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0 00:40:27

후지와라노 히로츠구의 난

1. 개요2. 배경3. 전개
3.1. 조정에서 군을 보내다3.2. 후지와라노 히로츠구와 사에키노 츠네히토의 대면3.3. 후지와라노 히로츠구 휘하의 이탈
4. 결과

1. 개요

藤原広嗣の乱

나라 시대의 귀족인 후지와라노 히로츠구가 다자이노쇼니(大宰少弐)로 좌천된 것에 불만을 품고 군사를 일으킨 반란.

2. 배경

후지와라씨가 권세를 휘두르다가 737년에 역병이 퍼져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아들인 후디와라노 후사사키, 후지와라노 마로, 후지와라노 무치마로, 후지와라노 우마카이가 차례대로 천연두로 죽으면서 후지와라씨는 어린 자손들만 남았고, 시키케(式家, 식가)의 일원인 히로츠구가 738년 12월 4일에 다자이쇼니로 큐슈의 다자이후에 부임하자 불만을 품었다.

다자이후는 키나이의 조정과 함께 수도에 준하는 위치에 있었으나, 교토에 비하면 격이 떨어졌고 히로츠구가 임명된 쇼니는 다자이후의 차관직이었다. 쇼니보다 높은 다자이후의 장관은 다자이노소치(大宰帥)로 고위 관료나 친왕이 임명되었지만 실제로는 관직만 임명되고 부임하지 않는 직위라서 다자이후의 실권은 쇼니에게 있긴 했으나, 쇼니에 임명된 것은 중앙 권력에 밀려 지방으로 좌천되었다는 의미였다.

3. 전개

3.1. 조정에서 군을 보내다

740년 8월 29일에 겐보(玄昉)와 키비노 마키비(下道眞備)를 해임하라고 하면서 9월 3일에 1만 명의 병력으로 군사를 일으켰으며, 일본 조정에서는 오노노 아즈마비토(大野東人)를 대장군, 키노 이이마로(紀飯麻呂)를 부장군으로 삼아 군감, 군조 각 4명씩 임명하고 토카이, 토야마, 산인, 산요, 난카이 5도의 군 17,000명을 징발해 아즈마비토에게 위임하도록 했다.

9월 4일에는 일본 조정에서 추가로 하야토 24인에게 관위를 내리고 토벌에 파견했으며, 5일에 사에키노 츠네히토(佐伯常人) 아베노 무시마로(阿部虫麻呂)에게 군사를 맡겨 파견했다.

아즈마비토가 히로츠구의 세력인 오하세노 츠네히토(小長谷常人), 오오시코우치노 타마치(凡河内田道)을 격파해 죽였으나, 미타노 시오코(三田塩籠)를 놓치고 토미, 이타비츠, 교토 3곳의 병영에 있는 1,767명을 생포해 17종의 무기를 얻었으며, 21일에 누카타베노 히로마로(額田部広麻呂)는 아즈마비토의 명령으로 정예병 40명을 이끌고 21일에 큐슈로 갔다.

츠네히토, 무시마로에게는 하야토 24명과 군사 4천 명을 이끌고 22일에 진격해 이타비츠의 병영을 진압했으며, 아즈마비토는 츠네히토, 무시마로의 병력이 도착하면 이어서 출발해 큐슈로 상륙할 예정이었고, 간첩으로부터 히로츠구가 온가군의 쿠우케(郡家, 군의 관인을 맡는 관청)에 군영을 짓고 쇠뇌의 무기를 갖추고 봉화를 이용해 국내의 군사를 징발하고 있다고 했다. 아즈마비토가 24일에 3곳의 병영을 격파한 것을 조정에 보고했다.

25일에 시모토다노 스구마로(楉田勢麻呂)가 기병 500명, 카시와데노 오즈마히토(膳東人)가 80명, 이사야마노 키미모로(勇山伎美麻呂), 사에키노 토요이와(佐伯豊石)가 70명을 이끌고 일본 조정에 귀순했으며, 백성인 토요쿠니노 아키야마(豊国秋山)가 시오코를 죽였고 키노 우마로(紀宇麻呂) 등 3명이 모의해 히로츠구의 일당인 4명의 목을 베었다.

29일에 천황이 반역을 일으킨 히로츠구를 욕하는 것과 함께 히로츠구를 돕는 자들도 돌아서서 히로츠구를 죽여 백성들을 안심하게 하면 벼슬을 준다는 조서를 내렸고, 10월 9일에 히로츠구의 군사 1만여 기가 이타비츠카와(板櫃河)에 이르러 하야토의 군사를 선봉으로 삼아 나무로 짠 배로 도하를 준비하자 츠네히토와 무시마로가 히로츠구의 군사를 향해 노와 궁을 쏘아 강 서안으로 몰아냈다.

3.2. 후지와라노 히로츠구와 사에키노 츠네히토의 대면

츠네히토는 군사 6천여 명을 이끌고 강 동쪽에서 진을 쳤고, 하야토의 군사를 통해 히로츠구 측에 선 하야토의 군사들에게 반역자 히로츠구를 따라 관군에게 대항하면 그 몸이 죽어도 죄는 친족들에게도 미친다고 하자 히로츠구 휘하의 하야토와 병사들은 활을 쏘지 못했으며, 츠네히토가 히로츠구를 10번 불렀지만 응답하지 않았다.

히로츠구가 말을 타고 와서 칙사에 대해 묻자 츠네히토는 칙사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히로츠구는 말에서 내려 2회씩 2번 배례한 후 조정의 명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조정을 어지럽히는 두 사람[1]을 죽이기를 청할 뿐이라면서 조정을 거역하면 천신이 주살할 것이라고 했다. 츠네히토가 칙서를 주기 위해 대대전 이상을 불렀는데 군사로 압박하는 것은 무슨 이유냐고 하자 히로츠구는 답하지 못하고 말을 타고 퇴각했다.

3.3. 후지와라노 히로츠구 휘하의 이탈

히로츠구를 따르는 하야토 3인이 강을 헤엄쳐 조정에 항복했고 조정에서 돕는 하야토가 돕는다는 설득으로 히로츠구를 따르는 하야토 20인이 조정에 항복했으며, 히로츠구의 기병 20명이 조정에 투항했다. 조정에 투항한 하야토 중 소오 타리시치(贈唹君多理志佐)가 히로츠구의 계획을 알려줬다.

히로츠구의 계획은 군사를 3도로 나누어 자신은 오스미, 사츠마, 치쿠젠, 분고 등의 군사를 합해 5천 명을 이끌고 쿠라테도로부터 나가고 히로츠구의 동생 후지와라노 츠나데(藤原綱手)는 치쿠고, 비젠의 군사를 5천여 명을 이끌고 분고(豊後)로부터 출발하고 타고노 코마로(多胡古麻呂)는 田河道로 나가자고 했으나, 츠나데와 코마로가 도착하지 못한 상태였다.

4. 결과

히로츠구는 비젠에서 배를 띄워서 신라로 달아나려다 탐라 근처에서 풍랑으로 뱃길이 막혀 버렸고, 10월 23일에 비젠국 마츠우라군 치카노지마 나가노무라에서 아베노 쿠로마로(安倍黑麻呂)에게 생포되었으며, 11월 1일에 히로츠구와 츠나데 등은 카라츠에서 참수되어 난은 진압되었다.

히로츠구의 종자 미타노 코에토(三田兄人) 등 20여 명은 아즈마비토의 진으로 끌려와 히로츠구가 도망갔다가 붙잡히기 전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741년 1월 22일에 히로츠구와 그 일당으로 생포된 자 중 사형죄는 26명, 관직 몰수는 5명, 유배는 47명, 노역 종사는 32명, 매를 맞는 것은 177명으로 법에 따라 처벌시켰으며, 나가토미노 나시로(中臣名代), 시오야노무라치 고마로(鹽屋連古麻呂), 大養德宿禰小東人 등 43명이 이 난에 연루되어 유배를 갔다. 3월 8일에 오노노 아즈마비토(小野東人)가 이 난에 연루되어 헤이조쿄 감옥에 투옥되었고, 9일에는 동서의 두 시장에서 각각 장 50대의 처벌을 해서 이즈의 미시마테이에 유배되었다.

난에 연루된 사람들은 9월 8일에 새로 천도해 대사면령을 내리면서 사면되었으며, 742년 1월 5일에는 히로츠구가 난을 일으킬 때 다자이후의 기구를 이용했다는 이유로 다자이후를 폐지했다. 나중에 가서 다시 설치하기는 하지만.

헤이케 이야기에는 히로츠구의 최후에 대해서 정사와 다르게, 배를 띄워 바다로 나아갔다가 풍랑을 만나게 되자 평소 자신이 타고 다니던 말[2]을 타고 바다에 뛰어들었다는 전설을 전하고 있다.[3] 나아가 히로쓰구가 '제거' 대상으로 지목했던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인 겐보 대승정은 히로쓰구가 죽고 5년 뒤에 권력을 잃고 다자이후 간제온지로 유배되어 이듬해인 746년에 죽었는데, 헤이케 이야기에는 법회 도중에 하늘에서 내려온 검은 구름에 휘감겨 하늘로 끌려 올라갔고, 며칠 뒤에 목만 땅에 떨어졌다고 전한다. 겐보 대승정의 죽음에 히로츠구의 원령이 있었다는 인식은 이미 정사 기록인 속일본기에도 나올 정도이니 확실히 양자간에 알력이 있긴 있었던 모양. 다만 히로츠구가 지적한 다른 한 명인 기비노 마키비는 부침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호키 2년(771년)에 사임할 때까지 조정의 요직을 맡으며 천수를 누렸다.

이후 후지와라노 히로쓰구는 가라쓰의 가가미 신사(鏡神社)에 모셔져 가가미 명신(鏡明神)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가가미 신사는 나라에도 동명의 신사가 존재하고 마찬가지로 히로쓰구를 제신으로 모시고 있는데, 가라쓰 가가미 신사의 경우 고려불화 수월관음도(1310년 제작)[4]가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 학계에서는 왜구에 약탈되어 가가미 신사에 오게 된 듯하다고 보고 있다. #

일본의 소설가 시바 료타로1960년 후지와라노 히로쓰구와 그의 반란을 소재로 주도(朱盗)라는 단편소설을 썼다. 단편집 <가신 거사의 환술(果心居士の幻術)>[5]에 실려 있는데, 반란을 몽상하고 있던 후지와라노 히로쓰구가 우연히 「부여의 아나카와즈(穴蛙)」라는 기괴한 백제인 사내와 만나 속세의 일에 초연한 그의 모습에 흥미를 느끼게 되면서 전개된다.


[1] 기비노 마키비와 승정 겐보를 가리킨다.[2] 비젠에서 교토를 하루 만에 왕복할 수 있는 명마였다고 한다.[3] 조선의 실학자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서 싸움에서 패한 히로쓰구 스스로가 목을 자르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도 적고 있는데, 일본측 전승을 적은 것으로 보이지만 원전 출처는 알 수 없다.[4] 충선왕의 후궁인 숙비 김씨가 발원해 그렸다.[5] 참고로 가신거사의 환술은 시바 료타로의 데뷔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