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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노베노 모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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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발매된 모바일 RPG 노을빛 세계에서 너와 노래를…의 등장인물에 대한 내용은 모노노베노 모리야(노을빛 세계에서 너와 노래를…)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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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

1. 개요

?~587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 もののべの もりや, 물부수옥)는 아스카 시대의 주요 씨족 중 하나인 모노노베 씨족의 인물로, 긴메이 덴노 재위기에 소가노 우마코의 아버지 소가노 이나메(蘇我稲目, そがの いなめ, 소아도목)와 불교 도입 문제를 놓고 대립했던 인물인 모노노베노 오코시(物部尾輿, もののべの おこし, 물부미여)의 아들이다. 모노노베노 유게노 모리야노 오오무라지(物部弓削守屋連, もののべの ゆげの もりやの おおむらじ, 물부궁삭수옥대련)[1] 모노노베노 유게노 모리야노 무라지(物部弓削守屋連, もののべの ゆげの もりやの むらじ, 물부궁삭수옥련), 모노노베노 오오무라지(物部大連, もののべの おおむらじ, 물부대련)[2]이라고도 한다.

2. 생애

《일본서기》에서의 첫 등장 기록은 비다쓰 덴노 원년(572년) 4월 기사로, 비다쓰 덴노가 그를 오오무라지(大連, おおむらじ, 대련: 덴노를 가까이서 보좌하는 직책. )로 삼았다는 기사가 그것이다. 《일본서기》에서는 그가 이 기사에서 처음 등장함에도 '전과 같았다[如故]'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 표현에 대해 동북아역사재단 역 《일본서기》의 주석에서는 모리야가 아버지 오코시의 직책을 이은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모노노베노 모리야는 아버지인 오코시가 소가노 이나메에게 그랬던 것처럼 반불적인 태도를 취했는데, 비다쓰 덴노 14년(585년) 3월 1일에 마에츠키미(大夫, まえつきみ, 대부) 나카토미노 카츠미(中臣勝海, なかとみの かつみ, 중신승해)와 함께 덴노에게 역병이 돌고 있는 이유가 소가노 우마코가 불교를 진흥시키고 있기 때문이라며 불교를 금지해달라고 건의하고, 같은 달 30일에 절에 가서 탑을 무너뜨리고 불상과 불전을 태운 다음 소가노 우마코로부터 여승들을 건네 받아 정자에서 매로 때렸을 정도였다. 이때는 일본에서 역병이 유행하던 때였는데, 늙은이나 젊은이나 몰래 서로 "불상을 불태워서 역병이 유행하는 것"이라며 모리야의 행동을 욕했다고 한다.[3] 한편 이 일로 모노노베노 모리야와 소가노 우마코의 관계는 험악해져서, 비다쓰 덴노의 기일에 우마코가 칼을 차고 조문을 읽을 때 모리야가 "사냥에 쓰는 화살에 맞은 참새같다"라고 조롱했으며, 모리야가 손발을 떨면서 조문을 읽을 때 우마코가 "방울을 달아야겠다"[4]라고 조롱했다고 한다.

요메이 덴노가 즉위한 뒤에도 모리야는 오오무라지 직위를 맡았다.[5] 그 다음 해인 요메이 덴노 원년(586년) 5월, 모리야는 카시키야히메 황후(炊屋姬皇后, かしきやひめの きさき, 취옥희황후)를 범하려고 빈궁에 들어가려다 비다쓰 덴노의 총신이었던 미와노 사카우(三輪逆, みわの さかう, 삼륜역)[6]에게 제지당하고[7] 이 일을 구실로 왕위를 차지하려는 계획을 세운 아나호베 황자(穴穗部皇子, あなほべの みこ, 혈수부황자)[8]로부터 소가노 우마코와 함께 사카우를 죽이라는 명을 받는다. 아나호베 황자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사카우는 자신의 본거지로 도망갔다가 그날 밤에 카시키야히메 황후의 궁에 숨었다. 하지만 사카우의 일족인 시라츠츠미(白堤, しらつつみ, 백제)와 요코야마(橫山, よこやま, 횡산)로부터 사카우의 거취를 알아낸 아나호베 황자가 모리야를 보냈고,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모리야가 사카우와 그의 두 아들을 죽였다고 아나호베 황자에게 아뢰었고, 이 말을 듣고 소가노 우마코가 "천하가 머지 않아 어지러워질 것 같다"며 탄식하자 모리야가 "너는 소신(小臣)이어서 알 수 없는 바이다"라고 조롱했다고 한다. 이 일이 일어난 후 카시키야히메 황후와 소가노 우마코는 아나호베 황자를 원망했다고 한다.

요메이 덴노 2년(587년) 4월 2일에 요메이 덴노가 병에 걸려 불교에 귀의하려 하자, 모리야는 나카토미노 카츠미와 함께 어떻게 전통 신을 등지고 다른 신을 섬기냐며 반대했다. 하지만 소가노 우마코가 그 의견에 반대하며 요메이 덴노의 뜻에 따라야 한다고 말하고, 이에 아나호베 황자가 풍국법사(豐國法師)를 데리고 궁 안으로 들어가자, 노려보며 화를 냈다고 한다. 이 때 오시사카베노 케쿠소(押坂部毛屎, おしさかべ の けくそ, 압판부미분)로부터 은밀히 여러 신하들이 자신을 노린다는 소리를 듣고 본인의 집으로 물러나서 사람을 모았다.[9] 그 후 소가노 우마코에게 여러 신하들에게 자신을 노린다는 책모를 들었으니 관직에서 잠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같은 달 9일에 요메이 덴노가 붕어하자, 모리야는 5월(스슌덴노 즉위년 5월)에 아나호베 황자에게 은밀히 사람을 보내 사냥을 구실로 아나호베 황자를 왕으로 세우려 하였는데, 그 모의가 누설되어 아나호베 황자가 6월 7일에 소가노 우마코에게 토벌당했다.

7월, 소가노 우마코가 여러 황자와 군신들에게 명하여 모노노베노 모리야 토벌에 나섰다. 모리야가 직접 자제와 사병들을 거느리고 볏짚으로 성곽을 쌓고 후박나무 가지 위에서 화살을 쏘아대며 토벌군에 저항했다. 저항의 기세가 강력해 토벌군의 병사들이 겁을 먹고 세 번이나 퇴각하자, 토벌군의 일원이었던 우마야도 황자(廐戶皇子, うまやどの みこ, 구호황자)가 이마의 머리카락을 묶은 후 붉나무사천왕상을 급히 만들어 정수리에 올리고 "지금 만약 우리가 적을 이기도록 하여 주시면 반드시 사천왕을 위하여 절과 탑을 세우겠습니다"라고 맹세했고, (이때 소가노 우마코도 불상에 맹세했다) 맹세를 마친 후 여러 병기를 갖추어 나아가 토벌을 재개했다.

그 후 토벌은 성공적으로 이뤄졌는데, 토미노 오비토이치히(迹見首赤檮, とみの おびといちひ, 적견수적주)가 화살을 쏘아 모리야를 나무 아래로 떨어뜨린 후 모리야와 그의 아들을 죽인 것이다. 모리야가 전사하자, 지휘관을 잃은 모리야의 군대는 스스로 붕괴되었다. 그의 자식들과 식객들 중에는 갈대밭으로 도망가 성과 이름을 바꾼 사람도 있었으며, 도망간 뒤 행방을 알 수 없어진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이 "소가노 우마코의 처가 오오무라지(大連: 모노노베노 모리야)의 누이인데, 소가노 우마코가 망령되게 아내의 계책을 써 오오무라지를 죽였다"며 소가노 우마코를 흉봤다고 한다.

난이 평정된 후 사천왕사(四天王寺)가 창건되자, 모리야의 노비 절반과 집은 나뉘어 사천왕사의 노비와 사유지가 되었으며, 모노노베노 모리야 토벌에 공을 세운 토미노 오비토이치히는 논 1만 경(頃)을 하사받았다. 소가노 우마코도 아스카에 법흥사(法興寺)를 세웠다.

3. 대중매체에서

먼나라 이웃나라 8권 일본 역사 편에 모노노베 모리야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요메이 덴노 사후 군사를 일으켜 똑같이 군사를 일으킨 소가노 우마코와 겨루다가 패배했다고 단순하게 나온다.
[1] 《일본서기》에서의 독음은 모노노베노 유게노 모리야노 오호무라지(モノノべノ ユゲノ モリヤノ オホムラジ).[2] 《일본서기》에서의 독음은 모노노베노 오호무라지(モノノべノ オホムラジ).[3] 물론 소가노 우마코는 3개월 뒤인 6월에 병 치료를 이유로 불교 예배를 비다쓰 덴노로부터 허락받긴 했다.[4] 손발을 하도 떨어대니 방울을 달면 잘 울리겠다고 조롱한 것이다.[5] 정확한 날짜는 즉위년(585년) 5월 9일.[6] 《일본서기》본문에는 미와노 키미사카후(三輪君逆, ミワノ キミサカフ, 삼륜군역)라는 이름으로 나온다.[7] 호위병을 불러 궁문을 방비했으며, 아나호베 황자가 일곱 번이나 문을 열라고 호령할 때도 모두 무시했다.[8] 긴메이 덴노의 아들로, 비다쓰 덴노, 요메이 덴노, 스슌 덴노, 그리고 훗날 스이코 덴노가 되는 카시키야히메 황후와는 형제관계다.[9] 이 때 모리야와 함께 요메이 덴노의 불교 귀의를 반대했던 나카토미노 카츠미도 모리야를 따라가 그를 도왔는데, 카츠미가 히코히토 황자(彦人皇子, ひこひとの みこ, 언인황자)와 타케타 황자(竹田皇子, たけたの みこ, 죽전황자)(둘 다 비다쓰 덴노의 아들이다)의 상을 만들어 저주하였다. 하지만 일이 생각대로 될 것 같지 않자, 히코히토 황자에게 귀부하였는데, 귀부를 밝힌 후 물러나다가 히코히토 황자의 측근이었던 토미노 이치이(迹見赤檮, とみの いちい, 적견적주: 《일본서기》의 독음으로는 토미노 이치히トミノ イチヒ)에게 살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