 전사했다고 기록했으나 정사 기록에는 없는 내용이다. 신라인이 의직이 죽은 곳을 조룡대(釣龍臺)로 불렀다는 내용을 수록한 것으로 보아 지역 전설을 차용한 걸로 추정된다.[55] 라고 했지만 후술할 예식진의 행적을 연구하면서 최근에는 제대로 싸우기도 전에 예식진의 반란으로 멸망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당시 신라와 당군의 이동 속도 등을 계산했을 때 5일이면 웅진성으로 나당연합군이 도착조차 제대로 하기 이전이다.[56] 이때 현 충청남도 공주시 신원사(사찰)(新元寺)의 부속 암자인 고왕암(古王庵)에 백제 왕자가 도망쳐 숨었다가 잡혔다는 전설이 내려오는데 정확히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다. 부여융이었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때 부여융은 사비성에 있었다가 나당연합군에게 항복했기 때문에, 고왕암 전설의 백제 왕자일 가능성은 낮다.[57] 황산벌 전투에서 5천, 웅진강 전투에서 수천명을 잃고 뒤이어 사비 전투에서 1만이 넘게 사망하면서 완전히 소모되어 버린 걸로 추정된다.[58] 웅진성의 구조는 삼면이 강과 절벽으로 둘러쌓여 있어 한 곳만 집중적으로 막아도 오랫동안 버틸 수 있는 훌륭한 방어진지 형태다. 훗날 오합지졸 그 자체였던 김헌창의 난의 세력들조차 중앙군과 웅진성에서 열흘 가까이 항쟁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것이다. 거기에 예전에 백제의 수도였고 당시에도 비교적 많은 인구가 있어 충분한 물자와 인적자원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5일도 버티지 못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리고 다 떠나서 5일이면 아직 나당연합군이 웅진성에 도착해서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하기도 부족한 시간이었다.[59]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아마도(阿麽島)가 전남 여수의 섬으로 나온 점을 보면 전라남도 여수 근처의 섬으로 추정된다.[60] 조국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 대야성 성주의 아내가 무열왕의 딸이자 문무왕의 동생이었다. 어떻게 봐도 최소 사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