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5 15:05:45

법왕(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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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제29대 국왕
법왕 | 法王
파일:2016012117421002.jpg
법왕릉으로 추정되는 부여 왕릉원 전경.
<colbgcolor=#008080><colcolor=#fbe673> 출생
(음력)
연대 미상
백제 사비성
(現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사망
(음력)
600년 5월[1]
백제 사비성
(現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묘 능산리 서하총 (추정)
재위기간
(음력)
백제 왕태자[2]
연대 미상 ~ 599년
백제 제29대 국왕
599년 ~ 600년 5월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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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宣) / 효순(孝順) / 관(寬)
부왕 혜왕 / 위덕왕[3]
왕자 부여장 (?)
종교 불교
시호 법왕(法王)
별호 헌왕태자(獻王太子)[4] }}}}}}}}}

1. 개요2. 생애
2.1. 출신2.2. 즉위 이전2.3. 즉위 이후
3. 기타4. 《삼국사기》 기록5. 대중매체에서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백제의 제29대 건길지.

재위기간은 599년~600년으로 2년인데 5개월이라는 설도 있다.

2. 생애

2.1. 출신

그의 출신에 대한 기록은 사서마다 다르다. 《삼국사기》에는 혜왕의 아들이라고 명시되어 있으나 《수서》에는 위덕왕의 아들이라고 나와 있다. 백제 역대 국왕들의 가족사에 대해서 가장 정확도가 높은 《일본서기》에서는 법왕의 출신이 언급되지 않는다. 위덕왕의 아들이라면 고령의 숙부를 징검다리로 거쳐서 즉위한 셈이지만, 혜왕의 아들설을 채택한다고 가정하면 법왕은 정변을 일으켜 고령의 아버지 혜왕을 왕위에 올린 뒤 그가 사망하자 왕위를 이어받았다는 추론이 성립된다.

정황상 혜왕은 선왕 위덕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것으로 보이는데[5][6] 이에 법왕이 관여했다고 보는 것이다.

중국 측 일부 역사서에는 '부여관(夫餘寬)'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부여관이 법왕 부여선과 동일인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조선의 실학자 이규경이 부여융의 아들인 부여문선의 묘지명에 있는 글자를 필사하면서 법왕의 이름인 '부여선(夫餘宣)'을 '부여관(夫餘寬)'으로 착각하여 생긴 오류라고 주장하는 설이 있다.

18~19세기 조선실학자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중국의 사서와 당나라 부여문선의 묘지명에
'百濟國王夫餘寬生璋。號帶方郡王。生義慈。唐拜帶方郡王金紫光祿大夫。生隆。熊州都督隆。生文宣。司膳卿左衛大將軍樂浪郡公'
라는 글귀가 쓰여져 있었다고 주장했는데 《후주서》(後周書), 《풍속통》(風俗通), 《만성통보》(萬姓統譜), 《성보》(姓譜)에서도 '부여관'으로 등장한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주서》에는 저런 내용이 없고, 이들의 원사료가 된 것으로 보이는 《북사》와 《수서》에서 무왕의 아버지가 법왕으로 나오기 때문에 부여관이라는 이름이 부여선의 오기라는 의견도 강하다. 현재 이규경이 보았던 부여문선의 묘지명은 행방불명인 상태이다.

2.2. 즉위 이전

“성주선원(聖住禪院)은 본래 수나라 양제(煬帝) 대업(大業) 12년 을해(乙亥, 616)에 백제국 28세인 혜왕의 왕자인 법왕이 오회사를 건립한 곳이다. 전쟁에서 승리하여 원혼들이 불계(佛界)에 오르기를 바라며 세운 원찰(願刹)이다.”
《숭암산 성주사 사적》(崇巖山聖住寺事蹟)

왕위에 오르기 전 기록으로는 위 기록이 전한다. 다른 문헌 기록과 법왕의 생몰년이 맞지 않는 문제가 있지만, 오회사를 법왕이 왕자 시절이던 598년에 짓기 시작해 616년에 완성됐다고 해석하는 견해가 존재한다.[7] 아무튼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대목이 존재하는데, 마침 598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한 사건이 존재한다.
왕이 수나라요동전쟁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듣고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바치고, 군도(軍道)가 되기를 요청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왕년에 고구려가 조공을 바치지 않고 신하로서의 예절을 갖추지 않았기에 장군들로 하여금 그들을 토벌케 하였는데, 고원(高元)의 신하들이 겁을 내며 잘못을 시인하기에 내가 이미 용서하였으니 그들을 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우리 사신을 후대하여 돌려보냈다. 고구려가 그 일을 모두 알고 군사를 보내 우리 국경을 침략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위덕왕 45년(598)

이 전투는 기록이 소략하고, 전면전이라기보단 고구려의 보복성 제스처인데다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는 신라의 한강 하류 영토가 존재하기 때문에 수군을 이용해 소규모로 벌어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숭암산 성주사 사적》과 종합하면 즉위 이전의 법왕이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을 가능성이 있다.

2.3. 즉위 이후

즉위 후에는 불교 신앙을 가진 군주답게 불교를 매우 숭상했지만 정도가 너무 지나쳐 백성들에게 물고기를 잡는 그물과 사냥하는 도구들을 태워버리게 하고, 민간에서 기르는 매나 사냥한 매를 풀어주며, 적군이 쳐들어와도 죽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호의적으로 평가했는데 신분이 승려였던만큼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삼국유사》 <흥법> 편에 법왕이 살생을 금한 이야기를 실어놓은 후 왕을 찬미하는 를 지어 적어두었다.
짐승도 보호한 왕의 명령 천산에 은혜가 미치고
은택이 돼지 물고기까지 흡족하여 어짊이 온 세상에 넘치네.
성군이 갑자기 돌아가셨다 말하지 말라.
천상의 도솔천(兜率天)은 꽃다운 봄이 한창일지니.
《삼국유사》 <흥법> 제3, -법왕금살-(法王禁殺 : 법왕이 살생을 금지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재위 기간을 2년도 채우지 못하고, 서기 600년 5월, 즉위한지 단 5개월만에 승하했다. 사실 혜왕의 아들설을 따르면 혜왕이 70이 넘는 고령으로 사망했으므로[8] 장남 법왕 역시 적어도 40대 ~ 50대의 나이에 즉위했을 것이다. 의학이 현대처럼 발달하지 못한 전근대 시대에 이 정도 나이면 적은 나이는 아니었다.

법왕의 재위 기간이나 《삼국사기》 기사들을 살펴보면 그는 즉위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것이 성인병인지 사고인지 뭔지는 기록이 부족해 알 수 없지만 이미 건강에 큰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이 높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불교 교리에 집착해서 나온 산물인 살생 금지령 역시 그런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으며, 결정타는 600년 상반기 시점에 칠악사(漆岳寺)에 가서 기우제를 지낸 것이었다. 결국 기우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타계하고 말았다.

사망에 대해서는 반대파들에 의해 시해당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아마도 법왕의 재위기간이 너무도 짧았던 탓에 이런 얘기가 나온 듯하다.[9] 실제로 차기 군주 무왕의 경우 일단 사서에는 법왕의 아들로 나와 있지만, 여러가지 서술을 볼 때 출신이 불확실하며[10] 임성태자후손이라는 《토요타족보》에는 법왕과 무왕 사이에 진이왕이라는 국왕이 추가로 들어가 있다. 중국 측 사서인 《수서》와 《북사》는 물론 《일본서기》 또한 혜왕과 법왕의 존재를 누락하고 있어 이 시기에 정치적 혼란이 있었을 가능성을 증대시킨다.

법왕에 대한 평가는 불교의 영향력이 강했던 고려 때와 성리학이 유일한 국가적 사상이 된 조선의 평가가 완전히 달랐다. 《삼국유사》에서는 법왕을 위에서처럼 찬미하여 시까지 지어서 넣어 두었지만, 조선시대의 《동국통감》에서는 불교 믿어봐야 수명을 늘리고 복을 받는 것 따윈 없다고 부처에 현혹되는 것이 의미없다고 혹평했다.

3. 기타

  • 불교 계율을 민간에까지 강행하는 등 구복적(求福的)인 신앙에 의존하여 정치를 한 것으로 보아 그의 왕권이 불안했던 것 같다. 이미 성왕, 위덕왕, 혜왕까지 3대에 걸쳐 신라에 연전연패한데다 태자 대신 동생이 즉위한다던가 하는 등 내부 정치가 상당히 혼란스러웠던 정황이 드러난다.

4.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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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법왕 본기>
一年 법왕 즉위하다
一年冬十二月 살생을 금하라는 명령을 내리다
二年春一月 왕흥사를 창건하다.[11]
二年 칠악사에서 기우제를 지내다
二年夏五月 법왕이 죽다

5. 대중매체에서

  • 2005년 SBS 드라마 <서동요>에서는 배우 김영호[12]가 연기했다. 혜왕의 아들이자 정치계의 거물로서 이 작품의 메인 빌런으로 등장하는데, 위덕왕아좌태자를 암살하고 즉위한 혜왕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한 것으로 묘사된다. 서동이 이러한 사실을 폭로하여 민심이 등을 돌렸고 결국 이로 인해 실각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법왕의 왕권이 불안했고 재위 기간도 짧았다는 학자들의 추론에 입각한 작가의 상상력에서 나온 이야기인 듯. 하지만 실제로는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법왕이 무왕의 아버지였거나 적어도 무왕의 즉위가 법왕의 갑작스런 죽음과는 무관하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 드라마에서는 《북사》의 기록을 근거로 무왕이 위덕왕의 서자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전개가 나온 것이다.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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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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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러나 《숭암산 성주사 사적》(崇巖山聖住寺事蹟)에는 “성주선원(聖住禪院)은 본래 수나라 양제(煬帝) 대업(大業) 12년 을해(乙亥, 616)에 백제국 28세인 혜왕의 왕자, 법왕이 오함사를 건립한 곳이다. 전쟁에서 승리하여 원혼들이 불계(佛界)에 오르기를 바라며 세운 원찰(願刹)이다.”라고 하여 법왕이 최소 616년까지는 살아있었다고 되어 있다. 물론 이는 다른 기록과 맞지 않기에 좀더 지켜봐야할 부분이다.[2] 김립지찬 성주사비의 기록이다.[3]수서》. 그러나 여기에는 혜왕이 누락되어 있다.[4] 김립지찬성주사비 기록. 비석에는 '백제국 헌왕태자'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혜왕의 다른 시호가 '헌왕'이고 이를 헌왕의 태자로 해석하면 왕자 부여선(법왕)과 동일인물이 된다.[5] 위덕왕의 나이가 자연사하기 충분한 고령이긴 해도 그의 아들이자 명실상부한 후계자인 아좌태자가 버젓이 살아 있었음에도 직계로 왕위가 이어지지 않은 것이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6] 또 사서에 따르면 승하하기 1년 전까지 별 무리없이 정사를 돌본 듯한 흔적이 나오고 아좌태자의 존재도 혜왕의 즉위 이후에는 아예 사서에서 사라진다. 이 탓에 귀족 세력이 위덕왕을 시해하고 혜왕을 허수아비 격으로 보위에 올린 것이 아니냐는 추정도 있다.[7] 이도학, 1989[8] 위덕왕 아들설을 따른다고 해도 위덕왕 역시 고령에 사망했으니 마찬가지이다.[9] 사실 어느 국가들이고 재위 기간이 짧았던 군주들은 이런 와전된 얘기가 나오고는 한다. 당장 조선만 해도 괜히 '조선왕 독살설' 같은 것들이 나온 것이 아니다.[10] 원래는 법왕의 아들일 것이라는 의견이 대세이자 정설이었으나 최근 서동 설화의 진위 여부와 함께 법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11] 그런데 정작 왕흥사는 사리함이 발굴되면서 《삼국사기》의 기록과 달리 위덕왕 대에 건립된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사리탑이 왕흥사보다 먼저 세워졌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12] 2002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이정재 역할을 맡은 것으로 유명한 배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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