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02 02:13:04

아림국

마한의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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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2. 일본서기 기록

1. 소개

兒林國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소개된 마한 54개국 중 하나이다. 소국일 당시의 기록은 없지만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한반도의 지명 이림성(爾林城)과 동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고한어 기준으로 아림과 이림은 모두 발음이 '니림(ȵiᴇ.lim)'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3~4세기 무렵 백제에 병합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일본서기》에서는 397년 8월 백제 아신왕왜국에 예의를 갖추기 않았기 때문에 이 지역을 빼앗고 왕자 부여전지를 볼모로 데려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헌 특성상 이 기록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4세기 말에는 아림국이 위치했던 곳이 동한(東韓)의 일부로서 백제의 소유가 되었음이 확인된다. 이후 405년 9월 아신왕이 죽자 전지왕으로 즉위한 부여전지가 이림성을 다시 되찾았다. 5세기에는 광개토대왕장수왕의 대외 확장 과정에서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는데, 이 사실은 《일본서기》 487년 기사에서도 드러난다.

정확한 위치는 불명이나 《일본서기》 550년 4월 1일 기사에서는 백제가 이림성을 공격해 사로잡은 고구려의 노비 6명을 선물했다는 내용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삼국사기》 550년 1월 기사에 나타나는 백제의 도살성(道薩城) 점령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면 이림성과 도살성이 서로 인접해 있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 견해에 의거하면 아림국은 고구려 도살성, 즉 도서현(道西縣)이 있었던 충청북도 증평군 도안면 일대에 비정된다.

한편 마한 소국 중 한자 림(林)이 들어가는 국명은 아림국이 유일하며, 《삼국사기》에 기록된 삼국시대 지명 중 림(林)이 들어가는 설림군(舌林郡)과 가림군(加林郡)이 각각 충청남도 서천군 서천읍부여군 임천면으로 서로 인접해 있었다는 점을 들어 그 근방인 금강 하구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1] 다만 이 설을 따를 경우 5세기 후반 당시 국경 지대도 아니고 백제 영토 한가운데에 고구려의 월경지가 생겨버리는 문제가 발생한다.

일각에서는 국명이 《일본서기》에서 등장하는 의 옛말 '니리무(ニリム)'와 발음이 유사하다는 점[2]과 한자 임(任)의 중고한어 재구음이 '님(ȵiɪm)'이라는 점을 근거로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백제의 임존성(任存城)이 있었던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에 비정하기도 한다. 다만 이 경우 지침국이 비정되는 위치와 겹치며 마한 소국 목록에서 나열된 순서와도 맞지 않는다.

2. 일본서기 기록

百濟人來朝. 【百濟記云, 阿花王立无禮於貴國. 故奪我枕彌多禮, 及峴南·支侵·谷那·東韓之地. 是以, 遣王子直支于天朝, 以脩先王之好也.】
백제인이 내조하였다. 【《백제기》에 따르면, 아화왕(阿花王)이 왕위에 있으면서 귀국에 예의를 갖추지 않았으므로 (귀국이) 우리의 침미다례 및 현남(峴南), 지침(支侵), 곡나(谷那)[3], 동한(東韓)의 땅을 빼앗았다. 이에 왕자 직지(直支)를 천조(天朝)에 보내 선왕 때의 우호를 닦도록 하였다.】
일본서기》 10권 오진 덴노 8년(397년)[4] 3월
是歲, 百濟阿花王薨. 天皇召直支王謂之曰, 汝返於國以嗣位. 仍且賜東韓之地而遣之. 【東韓者, 甘羅城·高難城·爾林城是也.】
이 해에 백제 아화왕(阿花王)이 죽었다. 천황이 직지왕(直支王)을 불러 "그대는 나라로 돌아가서 왕위를 이으라."고 말하고 동한(東韓)의 땅을 돌려주면서 보냈다. 【동한이란 감라성(甘羅城), 고난성(高難城), 이림성(爾林城)[5]이 그것이다.】
일본서기》 10권 오진 덴노 16년(405년)[6]
是歲, 紀生磐宿禰, 跨據任那, 交通高麗. 將西王三韓, 整脩官府, 自稱神聖. 用任那左魯那奇他甲背等計, 殺百濟適莫爾解於爾林. 【爾林高麗地也.】 築帶山城, 距守東道. 斷運粮津, 令軍飢困. 百濟王大怒, 遣領軍古爾解內頭莫古解等, 率衆趣于帶山攻. 於是, 生磐宿禰, 進軍逆擊. 膽氣益壯, 所向皆破. 以一當百. 俄而兵盡力竭. 知事不濟, 自任那歸. 由是, 百濟國殺佐魯那奇他甲背等三百餘人.
이 해에 키노 오이와노스쿠네(紀生磐宿禰)가 임나(任那)에 웅거하여 고구려와 교통하였다. 그리고 서쪽으로 삼한의 왕이 되고자 하여 관부(官府)를 정비하고 수리해서 스스로 카미(神聖)라고 칭하였다. 그는 임나의 좌로(左魯) 나기타(那奇他) 갑배(甲背)[7] 등의 계책을 써서 백제의 적막이해(適莫爾解)를 이림(爾林)에서 죽였다. 【이림은 고구려의 땅이다.】 그리고 대산성(帶山城)을 쌓아서 동쪽 길을 막고 식량을 운반하는 나루를 끊어 군대를 굶주리고 곤핍하게 하였다.

백제의 왕은 이에 크게 노하여 영군(領軍) 고이해(古爾解)와 내두(內頭) 막고해(莫古解) 등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대산(帶山)을 침공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오이와노스쿠네가 군사를 내어 역습했는데, 담력이 더욱 강해져서 가는 곳마다 모두 깨뜨리니 한 사람이 백 사람을 감당할 정도였다. 그러다 얼마 후 군대의 힘이 다하니 일이 원만히 끝나지 않을 것을 알고 임나로 돌아왔다. 이로 인해 백제는 좌로 나기타 갑배 등 300여 명을 죽였다.
일본서기》 15권 겐조 덴노 3년(487년)
在百濟日本王人, 方欲還之. 【百濟本記云, 四月一日庚辰, 日本阿比多還也.】 百濟王聖明, 謂王人曰, 任那之事, 奉勅堅守. 延那斯·麻都之事, 問與不問, 唯從勅之. 因獻高麗奴六口. 別贈王人奴一口. 【皆攻爾林, 所禽奴也.】
백제에 있는 일본 왕의 사자가 비로소 돌아가고자 하였다. 【《백제본기》에는 4월 1일 경진에 일본의 아비다(阿比多)가 돌아갔다고 전한다.】 백제왕 성명(聖明)이 사자에게 "임나의 일은 칙을 받들어 굳게 지키겠다. 연나사(延那斯)와 마도(麻都)[8]의 일을 문책할 것인지 아닌지는 오로지 칙에 따를 것이다."라고 말한 뒤 고구려의 노비 6명을 바치며, 별도로 사자에게 노비 1명을 주었다. 【모두 이림(爾林)을 공격하여 사로잡은 노비이다.】
일본서기》 18권 긴메이 덴노 11년(550년) 4월 1일

[1] 주로 설림군과 연관지어 서천군 서천읍에 비정하는 편이다.[2] 실제로 《일본서기》에서는 이림을 '니리무(ニリム)' 또는 '니린(ニリン)'으로 훈독했다.[3] 백제의 욕내군(欲乃郡)으로, 곧 전라남도 곡성군을 의미한다.[4] 《일본서기》의 기년을 그대로 신뢰하면 서기 277년이지만, 아신왕이 등장하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실제 연대는 이주갑인상을 적용한 서기 397년으로 추정된다.[5] 일본서기 원문에서는 '니리무노사시(ニリムノサシ)'로 훈독하였는데, 뒤의 '사시'는 을 뜻하는 중세 한국어 '잣'의 옛 형태인 '*자시'를 음차한 것으로 보인다.[6] 《일본서기》의 기년을 그대로 신뢰하면 서기 285년이지만, 아신왕은 405년 9월에 죽었으므로 실제 연대는 이주갑인상을 적용한 서기 405년으로 추정된다.[7] 좌로는 《일본서기》 긴메이 덴노 5년(541년) 2월조의 '좌로(佐魯) 마도(麻都)'에서 알 수 있듯 칭호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갑배 역시 《일본서기》 게이타이 덴노 23년(529년) 3월조의 '마나(麻那) 갑배(甲背)'에서 알 수 있듯 칭호였을 것이다.[8] 일찍이 안라국에 머무르며 친신라 행보를 보임으로써 백제 성왕의 눈엣가시가 되었던 가야계 왜인 관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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