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1 14:08:10

진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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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25대 국왕
진지왕 | 眞智王
파일:external/www.gyeongjuimage.or.kr/w_IMG_3698.jpg
진지왕릉 전경.
출생
(음력)
550년대 추정
신라 금성
사망
(음력)
579년 8월 26일[A] (향년 20대 추정)
신라 금성
능묘 영경사 북봉(永敬寺 北峯) 진지왕릉
재위기간
(음력)
신라 제25대 국왕
576년 7월 ~ 579년 8월 26일[A] (3년 1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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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본관 경주 김씨
사륜(舍輪) / 금륜(金輪)
부모 부왕 진흥왕
모후 사도부인 박씨
형제자매 김동륜
동생 김구륜
왕후 지도부인 박씨, 도화랑(?)
자녀 김용수, 비형랑(?)[3]
종교 불교
시호 진지대왕(眞智大王)[4]
연호 홍제(鴻濟, 576년 ~ 579년)[5]
골품 성골(聖骨) }}}}}}}}}

1. 개요2. 이름에 대한 이모저모3. 생애
3.1. 왕위에 오르다3.2. 백제와의 전쟁
3.2.1. 알야산성 공격?
3.3. 폐위와 의문
4. 가족 관계5. 《삼국사기》 기록6. 대중매체에서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신라의 제25대 군주.

황음의 누명을 쓰는 등 본인은 비록 업적없이 일찍 왕위에서 물러났지만, 직계 손자가 바로 김춘추였다.

훗날 통일 신라 시기, 위패가 신라 5묘(新羅五廟)에 모셔져 유교적 제례가 행해진 왕이다.

2. 이름에 대한 이모저모

이름은 사륜(舍輪) 혹은 금륜(金輪)으로 불교전륜성왕에서 따온 이름으로 전륜성왕은 불법을 펼쳐 세상을 평정한다고 예언된 인물이다. 석가모니 탄생시 아시타 선인이
'이 아이는 자라서 출가하면 부처가 될 것이요, 군주가 된다면 전륜성왕이 될 것'
이라고 한 것이 유명한 일화로 전해진다. 전륜성왕은 금륜, 은륜, 동륜, 철륜의 4종류로 구분되는데 금륜이 4개국, 은륜이 3개국, 동륜이 2개국, 철륜이 1개국을 다스린다고 한다. 따라서 불교 국가에서 왕이 전륜성왕을 자칭하는 경우가 제법 있었는데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명군인 아소카 대왕이나 백제성왕도 그러한 인물들이다.[6]

자칭 전륜성왕인 진흥왕은 아들들에게 전륜성왕 전설에서 따온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사륜'의 '사'는 순우리말 음차한 것, 즉 '철륜'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런데 동륜과 철륜은 있는데 금륜과 은륜이 없기 때문에 기록에 남지 않은 진흥왕의 아들이 더 있었던 게 아니냐는 설도 있었고, 이를 반영하였는지 위서로 의심되는 필사본 《화랑세기》에서는 진흥왕과 사도부인의 딸이자 동륜과 사륜의 여동생인 은륜공주가 나온다.

하지만 형 김동륜태자로 언급된 것을 봐서는 여동생 이름에 '동'보다 먼저인 '은'을 넣은 은륜을 집어넣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전개이고, 왕비에게 붙이지 않았다면 동륜 이전에 요절해서 역사 기록에 적히지 않은 다른 아들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역사학계에서는 왕가의 순혈주의를 지키기 위해 거듭된 근친혼이나 부족한 의학 지식으로 인한 높은 유아 사망률로 인해 어려서 죽은 게 아닐까 하는 의견을 내고 있고, 불교학계에서는 금륜~철륜을 한 세대에 모두 지어준 게 아니라 신라에서 불교를 최초로 공인한 법흥왕을 금륜왕으로 추존하고, 진흥왕은 은륜왕을 자처했다는 설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전륜성왕의 등장 순서는 철 > 동 > 은 > 금이기 때문에 금륜왕과 은륜왕은 후대에 나오면 나왔지, 역순으로 등장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높고, 3남의 이름이 '금'보다 높다고 보기는 힘든 구슬에서 이름을 딴 점, 전륜성왕 중 가장 급이 높은 금륜일 경우, 자손들이 진골로 취급된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보면 철륜 쪽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즉, 철륜왕을 자처했던 진흥왕이 태자에게 동륜왕이라는 작위를 내려주고, 차남인 진지왕은 자신의 작위였던 철륜왕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 생애

3.1. 왕위에 오르다

진흥왕의 둘째아들로 어머니는 사도부인. 왕비는 기오공의 딸 지도부인(知道夫人). 형 동륜태자가 죽자 어린 조카 백정(白淨)[7]을 제치고 즉위한다.

신라 왕실은 자신들을 석가족(샤카족)의 가계에 일치시키려 노력했기 때문에 현대인이 보기에 오해할만한 이름이 붙어버렸다. 백정은 석가모니의 아버지 '정반왕'에서 따온 이름으로 정반왕은 동생 백반(白飯)[8]왕과 국반왕을 두고 있었고, 이들이 바로 불교 태동기 고대 인도아난존자와 데바닷타의 아버지였다. 실제로 진평왕도 남동생이 둘 있었는데 이름이 '김백반'과 '김국반'이었다. 그리고 진평왕의 정비는 이름이 '마야'였는데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따라서 진평왕이 아들만 낳았으면 "얘가 바로 석가다!"라고 할 판인데 계속 만 태어나니 망해버렸다.

3.2. 백제와의 전쟁

진흥왕 대에 신라와의 전쟁에서 주도권을 빼앗겼던 백제 위덕왕 부여창은 진흥왕이 죽고 진지왕이 즉위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신라를 공격했으나 진흥왕 때부터 장군으로 활약했던 노리부[9]가 이를 막아내고 백제군 3,700명의 목을 베는 등 대승을 거뒀다. 거칠부상대등으로 삼았고, 백제 전선의 전방에 성을 쌓는 등의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3.2.1. 알야산성 공격?

백제에게 알야산성(閼也山城)을 주었다.
與百濟閼也山城.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지왕 3년(578)

578년에는 알야산성을 백제에게 '주었다'는 기사가 있다. 그런데 알야산성이 전북 익산시 낭산면으로 비정되는 걸 볼 때, 이 시기 신라가 백제 중심부에 가까운 익산까지 진출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이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맞는지 실존을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다만 이 시기 신라는 선왕 진흥왕 시절에 백제와의 전쟁에서 여러 번 승리해서 백제 중심부와 인접한 아막성(남원시), 내리서성(영동군), 장대리 고분군(금산군), 계족산성(대전광역시 대덕구)[10] 등을 점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과 50km 정도 떨어진 익산 낭산면 공격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입장도 존재한다. 이 사건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보는 측에서는
  • 진흥왕 시절 백제를 크게 꺾은 신라가 진지왕 초기 백제를 완전히 멸망시키기 위해 과감한 공세를 했다가 정세가 불리하자 잠깐 점거했던 익산을 되돌려주고 철군했다고 보거나,
  • '줄 여'()자를 오기로 보아서 해당 구절을 '침'()이나 '거'(擧)로 읽어 '알야산성을 공격/함락했다'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보며,
반면 이 전투 여부를 부정적으로 보는 측은
  • 알야산성을 익산 낭산면이 아니라 국경 지역의 다른 성으로 비정하거나,
  • 후대 백제부흥운동 시기의 기록이 위덕왕 대의 일로 시기가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아무튼 알야산성 전투는 기록이 굉장히 소략해서 어떻게 보더라도 추정일 뿐이지만, 백제의 수도 사비에서 멀지 않은 익산을 실제로 공격했다고 본다면 진지왕은 백제 멸망을 100여년은 앞당길 수 있는 과감한 기습공격을 시도한 셈이지만, 결국 기록에 남지 않은 어떤 이유로 공격은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백제 위덕왕은 다음 해 579년에 접경에 성을 쌓아 신라를 견제한다.

3.3. 폐위와 의문

그러나 즉위한 뒤 황음하다는 이유로 불과 4년 만인 579년 화백 회의를 통해 끝내 폐위당했고 곧 승하하고 만다. 기록을 액면 그대로만 해석한다면 5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폭풍같이 검열삭제를 하다가 왕의 자리에서 쫓겨났고 이내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 10년동안 큰 문제없이 통치를 하다가 갑자사화 이후 2년 동안 폭정을 저지른 끝에 폐위당한 연산군의 사례가 있으니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패자는 말이 없으니 정확한 진실을 알 길은 없다.

일단 《삼국사기》를 보면 진지왕이 폐위되었다는 일체의 언급도 없으며 진지왕이 딱히 방탕한 짓을 했다는 기록 자체도 없다. 《삼국사기》 <진지왕 본기>만 놓고 보면 노리부를 기용해 백제의 공격에 대비하는 한편 새로이 성을 쌓고 제사를 지내는 등 그냥 평범하게 재위하다가 짧게 재위하고 승하한 것으로만 보이는 임금이다.

방탕하게 생활하다가 끝내 폐위되어 쓸쓸하게 승하했다는 이야기는 《삼국유사》, 그리고 필사본 《화랑세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삼국유사》를 봐도 <도화녀 설화> 외에 진지왕이 어떤 방탕한 생활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일절 나와있지 않다.[11] 따라서 진지왕이 귀족들과의 모종의 정치적 갈등 끝에 폐위 혹은 시해를 당했고, 이후로도 정치적 목적으로 폄하된 것이 아닐까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다른 설도 있는데, 진흥왕의 중신이었던 거칠부의 지원을 받아 형인 동륜태자의 아들 백정(후의 진평왕)에게 갈 예정이었던 왕위를 가로챘다는 설이 그것이다. 그 증거로 《삼국사기》 <진지왕 본기>에서 진지왕이 즉위하고 곧 거칠부를 상대등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거론된다. 그러나 거칠부가 연로해서 곧 세상을 떠나 진지왕의 정치적 기반이 갑작스레 약해져서 백정을 지지하는 귀족들의 정치적 공세 끝에 결국 폐위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약 8년 뒤인 587년에 내물왕의 7세손인 대세(大世)가 신라를 떠나 남해 바다로 건너갔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연계해서 거칠부를 비롯한 내물왕계가 579년의 정변으로 몰락했다고 보는 관점도 일부 있다.[12]

또 다른 설로는 폐위된 것이 아니라 조카인 백정에게 양위한 것이었다고도 한다. 사실 왕조 국가에서 정통 후계자가 너무 어려 대신 왕위에 오른 사람은 자신의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못하고 원래 왕위를 이었어야 할 사람이 장성하면 양위하는 것이 관례였다. 신라에서도 이전 시대에 그런 케이스가 실제로 많았다. 따라서 진지왕은 단순히 잠깐 왕위에 올랐다가 백정이 장성한 후 양위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추측의 영역이므로 그냥 이런 시각도 있다는 것 정도로만 보는 것이 이롭다. 어쨌든 금방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지만 제법 작지 않은 떡밥을 남긴 임금이라 할 수 있다. 단순히 진지왕 치세에 하자가 있어 폐위되었다라고 하기에는 바로 다음 진평왕 시대에 진지왕의 아들 김용춘이 중용되다가 나중에는 사위로 삼아 사실상 차기 후계자로 확정되고[13] 그 아들인 김춘추는 동륜태자의 직계인 선덕여왕&진덕여왕 치세에 친황 세력의 거두였던데다가 그들에게 왕위를 이어받았는 등 여러모로 단순하게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부분. 혹은 퇴위가 아니라 형인 동륜태자처럼 몸이 안 좋은 관계로, 《삼국사기》 기록대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볼 수도 있는 노릇이다. 다만 백성들 사이에는 좋은 이미지가 아니라서 후대에 부정적으로 폄하되었을 여지도 있는 셈.

그가 묻힌 진지왕릉은 폐위된 왕답게 동시대 다른 신라왕릉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이지만, 진지왕릉으로 지정된 그 무덤이 진지왕릉이 맞느냐는 이설이 있다.

비록 본인은 좋지 못한 이유로 퇴위당했지만 훗날 진평왕계가 두 여왕을 끝으로 단절되고, 손자인 태종 무열왕 김춘추가 즉위하면서 사실상 명예를 회복했고, 현손 신문왕 시대에는 왕실 조상묘의 5묘로서 시조 중 한 명으로 거론되었다.[14]
대신을 보내 조상묘에 제사를 올렸다. 제문에 아뢰었다.
“왕 아무개는 머리를 조아리고 재배(再拜)하며 삼가 태조대왕(太祖大王)진지대왕(眞智大王)문흥대왕(文興大王)태종대왕(太宗大王)문무대왕(文武大王) 영전에 아룁니다. 저는 재주와 덕이 없이 숭고한 유업을 이었기에, 자나 깨나 걱정하고 애쓰느라 편안하게 지낼 겨를이 없었습니다.

{{{#!wiki style="text-align:right"
《삼국사기》 권제8 <신라본기> 제8, 신문왕 7년(687) 4월}}}

이후에도 《삼국사기》에서 시중, 《일본서기》에서 상대등 역임 기록이 있고, 성덕대왕신종에 대각간으로 나올 정도의 거물이었던 김옹이 가진 명예직으로 진지대왕을 모신 절의 일을 맡아보는 관직이 있었던 만큼 적어도 신라 중대까지는 대단히 높은 위상을 누렸을 것으로 보인다.

4. 가족 관계

아들로는 용춘(김용춘. 일명 용수)[15]이 있으며, 《삼국유사》의 설화에 나오는 서자 비형랑이 있다. 몇몇 학자는 비형랑이 김용춘을 모티브로 해서 만든 설화, 즉 같은 사람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용춘의 아들이자 진지왕의 손자가 바로 태종 무열왕. 《삼국유사》에는 비형랑에 대한 신비한 이야기도 전해지는데, 이걸 보면 의외로 유부녀는 그냥 놔두는 변태라는 이름의 신사지만 유부녀의 남편이 죽자마자 저승에서 돌아오는 집념의 소유자로 그려지고 있다.

즉 내용에 따르면 진지왕이 사량부의 서녀(庶女)인 도화녀의 미색에 반해 그녀에게 동침을 제의했는데 도화녀가 자신이 유부녀라고 밝히며 그 제의를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자 진지왕은 만약 남편이 죽으면 왕을 모시겠냐고 다시 한번 물으니 이번에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진지왕은 물러났는데, 그 뒤에 진지왕은 폐위되고 나서 곧 죽고 얼마 안 있어 도화녀의 남편도 죽었다. 그러자 도화녀에게 진지왕의 혼령이 찾아와서 남편이 죽었으니 이제는 약속대로 동침하자고 제의하여 그 혼령이 도화녀에게 며칠간 머물렀다.[16] 그리고 그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가 비형랑이라는 것이다. 비형랑은 귀신을 부리는 능력이 있었는데, 진평왕이 사촌뻘인 비형에게 관직을 주어 북천에 다리를 놓는 등의 일을 시켰다고 한다.

<비형랑 설화>는 설화적으로 각색된 내용이라 그 해석이 여러가지가 있는데, 건국대학교 사학과의 김기흥 교수는 자신의 저서 《천년의 왕국 신라》에서 비형랑은 김용춘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신라 중고기의 승려 안함이 비형랑이라는 설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비형랑 문서로.

화랑세기》 필사본에 따르면, 진지왕이 즉위한 뒤 정사를 멀리하고 쾌락에 빠져 진지왕의 어머니인 사도태후가 진지왕을 폐위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미실 역시 자신에게 황후의 자리를 약속하고도 지도황후에게 빠져 말을 바꾼 진지왕에 대해 한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태후의 뜻을 알고 힘을 합쳐 진지왕을 폐위시켰다고 한다. 다만 《화랑세기》 필사본 자체가 현재까지도 위서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 책이므로 그냥 참고만 하자.

5.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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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진지왕 본기>
一年秋八月 진지왕이 즉위하다
一年 이찬 거칠부를 상대등으로 삼았다
二年春二月 신궁에 제사지내다
二年冬十月 백제가 서쪽 변경의 주와 군에 침입하다
二年 내리서성을 쌓다
三年秋七月 진에 사신을 보내다
三年 백제에게 알야산성을 주다
四年春二月 백제가 성을 쌓아 길을 막다
四年秋七月十七日 왕이 죽다

실제로 기록만 따지고 보면 이 사람이 진짜로 암군이었는지 확실히 의심스러워 보인다. 그리고 백제 침공을 받은 사람이 바로 노리부인데, 진평왕 때 상대등을 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노리부는 바로 김유신의 큰할아버지이다. 당시 백제는 30,000명의 대군이라는 엄청난 병력으로 침공했는데, 이를 막았다. 그렇다면 노리부가 진지왕을 배신했을 수도 있는데, 나중에 김춘추와 사돈이 되었다는 것은 원수와 손을 잡았다는 이상하고 뭔가 납득이 안되는 전개가 되어버린다. 뭐 역사 속에서 정치적 이유로 원수와 손을 잡은 사례가 어디 한둘이냐마는...

6.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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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년작 MBC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배우 임호가 연기했다. 임호가 맡은 왕 중 가장 최단 시간에 폭풍처럼 사라지는 왕이 되었다. 임금의 자리를 노리고 미실과 동침하고 진흥왕의 유언[17]을 얼씨구나 조작하여 자신이 진흥왕 다음 임금이 되는데 성공한다. 허나 미실의 세력이 워낙 급속도로 커졌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미실이 협조 조건으로 내 건 그녀를 황후로 만들어주기로 한 약속을 없던 것처럼 하려고 한다. 결국 미실은 진지왕이 이용 가치가 없어졌다고 판단 후 이 사람과의 사이에서 난 당시 갓난아기였던 비담까지 버리고 평소 묵혀 두었던 원화의 신분을 이용해 화랑들의 낭장결의로 결국 진지왕을 왕좌에서 탄핵시켜 버린다. 그 다음 거취는 어느 경우에도 언급되는 경우가 없고(심지어는 아들들인 김용춘, 김용수에게도) 결국 2회 분량에 폭풍처럼 시청자들에게서 잊혀져 갔다. 다만 나중에 진지왕이 자신에게 비담을 부탁했다는 문노의 짤막한 언급이 나오기는 나온다.[18] 하지만 후에 미실이 김춘추에게 직접적으로 "조부이신 진지왕을 내가 죽였다"고 말한 것을 보면 그의 결말은 대충 예상할 수 있다.
  • 애니메이션 아이삼국유사의 비형랑 에피소드 초반에 짧지만 비중성은 있게 등장한다. 당연히 도화녀와도 엮이는데 보통 미디어믹스에서 자주 표현되는 호색한 이미지과는 달리 의외로 나름 순정파스러운 모습으로 좀 애잔하게 보여진다. 변장한 채 궁궐 밖을 살펴보던 중, 우연히 도화녀를 보고 반하지만 짧은 만남에 금방 헤어져야 했다. 이후 궁에 돌아가 도화녀를 불러와 청혼(?) 하지만[19] 이때 도화녀는 하필 이미 다른 남자와 약혼한 상태라(...) 청혼은 거절당했다. 대신 도화녀와의 약속을 받아내고 그녀를 돌려보낸 이후, 몸이 수척해질 정도로 도화녀를 계속 그리워하다가 결국 병상에 세상을 뜨게 된다. 이후 결혼은 했지만 금세 남편을 잃은 도화녀의 꿈에 나타나 그녀를 부르다가 금세 사라져버린 것으로 직접 등장은 끝. 도화녀 쪽도 진지왕에 대한 마음이 아예 없진 않았는지 이후 아들 비형랑과 같이 궁으로 들어갔을 때 아주 잠시 진지왕을 추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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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음력 7월 17일, 율리우스력 8월 24일[A] [3] 김용춘과 동일인이라는 설도 존재한다.[4] #[5] 진흥왕 말년의 연호를 이어서 사용했다.[6] 여담이지만 시대가 좀 지나면 전륜성왕은 한물가고, 미륵이 유행하게 된다. 이후 궁예가 미륵을 자칭했던 것도 시대상을 반영한 셈.[7] 후에 진평왕이 되는 인물. 백정은 석가모니의 아버지 슈도다나에게서 따온 이름이다. 당연히 조선 시대의 도축업자와는 상관없다.[8] 실제 뜻도 흰 쌀밥이다.[9] 이름이 '노부' 혹은 '세종'이라고 표기되기도 한다. 김유신의 큰 할아버지기도 하다.[10] 백제 산성이냐 신라 산성이냐를 두고 논쟁이 있다가 지금은 백제 산성으로 보는 시각이 유력하지만, (통일 이전의) 신라 유물도 어느 정도 출토되었기 때문에 신라가 진출한 시기도 존재했다고 추정되기도 하며, 신라가 통일 이전에 이곳을 점거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시기가 위덕왕 시기다.[11] 게다가 <도화녀 설화>에서도 음란하다는 왕이 순순히 도화녀의 뜻을 존중해주기도 한다.[12] 이호영, <삼국통일>, 《신편 한국사》 9권(2002) 국사편찬위원회, 16~17[13] 신라에서는 적장자가 없으면 왕족을 사위로 삼고 나중에 그 사위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사위 계승 사례가 많았다.[14] 이전에도 조상 추모 시설은 있었지만, 이 5묘는 이후 고려와 조선의 종묘로 이어지는 유교적 형태의 종묘 제도의 시초다.[15]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동일인물로 나온다. 《화랑세기》 필사본에만 용수가 형이라고 나온다. 다만 《화랑세기》는 위서 논란이 있기 때문에 곧이 곧대로 믿을 수가 없다.[16] 살을 더 붙여서 어떻게 해야 할 지 결정 못한 도화녀가 부모에게 어떻게 해야 하냐고 말하니 부모가 군왕의 뜻이니 어쩔 수 없다고 말해줘서 도화녀가 진지왕의 뜻에 따라줬다고 설명하기도 한다.[17] 내 후계는 태손 백정(진평왕)이니라.[18] 그래도 아들이라고 챙기는 기본적인 부성애는 있었던 것인지, 미실에 의해 폐위되고 뒤늦은 반성을 한 건지는 아무도 오른다.[19] 첫만남에서 진지왕이 좀 얼빵한 모습으로 도화녀를 대했는지라(...) 도화녀는 처음에 그를 못 알아보다가 그때 만난 그 얼빵한 남자라는 걸 떠올리고 그제서야 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