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8 15:57:20

구이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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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확실하게 부자관계가 아님이 증명됨
백제 국왕 }}}}}}}}}

백제 제19대 국왕
구이신왕 | 久爾辛王
<colbgcolor=#008080><colcolor=#fbe673> 출생
(음력)
연대 미상
백제 위례성
(現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일대)
사망
(음력)
427년 12월[1]
백제 위례성
(現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일대)
능묘 미상
재위기간
(음력)
백제 제19대 국왕
420년 3월 ~ 427년 12월 (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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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80><colcolor=#fbe673> 성씨 부여(扶餘)
구이신(久爾辛) / 기(奇)(?)[2]
부모 부왕 전지왕
모후 팔수부인
자녀 왕자 부여비유(?)[3]
종교 불교
왕호 구이신왕(久爾辛王) }}}}}}}}}

1. 개요2. 생애3. 《삼국사기》 기록4.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백제의 제19대 군주이자 건길지.

2. 생애

선왕인 전지왕의 맏아들로 약 8년 재위했으나 즉위와 사망 외에 별다른 기록이 없다. 427년 12월 사망했다고 하는데 《송서》에서는 425년에 이미 비유왕이 군주가 된 것으로 나오며 반대로 《일본서기》에서는 구이신왕 사후 개로왕왕위를 계승한 것으로 나와서 여러모로 혼란의 도가니다.

구이신왕을 단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 왕들 중 개루왕, 사반왕, 책계왕, 분서왕, 계왕, 침류왕, 삼근왕, 혜왕, 법왕과 더불어 한중일 삼국의 역사서를 모두 뒤져서 업적을 정리해도 A4 용지 1페이지조차 채울 수 없는 왕들 중 1명이다. 그나마 위의 왕들 중에는 재위 기간이 1~3년밖에 안 되는 왕들도 있는데, 구이신왕은 재위 기간이 8년이나 되지만 남은 기록이 너무 적은 데다가 그마저도 사신무역 기록을 빼면 없다. 기록말살형이라도 당했나 싶을 정도로 기록이 없어 어떤 왕이었는지 자세히 알기 힘들다.

《송서》에도 아예 서차가 누락되어 있는데 비유왕이 재위 기간이 길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서기》에서 1줄도 등장하지 않는 것과 대조적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비유왕의 치세기가 《일본서기》에 1줄도 등장하지 않는게 아니라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으며 그의 치세기는 개로왕과 이전의 선왕들의 치세기로 뒤덮여 있다. 특히나 《일본서기》에 따르면 개로왕의 즉위년도는 429년으로 구이신왕이 사망한 428년의 이듬해이기 때문에 일본 기준으로는 비유왕이 아예 없는 사람으로 취급된다. 또한 구이신왕의 즉위년도는 《일본서기》에 의하면 294년, 즉 이주갑인상을 적용해 보정하면 414년이므로 《삼국사기》의 420년과 차이가 난다. 누가 봐도 비유왕의 치세기를 노골적으로 지우기 위해 이런 조작을 한 것으로 보이며 중국 사서와 《삼국사기》에서도 합치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승계 과정이 정상적이지 않았으며 백제 국내에서 엄청난 혼란과 정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 가지 가설은 비유왕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 백제의 호족이나 왕족 측이 《일본서기》의 근간이 되는 《백제삼서》와 단편적인 사료에서 비유왕의 치세기를 노골적으로 지웠고 《일본서기》가 의도치않게 그것을 그대로 받아 적었을 가능성이 크다.

구이신왕이 우리에게 남긴 것 중 다른 하나는 백제의 국왕 재위 기간 계산법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구이신왕은 427년 12월에 죽었는데 비유왕 2년이 이듬해인 428년이므로 백제에서는 왕이 죽으면 바로 그 달부터 다음 왕의 재위 기간을 계산하였음을 파악할 수 있다.
25년에 백제의 직지왕이 죽었다[薨]. 이에 아들 구이신(久爾辛)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이 어려 야마토(大倭)의 목만치(木滿致)가 국정을 잡았다. 아울러 왕모(王母)와 밀통하여 무례한 행위를 많이 저질렀다. 천황은 이를 듣고 소환하였다【《백제기》에서는 “목만치는 목라근자가 신라를 정벌할 때 그 나라 부인을 얻어서 낳은 자식이다. 아버지의 공적으로 임나에서 전횡을 하다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귀국(貴國)과 왕래하였다. 천조(天朝)의 명령을 받아서 우리나라의 정사를 장악하고 권세를 세상에 떨쳤다. 그러나 천조가 그 포악함을 듣고서 소환하였다.”라고 한다.】.
일본서기오진 덴노 25년. 백제의 직지왕이 죽고 구이신이 왕위에 오름

구이신왕의 기록량이 적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문구가 《일본서기》에 있다. 구이신왕은 전지왕이 사망한 후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고 쓰여 있는데 이 때문에 목만치라는 인물이 국정을 장악했고, 구이신왕의 모후 팔수부인과 놀아나며 구이신왕에게 무례하게 굴었다고 한다. 물론 《일본서기》에만 기록되어 있고 국내나 중국측 기록에는 이런 내용이 전혀 보이지 않기에 진위를 의심하는 이들도 있지만 적어도 백제에 관해서는 《일본서기》기록이 가장 자세하다.[4] 실제로 구이신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면 허수아비 왕이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전지왕의 재위 기간은 405년부터 420년까지이다. 그런데 《송서》에는 전지왕이 424년(구이신왕 5)에 유송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있다.[5] 반면 《일본서기》에는 개로왕의 즉위 원년이 429년(비유왕 3)으로 기록되어 있어 구이신왕의 생몰 연대에 차이가 보인다. 일설에서는 부여기와 동일 인물이라는 추정도 있다.

하지만 대중에게 알려져 있지 않아서 그렇지 구이신왕-비유왕-개로왕 때에 이르는 왕사와 왕실, 귀족간 권력다툼은 어느 정도 전모가 드러나 있다. 줄거리는 구이신왕과 비유왕의 아버지 전지왕 때부터 시작된다. 전지왕은 일본에서 복귀했을 때 이미 팔수부인과 결혼한 상태였는데, 이 팔수부인은 일본 대왕가의 왕족이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것으로 드러나 있고 구이신왕은 팔수부인 소생인 장남이었다. 그러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진씨 혹은 해씨 가문이 자기네 가문 여성을 제2부인으로 제공했고 그 관계에서 태어난 게 비유왕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구이신왕의 모후인 팔수부인이 비유왕을 끼고도는 진, 해씨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옛 목지국 왕가의 후예로서 백제 귀족으로 편입된 목씨와 제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나, 끝내 구이신왕과 팔수부인은 비유왕 지지 세력에게 타도당하고 만다. 그러나 정작 비유왕과 비유왕의 아들인 개로왕 또한 팔수부인, 구이신왕과 마찬가지로 진, 해씨 가문과 심각하게 다투게 되는 게 아이러니다.[6]

3.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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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구이신왕 본기>

一年春三月 구이신왕이 즉위하다
八年冬十二月 구이신왕이 죽다

이게 끝. 재위 8년간 왕위에 올랐고 사망했다 빼면 《삼국사기》에 남은 기록이 없다. 삼국 중 특히 백제는 기록이 너무 없는데 구이신왕도 예 중 하나이다.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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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서기의 기록으로는 414년 ~ 429년이다.[2] 박호균은 저서 《칠지도 명문》에서 구이신을 줄여서 '기(奇)'로 적었다고 주장했다.[3] 《삼국사기》에서는 일단 구이신왕의 아들로 기록했으나 일설에 의하면 전지왕의 서자라고도 한다고 적어놨다. 구이신왕이 15세에 비유왕을 낳았다고 하더라도 즉위 당시 비유왕은 9세에 불과함으로 구이신왕이 20세에 비유왕을 낳았다면 비유왕은 4세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연령관계를 생각한다면 비유왕이 구이신왕의 아들이라기보다는 형제일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중시된다.(이도학, 1995; 이기백, 1996) 《송서》에서도 “여비(余毗, 비유왕)에게 여영(余映, 전지왕)의 작호를 계승하도록 허락했다.”고 명확하게 써져 있어 둘이 조손 관계가 아닌 부자 관계임을 암시하고 있다.[4] 정확히는 일본과 교류가 없었던 초기의 부분은 당대 백제 고유의 기록이 반영된 삼국사기가 가장 자세하고 일본과 교류가 생긴 뒤에는 일본측에서 백제삼서를 참고해 기록했기 때문에 가장 자세하다.[5] 《송서》 권97 <이만열전> -백제편- “소제 경평 2년(424년), 영이 장사 장위를 보내 궐에 이르러 조공을 바쳤다. 少帝景平二年,映遣長史張威詣闕貢獻。” 여기서 ‘영’이 바로 백제왕 여영, 즉 전지왕이다.[6] 때문에 결국 백제 왕실과 진씨, 해씨 가문 모두 한성 공함으로 참혹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내분으로 서로 다투면 모두 망한다는 것은 역사의 진리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알기 어려운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