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진의 인물에 대한 내용은 안함(동진) 문서 참고하십시오.
신라십성 新羅十聖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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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含
1. 개요
신라 진평왕 때의 승려이다. 성은 김씨이고, 안홍법사, 안함법사, 안함태(安含殆) 화상 등으로 불린다. 불교가 흥했던 신라의 대표적 고승 열 분을 기리는 신라십성(十聖) 가운데 한 사람이다.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의 다른 곳에 기록된 안홍(安弘)과는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외에도 밀본(密本)[1], 환희(歡喜)[2] 등도 안함의 별호라는 설도 존재한다.
2. 생애
진평왕 23년(601) 23세 되는 해에 수나라로 가서, 열반에 이르는 십승(十乘)의 비법과 심오한 불교 경전과 진문(眞文)을 공부하고 해동고승전에 의하면 5년 후 서역의 승려들과 함께 귀국하였다.다만 안함의 귀국 시점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조금씩 달라서 576년(삼국사기 신라본기), 605년(해동고승전), 625년(의상전) 설이 나뉜다. 이 중에서 576년 설은 진평왕 37년(615)을 진흥왕 37년(576)으로 오인했을 가능성이 크다. 605년 설은 입당 시점에서 고작 4년 뒤라는 것을 고려할 때 문제가 있어 보인다. 625년 설을 주장하는 최치원의 의상전은 비교적 당대의 기록이기도 하거니와, 재위년수가 아닌 연호로 건복 42년이라 하므로 착오가 있었을 가능성이 적다. 따라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적힌 '진평왕 37년'이란 부분은 다시 47년으로 보정할 수 있다. 진평왕을 진흥왕으로 오인하면서, 진흥왕은 37년까지만 재위했기 때문에 47년이라 적힌 이전의 기록을 37년으로 바꾸었던 듯하다.
일찍이 세속 너머의 세계에 뜻을 두었던 안함은, 사물에 통달하고 지혜가 밝아, 번뇌의 속박을 벗어나 가고 머무름을 뜻대로 하였다. 또한 물 위를 걷고 공중을 날아다니는 범상치 않은 신통력을 보였다고 한다.[3]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라는 책을 지었다고 하는데 현대에 전하지 않는다. 삼국유사에서 이 책을 인용해 그가 황룡사 9층 목탑 건립 제안을 했다고 한다.
선덕여왕 9년(640) 만선도량(萬善道場)에서 62세로 입적하였다.
고려 고종대에 쓴 해동고승전에 의하면, 고려 말까지는 안함의 행적을 기록한 신라시대의 비석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고려시대에 이 안함의 비문은 이끼가 끼고 훼손되어 읽을 수 없는 글자가 많았다고 한다. 당연히 고려 말에서 또 수백 년이 지난 현대에는 이 비석의 흔적도 찾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