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3 19:51:17

약광

1. 개요2. 상세3. 기타4. 대중 매체에서5. 같이 보기

1. 개요


고구려[1]의 왕족으로, 마지막 통치자인 제28대 보장왕의 아들이라고 전하는 인물이다. 동아시아 역사상 격동의 시기였던 고구려 말기에 야마토 왕권 치하의 일본 열도에 망명해서 현재의 사이타마현에 정착해 고구려 유민의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약광이 특별한 이유는 그의 후손고마(高麗, 고려)씨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기 때문이다. 후손들도 자신들이 고구려계라고 생각한다.

2. 상세

고구려가 을상 엄추(奄鄒) 등을 보내 조(調)를 바쳤다. 대사는 을상 엄추이고 부사는 달상 순, 이위 현무약광(玄武若光) 등이다.
일본서기》 권27 <덴지 덴노> 5년(666년)#
종5위하(從五位下) 고려약광(高麗若光)에게 왕성(王姓)을 내려 주었다.
속일본기》 권3 <몬무 덴노> 다이호(大寶) 3년(703년)#
고려약광을 일본어로는 고마노 쟛코(こまの じゃっこう)라고 읽는다. 약광에게 수여된 왕성은 '고키시 카바네'(こきし かばね)라고 읽는데, '고키시'(왕)는 '가바네'의 일종이다. 가바네(かばね, 성)란 일본 천황가에서 사성할 때 우지에 붙여서 겨레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다. '고키시'(또는 고니키시, 왕)라는 가바네는 백제 제31대 의자왕의 아들이었던 선광왕이 '구다라노코키시'(百濟王, 백제왕)라는 씨를 사성받을 때도 확인되어, 다른 나라의 왕족에게만 주는 가바네인 듯 하다. 한편 고키시는 백제의 왕호인 '건길지'와 관계가 있다고 한다.

약광의 존재는 한국 측 사서에는 전하지 않고, 《일본서기》와 《속일본기》에만 전한다. 《일본서기》의 기록은 666년에 고구려에서 이위 현무약광(玄武若光)이라는 자가 야마토 정권에 사신으로 온 내용이고, 《속일본기》의 기록은 일본에서 약광에게 '고려왕씨'를 하사했다는 것이다. 다만 현무약광과 고려약광이 동일인물인지는 불분명하다. 그 외에는 대체로 가문의 전승이나 설화 따위가 주를 이룬다. '현무'를 도교의 4신 사상에 입각해 보면 북부, 후부, 흑부로도 불리던 절노부에 해당한다. 절노부는 대대로 왕비를 배출한 부족이므로, 약광은 계루부 고씨 왕족이 아니라 고구려 왕의 외척이라고 추측할 수도 있다. 현무약광의 관위인 이위(二位)란 태대형이나 막리지에 해당하는 고위직으로 추정된다.

약광이 고구려 왕족이라고는 하지만, 다른 사료와 교차검증이 되지 않으므로 약광 또는 그의 후손들이 고구려 계루부 고씨 왕족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사칭했을 수도 있다. 다만 고구려 관련 사료가 부족해 교차검증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삼국사기》에도 고구려 왕족은 거의 왕만 기록하고, 다른 왕족은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기록했기 때문에 약광이 등장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고구려, 즉 고려와 꾸준히 교류한 야마토 조정을 상대로 보장왕의 아들이라고 사칭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아무튼 고구려 유민임은 확실해 보인다. 일본은 716년 도카이도(동해도) 전역에서 고구려 유민들을 추려 모두 1,799명을 무사시(武蔵, 무장) 지역에 이주시키고, 고마군(高麗郡, 고려군)을 설치했는데, 이는 당시 황무지가 많았던 간토(관동) 지역을 개간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고마군이 설치될 때 약광도 무사시로 이주해 고구려 유민들의 수장이 된 것으로 추측된다.

약광 사후 그의 후손들은 그를 제사지내기 위해 사당을 세웠는데, 훗날 고마 신사로 발전했다. 전승에 따르면 약광은 나이가 들어 백발에 흰 수염이 무성한 모습이 되었기 때문에 주민들이 그를 '시라히게'(白髯, 백염) 님으로 불렀다고 한다. 옛 고마군 지역에는 시라히게 신사들이 여럿 있다.

3. 기타

약광이 바다로 건너와 도착한 가나가와현 오이소 지역에는 여전히 약광왕이 도착한 내용을 담은 축제와 향토 민요가 전승되어 온다.[2] 그런데 이 노래 가사집에 적힌 내용에는 약광이 도래한 시기가 제15대 오진 덴노(應神天皇, 응신천황)[3]때라고 적혀 있다.#

약광이 일본 가나가와현에 도착한 시기가 고구려가 멸망한(668년) 7세기 말~8세기 초라는 점과 일본측 기록에 있는 제15대 오진 덴노의 생몰 시기(AD 200~AD 310)를 비교하면, 《일본서기》와 《속일본기》에 적힌 역사 왜곡에 대한 이주갑인상(120년)을 감안해도 약 200년의 또다른 차이가 발생한다.

4. 대중 매체에서

김성한 작가가 쓴 소설 《요하》에서는 살수대첩 시기부터 등장한다. 그래서인지 668년 고구려가 멸망할 때는 이미 백발 노인이 되어버렸다.[4] 고구려가 망하기 직전에 구원군을 요청하러 일본으로 떠난 후 소설이 종료된다.

5. 같이 보기



[1] 후기에는 '고려'로 불렸다.[2] 과거 약광을 모시던 고마 신사(高麗神社)라 불리던 곳은 한국을 정벌하자고 주장한 정한론(征韓論)이 펼쳐진 메이지 유신 이후, 다카쿠 신사(高来神社)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모시는 신사의 신도 약광이 아닌 공교롭게도 한반도를 정벌했다며, 역사가 왜곡 서술된 허구의 인물인 진구 황후와 신라를 정벌했다고 주장하는 오진 덴노을 신으로 모시고 있다.[3] 수정한 기록에는 제16대[4] 작가는 위의 '시라히게'(백염) 전승을 채용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