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by(物部氏,ruby=もののべうじ)] 모노노베씨 | |
<colbgcolor=#760360> 씨성 | 모노노베노 무라지(物部連) 노치모노노베노 아손(のち物部朝臣) |
시조 | 니기하야시노 미코토(邇芸速日命) |
씨조 | 모노노베노 도오치네(物部十千根) |
종별 | 신별(神別) 천신(天神) |
본관 | 가와치국 시부카와군 (河内国渋川郡) |
후예 | 아라야씨(新家氏) 다카오카씨(高岡氏) 고토씨(厚東氏) 아자이씨(浅井氏)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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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기하야히노미코토(邇芸速日命)라는 신의 후예로 여겨질 정도로 일본에서 유래가 긴 호족 출신이다. 모노노베씨는 5세기 야마토 왕권에서 주로 무기 제조 및 관리를 맡아왔으며, 오토모씨와 함께 유력한 군사 씨족으로 성장했다. 야마토 왕권의 왕위 계승 다툼에서 군사적으로 활약하였고, 유랴쿠 조에는 최고 집정관으로 선정되었다. 베(部)는 왕실에서 모종의 목적으로 하사한 성을 의미하기 때문에 왕실 친위 귀족으로 추정된다.해부를 거느린 모노노베씨는 형벌, 경찰, 군사 뿐 아니라 주술, 씨성 등의 다양한 직무를 맡아왔다. 이 중에서 맹신탐탕의 집행자를 겸했다는 일설도 전해지고 있다. 나라현 덴리시 시가지 주변에는 모노노베 씨와 관련된 무덤이 위치해 있으며, 그들의 역사와 연결된 고분군들이 존재한다.
모노노베씨는 528년에 규슈 북부에서 발생한 이와이의 난을 진압하는 임무를 받았으나, 이를 진압한 모노노베노 아라카히는 센카 천황 원년 7월에 사망하였다. 센카 천황 시대에는 모노노베노 오코시가 오무라치(大連)가 되었고, 백제에서 전해진 불상을 숭배하는 문제에서 불교 지지와 불교 배척 간의 갈등이 일어났다.
불교 숭배 문제는 나카토미노 가마코와 소가노 이나메를 중심으로 한 숭불파와 배불파 간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이 논쟁은 역병이 더욱 성행하며 비다쓰 천황까지 사망하게 되었다. 모리야는 불교를 배척하고 역병을 막기 위해 불상을 파괴하고 불교 신자를 처벌하는 활동을 벌였으나, 결과적으로 역병은 더욱 확산되었다.
684년에는 무라치의 카바네가 아손으로 고쳐지면서 모노노베씨는 몰락하게 되었다. 이로써 일본 신토가 발전하고 백제의 불상 숭배는 사라지게 되었다.
2. 백제와의 관계
시나노(斯那奴/科野), 키(紀), 코세(許勢)와 마찬가지로 백제 관등이 확인된 야마토 왕권 귀족 가문 중 하나다. 일본서기에서는 6세기 중반부터 백제 관등을 가진 모노노베가 여럿 출몰하는데, 백제 멸망 이후 당나라로 이주해 흑치상지의 사위가 된 물부순의 존재가 밝혀지면서 모노노베 씨족의 일부가 아예 백제로 귀화했으리라 추정된다. 귀화 당시부터 야마토 왕권에서 이름 날린 대호족이었던 모노노베 일파가 귀화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대규모 인적 교류가 이루어지던 나라 간의 관계상 오는 사람 있으면 가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고 모노노베라고 일족의 전부가 영달하지는 못했을 것이므로 백제에 귀화하는 게 해당 일파에게는 더 이익이었을지도 모른다.[1]다른 일본계 백제인 귀족들도 모노노베와 비슷한 시기부터 등장하며, 시대의 특성상, 한성백제의 멸망과 그로 인한 왕권의 약화로 왕들이 자주 시해당하는 혼란 속에서 자국 귀족을 신뢰할 수 없던 백제 왕실이 이들을 등용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백제 모노노베는 주로 나솔(奈率)과 시덕(施德)의 관등을 가진 것이 확인되는데, 백제 16관등 중 나솔은 6위, 시덕은 8위다. 동시대 신라 17관등과 비교하면 6두품에 상당하며 시나노씨, 키씨, 코세씨도 나솔 관등이었기 때문에 대우가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2] 모노노베는 이들 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지는데, 일본서기에 확인되는 일본계 백제인 성씨 중 모노노베가 독보적으로 숫자가 많다. 야마토 모노노베가 친백제 성향이 강했던 건 여기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 모노노베는 왜와 중국 남조와의 외교를 주로 맡은 것으로 보이며 백제 모노노베가 왜에 파견되었다는 기록이 많은 것으로 보아 백제에 귀화한 뒤에도 본국과 원만한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대부분의 백제 귀족들이 반대한 관산성 전투에 지휘관으로 참전하거나 시덕(施德) 마가무(麻奇牟)가 백제의 지방 구분인 5방 중 하나를 통솔하는 동방령(東方領)의 관직을 맡았던 것으로 보아 귀화인의 특성상 부여씨의 친위 세력에 속하던 가문으로 보인다.[3]
백제 멸망 이후 백제 모노노베의 행방은 알 수 없으나, 적게 잡아도 성왕 대부터 백제멸망전까지 100년 넘게 백제에 자리를 잡고 일족의 숫자를 불렸기 때문에 모든 모노노베가 당나라나 야마토로 가지는 않았을 것이고 대성팔족같은 다른 백제 가문들이 그랬듯이 변성했다가 가문의 기원이 잊히고 한국인의 유전자에 동화된 것으로 보인다.[4] 다른 일본계 귀족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3. 인물
3.1. 실존 인물
- 모노노베노 아라카히
- 모노노베노 오코시[5]
- 모노노베노 모리야: 정미의 난(丁未の乱, 587) 때 소가노 우마코와 대립한 호족. 불교에 반대하고 친백제 외교노선을 걷던 정치파벌[6]의 수장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7].
- 물부순(勿部珣): 흑치상지의 사위. 일본식 발음은 모노노베노 슌 혹은 타마로 추측할 수도 있다.
- 모노노베노 마가무(物部麻奇牟): 관산성 전투에 참가한 백제인 장수. 기록상 관등은 8품 시덕(施德). 백제의 지방관제였던 5방을 기준으로 동방령(東方領)을 맡았다고 한다. 카바네는 무라지(連).
- 모노노베노 마가와사카(物部莫奇委沙奇): 관산성 전투에 참전한 왜인 장수. 풀네임은 츠쿠시노모노노베노마가와사카(竹斯物部莫奇委沙奇)이기에 츠쿠시(筑紫)[8] 출신으로 추측된다. 불화살을 잘 쐈다고 한다.
- 모노노베노 요가타(物部用奇多): 백제의 관료. 기록상 관등은 6품 나솔(奈率).
- 모노노베노 가히(物部奇非): 백제의 관료. 기록상 관등은 6품 나솔(奈率).
- 모노노베노 카쿠(物部烏): 백제의 관료. 기록상의 관등은 6품 상부나솔(上部奈率).
3.2. 가상 인물
4. 기타
[1] 고고학적으로 조몬인이 석기시대부터 원삼국시대 초기까지 대거 유입되거나 전방후원분을 대표로 한 많은 일본계 귀족들이 마한, 가야에 정착한 것이 확인되기 때문에 '명확하게 성씨가 기록에 남은' 일본계 가문은 이들이 최초다.[2] 단 사나노차주(斯那奴次酒)만은 4위 덕솔(德率)이었다.[3] 물부순이 결혼한 흑치상지의 흑치씨도 부여씨의 분가였다.[4] 획순의 일부만 바꿔서 추측이 용이한 다른 대성팔족과 달리 모노노베는 현대에 유사한 글자가 없는 것으로 보아 완전히 다르게 바꿨다가 잊히고 만 듯하다. 고대 일본에서는 성씨를 이전과 완전히 다르게 바꾸는 경우가 허다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5] 니기하야히노미코토(饒速日命)의 후손이라는 것이 ‘신찬성씨록’에 밝혀져 있다. 이에 의하면 모노노베노 오코시의 할아버지인 모노노베노 메(物部目)가 니기하야히노미코토의 12대손으로 나와 있으므로, 모노노베노 오코시는 니기하야히노미코토의 14대손인 것이다.[6] 반대파였던 소가노 우마코가 뚜렷한 친불교, 반백제 외교노선(혹은 왜국의 자주노선)을 걸었기 때문. 다만 왜국의 외교노선과는 별개로 소가노 우마코 개인은 백제 문물을 좋아했다고도 한다.[7] 애초에 모노노베 가문 자체가 백제 관료를 많이 배출할 정도로 백제와의 친연성이 있는 가문으로 추정된다.[8] 원문에는 죽사(竹斯)로 써있는데, 마찬가지로 츠쿠시로 읽는다.[9] 모노노베노 후토는 동방 프로젝트의 캐릭터로, 풍수의 진면목을 활용하여 상대의 운을 조작하여 공격하는 능력을 가진 캐릭터다. 그녀의 능력은 운기를 약화시키고 상대의 불행을 초래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후토는 벽콤보나 근접 공격 반격에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으며, 그녀의 모티브는 모노라는 인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