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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몬인 여성 | 조몬인 남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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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몬인이란 조몬 시대 일본 열도에 거주했었던 인구 집단을 뜻한다. 유전적으로 보았을 때 지금의 중국 대륙과 한반도, 일본 열도가 육지로 연결이 되어 있던 빙하기 때 일본 열도에서 수렵 채집 생활을 하고 있던 하플로 그룹D에 속하는 인구 집단으로 이후의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일본 열도가 분리가 되면서 일본 열도에서 만 년 이상의 세월을 거친 집단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1] 주로 부계 하플로 D1a2a와 C1a1, 모계 하플로 M7a와 N9b가 조몬인들의 후손으로 비정되며,[2] 큐슈와 서혼슈 일대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동북아시아인, 동남아시아인들과의 인적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동아시아인들과 많이 혼혈된 반면에 도호쿠와 홋카이도 등 동북부로 갈수록 조몬계 특징이 크게 나타나며 현대 일본인들에 비해 수염과 체모가 짙고 이목구비도 뚜렷한 편이다. 물론 신석기 시대에는 고대 북유라시아인들이 동아시아로도 이민했을 때는 중국과 한반도는 이미 인구가 상당하여 유전적으로 끼친 영향이 크지 않았지만, 신석기 시대의 일본에서는 꽤 큰 영향을 발휘했던 면이 컸기 때문이기도 했다.2. 상세
조몬인은 현대 일본인의 상염색체 혈통 비율 중에서 10%~15%를 차지한다고 한다. [3]조몬인 혈통 비율이 가장 높은 민족은 아이누인데 아이누인의 혈통 비율 중에서 조몬인은 66~79.3%를 차지한다고 한다. 그 다음은 류큐인이 가장 높은데, 류큐인의 혈통 비율 중에서 조몬인은 28%이며[4] 그 다음은 조몬인의 혈통 비율이 26%정도 되는 현대 일본인이라고 한다.
위의 상염색체의 비율과는 대조 되게 현대 일본인의 부계 하플로에서는 지역별로 차이가 있지만 조몬계인 D1A2A[5]와 C1A1을 합치면 도호쿠와 홋카이도에서는 50~60% 이며, 북큐슈,산인지방, 간사이를 비롯한 서부 지역으로 갈수록 하플로 그룹 D1a2a의 빈도가 낮아 지는데 그마저도 30% 이상에 이를 정도로 번창한데 이는 일반적인 세계사의 기준을 대입 하면 고대 일본의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프레임은 앞선 문명이나 무기를 지닌 고대 한반도 도래인 계통민들이 일본 열도에 고립 된 세월만 1만년 이상인 원시적인 문명를 지닌 조몬인 등의 토착 부족을 완전히 제압하고, 이들의 남성 부계 하플로는 거의 사라지고, N9b, M7a, M10 등 여성 모계 하플로만 남는 것인데, 실제 역사에서는 반대의 시나리오가 일본 열도에서 이루어 졌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고분시기 동국에 대한 정복을 다룬 자료들에서 에미시(蝦夷)들의 힘이 무척 강하고, 무력으로 이들을 누르기가 매우 어렵다는 기록들이 발견이 된다. 이 시기까지 수렵 채집인으로서 인구는 적었지만 육류와 어류등으로부터 단백질 등, 다양한 음식으로 영얍 섭취를 하고, 수렵 등을 위해 전투에 필요한 운동량도 휠씬 많았던 조몬인들의 후예인 에미시들이 농경에서 수확한 곡물 위주의 탄수화물에 편중된 식생활을 하고, 평소 활동 범위도 제한적이고 농경을 위한 단순 반복노동이 주가 되었던 도래인들보다 전사로서의 자질은 나았을 것이며 냉병기 시대에 도래인들의 앞선 문화의 무기는 이미 조몬토기 등 선진 기술의 토기들을 만들 수 있었던 조몬인들에게 곧 따라 잡혔을 것이다. 또 역사서에 기록된 중앙 정권의 에미시나 다른 여러 토착부족에 대한 정복 활동은 실제의 전과 보다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큰데, 고대 일본의 지형이나 환경 자체가 대규모 병력이 작전을 수행해서 한꺼번에 상대방을 전멸시키기 보다 산악이나 삼림에 의존해서, 게릴라 전술을 폈던 이들 에미시 전사들의 생존과 전세에 유리 했을 것이다.
이는 곧 일본 열도에서 지배 계급으로 오래 군림한 무가(사무라이)집단에서는 키는 다소 작았지만, 완력과 체력에서는 우세한 조몬인들의 후예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이들의 부계 하플로인 D1b가 오늘날과 같은 상염색체의 비율을 휠씬 초과하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부계 하플로 그룹 D1a2a의 분포를 볼 때 간토(도쿄), 도호쿠, 홋카이도로 갈수록 40~50%대로 높아지면서 이목구비가 뚜렷해지고 수염과 체모가 짙어지는 양상이 강하며, 아이누들은 85~90%에 가까운 비율을 보이고 있다. 이는 일본의 역사와 고고학적인 자료를 살펴볼때 기원전 4~3세기 무렵에 한반도에서 대규모로 도래인들이 이주 해오면서 인구가 비교적 적은 조몬인들을 흡수하고[6] 서일본 일대에서 우위를 차지한 다음에 서일본 각지에 소국들을 건립하면서 이합집산하는 양상을 보이며, 이들 소국들이 서기 3세기 무렵에 야마타이국라는 연맹국가로 통합되는 양상을 보였고, 야마타이국은 야마토 왕권과 일본이라는 정치체로 계승되었다. 다만 이 시기에도 동일본과 가고시마, 류큐에서는 지리상의 이유로 야요이인들의 유입이 적었기 때문에 조몬인들이 여전히 높은 비율을 차지했었는데, 야마토가 서일본을 제패한 뒤로는 점차 가고시마와 간토 이동의 조몬계 세력들(하야토, 에미시)을 정복하는 양상을 보여왔다. 동일본에 주거하던 에미시들은 헤아안 시대 전반기때 야마토 정권과의 전쟁에서 선전하는 양상을 보였지만, 결국에는 자체적인 통일국가 형성에 실패하였고, 11세기경에 도호쿠 전역이 야마토에 복속되면서 이들 에미시들은 점차적으로 일본인에 동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다만 그 영향으로 도호쿠와 간토 일대의 인구가 일본에 그대로 흡수되었는데, 하플로 그룹 D의 차이가 지역별로 차이가 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홋카이도의 레분 섬에서 발견된 조몬인 여성의 유골 DNA를 분석한 결과, 밝은 갈색 눈, 젖은 귀지, 알코올 분해가 가능한 형질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유전적 구성이 일본인 외에도 한국인, 울치족, 대만 원주민과도 유사하였다.#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종종 일본인에 관한 생물학적인 연구를 할 때, 일본 내에 존재하는 오키나와인, 아이누인, 본토 일본인(야마토 민족)을 각각 비슷한 숫자로 표본을 수집하여 연구 결과를 낼 때도 있다. 이렇게 되면 1억 2천만 명이 넘는 일본 인구 중 오키나와인과 아이누인은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유전 형질 비중(조몬인 계통)이 심하게 과대평가된다. 과학계에서 이런 식으로 표본을 편향되게 수집하여 의도적으로 원하는 결과를 유도하는 행태가 아예 없는 게 아니므로 주의해야 한다. 의도한 부분은 아니었겠지만 암내 유전자 비율을 조사할 때도 유사한 경우가 있었다.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에서 선사시대 동아시아지역 고인골 유전체를 분석해서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한반도 남부 지역의 신석기 시대 고인골들의 dna를 분석한 결과 인골마다 20~95%가량의 조몬계 유전자가 발견이 되었다고 하며 이는 일본의 야요이 시대 고인골에 버금 가는 비율이고, 금관 가야국의 대성동 고분군에서 발굴한 금관 가야인 8명의 유골 중에서 지배계층에 속하는 AKG_10203은 일본 열도 토착 조몬인 그룹에 속하는 부계 하플로인 D1a2a1로 나왔으며 상염색체 부분에서도 높은 조몬계 유전자를 가지고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 외 나머지 7명도 기득권층과 피지배층 구분 없이 모두 넓은 범위로 봤을 때 현대 한국인 그룹에 속하지만 조몬인 유전자가 20~30%씩 나왔다. 한반도 여러 지역에서 일본산 흑요석이 발견되는 걸 볼 때 야요이인들이 정착하기 이전에도 한반도인과 조몬인들이 서로 배타고 교역하고 일부는 정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대 한국인들에게는 지역별로 차이가 있지만 하플로그룹 d1a2a1은 비중이 2~9%내외에 불과한 것을 보면 북방에서의 인구유입과 청동기 시대 말기~삼국시대 때의 일본 이주로 인해 그 비중이 줄어든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이 야요이인들이 한반도와 중국에서 왔다는 증거가 되었다. 물론 하플로 그룹 D12A1이 일본에서도 주류가 된 것이 조몬시대에서도 후기 때문인 면도 크기는 했다.
2.1. 신체적 특성
2.1.1. 에조
에조의 수장 몬베츠슈우(좌) 츠키노에(우) |
후에 유입된 도래인에 비해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많은 체모를 지녔다고 하는데, 이러한 특징은 조몬인의 직계 후손인 아이누인들과 유사하며, 일본의 지역별 체모분포에서도 조몬인 후예의 비율이 높은 도호쿠, 간토, 홋카이도, 가고시마, 오키나와 주민들의 수염 길이가 평균적으로 더 길고 짙다는 점에서 입증된다. 유골 조사를 볼 때 일본 중남부에 살고있던 조몬인들은 도래인들보다 키가 작았던 것으로 보인다.
2.2. 비하의 역사
현대 일본은 조몬인에 대한 인식이 많이 나아졌지만, 과거 일본 제국 시절에는 조몬인을 아이누 신화에서 따와 '고로봇쿠루'라고 불렀는데, 당시에는 연구가 부족했던 탓에 식인 종족의 상징으로 통용됐다.[7]도리이[8]의 생각에선 당시 일본 제국주의의 모순이 잘 드러난다. 원래 서구에서 식민지는 머나먼 아프리카나 근동지역에서 문명의 개화가 아주 늦은 지역을 차지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물론 영국과 아일랜드의 관계처럼 예외는 있었다.) 하지만 한국은 일본의 신식 문물들을 전달해 줌으로써 성장에 크게 기여한 부모의 나라였던데다[9] 심지어 일본인들의 기원으로도 생각한 곳이었다. 그런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든 일본으로는 이를 어떻게 역사적으로 합리화할 것인가가 큰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도리이 이후에 조선총독부는 북한에 몇 몇 지역들의 설치되었던 한사군현과 남한의 임나일본부를 강조함으로써 원래 한국인은 미개했고, 그들 사이로 일본민족(야마토민족)의 기원이 된 이들이 지나갔다는 식의 억지 해석을 했다. 지금도 혐한세력이 한국을 얼토당토않게 비하하는 논리는 이미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은 왜 한국을 ‘되찾아야 할 고향’이라 하는가(2019) 경희대 사학과 강인욱 교수
일본은 왜 한국을 ‘되찾아야 할 고향’이라 하는가(2019) 경희대 사학과 강인욱 교수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인들은 천황의 만세일계를 외치며 순혈의 단일민족을 주장했다. 그렇다면 야요이 이전에 거의 만년 가까이 있었던 조몬시대 사람들은 일본인이 아니란 말이 된다. 이러한 자기부정의 역사는 일본 동북쪽에 살던 아이누인과 남서쪽에 사는 오키나와인에 대한 강력한 탄압으로 이어졌다. ...(중략)... 고로봇쿠루 논쟁[10]으로 일본인들은 자신들은 섬나라(일본 열도)가 아니라 북방 대륙(한반도 및 만주)에서 기원했다고 더욱 굳게 믿었다.'''
홋카이도와 쿠릴열도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인가(2019) 경희대 사학과 강인욱 교수
홋카이도와 쿠릴열도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인가(2019) 경희대 사학과 강인욱 교수
세키네 히데유키 가천대 교수는 일본인의 기원이 '고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왜곡하는 기조가 일본 학계에 있다고 주장하며, 일본인의 기원의 다양한 갈래를 주장하는 학자들도 도래인의 위상을 과소평가하거나 한반도 문화가 일본 열도에 전파된 것 정도로만 보려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심지어 몇몇 일본 학자는 도래인이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시베리아, 만주, 중국 대륙 남부에서 바로 건너왔다고 보기도 한다는데, 어떻게든 한국인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피하고자 만들어낸 억지 주장이라고 보았다. 그는 현 일본 학계가 한일 간 명백한 문화적 연속성이 있음은 알고 있으면서도 혈연 관계는 인정하면 안 된다는 신념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11]
또한 세키네 교수는 일본 제국 시절 유리할 때는 일선동조(日鮮同祖)론을 내세우고, "일본인은 조선을 조상의 나라로 생각했고, 일본은 (조선의) 식민지였다."라고 주장했던 학자(도쿄제국대 인류학 주임교수 도리이 류조, 1919년)도 있었던 일본 학계가 패전 후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특별한 민족론'을 내세우려 한반도와의 관계를 억지로 부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12]
3. 생활
자세한 것은 조몬 시대 참조.4. 관련 항목
[1] 분화 연대가 만 년 단위여서 그런지 다른 하플로D 그룹의 비율이 높은 티벳인이나 안다만 제도인들이랑은 외형이 다르고 상염색체 부분에서도 조몬인 고유의, 다른 양상을 보인다.[2] 하플로 그룹 K와 P도 일정비율 존재했지만 조몬시대 말기에는 그 비율이 크게 줄어드는 양상을 보였고, D1a2a가 주류가 된다. 이후의 인구 유입으로 지금도 중국 대륙과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많은 인구가 유입이 되고 있고 이러한 영향으로 현대 일본인들의 상염색체는 조몬인들의 유전자가 많이 희석되었다. 반면에 부계 하플로에서는 전체적으로 D1A2A와 C1A1을 합치면 40%, 도호쿠와 홋카이도에서는 50~60%에 이른다, 이렇게 부계에서 번창한 이유는 천황가가 하플로 D1a2a에 속하는 유전자를 지닌데다가, 에미시 계통의 후슈들이 가마쿠라 막부 시대에 사무라이나 다이묘로 출세한 경우가 빈번하여 이들에 의한 창시자 효과가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일본 천황가들은 후손을 많이 낳았고, 또한 야마토가 도호쿠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도호쿠 일대의 토착 호족들은 무사계층으로 많이 편입되었는데, 이들은 가마쿠라 시대와 남북조시대, 센고쿠 시대를 거쳐서 다이묘가 된 경우도 흔했기 때문에, 그만큼 많이 번성했다고 추측할수있다.[3] 이는 상염색체의 비중이다.[4] # #[5] 하플로 그룹D가 높은 비율로 발견이 되는 곳이 전 세계에서 티벳과 안다만 제도, 한반도, 일본 열도인데 티벳이나 안다만 제도의 경우 일본 열도의 D그룹과는 갈라진 분화 연대가 만년 단위다보니 D계통이라는 아주 넓은 범위에서 묶일 뿐이며 외형도 많이 다르고 상염색체 부분에서도 조몬인들은 조몬인 고유의 독자적인 유전자 양상을 보인다. 한반도 그룹의 경우 일본 열도에서 발견되는 하플로의 하위 클레이드가 주류인데, 즉 이쪽은 아예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도래해온 만큼 형제뻘 수준으로 가장 가깝다. 그 한반도에서 하플로D 그룹의 점유율은 5~9%이다.[6] 또한 서일본 지역의 경우에는 한반도와 중국계 야요이인 말고도 대만에서 온 오스트로네시아 계통의 종족들도 다수 주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토착민들의 비중이 적었기 때문이기도 했다.[7] 지금은 평화의 상징으로 불리는데 야마구치 대학교와 오카야마 대학교 연구진들의 인골 조사에 따르면 조몬 시대에 폭력에 의한 사망률은 약 1.8%로 다른 국가나 다른 시대의 폭력에 의한 사망률에 비교하면 5분의 1 이하 수준에 불과하며, 대조적으로 야요이 시대부터 살해된 것으로 보이는 인골이 급증 하기 시작 하였다고 한다.[8] 도리이 류조. 일본제국 시절 도쿄제국대 인류학 주임교수.[9] 이는 고대 한반도 국가들에 대한 왜곡과 이주갑인상식 서술로도 많이 점철되었던 일본서기에서조차 쓰여있다.[10] 조몬인 같은 식인종은 일본인의 기원이 아니라는 주장에서 비롯됨. 고로봇쿠루는 아이누 신화에 나오는 사람들로 당시 일본제국 학계는 조몬인을 고로봇쿠루라고 불렀다.[11] #[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