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31 00:37:24

팔수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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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제18대 왕후
八須夫人 | 팔수부인
<colbgcolor=#4CCB3B><colcolor=#fbe673> 출생
(음력)
390년대 추정[1]
백제
사망
(음력)
미상
백제
능묘 미상
재위기간 제18대 어륙
405년 9월 ~ 420년 3월 (14년 6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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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CCB3B><colcolor=#fbe673> 팔수(八須)
주군 전지왕
자녀 구이신왕 }}}}}}}}}
1. 개요2. 생애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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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제 제 18대 국왕 전지왕의 처.

2. 생애

아이부인 진씨와 달리 팔수부인의 출자는 확실치 않은데, 이에 대해서는 해씨(解氏) 설[2]과 일본 귀족 여성이라는 설[3]이 제기되었다.
25년에 백제의 직지왕이 죽었다[薨]. 이에 아들 구이신(久爾辛)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이 어려 야마토(大倭)의 목만치(木滿致)가 국정을 잡았다. 아울러 왕모(王母)와 밀통하여 무례한 행위를 많이 저질렀다. 천황은 이를 듣고 소환하였다【《백제기》에서는 “목만치는 목라근자가 신라를 정벌할 때 그 나라 부인을 얻어서 낳은 자식이다. 아버지의 공적으로 임나에서 전횡을 하다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귀국(貴國)과 왕래하였다. 천조(天朝)의 명령을 받아서 우리나라의 정사를 장악하고 권세를 세상에 떨쳤다. 그러나 천조가 그 포악함을 듣고서 소환하였다.”라고 한다.】.
일본서기 오진천황 25년.

일본서기에서도 간접적으로 언급되는데, 414년[4] 전지왕이 사망한 후 구이신왕이 즉위한 후[5] 왕이 어려 목만치가 국정을 잡았다고 한다. 목만치는 구이신왕의 어머니와 서로 정을 통하고 왕에게 무례한 행동들을 했다가 이를 보다못한 오진 덴노이 목만치를 일본으로 소환시켰다는 기록이 있다.[6] 이후의 행적은 불명.

일본서기에 목만치와 밀통해 무례한 행위를 저질렀다고 서술한 것에 대해 목만치 등 신진 세력을 등용하여 정국을 이끌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출처]

3. 기타

김현구 교수의 주장에 따라 실제로 일본인일 경우 부여풍의 아내 왕후 오호노오미씨 이전 첫 일본인 왕후가 된다. 현대 학계에서는 여러 정황상 팔수부인은 최소 진씨, 해씨 출신이 아니라 보며 아신왕이 태자인 전지왕을 왜에 보내 아버지 사후에 백제로 돌아갔다는 점과 비유왕이 구이신왕의 아들이 아니라 서제(庶弟)일 가능성이 더 높다는 점,(그러니까 팔수부인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 팔수부인이 손잡은 목만치의 목씨 가문이 목지국 왕가(정확히는 본가인 청당동이 아니라 분가인 용원리)의 후손임이 유력시되는 점, 구이신왕의 치세가 중국 기록에는 삭제되고 일본 기록에만 남은 점을 들어 일본 출신이 더 유력하다고 본다.

전지왕은 막내 숙부인 부여설례아신왕 사후 왕위를 빼앗자 해씨의 힘을 빌어 왜에서 백제로 귀국해 왕위에 올라 전지왕 대에는 해씨가 출세했는데,[8] 전지왕은 즉위하면서 해씨 또는 진씨 여자와 결혼해 비유왕을 낳았다. 팔수부인이 백제 권력에서는 약체임에도 후대 기록에서 '유일한 정실'로 기록된 점을 보면 팔수부인의 신분은 일본에서 대단히 높았을 것으로 보이므로 최소 대귀족, 높게 잡으면 일본 대왕가 출신일 수도 있다.

문제는 전지왕 사후 구이신왕이 즉위하면서 팔수부인의 세력 기반이 없다는 점이다. 진씨, 해씨 세력은 비유왕을 내세우고 있으니 팔수부인이 손을 벌릴 만한 세력은 목지국을 위시로 한 마한계 세력뿐이었을 것이고, 이에 반발한 진씨, 해씨 세력이 아예 구이신왕을 팔수부인, 목만치 등과 함께 날려버리고 비유왕을 왕위에 올린 것으로 본다. 정작 비유왕도 진씨, 해씨를 배제하고자 마한계와 왜계를 끌어들였다 이에 반발한 진씨, 해씨에게 살해당하고 21년간 시신도 수습하지 못했으며, 이에 귀족들을 불신한 개로왕은 부여씨 친족 중심의 정치와 기존 귀족 억제를 이어가며 진씨, 해씨 등과 계속 갈등을 빚다가 결국 한성백제의 멸망이라는 결과를 부르고 만다.


[1] 아신왕의 출생연대를 역산하면 전지왕은 390년대생이 되는데 이를 바탕으로 한 추정.[2] 전지왕 시기에 해씨들이 대거 기용되었는데, 이때 기용된 해수(解須)와 해구(解丘)가 왕의 친적이라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해진다.[3] 한일 관계사를 연구한 김현구 교수의 주장이다.[4] 원문은 294년으로 되어있다. 이주갑인상으로 올린 연도다.[5] 삼국사기에 기록된 전지왕의 사망 / 구이신왕의 즉위년도(420년)과 6년이나 차이난다.[6] 천황의 부름을 받고 일본으로 소환했다는 내용은 일본서기의 윤색으로 보인다. 목만치가 왜로 건너간 이유에 대해선 구이신왕-비유왕 계승이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들어 비유왕의 쿠데타로 인해 실각하여 왜로 건너간 것이라는 설이 있다.(홍성화, 2024)[출처] 조경철 ( Jo Gyung-choul ). "백제 왕비 팔수부인(八須夫人)의 출자와 그 생애." 여성과 역사 -.11 (2009): 105-132.[8] 부여설례를 밀었던 진씨는 이후에도 잘 나간 걸 보면 중간에 전지왕, 해씨와 타협해서 살아남은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