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5 20:53:06

상대등

1. 개요2. 역사3. 역대 상대등 역임자4. 같이보기5. 여담

1. 개요



신라시대 귀족 권력을 대표하는 최고 관직이다. 상대중등, 상신이라고도 불렸다.

오늘날로 치면 국회의장이나 상원의장과 비슷하다. 화백회의 참석자 중 우두머리이다. 최고 관직이지만 이벌찬과는 다른데, 비유하자면 이벌찬은 1급 공무원 같은 관등명이고 상대등은 국회의장 같은 관직명이다. 물론 상대등 자체가 최고위 관직이므로 상대등을 역임하는 인물은 관등 역시 높은 사람들이 맡았다.

귀족의 대표자로서 왕권견제하는 신권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으며, 국왕을 보좌하며 행정을 맡는 시중과 성격은 좀 다르지만 서로 겹치는 부분이 있었다. 따라서 왕권의 변화와 함께 상대등과 시중의 파워는 엎치락 뒤치락했다. 왕권이 가장 강했던 시기에는 거의 형식적인 정도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신라에서 '대등'을 다른 말로 '신(臣)'이라 표기하기도 했다는 정황이 나타난다. 일본 측 기록인 일본서기케이타이 덴노 23년(529년) 3월 기사에서는 당시 이질부례(이사부)가 지냈던 상신(上臣)이라는 신라 관등을 소개하고 이를 훈독해 마카리타로(萬加利陁魯)라고 써 놓았는데[1], '등'의 당시 음이 '타로'에 대응하는 것을 보여준다.[2] 일본 기록에 전하는 백제어로 '위'는 '무쿠', '크다'는 '코니'나 '코', '신하'는 '다로'라고 했는데, 이를 바탕으로 '마카리타로'의 뜻을 유추하는 의견도 있다. 참고로 '마카리(萬加利)'가 붙는 관직은 주로 계승권이나 대표성이 강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3]

그러나 상신과 상대등이 음운상 일치하기는 해도, 속일본기에 등장하는 상신은 상대등과는 다른 관직이다. 일본서기에서 상신으로 나오는 이사부김춘추, 속일본기에서 상신으로 나오는 김순정와 김옹 중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상대등 임명자와 겹치는 사람은 하나도 없으며, 성덕대왕신종에서 대각간 김옹이 상상(上相)으로 등장하는 것과 다르게 그 당시 상대등이었던 김양상은 김옹보다 낮은 각간의 지위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서도 선덕왕 말년 김경신이 상대등이라 하였으나 삼국유사에서는 김경신은 이재(二宰)이고 김주원이 상재(上宰)라고 기록되어 있다.

2. 역사

상대등 이전에 대등(大等)이란 관직이 존재했는데, 주와 군에 파견된 행사대등, 소경의 장관인 사대등, 중앙정치기구의 차관인 전대등 등으로 분화되어 국정을 담당했다.

법흥왕 대인 531년 처음으로 철부가 상대등으로 임명되어 시작되었는데, 그 이전까지 왕이 직접 주재했던 화백회의를 대신해 주재하는 역할을 맡았다. 적당한 왕위계승권자가 없는 상황이 닥치면 상대등은 왕위를 계승할 후보 우선순위로 여겨지기도 했다. 화백회의는 만장일치 합의제로 신라 성립 초기부터 존재하였으며 왕권이 너무 강해지는 것을 견제, 심지어 특정 왕(진지왕)마저 폐위시킬 수 있었을 만큼 권한이 막강했다. 이런 화백회의의 장(長)이 상대등이다.

진흥왕 시기 건립된 단양 신라 적성비에는 "대중등(大衆等)"이란 관직명이 보이고 있으며, 이후 작성된 진흥왕 순수비삼국사기에도 비슷한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마운령비황초령비에는 7~8명의 대등, 창녕 척경비에는 20~21명의 대등이 기록되어 있다.

선덕여왕 때 상대등이었던 비담반란을 일으켰다가(비담의 난) 오히려 털리고 김춘추는 화백회의를 장악한다. 성골 국왕세력과 상대등의 충돌, 그리고 김춘추 김유신 세력이 이를 봉합하는 과정에서 성골 국왕과 상대등의 권위는 동반 하락했고, 김춘추 세력이 사실상 실권을 잡는다. 진덕여왕을 거쳐[4] 결국 김춘추가 진골 중 가장 우위임을 인정받아 왕에 오른다. 원래 진덕여왕 사후 알천을 왕으로 추대했으나 알천이 스스로 사양했는데 이는 상대등의 몰락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김춘추가 권력을 잡은 진덕여왕 대부터 중국식 정치제도의 수용을 통해 국왕 중심의 관료제를 강화하면서 상대등으로 대표되는 귀족 권력이 약해졌고, 중대 왕권의 버팀목 역할을 하던 김유신을 상대등에 임명하면서 중대 왕권이 귀족회의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이 시기는 이전 시대와 달리 상대등이 국왕 견제가 아니라 역으로 왕권을 보좌하는 위치로 전락한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귀족세력의 반발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때로는 타협책으로 귀족 세력을 실질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실세 귀족을 상대등에 임명하기도 했는데, 이미 김춘추-김유신계가 권력을 장악하였음에도 김춘추 즉위 후 김유신보다 먼저 상대등이 된 금강이나[5] 680년(문무왕 20년)에 상대등에 오른 김군관이 그러한 부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상대등이 전제왕권에 방해물이 된다고 여겨지면 가차없이 숙청당하기도 했는데, 신문왕김흠돌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반란에 직접 연루된 것도 아닌 전직 상대등 김군관을 비롯한 진골 귀족들을 대거 숙청한 사건이 그 예다. 이렇게 전제왕권이 강화되고 상대등의 권력도 한동안 물 밑으로 가라앉으면서 대신 왕을 보좌하며 실무를 담당하는 직책인 시중의 권한이 막강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전제왕권이 약화되는 중대 후기에는 상대등의 비판적 기능이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는데, 경덕왕 15년(751) 상대등 김사인이, 혜공왕 13년(777) 상대등 김양상이 정치상황을 비판한 것이 그 예에 해당한다.

왕권이 약해진 하대에 들어서 상대등은 다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하대의 첫 왕인 선덕왕이 상대등이라는 지위를 바탕으로 해서 왕위에 올랐고, 이후로도 상대등 역임자가 왕위에 오르는 일이 많아졌다. 자연스레 상대등은 유력 왕위계승권자로 인식되었고, 실제로 상대등의 지위를 이용해 찬탈을 시도하는 경우도 생기고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로 급부상했다. 물론 왕이 되고 나면 자기 자리를 뺏기면 안 되니까 가능하면 가까운 친인척을 상대등으로 임명하는 경향이 생겼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왕족 사이에서도 작은 집안끼리 분파를 이루는 원인이 되었고 피튀기는 하대 왕위쟁탈전의 원인 중 하나가 된다.

3. 역대 상대등 역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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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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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대 제34대 제35대 제36대
김명 김귀 장보고 김예징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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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김위홍 준흥 김성 계강
제45대 제46대
박위응 김성
문헌상 기록이 확인된 인물
김춘추, 김순정, 김옹, 김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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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흥왕 때 최초의 상대등인 철부부터 경명왕 3년(919) 김성이 퇴위하기까지 400여년간 40여명의 임명 사례가 삼국사기에 전한다.
시기 이름 재임년도 비고
법흥왕 철부 531년 4월 ~ 534년 초대 상대등[6]
김구해 532년 ~ ? 금관가야 말대 군주[7]
진흥왕
진지왕 거칠부 576년 ~ ? 미사흔의 증손
진평왕 노리부 579년 8월 ~ 588년 12월 김구해 장남
수을부 588년 12월 ~ ?
선덕여왕 을제 632년 2월 ~ ? [8]
수품 636년 정월 ~ ?
비담 645년 11월 ~ 647년 정월 22일
진덕여왕 알천 647년 2월 ~ 654년 [9]
태종 무열왕 금강 655년 정월 ~ 660년 정월
문무왕 김유신 660년 정월 ~ 673년 태종 무열왕 3녀 지소부인 남편
흥무대왕(興武大王) 추존
김군관 679년 2월 ~ 681년 8월
신문왕 진복 681년 8월 ~ ?
효소왕 김문영 694년 정월 ~ 695년
김개원 695년 ~ ? 태종 무열왕 7남
성덕왕 인품 706년 정월 ~ 720년 정월
배부 720년 정월 ~ 728년 7월 [10][11]
김사공 728년 7월 ~ ?
효성왕 김정종 737년 3월 ~ ? 혜명부인 부친
경덕왕 김사인 745년 정월 ~ 757년 정월
신충 757년 2월 ~ 763년 8월 [12]
만종 763년 정월 ~ ?
혜공왕 신유 768년 10월 ~ ?
김옹 771년 이전 ~ 774년
김양상 774년 9월 ~ 780년 성덕왕의 딸 사소부인의 아들
선덕왕 즉위[13]
선덕왕 김경신 780년 ~ 785년 태종 무열왕 4녀 증손
원성왕 즉위[14]
원성왕 충렴 785년 2월 ~ 792년 8월
세강 792년 8월 ~ ?
소성왕
애장왕 김언승 801년 2월 ~ 809년 혜충태자 2남
헌덕왕 즉위
헌덕왕 김숭빈 809년 ~ 819년 2월
김수종 819년 2월 ~ 822년 혜충태자 3남
김충공 822년 정월 ~ 822년 4월 혜충태자 4남[15]
흥덕왕 김균정 835년 2월 ~ 836년 원성왕 3남 김예영 차남
성덕대왕(成德大王) 추존[16]
희강왕 김명 837년 정월 ~ 838년 정월 혜충태자 4남 김충공 장남
민애왕 즉위
민애왕 김귀 838년 ~ ?
신무왕 장보고 839년 ~ ? [17]
문성왕 김예징 840년 정월 ~ 849년 정월 김예영 차녀 남편
김의정 849년 정월 ~ ? 김균정 차남
헌안왕 즉위
헌안왕 김안 857년 ~ ?
경문왕 김정 862년 정월 ~ 874년 정월
위진 874년 정월 ~ ?
헌강왕 김위홍 875년 ~ ? 희강왕의 아들 김계명 차남
혜성대왕(惠成大王) 추존
정강왕
진성여왕
효공왕 준흥(俊興) 898년 정월 ~ ?
김성(金成) 906년 정월 ~ ?
신덕왕 계강(繼康) 912년 5월 ~ ?
경명왕 박위응 917년 8월 ~ ? 신덕왕 차남
경애왕 즉위
김성(金成) ? ~ 919년 [18]

4. 같이보기

5. 여담

  • 중학교때 삼국의 수상으로 대대로, 상좌평, 상대등을 외운 기억이 있을 것이다.


[1] 정확히는 일본서기를 주해한 석일본기의 기록이다. 한글이 창제되지 않았던 시절인 고대 한국어의 표기에서는 음독훈독이 공존했으며, 이러한 경향은 고려를 거쳐 조선의 이두 표기에까지 이어졌다.[2] 비슷한 예로 지증왕의 다른 이름이 지대로(智大路)라는 점을 통해 등(登)과 대로(大路)의 대응을 도출할 수 있다. 당시 한자음에는 ㄹ 말음이 없었기 때문에 고유어의 ㄹ 말음을 표기하기 위해 ㄴ, ㄷ, ㅇ 등의 말음을 지닌 한자를 다양하게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현대 한자음으로 비슷하게 발음되는 고구려의 관직명 대로(對盧)와 같은 어원으로 짐작하기도 하지만, 대로가 처음 기록된 문헌인 삼국지가 편찬됐을 당시인 중국 삼국시대에 대(對)자의 발음이 '두스'에 가까웠으며(쓰시마섬 문서 참조) 이를 통해 대로의 음가는 '두소로' 정도로 재구된다는 점을 간과한 주장이다. 실제로 대로는 중국 사서에서 '토졸(吐捽)'이라고 전사되기도 했다.[3] 마카리요모(왕자), 마카리오리쿠쿠(정실 부인) 등.[4] 진덕여왕 시대에 이미 최고 실권자는 김춘추였다.[5] 김춘추 다음가는 2인자이자 정권 실세인 김유신도 무열왕 7년인 660년에야 상대등에 임명되었다.[6] 일본서기에 따르면 529년(케이타이 덴노 23년)에 이사부가 상신(上臣)을 지녔던 것으로 나온다.[7] 앞서 철부가 534년 사망했다는 기록과 상충한다. 그러나 철부가 죽은 후에 따로 상대등을 임명한 기사가 없는 걸 보아서 그가 죽기 전에 이미 교체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8] 원문에는 그냥 대신(大臣)으로 나와있으나 "나라의 일을 총괄토록 했다."는 기록에 의거해 상대등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9] 일본서기에서는 647년에 상대등직을 역임하고 있던 사람이 김춘추라고 했다.[10] 나이가 들어 물러나길 청했고(727년, 728년) 이를 성덕왕이 받아들여 물려주었다. 황희?[11] 속일본기에서는 726년 당시 상대등이 김순정이라 하였다.[12] 시중 김옹과 함께 사직했다. 향가 중 하나인 원가의 작사가이다.[13] 성덕대왕신종에서는 771년 당시 김옹이 상대등으로 나오고 김양상은 제2재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속일본기에서는 774년 당시 상대등이 김옹이라고 하였다.[14] 삼국유사에서는 김주원이 상대등으로 나오고 김경신은 제2재상으로 기록되어 있다.[15] 삼국사기 본기에는 안 나오고 녹진 열전에서만 나온다.[16] 흥덕왕이 죽고 김제륭과 차기 왕위를 두고 싸우다 궁궐에서 벌어진 전투중 화살에 맞고 전사했다.[17] 삼국사기에는 안 나오고 삼국사절요에서만 나온다.[18]삼국사기》 신라본기 경명왕편에 919년에 상대등 김성을 각찬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 계강, 박위응과 공존한 것인지, 아니면 박위응이 퇴직하고 짧은 시간동안 다시 임명된 것인지는 불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