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2-27 22:00:45

쇼무 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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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풍 시호[1] 쇼무 덴노(聖武 天皇)
화풍 시호[2] 아메시루시쿠니오시하라키토요사쿠라히코노스메라미코토
(天璽国押開豊桜彦天皇)
별호 승보감신성무황제/쇼호칸진쇼무황제[3]
(勝宝感神聖武皇帝)
샤이쇼만(沙弥勝満)
오비토(首)
능호 사호야마남릉(佐保山南陵)
생몰 701년 ~ 756년 6월 4일
재위 724년 3월 3일 ~ 749년 8월 19일
연호 진키(神亀) → 덴표(天平) → 덴표칸포(天平感宝)
황거 후지와라쿄(藤原京)

1. 개요2. 생애
2.1. 약력2.2. 후지와라노 히로츠구의 난2.3. 불교에 빠진 천황
3. 사후4. 이론5. 가족관계6. 기타

1. 개요

일본의 제45대 천황.

2. 생애

2.1. 약력

7세 때 아버지인 몬무 덴노가 사망하고 어머니인 미야코는 건강이 약해져 아들 쇼무 덴노를 돌볼 수 없었다. 그래서 대신 할머니인 겐메이 덴노가 천황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714년 쇼무 덴노는 성인식을 치르고 태자가 되었으나 병약하여 그의 누나가 겐쇼 덴노로 대신하여 즉위하였다. 그 후 오비토노미코가 24세가 되던 해 겐쇼 덴노로부터 황위를 양위 받아 쇼무 덴노로 즉위하게 되며, 후지와라 집안에서 황후를 맞이했는데 이 황후가 코묘 황후다.

쇼무 덴노는 황태자가 요절한 후 738년 장녀인 아베 내친왕을 황태자로 삼았다. 쇼무 덴노의 다른 부인에게서 낳은 아들이[4] 있음에도 불구하고 딸인 아베를 태자로 삼은 것은 당시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후지와라 집안의 소생만이 황태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었다.[5]

쇼무 덴노는 건강문제로 749년 아베 내친왕에게 황위를 양위한다는 결단을 내리는데, 여성 천황이 아닌 남성 천황이 여성에게 양위를 행한 것은 일본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이로써 최초의 독신 천황인 코켄 덴노가 탄생하게 되었으나, 적계황통이 아닌 코켄 덴노의 즉위는 처음부터 논란이 많았다. 결국 756년 쇼무 덴노가 사망하자 코켄 덴노의 정통성 논란과 황위를 둘러싼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되었다.

쇼무 덴노의 연호는 덴표다. 이 시기에 유난히 재해가 많고 천연두가 유행하였다. 쇼무 덴노는 이 재앙을 피하기 위해 자주 천도를 행하였다. 이 때 관료들과 백성들의 반발이 심하여 다시 헤이죠쿄에 복귀하게 된다. 더불어 쇼무 덴노는 국가의 위기를 물리치기 위하여 741년 고쿠분지(國分寺) 건립의 조(詔)[6]를 내려 전국 각지에 고쿠분지를 짓도록 하고, 743년 대불개안(大佛開眼)의 조를 내려 도다이지에 새로운 불상을 만들도록 하는 등 불교를 중시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 결과 건축과 예술 등 여러 분야에서 불교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덴표문화가 탄생하였다.

2.2. 후지와라노 히로츠구의 난

당시 후지와라 집안의 사람으로서 조정의 요직을 맡고 있던 중진이었던 4형제가 잇달아 병사하면서 국정은 가쓰라기 왕(葛城王) 다치바나노 모로에(橘諸兄)가 맡게 되었고(그는 코묘 황후와는 아버지가 다른 형제에 해당한다) 견당사로써 당에서 귀국한 기비노 마키비와 승려 겐보(玄昉)가 중용되면서 후지와라 세력은 크게 후퇴했다.

앞서 천연두로 죽은 후지와라 4형제의 한 명인 우마카히(宇合)의 맏아들 히로츠구(広嗣)는 덴표 10년(738년), 야마토노카미(大養德守)에서 진제이(鎭西) 다자이노쇼니(大宰少弐)로 옮겨졌는데, 이를 좌천이라 생각하고 크게 불만을 품어, 덴표 12년(740년) 8월 29일에 시정을 비판하고 기비노 마키비와 겐보의 처분을 요구하는 표문을 조정에 보냈다.

9월 3일, 히로츠구가 거병했다는 소식이 빠른 말을 통해 수도 헤이조쿄에 도착했고, 천황은 오노노 아즈마히토(大野東人)를 대장군으로 삼아 절도를 하사하고 부장군으로는 기노 반마로(紀飯麻呂)를 임명했다. 그리고 도카이(東海), 도산(東山), 산인(山陰), 산요(山陽), 난카이(南海) 등 5도(道)의 군사 17,000명을 동원하도록 명했다.

4일, 조정에 출사한 하야토 24명에게도 종군할 것을 명했고, 다음날 사에키노 쓰네히토, 아베노 무시마로가 칙사로 임명되어 전승 기원을 위해 이세 신궁에 폐백을 봉납하는 한편, 여러 구니에서 관음보살상을 만들고 관음경 10경을 사경하여 전승을 기원하라는 명령이 거듭 내려졌다.

9월 21일, 나가토 국에 도착한 오노노 아즈마히토는 현지에 정박해 있던 신라선의 인원과 기기를 채용할 수 있도록 허가해줄 것을 요구했다. 다음날인 22일에 칙사 사에키노 쓰네히토 · 아베노 무시마로가 하야토 24명, 군사 4천 명을 이끌고 항해하여 판궤진(板櫃鎭, 부젠 국 기쿠군)을 공략. 등미(登美)·판궤(板櫃)·경도(京都) 3진의 군사 1,767명과 병기 다수를 노획한다.

후지와라노 히로츠구는 기쿠군 근처의 원가군에 도착하여 봉홧불로 쿠니 안의 군사들을 모으고, 히로츠구 자신은 오스미· 사쓰마 · 지쿠젠 · 분고의 군사 5천으로 구라테도로 나아가고, 동생 츠나테(綱手)가 지쿠고 · 히젠의 군사 5천으로 분고에서 진군, 다고고마로가 전하도로 진군해 세 방면으로 관군을 포위한다는 것이 히로츠구의 작전이었다.

9월 25일, 부젠의 여러 군지(郡司)들이 각기 5백 기, 80명, 70명 등을 이끌고 관군에 투항해 왔다. 9월 29일, "히로츠구는 흉악한 역적으로 광포하게도 반란을 일으켜 인민을 괴롭히니 불효불충의 죄를 신이 벌하실 것이다. 따르는 자들은 즉시 귀순하라. 히로츠구를 죽이는 자에게는 5위 이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의 칙이 규슈 여러 쿠니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발호되었다.

10월 9일에 히로츠구의 군사 1만 기는 판궤하(기타큐슈 시)에 이르러 강 서쪽에 포진했고, 칙사로 보내진 사에키노 쓰네히토 · 아베노 무시마로의 군사들은 6천여 명의 군사로 강 동쪽에 포진했다. 하야토를 선봉에 세우고 조를 짜서 강을 건너려는 히로츠구군에 관군은 쇠뇌를 쏘며 막았다. 한편으로 휘하의 하야토들을 시켜 적측의 하야토에게 투항을 권하게 했다. 이에 히로츠구측의 하야토들은 화살을 쏘는 것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쓰네히토 등은 열 번이나 후지와라노 히로츠구를 불렀다. 말에 탄 히로츠구가 나타나 칙사를 찾고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면서 "나는 조정에 항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조정을 어지럽히는 두 사람(기비노 마키비와 겐보)을 처벌할 것을 청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조정에 항명하는 것이라면 모든 신들이 벌하실 것이다."라 대답했다.

그러나 쓰네히토 등이 "그렇다면 뭐하러 병사까지 이끌고 왔는가?"라 묻자, 히로츠구는 대답하지 못하고 말을 타고 돌아가버렸고, 문답을 듣고 있던 히로츠구측의 하야토 세 명이 강에 뛰어들어 관군쪽에 가담해버렸고, 이어 히로쓰구군의 하야토 20명과 10여 기가 잇따라 관군에 항복해 버렸다. 투항자들은 세 방면에서 관군을 포위한다는 히로츠구의 작전을 관군에게 보고했고, 아직 다른 두 방면의 군사들은 도착하지 않았음을 알렸다.

결국 판궤하에서 패전한 히로츠구는 배를 타고 히젠(肥前) 마쓰우라 군 지가 섬(오도 열도)으로 건너가 그대로 신라(新羅)로 망명하려 했지만, 탐라(耽羅) 근처까지 이른 배는 더 나아가지 않고 역풍까지 불었다. 히로츠구는 "나는 대충신이다. 신령이 나를 버리실 리는 없다. 신이시여, 풍파를 가라앉혀 주소서."라 빌며 역령을 바다에 던졌지만 풍파는 더욱 격렬해졌고 끝내 배는 지가 섬으로 돌아왔다. 섬에 숨었던 후지와라노 히로츠구는 10월 23일, 마침내 아베노 구로마로에게 붙잡혔고, 11월 1일에 오노노 아즈마히토에 의해 형제인 쓰나테와 함께 히젠의 가라쓰(唐津)에서 처형되었다.

덴표 13년(741년) 1월에 사죄 16명, 몰관 5명, 유배죄 47명, 강제이주된 자 32명, 장을 맞은 자가 177명으로 난은 마무리되었고, 히로쓰구의 아우들도 대부분이 연좌되어 유배에 처해지면서, 히로츠구의 후손인 후지와라 시키케(式家)는 난케와 홋케에 눌려 한동안 정계의 중심에서 밀려난다.

난의 진압되었음을 알리는 보고가 미처 헤이조쿄에 닿기도 전에, 쇼무 덴노는 갑자기 간토로 내려간다면서 마침내 수도를 떠나버렸다. 이후 천황은 이가 국, 이세 국, 미노 국, 오미 국을 돌아다닌 끝에 구니노 미야코(恭仁京, 야마시로 국)로 수도를 옮겼다. 그 후로도 거듭 나니와노 미야코(難波京)로 옮겼다가 다시 헤이조쿄로 돌아온다는 식으로 거듭 천도를 반복하게 된다. 머나먼 진제이에서 일어난 후지와라노 히로츠구의 난을 쇼무 덴노가 얼마나 무서워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2.3. 불교에 빠진 천황

쇼무 덴노의 치세인 덴표 시대는 각종 자연 재해나 역병(천연두)이 횡행했던 시대였다. 천황은 불교에 깊게 귀의해 덴표 13년(741년)에는 고쿠분지(國分寺) 건립의 조(詔)를, 덴표 16년(743년)에는 유명한 도다이지(東大寺)의 비로자나불(대불)의 건립의 조를 내렸다. 덴표 16년(743년)에는, 경작되지 않은 황무지들의 개간을 장려하기 위해서 새로이 간전영년사재법(墾田永年私財法)을 제정했다.

이 법은 새로 개간한 토지에 대해 일정 기간 동안 개간자의 개인 사유를 인정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으며, 율령국가 일본의 근간이기도 했던 율령제, 공지공민제의 붕괴를 결정적으로 초래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덴표 17년(744년)에는 나니와로 다시 수도를 옮겼는데, 이 해 윤 1월 13일(3월 7일)에 아사카(安積) 친왕이 각기병으로 급사한다(이에 대해서는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에 의한 독살이라고 보는 설이 있다). 덴표 18년(745년) 시라카키쿄를 수도로 선언하였다가 다시 헤이조쿄로 환도하였다.

덴표쇼호(天平勝寶) 원년 7월 2일(749년 8월 19일), 딸이자 황태자였던 아베 내친왕에게 양위한다(일설에는 스스로 '삼보의 종'이라 칭한 천황이 독단으로 출가해버리는 바람에 조정에서는 몹시 당황한 와중에 퇴위 수속을 밟았다고도 한다). 남자로서 태상천황이 된 것은 이것이 최초였다.

덴표쇼호 4년 4월 9일(752년 5월 30일), 도다이지 대불의 개안법요(開眼法要)를 실시했다(16미터 높이의 대불 축조로 일본 내 청동과 금은의 재고가 바닥났다고 한다). 덴표쇼호 6년(754년)에는 당의 승려 간진(鑑眞)이 일본을 방문해 태상천황이 황태후나 천황을 데리고 함께 만나기도 했는데, 이 무렵 오랫동안 병을 앓고 있던 태후 미야코가 세상을 떠났다.

덴표쇼호 8년(756년)에 덴무 덴노의 손자 후나도 왕(道祖王)을 황태자로 삼으라는 유조를 남기고 붕어한다. 계명은 승만(勝満)이었다.

3. 사후

사후에는 코묘 황태후의 의사도 반영되어 태상천황이 생전에 아끼던 유품들이 도다이사에 봉납되었는데, 일부가 오늘날까지 도다이지 쇼소인(正倉院)에 전해지고 있다.

덧붙여 1907년에서 1908년에 있었던 도다이사의 대불전 개수공사 때에 불상의 연화좌 옆에서 두 자루의 칼이 발견되었는데, 2010년 엑스레이 조사를 통해 이 칼들이 쇼무 태상천황의 유품들을 도다이사에 봉납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759년 12월)에서 다시 쇼소인에서 반출되어 국가진보장(國家珍寶帳, 쇼소인의 소장품 목록)에 '제물(除物, 제외된 물건)'로 기재된 '요노보켄(陽寶劒, 양의 보검)'과 '인노보켄(陰寶劒, 음의 보검)'임이 판명되었다. 이 한 쌍의 칼은 모두 쇼무 태상천황이 생전에 아끼던 것으로 쇼소인에 한 번 봉납되었다가 다시 고묘 황후에게 반환된 것으로 여겨진다.

천황의 무덤은 지금의 일본 나라 시 호렌쵸(法蓮町)에 있으며 사호야마노미나미노 미사사기(佐保山南陵)라 불린다. 이 무덤 동쪽에 고묘 황태후의 무덤도 함께 모셔져 있다.

4. 이론

그는 후지와라씨의 피를 이은 최초의 천황이자 후지와라씨의 영향력을 많이 받은 천황이다. 하지만 흔히들 알려진 것과 달리 나이가 들면서 후지와라씨에 반기를 든 게 아니냐는 설이 있다. 후지와라 4형제는 북규슈에 유행하던 천연두가 갑자기 도읍 헤이조쿄를 덮치면서 4형제 모두 급사하고 마는데, 사람들은 이를 두고 4형제가 무고로 죽인 나가야 왕의 저주라고 믿었다.

이후 권력의 공백이 생겨 정권을 장악한 자는 타치바나노 모로에橘諸兄와 기비노 마키비, 겐보 등 비 후지와라 정권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다만 타치바나노 모로에는 자기 어머니가 후지와라노 후히토에게 재가해 코묘 황후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에 인척관계였다. 이에 후지와라는 규슈에서 반란을, 수도에서는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쇼무 덴노는 관동행궁을 나섰다. 이에 대해 반 후지와라 정권에 조종된 거나 노이로제 때문에 빠져나왔다는 말이 있지만, 이 관동행궁의 루트는 과거 임신의 난 때 오아마 황자의 군데가 따라가는 움직임과 같다. 이는 임신의 난의 재림을 암시하는 위협이기도 했다.

속일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737년 12월 27일, 즉 후지와라 4형제가 몰살당하고 바로 얼마 뒤의 일이다. 이 날 코묘 황후가 있는 황후궁에서 쇼무 덴노의 어머니 후지와라노 미야코藤原宮子가 겐보에게 연락을 받은 뒤 확실히 좋아졌다고 했다. 후지와라노 미야코는 쇼무 덴노를 낳은 뒤 남모르는 근심 때문에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사가에서 지내고 있었다. 이때 후지와라노 미야코는 며느리이자 이복 여동생인 코묘 황후가 있는 황후궁을 방문한 쇼무 덴노와 37년 만에 재회했다. 겐보에게 한 번 간호를 받았다는 것만으로 오랜 병이 다 나아서 아들과 바로 재회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말이다. 즉 아들을 낳은 뒤 후지와라노 미야코는 자기 아버지와 형제들에 의해 감금되어 있다가 형제들이 연달아 급사하자 해방된 것이다.

후지와라노 미야코藤原宮子의 어머니 가메노히메는 가모노 에미시의 딸인데, 가모加茂씨는 소가씨의 강한 지반인 가쓰라기葛城 주변의 일족이다. 따라서 후지와라 씨족이 곡해해서 자신들의 왕으로 키우는 데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며 가둬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일로 인해 쇼무 덴노는 변심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코묘 황후의 행적이다. 쇼무 덴노는 자기 시어머니이자 이복 언니인 후지와라노 미야코를 자기 궁에 불러서 남편과 재회하게 했다. 가거 자기 시어머니이자 이복 언니를 자기 거처로 불렀지만 저지된 적이 있었다. 나가야 왕의 저주로 인해 자기 형제들이 죽었다는 소문은 코묘 황후 입장에서 결코 그냥 넘어갈 없는 문제였다. 코묘 황후는 당신과 함께 보는 눈이라면 얼마나 즐겁겠냐는 시를 만엽집에 남길 정도로 남편과 금슬이 좋았는데, 나가야 왕의 저주를 대단히 두려워했던 후지와라 씨족의 황후로서 남편을 지키고자 불교에 귀의해 멸죄의 사찰을 세우고 구호소를 세워 사람들에게 적선을 베푸는 것으로 남편을 지키고자 했다.

이후 쇼무 덴노와 코묘 황후의 합심으로 생긴 게 도다이지다. 속일본기에는 740년 2월 쇼무 덴노가 나니와로 행차했는데, 그곳에서 가와치河內의 치시키 사를 참배하고는 그 절의 건립 사연에 감동해서 도다이지를 세우고자 했고 코묘 황후가 설립을 지원해줬다. 치시키 사는 시주자들이 세운 절로서 여태까지 세워진 나라나 호족들을 위한 절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도다이지 건립을 위해 반골의 승려 교기를 고용했다. 교기는 소가씨가 추진한 율령제를 후지와라 씨족이 왜곡해서 악용하고 무거운 세금으로 고통받던 중생들을 구제하고자 불교를 퍼뜨리고 사회봉사활동을 했다. 교기는 세수를 수도로 옮기는 도중에 쓰러지는 사람들을 위해 후세야를 만들고 각지에 다리를 놓았으며 치수 공사를 했다. 토지를 버리고 유랑하는 사람들은 그의 아래에 모였으며, 결국 우바쇼쿠가 되어 헤이조쿄 주변에 출몰했다. 이들의 숫자는 장정 수천 명이 넘어갔다고 한다.

이에 조정은 멋대로 출가해서 방랑하면 국가 재정이 파탄난다며 교기 일파를 탄압했지만, 정작 쇼무 덴노는 교기에게 도다이지 건립을 맡기는 것으로 한편으로 끌어들였다. 거기다 우바소쿠=걸식승을 정식으로 인정해 토목공사에 참가시키고 그들의 두목인 교기를 불교계의 최상위에 발탁하였다. 치시키 사는 우바소쿠들이 세운 설이었는데, 과거와 다른 의미를 가진 새로운 절이었고 이에 감명받은 쇼무 덴노는 풍수지리 비슷한 원리로 후지와라 씨족을 위한 절인 호류지를 억누르는 위치를 가진 곳의 제일의 치시키 사인 도다이지를 건설하게 했다.

5. 가족관계

  • 황후皇后 : 코묘 황후(光明皇后)
    • 차녀 : 코켄 덴노(孝謙天皇)
    • 장남 : 황태자 모토이 왕(皇太子 基王, 727~728)
  • 부인夫人 : 아가타노이누카이 히로토지(県犬養広刀自, ?~762)
    • 장녀 : 이노에 내친왕(井上内親王, 717?~775)
    • 3녀 : 후와 내친왕(不破内親王, 723?~795?)
    • 차남 : 아사카 친왕(安積親王, 728~744)
  • 부인夫人 : 후지와라씨(藤原氏, ?~748) - 후지와라노 무치마로(藤原武智麻呂, 680~737)의 딸
  • 부인夫人 : 타치바나노 코나카치(橘古那可智, ?~759) - 타치바나노 사이(橘佐為, ?~737)의 딸
  • 부인夫人 : 후지와라씨(藤原氏, ?~760) - 후지와라노 후사사키(藤原 房前, 681~737)의 딸

6. 기타

또 이 천황의 재위 시기에 일본에서 최초로 이 발견되었다. 도다이지 대불을 만들고 나서 도금을 해야겠는데 일본에서는 그때까지 금이 나지 않고 있었던 것(은이나 다른 광물은 나고 있었다). 이때 무츠노카미(陸奧守)[7]를 맡고 있던 구다라노고니키시 쿄후쿠(百濟王敬福)[8]가 휘하의 백제계 주금 기술자들을 거느리고 쿠니 안을 뒤져서 지금의 미야기 현 오다 군 가나야마(金山)에서 금맥을 찾아내는 데 성공, 황금 9백 냥을 조정에 갖다 바쳤다. 이후 일본 조정은 무츠에 황금 공납 임무를 맡기게 된다.[9]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 불새/봉황편에서도 등장한다. 물론 얼굴은 휘장에 가려진 채로. 반란이 속출하고 천재지변이 끊이지 않는 와중에 민심을 다잡는다는 명분으로 대불 축조를 명령한다.

2010년에 일본 NHK에서 방송된 2부작 사극 『대불개안』[10]에서 등장한다. 배역은 쿠니무라 준. 정신병에[11] 걸렸다가 승려 겐보(玄昉)의 신통력으로 병이 낫게 된 모후 미야코로부터 "불상을 만들자꾸나. 아주 커다란 불상 말이다."[12]라는 중얼거림을 듣고 도다이지 대불 건립을 명령한다.


[1] 중국식으로 올린 시호이다.[2] (이름)가 아닌 왕이 죽은 뒤 왜국식으로 올린 시호이다.[3] 존호로 받았다.[4] 아사카 친왕(安積親王). 이 아들은 훗날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2010년에 일본 NHK에서 방송된 2부작 사극 『대불개안』에서는 아예 독살당하는 것으로 묘사된다.[5] 고묘시 소생의 아들이었던 모토이(基)는 태어난 지 1년만에 사망했다.[6] 조는 천자가 내리는 명령을 가리킨다. 고쿠분지는 일종의 관영 사찰로써 각 쿠니마다 하나씩 세워졌는데 수도 헤이죠쿄의 도다이지가 전국 고쿠분지의 총본산이었다.[7] 지금의 혼슈 동북부로 후쿠시마, 아오모리, 이와테, 미야기, 아키타 현을 포함하는 지역. 카미는 중국으로 치면 태수 또는 자사와 같은 지방의 최고 통치직이다.[8] 이름에서 보이듯 백제계 도래인 집안으로 의자왕의 왕자인 선광의 후손이다. 가바네(姓)인 고니키시(王)를 빼고 그냥 구다라노 쿄후쿠라고도 하는데, 고니키시라는 가바네 자체가 백제왕의 칭호인 건길지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는 지적도 있으며, 고구려 출신의 도래인 약광의 후손들 역시 고마노 고니키시(高麗王)라는 씨성을 사용했다. 가바네를 빼고 고마라는 우지(氏)만 쓰기도 하는 용법도 똑같다. 이 고니키시라는 가바네는 백제와 고구려 왕족 외에는 주어지지 않았던 특수한 가바네였다.[9] 이때 가인(歌人) 오토모노 야카모치(大伴家持)가 일본 땅에서 최초로 금맥을 찾아낸 것에 감격하면서 지었던 노래가 바로 바다에 가면(우미유카바)인데... 항목 참조(정확히는 노래의 일부분만을 따서 곡을 붙인 것이다. 원래 노래는 더 길다).[10] 도다이지 대불의 건립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복잡한 권력 투쟁을 그린 작품.[11] 작중 묘사는 자폐증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12] 스스로 부처의 힘을 지니고 있다고 자처하던 겐보가 병을 치료할 때 모후 앞에 비로자나불의 그림을 갖다 놓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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