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2-27 22:32:09

진구 황후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AF001F, #BE0026 20%, #BE0026 80%, #AF001F)"
{{{#C0A73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border: 0px solid; margin: -5px -1px"
초대

진무
제2대

스이제이
제3대

안네이
제4대

이토쿠
제5대

고쇼
제6대

고안
제7대

고레
제8대

고겐
제9대

카이카
제10대

스진
제11대

스이닌
제12대

케이코
제13대

세이무
제14대

주아이
-

진구
제15대

오진
제16대

닌토쿠
제17대

리추
제18대

한제이
제19대

인교
제20대

안코
제21대

유랴쿠
제22대

세이네이
제23대

켄조
제24대

닌켄
제25대

부레츠
제26대

케이타이
제27대

안칸
제28대

센카
제29대

긴메이
제30대

비다츠
제31대

요메이
제32대

스슌
제33대

스이코
제34대

조메이
제35대

고교쿠
제36대

코토쿠
제37대

사이메이
제38대

덴지
제39대

고분
제40대

덴무
제41대

지토
제42대

몬무
제43대

겐메이
제44대

겐쇼
제45대

쇼무
제46대

코켄
제47대

준닌
제48대

쇼토쿠
제49대

코닌
제50대

간무
제51대

헤이제이
제52대

사가
제53대

준나
제54대

닌묘
제55대

몬토쿠
제56대

세이와
제57대

요제이
제58대

고코
제59대

우다
제60대

다이고
제61대

스자쿠
제62대

무라카미
제63대

레이제이
제64대

엔유
제65대

카잔
제66대

이치조
제67대

산조
제68대

고이치죠
제69대

고스자쿠
제70대

고레이제이
제71대

고산죠
제72대

시라카와
제73대

호리카와
제74대

도바
제75대

스토쿠
제76대

코노에
제77대

고시라카와
제78대

니죠
제79대

로쿠죠
제80대

다카쿠라
제81대

안토쿠
제82대

고토바
제83대

츠치미카도
제84대

준토쿠
제85대

주쿄
제86대

고호리카와
제87대

시죠
제88대

고사가
제89대

고후카쿠사
제90대

가메야마
제91대

고우다
제92대

후시미
제93대

고후시미
제94대

고니죠
제95대

하나조노
제96대

고다이고
제97대

고무라카미
제98대

조케이
제99대

고카메야마
제100대

고코마츠
제101대

쇼코
제102대

고하나조노
제103대

고츠치미카도
제104대

고카시와바라
제105대

고나라
제106대

오오기마치
제107대

고요제이
제108대

고미즈노오
제109대

메이쇼
제110대

고코묘
제111대

고사이
제112대

레이겐
제113대

히가시야마
제114대

나카미카도
제115대

사쿠라마치
제116대

모모조노
제117대

고사쿠라마치
제118대

고모모조노
제119대

고카쿠
제120대

닌코
제121대

고메이
제122대

메이지
제123대

다이쇼
제124대

쇼와
제125대

아키히토
제126대

나루히토
}}}}}}}}}}}}

파일:attachment/진구 황후/일본진구황후.jpg
진구 황후를 그린 일본 그림.
옆의 노인은 책사라고 전해지는 타케우치노 스쿠네(武內宿禰).
한풍 시호[1] 진구 황후(神功皇后)
화풍 시호[2] 오키나가타라시노히메노미코토
(気長足姫尊[3], 息長足姬尊)
오오타라시노히메노미코토[4]
(大帶比賣命,大足姬命皇后)
별호 오키나가타라시노히메노스메라미코토
(気長足姫皇尊[5])
오키나카노타라시히미(息長帯媛天皇)[6]
이와레와카사쿠라노미카도(磐余稚櫻朝)[7]
신공위[8](神功為)
신공천황[9](神功天皇, 息長足姫天皇)
능호 사키노타타나니노이케노에노능(狹城盾列池上陵)
생몰 170년 ~ 269년 6월 3일
섭정 201년 ~ 269년
황거 아나토노토유라노미야(穴門豊浦宮)
츠쿠시노카시이노미야(筑紫橿日宮)
카루시마노토요아키라노미야(軽島豊明宮)
파일:attachment/진구 황후/e0079724_4d90a71fd705a.jpg
진구 황후의 한반도 침공을 묘사한 오스프리의 그림. 일본서기 내용을 거의 복붙하고 있다.

1. 개요2. 상세
2.1. 오진 덴노의 친부(親父) 문제
3. 고사기의 계보도4. 실존 인물?5. 학설들6. 그 외

1. 개요

일본서기, 고사기, 신황정통기에 등장하는 일본통치자로, 천황이면서 섭정이라는 다소 해괴한 직위로 나온다. 이런 직위는 일본 역사에서는 전무후무하다. 일본 역사상의 다른 몇몇 사례들처럼 실존인물이 아니라고 추정된다.

2. 상세

처음에는 자신에게 반발하는 규슈를 진압하고자 타케우치노 스쿠네와 함께 자신들의 세력을 이끌고 가서 규슈의 지쿠고가와 상류에 진을 치고 북규슈의 여러 추장들을 복속시켰으며, 자신에게 반발한 야마토(山門)의 여추장을 멸망시켰다고 한다. 이 여추장이 히미코이며 에도 시대 학자 중에서는 본래 히미코가 규슈의 야마토(山門 ) 출신이지만 긴키의 야마토(倭)를 참칭했다는 추측을 내놓기도 했는데, 이와 연관되었을 수도 있다. 2세기 말~3세기 무렵 긴키의 야마토 왕권 세력이 규슈로 진출해 전방후원분 문화를 퍼뜨린 과정을 표현한 듯하다.

규슈에 머물던 도중 신라를 정벌하라는 신령의 계시를 받았으나, 주아이 덴노가 이를 의심하고 따르지 않다 죽자, 아내 진구 황후가 임신한 몸으로 배를 타고 신라로 건너가자 바다가 신라를 삼키니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한이 항복했다고 기록했다. 14세기 가마쿠라 막부 시절에 나온 문서 <<하치만 우동훈(八幡愚童訓)>>[10]에서는 진구 황후가 '신라국의 대왕은 일본의 개'라는 문구를 바위에 새겼는데, 일본군이 돌아간 뒤 신라인들이 이를 수치로 여겨 지우려 했지만 오히려 돌의 명문만 또렷해졌다고 해놓았다.

유명한 이야기는 서기 200년에 진구 황후가 (나중에 오진 덴노가 되는) 아들을 임신한 상태로 신라를 정벌하였는데, 정벌이 끝나기도 전에 아기가 태어날 조짐이 나타나 돌로 출산을 늦추었다는 것이다. 한국 인터넷상에는 이때 진구 황후가 돌을 산도에 꽂았다느니, 돌로 산도 입구를 막고 천으로 감았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돌아다니지만, 이는 아무 근거가 없다. 일본의 고서에서도 산도를 돌로 막았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故其政未竟之間, 其懷妊臨産. 即爲鎭御腹, 取石以纒御裳之腰而, 渡筑紫國, 其御子者阿禮坐. 故, 號其御子生地謂宇美也. 亦所纒其御裳之石者, 在筑紫國之伊斗村也.
(신라의 정벌이) 끝나기도 전에 임신한 황후에게 태기가 있었다. 그리하여 황후는 출산을 억제하기 위해 돌을 주워 입고 있던 옷의 허리춤에 감고 있었으나, 쯔쿠시(筑紫)[11]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는 태어났다. 그래서 그 아이가 태어난 곳을 우미(宇美)[12]라 한다. 그리고 옷에 감았던 돌은 쯔쿠시의 이도(伊斗)라는 마을에 있다.
고사기 주아이 천황[13]
于時也, 適當皇后之開胎. 皇后則取石揷腰, 而祈之曰, 事竟還日, 産於玆土. 其石今在于伊覩縣道邊.
이때(200년 9월) 마침 황후는 산달[14]이었는데, 황후가 돌을 들어 허리에 차고 “일이 끝나고 돌아오는 날, 이 땅에서 태어나소서.”라고 빌었다. 그 돌은 지금도 이토노아카타(伊覩縣)[15]의 길가에 있다.
일본서기 진구 황후조[16]

산도에 돌을 넣었다거나, 산도의 입구를 돌로 막았다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 다만 허리춤에 넣었다고 할 뿐이다. 옛 일본에서는 출산을 늦추고자 할 때 이렇게 돌을 허리춤이나 소매에 넣고 주문을 외웠다고 한다. 진구 황후가 출산을 늦추는 데 쓴 그 돌을 진회석(鎭懷石)[17]이라고 불렀다. 나라시대의 기록에는 이때 진회석이 남아 사람들에게 경배받았다고 한다. 전승에 따르면 진회석은 두 개였는데, 길이는 30 cm 남짓에 무게는 10 kg 정도라고 한다. 이만한 돌을 두 개나 허리춤에 넣을 수는 없다. 진구 황후가 아이를 낳고 돌을 버리자 그 돌이 이렇게 커졌다고 한다.[18] 이토시마시에 있는 친카이세키하치만 궁(鎭懷石八幡宮)에서 진회석(鎭懷石 친카이세키)을 신으로 모신다.

후대의 일본인들이 보기에도 이런 내용은 무리수라고 생각했는지, 14세기 중엽에 나온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에서는 삼한정벌은 사료 오독이니 신라 정벌이 맞다고 하고,[19] 위지 동이전에 신라는 변한의 후예로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에는 옛 조선의 유민들이 그 기원이라 적고 있다.돌로 출산 늦추기는 '우연히 여의주를 얻어 그 힘으로 출산을 늦추었다.'고 수정했다. 17세기 에도 막부 시대에 미토 토쿠가와 가문의 당주 도쿠가와 미쓰쿠니(徳川光圀)가 편찬한 사서 대일본사(大日本史)에서는 진구 황후를 제위 목록에서 삭제했다. 이들의 주장이 일본 사학파 중 가장 우익 성향이 강한 미토 학파의 전신이고, 후대의 미토 학파는 진구 황후의 실존을 적극 주장했다는 점을 생가하면 참으로 얄궂은 일이다.

이후 아들과 함께 야마토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야마토의 세력들이 반발해 돌아가지 못했고, 이에 아들이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일족의 주술적인 행위로 적을 굴복시키고 야마토로 돌아와 무려 69년 동안이나 섭정으로 나라를 다스렸다고 한다.

2.1. 오진 덴노의 친부(親父) 문제

진구 황후가 삼한정벌을 했다는 기록이 '합리적 수준'에서 사실이라고 가정해보자.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서기 200년 음력 2월에 남편 주아이 덴노가 숨을 거두었다. 이후 진구 황후는 삼한정벌을 계획하고 실행하는데, 그해 9월에 산기가 보였으므로 돌을 허리춤에 넣어 주술로 출산을 늦추었다. 10월에 출정하여 삼한정벌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와 12월 14일에 아들 오진 덴노을 낳았다고 한다. 주술로 출산을 늦출 수 없으니 이를 무시한다. 그리고 현대의학은 인간의 임신기간을 9개월 반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진구 황후가 아들을 임신한 때는 남편이 죽고 아직 제대로 경황도 없던 3월 초라는 뜻이다.[20]

계속 가정을 전개해보자. 오진 덴노가 3월 초에 수태(受胎)되었다면, 주아이 덴노가 친아버지가 될 수 없다. 친아버지는 도대체 누구일까? 물론 알 수가 없다. 다만, 삼한정벌에 동행했다는 권신 타케우치노 스쿠네도 후보가 될 수 있다. 또한 만약 스쿠네가 친아버지라면 고겐 덴노의 남계후손이 되어서 만세일계가 딱히 부정되지는 않지만, 황후가 신하와 간통하여 차기 천황을 낳았다니, 그것만으로도 일본 황실은 위신이 크게 떨어진다. 물론 진구 황후의 존재 자체가 허구라면 이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다. 게다가 진구 황후만이 아니라 타케우치노 스쿠네 역시 신화적인 인물이다. 스쿠네는 일본서기에 따르면 수명이 수백 년에 달했고, 진구 황후가 삼한정벌을 하던 시점에서 최소한 110살, 어쩌면 130살에 가까웠을 수도 있다. 이런 내용을 과연 믿을 수 있을까?

일본 만화 하늘의 혈맥에서는 우치다 료헤이가 이것을 채우기 위해 광개토왕릉비 비문을 조작하며 무시무시한 소설을 쓴다[21]

그런데 더 황당한 것은 옛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오진 덴노가 주아이 덴노의 친아들이 아니란 이야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8세기에 나온 ≪스미요시 대사 신대기(住吉大社神代記)≫에 따르면 주아이 덴노가 죽은 뒤 진구 황후가 스미요시 대신(住吉大神)[22]과 관계하여 오진 덴노를 낳았다는 것.

일본 역사학자 중에서는 오진 덴노가 기존의 천황 정권을 탈취하고 새로운 정권을 세운 게 아닌가 생각하는 이도 있다. 그래서 일본서기/고사기의 내용이든 스미요시 대사 신대기의 내용이든 정통성을 꾸며주는 이야기가 필요했다는 것.

3. 고사기의 계보도

  아메노히보코
9대 카이카 덴노 타지마-모로스쿠
(多遲摩母呂須玖)
10대 스진 덴노 히코-이마스-노-미코
(日子坐王)
  타지마-히네
(多遲摩斐泥)
11대 스이닌 덴노 야마시로-노-오호쯔쯔키-노-마와카-노-미코
(山代之大箇木眞若王)
이리네-노-미코
(伊理泥王)
  타지마-히나라키
(多遲摩比那良岐)
12대 케이코 덴노
이니시키-노-이리-히코-노-미코토
(印色之入日子命)
타니하-노-아지사하-히메
(丹波能阿治佐波毘賣)
타니하-노-토호쯔-오미
(丹波之遠津臣)
타지마-히다카
(多遲摩比多訶)
키요-히코
(淸日子)
야마토 타케루 카니메-이카즈찌-노-미코
(迦邇米雷王)
타카키-히메
(高材比賣)
스가카마-유라도미
(菅竈由良度美)
오키나가-스쿠네-노-미코
(息長宿禰王)
카즈라키-노-타카누카-히메
(葛城之高額比賣)
14대 주아이 덴노 진구 황후
15대 오진 덴노
호무다-와케-노-미코토
(品陀和氣命)

위의 관계도를 정리해보자면 진구 황후는 카이카 덴노아메노히보코의 후손이다. 또한 14대 주아이 덴노의 아내이며, 15대 천황인 오진 덴노의 어머니라고 한다. 주아이 덴노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고 다만 아내 진구 황후의 조언을 듣지 않았다는 내용만 있다.

4. 실존 인물?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설이 우세하며, 진구 황후의 실존성을 입증할 그 어떤 교차검증된 기록도 없다. 일단 역사적 실제사건으로 보기에는 기록의 앞뒤가 전혀 안 맞는다. 먼저, 진구 황후가 신라로 쳐들어오자 신라의 파사매금(波沙寐錦)[23][24]이란 왕이 인질을 보내며 항복했고, 그 인질은 이름이 미질기지(微叱己知, 혹은 미질허지(微叱許智)라고 기록되었다. 파사 이사금미사흔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파사 이사금은 재위기간이 80년~112년이므로, 170년 ~ 269년에 활약한 신공황후랑 전혀 맞지 않는다. 무려 1세기나 차이가 난다.

신라 정벌 기록의 근거를 따져보자. 삼국사기파사 이사금 재위 당시 신라가 백제가야에게 침략받아 물리쳤다는 기록은 있지만 일본이 공격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리고 미사흔은 눌지 마립간의 동생으로, 후대의 인물이다. 파사 다음 신라왕인 지마 이사금가야에 패하고 왜의 침입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그럼 이번에는 일본서기랑 안 맞게 된다. 또한 일본서기의 다른 기록에 보면 포로로 잡은 신라왕의 무릎 힘줄을 뽑아버리고 돌 위를 기어다니게 한 후 참수했다느니 하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249년/253년[25] 왜군에게 죽었다는 석우로에 대한 기록을 거의 그대로 베꼈다. 즉, 하나도 맞는 게 없다.

더 웃긴 점은 일본서기에서 신라구에게 피해를 받는 기록을 보면, 일본은 제대로 된 정식 군대가 있던 적이 없어 맨날 당한다느니, 그래도 일본은 신이 지켜주는 신국이니 앞으로는 안 오겠지 하며 자기위안만 하는 내용이 무더기로 나온다는 것. 그런데 이런 상황이면 최소한 정신적 위안용으로라도 진구 황후 얘기가 조금이라도 나올 만한데, 안 나온다. 심지어 신라구 때문에 反신라 감정이 높아져 일본인들이 일본에 살던 신라인들을 공격했다는 기록도 있으면서, 진구 황후는 신화시대 기록 이후에는 안 나온다.

중국의 기록과도 안 맞는다. 일단 중국의 기록 중에 종종 신라의 경우 일본보다 아래라고 적는 기록은 있지만 애매모호하며(이에 대해서는 일본서기, 임나일본부설 항목을 참조하기 바람), 무엇보다 위지 동이전 왜인전 기록을 비롯한 일본 고대사 관련 중국기록에 히미코는 나올망정 진구 황후에 대한 기록은 안 나온다. 더욱이 당시 히미코의 지배지 외에 다른 곳에 있는 나라에 대한 기록도 나오고 해당 소국들의 존재가 고고학적으로 입증되면서 단순 지방호족/반란세력 정도로 묘사하는 일본서기의 기록과도 안 맞는다.

더군다나 진구 황후 본인의 가족관계도 문제가 된다. 진구 황후의 아버지는 오키나가노스쿠네노미코(息長宿禰王)인데, 이 사람의 생몰연대는 기원후 321~384년으로, 진구 황후보다 나중 사람이다. 거기다 어머니 카츠라기노타카누카히메(葛城高顙媛)는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아메노히보코의 손녀(6대손이라는 기록도 있는 듯)인데, 정작 진구 황후는 신의 계시를 받기 전에는 신라의 존재를 몰랐다고 기록되었다. 게다가 천일창(아메노히보코) 설화는 한국연오랑과 세오녀 설화와 구조가 거의 같아 출연 인물들을 동일시하거나 같은 계통 설화로 보는 학설도 있는데, 이 경우 연오랑 세오녀 설화가 기원후 2세기경의 이사금인 아달라 이사금의 통치기가 되어 진구 황후 집권기와 맞지 않는다는 문제가 생긴다. 거기다 이 때는 진구 황후의 모델이라는 주장이 있는 히미코가 사신을 보낸 시기. 더 꼬인다.

추가로 진구 황후의 이름은 타라시(足 혹은 帶) 계통인데, 이 계통 이름은 일본의 역사기록에서 7~8세기에 들어서야 나타난다.

한때 큐슈 지역에서 발굴된 요시노가리 유적이 이와 관련되어 일본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받았으나, 정작 출토되는 유물 상당수는 반도계 유물들이 주루룩이었고, 결국 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들이 중심이 되어 야요이 시대를 열었다는 일본의 기존 연구결과에서 크게 벗어나는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한국에서 요시노가리 특별전을 열 때, 한국 학자들이 특별전의 부제로 일본 속의 고대 한국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요구하자 일본 학자들은 아무 군말없이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그대로 부제로 통과되어 버렸다.#

몇몇 일본 학자들은 야요이 시대보다 먼저 존재한 죠몬시대와 야요이 시대의 연관성에 대해 단절성보다는 연관성에 집중하여 어떻게든 일본의 고대사의 상한선을 올려보려고 했지만, 두 문화는 주류 인종부터가 다른 데다 대륙(특히 한반도)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야요이 문화가 현대 일본인의 직계임은 연구하면 할수록 더 단단해지므로 이 설은 용도폐기된 상태다.[26]

5. 학설들

진구 황후가 이렇게 앞뒤가 전혀 안 맞는 뒤죽박죽이다 보니, 이미 에도시대 때부터 일본 내에서도 여러가지 설이 혼재되어 서로 갑론을박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일본 사학계는 제국주의 시절 이 반론들을 다 씹고 밀어붙였다가 결국 게임 오버.
  • 1. 실존인물설
    말 그대로 실존인물이라는 설. 당연하지만 일본 제국 시대가 끝나고, 1945년 고대 일본사서 비판이 해금된 이후로는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현재는 진구 황후 전설이 내려오는 일부 신사나 이들 신사의 마쓰리에서나 볼 수 있다. 즉 역사가 아닌 설화로 취급받는다. 실존인물로 인정하다 치더라도 모티브인 주아이 덴노의 황후 그 이상을 넘어서진 않으며 삼한 정벌은 부정된다.
  • 2. 히미코-토요(이요)설
    히미코(비미호)가 모델이라는 설. 에도시대부터 등장한 설이다. 히미코가 진구 황후와 마찬가지로 신술로 사람들을 다스리는 무녀 여왕이었다는 점 등 그나마 가장 타국 역사서의 기록과 근접하기에 나온 설. 그러나 재위 기간에 약간 차이가 있어, 이를 보완하기 위해 토요(혹은 이요)도 진구 황후의 모델로 본다. 임용한의 '한국고대전쟁사' 1권에서는 히미코 설을 채택하면서도 진구 황후의 신라 침공은 백제에 고용된 용병으로써의 공격이고, 신라왕을 죽였다는 것은 위에 나온 신라의 왕족이자 장군인 석우로를 죽인 것을 과장한 것이라는 절충설을 택했다. 세키 유지는 진무=스진=오진이 전부 동일인물이며, 진구 황후=히미코=토요로 초대 천황의 어머니라는 설을 내놓아 시대 오차를 수정할 수 있다는 가설을 내놓았다. 일본서기에서 신라 정벌 전에 있던 규슈 정벌과 그곳에 있던 여추장 멸망, 신라 정벌 이후 저주로 야마토 입성 일화를 진무=스진=오진의 기록과 합쳐 신라 정벌을 제외한 사건 전후와 세 천황 일화를 하나로 합친 게 진실이라고 여겼다.
  • 3. 사이메이 덴노
    과거 백제 멸망시 백제 부흥군을 파병한 사이메이 덴노가 모델이라는 설, 일단 둘 다 여왕이고, 이름이 타라시 계통임도 증명이 가능해지며, (과거 야마토의 위치가 아직 논란 중인데 반해) 진구 황후 전설과 관련있는 신사들이 많은 큐슈에 실제로 부흥군 출병과 관련해 진구 황후가 머문 적이 있어 이를 근거로 주장하는 설이다. 현재 가장 유력한 설이다.
  • 4. 근초고왕
    근초고왕 재위 시절 업적들의 주체가 일본서기에 진구 황후의 업적으로 기술되어 있어, 진구 황후가 근초고왕을 모델로 한 가상인물이라는 설.
  • 5. 신라에 대한 공포가 만들어낸 신화?
    일부 학자들은 진구 황후가 신라에 대한 공포와 증오가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라는 추정을 한다. 백촌강 전투의 패배 이후 일본은 쓰시마와 큐슈에 신라와 당의 침공에 대비해 다수의 성을 축조했는데 이후로 신라를 가상 적국으로 규정하면서 신라에 대한 공포와 증오라는 양가 감정이 생성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나타난게 바로 진구 황후라는 것. 진구 황후가 삼한정벌을 내세웠으나 실질적인 적은 신라라는 점, 파사 이사금의 항복을 받은 점, 진구 황후 전설에 기반한 신사들이 큐슈에 다수 존재한다는 점 등이 근거로 제시된다. 즉, 내부적으로 우리는 신라를 정복했었고 신라는 우리의 속국이니 두려울 것 없다는 차원에서 만들어낸 신화가 관찬 사서인 일본서기에 기록되면서 실제 역사로 둔갑했다는 것.
  • 2, 3, 5 종합설
    일본서기가 기록된 시기는 8세기로, 3세기에는 나라가 세워지기도 전이라 명확한 기록 문화가 있었을 리 없고 6세기에 나라가 세워진 뒤 여러 기록물들이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 사라지고 일본서기나 고사기 같은 기록물들이 나타난 건 8세기다. 즉 8세기에 이르기까지 오백 년이라는 세월 동안 온갖 전설과 구전이 뒤섞여서 이어졌을 텐데, 일본서기에 기록될 시점에 이미 여러가지 전설이 하나로 합쳐져서 진구 황후의 존재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6. 그 외

복거일대체역사소설 비명을 찾아서에서는 일제가 1940년대 말까지 강력하게 실시한 내지화 정책의 영향으로 조선 고유의 역사는 완벽히 말살되었다. 이후 일제가 왜곡한 조선의 역사교육 시간에는 조선이 5세기 무렵에 일어난 진구 황후의 한반도 정벌 이래로 일본의 영토였다고 가르치고 있으며, 진구 황후의 한반도 정벌 이후의 조선 역사에 관해서는 역사 교과서에서조차 아예 언급을 하지 않는다.

방영 종료된 사극 드라마인 근초고왕에서는 막판에 조금 등장한다.


[1] 중국식으로 올린 시호이다.[2] (이름)가 아닌 당시 왜국식으로 올린 시호이다.[3] 일본서기[4] 고사기[5] 신찬성씨록 원문을 보면 気長足姫皇尊이라 쓰고 천황을 뜻하는 스메라미코토すめらみこと로 읽는다.[6] 죽내문서(竹内文書)[7] 고어습유(古語拾遺). 일본어에서는 황제의 제를 미카도라고 읽기도 한다.[8] 신당서(新唐書)[9] 송사(宋史)[10] 하치만(八幡) 신의 영험을 어리석은 아이(愚童)도 이해할 수 있게 설명(訓)한 책이라는 뜻이다. 그 이름대로 하치만 신의 영험과 신이담을 모았다.[11] 오늘날 후쿠오카현 북동쪽 지역[12] 오늘날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 우미 정(宇美町). '우미'는 아이를 낳는다는 뜻인 '우무'의 명사형이다. 우미 정에는 우미하치만 궁(宇美八幡宮)이라는 신사가 있어, (그곳에서 태어났다는) 오진 천황과 어머니 진구 황후를 신으로 모신다. 또한 출산을 도와주는 효험이 있다 하여 임산부들이 찾아오며, 경내에 있는 돌에도 산모와 아기를 도와주는 힘이 있다고 하여 가져간다고 한다.[13] 노성환 역주, <<고사기>>, 민속원 출판, (2009), p213-4에서 번역문을 인용함.[14] 뱃속에 있는 아이가 나오는 달[15] 오늘날 후쿠시마현 이토시마시 지역[16] 동북아역사재단 번역, <<역주 일본서기 1>>, 2013, p476에서 번역문을 인용하되, 일본 지명을 일본어 음역으로 바꾸었다.[17] 한자를 풀이하면 '임신을 억누르는 돌'이란 뜻이다.[18] 기미가요에도 '작은 조약돌이 큰 바위가 되어'라는 구절이 있다. 신령한 돌은 자랄 수 있다고 보는 애니미즘적 관념이 전재된 구절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를 따른다면, 진구 황후가 자식의 출산을 늦추는 데 쓴 돌이 신령함을 얻어 크게 자랐다고 해도, 옛 일본인들의 관념에서는 자연스러울 것이다.[19] 신황정통기의 저자 기타바타케 지카후사(北畠親房) 본인도 이 부분에서 '진한, 마한, 변한을 합하여 신라라고 한다.'고 사료 오독을 저질렀다.[20] 옛 일본에서는 여자의 임신기간을 딱 1년으로 친 듯하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199년 9월에 진구 황후가 아들을 배었고, 200년 9월에 산기가 있었으나 주술로 늦추어 12월에 낳았다. 즉, 일본서기에 따르면 오진 덴노은 어머니 뱃속에 15개월간 있었던 것이다.[21] 오진 덴노의 아버지가 광개토대왕이라고 한다. 오진 덴노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그의 생부가 일개 신하인 타케우치노 스쿠네가 아닌 대왕이라고 조작하려 하는 것. 그런데 전후사정을 보면 타케우치노 스쿠네가 작중 세계관에서 우치다 료헤이의 먼 선조로 설정되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22] 바다와 관련된 3위 신을 통칭하는 이름이다.[23] '파사'의 한자가 삼국사기와 다르지만, 어차피 신라나 일본이나 고대 인명/지명들은 대부분 고유어 음차라서 그건 별로 상관이 없다.[24] 매금은 광개토왕릉비통일신라최치원이 지은 봉암사 지증대사비에도 나오는, 실제로 쓰였던 호칭이다. 자세한 내용은 법흥왕 항목 참조.[25] 249년은 삼국사기, 253년은 삼국유사 기록. 그나마 이건 거의 차이가 없다.[26] 같은 이유로 기자동래설이 부정된다. 기자가 동래했했음을 증명할 만한 중국계 청동기 유물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계 청동기 유물이라 해 봐야 기껏해야 청동 꺾창이나 중국식 청동거울, 중국식 거울을 모방한 본뜬거울이 전부. 그리고 이런 추세의 청동기 흐름은 일본 청동기 유적에서 복붙한 듯 그대로 따르고 있다. 더 안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