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7 12:33:09

목지국

마한의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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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지국 | 월지국
目支國 | 月支國
<colbgcolor=#251716><colcolor=#ffffff> 국호 목지국(目支國), 월지국(月支國)
존속기간 1세기 후반 혹은 2세기 초반 ~ 3세기 후반 혹은 4세기 중반
소속 연맹 마한(馬韓)
위치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청당동 일대
언어 고대 한국어
국가원수 진왕(辰王), 마한왕(馬韓王)

1. 개요2. 위치3. 역사
3.1. 전성기3.2. 쇠락3.3. 멸망
4. 삼국사기 초기 기록 문제5. 훗날 반복된 지정학적 패턴6. 목지국 이동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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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삼국시대 마한맹주국이자 사실상 수도 역할을 했던 곳이다. 3세기 중후반 이후 한성백제에게 마한 연맹의 주도권을 내주고 백제의 간접 지배 영역으로 전락하며, 4세기 중반엔 직접 지배로 넘어가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를 목지국으로 보고 백제의 왕을 목지국의 진왕으로 추정하는 학설도 있지만, 문헌적[1]·고고학적 근거와 배치되어 정설로서 인정받지는 않는다.

일부 사서에 '월지국(月支國)'이라고도 기록되어 있으나 오기일 가능성이 있으며, 실은 '목지국(目支國)' 또한 그렇다.

2. 위치

현전하는 기록은 적지만, 학자들이 추정하는 주요 위치는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청당동 일대다. 근거로는 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일대에 있던 대목악군(大木岳郡)의 목(木)이 목(目)과 한국어 독음이 비슷함이 주로 거론된다. 또한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가 목지국을 멸망시킨 후[2]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축조하고[3] 탕정성(湯井城)을 쌓은 뒤 대두성의 민호를 나누어 거주하게 하였다고 하는데[4], 이는 목지국 일대 병합으로 늘어난 백제 국경을 방어하기 위해 성을 축조한 것으로 여겨지며, 탕정성(현 아산시 읍내동 일대)의 근처에 천안이 위치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마한 소국들을 북에서 남으로 나열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 목지국이 중간 지점에 위치함 역시 주된 근거다.

일각에서는 목지국의 이칭 또는 원명(原名)으로 추정되는 월지국(月支國)이 충청남도 홍성군 일대의 지명이던 '우견(牛見)'과 상고 한어 재구음이 비슷하다는 점을 들어 홍성 성택리 유적을 목지국으로 비정하기도 하지만 당시 한국에 상고 한어 음이 유입되어 쓰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게다가 홍성 성택리에 있던 마한 거수국[5] 유적은 3세기 중반에 생겨 융성하다가 4세기 중반에 완전 해체[6]되고, 4세기 후반부터 백제가 직접 지배지로 편성한 걸로 드러나는데, 1세기 후반 ~ 2세기 초반부터 시작해 고이왕 혹은 책계왕(3세기 후반), 비류왕(4세기 중반) 등으로 쇠락 폭이 문헌 자료 근거와 함께 딱딱 맞아떨어지는 천안 청당동 유적과 달리, 홍성 성택리 유적은 백제가 목지국 잔여 세력을 진압하는 4세기 초반 시기에 독자 기반이 해체되기에 문헌 자료 시기와 맞지 않다.

게다가 3세기 중반은 문헌 사료로 보면 건국 시기가 백제보다 훨씬 늦고 고고학 자료로 봐도 한성백제와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것인데, 어떻게 봐도 백제국이 자리잡게 허락해준 마한 진왕의 본거지인 목지국이 백제보다 늦게 생겼다는 건 말이 되지 않으므로 홍성에 있던 거수국이 목지국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현재 고고학자들이 추정하는 주요 위치는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청당동 일대며 문헌학계도 별다른 부정이나 반론은 하지 않는 상황이다. 삼국사기 기록으로 보아 백제국 상전이던 천안 목지국은 어디까지나 안성천 이남에 위치할 수밖에 없고, 그와 함께 안성천 일대 무역로를 감제하는 위치도 만족하며 어느 정도 규모 있는 고고학적 발굴 성과가 있어야 하는 지역인데, 아직은 천안 청당동 외엔 이 조건을 만족하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천안 청당동이 목지국 본류라는 주장은 충청남도문화연구원에서 펴낸 백제사 시리즈, 한성백제박물관에서 펴낸 백제사시리즈, 백제와 주변세계[7], 송호정 교수의 고조선사 연구 저서 등에서 거듭 확인된다. 물론 당대 학계 다수설이 세월이 흘러 다른 증거 발견 등으로 논파되는 경우도 없는건 아니지만, 백제가 본가격인 천안 청당동 세력을 탄압해 무력화한 다음 분가격인 다른 세력을 키워준 정황도 시대 유물 및 사서 기록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향후에도 쉽게 논파될 성질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목지국을 도와 백제에 가장 끈질기게 저항한 지역이 다름아닌 천안과 가까운 내륙 일대(청주, 충주, 보은, 진천, 괴산 등)라는 것에서 드러나는 내러티브로도 연관성이 더해진다.

3. 역사

우선 짚고 넘어가자면, 고고학 연구가 진척되면서 오늘날 학계에서는 마한 초기 맹주국을 목지국이 아닌 건마국으로 추정하고 있다. 《후한서》 〈동이열전〉에 따르면 준왕이 기원전 190년경에 위만에게 고조선을 빼앗기고, 자기 수하들을 배에 태워 한반도 남부로 피난해서 마한을 세웠다고 하는데, 이때 준왕이 건국한 나라가 건마국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시기에 고조선계 집단이 익산을 중심으로 하여 전북 서부 지역에서 주도권을 잡은 것으로 파악된다. 이 기록으로 보면 마한은 한씨 조선을 직접 이은 후계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목지국은 언제 마한 맹주국이 되었을까?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후기 목지국에서 준왕의 대가 끊기는 얘기도 서술되어 있기에 중간에 왕조 교체가 일어났을 가능성도 있기는 하다. 다만 당대 한국의 자체 기록은 유실되었기 때문에, 관련 자료와 유물이 추가로 발굴되기 이전에는 어떤 방식으로 왕계가 이루어졌는지 자세히 알기 힘들다.

건마국에서 목지국으로 주도권이 넘어간 것에 대해서는 중요한 두 시사점이 있다. 우선 고고학적으로 전한이 어느 시기 이래로 마한 일대를 경계해서 마한을 견제하고자 진,변한에게만 쇠 및 철제품 수출을 자유로이 허용하고, 건마국이 이끄는 마한 일대는 강력하게 통제한 사실이다. 건마국은 이 과정에서 큰 역할을 못한 것으로 추정되기에 삼한 일대에서 영향력이 상당히 떨어지게 되었을 거라고 추정해볼 수 있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 시기에 건마국에서 한씨조선인 집단이 고고학적으로 다른 집단들에게 주도권을 잃는 현상도 관찰되고, 중국 사서 또한 건마국의 왕통이 어느 시기 이후 단절되었음을 서술하고 있다.

이를 보면 애초에는 준왕 집단이 주도하던 건마국이 마한의 맹주였으나, 준왕 직계 집단이 건마국 내부에서 그전까진 준왕 집단의 피지배 혹은 하위 지배 파트너였던 토돈분구묘제 계열 세력(한성백제의 고고학적 양대 지배 세력 중 하나, 그리고 침미다례의 구성 세력 중 하나인 해양 민족 계열이다)에게 세력을 잃기도 했거니와 계통 자체도 끊어져 권위가 떨어졌고, 게다가 전한의 견제질에 어떤 조치도 취하지 못함 등 이유로 목지국이 유리한 입지를 이용해 수장국이 된 듯하다. 물론 목지국이라고 이런 대놓고 하는 견제를 해결했다는 정황은 문헌으로든 고고학적으로든 없으나, 신나라후한은 그 이전 서한만큼의 견제는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는 주장도 있다.

3.1. 전성기

이 일대에는 본디 송국리 문화 유형인들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고고학적으로는 1세기 후반 ~ 2세기 초반 무렵 내려온 서북한 고조선인들이 송국리 문화 유형인들에게서 주도권을 빼앗아 규모가 상당한 마한 거수국을 이룬 것으로 나타난다. 이 시기는 준왕이 망명한 기원전 190년 및 위만조선이 멸망한 기원전 108년보다 훨씬 후대기에, 목지국 건국 세력은 준왕, 위만조선과는 연관성이 떨어지는 후대 고조선인들, 즉 낙랑 혹은 대방인으로 보는 게 논리적으론 가장 무리가 없는 편이다.

문헌으로 보면 천안 목지국은 아무리 늦어도 한성백제 건국 당시에는 건마국을 대신하는 마한맹주국이 된 것으로 보인다.
마한이 가장 커 모두 마한 종족을 세워 진왕(辰王)으로 삼았다. 진왕 수도는 목지국이고 삼한 전체의 왕이다.
《후한서》 〈동이전〉
그(변한·진한 24국 가운데) 12국은 진왕에 신속(臣屬)되어 있다. 진왕은 항상 마한 사람으로 임금을 삼아 대대로 세습하였다. 진왕이 자립하여 임금이 되지는 못하였다.
其十二國屬辰王。辰王常用馬韓人作之,世世相繼。辰王不得自立爲王。
삼국지 권제30, 23장 앞쪽, 위서 30 오환선비동이전 변진

우두머리를 '진국(辰國)왕'이라는 뜻인 진왕(辰王)이라 했다. 중국 사서(史書)에 삼한 시대의 한강 이남 여러 부족국가를 진국으로 총칭했다. 목지국왕은 진국왕으로, 즉 진왕은 여러 부족 국가 중에 세력이 가장 큰 나라의 왕으로서 부족 국가 연맹의 맹주(盟主) 위치에 있었다. 물론 목지국 역시 실상은 수많은 마한 소국 중 하나였지만, 명목상으로나마 마한, 진한, 변한 3개의 한반도 남부 지역 연맹체가 뭉친 진국이라고 하는 소국연맹 국가로서의 맹주(진왕)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는 기원전 11세기~춘추시대 당시의 주나라와 비슷한 입지였다고 볼 수 있다. 주나라도 실상 수도와 그 근교 지역만 직할했고, 나머지 지역에서는 제후들이 통치했지만 명목상으로는 중국의 천자로 인정되었는데 그것과 비슷했던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혁거세 거서간에게 무례하다 따진 것을 보아 진한변한에도 영향력이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진국은 연맹체이기에 진한과 변한의 각각 12 소국을 신하로 지배했다고 한다.

한편 마한왕을 겸하는 목지국 거수가 진한, 변한에도 정치적 우위가 있었다는 대목에 약간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고고학적으로는 경주를 비롯한 경상도 지방의 목관묘, 목곽묘 부장품이 동시기 목지국이 있었을 마한 지역 분구묘, 토광묘 부장품과 비교해 양과 질 모든 면에서 우세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충남 서북부 마한 최대 무덤유적인 아산시 탕정 밖 지므레 유적의 주구토광묘의 부장품을 보면 철제 무기류 부장량이 경주 덕천리 목곽묘에 비해 많이 딸린다. 쉽게 말해 나라의 내실은 목지국보다 진·변한 소국들이 더 강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그러나 문헌 기록과 반대인 이런 상황은 삼한 시기 소국들의 내부 사정을 이해하면 설명이 된다.

1번째 설로, 당시 삼한 지역 사람들은 아무래도 중국과 고조선 유민이 결합한 (초기 삼국시대 삼한보다 선진적이었을법한) 한반도 북서쪽 한사군 일대와 교역이 무척 중요했다. 그런데 진·변한 소국들이 연안 항해로 저기까지 올라가려면 전라남도를 돌아서 충청도 목지국이 통제하는 아산만을 통과해야 했다. 즉, 목지국이 우위를 차지한 건 국력 자체가 강해서가 아니라 지리적 위치상 경제적, 외교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삼한 일대 소국들이 모여서 정한 일종의 정치적 타협 결과 주나라처럼 목지국을 명목상의 상전 국가로 둔 것이라는 주장. 2번째는, 애초에 목지국이 상국 위치에 있던 시기 진한, 변한에 상당수 이민자들이 왔다는 설이다.[8] 기록만 봐도 타 지역에서 전란이 발생해서 대량의 유이민이 발생했을 경우 이들은 목지국을 거쳐서 한반도 곳곳으로 퍼졌으며 목지국 왕이 사람이 없는 지역을 지정해줘서 그곳에 정착했다는 기록과 또 여행 온 중국 사람이 대화가 통하는 마을에 가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고 한다. 즉, 선진 문물을 가지고 남하한 집단이 목지국의 안내를 받아 당시 인구밀도가 적은 진·변한에 정착했다고 본다면 이들 지역의 질이 더 좋은 것도 이해 못할건 없다.

3.2. 쇠락

삼국지》 〈위지〉 동이전 등에 기록된 것을 보면 한성백제도 초기엔 목지국이 주도하는 마한 지역에 있는 일개 거수국이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 그러나 상술한대로 진한의 실력이 만만찮았던데다 가뜩이나 고구려의 성장을 주목하고 있던 삼국시대 위나라마한의 위험성을 인지하게 되자 상황은 크게 변하게 된다. 관구검동천왕의 고구려를 크게 쳐부수어 강원도 동부 일대 경로를 확보하게 된데다 그 시점부터 한동안 고구려는 신경쓸 것 없게 된 위나라가 별안간 마한왕의 무역 독점권을 인정하지 않고 이제 진한과 직거래를 트면서 진한을 거의 마한과 같게 대우하겠다고 통보한 것. 이 말인즉슨 마한과 마한왕(=목지국 거수=삼한의 명목상 맹주)이 삼한 지역에서 차지하는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이나 진배없었다. 이러한 조치로 가장 심하게 이익을 침해당하는 건 신분활국(신분고국)을 비롯한 임진강 유역의 마한 소국들이었으나, 목지국을 비롯한 마한 지배 세력 입장에서도 크게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었다. 자세한 사항은 기리영 전투 문서도 참조. 이 전투 결과 경기도 동부, 황해도, 강원도 서부에 소재한 적지 않은 마한 소국들이 목지국을 등지고 위나라에게 충성하게 되었으며, 진한과의 직거래 루트 또한 이로 인해 완전히 뚫려 마한의 대중국 외교 및 무역 독점권은 실질적으로 부정되고 만다.

이러니 기원후 246년 이후 어느 시점에서 목지국의 위상은 수직낙하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목지국도 지긴 했으나 그 과정에서 위나라에게 꽤 큰 타격을 입혔던 것으로 보이며, 고구려도 상대적으로 짧은 시기 동안 국세를 회복하게 된다. 이보다 수백 년 전 마한 맹주국이었던 건마국전한에게 아무 것도 못해본 것과 비교해본다면, 마한 일대와 목지국의 실력이 적어도 그동안 꽤 성장했다고 볼 수도 있는 대목이다.[9]

그러나 문제는 백제국이 목지국에게 틈을 내주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발생했던 한반도 중부의 권력 공백을 백제국이 치고 들어온 것이다. 다만 목지국이라고 가만 있던 건 아니었다. 이후 백제국과 상대한 거의 한 세대에 가까운 격렬한 투쟁에서 보이듯 적어도 목지국이 위치한 천안 및 그 근처 청원, 홍성, 보은, 아산, 괴산, 옥천, 충주, 진천 등에 있었던 마한 거수국들은 모두, 목지국과 한편이 되면서 백제와의 마찰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목지국은 결국 백제에게 무릎 꿇고 만다.

사실 전쟁 초기부터 국력 차이는 꽤 있었던 걸로 보인다. 백제와 본격적으로 개전할 당시 목지국 친위 세력은 기껏해야 충청도 약 절반 정도에 그마저도 대부분 산악 내륙 지역이었던 반면, 목지국에게 3세기 중후반에 기습적으로 전쟁을 걸은 고이왕 때 백제국은 경기도 전체를 직접 지배화한 건 물론 충청도도 이미 서부 절반 지역은 침투가 완료된 상태였다. 또한 상술한 임진강 유역 및 강원도 서부 및 경기도 동부의 마한 소국들은 하나하나 백제에게 쓰러져 직접 지배령화되어가고 있었는데, 위나라낙랑군, 대방군 등은 본국인 위나라가 촉한, 동오랑 한창 전쟁하고 있고, 서진으로 통일된 이후에도 각종 난들이 발생하며 나라 자체가 내부적으로 개판인데다 북방민족과 고구려 견제 등에도 힘을 써야 했기에 이 과정에서 백제군까지 제대로 상대할 겨를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니 백제는 적어도 3세기 중반 ~ 4세기 초반까지 무려 반 세기 동안 북방은 거의 신경쓰지 않고 목지국 계열 세력에게 전력을 투사할 여건이 마련된다.

게다가 목지국을 중심으로 한 반백제 연합에서 중심이 되어주었어야 할 목지국 자체가 3세기 중후반 책계왕 무렵 기습적으로 본거지인 청당동을 함락당하면서 무력화된 건 정말 큰 타격이었다. 즉 앞장서서 싸워줘야 할 우두머리가 기습 한 방에 쓰러진 상황에서 싸움이 시작된 모양새인데, 이러니 목지국 잔여 세력이 백제에게 제대로 저항할 수 있을리 만무했다. 결국 비류왕 재위기에 해당하는 4세기 중반에 충청북도 청주시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 용원리의 백제 제휴 세력이 성장하는 것과 비례해서, 천안 청당동 잔여 세력은 완전히 퇴락하여 없어지는 걸로 나타난다. 고고학적으로는 3세기 후반~4세기 초반 즈음 백제의 직접 지배령의 진격이 충청도 북동부에서 갑자기 멈추면서 오히려 충청도 서부와 전라도 서부를 타며 내려가는 양상이 나타나는데, 목지국 및 목지국 추종 세력과의 저항 추이와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걸 보면 목지국이 맹주 자격을 잃은 후에도 그 일대가 직간접적으로 열심히 저항했음이 짐작되는 부분이다.

3.3. 멸망

결과적으로 요약하면 3세기 중반부터 목지국은 낙랑군과의 교역권을 한성백제에게 상당 부분 침해당하다가 3세기 후반에 백제에게 일격을 당하면서 마한맹주 자리를 빼앗겼고, 이후에도 4세기 중반 쯤까지 저항했지만 이후엔 마지막 저항 세력마저 무너진 것으로 추정된다.

거의 한 세대에 가까운 세월 동안 격렬한 투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이 시기에 충청도 내륙부는 각 거수국들 내부에서 일종의 언더독에 해당하는 세력들을 백제가 후원하며 열심히 내외부에서 흔들어댔던 정황이 드러난다.[10] 각 충청도 마한 소국들의 적지 않은 주도 중심 분묘 위치 지역들이 꽤 바뀌고 있는 양상인데[11], 이는 백제가 말을 듣지 않는 마한 거수국의 주류 세력을 어떤 수단을 써서든 무력화하거나 해체하고, 상대적으로 고분고분한 비주류 세력에게 자치권을 부여한 것으로 풀이된다.[12] 이는 상황에 따라 화해와 배반, 전쟁과 응징 등을 그래도 약 백 년 단위로 반복했던 침미다례나, 6세기 초 대가야와 연합해 백제와 10여년간 전면전을 불사했지만 그래도 상황이 비교적 빨리 정리된 무령왕 시대 전라도 동부 지역과도 상당히 양상이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목지국과 백제국간 대립과 갈등이 격렬했던 건, 백제국의 엄연한 상전이었고 삼한 전체의 명목상 우두머리였던 목지국 및 그 직계 잔여 세력들이 당연히 백제를 순순히 따를 순 없었던 상황과, 목지국을 먼저 어떻게든 정리하지 않으면 침미다례를 비롯한 다른 마한 내부 세력들과의 서열 정리가 대단히 어려워지는 백제 사정 탓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전쟁이 끝난 후 백제는 항복한 세력들은 나름대로 대우해준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천안 청당동 세력의 분가인 천안 용원리 세력에겐 그 일대의 자치를 허용하게 해줬다.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협조해준 대가로 존재는 허가받은 것.

그러나 명목상으로는 삼한 전체 수장이었고 백제의 상전이었던 목지국의 마지막 잔재는 475년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목이 따이고 위례성이 함락당하는 대참사가 벌어진 한성 공함 이후 완전히 뿌리 뽑혀 사라지게 된다. 한성 공함 이후 위례성을 버리고 남하한 백제 세력으로 인해 이 일대는 삽시간에 고구려에 대항하는 웅진백제의 최북단 국경지대가 되어버렸고, 옛 청당동 세력의 치소는 백제 중앙정부가 직할하는 출장사무소 내지는 군사령부 자리로 개편된다. 용원리 세력 또한 묘제가 갑자기 죄다 석실묘제로 바뀌어버리고 부장 유물 자체도 크게 퇴락하고 만다. 학자들은 용원리 세력이 지역 기반을 포기하는 대가로 중앙 귀족으로 전환되었다고 보고 있다.[13]

4. 삼국사기 초기 기록 문제

삼국사기를 보면 기원전부터 백제와 신라가 전쟁을 벌였다는 식의 기록이 있는데, 고고학적으로나 문헌학적으로나 신뢰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때문에 이러한 전쟁들이 자리잡았다는 현장이 실제로는 목지국과 백제국의 분쟁 현장이었을 가능성이 거론된다.

주된 전장은 낭자곡성(청원), 와산성(보은), 구양성(괴산옥천), 모산성(진천) 등인데, 진한과 마한 소국들이 다툰 기록이 백제와 신라가 싸운 기록으로 훗날 옮겨졌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 일대는 진한에 속한 지역이 아닌 실제로는 목지국의 강한 영향력 아래 있던 지역들이었기에, 백제가 목지국 잔여 세력들을 완전히 뿌리 뽑으려면 반드시 함락해야 했던 입지가 중요한 군사 요지들이었다. 이는 사로국으로 망명하기 전 충주 금릉동에 소재한 마한 거수국이었던 김씨 족단이, 목지국 편에서 목지국 친위 세력들과 함께 백제와 싸운 경험의 기록이었을 개연성이 현재로선 높아보인다.[14]

훗날 진흥왕 때 신라가 청주, 천안, 청원 외 옛 목지국 직계 세력 지역을 모두 장악에 성공하는 것도 특기해볼 사항이다.

5. 훗날 반복된 지정학적 패턴

후삼국시대에는 목지국 지지 세력 강역 중 부여, 괴산, 보은을 제외한 다수가 견훤후백제가 아닌 궁예태봉을 선택했는데, 이는 궁예가 백제계를 친위 세력으로 두고 고구려계를 견제한다는 정책을 쓴 탓이었으나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다. 패서 호족이 궁예를 타도한 후 왕건의 만류도 뿌리치면서 백제계 호족에게 복수해대자 옛 목지국 지지 세력 강역 중 천안을 비롯한 충청 북부 일대는 그래도 고려에게 남았으나 나머지는 견훤에게 달려간 것 또한 눈여겨볼 사항이다. 다만 이 대목에서 군사적 충돌 사항은 태봉-고려가 한성백제 포지션인 반면, 백제를 계승했다는 후백제는 한성백제에게 저항하던 목지국 친위 세력과 비슷한 패턴을 보이고 있음이 중요하다.

시대와 명분은 달라졌으나 태봉-고려가 경기도와 천안을 확고히 장악하여 흡사 목지국을 막 무너뜨린 3세기 후반~4세기 초반 한성백제와 입장이 비슷해진 반면, 남쪽의 후백제는 충북 남부를 장악해서 3세기 후반~4세기 초반 목지국 잔여 세력과 입장이 비슷해진 것이다. 다만 한성백제는 부여와 대전 일대를 일찌감치 손에 넣은 반면 후백제는 백제부흥의식으로 부여와 대전을 장악한 것, 직간접적으로 천안은 4세기 중반까지도 백제에게 저항했던 반면 10세기 천안은 처음부터 끝까지 태봉-고려가 확고히 붙잡고 있는 게 약간 달라진 점이다.

6. 목지국 이동설

1990년 최몽룡 교수가 한성백제에 밀린 목지국이 천안→익산→나주 반남면 순으로 남하했다는 소위 '목지국 이동설'을 제기한 적이 있었지만, 이는 현재 거의 폐기된 이론이다. 일단 천안과 익산, 나주에 있었던 각 마한 거수국은 묘제와 유물에서부터 전혀 계승 관계가 없다. 교류가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이 주장은 세 부분에서 크게 반박되었다. 마한 수장국 자리는 오히려 익산에서 천안으로 이동했고, 목지국 세력이 완전 무력화된 4세기 중반에 익산 일대는 백제의 간접 지배 지역이 되어 있었으니 목지국이 천안에서 익산으로 가는 건 있을 수 없다. 게다가 나주 반남면은 백제가 침미다례 주도 세력인 영암과 해남을 무력화하기 위해 일부러 선택해서 키운 세력인만큼, 익산에서 나주 반남면으로 가는 게 애초부터 불가능한 건 둘째치고, 천안에서 나주로 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마한과 백제의 교체 관계는, 마한이 어떤 고대 국가로서 백제에게 일방적으로 영토를 잃어가면서 저항하다 망하는 과정이 아니라, 마한 연맹체 소속인 백제국이 우선 임진강 및 한강 유역 일대를 통합한 다음에 맹주국인 목지국을 제압한 후 마한 영도국 자격으로 마한 전체를 영역 국가로 통합해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상술했듯이 여러 의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수 없는 '목지국 이동설'은 현재로서는 완전히 부정된 옛날 학설이라고 보면 된다. 문헌사학계와 고고학계 의견이 늘 일치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목지국 이동설은 문헌학으로든 고고학으로든 전혀 성립하지 않는 게 현실이다.


[1] 가령 삼국지에서 진왕을 목지국만을 다스린다고 기록한 것과는 달리 삼국사기에서의 백제는 북으로는 패하, 남으로는 웅천, 동으로는 주양(走壤: 강원도 춘천시로 비정), 서로는 대해에 닿는 영토국가로서 묘사된다든가.[2] 삼국사기 권 23, 백제본기 제1, 시조 온조왕 27년, 27년 4월 마한을 멸망시키다.[3] 삼국사기 권 23, 백제본기 제1, 시조 온조왕 27년, 27년 7월 대두산성을 쌓다.[4] 삼국사기 권 제23, 백제본기 제1, 시조 온조왕 36년, 36년 7월 탕정성을 축조하고 주민을 이주시키다.[5] 거수(渠帥)는 무리의 우두머리를 뜻하는데 보통은 부정적 뉘앙스로 쓰이며(비슷한 의미의 단어로는 수장, 수괴 등이 있다.) 중국측 사서에서는 고대 주변민족들의 군장(君長)을 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거수 대신 장수(長帥)로 쓰이기도 하였고 거수국은 군장국, 추장국 정도로 해석될듯싶다.[6] 한성백제박물관 시리즈 제20권 백제 도성편 참조.[7] 출판사 진인진. 저자 성주탁 교수 추모회 논문 모음집.[8] 신라도 건국 초 많은 이주민 세력들이 왔었다는건 기록상으로도 확인된다. 금관가야도 허황후만 봐도..[9] 물론 위나라가 서한(전한)에 비해선 당연히 국력이 약했던데다 그마저도 일부는 동오, 촉한, 북방 야만족 등에게 늘 할애해야 했던 것도 고려할 부분이다.[10] 침미다례 지역을 접수할 때도 비슷한 정황(영암 시종면 vs 나주 반남면)이 있었다. 공주 바로 옆인 세종시 대평동에 소재했던 세력은 한성백제가 그전까진 세종시 내 언더독 집안들에 불과했던 새롬동 및 나성동 세력을 후원하며 통치 파트너로 삼는 시기에 급격하게 약화되는 모습을 보인다.[11] 특정 집안이나 가문의 분묘가 더 이상 축조되지 않는 상황을 말한다. 이 경우는 쉽게 요약하자면, 후손들이 딴 곳으로 강제이주당하거나 아예 대가 끊겨버렸다는 얘기다. 즉 백제에게 비협조적인 집안들은 다 망해버린 결과라고 이해하면 간단하다. 바로 천안 청당동 목지국 직계가 당한 일이다.[12] 물론 백제가 모든 충청도 마한 거수국에게 이랬던 건 아니다. 적당한 타이밍에 잘 협상해서 위치를 유지한 소국도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위치가 백제와 가장 가까워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었겠지만, 목지국 직계 세력들 중 청주에 소재한 거수국이 가장 먼저 목지국을 등지고 백제에게 항복했기에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한성백제에게 협력한 공주 수촌리 세력도 마찬가지.[13] 백제 대성팔족 중 하나인 목라씨(木刕氏)(일본 기록에 따르면 木羅라고도 표기했으며 표기와 상관없이 '모쿠라'라고 훈을 달았기 때문에 목라씨일 가능성이 높다.)와 목소씨(木素氏)가 용원리 지배층 출신으로 유력시된다. 목지국이 소재한 천안 청당동 근처인 목천읍의 목(木)이 목지국의 목(目)에서 유래된 것으로 유력시되기 때문에, 국명을 씨로 쓰는 경우가 흔했던 시대적 특성에 따라 목지국에서 목라씨를 따왔다는 것이다. 목라씨가 목(木)으로 축약 표기하는 경우가 흔했다는 점에서도 확인 가능한 부분. 목라씨는 백제의 마한과 가야 남정에서 주로 활약했으며, 백제 멸망 이후 상당수는 왜로 이주했고 한반도에 남은 사람들은 임(林)씨로 변성해 현대까지 내려온 것으로 추정된다.(왜로 이주한 목라씨도 하야시(林)씨를 썼다)[14] 신라사 전공 강종훈 교수의 신라상고사 연구 참조. 다만 강종훈 교수는 여러 지정학적 측면에서 충주에 소재한 진한 거수국이 충북에 있던 세력들 및 경북 영주, 상주에 있던 진한 서북부 세력들과 연계해 백제와 싸웠을 것으로 여러 문헌 사료를 통해 효과적으로 입증하였으나, 이 저서가 나오던 시기에는 충주의 고고학적 성과가 발굴되기 전이었기에 충주에 있었을 유력한 삼한 거수국은 진한 소속 거수국이었을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발굴 결과 충주에 있었던 거수국은 (고고학적으로는 한성백제와 거의 같은 시기인 3세기 중반에 건국된 것으로 추정되는) 천안, 홍성과 거의 계통이 같은 전형적인 목지국 계열 마한 거수국이었던 걸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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