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3 12:45:59

진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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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24대 국왕
진흥왕 | 眞興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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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릉 전경.
출생
(음력)
534년
신라 금성
사망
(음력)
576년 8월 (향년 42세)
신라 금성
능묘 애공사 북봉(哀公寺 北峯) 진흥왕릉
재위기간
(음력)
신라 제24대 국왕
540년 7월 ~ 576년 8월 (36년 1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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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본관 경주 김씨
삼맥종(彡麥宗) / 심맥부(深麥夫)
부모 부왕 입종 갈문왕
모후 지소부인 김씨
형제자매 2남 1녀 중 장남[1]
왕후 사도부인 박씨, 소비 부여씨
자녀 3남
태자 김동륜
왕자 김사륜, 김구륜
종교 불교
법명 법운(法雲)[2]
시호 진흥대왕(眞興大王)[3][4]
존호 진흥태왕(眞興太王)[5]
연호 건원(建元, 540년 ~ 551년)[6]
개국(開國, 551년 ~ 568년)[7]
대창(大昌, 568년 ~ 572년)[8]
홍제(鴻濟, 572년 ~ 576년)[9]
골품 성골(聖骨) }}}}}}}}}
파일:2016012709020000.jpg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1. 개요2. 생애
2.1. 재위 초반 섭정기2.2. 영토 확장2.3. 내치2.4. 외교2.5. 말년
3. 가족 관계4. 평가5. 《삼국사기》 기록6. 여담7. 대중매체에서
7.1. 드라마7.2. 게임
8. 같이보기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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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의 제24대 군주.

신라 역사상 최고의 청년 정복군주로 꼽히는 명군이다. 백제근초고왕고구려광개토대왕과 더불어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정복군주로 평가받는 명군인 동시에 자비 마립간, 소지 마립간, 지증왕, 법흥왕의 뒤를 이어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진 능숙한 현군이다.

진흥왕 시기의 치세를 전후로 신라는 실질적으로 국력상에서 백제를 추월[10]하고, 고구려와 호각을 다툴[11] 정도로 강성해지면서 6세기 전반에 걸쳐서 위용을 뽐내게 된다. 하지만 한편으로 진흥왕의 정복전쟁을 계기로 신라는 향후 100여 년 동안 백제와 고구려를 동시에 맞닥뜨리게 되는 형세에 놓이게 되면서 소모적인 양면전선에 휘말리기도 했다.[12]

2. 생애

2.1. 재위 초반 섭정기

진흥왕 김삼맥종은 입종 갈문왕지소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13] 입종 갈문왕은 선왕 법흥왕의 동생으로 울주 천전리 각석에 새겨진 내용으로 보아 진흥왕의 유년기 때 이미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법흥왕이 사망하자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는지 왕위를 물려 받았다. 하지만 즉위 당시 6세의 어린 나이였기에[14][15] 당연히 직접 정사를 돌볼 수는 없었고 결국 태후섭정을 하게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왕태후가 섭정을 했다고만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섭정을 한 태후가 법흥왕의 왕비이자 진흥왕의 외할머니이면서 큰어머니인 보도부인인지, 모친인 지소태후인지 불확실하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법흥왕의 이자 입종 갈문왕의 비인 지소부인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학계에서도 지소부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진흥왕이 즉위한 직후 섭정을 시작한 태후는 대사령을 내려 민심을 안정시켰고, 문•무관의 관작을 한 등급씩 올려주었다.

541년 태후는 법흥왕 후기부터 공석이었던 병부령(국방부 장관)에 명장 이사부를 임명하여 국방 안정화를 시도하였다. 544년 권력이 이사부 1인에게 지나치게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병부령을 2인으로 늘렸는데 이후 신라는 모든 관부의 장관을 2인으로 하는 관습이 정착되었으며, 법흥왕의 명으로 건설이 시작된 흥륜사가 완공되었다. 545년에 병부령 이사부가 역사서 편찬을 건의하자 이를 받아들여 거칠부에게 명해 전국의 문서를 모아 《국사》를 편찬하도록 했는데, 이때 내린 명령은 이전에 내린 명령 기록과는 달리 《삼국사기》에서 태후를 언급하지 않고, 진흥왕이 직접 내린 명령으로 확실히 기록되었기 때문에 551년이 아닌 545년부터 진흥왕이 친정을 시작했다고 추론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수렴청정 제도를 살펴 보면, 어린 국왕 뒤에서 대비가 결정한 후 조언을 건네면 국왕이 자신의 입으로 직접 신하들에게 명하는 것이 수렴청정의 정석적인 형태였다.[16] 때문에 진흥왕이 직접 명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섭정을 벗어났다는 확고한 근거로 보기에도 무리가 있는 부분이다.

태후가 언제까지 섭정을 했는지는 기록에 나와있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진흥왕이 18세가 되던 551년 '나라를 연다'는 의미인 '개국'(開國)으로 연호를 바꾸게 되므로 551년 정월부터 진흥왕이 친정을 시작했다고 학계에서는 유력시하고 있다. 나이로도 이 시기에 친정을 시작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사료적으로 551년부터 김무력 등 젊고 아직 품계도 낮은 신진 장수들이 이사부 등 기존의 노중신들을 대체해 중용되는 등 군 수뇌부에 급격한 세대 교체가 일어났기에 551년에 친정을 시작한 것으로 보는 것. 551년 이전의 정치를 섭정하던 태후가 담당했다고 추정한다면 태후는 매우 현명하고 뛰어난 자질을 갖춰 섭정 기간 동안 나름의 선정을 통해 법흥왕에 이어 신라의 국력을 더욱 발전시킨 후 이를 진흥왕에게 물려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2.2. 영토 확장

파일:진흥왕의 영토 확장.jpg
진흥왕 때의 영토 확장.

548년 고구려가 백제의 독산성(禿山城, 현 오산시 지곶동)에 쳐들어왔다. 이때는 나제동맹이 아직까지 유효했던 시절이므로[17] 백제가 원병을 청하자 장군 주령에게 병력 3,000명을 줘서 파견해 서로 연합하여 고구려군을 패퇴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것이 독성산성 전투이다.

550년에는 또다시 고구려가 백제를 침공하여 도살성(道薩城, 현 단양군 도락산)과 금현성(金峴城, 현 제천시 와룡산)을 점령했는데, 신라 이사부 장군의 군대가 출병하여 도살성과 금현성을 되찾아 점령했고 이를 신라의 영토로 만들었다.(도살성-금현성 전투) 이 도살성-금현성 전투를 통해 고구려는 물론이고, 나제동맹에 있던 백제 성왕에게도 신라의 군사적 우위를 확실하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때 백제는 신라가 도살성과 금현성을 얻은 상황을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 일단 도살성은 고구려, 금현성은 백제 땅이었으나 백제가 550년 1월 도살성을 차지한 후 3월 고구려가 도살성과 금현성을 백제로부터 빼앗아 점령한 상황이었고, 이것을 신라가 다시 단독으로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것이었다. 게다가 원래 도살성과 금현성은 백제 시절 성이 아니라 제대로 된 방비가 없었던 지역이었고, 이를 신라가 차지한 후 고구려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해 신속히 산성을 구축하며, 신라가 계속 방비를 담당하여 군사를 주둔시킨 것이었다. 당시 백제의 성왕은 조상(개로왕)의 원수 고구려를 물리치고, 고향(초기 백제 중심지였던 한강 하류) 땅을 회복한다는 목표가 명확히 있었고, 그 과정에서 동맹군으로 반드시 필요한 신라가 때때로 도발에 가까운 행동을 해도 최대한 문제삼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일본서기》에 기록된 안라회의, 사비회의 기록에서도 신라를 직접 자극하는 행동은 피하려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진흥왕은 아울러 새로 점령한 지역에 단양 신라 적성비를 세워, 새로 신라에 복속된 중부지방 주민들에게 신라를 위해 공을 세우면 죽더라도 유족이 합당한 보상을 받는다는 보훈체계를 명확히 했고, 이들 지역은 빠르게 신라에 충성을 바치게 되었다.

551년, 진흥왕은 당시 고구려가 한창 북쪽에서 발흥하던 돌궐을 상대하느라[18] 남쪽 후방 경계선이 허술해진 것과 더불어 불과 6년 전인 545년, 양원왕의 태자 지위를 놓고 추군과 세군 두 파벌간에 다툼이 일어나 평양 궁중에서 수천여명이 목숨을 잃는 등[19] 고구려 내부가 혼란해진 틈을 노려 백제와 함께 551년 3월, 장수 9명[20]에게 시켜 고구려를 대대적으로 공격해 백제는 한강 하류 6군을, 신라는 강원도 쪽의 한강 상류 10군을 장악했다. 오늘날에는 이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 때 고구려가 한반도 중부를 잃어버리면서 광개토대왕 때부터 이어진 고구려의 전성기가 비로소 막을 내리고, 신라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고 평가한다.
파일:나제동맹의 한강유역 탈환.png
백제의 6군과 신라의 10군 추정 위치.

이에 지금의 몽골 지방에서 일어나 고구려와 친했던 유연을 멸망시키고 고구려 땅까지 공격하기 시작하던 돌궐에 대비해야 하는 고구려는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대내적으로 수상인 대대로 자리를 귀족들끼리 교대하며 맡기로 결정하고[21], 대외적으로 서북방 국경을 위협하는 돌궐 방어에 집중하기 위해 남쬭 국경을 위협하는 신라와 밀약을 체결하고자 했으며[22], 이에 신라의 진흥왕이 화답하며 고구려와의 밀약이 체결되었다. 그 결과, 고구려는 신라의 한강유역 점유를 인정하며, 함흥평야 일대를 신라에게 할양하면서 신라와 화친관계를 맺었고, 남쪽 국경에 있는 군대를 서북방 국경쪽으로 돌려 돌궐 방비에 집중했다.[23][24] 《삼국유사》 <기이편> -진흥왕조-에 의하면 백제 측은 이 기회에 고구려를 완전히 끝장내자고 제의했지만[25] 진흥왕은 이를 반대하고 오히려 고구려에 사람을 보내서 이 사실을 들은 고구려가 감동해 신라와 사이좋게 지내고자 했다고 한다. 사실 이 때 고구려는 수백년간 백제와는 서로 왕을 죽이고 왕이 살해당하는 대를 이은 적대 관계였던 반면 신라는 고구려 입장에서 보자면 옛날엔 샌드백이었고, 지금은 적(백제)의 친구 정도라, 대대로 사이가 꼭 좋았다고 하긴 어렵지만 백제처럼 딱히 크나큰 원한이 있던건 아니었기에 고구려가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신라와 손잡고 백제를 막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신라 역시 이 때 나제동맹 연합군에게 고구려가 완전히 망하거나 요동으로 쫓겨나고 평양까지 백제가 차지한 뒤 만에 하나 신라에 창끝을 돌리면, 강원도나 함경도 같은 생산력 낮은 척박한 땅만 신라가 차지한 상태에서 그런 백제를 단독으로 상대하기는 어려움이 자명했으니 결국 고구려의 밀약 제의를 받아들여 고구려에 막타를 넣지 않았다.
秋七月, 取百濟東北鄙, 置新興, 以阿湌武力爲軍主.
(진흥왕 14년) 가을 7월에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가져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군주(軍主)로 삼았다.
삼국사기》 <진흥왕 본기>
三十一年, 秋七月, 新羅取東北鄙, 置新州.
(성왕) 31년 가을 7월에 신라가 동북 변두리를 가지고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삼국사기》 <성왕 본기>
是歲 百濟棄漢城與平壤 新羅因此入居漢城 今新羅之牛頭方·尼彌方也
이 해(552년)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신라의 우두방, 니미방이다.
일본서기》 <긴메이 덴노 조>

이렇게 고구려로부터 한강유역 점유를 인정받고, 함흥평야까지 할양받은 진흥왕은 553년 백제가 점거한 한강 유역을 점령해 백제에게 원한을 샀다. 이 부분이 신라가 나제동맹을 배신하고 백제를 기습공격해 힘으로 빼앗았다는 쪽으로 주로 알려졌다. 다만 신라군이 백제군을 직접 힘으로 뒷치기한 게 아니라 모종의 이유로 백제가 한강 하류를 포기하고 그걸 신라가 잘 먹겠습니다! 하고 낼름 차지한 것에 가깝다는 해석도 꽤 많이 제기되는데, 《일본서기》에는
'是歲 百濟棄漢城與平壤 新羅因此入居漢城(이 해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라고 해서 신라가 직접적으로 빼앗은 것이 아니라고 기록되었다. 《삼국사기》에는 한자의 미묘한 의미 차이지만,
'取百濟東北鄙(백제의 동북 지역을 취했다)'
, 즉 《삼국사기》에서 공격해 빼앗는 다른 부분과 달리, 공격해 빼앗은 게 아니라 '가진'() 것이라고 써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성왕 본기>, <진흥왕 본기>의 다른 부분에서 백제나 신라가 뭔가 공격해서 빼앗을 때는 '공취'(取), '침'() 자를 썼다. '가지다'와 '공격하다', '침범하다'는 같은 상황에 쓰일 여지는 있지만, 분명히 차이가 있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아무튼 성왕은 신라에 바로 보복이나 항의를 하지 않고 오히려 553년에 딸 소비 부여씨를 진흥왕에게 시집보내는 모순된 행동을 보인다. 일단은 성왕이 진흥왕의 장인어른이 된 것이다. 그러나 성왕은 이미 553년 시점엔 신라와의 일대 결전을 뒤에서 준비하고 있었고, 딸은 신라의 방심을 사기 위한 시간벌이였다.[26] 같은 553년 《일본서기》에서는 정월에 백제가 사신을 왜국에 보내 군병을 요청하고, 왜국은 6월에 왜장 우치노오미(有至臣)가 이끄는 왜군 및 전쟁물자를 백제에 보냈으며, 554년 초에도 일본이 구원군, 군마, 배를 백제에 보내주고, 백제는 역박사, 의박사, 음악가, 승려 등 선진문물을 왜에 답례로 보내주는 등 은밀히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 기록되어 있다. 《일본서기》는 일본 측 사서이므로 백제가 일본에 원군을 요청하고 일본이 원군과 무기를 보내주는 것 위주로 기록되어 있지만, 가야에도 비슷하게 지원군을 약속받고 백제 내부에서도 이 시기 전쟁 준비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진흥왕과 신라 측이 이 전쟁 준비를 미리 눈치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혹시나하는 마음은 있었던건지, 관산성 전투 직전에 명활산성을 수리하는 등 대비 태세를 갖추었다.

554년 1월 혹은 7월, 백제가 수만의 백제군 본군에 가야군[27], 왜군까지 동원해 신라에게 대대적으로 전쟁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바로 역사상 유명한 관산성 전투였다. 백제에서 신라 수도로 가는 최단거리는 가야 방향이지만, 성왕은 신라가 새로 얻은 북방 영토와 기존 영토 사이의 허리를 끊기 위해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군인 관산성 방면으로 쳐들어왔다.

이때 고구려는 관산성 전투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신라를 간접적으로나마 지원하기 위해 약간의 병력을 모아 백제의 웅천성을 공격케 했고 이는 당시 태자였던 부여창이 백제ㆍ가야ㆍ왜의 병력으로 구성된 연합군을 직접 이끌어 격퇴했다.(백합야 전투) 거기다 신라 전선에도 초기에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가 이끄는 군대를 격파하며 몇 번의 승리를 거두고 관산성을 압박, 554년 12월 9일 관산성을 함락해 불태우는 등 승승장구 했다. 한편 《삼국유사》의 기록에서는 9월에 백제군이 신라의 진성(珎城)을 공격해 남녀 39,000명과 군마 8,000필을 빼앗았다고 하는데, 관산성 전투가 한 곳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라면 진성 전투는 9월에, 관산성 함락은 12월에 벌어졌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백제군을 이끌던 태자 부여창은 승전의 기세를 몰아 신라 영역으로 더 진격해 들어가려 했고, 이를 백제의 늙은 대신들이 반대했지만 부여창은 공격을 강행해 신라 땅 안쪽의 구타모라(久陀牟羅)라는 곳까지 들어가 보루를 쌓았다. 그러던 와중 성왕은 전장에서 분투하는 태자 부여창을 위로하기 위해 소규모 호위부대만을 이끌고 따로 이동 중이었는데, 마침 신라에서는 신주(지금의 경기도 지역)를 지키던 김무력 휘하의 신라군이 북쪽에서 내려와, 소규모 부대와 함께 이동 중이던 성왕을 구천(狗川) 혹은 고리산(古利山)[28]이란 장소에서 기습공격해 붙잡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도도가 성왕을 처형해,[29] 신라는 백제군에 머리 없는 성왕의 시신을 보냈다. 국왕을 잃은 백제군은 사기가 크게 떨어졌고, 신라군은 곧 백제, 가야, 왜 연합군을 도리어 크게 격파해 29,600명을 베었다. 전근대의 전투 특성상 죽는 사람보다 와해되어 패주하는 병력이 더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29,600명이 죽었다는 기록상 실질적인 병력 손실은 더 컸을 수도 있으며, 백제가 향후 수십년간은 거의 신라를 견제하지 못할 정도의 대승이었다. 관산성 전투의 승리 이후 한반도 중부 한강 유역은 확고하게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여기서 《일본서기》의 분주에 따르면 성왕의 목을 자른 후 머리 없는 시신만 백제에 예를 갖춰 보내고, 머리는 신라 궁궐의 계단 아래에 묻어버렸다는 기록도 있다. 이 역시 유명한 일화지만 사실 《일본서기》의 해당 부분에서도 성왕의 시신이, 본문에는 참수한 후 구덩이에 묻었다고만 돼있고,[30] 머리를 계단 아래에 묻었다는 것은 '다른 책에는 이렇게도 써 있다' 정도로 언급하고 있어, 궁궐 계단에 목을 묻어 그 위 땅을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했다는 건 당대 백제나 일본에 퍼져 있던 자극적인 카더라 소문일 가능성이 높다. 고대사회에서는 보통 적국의 임금이라도 왕은 왕이라 고귀한 신분으로서 대우를 해 주는 게 동서고금의 보편적 현상이었다. 신라의 장군인 도도는 성왕의 목을 베기 전에 성왕에게 절을 하며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었고, 당장 성왕의 딸 소비 부여씨가 진흥왕에게 시집갔던 것과 같이 백제 부여씨 왕가와 신라 김씨 왕가는 서로 대등한 관계를 맺었던 것이 관산성 전투 기준으로 바로 얼마 전 일이었다. 다른 나라도 다 그렇겠지만 신라는 특히 골품제로 잘 알려져있듯 아무 가문하고나 혼인을 하지 않았으며 혈통 보존을 위해서라면 근친혼도 마다하지 않았던 나라다. 즉 진흥왕의 혼인동맹은 성왕 일가를 성골이나 진골에 준하는 격으로 간주한 것이다. 결국 성왕을 지나치게 깎아내리는 것은 '동급'인 신라 왕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겨서 왕권을 세우는 데 있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올 뿐이다.

사실여부와 별개로 당대 백제와 일본에서 그런 소문이 돌아다녔다고 볼 수 있다. 왕까지 죽이고 목을 왕궁 계단 밑에 묻어서 두고두고 밟히게 했으니(혹은 했다고 생각했을 테니) 백제로서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으나 그렇다고 백제가 신라와의 교류를 완전히 단절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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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국보 3호.[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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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진흥왕 순수비를 옮기는 작업을 찍은 사진.[32]

파일: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png 진흥왕 순수비
眞興王巡狩碑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창녕 진흥왕 척경비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
파주 감악산비는 진흥왕 순수비 중 하나로 추정되나 확실하지 않음.



이렇게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의 주력군을 확실히 꺾은 이후 신라는 백제에 추가 공세를 하기보다는, 백제가 더 이상 끼어들지 못할 이 타이밍에 가야 지역을 공략하고 이렇게 새로 얻은 땅들을 확고한 신라 영토로 굳히는 내치를 다지는 데 집중한다. 당연히 백제 위덕왕은 이를 막기 위해 없는 살림에 어떻게든 병력을 모아 가야에 지원군을 보내거나 신라의 후방을 기습공격해 신라의 확장을 막으려 했지만 관산성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는 역부족이었다.

진흥왕은 새로 확보한 영토를 직접 순시하며 새로 신라에 편입된 지방민들에게 불교와 같은 문화[33]와 함께 신라의 뜻을 전파하고 그 기록을 돌에 새겼는데 그것이 진흥왕 순수비다. 가장 알려진 서울 북한산 순수비는 그 중 하나다. 순서대로 북한산비(555년),[34] 창녕 진흥왕 척경비(561년), 황초령비(이하 568년), 마운령비이다. 순수비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삼국사기》 기록상 551년에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지역인 낭성에 순행했다는 기록이 있는 등 진흥왕은 더 많은 곳을 순수한 모양이다. 파주시 감악산감악산비도 글자가 지워져 확실하지는 않지만 진흥왕 순수비라고 추측한다. #

진흥왕 관련해서 언급되는 또다른 비석인 단양 신라 적성비는 순수비가 아니다. 이는 왕의 명령을 받은 이사부를 비롯한 신라 장군들이 고구려 영토였던 적성을 공략한 것과 그들을 도운 토착민을 포상하며 적성 지방의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진흥왕이 새로 얻은 영토를 직접 순수(巡狩)[35]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순수비와 차이가 있다. 하지만 적성비와 순수비는 모두 진흥왕의 활발한 영토 확장을 보여주는 예이다. 신라는 경상도에만 고립된 국가에서 한강 유역을 차지한 나라가 되면서 황해를 통해 중국과 직접 통하게 되었다.[36]

한편 새로 굳힌 영토에 속리산 법주사 등 사찰을 여럿 지었는데, 한반도에 도입된 지 오래되지 않았던 불교는 당시 선진 종교로 여겨졌으므로 새로 편입된 주민들 및 주변국에게 신라의 문화적, 군사적 수준을 과시하는 수단이 되었다.

관산성 전투 시점까지 남아있던 여러 가야 소국들은 유사시 도움을 요청할 백제가 약화되자 신라 앞에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555년에는 비화가야가 있던 지금의 창녕군을 장악하고 행정 구역을 설치했으며, 지금의 함안군아라가야도 561년 이전 시점에 합병시켜 안라국의 영역이던 파사산에 신라군의 성을 쌓아 왜군에 대비하였다. 마침내 562년에는 신라의 명장 이사부가 군대를 이끌고 가야 지역의 맹주 대가야를 공격했다.(가야멸망전) 선봉이던 화랑 사다함이 항복의 상징인 백기를 가야의 성문에 꽂아 병사들이 당황해 무너지는 활약에 힘입어 대가야를 멸망시켰다. 백제의 위덕왕과 왜 연합군이 대가야를 구원하기 위해 562년 7월 신라의 서쪽 변경을 공격했지만 아직 10년도 채 지나지 않은 관산성 패전의 여파로 백제군의 규모는 과거보다 훨씬 줄어있었던 탓에 큰 도움이 되진 못했다. 사실 백제 입장에서는 후유증이 가시지 않았지만 쓸만한 동맹 가야를 살려두기 위해 상당히 무리한 상황이었는데, 일본서기 기록상 왜군 장수가 군사기밀을 백제에 전하려고 이동하던 중 봉인한 서신과 화살을 길에 떨어뜨리는(...) 실수를 하고 그걸 신라가 손에 넣어 신라군이 승리하고 백제+왜군 1,000여명을 죽이거나 잡았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서기》에서는 신라군이 거짓항복 혹은 휴전의 뜻으로 백기를 걸었는데 반파국을 돕기 위해 온 왜군 장수가 백기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속아 역습에 당하는 기록이 《일본서기》 <긴메이 덴노 조>에 기록되어 있다. 위의 대가야 멸망전과 비슷하게 백기가 등장하는 일화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 같은 상황이 다른 입장에서 기록된 것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진흥왕은 단양 적성비 부분에서도 그랬듯 새로 정복한 지역을 강압적으로 지배하지 않고, 우륵가야금으로 대표되는 가야 문화를 계승토록 해서 유화 정책을 펴는 등 가야 백성들의 반발을 최소화했다.[37] 고령 지산동 고분군을 보면 고고학적으로 멸망 이후에도 고령 재지귀족이 한동안 원래 문화를 유지하며 이어지고 있고, 많은 보물이 묻혀 있었을 왕릉급 고분들도 한꺼번에 대대적으로 도굴, 파괴당한 정황은 없기 때문에 일부 숙청은 있었을지 몰라도 기존 사회를 크게 뒤집지는 않은 것 같다.[38] 이후의 역사를 살펴봐도 가야 지역은 불과 50년만에 빠르게 신라에 융화되었으며, 이 가야 지역과 유민들은 훗날 백제가 국력을 회복하고, 무왕대의 아막성 전투부터 시작해 신라에 맹공을 펼칠 때 이를 막아내 신라가 삼국시대 최후의 승자로 남게 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대야성죽죽 등이 바로 가야 지역과 가야 현지인의 후손이다. 이들이 신라 중앙에 협조적이지 않았다면 7세기 무왕의자왕의 공격을 방어하던 신라는 훨씬 고달팠을 것이다. 아무튼 이로서 선왕인 법흥왕금관가야를, 진흥왕은 대가야를 정복함으로서 가야 세력은 완전히 신라에 흡수되고 비로소 지금의 경상도 지역 전체도 신라가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북쪽으로도 영토를 넓혀, 556년에는 옛 옥저 땅이었고 고구려가 지배하던 지금의 함경도 남부 비열홀주(比列忽州, 지금의 안변군)까지 진출하여 사찬 성종(成宗)을 이곳의 군주(軍主)로 삼았다. 이후 더욱 북진해 568년 시점까지 최소한 지금의 함흥시, 장진군, 리원군 지역까지 차지했다. 그리고 개마고원의 입구 고갯길인 황초령마운령 고개에 진흥왕이 직접 행차해 둘러보면서 현지 백성들을 교화하고 진흥왕 순수비를 세운다. 이 568년에 진흥왕의 나이는 불과 35세로 여전히 기력이 넘칠 나이였고, 그런 진흥왕이 평양에서 멀지 않은 이 개마고원의 출입구까지 직접 올라가 존재감을 과시한 사건에 고구려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본 측 기록인 《일본서기》에서는 570년 4월 2일, 고구려가 동해를 가로질러 일본 도호쿠로 사신을 보냈는데,[39] 고구려가 동해 한가운데 고난이도 항해로 사신을 보내는 일도 여태 없었고, 백제와 싸워온 고구려는 백제와 친밀한 일본과 역사적으로 그다지 사이가 좋다고 할 수 있는 관계는 아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570년부터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신라의 고구려 영토 잠식에 대응하기 위한 한 방책으로, 신라 후방에 있는 일본과 화친해서 신라를 공동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후로도 고구려 평원왕은 5년 동안 세 차례나 일본에 사신단을 보냈는데, 동해 한가운데의 거친 바다에 익숙지 않았기 때문인지 573년 5월 3일에는 배가 부서져 물에 빠져 익사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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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 시기 신라의 북쪽 영토.

사실 마운령보다 더 북쪽 개마고원이나, 혹은 더 동쪽 해안에 진흥왕이 진출해서 또다른 신라비를 세웠을 가능성도 없는 건 아니다. 마운령비가 현대에 알려진 것 중에서 가장 북동쪽이라 최소한 리원군까지 올라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 최대치는 밝혀진 바 없다.[41] 앞으로도 교과서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데, 포항 중성리 신라비가 2009년에 발견된 것처럼 21세기에도 비석은 계속 발견할 가능성이 열려있기 때문.

다만 이 지역은 경주 인근의 신라 본토에서 너무 멀기도 하고 고구려도 가만 있지는 않았을테니 568년 이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고구려가 되찾은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 과정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지만, 고구려가 공격했을 수도 있고, 장창은 교수는 신라가 알아서 포기하고 철수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래도 신라 왕이 568년에 직접 행차했다는 건 적어도 진흥왕 시대에는 주변 치안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뜻이고, 지식인을 대동해 주민 교화를 시도했다는 점을 봐선 아주 잠깐 깃발만 꽂아봤다가 바로 물러난 정도는 아니었으며, 신라도 진지하게 통치해볼 의사는 있었던 것 같기에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대략 몇십 년 동안은 신라가 지배했다고 추정한다. 아무튼 신라는 이 지역을 진흥왕 대에 획득했다 상실한 이후 통일신라가 들어서고도 멸망할 때까지 이 지역을 다시는 되찾지 못했다. 사실 마운령 순수비가 있는 리원군은 신라 다음 고려 때에도 가끔 짧게 점령한 적은 있어도 말기 공민왕 이전까지는[42] 상시 지배를 못했을 정도로 머나먼 한반도 북동쪽이다. 여기는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보다도 훨씬 북쪽이고, 고구려의 옛 수도이자 압록강 북쪽에 있는 국내성과 위도가 비슷할 만큼 북쪽 지역이다.

그런데 568년에 세워진 황초령비의 내용에 따르면 고구려는 신라의 영토 획득을 순순히 인정하고 오히려 축하하고 있는데, 고구려의 뒷마당을 빼앗긴 셈인데도 모순된 반응이라 이를 해석하는 주장이 여럿 있었다. 당시 고구려에 속해있던 거란족의 일부가 중국 수나라에 투항해버리는 등 서북방에 어두운 정세가 드리워지고 있었고 고구려는 북방 전선도 신경써야 하는 입장이라 일단 신라와 굴욕적인 화친을 맺었다가 나중에 되찾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서기》 <긴메이 덴노 조>에 따르면 고구려는 570년부터 갑자기 일본에 무리해서 동해 바다를 횡단해 사신을 자꾸 보내기 시작하는데,[43] 이 역시 신라를 배후에서 견제할 우군이 필요했고 그만큼 고구려가 신라의 팽창을 우려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가 함경도까지 올라갔을 때 세운 황초령비마운령비는 지금도 남아서 북한의 얼마 안 되는 신라 관련 국보함흥본궁에 보관하고 있으며 남한에는 탁본이 남아있어 내용 확인은 가능하다.

단지 영토 확장만 끝없이 하는 게 아니라 얻은 영토를 확실히 신라 영토로 굳히는 작업도 계속 진행했는데, 557년에 국원(國原, 충청북도 충주시)을 소경(小京), 즉 작은 수도로 삼았고, 558년에는 서라벌 인근의 부유한 백성을 국원으로 옮겨서 도시를 키웠다고 한다. 충주를 고구려에게서 빼앗은 게 551년이니 신라에 편입된 지 정말 얼마 안 된 땅이었는데 이렇게 위상을 크게 높여준 것에는 서라벌에서 한강 유역까지 원거리 통치하기는 너무 멀고 소백산맥을 통과해야 하는 교통도 불편해서 부담이 컸으니 그랬던 것 같은데, 결국 신라는 나중에 백제 무왕, 의자왕한테 지금의 경상남도까지 탈탈 털리면서도 오히려 서라벌에서 더 멀리 있는 한강 유역만큼은 기어코 뺏기지 않고, 북한산성 전투와 같이 지방민들이 신라에 충성하는 모습을 보이는 점은 진흥왕 때부터 했던 이런 새 영토 굳히기가 꽤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44]

울진군 근남면에 있는 성류굴 제8광장에서 2019년 3월, 신라시대에 새겨진 문자 기록이 다수 발견되었는데 이 문자기록 중 하나를 심현용 박사와 이용현 박사가 판독해낸 결과, 진흥왕이 560년 6월에 배를 타고 울진 성류굴에 행차했음을 동굴 벽에 새겼음이 확인되었다.# 행차를 위해 잔교, 즉 배를 정박시킬 수 있는 다리 모양 구조물을 설치했고, 50명이 수행원으로 동행했다고 한다. 진흥왕이 성류굴로 왜 행차했는지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한 것으로 보이지만 명문의 내용만으로 보면 다른 진흥왕 순수비를 세울 때처럼 임금의 지방 순수 행사라기보다는 여흥을 위한 목적이었을 개연성이 있어보이며 진흥왕을 보좌한 두 여자는 진흥왕대에 있었던 화랑의 전신인 원화 두 명을 떠올리게 해 주목을 받았다. 진흥왕 관련 명문으로 밝혀졌기 때문에 문화재로 지정될지의 여부도 관심거리다.

2.3. 내치

거칠부를 시켜 역사서 《국사》를 편찬하게 한다. 불심이 깊어 황룡사를 창건하고 다른 절도 많이 세웠다고 하며 인도에서 아소카 대왕이 보낸 철과 금으로 나중에 신라삼보 중 하나로 꼽히는 불상 '장륙존상'을 주조하기도 했다. 물론 마우리아 왕조의 명군이었던 아소카 대왕은 시대도 안 맞고, 진짜 인도에서 재료를 배에 태워 보내고 그걸로 만들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어쨌든 장륙존상은 황철(黃鐵) 57,000근과 황금 30,000푼, 불상 시제품 모형까지 재료 정보가 구체적이고 고려와 조선시대 기록까지 장륙존상의 존재가 계속 나오므로 이 때 크고 아름다운 불상을 만든 것은 분명해 보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원화화랑의 제도는 바로 진흥왕이 창설했다라고 전해진다. 다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화랑 제도 자체는 진흥왕 이전에도 있었다고 한다. 당장 사다함만 해도 진흥왕이 원화를 만들었다 폐지하고 화랑을 창설한 것보다 이전 시점에 활약했던 사람이다. 민간에 자치적으로 운영되었던 조직을 국가조직 안으로 흡수하고 보다 체계화했다고 봄이 타당하다.

위에서 언급했듯 진흥왕 시대는 과거 신라의 영토가 기존의 3~4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당연히 통치하는 백성의 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 획득한 거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능력을 갖춘 관료가 '갑자기 많이' 필요해졌으며, 마침 진흥왕 재위 후반에 화랑제도를 창설한 것도 이와 연관이 있다.

서라벌 내 왕궁 경비 근위대에 진골을 비롯한 서라벌 출신자는 지휘관이든 병사든 아예 왕궁 근위대로는 진입을 못하게 틀어막고, 해당 근위대에는 주로 조령이나 추풍령 일대 자원 입대자들로만 받도록 규정하여 서라벌 방어 부대와 서라벌내 왕궁 근위대 간 편제를 철저하게 분리한 것도 바로 이 진흥왕이다.[45]

진흥왕 27년, 진흥왕이 화랑 백운 등의 관작을 높여준 일화가 있는데 이 일화의 자세한 내용은 백운 항목 참조.

고구려의 명망높은 승려 혜량을 등용해 신라 최초의 국통으로 삼았다. 신라에 기존에 들어와 있었던 불교는 백제를 매개로 한 중국 남조 계통 불교였는데 그것을 바탕으로 진흥왕 때 고구려 승려 혜량을 통해 북조 불교까지 신라에 유입되어, 중국 남북조 중 어느 한 쪽의 영향을 많이 받은 백제[46]나 고구려[47]와 달리 신라는 초기부터 남북조 두 계통의 불교와 고구려 계통의 불교까지 어우려져 융합할 수 있었다고, 그리고 신라 불교가 역사가 짧으면서도 급속히 발전한 만한 요인이 여기에 있었다고 보는 설도 있다.

2.4. 외교

진흥왕 때 신라는 비로소 서해에 면한 항구도시 당항성(지금의 경기도 화성시)을 얻어, 백제나 고구려를 거치지 않고 직접 중국 국가들과 교역할 수 있게 되었다. 기록을 보면 신라가 건국 ~ 진흥왕 이전 수백년 동안에 중국 국가들에 사신을 보낸 건 377년, 382년, 502년, 508년, 521년 딱 5번 뿐이었다.[48] 그나마 이것도 고구려나 백제 사신이 갈 때 신라 사신을 데려간 게 대부분이었고, 같은 시기 고구려와 백제는 서해에 접해 있다는 지리적 장점 덕분에 중국 국가들에 수십번씩 사신을 보냈다. 그런데 진흥왕 이후 ~ 진덕여왕까지 100년 정도 동안 신라는 중국에 42번 사신을 보냈다.[49] 진흥왕의 한강 하류 점령 이후 신라가 중국ㆍ서역 문물을 이전 시대보다 넘사벽으로 받아들이기 쉽게 되어 비로소 고구려와 백제의 조건과 동등해진 것이다.

당시 중국은 남북조시대로 여러 나라로 갈라져 있었는데, 진흥왕은 564년에는 북제에 사신을 보내고, 북제 역시 여기에 화답해 신라에 '동이교위' 관작을 수여했다. 동이교위는 중국 동쪽에 있는 동이 여러 나라들의 교섭을 총괄하는 의미로 물론 명목상의 관작이지만, 본래 '동이교위'나 '동이중랑장' 관작은 북위 시절부터 북조가 장수왕을 비롯한 고구려 역대 국왕에게 수여하던 관작이었다. 이는 북조를 차지한 북제가 나름대로 진흥왕의 신라를 전성기 고구려를 대신하는 새로운 세력으로서 인정한 것이다. 이는 북제와 교류하면서 북조의 불교 문화도 수용해서 왕권 강화에 써먹었다는 얘기다.

이후 남조 과도 외교 관계를 맺으며, 불경 1,700여 권을 선물로 받았다. 당항성은 이후에도 수, 당, 왜, 서역 등으로 사신을 보내고 무역을 하는 창구로 계속 쓰였다.

549년 2월에 양나라에서 사절단으로 갔던 사신들과 유학을 갔던 승려 각덕(覺德)을 보내면서 사리(舍利)[50]를 보내왔는데 이에 진흥왕은 흥륜사(興輪寺) 전각에서 이들을 맞이하게 했다.

즉 진흥왕은 장수왕, 위덕왕처럼 남북조 국가들이랑 모두 조공ㆍ책봉 관계를 맺은 왕이다.

2.5. 말년

불심이 깊어 말년에는 동륜태자처럼 아예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어 승려처럼 하고 다녔으며 법호를 법운(法雲)이라 했다고 한다. 자신을 전륜성왕과 동일시했으며 두 아들 동륜, 사륜(진지왕)의 이름도 불교에서 기원을 둔 이름이다. 본인의 이름도 《반야심경》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따왔을지도 모른다.[51]삼국사기》에 의하면 왕비사도부인 또한 진흥왕을 본받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永興寺)에 머물었다고 한다. 그만큼 불교가 신라 왕실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물론 고구려백제왜국위진남북조시대의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즉위 37년째인 576년 8월에 승하했다.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장사지냈다. 현대에 이 진흥왕릉이라고 전해지는 왕릉은 고고학이랄 게 발달하지 않았던 조선시대 김씨 문중에 의해 임의로 비정된 것이었는데 아무래도 진흥왕의 업적과 위상에 비해 너무 작다. 그래서 근처에 있는 크고 아름다운 서악동 고분군이 진흥왕릉이라고 이미 조선 시대 김정희 때부터 추정해왔기도 하고, 현대에도 서악동 고분군의 대형 고분이 진흥왕 가계의 능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학자가 많이 있다. 진흥왕릉 앞의 설명에도 서악동 고분군 진흥왕릉설을 같이 써 놓았다.

사망 시 나이는 고작 43세였지만 워낙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재위 기간은 상당히 길었다.

3. 가족 관계

장남인 동륜태자(아버지처럼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는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등졌고 후계자이자 차남인 진지왕은 《삼국유사》 기록상 행실이 막장이라 화백회의에 의해 폐위된다.[52] 다만 진지왕이 능력이 아주 없었다고 보긴 그렇다. 일단 행실이 막장이라는 기록은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고 《삼국유사》에만 나오는 기록이며, 이 시기 백제위덕왕이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서인지 3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신라를 침공했다가 노리부[53]에게 대패하고 이로 인해 성을 새로 쌓는 등 업적은 제법 괜찮다.

삼국유사가 인용한 이제가기에는 3남으로 김구륜(金仇輪)이 있었고 김구륜의 아들 김선품(金善品)이 문무왕의 처 자의왕후의 아버지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제가기에는 김구륜의 어머니는 사도지만 시호는 백숭부인(白𪀚夫人)이라 적었는데, 이 백숭이 서융(西戎), 즉 백제에서 따온 말로 소비 부여씨라는 가설이 있다.

정실부인으로 사도부인 박씨가 있었고, 553년 백제와의 결혼동맹으로 작은 왕비로 들인 성왕의 딸 소비 부여씨가 있다.

진흥왕 때부터 신라에서 (왕족을 포함해) 중국식 한자 성씨가 쓰이기 시작했다. 물론 진흥왕 이전에도 훗날에 김씨, 박씨 등으로 이어지는 종족집단 계통 자체는 존재해 왔고, 이를 金, 朴 같은 중국식 한자 성씨로 이름 앞에 표현한 것이 진흥왕 시기부터라는 의미다. 중국 측 기록에서 진흥왕은 '김진흥'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54] 진흥왕의 아버지 법흥왕만 해도 《양서》, 《남사》, 《책부원귀》 등 중국 기록엔 성을 (募), 이름을 '진'(秦)이라고 했고, 신라 쪽 금석문울진 봉평리 신라비즉지매금왕(牟卽智寐錦王), 울주 천전리 각석즉지태왕(另卽智太王)이라고 되어 있으나 《양서》 / 《남사》 등의 기록은 중국 측에서 '모진'이라는 이름에서 임의로 성씨를 분리한 것이다. 법흥왕 시기까지의 금석문을 참고하면, 법흥왕의 아버지인 '지도로 갈문왕'(지증왕)과 법흥왕의 형제인 '사부지 갈문왕', 그리고 그 아들로 후에 진흥왕이 되는 '심맥부지' 모두 중국식의 성씨 개념으로 보았을 때 '성씨'라고 할 만한 공유하는 요소가 전혀 없으므로 이 때까지 신라 내에서 성씨가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이 통설이다. 결국 진흥왕 이전 왕과 귀족들의 성씨는 후대에서 소급해 기록한 것으로 생각된다.

4. 평가

명실상부한 신라 최고의 정복군주이자 한국사에서 광개토대왕, 근초고왕, 선왕과 더불어 자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한 군주로 자리매김한 걸출한 명군.# 진흥왕이 고대사에 큰 영향을 끼친 부분은 수백년 가까이 한반도의 패권 싸움이 백제 vs 고구려로 돌아가던 틀을 깨부쉈다는 것이다. 지증왕, 법흥왕 때까지만 해도 신라는 나제동맹과 같이 변수 역할까지는 가능했지만 근초고왕, 광개토대왕으로 대표되는 한반도 전체의 최강을 다투는 경쟁에서는 사실상 바깥에 있었다. 그런 와중에 이런 구도를 뒤흔들어 놓은 임금이 바로 진흥왕이었다. 신라가 한반도 중부 지방을 장악하면서 백제는 해상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고립무원 상태로 전락해버렸고, 고구려도 한강 유역을 상실해 언제든지 수도 평양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국경을 위협당할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 이 때문에 백제와 고구려는 이전까진 존재감이 별로 없다가 거의 새로 등장하다시피한 신흥 강국 신라에 온 국력을 쏟으면서 맹공을 가해야 했다. 특히 백제는 예전 정세로 바꾸기 위해 더욱 끊임없이 맹공을 가했으나, 도리어 성왕이 전사하여 어려운 시기를 겪기도 했다. 온달 전설로도 전해지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도 일시적으로 신라가 밀렸다는 설도 있지만[55] 결과적으로는 진흥왕 대에 확장한 북방 국경은 함경도를 제외하면 고구려 멸망 때까지 줄곧 신라가 유지하며 우위를 점하는데, 이는 진흥왕 대의 영토 확장이 시발점이 된 것이었다.

또한, 신라는 내물왕 대에 본격적인 중앙 집권화를 시작했지만 내물왕 말년에 왜, 가야, 백제 연합군의 대규모 공격을 받았고, 이를 막기 위해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지원을 받으면서 결국 중앙집권화가 지체되고 말았다. 이로부터 100년 후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 대를 거치면서 신라는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확실히 변모했다. 그리고 고구려, 백제와 대등하거나 더 나아가 이 두 국가를 흡수통일할 수 있는 국가적 역량을 갖추어 나가는 강력한 정복국가가 된 시기도 진흥왕 대이다. 이후 신라는 삼국통일을 위한 지난한 과정을 겪게 되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진흥왕의 영토 확장으로 인해 서로 동맹을 맺어 신라를 협공하는 구도가 되어 진지왕진평왕, 선덕여왕으로 이어지는 7세기 중엽까지 오히려 위기에 몰리기도 한다. 신라가 한강을 차지하면서 황해로 통하는 통로를 얻어 이때부터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게 되었기에, 넓게 보면 이후 삼국통일전쟁당나라, 신라 vs 고구려, 백제, 말갈, 돌궐, 왜국 구도의 베이스를 깔아준 왕도 진흥왕이다.

진흥왕이 폭발적 성장을 이끌었지만 그가 일찍 죽어버리고 곧이어 기세가 꺾였던 것은 신라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아쉬운 일이었다. 후계자 진지왕이 4년만에 폐위당해 확장에 필요한 동력을 낭비했고, 이후 무려 100여년이 지난 문무왕삼국통일 이전까지 신라는 오랫동안 진흥왕이 만든 판도를 지켜내는 굳히기 태세를 이어나가게 되기 때문. 진흥왕은 42세에 사망했는데, 당시 평균수명이 낮았다고 하지만 유아사망률을 감안하면 40대 초반은 전근대시대라도 아직 활발히 활동할 나이대였기도 하고, 지증왕부터 문무왕까지 신라 중대 대부분 왕들이 진흥왕과 진지왕을 제외하면 50대~70대 정도는 살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가족력을 따져도 진흥왕은 좀 빨리 세상을 떠난 편이었다.

일각에선 비판도 있는데, 진흥왕 때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건 좋았으나 이로 인해 백제무왕, 의자왕 대에 대대적으로 신라를 공격하고 주요 요충지인 대야성을 포함한 성들이 함락되고 고구려 역시 맹공을 가하며 후대왕인 진평왕이 고생을 했을뿐만 아니라 당나라가 개입을 안했으면 신라는 하마터면 멸망당할뻔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본토인 경상도까지 뚫렸고 고구려-당 전쟁이 없었으면 주필산 전투의 150,000명, 금산의 200,000명, 신성과 국내성의 지원군 40,000명 등 일개 성들에게서 신라 각지에서 긁어모은 주력군과 같은 수의 병력이 뽑혀져 나오고 전투 한번에 10~20만명을 동원하는 고구려군과 백제군 3~4만명이 연합해 들어왔으면 신라는 그대로 망하는 수순을 밟았다는 것이 이 비판의 주된 내용이다.[56]

하지만 이런 평가는 선후파악을 잘못한 다소 성급한 주장에 불과한데, 한강 유역 점령을 하지 않았으면 당나라의 개입 이전에 이미 영남의 3류 국가로 전락해 도태하여 멸망했을 확률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우선 신라가 거길 차지하지 않았으면 그게 없어지는 게 아니라 당장 신라의 경쟁상대인 고구려나 백제가 거길 차지했을 것이다. 그들을 상대하는 신라는 한강 유역 생산력의 2배만큼 불리해지는 셈으로 실제 역사보다 더 어려운 싸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강 유역은 단순히 전략적인 요충지이자 농경지였을 뿐 아니라 당나라와의 교역 루트를 담당했던 곳으로써 이 곳이 없었다면 단순 국력에서 고구려와 백제에 밀릴 뿐 아니라 중원 왕조와의 교류 및 나당동맹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신라가 고구려 - 백제 - 왜국의 협공에 대응하려면 당나라와 외교를 해야 했는데, 남해를 거쳐서 당나라를 가거나, 한강 유역에 위치한 당항성을 거쳐서 가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남해로 이동할 경우 백제에게 가로막힐 확률이 매우 높았다는 점을 감안하면[57] 당항성의 존재는 신라에게 단비같은 존재였을 수 밖에 없었다.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한 이후 당시 신라의 최고 장수였던 김무력을 한강일대를 다스리던 신주의 초대 군주로 임명했던 것도, 신라 최정예군을 대야성을 비롯한 대(對) 백제 전선이 아닌 신주에 배치했던 것도, 한강을 잃으면 신라는 버틸수 있는 기반이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한강 유역에 비해 간과하기 쉽지만 한강 유역뿐 아니라 진흥왕대에 신라가 가야 거의 전체를 흡수한 것도 엄연히 진흥왕의 공적이다. 이것이 없었다면 이미 함안 안라국까지 백제군이 동진했던 상황인 이상 적어도 가야 서부지역은 백제의 몫으로 떨어졌을 가능성이 높고, 7세기 신라 서측 국경의 철통 방어선이었던 대야성도 없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위의 비판점에서는 고구려백제는 한강유역을 빼앗기기 전부터 이미 신라를 틈만 나면 털어버리려고 눈에 불을 키고 있던 나라들이라는 점을 간과했다. 광개토대왕 - 장수왕대의 고구려는 신라를 속국으로 다스렸고,[58] 나제동맹이 결성되기 이전까지의 백제는 신라의 적국으로서 수차례 전쟁을 주고 받았던 관계였으며, 동맹 기간에도 표면적으로는 우호적이었으나 양국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가야를 놓고는 신경전이 지속되었다. 따라서 한강 유역의 지배여부와 상관 없이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가 약해보인다 싶으면 덮쳐버릴 준비를 했다.

따라서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했기 때문에 고구려백제가 침공해 후대 왕들이 고생한 게 아니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과 가야 지방을 차지한 덕분에 훌륭한 군사적 요충지 + 압도적인 자원 + 훌륭한 교역망을 얻었고, 이로 인해 멸망할 뻔 한 나라를 살릴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다만 《동국통감》의 평가숭유억불의 시대 조선 때 쓴 책이라서 그런지 법흥왕처럼 불교를 믿었다고 악평했다.
"진흥(眞興)은 부처에 대한 아첨이 더욱 심하여, 흥륜(興輪)·황룡(皇龍) 두 사찰을 창건하고 장륙금신(丈六金身)을 만들었으니, 백성의 고혈(膏血)을 짜낸 것이며, 천승(天乘)의 존귀함을 굽혀 불문(佛門)의 행자가 되어서 방포(方袍, 중의 법복) 원정(圓頂, 둥근 머리. 즉 승려를 뜻함)으로 일생을 마쳤습니다. 드디어 여염(閭閻)에 반은 사찰이 차지하여, 일반 백성이 모두 승려가 되게 하였으니, 후세에 남겨 준 화가 무궁하였습니다."

5.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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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신라 1권 (新羅 一)」 2권 「신라 2권 (新羅 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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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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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진흥왕 본기>
一年秋七月 진흥왕이 즉위하다
一年秋八月 크게 사면하고 문•무관의 관작을 올려주다
一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다
二年春三月 눈이 한 자나 내리다
二年 이사부를 병부령으로 삼다
二年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다
五年春二月 흥륜사가 완성되다
五年春三月 사람들의 출가를 허락하다
六年秋七月 국사를 편찬하다
九年春二月 백제를 침입한 고구려를 공격하다
十年 에서 부처의 사리를 보내다
十一年春一月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다
十一年春三月 이찬 이사부가 두 성을 빼앗다
十二年春一月 연호개국으로 바꾸다
十二年春三月 우륵에게 음악을 연주하게 하다
十二年 고구려를 침입하여 10개 군을 빼앗다
十三年 우륵에게 음악을 배우도록 하다
十四年春二月 황룡사를 짓다
十四年秋七月 신주를 설치하다
十四年冬十月 백제 왕소비로 삼다
十五年秋七月 명활성을 수리하여 쌓다
十五年 백제가 관산성을 공격하다
十六年春一月 비사벌에 완산주를 설치하다
十六年冬十月 북한산에 순행하다
十六年冬十一月 북한산에서 돌아오다
十七年秋七月 비열홀주를 설치하다
十八年 국원을 소경으로 삼다
十八年 감문주와 북한산주를 설치하다
十九年春二月 귀족의 자제 등을 국원소경으로 옮기다
十九年 나마 신득이 포노를 만들다
二十三年秋七月 백제가 변경의 백성을 침략하다
二十三年秋九月 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하다
二十五年 북제에 사신을 보내다
二十六年春二月 북제의 무성황제가 조서를 내리다
二十六年秋八月 아찬 춘부에게 국원을 지키게 하다
二十六年秋九月 품주를 설치하다
二十六年 진에서 불경을 보내다
二十七年春二月 기원사와 실제사가 세위지다
二十七年 동륜을 왕태자로 삼다
二十七年 에 사신을 보내다
二十七年 황룡사가 준공되다
二十八年春三月 진에 사신을 보내다
二十九年 연호를 태창으로 바꾸다
二十九年夏六月 진에 사신을 보내다
二十九年冬十月 남천주와 달홀주를 설치하다
三十一年夏六月 진에 사신을 보내다
三十二年 진에 사신을 보내다
三十三年春一月 연호를 홍제로 바꾸다
三十三年春三月 왕태자인 동륜이 죽다
三十三年 북제에 사신을 보내다
三十三年冬十月二十日 팔관연회를 열다
三十五年春三月 황룡사의 장육상을 주조하다
三十六年 봄과 여름에 가물다
三十六年 황룡사의 장육상이 눈물을 흘리다
三十七年 원화를 받들다
三十七 안홍법사가 돌아오다
三十七年秋八月 왕이 죽다

6. 여담

  • 일본사에서는 무로마치 막부의 제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진흥왕과 비슷한 행보를 보인다.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남북조 시대를 통일하고, 막부의 권위를 높여 무로마치 막부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불심이 깊어 말년에 머리를 깎고 출가했다는 점[59]에서 진흥왕과 유사점을 보인다.
  • 신라를 진흥시킨 왕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진흥시키다'의 진흥은 振興(떨칠 진, 일 흥)이고, '진흥왕'의 진흥은 眞興(참 진, 일 흥)이라는 거다. 쉽게 말하면 진짜로 일으킨 왕이라는 뜻. 법흥왕과 더불어 불교식으로 시호를 올린 예로 손꼽힌다.[63]
  • 진흥왕의 재위기에 갑자기 신라가 너무 커져버린 탓에 역설적으로 후대 진평왕 말기부터 선덕여왕 시기에는 지켜야 할 방어선이 길어지고, 고구려백제가 합작으로 신라를 압박하여 양면전쟁을 강요받아 국방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실제로 진평왕대에 신라는 한강 유역 지방에 방어군을 밀집시켜놓은 탓에 고구려군에게 함경도를 다시 빼앗기고, 백제군에게는 대야성이 함락당하여 서라벌로 가는 길이 위협받는 등 많은 고초는 있었다. 그래도 이는 영토가 넓어진 것에 따른 대가라고 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는 진흥왕이 획득한 영토를 기반으로 신라가 최후의 승자가 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 정복을 많이 했는데 정복의 대부분이 진흥왕이 10대 후반~20대 혈기왕성한 청년기에 이뤄졌다. 고구려광개토대왕이나 마케도니아알렉산드로스 3세처럼 역사의 대표적인 청년 정복군주이다. 흔히 진흥왕의 동시대 라이벌처럼 여겨지는 백제 성왕은 사실 진흥왕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아버지뻘 이상이었고, 성왕의 아들인 태자 부여창보다도 진흥왕이 9살이나 더 어렸다. 젊을 때 엄청나게 활약했지만 수명은 짧은 편이었다는 점도 광개토대왕이나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비슷한 부분이다. 하지만 진흥왕은 둘보다는 오래 살았는데 그래봤자 진흥왕도 42세에 사망하여 사실은 도토리 키재기. 다만 일찍 죽었다는 이미지가 덜한 편인데, 광개토대왕이나 알렉산드로스 3세에 비해 매우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꽤 오래 통치한 것처럼 인식된다. 비슷한 케이스로는 조선성종이 있다.[64]
  • 초기의 연호는 '개국'(開國), 이후에 '태창'(太昌), '홍제'(鴻濟) 순으로 바꾸었다. 이중 '홍제'는 진지왕과 공유하며, '태창'은 동륜태자가 태자로 있던 기간과 거의 겹친다는 점을 고려하면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반영된 연호는 개국으로 보인다.
  • 울진 성류굴에 서기 560년(진흥왕 21년) 행차하여 여흥을 즐긴 기록이 성류굴 8광장 암벽에 새겨져 있는것이 2019년 3월에 발견되었다.
진흥왕이 그의 덕행을 이은 성군이었기에 왕위를 이어 임금의 자리에 처하여 위엄으로 백관을 통솔하니 호령이 다 갖추어졌으므로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로 사액하였다.

7. 대중매체에서

7.1.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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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선덕여왕>에서의 진흥왕
  • 2009년 MBC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배우 이순재[65][66]가 연기했다. 1화에서만 등장하고 현재 주역들과는 그다지 마주치는 교집합이 없기 때문에 사실상 카메오라는 의견도 있다. 이 드라마에서 진흥왕 시절은 영광스러웠던 옛날을 상징하는 요소로[67], 드라마 내에서 "진흥대제"로 불리고 있는데 《삼국사기》나 금석문에 있는 짐, 선황(先皇), 황왕(皇王) 같은 표현들이나 연호와 묘호의 사용 기록을 볼 때 신라가 적어도 법흥왕 때부터 외왕내제를 했음은 분명하므로 황제, 대제, 폐하 같은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물론 다른 표현보다는 당대에 사용했던 것이 가장 분명한 태왕 같은 칭호를 사용하는게 가장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드라마에서도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신라의 최대 영토를 마련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한강 유역 시찰 도중 백제의 자객[68]에게 둘러싸여 위험에 처한 것을 당시 원화인 미실이 구출해내자 당시로써는 온갖 전쟁 풍파를 함께 겪은 미실을 호의적으로 봤는지 미실을 품은 첫 번째 왕이 되었다. 말년에 미실의 독기를 발견해서인지 유언에 '미실은 불가에 귀의하라'는 글귀를 미실에게 직접 남기게 했는데 미실이 그것을 지키지 않을 것임을 생각하며 설원에게 미실을 제거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설원을 비롯한 대부분의 측근을 미실이 포섭한 상황이었고 진지왕과 손을 잡은 미실은 진흥왕을 독살하러 쳐들어 왔다. 결국 마지막이 다가오자 손자인 백정(후일의 진평왕, 장남인 동륜태자의 아들)과 함께 여러 얘기를 했고 불행 중 다행인지 미실이 찾아와서 독약을 먹이기 직전에 세상을 떠났다. 미실에게 남긴 유언에서 그의 후계를 손자인 백정으로 잇는다고 명한 것으로 볼 때 아들인 금륜 왕자(진지왕)는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못했던 모양. 미실이 황후가 되기 위해 금륜을 포섭해 이 유언을 숨겨 금륜이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곧 말을 바꾼 금륜을 보고 미실이 이 유언을 만천하에 공개해 진지왕은 자연스레 폐위되었다. 《삼국사기》 등의 정사에서는 진흥왕이 왕위를 손자 백정(진평왕)이 아닌 아들 진지왕에게 넘겨준 것으로 나온다. 드라마가 기반을 두고 있는 《화랑세기》에서 사도태후와 미실이 짜고 진지왕을 올린 것으로 묘사되었으니[69] 아무래도 《화랑세기》에서 따온 내용인 듯. 추후 제사를 지내던 문노에게 하늘에서 '미실을 대적할 사람은 개양자의 북두칠성이 8개가 될 때까지 나오지 않을 것이다.'는 예언을 내려 미실의 유일무이한 맞수 덕만의 출생을 예고한다. 그가 남긴 소엽도는 진평왕을 거쳐 덕만공주에게 넘어가 여러 번 그녀의 목숨을 구했다.
  • 2023년 ENA 드라마 <낮에 뜨는 달>에서는 배우 김명수가 연기했다.

7.2. 게임

파일:The Legend of Cao Cao Kim Sammaekjong.png}}} ||
삼국지조조전 Online에서의 진흥왕
  • 영걸전 시리즈삼국지조조전 Online〉에서는 진흥태왕의 패라는 계보의 미등장 데이터로 남았다. 병과는 군주계. 장수 이름은 본명인 김삼맥종으로 나온다. 능력치는 무력 87, 지력 72, 통솔 93, 민첩 82, 행운 75. 본래 플레이어블로 등장할 예정이었다가 제작진이 한국사 고대무장이 출시되면 능력치 논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결국 일부러 등장시키지 않았다. 데이터상의 장수 특성은 상태이상 반사/주위고양으로 매우 좋지 않았다. 이렇게 나와봤자 주위기합과 주위견고를 동시에 갖춘 손권이나 손권 너프 후에는 진시황 영정 등에 밀려서 섬멸전이나 경쟁전 등 여러 콘텐츠에서 고인 확정이었을 것이다. 다만 이건 극초창기에 이득규 개발자가 임의로 부여한 것이고 만약 정식 등장했다면 항우 때 그랬던 것처럼[71] 좋은 전용 특성으로 바뀌어 나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8. 같이보기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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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숙흘종, 만호부인.[2]해동고승전》에 기록된 재위 후반에 사용한 불교법명.[3]삼국사기》 기록.[4] 다만 진흥왕의 경우는 살아 생전에 건립해놓은 순수비에도 '진흥'이라는 표기가 보인다. 본 문서 개요의 주석 부분 참조.[5] 마운령비 등 비석에서 등장.[6] 전임 법흥왕의 연호를 그대로 이어서 사용하였다.[7] 진흥왕이 본격적으로 북진에 나서는 시점에 개정했다.[8] 동륜태자가 왕태자로 있었던 시기와 거의 겹친다.[9] 이 연호는 진지왕을 거쳐 진평왕 재위 5년(서기 584년)까지 계속 사용되었다.[10] 가야멸망전관산성 전투 당시 신라는 백제▪︎가야▪︎왜국의 삼각동맹을 단독으로 깨트리고 가야를 정복, 한산하(漢山河)를 손에 넣어 한반도에서의 패권을 쥐게 된다. 신라가 내물 마립간 시절 세 나라의 침략으로부터 국체를 보존하기 위해 고구려에게 지원을 요청했던 것을 감안하면 격세지감이다. 물론 진흥왕 이후 신라는 황초령과 같은 함경남도 일대의 영토를 상실하면서 위기에 빠지지만, 고구려와 백제를 상대로 양면전쟁을 장기간 치르는 등 여전히 막강했음을 알 수 있다.[11] 당시 고구려가 돌궐중원 왕조들의 견제를 받고 있는 상황임을 감안해도 여전히 강력한 패권국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당시 신라는 함경남도 일대까지 진출해 황초령비 등을 세우는 등 사실상 고구려의 목덜미에 단검을 들이밀게 된다.[12] 다만 불세출의 명장인 김유신 같은 유능한 장수들과 진평왕, 태종 무열왕, 문무왕 같은 명군들의 활약이 있었고, 상무적인 기풍이 강력하게 흐르던 당대 신라인들의 필사적인 항전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13] 갈문왕과 지소부인은 부부이자 숙부-조카 관계이기도 하다. 신라 왕실에서 이런 근친혼은 흔했다.[14] 신라의 56대 역대 임금 중에서 5세에 즉위한 효소왕에 이어 두 번째로 어린 나이에 즉위한 왕이 진흥왕이다.[15] 526년생이라는 설도 있으나 500년 이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법흥왕의 생년을 보면 불가능에 가깝고 14세에 즉위했다면 굳이 지소태후가 섭정을 할 까닭이 없다. 조선 숙종도 14세에 즉위 해 친정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16]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석적인 형태고 수많은 정사를 일일이 이렇게 정석적인 격식을 갖춰 결정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실제로는 대비와 신하 사이에 서면을 통해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17] 나제동맹의 경우, 사실 고구려 장수왕의 남침 위협이 강하던 5세기 후반에 끈끈했던 것과 달리 6세기 초반부터는 지원군 파견 사례도 확 줄어들고 나제 국경에 방어시설을 건설하거나 후방에서 가야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는 등 나제동맹이 약화되었거나 심지어는 이미 깨진 상태였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진흥왕 시절까지는 신라와 백제가 직접 군대로 크게 맞붙는 상황은 생기지 않았고, 형식상의 나제동맹은 진흥왕 때까지 계속 유지된 것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18] 이 해에 신흥 유목제국인 돌궐이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의 국방상 요충지인 신성과 백암성에 쳐들어왔다. 이에 양원왕은 즉시 장수 고흘과 10,000명의 병력을 보내 돌궐군 1,0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 잡으며 그들을 물리쳤다. 하지만 이 탓에 신라 - 백제와의 전선이 헐거워졌고 이 틈을 타 백제와 신라가 한강 유역을 공격했다.[19] 추군과 세군의 내전은 《일본서기》에만 나온다.[20] 대각간 구진(仇珍), 각간 비태(比台), 잡찬 탐지(耽知)ㆍ비서(非西), 파진찬 거칠부(居柒夫)ㆍ서력부(西力夫)ㆍ노부(奴夫), 대아찬 비차부(比次夫), 아찬 미진부(未珍夫)[21] 이전에는 대대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탈다림의 라크쉬르 의식처럼 대대로 자리를 차지한 일파와 내전을 벌여 승리해야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22] 이는 고구려 입장에서도 고구려의 남쪽 국경을 위협하는 가장 큰 요소인 나제동맹을 와해시키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성사시켜야 하는 밀약이었다.[23] 황초령비에 인근 국가가 사절을 보내 강역 확정을 축하했다는 언급이 있는데 이를 고구려의 사절로 본다. 그리고 《삼국유사》에서도 고구려와 신라가 화친했음이 나타나고, 백제 측 원사료를 많이 참고한 《일본서기》 <긴메이 덴노기>에서도 이 때 고구려와 신라가 손을 잡았다는 서술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상식적으로 신라가 나제동맹을 깨고 단독으로 한강을 차지한데다 나중엔 백제와 싸우기 위해 한강 방어군까지 남부 전선에 동원해야 하는데, 한강 방어군을 남쪽으로 돌리면 당연히 한강 유역의 원 주인이었던 고구려의 빈집털이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커진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선 고구려는 침묵을 지키고 오히려 병력이 빠져 비어있었을 신라의 한강 유역을 놔두고는 위기에 빠진 백제를 추가 공격하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즉, 이 당시 위기에 몰린 고구려는 신라와 어떤 형태로든 밀약을 맺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그리고 568년 세워진 황초령비 당시 신라의 인근 국가를 유추해 보더라도 이미 가야는 진흥왕에 의해 망해 사라진 시기고, 상식적으로 일본, 중국이 뜬금없이 사신을 보내 그걸 축하한다는 것도 이상하다. 남은 것은 고구려 뿐이다.[24] 다만 고구려와 신라가 맺은 밀약은 일종의 정전협정이었고, 한강 유역을 신라 땅으로 완전히 인정하는 내용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함흥평야는 고구려가 다시 차지했으며, 훗날 온달이나 연개소문 등 고구려는 줄곧 한강 유역 수복을 목표로 삼았고 실제로도 북한산성 전투, 칠중성 전투 등 꾸준히 각축전이 벌어졌기 때문. 일시적으로는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다시 정복했었다는 설도 있다.[25] 성왕의 목표는 백제 전성기의 영역 회복이고, 근초고왕황해도까지 진출했었으니 아직 한강 유역만으로 북벌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26] 성왕이 죽을 때 신라의 장군 도도는 '신라에서는 국왕이라도 맹세한 것을 어기면 노비에게 죽는다'고 하는데, 일방적으로 나제동맹을 진흥왕이 배신해 깼다는 시각에서 생각하면 반대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도 싶은 구절이지만, 국혼으로 화해 무드를 위장해놓고 1년 뒤 관산성 전쟁을 일으킨 일을 말하는 듯 하다.[27] 신라는 이미 가야 소국 중 동쪽에 위치해 신라와 가까운 금관국탁순국 등 몇몇을 잡아먹은 상태였다. 6세기 중반의 (앞서 신라에 먹혀버린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가야는 백제와 신라(+왜국과 고구려) 중 어디 붙어야 안 망하고 버틸까 눈치싸움 외교전이 정말 치열했는데, 신라 쪽이 가야와 거리도 가깝고 흡수의지가 좀 더 노골적이라 외교적으로 백제 쪽에 붙었던 상태였다.[28]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서 조상 김무력의 전공을 설명할 때 성왕을 잡은 곳으로 언급된다.[29] 진흥왕이 직접 참전한 것은 아니고 군대를 보낸 것.[30] 서술 순서상 성왕을 참수한 그 장소에 묻었다는 것으로 보인다.[31] 단 오늘날 비봉에 있는 저 비석은 모조품이고, 진짜 순수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지만 저 장소 또한 '진흥왕 순수비 유지'라는 명칭으로 사적 228호로 지정되었다. 비봉(碑峯)이라는 봉우리 이름 자체가 진흥왕 순수비에서 유래하였다. 비봉의 저 장소는 그냥 하이킹한다는 생각으로 올라가면 피본다. 해발 560m 지점이지만 여기 올라가려면 거의 암벽 등반을 해야 한다. 다만 저 지점의 전망이 상당히 좋아서 저곳에 올라가면 서울 도심과 한강, 강남 일대는 물론이고 날씨가 좋은 날에는 멀리 인천 앞바다까지 볼 수 있다.[32]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했다.[33] 순수비를 보면 이름높은 승려를 대동하거나 현지의 유명 승려를 초빙하고 있다.[34] 사실 북한산 순수비 555년은 교과서나 각종 한국사 시험 차원에서는 그냥 그렇게 비정하고 가르치고 있지만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이견이 있다. 또한 이 북한산 순수비가 진흥왕 순수비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김정희에 의해서이다. 이에 대해서는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문서 참조.[35] 임금이 나라를 두루 돌아다닌다란 뜻이다.[36] 순수비에 '太王'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연구한 바로는 법흥왕 때부터 '태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고 한다. 다만 진흥태왕 이후로는 '태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기록이 보이지 않아 이 호칭이 신라 국왕을 가리킨 것인지, 아니면 일시적으로만 쓴 호칭인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된다.[37] 《일본서기》에서는 가야의 귀족과 백성이 도륙당했다고 하는 기록도 있지만, 이는 대가야 멸망전 당시의 상황 자체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일본측이 신라를 악마화해 극렬히 비난하는 천황의 조칙을 인용한 구절인데, 전쟁이니만큼 폭력행위가 동반되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일부러 잔혹한 표현을 사용해 다소 과장한 문구로 보인다. 고고학적으로는 대가야 멸망 과정에서 도륙이라고 할 만큼 큰 규모의 폭력이 있었다고 볼 근거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38] 다만 강원도 동해시에서 대가야계 유물이 나오고, 가야인 강수가 중원경(충주시) 출신인 등 가야인들을 원 가야 영역 바깥 각지로 강제이주(사민)시킨 정황은 있다. 그런데 진흥왕은 신라 본토인도 충주 등 북쪽으로 사민시켰기 때문에 이런 강제이주가 가야인 저격이라고 보기 힘들고, 조선 세종대왕도 3남 사람들을 함경도에 사민시켰듯 새로 얻은 영토에 대한 사민정책은 좀 가혹하더라도 크게 봐선 필요한 일이었다.[39] 훗날의 발해 역시 신라 연안을 피해서 이런 경로로 사신을 보냈다.[40] 다만 고구려는 일본의 동맹인 백제와 6세기까지는 사이가 여전히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측에서는 고구려와 가까워지는 것을 주저했고, 이 때문에 두 나라의 외교관계는 그렇게 활발해지진 않고 곧 흐지부지된다.[41] 그래서 진흥왕 시기 지도에 따라서는 황초령비와 마운령비 주변지역까지 신라 영토를 좀 넉넉히 칠하는 경우도 있다.[42] 공민왕 초기인 1356년 병신정변을 일으키면서 유인우 등을 보내 이 지역에 있던 쌍성총관부를 무너뜨리고 영토를 되찾았다.[43]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항해는 당연히 대한해협을 건너는 항해 루트가 가장 짧고 안전하지만 거긴 전부 신라 땅이니 동해 바다 정가운데로 먼 바다 항해를 할 수밖에 없다. 573년에는 사신단에서 다수의 익사자가 발생했다.[44] 현대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신라 김씨 족단은 본래 충주 금릉동 일대에 소재한 마한 거수국 출신으로 친목지국 성향의 마한 거수국들과 함께 3~4세기 백제의 남정에 맞서다가 패퇴하고 사로국으로 도망친 것으로 추정되는데, (역사서에 기록된 3~4세기 신라와 백제의 충북 일대의 전투도 실은 백제와 김씨 족단을 포함한 목지국 잔여 세력의 전투로 추정된다) 진흥왕의 이러한 행동은 백제에게 잃은 김씨 족단의 고향을 되찾았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국원, 소경이라는 명칭의 유래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45] 진흥왕은 그 당시 기준으로도 역대 신라 임금들 중 군공이 가장 하늘을 찌를 정도로 권위가 강한 최강의 정복군주였으니 이 조치에 감히 반대할 진골은 아무도 없었겠지만, 아무래도 이미 이때부터 진골이 신라 왕실에게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는 선견지명이 있었던 듯하다. 어느 나라나 왕궁 근위대의 위상이 가장 강하고 그 근위대장 계급도 높은 게 관행이지만, 신라만은 진골들의 반대 때문이었는지 경덕왕 이전까진 근위대장이 '장군 대우'만 받았지 어디까지나 장군은 아니었다. 진흥왕조차도 골품제의 제약 탓에, 왕궁 근위대장한테 장군 계급을 주지 못했다는 뜻이다.[46] 원래 백제는 수백년간 남조와 주로 교류했다. 개로왕북위에 고구려 치게 도와달라고 국서 보낸 한 번을 제외하면 유독 북조와 교류한 기록이 적다.[47] 당연히 고구려는 바다 건너에 있는 남조보다는 육지로 바로 이어진 북조와 교류가 많았다.[48] 전진에 2번, 북위에 2번, 에 1번[49] 북제에 2번, 에 8번, 수에 6번, 당에 26번[50] 석가모니의 유골이나 오랜 수행을 한 스님을 화장했을 때 나오는 구슬을 말하는데 당시 소연(蕭衍)은 병에 걸린 것으로 의심할 정도로 불교에 심취해 있었다. 소연은 백제에 불경을 전파해 준 왕이기도 했는데 신라도 영향을 어느정도 받은 것으로 보인다.[51] 다만 진흥왕 본인의 이름은, 진흥왕이 어린이였던 시절에 작성된 울주 천전리 각석 명문도 있으니 불교와 관련된 이름이라면 본인이 아닌 부왕 입종 갈문왕의 의지였을 것이다.[52]화랑세기》에 따르면, 미실에게 4년만에 쫓겨났다고 나오지만 필사본 《화랑세기》 문헌 자체의 신빙성이 의심되는 현 시점에서는 뭐라고 할 수 없다. 다만 이쪽도 행실이 막장이라는 단서는 붙어 있고, 모친인 사도태후와 미실이 짜고 폐위를 주도했다고. 《화랑세기》에 따르면 장자 동륜태자는 자기 후궁 보명궁주와 바람피우다 개에 물려죽었다. 단 《삼국사기》에서는 이런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53] 김유신의 큰 할아버지이자 금관가야의 마지막 태자.[54] 북제 무성제 하청 4년 2월, 갑인에 조서를 내려 신라 왕 김진흥을 '사지절 동위 교위 낙랑공 신라 왕'으로 삼았다.(《북제서》)[55] 온달이 죽령 이북을 상당부분 수복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백제 멸망 당시 고구려 전선이 임진강 칠중성인 걸 보면 일시적이었다.[56] 다만 고구려의 십수만명 동원력은 어디까지나 방어전 한정이지 외부 원정에서 이 정도의 동원력을 보인 케이스는 700년 내내 전무하다.[57] 당장 서해를 통해 중국 대륙과의 직접 교류가 가능했던 백제의 경우에도 고구려군에게 가로막힌 기록이 《삼국사기》 <개로왕 본기>에 나와있으며, 당항성을 확보하고 당과 직접 서해를 통해 교류하던 시절의 신라마저도 거물급 귀족 대신이자 차기 왕이 될 김춘추가 사신으로써 당나라에 파견되던 도중에 서해에서 고구려군에 붙잡혀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 온군해라는 인물이 대신 죽었지만.[58] 내물 마립간실성 마립간 시기로, 광개토대왕릉비충주 고구려비, 《삼국사기》, 《일본서기》에 아주 잘 드러나 있다.[59] 물론 권력은 계속 장악하고 있었다.[60] 삼맥(彡麥)은 승려라는 뜻의 삼마(彡摩, *sama), 사미(沙彌, *sami), 소물(所勿, *sHmH) 등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동자승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스라마네라(Sramanera)가 나온다.[61]삼국유사》에서 인용한 《이제가기》에 따르면 아자개의 조상이다. 세대를 따져보면 증조부이지만 일단 수백년이라는 연대 차이상 증조부일 수는 없으며 김구륜의 아들이라고 나오는 파진찬 선품이 문무왕의 장인으로서 정사에 등장하기 때문에 선품~작진 사이의 계보가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62] 필사본 《화랑세기》로 가면 정실인 사도부인을 포함한 7명의 부인에게서 6남 8녀를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화랑세기》는 위서일 가능성이 높다.[63] 본래 시호는 사후에 올리는 것이지만 신라의 경우 살아 생전에 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진흥왕 재위기에 세워진 진흥왕 순수비에조차 대놓고 '진흥태왕'이라는 표현이 등장할 정도니. 이는 시호연호같은 중국식 문화가 바로 전대의 왕인 법흥왕 때에 들어왔기 때문에 신라에서 시호라는 개념이 완벽히 정착되지 않았을 수 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시호가 아니라 존호에 가까웠다고 봐야할 수도 있다. 이처럼 생존에 받은 존호가 사후 시호가 되는 방식을 사용했거나 아니면 그냥 시호나 존호가 아니라 왕의 이름이라는 주장도 없지는 않다. 중국측 기록에 신라 왕의 성명이 김진흥, 김선덕(선덕여왕) 식으로 등장하기 때문. 물론 신라 왕들은 즉위 전에 본래 이름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이름이라는 설이 사실이라면 왕위에 오른 뒤 새롭게 붙인 이름일 것이다.[64] 성종은 37세에 죽었고, 문종보다도 빨리 죽었다. 다만 12세 때 왕위에 올라서 그런 이미지가 약하다.[65] 함경북도 회령군 출신인데 <선덕여왕> 이후에도 2011년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는 김종서 역, 2015년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이자춘 역을 맡는 등 함경도 지역과 연이 깊은 배역을 꽤 맡았다. 한국사에서 발해 이후 함경도 지역까지 다시 진출하게 되는 것은 고려 말기에서 세종 시대에 걸쳐 일어난 일이고 사실 진흥왕 시절에는 아직 함경북도 쪽까지는 연이 없기는 하지만 신라가 북방 함경도 지역에 처음으로 진출한 것이 진흥왕 때의 일임을 생각하면 묘한 인연이라고 할 수 있다.[66] 실제 진흥왕은 40대 초반에 죽었는데 이순재는 70대 중반이어서 고증오류다.[67] 주인공 진영이든 적대 진영이든, 심심하면 언급하는 것이 "과거 진흥대제 시절에는~"이다.[68] 성왕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실제 역사에서도 성왕은 관산성 전투에서 진흥왕에 의해 전사했다.[69] 진흥왕의 사망을 숨겼다고 한다.[70] 2006년 MBC 드라마 〈주몽〉에서는 부여 대소왕 역.[71] 항우는 정식 출시 이전 원래 데이터에서는 기마공격 강화 무시, 일기당천이었다.[72] 한국어판 한정으로 추가된 평행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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