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05 03:24:10

게이타이 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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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E0026><colcolor=#dca600>
일본 제26대 천황
게이타이 덴노
繼體天皇
파일:external/www.pahoo.org/img0507-01.jpg
출생 450년
오미국 타카시마고오 미오노
(現 시가현 타카시마시)
사망 531년 3월 10일 (향년 81세)
나라현 반여옥수궁
(現 나라현 사쿠라이시)
능묘 미시마노아이노능([ruby(三嶋藍野陵, ruby=삼도남야릉)])
재위기간 제26대 천황
507년 3월 3일 ~ 531년 3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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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E0026><colcolor=#dca600> 오호도([ruby(袁本杼, ruby=원본저)], [ruby(男大迹, ruby=남대적)], [ruby(乎富等, ruby=호부등)], [ruby(雄大迹, ruby=웅대적)])
부모 부친 히코우시 왕
모친 후루히메
배우자 오와리노메노코히메
타시라카 황후
자녀 9남 12녀
관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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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스바노미야([ruby(樟葉宮, ruby=장엽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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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쿠니노미야([ruby(弟國宮, ruby=제국궁)])
이와레노타마호노미야([ruby(磐余玉穗宮, ruby=반여옥수궁)])
한풍 시호 게이타이 덴노([ruby(繼體天皇, ruby=계체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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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대적천황(雄大迹天皇)[1][2][3]
원본저명(袁本杼命)[4][5]
언태존(彦太尊)[6][7]
남대적왕(男大迹王)[8][9]
호부등대공왕(乎富等大公王)[10][11][12]
부제왕(孚弟王)[13]
남제왕(男弟王)[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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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게이타이 천황상.jpg
후쿠이시의 게이타이 천황상
1. 개요2. 생애3. 이야기거리
3.1. 가문3.2. 오오키미(대왕, 大王) 즉위 당시 의문3.3. 게이타이~긴메이 내란설3.4. 전설3.5. 스다하치만 신사 인물화상경과 백제 무령왕과의 관계
4. 묘소5. 가족관계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제26대 천황이자 현 일본 황실의 중시조이다.

패전 직후인 1953년에 제기된 미즈노 유우(水野祐)의 <3왕조 교체설>(三王朝交替説)에 따르면 게이타이 덴노 이전에 두 차례의 왕조 교체가 있었으며 게이타이 덴노가 현 일본 황실 최초의 혈통적 직계 조상이다.[15] 오늘날에도 일본 사학계 내에서 게이타이 덴노 이전의 천황들과 게이타이 덴노 사이의 혈통적 연관성에 관한 이견이 분분하다.

화풍 시호[16]는 오오도노스메라미코토(雄大迹天皇)이며, 휘는 오호도(袁本杼)이다. 게이타이 덴노는 한자로 쓰면 '계체'(繼體)인데, '조상의 뒤를 잇는다', '제왕의 자리를 잇는다'는 뜻이다.

2. 생애

《고사기》나 《일본서기》는 그를 제15대 오진 덴노의 5세손(증손자의 손자/현손자)이요, 아버지는 히코우시 왕(彦主人王)이라고 적었다. 오미국(近江國) 다카시마노사토(高嶋鄕) 미오노(三尾野, 지금의 시가현 다카시마 시 근처)에서 태어났지만, 일찍이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의 고향인 에치젠국(越前國) 다카무쿠(高向, 지금의 후쿠이현 사카이시 마루오카쵸 고량)에서 자랐으며, '오오도노오키미'(男大迹王, 남대적왕)로서 5세기 말 에치젠(오미라는 설도 있음)을 통치했다.

《일본서기》는 부레츠 덴노가 후손도 없이 506년에 죽자 오오무라지(大連)인 오오토모노 가나무라(大伴金村)와 모노노베노 아라카이(物部麁鹿火), 오오미(大臣)인 고세노 오토히토(巨勢男人) 등이 협력하여, 맨먼저 제14대 주아이 덴노의 5세손으로 단바국(丹波國)에 살던 야마토히코 왕(倭彦王)을 발탁했지만, 야마토히코 왕은 맞아가려고 온 병사들을 보고 겁에 질려 산속으로 숨어버렸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은 제15대 오진 덴노의 5세손으로 에치젠에 있었던 (부레츠 덴노와 혈연관계가 옅은) 오호도 왕을 데려다 야마토 왕권의 오오키미('대왕')로 추대했다. 오호도 왕도 처음에는 이를 의심하여 부하인 가와치노 우마가이노오비토 아라코(河內馬飼首荒籠)를 시켜 오오무라지와 오오미 등의 본의를 확인하고 나서야 승낙하고는, 이듬해 507년에 58세 나이로 가와치국 구스바노궁(樟葉宮)에서 즉위한 후 부레츠 덴노의 누나(혹은 여동생)인 타시라카 황녀를 황후로 삼았다.

그러나 게이타이가 야마토(大倭, 대왜, 뒤의 야마토국)에 도읍을 정한 때는 즉위하고 20년이 지난 526년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야마토 왕권 내부 또는 지역 소국 간에 오오키미 자리를 둘러싸고 정치적 혼란이 벌어졌으며, 야마토 왕권이 아직 규슈 북부의 호족들까지 장악할 정도로 강하지 못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 직후 백제에서 요청한 구원군을 규슈(九州) 북부까지 보냈지만, 신라와 연계한 이와이(磐井)가 반란을 일으켰다.

531년 마가리노오에 황자(안칸 덴노)에게 양위했는데, 기록상으로는 일본 역사상 첫 양위 사례이다. 게이타이는 아들이 즉위한 날에 붕어했다. 《일본서기》는 백제의 기록 《백제본기》(百濟本記)를 인용해
"일본의 천황과 태자, 황자가 한꺼번에 죽었다".(日本天皇及太子皇子 倶崩薨)
라고 기록했다. 이는 모종의 정변이 일어나 게이타이 덴노 이하 여러 황족들이 살해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17] 《고사기》는 게이타이가 사망한 해를 527년이라 기록했는데, 이를 따르면 수도를 세운 이듬해에 게이타이 덴노가 사망한 것이다. 사망 당시의 나이에 대해서도 《고사기》는 대략 40세, 《일본서기》는 약 80세라고 했다.

3. 이야기거리

3.1. 가문

《일본서기》에 의하면 게이타이 덴노의 아버지는 15대 오진 덴노의 고손자 히코우시 왕(彦主人王)이고, 어머니는 11대 스이닌 덴노의 7세 손이라 전하는 후리히메(振媛)이다. 하지만 《고사기》나 《일본서기》는 오진 덴노에서 게이타이 덴노 사이의 중간 4대의 계보를 생략했으므로, 《석일본기》(釋日本記)에 인용된 《조구키》(上宮記) 일문으로 가까스로 짐작할 수 있다.

이를 따른다면 남자의 직계는 호무타와케노오키미(일본어: 凡牟都和希王)라고도 불렸던 오진 덴노에서 와카누케후타마타 왕(若野毛二俣王) ─ 오이라츠코(大郎子), 일명 오호호도노오키미(意富富等王)[18] ─ 오이도 왕(乎非王) ─ 우시 왕(汙斯王), 즉 히코우시 왕 그리고 '오호도노오키미'(乎富等大公王)라 불린 게이타이 덴노로 이어진다고 여긴다. 앞서 언급한《조구키》 일문은 마유즈미 히로미치(黛 弘道)가 33대 스이코 덴노 때의 유고일 가능성을 지적한 이후로는 그 내용의 신빙성이나 실제 혈통에 대해서는 논의가 나뉜다. 《제기》(帝紀) 원사료의 편찬(제29대 긴메이 덴노 때로 추정) 무렵에는 이와 비슷한 형태의 계보 전승이 성립한 듯하다.

게이타이 덴노의 황후인 타시라카 황녀는 제21대 유랴쿠 덴노의 손녀이자 제25대 부레츠 덴노의 남매이다.[19] 이미 야마토로 들어오기 이전에 현지에서 여러 명의 아내를 거느리고 많은 자식을 두었음에도, 즉위한 후 게이타이 덴노는 선대 오오키미인 부레츠 덴노의 여동생을 정식 황후로 맞아들였다.

선대 천황의 누이이며 정당한 혈통인 '직계' 타시라카 황녀를 황후로 삼음으로써 부레츠 덴노계와 융화를 도모함과 동시에, 부족한 혈통적 권위를 일종의 데릴사위 형태로 보강하려는 정략결혼일 것이다.[20]

또한 타시라카 황녀 사이에서 난 아들인 긴메이 덴노는 게이타이 덴노의 많은 아들들을 제치고, '적자'(嫡子)로서 대왕위를 이어받았으며, 마찬가지로 타시라카 황녀의 자매 소생인 28대 센카 덴노의 딸 이시히메 황녀(石姬皇女)를 황후로 삼아, 이시히메로부터 제30대 비다츠 덴노를 얻었다. 이것은 야마토 왕권의 '방계'라는 혈통적인 결점을 황후의 '직계' 혈통으로 보강하고자 한 것으로, 이렇게 해서 게이타이 덴노와 타시라카 황녀 사이 아들인 긴메이 덴노의 혈통이 오늘날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게이타이 덴노가 즉위함은 우선 야마토 왕권의 성립 근간에서 기인한다. 3세기에 형성된 초기 야마토 왕권은 서일본이 동일본을 지배하기 위한 구조였다. 동일본이 인구가 훨씬 많았기 때문에 서일본은 둘을 사이에 둔 거대한 산맥과 강 일대를 중심으로 일종의 장벽을 형성시켜 자신들을 통해서만 외부 문물이 유입되도록 했다. 하지만 4세기에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장수왕 때문에 주 교류 대상이었던 한반도의 백제, 신라, 가야제국의 힘이 꺾이자 야마토 정권은 곤란해졌다. 그래서 중국 남조를 대상으로 조공무역을 했지만 남조의 진나라도 수나라에 멸망했다. 동일본은 이 혼란 속에서 외부와 직접 교역할 독자적인 루트 확보에 성공해 유랴쿠 덴노 이후에 야마토 왕권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하지만 6세기로 접어들면서 일본에서는 과거와 다른 새로운 호족들이 형성되었고, 다시금 도래인들이 확산되면서 새로운 대왕권을 창출할 필요가 있었다.

6세기에는 교통의 발달과 개발의 진행으로 대왕권의 기반이 초기 야마토 대왕권의 중심지였던 마키무쿠가 아닌[21] 기나이 주변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주목할 곳은 오미(近江)였다. 후에 '삼관'(三關)이라고 해서 설치된 호쿠리쿠도(北陸道)의 아라치, 도산도(東山道)의 후와, 도카이도(東海道)의 스즈카 관문은 모두 오미와 가깝다. 즉, 오미가 동국으로부터의 거점이 된 것이다.

오호도 왕은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아버지 히코우시 왕의 미오 별장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미오는 오미의 다카시마군이다. 어머니는 에치젠의 미쿠니 출신이며, 친할머니는《상궁기일운》에 따르면 미노의 무게쓰노구니노 미야쓰코의 딸이었다. 처는 8명이었는데, 미오 2명, 사카타, 오사나가 등 비와 호 연안 호족의 딸이 가장 많았고, 그 밖에 요도가와 유역의 만다, 야마토 분지 동북부의 와니, 그리고 오와리노 무라지의 딸이 있었다. 이런 혼인관계를 볼 때 오호도 왕의 세력권이 오미를 중심으로 에치젠, 미노, 오와리에 있었음은 확실해 보인다.

광대한 면적과 많은 인구를 가진 동일본을 장악하는 것이 대왕권의 최대 근거였는데, 오호도 왕은 충분히 그 조건을 충족하고 있었다. 더욱이 오미의 미오 부근에 가모이나리야마 고분이 있는데, 축조 연대가 6세기 전반이므로 오호도 왕의 일족 출신이었을 것이다. 이 고분에서는 중국 남조 계통의 환두대도, 금제 귀걸이, 금동제 관, 신발, 쌍어패 등 한반도계 장신구가 대량 출현했다. 이를 보아 요도가와에서 세토 내해를 거쳐 한반도까지 인맥을 확보한 것 같다.

오호도 왕이 야마토로 와서 대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야마토에서 대호족으로 군림한 소가씨와 협동한 덕이었다. 이는 소가씨가 누리던 권세의 원인이 되었다. 야마토 분지에 들어간 오호도 왕은 이와레를 궁도로 삼았는데, 이곳은 미와 산 산록에 가까운 곳으로 하쓰세가와를 이용한 동국(東國) 지배를 염두에 둔 곳이었이다고 생각하면 된다. 자신을 옹립한 세력 중 오오토모 씨족이나 모노노베 씨족은 지명에서 유래된 씨(氏)가 아니라 '도모'나 '베'를 칭하고 있는데, 이는 토지에서 기원한 씨족이 아니라 대왕권 측근에서 편성된 일족임을 보여준다. 5세기의 장도인(杖刀人)이나 전조인(典曺人) 등의 호칭과 원리적으로 상이하며, 오호도 왕 이후 왕권의 권력 기반으로서 일정한 목적 수행을 위해 위에서 만들어낸 씨족(氏族)으로 볼 수 있다.

오호도 왕이 이끌고 온 세력은 오미와 요도가와 구역, 오와리 · 미노 · 에치젠 등지의 호족들이었다. 전체적으로 기나이의 동쪽인데, 엄밀히는 오미를 중심으로 야마시로 · 가와치 북부 · 야마토 분지 동북부, 거기에 오와리 · 미노 · 에치젠이었다. 본거지는 이와레였다. 반면에 소가 씨족은 야마토 분지 서남부의 카츠라기를 본거지로 하여 기이, 가와치 남부(이즈미)를 지배했다. 이와레와 카츠라기의 중간이 아스카로, 후에 이곳이 정권의 소재지가 되었다.

오호도 왕의 진짜 출신지가 어디인지는 모호하나, 《일본서기》에 근거하여 오미 다카시마군의 미오로 봐도 좋다고 여겨진다. 미오에서 태어났다는 《일본서기》의 기사와 가모이나리야마 고분의 존재가 주요 근거지만, 이는 혼인관계로도 추측이 가능하다. 일본 호족들의 혼인관계를 보면 처음에는 가까이에 있는 여성과 결혼하고, 힘이 생기면 정략결혼으로 먼 곳의 여성과 결혼하는 경우가 많다. 오호도 왕의 아내 중 네 명이 오미 출신이고, 그중에 두 명이 미오다. 그 밖에는 오와리와 만다, 와니다.

다만 미오의 호족이 유력했다기보다는 미오 출신인 오호도가 시대의 전환기에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여 일약 근린 지역의 지지를 얻고, 마침내 옹립되어 야먀토로 가서 대왕의 자리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우선 오미에서 유력해진 뒤 그것을 근거로 오와리와 만다에 인맥을 확보한 후, 다시 와니를 매개로 야마토와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소가씨와의 협동으로 대왕위까지 올랐다는 것이다.

3.2. 오오키미(대왕, 大王) 즉위 당시 의문

《고사기》나 《일본서기》는 선대 부레츠 덴노에게 자손이 없었기에 '오진 덴노의 5세손'인 게이타이를 맞아들였으며, 군신의 요청으로 그가 즉위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의 계도 가운데 한 권이 사라져 정확한 계보는 쓸 수 없으며, 게이타이의 출자를 전하는 문헌인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의 《조구키》(上宮記) 일문(逸文)을 통해서 겨우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게이타이 덴노의 특수한 즉위 사정을 둘러싸고 여러 논의나 추측이 있다. 기존의 기록을 존중한다면 게이타이 덴노를 오오키미 집안의 5대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먼 방계로서 유력했던 왕족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종전 후, 일본에서 자국의 역사, 특히 천황가를 두고 더 자유로이 연구하면서 게이타이는 그 전의 오오키미 집안과는 혈연 관계가 없는 '신왕조'(新王朝)의 초대 오오키미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것이 미즈노 유우(水野祐)가 주장한 <3왕조 교대설>(三王朝交代設)이었다. 이 경우 오늘날의 천황가로 이어지는 오오키미의 계통은 일체의 변동이나 단절 없이 하나의 피로만 이어져 내려왔다는 이른바 '만세일계'(萬世一系)는 부정되고, 출자가 확실하지 않은 제26대 게이타이 덴노부터 야마토 왕권의 새로운 오오키미 계통이 이어진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서 한 발짝 나아가, 게이타이 덴노를 오미의 황별씨족(皇別氏族), 즉 신적강하(臣籍降下)된 왕족 오키나가(息長) 씨족 출신으로 보고, 야마토 왕권을 무력으로 제압하여 대왕위를 찬탈했다는 설도 제기되었다.

근래에는 5세기 야마토 왕권의 오오키미의 지위란 특정 혈통으로 고착된 것이 아니었고,[22] 게이타이 덴노 이전의 야마토 왕권이란 각각의 지역 국가들의 연합이었으며, 그 수장인 '오오키미'도 지역 국가의 왕들 가운데서 때때로 선택되었기 때문에 그 조상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는 설도 나왔다.[23]

다케미츠 마코토(武光誠)는 게이타이 덴노 이전의 오오키미는 복수의 유력 호족들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했으며, 또한 부레츠 덴노 등도 실재한 천황이 아니고, 오진 덴노의 실재 여부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음을 지적했다. 1982년 마유즈미 히로미치(黛弘道)가《조구키》의 성립 시기가 스이코 덴노 때로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방계 왕족이라는 설이 다시 지지를 모으게 되었다. 즉,《조구키》 일문이 실려 있는 《석일본기》에
《조구키》(上宮記)에 이르기를(上宮記曰一傳)
이라는 기술이 있지만, 《조구키》의 작자는 별도의 더 오래된 자료에 근거한 왕권 계보가 실려 있는 자료를 인용했다는 것이다.

현재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게이타이 덴노가 정말 오진 덴노의 5대손인가 하는 문제의 진위 여부를 밝히기보다도,[24] 그가 야마토 왕권의 오오키미 지위를 찬탈한 것은 아니며, 야마토 왕권의 중추를 이루고 있었던 호족들의 지지로 즉위했다고 보는 설이 유력하다.

또한 게이타이 덴노 이후의 천황 계보에 대해서는 《고사기》와 《일본서기》 외에 어떤 근거 있는 사료도 없다. 다만 미즈노 유우 등이 제창한, 게이타이 덴노로부터 신왕조가 시작되었다는 설을 따르고 「실존 및 계보가 분명한 기간에 한해서」라는 조건을 걸어도 일본 황실의 역사는 1,500년 이상으로 전 세계에 현존하는 왕조 가운데 가장 오래된 왕실임에는 변함이 없다.[25] 따라서 일본 황실의 역사를 기릴 때에도 게이타이 덴노의 이름은 자주 언급된다.

3.3. 게이타이~긴메이 내란설

26대 게이타이 덴노에서 29대 긴메이 덴노에 이르는 시기의 역사를 기록한 문헌 자료에 존재하는 부자연스러운 점을 들어, 6세기 전반의 게이타이 덴노의 죽음과 그 후 대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본 열도 내에서 내란이 발생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내란이 일어난 시기는 《일본서기》에서 게이타이 덴노가 사망했다는 신해년(서기 531년)으로 비정되며, 간지를 따서 신해의 변(辛亥の變, 신가이의 난)으로 부르기도 한다.

우선 《일본서기》에는 게이타이 덴노의 사망 년도에 대해서 백제 기록인《백제본기》의 설을 채용하여 신해년(531년)으로 비정하는 한편, 갑인년(534년)이라는 설도 실었다. 갑인년은 게이타이 덴노의 다음으로 즉위한 안칸 덴노의 즉위년으로, 게이타이 덴노 사후 안칸 덴노의 즉위에 이르기까지 2년 동안 오오키미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몇 가지 의문점이 제기되는데, 이러한 모순을 해석하는 방법에 대하여 일본에서는 메이지 시대에 기년론이 주목받은 이래로 줄곧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백제본기》의 신해년 기사는
"일본의 천황 및 태자 ・ 황자들이 모두 죽었다."
전했고, 《상궁성덕법왕제설》(上宮聖德法王帝說)・ 《겐코지가람연기》(元興寺伽藍緣起)에는 긴메이 덴노가 즉위한 해를 신해년(531년)으로 적어, 마치 게이타이 덴노의 바로 다음이 긴메이 덴노인 양 서술했다.[26] 또 《고사기》에는 게이타이 덴노가 《일본서기》에서 언급한 신해년보다 4년 전인 정미년(527)에 붕어했다고 적었다.

가장 먼저 등장한 설은 게이타이 덴노의 죽음은 정미년(527년), 긴메이 덴노의 즉위는 신해년(531년) 때 일로 보아, 그 사이 4년을 안칸 덴노와 센카 덴노의 재위 기간으로 상정하는 설인데, 이 설은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모두 안칸 덴노가 사망한 해를 똑같이 을묘년(535년)으로 기록했다는 점과 충돌한다.[27]

쇼와 시대에 이르러 기타 사다키치(喜田貞吉)는 《백제본기》가 말한 신해년(531)에 왜국에는 뭔가 중대한 정치 위기가 발생했으며, 그 결과로 게이타이 덴노 사후 야마토 조정(야마토 왕권)은 지방 호족의 딸인 오와리노 메코히메(尾張目子媛) 소생의 안칸-센카계와, 타시라카 황녀 소생의 긴메이계가 서로 갈라져 '조정 두 곳'이 서로 병립했을 것이라고 시사했고, 패전 뒤 하야시야 진사부로(林屋辰三郞)가 이를 계승하여, 게이타이 덴노 말기에 한반도의 정세와도 관련된 대립에서 비롯된 혼란(이와이의 난) 등이 발생했고, 게이타이 덴노 사후 '조정 두 곳'이 병립한다는, 그리고 이에 수반한 전국적인 내란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일본서기》는 이러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마치 배다른 형제가 나이 순서에 따라 즉위한 것처럼 기록해 놓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단 이러한 사실을 전한 《백제본기》가 현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기술에 대한 검증이 곤란하다는 어려움이 따른다. 나아가 이 책은 백제에 관련된(백제인들에 의해 서술된) 사료라는 점에서 왜국(일본) 관계 기사를 전면적으로 신용하는 것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견해도 있다. 《백제본기》의 말처럼 신해년에 '일본의 천황 및 태자와 황자'가 사망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여기서 말한 것이 정말 게이타이 덴노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못한 것이다.[28]

따라서 '두 조정이 병립'하는 내란 같은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고, 이 시기의 대왕위 계승은 게이타이 덴노의 사망 이후 그 후사였던 안칸 덴노와 센카 덴노가 자연스러운 이유로 해서 짧은 기간 동안에 사망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게이타이→안칸→센카→긴메이로 이어진다는 《일본서기》 기술을 따라야 한다는 학설도 유력하다.

'조정 두 곳이 병립'했다고 보는 학자들 중에서도 하야시야의 학설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하야시야는 긴메이 덴노의 배후에는 천황과 혼인 관계였던 소가씨(蘇我氏)가, 안칸 ・ 센카 덴노의 배후에는 (이 시기에 쇠퇴한) 오오토모씨(大伴氏)가 있었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이러한 배후의 관계를 서로 바꾸어 파악하는 설이 있는가 하면 게이타이 덴노와 그 후사를 지지하는 지방 호족, 그리고 옛 왕통(부레츠 덴노 이전의 오오키미)의 피를 이어받은 긴메이 덴노를 지지하며 반격을 준비하던 야마토 호족과 그들 사이의 대립을 주장하는 설, 오미(臣)의 가바네(姓)를 가진 호족과 무라지(連)의 가바네를 가진 호족 사이의 대립으로 보는 설도 있다.

게이타이 덴노에서 긴메이 덴노에 걸치는 시대에 왜국에서는 백제로부터의 불교 전래나 미야케(屯倉, 둔창) 설치, 《제기》(帝紀) ・ 《구사》(舊辭) 등 기록물 편찬, 화풍 시호(和風諡號)의 도입, 무사시노 쿠니노미야츠코(武蔵國造)의 난 등, 향후 일본의 역사 전개와 관련된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시기에 과연 '두 조정'이 병립했는가, 두 조정이 서로 내전을 벌였는지 진위 문제는 이 시기에 있었던 일본 역사의 중대한 변화들을 바라보는 해석에도 영향을 준다.

3.4. 전설

게이타이 덴노가 에치젠국의 개척자라는 전승이 있다. 에치젠은 온통 습지대로 농경이나 거주에는 적합하지 않은 땅이었는데, 오호도노미코(男大迹王, 후의 게이타이 덴노)가 이 땅을 다스리면서 우선 아스와야산(足羽山)에 신전을 짓고, 오오미야도코로노미타마(大宮地之靈) 신을 모셔 이 땅의 수호신으로 삼았다. 이것이 현재의 아스와야 신사(足羽神社)이다.

신사를 세운 다음 오호도노미코는 지형을 조사한 뒤, 대규모 치수 사업을 펼쳐 구즈류 강(九頭竜川) ・ 아스와야 강(足羽川) ・ 히노 강(日野川)의 3대 하천을 만듦으로써 습기 많은 에치젠의 초원을 개간하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에치젠의 평야는 풍요로운 토지가 되어 사람들이 살 수 있었다.

오호도노미코는 나아가 항구를 열고, 수운을 발전시켜 벼농사, 양잠, 채석, 제지 등 여러 가지 산업을 발달시켰다. 이후 오호도노미코는 오오키미로 즉위하게 되어 에치젠을 떠나게 되었다. 떠나면서 이 땅을 염려하여 자신의 생령(生靈)을 아스와야 신사에 남겨두고, 딸 우마쿠다 황녀(馬来田皇女)를 제주로 삼아 뒷일을 맡겼다.

이러한 전승에 연유해서 게이타이 덴노는 에치젠을 개척한 조신(祖神)으로 받들어지고 있으며, 훗날 이를 연극으로 각색한 것이 노(能) 작품 <화광>(花筐)이다. 극 중 게이타이 미카도(繼體帝)는 부레츠 미카도(武烈帝)의 후계자로 선택받고, 총애하던 시테(照日)에게 편지와 함께 꽃바구니를 기념으로 남긴 채 수도로 떠났다.

시테는 게이타이를 그리워하다가 시녀와 함께 미친 여자의 모습으로 수도로 뒤따라 갔고, 마침 단풍 구경을 하러 나온 미카도의 행차 앞에 나타난 시테는 미카도의 와키(從者)에게 밀려 바구니를 떨어뜨리고는 그만 미쳐서, 중국 한(漢)나라의 무제(武帝)와 이부인(李夫人)의 고사를 춤으로 추었다.

곧 그 바구니가 예전 자신이 시테에게 주었던 꽃바구니임을 알아본 미카도는 시테를 맞아들여 수도로 데리고 돌아왔으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훗날 안칸 덴노로 즉위한다.

3.5. 스다하치만 신사 인물화상경과 백제 무령왕과의 관계

癸未年八月日十大王年男弟王在意柴沙加宮時斯麻念長寿遣開中費直穢人今州利二人等取白上同二百旱作此竟
계미년(443년? 503년?) 8월 10일(日十)(?) 대왕년(大王年)(?), 남제왕(男弟王)이 오시사카궁(意柴沙加宮)에 있을 때 사마(斯麻)가 장수를 염원하여 카와치노아타이(開中費直)와 예인(穢人) 금주리(今州利) 2명 등을 보내어 백상동(白上同→銅, 양질의 구리) 200한(旱)을 가지고 이 거울(竟→鏡)을 만들었다.

현전하는 일본 금석문 중 와카야마현 하시모토시 스다하치만 신사(隅田八幡神社) 소재의 인물화상경(人物画像鏡)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가 백제 무령왕일 가능성이 있다는 설이 제기된 바 있다. 이걸 가지고 아예 '사실 무령왕의 남동생이 게이타이 덴노였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일본서기》에는 부레츠 덴노가 죽고 후사가 없어서 적당한 사람을 찾다가 아버지가 16대 오진 덴노의 5대손이고, 어머니가 11대 스이닌 덴노의 7대손인 게이타이를 옹립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게이타이 덴노의 아버지의 5대조로 되어 있는 16대 오진 덴노는 제2왕조의 대왕('오오키미')이었고, 어머니의 7대조로 되어 있는 11대 스이닌 덴노는 제1왕조의 대왕이었다. 따라서 일부 학계에서는 게이타이 덴노의 출신이 불분명하므로 그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부모를 이전 두 왕조 대왕들의 자손으로 하는 계보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냈다고 보고 있다. 게다가 게이타이 덴노의 ‘게이타이’라는 말 자체가 새로이 왕조를 계승했다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무령왕이 ‘남동생 왕’이라고 칭한 일본 천황이 게이타이 덴노가 틀림없다면 게이타이 덴노야말로 행방을 알 수 없는 곤지의 세 아들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p.190~191

권오영 서울대 교수
“만약에 이 사마가 정말로 백제의 무령왕이라고 한다면 등극하기 전의 계체와 백제의 무령왕이 이미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요. 그렇다고 한다면 무령왕의 재위기간 그리고 계체천황의 재위기간 동안에 왜 이렇게 두 인물이 서로 긴밀하게 협조하고 백제와 왜 왕권의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는지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겠습니다.”

권오영 서울대 교수 <차이나는 클라스> 2020년 6월 방영분 중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왕이 계체(継体)입니다. 근데 그 계체(継体)가 왕이 되기 전에는 일본의 변두리에 있었던 작은 세력의 우두머리에 불과했어요. 근데 그 인물이 전체 일본의 왕이 되는 데는 백제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어요. 그래서 스다하치만 신사에 거울이 모셔져 있는데, 일본 국보입니다. 저기 글씨가 씌여져 있어요. (중략) 이 거울에 나와있는 내용이 한•일 학계의 수수께끼에요. 근데 분명한 것은 오오도{'남제왕'(男弟王)}라는 인물은 계체(継体)가 왕이 되기 전 본명이에요. 사마는 무령왕의 본명이고.. 그래서 게이타이가 왕이 되기 전에 무령왕이 관계를 갖는 것이에요.

이에 덧붙여 《백제삼서》를 인용하여 일본 국내에 있었던 태자와 왕후 등 일족들이 모두 죽어버린 대란을 전하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더욱 의문스럽다. 자국에서 벌어진 참화를 《백제삼서》를 인용하여 전하는 것을 보면, 당시 백제와 왜국 사이는 상당히 가까웠다고 유추할 수 있다.

4. 묘소

게이타이 덴노의 무덤은 미시마노아이노능(일본어: 三島藍野陵)에 마련되었다. 일본 궁내청(宮內廳)은 지금의 일본 오사카 부(大阪府) 이바라키 시(茨木市) 오오타 산쵸메(太田三丁目)에 소재한 길이 227 m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 오오타 챠우스야마 고분(太田茶臼山古墳)을 이 미시마노아이노능으로 비정하고 있지만, 실제 무덤의 축조 시기는 게이타이 덴노의 시대보다 앞선 5세기 중순으로 여겨진다.

같은 오사카 부의 다카쓰키 시(高槻市) 군게신마치(郡家新町)에 소재한 길이 190 m 전방후원분 이마키즈카 고분(今城塚古墳)에서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 진나라의 병마용(兵馬俑)을 닮은 하니와(埴輪)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1997년부터 매년 다카쓰키 시립 매장문화재 조사센터가 이마키즈카 고분을 찾아 발굴조사를 실시했는데, 이중의 해자를 나눈 제방에서 발견된 하니와는 출토된 양이나 크기가 일본 최대의 것이었다.

하니와 제사구(祭祀区)는 동서 62-65 m、남북 약 6 m 넓이로, 주택 모양이 15점, 목책 모양이 25점, 덮개 모양이 4점, 다치(大刀) 모양이 14점, 방패 모양이 1점, 유키(靱) 모양이 1점, 무인형(武人形) 2점, 매잡이 모양이 2점, 역사(力士) 모양이 2점, 관모를 쓴 남자 모양의 1점, 앉은 자세의 남자 모양 4점, 미코(巫女) 모양의 7점, 다리 넷 달린 동물(말 같은) 형태의 18점, 닭 모양이 4점, 물새 모양의 13점으로 모두 113점 이상이 발굴되었다.특히 주택형 토용은 높이가 170 cm에 달하는 것도 있었는데, 이리모야(入母屋) 구조로 일본의 신사 건축에서 지붕을 장식하는 가쓰오키(鰹木), 지기(千木), 높은 상(床)의 둥근 기둥도 표현되어서 신사 건물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했다.

이마키즈카 고분은 오오타 챠우스야마 고분에서 동쪽으로 1.3 km 거리에 있다. 옛 셋쓰국(攝津國) 북부의 미시마 평야(三島平野) 한복판에 위치해 있으며 미시마노 고분군(三島野古墳群)에 속해 있는 전방후원분으로 요도 강(淀川) 유역에서는 가장 큰 분묘이다.

무덤 주위로 이중의 해자가 둘러쳐져 있으며, 이 해자를 포함한 무덤 권역은 340×350 m의 범종 형태의 구획을 나타내고 있다. 무덤은 심하게 황폐해져 있었는데, 한 때는 오다 노부나가가 미요시(三好) 집안을 공격했던 에이로쿠(永祿) 11년(1568)의 셋쓰(攝津) 침공에 즈음해 성채로 쓰였기 때문으로 여겨졌으나, 발굴 조사 결과 게이초(慶長) 원년(1596)에 있었던 후시미 대지진(伏見大地震)으로 인한 붕괴 때문이라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무덤의 형상이나 출토된 등의 연대적 특징, 또 《고사기》와 《일본서기》, 《엔기시키》(延喜式) 등 문헌 자료의 검토를 통해, 6세기 전반에 지어진 것으로 6세기 야마토 정권의 오오키미의 무덤으로 추정된 이 고분이 진정한 게이타이 덴노의 능이라고 보는 것이 오늘날에는 정설로 되어 있다.[29]

이미 임시능묘조사위원회(1935~1944)에서도 이 고분을 능묘 참고지로 편입할 것을 요청하는 답신을 보냈지만, 궁내청은 이마키즈카 고분의 능묘 참고지 지정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난색을 보인다. 천황의 능묘에는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는 일본 궁내청의 규정에도 구애받지 않고 현재 이마키즈카 고분에는 일반 시민들도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으며, 무덤에는 주민들의 산책로가 조성되었다.

타카츠키 시에서는 이마키즈카 고분의 사적 공원 정비를 목표로 1997년 이후 지속적으로 그것을 위한 정보를 얻기 위한 발굴조사를 실시해 왔으며, 7개년에 걸친 복원정비 사업이 2011년 3월에 완료되었다. 4월 1일에 타카츠키 시 교육위원회는 이마키즈카 고분을 사적 공원으로 정비하고 하니와 제사장소 등의 발굴 조사 위치에는 하니와의 복제품을 두었으며, 가까운 이마키즈카 고대역사관(今城塚古代歷史館)에서는 이 일본 최대급의 주택 형태의 하니와들이 손에 닿을 수 있을 위치에 복원, 전시 중이다. 무덤을 둘러싼 해자는 현재 낚시는 금지되었지만, 공원으로 조성되기 전에는 낚시장으로 쓰이기도 했다.

이러한 오오키미의 무덤이 6세기에 이르러 기나이 북부의 요도 강 수계에 처음 출현한다는 것은, 여태껏 남부 야마토 강 수계의 야마토 · 가와치에 있던 세력에서 왕권의 주도권이 바뀌었음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5. 가족관계

  • 타시라카 황녀
  • 오와리노메노코히메(尾張目子媛, ? - ?) - 오와리노무라지 구사카(尾張連草香, ? - ?)의 딸
  • 와카코히메(稚子媛, ? - ?) - 미오노츠노오리노키미(三尾角折君, ? - ?)의 딸
    • 오이라츠코 황자(大郎, ? - ?)
    • 이즈모 황녀(出雲, ? - ?)
  • 히로히메(広媛, ? - ?) - 사카다노오마타 왕(坂田大跨王, ? - ?)의 딸
    • 카무사키 황녀(神前, ? - ?)
    • 만타 황녀(茨田, ? - ?)
    • 우마구타 황녀(馬来田, ? - ?)
  • 오미노이라츠메(麻績娘子, ? - ?) - 오키나가노마테노오키미(息長真手王, ? - ?)의 딸
    • 사사게 황녀(荳角, ? - ?)
  • 세키히메(関媛, ? - ?) - 마무타노 무라지 고모치(茨田連小望, ? - ?)의 딸
    • 마무타노오오이라츠메노 황녀(茨田大娘, ? - ?),
    • 시라사카노이쿠히히메노 황녀(白坂活日姫, ? - ?)
    • 오노노와카이라츠메 황녀(小野稚娘, ? - ?)
  • 야마토히메(倭媛) - 미오노키미 가타히(三尾君堅楲, ? - ?)의 딸
    • 오이라츠메 황녀(大郎子, ? - ?)
    • 마로코 황자(椀子, ? - ?) - 미노쿠니노키미(三國公)와 미노쿠니노 마히토(三國眞人)의 시조다.
    • 미미 황자(耳, ? - ?)
    • 아카히메 황녀(赤姬, ? - ?)
  • 하에히메(荑媛, ? - ?) - 와니노오미 가와치(和珥臣河内, ? - ?)의 딸
    • 와카야히메 황녀(稚綾姬, ? - ?)
    • 츠부라노이라츠메 황녀(円娘, ? - ?)
    • 아츠 황자(厚, ? - ?)
  • 히로히메(広媛, ? - ?) - 네 왕(根王, ? - ?)의 딸
    • 우사기 황자(菟, ? - ?) - 사케히토노키미(酒人公)의 시조다.
    • 나카츠 황자(中, ? - ?) - 사카다노키미(坂田公)의 시조다.



[1] 오호도노스메라미코토[2] 《일본서기》[3] 《지쿠고 국 풍토기》(筑後國風土記)[4] 오호도노미코토[5] 《고사기》(古事記)[6] 히코후토노미코토[7] 《일본서기》[8] 호도노오오키미[9] 《일본서기》[10] 호도노오오키미[11] 인물화상경.[12] 《상궁기》(上宮記)[13] 인물화상경[14] 인물화상경[15] 다만 일본국의 국호와 천황이라는 제호가 등장한 것은 당나라 풍(唐風)으로 국가 체제를 정비한 제40대 덴무 덴노부터이고, 그 이전에는 왜국(倭國, 야마토)의 대왕(大王, 오오키미)이었다. 따라서 게이타이 덴노 또한 본래는 왜국의 대왕이었고, 덴무 덴노부터 황제국을 칭하면서 선조를 황제로 추존한 것이다. 동아시아 유교 문화에서 선조를 황제로 추존하는 일은 흔했다. 일반적으로 초대 황제는 자기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를 추존했고, 세대를 거친 왕실에서 황제국을 자칭할 때는 자신부터 고조부까지 추존하고 추가로 건국시조와 그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까지만을 추존했다. 일본에서 처음 천황을 칭한 자는 이를 따르지 않고 자기보다 앞서 재위했던 왕들을 모두 천황으로 추존했으니, 이는 일본이 유교 예법을 따르지 않았음을 의미한다.[16] 헤이안 시대까지 존재하던 원시적 시호.[17] 일본 국내에서 벌어진 일을 두고 어째서 《백제본기》를 인용하여 기록했을까 하는 의문에 착안하여, 게이타이 덴노를 백제계라고 추정하는 경우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게이타이 덴노와 당대 웅진백제의 무령왕은 돈독한 친교를 맺었다.[18] 여담으로 오호호도(おほほと)의 "오호"(おほ)는 상대 일본어로 “크다”는 뜻이며, 이는 게이타이 덴노의 본명 오호도(をほと)의 "오"(を, 작다)와 대비를 이룬다.[19] 유랴쿠 덴노는 고분 출토로 실존이 확인된 인물이다.[20] 신라에서는 초기에 박씨가 왕이었다가 데릴사위 형식으로 석씨, 김씨가 왕위를 이어받기도 했다. 이 때문에 고려의 태조 왕건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과 자신의 딸을 결혼시키고, 경순왕의 사촌을 왕비로 들여 신라계를 포섭했다.[21] 3세기 마키무쿠에 거대한 전방후원분 고분군이 처음으로 들어선 점과 그 인근에 왕궁이 있었다고 일본서기가 기록한 점에서 유추할 수 있다.[22] 즉, '왕조'라 불릴 만한 정치체제가 존재하지 않았다.[23] 실제로 2세기 후반~3세기 초반 일본 야마타이국의 여왕들이었던 히미코토요만 하더라도 당시 혼슈에 있던 소국들끼리 연합한 국가의 수장으로 추대된 것으로, 일종의 단군왕검 비슷한 지위에 있으면서 사람들을 통솔했고, 한반도의 고구려신라 또한 초기에는 여러 부족들의 연합체 군장국가에서 고대 왕정국가로 발전했다.[24] 정말 오진 덴노의 자손이었더라도 5대손이라면 전근대 기준으로도 가까운 혈족은 아니다. 중국의 유교예법에서도 5대조부터는 따로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만약 게이타이가 오진의 5대손이라면, 타시라카 황녀와는 10촌 관계이다. 이처럼 혈연의 정통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게이타이 덴노는 굳이 오진 덴노의 '직계'인 타시라카 황녀를 아내로 맞아들였고, 장남이 아니라 타시라카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왕실의 중시조로서 대왕위를 계승했다.[25] 게다가 타시라카 황녀의 존재 때문에 모계까지 포함하면 더더욱 소급의 여지가 있다.[26] 《일본서기》에는 게이타이 덴노과 긴메이 덴노 사이에 안칸, 센카 두 덴노가 존재했다.[27] 이런 차이를 정확한 사료에 근거한 연차로 볼지 사료 자체에 결함이 있다고 봐야 할지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28] 만약 안칸 덴노의 사망년도가 틀렸다는 견해를 따른다면 신해년을 센카 덴노가 죽고 긴메이 덴노가 즉위한 해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29] 또한 하니와를 만들었던 공방터로 추정하는 니이케(新池) 유적과도 관련이 깊다고 지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