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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양력 서위일 불명) | 720년 11월 27일 | 724년 | 737년 8월 25일 | |||
(화력 서위일 불명) | 요로 4년 10월 23일 | 진키 원년 | 덴표 9년 7월 25일 | |||
(고세노 도코타) | ||||||
737년 11월 3일 | 749년 5월 4일 | 760년 9월 20일 | 762년 2월 28일 | |||
덴표 9년 10월 7일 | 덴표칸포 원년 4월 14일 | 덴표호지 4년 8월 7일 | 덴표호지 6년 2월 1일 | |||
770년 10월 23일 | 785년 6월 14일 | 785년 10월 31일 | 788년 6월 21일 | |||
호키 원년 10월 1일 | 엔랴쿠 4년 5월 3일 | 엔랴쿠 4년 9월 24일 | 엔랴쿠 7년 5월 13일 | |||
791년 1월 | 791년 1월 | 806년 6월 | 806년 6월 | |||
엔랴쿠 9년 12월 | 엔랴쿠 9년 12월 | 다이도 원년 6월 | 다이도 원년 6월 | |||
819년 1월 18일 | 823년 6월 17일 | 823년 6월 17일 | 826년 9월 1일 | |||
고닌 9년 12월 19일 | 고닌 14년 5월 6일 | 고닌 14년 5월 6일 | 덴초 3년 7월 26일 | |||
833년 | 833년 | 847년 11월 16일 | 848년 1월 28일 | |||
덴초 10년 | 덴초 10년 | 조와 14년 10월 5일 | 조와 14년 12월 19일 | |||
850년 9월 | 854년 10월 28일 | 858년 | 867년 11월 9일 | |||
가쇼(嘉祥) 3년 8월 | 닌주 4년 10월 4일 | 덴난 2년 | 조간 9년 10월 10일 | |||
869년 4월 | 872년 10월 9일 | 877년 1월 | 877년 1월 | |||
조간 11년 3월 | 조간 14년 9월 4일 | 조간 19년 1월 | 조간 19년 1월 | |||
884년 3월 23일 | 884년 3월 23일 | 891년 2월 24일 | 895년 9월 20일 | |||
간교 8년 2월 23일 | 간교 8년 2월 23일 | 간표 3년 1월 13일 | 간표 7년 8월 28일 | |||
897년 7월 19일 | 898년 1월 3일 | 900년 4월 15일 | 906년 6월 24일 | |||
간표 9년 6월 16일 | 간표 9년 12월 7일 | 쇼타이 3년 3월 14일 | 엔기 6년 5월 30일 | |||
907년 | 909년 4월 27일 | 913년 4월 27일 | 937년 11월 | |||
엔기 7년 | 엔기 9년 4월 5일 | 엔기 13년 3월 18일 | 조헤이 7년 10월 | |||
949년 9월 13일 | 949년 9월 13일 | 962년 11월 17일 | 967년 | |||
덴랴쿠 3년 8월 18일 | 덴랴쿠 3년 8월 18일 | 오와 2년 10월 18일 | 고호 4년 | |||
969년 12월 2일 | 970년 6월 26일 | 972년 12월 13일 | 978년 1월 1일 | |||
안나 2년 10월 20일 | 덴로쿠 원년 5월 20일 | 덴로쿠 3년 11월 5일 | 조겐(貞元) 2년 11월 20일 | |||
987년 3월 | 989년 8월 23일 | 992년 7월 18일 | 993년 6월 12일 | |||
간나 3년 2월 | 에이엔 3년 7월 20일 | 쇼랴쿠 3년 6월 16일 | 쇼랴쿠 4년 5월 20일 | |||
993년 8월 19일 | 995년 6월 25일 | 995년 6월 25일 | 1025년 9월 23일 | |||
쇼랴쿠 4년 7월 29일 | 조토쿠 원년 5월 25일 | 조토쿠 원년 5월 25일 | 만주 2년 8월 29일 | |||
1029년 11월 25일 | 1073년 6월 | 1073년 6월 | 1075년 11월 16일 | |||
조겐(長元) 2년 10월 17일 | 엔큐 5년 5월 | 엔큐 5년 5월 | 조호 2년 10월 6일 | |||
(서기·양력 서위일 불명) | 1094년 | 1107년 | 1146년 11월 9일 | |||
(화력 서위일 불명) | 가호 원년 | 가쇼(嘉承) 2년 | 규안 2년 10월 4일 | |||
1146년 11월 9일 | 1166년 9월 8일 | 1168년 7월 | 1168년 7월 | |||
규안 2년 10월 4일 | 에이만 2년 8월 12일 | 닌난 3년 6월 | 닌난 3년 6월 | |||
1177년 8월 28일 | 1190년 5월 | 1220년 | 1242년 | |||
지쇼 원년 8월 3일 | 겐큐 원년 4월 | 조큐 2년 | 닌지 3년 | |||
1617년 4월 14일 | 1628년 7월 | 1632년 3월 30일 | 1651년 7월 4일 | |||
겐나 3년 3월 9일 | 간에이 5년 7월 | 간에이 9년 2월 10일 | 게이안 4년 5월 17일 | |||
1680년 6월 17일 | 1709년 3월 4일 | 1709년 10월 9일 | 1712년 12월 1일 | |||
엔호 8년 5월 21일 | 호에이 6년 1월 23일 | 호에이 6년 9월 7일 | 쇼토쿠 2년 11월 3일 | |||
1716년 7월 1일 | 1752년 7월 20일 | 1761년 8월 24일 | 1786년 10월 13일 | |||
쇼토쿠 6년 5월 12일 | 호레키 2년 6월 10일 | 호레키 11년 7월 24일 | 덴메이 6년 9월 22일 | |||
1841년 4월 8일 | 1848년 8월 7일 | 1853년 9월 23일 | 1858년 8월 29일 | |||
덴포 12년 2월 17일 | 가에이 원년 7월 9일 | 가에이 6년 8월 21일 | 안세이 5년 7월 21일 | |||
1866년 8월 29일 | 1880년 7월 20일 | 1882년 8월 7일 | 1885년 7월 20일 | |||
게이오 2년 7월 20일 | 메이지 13년 동월 동일 | 메이지 15년 동월 동일 | 메이지 18년 동월 동일 | |||
1891년 2월 18일 | 1898년 3월 18일 | 1899년 9월 26일 | 1900년 11월 16일 | |||
메이지 24년 동월 동일 | 메이지 31년 동월 동일 | 메이지 32년 동월 동일 | 메이지 33년 동월 동일 | |||
1901년 5월 16일 | 1901년 5월 16일 | 1903년 6월 27일 | 1904년 3월 17일 | |||
메이지 34년 동월 동일 | 메이지 34년 동월 동일 | 메이지 36년 동월 동일 | 메이지 37년 동월 동일 | |||
1908년 4월 2일 | 1908년 9월 9일 | 1915년 8월 18일 | 1917년 11월 17일 | |||
메이지 41년 동월 동일 | 메이지 41년 동월 동일 | 다이쇼 4년 동월 동일 | 다이쇼 6년 동월 동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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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戸黄門(みと こうもん)
1628년 ~ 1701년
도쿠가와 미츠쿠니 초상. |
1. 개요
본명은 도쿠가와 미츠쿠니(德川光圀).[1]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자이며 초대 미토 번주(藩主) 요리후사(賴房)의 아들이니 당시 나라 안에서 무서울 것 없는 높으신 분이었다.2. 미토 고몬 이야기의 내용
일본을 유랑하는 노인으로 신분을 위장한 미토 고몬이 충성스럽고 무예실력이 뛰어난 두 가신 사사키 스케사부로(통칭 스케상), 아츠미 카쿠노신(통칭 카쿠상)을 거느리고 일본 전국을 떠돌며 악을 벌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이야기다.다소의 변형은 있지만, 매 시리즈/매 회의 기본적인 패턴은 동일하다.
미토 고몬이 미복 차림으로 천하를 주유하다가 백성의 억울한 사연을 접함. 이때 미토 고몬은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있기 때문에, 미토 고몬은 가신들로부터 ご隠居(고인쿄)[2]라는 호칭으로 불린다. 백성들도 정체를 알기 전까지는 어르신이라고 부른다.
→ 바람개비 야시치 등이 정보를 수집하여 사건의 진상을 캐 냄
→ 악당의 소굴에 고몬과 카쿠상, 스케상이 난입
→ 악당은 고몬을 알아보지 못하고 떼거리로 덤비고 미토 고몬이 "스케상, 카쿠상. 혼쭐을 내주시지요!"
→ 어느정도 싸우고 나서 미토 고몬이 "스케상, 카쿠상. 그만하면 되었습니다"라고 하면 스케상과 카쿠상이 "물럿거라!!" "물럿거라!"를 외치고
→ 카쿠상이 악당의 면전에 지니고 있던 도쿠가와 막부의 가문(家紋)인 세잎 접시꽃(三葉葵)이 새겨진 인롱(印籠)[3]을 내보이며 "이 문장이 네놈들 눈에 보이지 않느냐!" 하며 신분을 드러냄. 이때 인롱을 클로즈업하며 장엄한 음악이 깔리고, 악당들은 문장만 봐도 새파랗게 질린다.
→ 카쿠상이 "여기 계신 분이 뉘신줄 아느냐! 황송하옵게도 선대 부쇼군, 미토 미츠쿠니 공이시다!"라고 외치며 정체를 밝힘
→ 스케상이 "네놈들! 부쇼군의 면전이다! 머리를 숙이지 못할까!"라고 외치면 악당들은 벌벌 떨며 바닥에 납작 엎드린다. 일반적으로 미토 고몬이 악행을 꾸짖으며 합당한 처벌을 내리지만, 매우 드물게 이판사판이라는 심정으로 칼을 들고 덤비는 악당도 있다. 그 경우는 스케상이나 카쿠상 등이 악당을 베어버린다.
이 패턴은 암행어사가 마패를 내보이며 탐관오리를 내치는 것과 매우 흡사하다. 에도 시대의 박문수라고 생각해도 좋을 정도다.
한국에 어사 박문수가 있다면 일본에 미토 고몬이 있다고 해도 될 정도로, 권선징악을 대표하는 인물로 일본 사극에서 오랫동안 우려먹어온 사골같은 존재다. 한국의 암행어사 이야기나 중국의 포청천 이야기와 비슷한 위상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소재다. 실제로 60~70년대에 일본 TBS의 드라마가 힛트하자 한국에서도 박문수를 모티브로 한 암행어사 드라마가 기획되었고, 이것이 MBC가 1981년부터 1984년까지 방영하던 "암행어사"이다. 이 드라마는 배우 이정길을 그 당시 국민배우로 올려놓았다.
3. 실제
실제로 암행어사 노릇을 했지만, 일화와 달리 전국 탐방을 하지는 못했다. 애초에 미토 번의 번주였던 중임인 만큼, 현역 시절은 물론이고 은퇴하고 나서도 워낙 중요인물이다보니 멀리 가봤자 자신에게 배정된 미토(水戸, 오늘날의 이바라키현)까지가 전부였고,[4] 그 미토조차 한국으로 비유하면 서울에서 경기도까지 나간 격이었다. 그 외 현들은 당연히 못가고 주로 부하들이나 감찰역으로 보냈다.참고로 미토 번(藩)이라 하면 기이(紀伊, 오늘날 와카야마현), 오와리(尾張, 오늘날의 아이치현)와 함께 고산케(御三家)를 이루는 친번(親藩)으로, 한마디로 말하자면 엄청 높으신 분이었다. 실제로 법적으로 쇼군 계승권까지 가진 가문이며, 미토 고몬 또한 쇼군 계승권자이기도 했다. 아이러니한 점은 정작 고산케 3가 중에선 서열 3위인데다가 이에야스부터가 '보좌역에 충실해라' 정도의 유언을 남긴 탓에 계승 서열이 밀려 이 가문에서 쇼군이 나올거라 예상한 인물은 없었으나, 의외로 제일 건실하게 버틴 가문도 미토 가였다. 정작 에도 막부가 종식될 때까지 고산케 중 쇼군을 배출하지 못한 가문은 서열 1위였던 오와리 도쿠가와 쪽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한 세대도 남아가 끊긴적이 없었다고 하며, 오히려 남아 복이 넘쳐서 남아를 낳지 못한 다른 가문에서 대를 잇기 위해 양자로 입양해가는 경우가 더 많았다.
상술했듯 본명은 도쿠가와 미츠쿠니이며, 미토 고몬은 일종의 관직명에 가깝다. '미토'는 미토 번주라는 의미고, 고몬(黃門)은 중납언(츄나곤: 中納言) 관직을 가진 사람을 중국식으로 부른 명칭으로 중국의 '황문시랑(黄門侍郎)'이라는 관직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풀어쓰자면 '미토 번의 번주이자 츄나곤(水戸中納言)'을 지낸 사람'을 뜻하는 의미로, 미토 번 번주중 이런 '미토 고몬'이었던 인물은 미쓰쿠니 외에도 미쓰쿠니의 아버지이자 초대 미토 번주인 도쿠가와 요리후사부터 시작해서 도쿠가와 쓰나에다(3대 번주), 도쿠가와 하루모리(6대), 도쿠가와 나리노부(8대), 도쿠가와 나리아키(9대)[5], 도쿠가와 요시아츠(10대) 등 6명은 더 있었다. 즉 '미토 고몬'은 총 7명이 있는 셈이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선 '태합(타이코: 太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만 있는 게 아니었는데도 히데요시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쓰이는 것처럼 미토 고몬이란 단어 역시 '도쿠가와 미츠쿠니'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굳어졌다. 한국으로 치면 '충무공'하면 흔히 이순신 장군을 떠올리는 거나 '대원군'하면 흥선대원군을 떠올리는 것과 비슷한 예다.
부쇼군이라 칭해진 것은 실제로 그가 부쇼군이란 직위에 있었기 때문은 아니며 이는 미토 번주의 별칭이다. 미토 번은 에도와 붙어 있었기 때문에 미토 번주는 에도에 상주하며 쇼군을 보좌해야 했다. 이 때문에 미토 번주는 막부 정계에서 위상이 대단했었고 그 때문에 부쇼군이란 별칭이 붙었다.
3.1. 미토 고몬에 대한 역사 이야기
- 19세기 막말(幕末)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慶喜)가 미토 도쿠가와의 먼 후손이다. 다만 고몬의 직계 후손은 아니며,[6] 요시노부 본인은 고산쿄(御三卿)의 하나인 히토츠바시(一橋)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므로 미토보다는 히토츠바시 계의 일원임을 더 강조한다.
- 천하를 주유했다는 일화에 가려 있지만, 학문에 힘쓰고 "대일본사" 편찬에 착수하는 등 미토를 학문의 중심으로 일구는 역할을 다하였으며 훗날 이곳을 중심으로 한 학문사조를 미토학(水戶學)이라 일컫는데 이를 일본사 편찬 등에서 민족주의와 국민국가 의식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실은 동복형이자 장자인 마츠다이라 요리시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번주에 올랐다. 이에 대해서는 미츠쿠니의 아버지인 도쿠가와 요리후사가 다른 고산케의 번주였던 두 형들보다 먼저 아들을 얻은 탓에 형들의 체면을 위해 장자를 서자취급하고 나중에 태어난 둘째인 미츠쿠니를 적장자로 세웠다는 설이 있으나 사실 여부는 불명이다.
- 사실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을 뻔 했다. 미츠쿠니의 생모 큐쇼인은 한미한 집안 출신의 시녀에 불과한 상태에서 아이(장남 요리시게)를 잉태했는데 이것이 요리후사의 측실 사사키씨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어 요리후사가 가신 미키 유키츠구[7]를 시켜 큐쇼인의 아이를 지우도록 명했으나 유키츠구가 요리후사의 양어머니이자 이에야스의 측실인 에이슈인과 상담해 요리후사의 명령을 어기고 큐쇼인이 아이(요리시게)를 에도에서 몰래 낳을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후 큐쇼인이 둘째[8]인 미츠쿠니를 잉태했을 때에도 요리후사는 전처럼 아이를 지우도록 유키츠구에게 지시했으나 유키츠구는 이번에도 에이슈인과 상담해 큐쇼인이 미츠쿠니를 몰래 낳도록 하고 아예 자신의 아이인 것처럼 숨기고 길렀다. 다만 장남인 요리시게가 미토 번에 돌아간 후에도 15세가 될 때까지 아버지 요리후사를 한번도 알현하지 못한 것에 반해 미츠쿠니의 경우 4살 때 신분을 인정받아 미토 성으로 돌아갔고 이듬해인 5살 때에는 정식으로 요리후사의 후계자로 인정받는 등 받은 대우는 완전히 달랐으며, 이후 요리시게가 3대 쇼군 이에미츠를 알현할 때에도 사실상 요리후사의 차남으로 취급되었다고 한다.[9]
- 상술했듯 불행한 삶을 살았던 형을 제치고 어린 나이부터 유복하게 살며 후계자가 된 것에 대한 자책감을 꽤나 강하게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츠쿠니의 일화를 집대성한 겐로쿠 시대의 책인 '도원유사'에선 1661년, 미츠쿠니가 선대 요리후사 사후 미토 번을 계승받기 전날, 형 요리시게와 이복동생들을 불러모아 요리시게의 장남 마츠치요(도쿠가와 츠나카타)를 자신의 장남으로 받아들이겠다는 폭탄 발언을 내뱉는데,[10] 이를 들은 형제들이 무슨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선수쳐서 이를 받아들여주지 않으면 후계고 뭐고 은거하겠다.라고 폭탄선언해서 결국 말다툼끝에 형을 포함해 형제들 모두가 이를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물론 위의 이야기는 어느정도 작가의 입맛이 첨가된 야사지만, 실제로 미토 번주가 되기 직전은 아니더라도 미토 번주로 취임한 뒤 2년 뒤인 1663년 츠나카타를 자신의 양자로 맞이했고,[11] 심지어 츠나카타가 요절하여 본인보다 먼저 죽어버리자 아예 형의 차남인 츠나에다까지 양자로 받아들여 끝끝내 후계자로 세웠다. 어찌보면 위 일화보다 더욱 독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물론 친아들인 요리츠네를 박해하진 않았고 거꾸로 그를 형인 요리시게의 양자로 보내 그의 후계자로 만들어줬다.
- 고몬(黃門)은 중납언(中納言)벼슬의 중국식 표현. 실제 직무를 수행했다기보다 명예직의 성격이 강하다. 묘하게도 항문(肛門)의 일본어 발음과도 같아서 개그의 소재로 널리 활용되기도 했다.
- 일본에서 처음 교자, 라멘, 치즈를 먹은 당대의 미식가로 알려져있다.
- 야사이긴 한데 야와타노 야부시라즈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귀신들의 장난에 길을 잃은 적이 있다고 한다.
- 명나라 출신의 유학자 주지유와 친분이 있었다. 위에서 말한 미토 코몬이 처음 먹었다는 라멘도 그가 중국식 탕면을 일본식으로 어레인지해서 올린 것이다.[12]
4. 미디어 믹스에 등장하는 미토 고몬
주로 패러디 되는 요소는 2명의 요짐보(스케상&가쿠상)와 문장. 이 문장에 경우 매체에 따라 다양한 바리에이션으로 나온다.4.1. 드라마판 미토 고몬
미토 고몬(드라마)4.2. 기타
- 드라마가 가장 유명하다.[13]
TBS판 미토 고몬의 대표적인 주제곡인 아~ 인생에 눈물이 있어(ああ人生に涙あり), 영상 보기 1, 영상 보기 2
- 일본 만화에서 악역 '을'[14]이 악역'갑'[15]에게 과자를 빙자한 돈을 건네면서 아첨하는 것은 미토 고몬의 패러디다. 이 때 주고받는 대사는 "에치고야, 그대도 참 나쁘구먼." / "아뇨아뇨. 나리만 하겠습니까"[16] 당연하지만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애용되는 로비 수단으로, 그 외에도 정치인들이 여러가지 방법으로 애용한다. 예를 들면 - 전통적인 사과박스부터 떡상자, 김상자, 파이 상자 등, 트럭째 차떼기도 있다.
- 개그만화 일화에서 한 번 등장하는데, 해당 에피소드에선 분위기 전환이랍시고 강 속을 걸어 다닌다. 지나가다가 길 위에 쓰러진 임산부를 도와주기는 커녕, 온갖 바보짓만 일삼다가 쳐맞는 등 다른 위인들 못지 않게 망가진다. 임산부가 미토 고몬 일행에게 화내다가 벌떡 일어서서 결과적으론 그녀를 도와준 셈이 되었지만. 그리고 보디가드 역할을 하는 무사가 3명인데 스케상, 카쿠상, 박상이다.
- 토야마의 킨상이나 망나니 장군과 더불어, 일본의 장수하는 시대극 중 하나. 심지어 망나니 장군에서는 에도성 전체에 미토 고몬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크게 유행하여 당시 은퇴를 앞둔 가로가 미토 고몬 코스프레를 하고 유랑하면서 사고를 치는 에피소드도 있다. 그러나 미토 고몬은 공식적으로는 2011년 12월 19일에 방영 누적회수 총 1228회로 종영하였으며 2015년에 미토 고몬 스페셜이 방영되는 등, 장기가 아닌 단발성 시리즈로 전환하였다.
- 교도관 나오키(여검시관 히카루)에서 주인공이 보는 시대극에 미토 고몬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나온다.
- 고요키바에서는 카메오 출연한다.
- 일본에서는 1981년 SF로봇물로 나와서 행성간을 여행하는 작품으로도 나왔다. 작품명은 '최강로보 다이오쟈'. 원전에서는 미토 고몬이 자기 신분을 밝히면 다들 알아서 기었지만 다이오쟈에서는 당연히 덤비고 미토 왕자가 다이오쟈를 불러서 싸우는게 패턴. 사실 미토 왕자의 경우는 설정상 우주정복도 끝낸 국가의 왕세자라서 미토 고몬보다 더 무서운 존재인데, 안 덤비면 슈퍼로봇물이 안되니까 거의 자포자기 형태로 덤볐다가 깨지는 것을 반복했다.[18]
- 일본 밴드 센다이 카모츠의 노래 절교문(絶交門)의 MV에 이 이야기를 패러디했다. 절교문(젯코몬)과 코몬(黃門)의 음이 비슷하다는 걸 이용한 말장난
- 그래플러 바키에 등장하는 지하 격투장의 주인 겸 주최자 토쿠가와 미츠나리는 미토 고몬의 후손이라고 한다. 또한 작중에서 토쿠가와가 직접 설명하길 미토 고몬의 수많은 야사는 천하가 통일되고 전쟁이 없어지자 전쟁에서 활약하던 수많은 강자들이 사회적 위협이 되었는데 그런 이들을 원없이 싸우게 할 수 있는 지하투기장으로 스카웃하기 위한 여정이었다고.
- 신암행어사의 대장장이 미토는 이 미토 고몬을 모델로 한 캐릭터이다.
- 귀축왕 란스, 전국 란스에서는 제스 왕국의 국왕 라그나뢰크아크 슈퍼 간지가 국정은 4천왕에게 떠넘기고 이짓을 한다(...). 그 휘하에는 카오루 퀸시 카구라와 위치타 스케트가 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카쿠상과 스케상의 오마주. 왕국내에서 이 활동을 소재로 만화를 내고 있는데 제목은 정벌의 미토. 인기가 나름 상당해서, 제스 왕국 밖의 JAPAN에 사는 스즈메를 비롯해 꽤 많은 팬이 있는듯 하다.
- 누라리횬의 손자에도 등장한다. 여기서는 누라리횬의 바둑 친구로, 누라리횬이 성에 숨어들어서 억지로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누라리횬과 누라리한이 산모토 고로자에몬의 햐쿠모노가타리에 잠입하게 도와준다. 참고로 누라리횬은 친구의 흉내를 내고 싶었는지 누라리가의 외의 문장을 그려서 미토 고몬의 흉내를 내기도 했다.
- 에로게 장하다 천하공인의 미토 미츠키나 라이트 노벨 경계선상의 호라이즌의 네이트 미토츠다이라가 이 사람을 모델로 한 캐릭터.
- 우주해적 미토의 대모험 주인공인 미츠쿠니 미토의 이름부터가 (도쿠가와) 미츠쿠니 + 미토 (고몬)의 조어이며. 아들인 아오이는 접시꽃이니 도쿠가와 가문의 문장(紋章), 두 부관 스케사부로와 카쿠노신은 드라마상의 보디가드가 모티브이며, 키슈와 오와리는 역사상 미토와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직계자손에게 주어진 친번(親藩) 고산케(御三家)에서 유래한 것이다.
- 트랜스포머 슈퍼 링크에서 등장한 오토봇 스프렁이 미토 고몬 패러디. 온화하지만 싸움도 능한 노년전사인데다가 충성스러운 두 부하들도 있어 일본에서는 거의 맞다고 생각하는 듯. 그러나 전반적인 생김새는 이 트랜스포머의 오마쥬[19]여서 일본풍 디자인은 아니다.
- NHK 대하드라마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에서도 해설역으로 등장한다. 작중에서 시공간을 초월하여 주요 장면에 등장하기도 하고 자신의 아버지가 태어날 때도 아기인 아버지를 안아 보기도하며 이시다 미츠나리와 대화도 나누었다.[20] 가신인 스케사부로와 카쿠노신도 등장하는데 이 두 가신은 남장여자로서 미토 고몬이 역사는 공정한 시각에사 바라봐야 한다며 자신의 도쿠가와 가문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면 불경하다며 말리는 역할도 한다. 참고로 이 드라마에서 미토 고몬과 스케사부로, 카쿠노신의 만담도 상당히 재미있다. 마지막에는 맨 위의 복장을 하고 여행을 떠나려고 한다.
- 천외마경 지라이아의 초반 전개에서 등장하는 조연의 모티브. 대문교 13간부의 한명인 고몬에게 미토성에서 쫓겨나 츠치우라로 피난왔지만 평소 불의 용사의 전설을 믿고 있었고 마침 지라이아에게 고몬 토벌을 의뢰한다.
- 키테레츠 대백과에서 그의 인롱을 모티브로 한 발명품이 등장한다. 이걸 본 사람들은 절을 하며 이를 든 사람을 절대복종한다. 더빙판에서는 암행어사 마패로 로컬라이징 되었다.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
- 신장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천상기때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무장으로 등장.
- 달이 이끄는 이세계 여행의 등장인물 토모에가 이 사람의 팬이다. 위에 나온 클리셰를 일부로 따라할 정도. 그때문인지 애니메이션 1기 ost에 미토 고몬 드라마의 주제곡 편곡이 있다. ああ人生に涙あり 편곡
[1] 圀는 四안에 方자가 들어간 모양으로 당나라 측천무후가 만든 글자다. 달리 쓰인 예는 거의 없다 한다. 미츠(光)는 제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에서 딴 것으로 미츠쿠니가 7살 때 에도로 상경하자 하사받아 쓴 것이다.[2] 어르신, 일선에서 은퇴해서 조용히 살고 있는 노인을 칭하는 말이다.[3] 약 등을 넣고 다니는 휴대용 케이스. 미토 고몬의 상징과도 같은 아이템이다.[4] 미토 번은 그 애매하게 높은 이름값탓에 수도인 에도에 상시 머물러야 해서 대리인을 통해 대신 관리하고 있었다.[5] 도쿠가와 막부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친아버지다. 정치적으로는 번정개혁을 성공시킨 명군이자 막부 말 히토츠바시파를 주도하여 이이 나오스케와 대립한 사람으로 유명하지만 한편으론 호색한으로도 유명해서 선대 번주였던 형의 정실부인의 시녀나 자기 며느리를 건드렸다는 괴담이 일본 전국에 떠돌 정도로 악명높았으며 오오쿠의 낭비를 비난하는 한편 오오쿠 여성들에게 성희롱적인 발언을 일삼았던 탓에 오오쿠 여성들의 증오를 한몸에 받아 이후 아들인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쇼군 계승경쟁에 악영향을 끼쳤을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요시노부 외에도 자식이 엄청나게 많았으며 그 덕분에 요시노부의 이복 형제들의 상당수는 다른 가문의 양자로 들어가 번주직을 계승했는데, 그 중에는 히토츠바시와 함께 고산쿄의 일원이었던 시미즈가도 포함되어 있었다.[6] 아래쪽에서도 언급되는 미츠쿠니의 동복형 도쿠가와 요리시게의 후손이다. 쇼군가 및 다른 고산케가 혈통단절로 인해 다른 분가에서 양자를 들이는 사례가 굉장히 잦았던 것에 비해 미토 도쿠가와가는 요리시게의 친자식인 3대 번주 이래로 요리후사-요리시게의 혈통이 끊어지지 않은 채 메이지 유신을 거쳐 오늘날까지도 그 가계를 유지하고 있다.[7] 유키츠구의 부인 무사는 요리후사의 첫 유모였던 오카자키씨의 언니였는데, 요리후사가 5살이 되던 해 죽은 오카자키씨를 대신해 요리후사의 유모가 되었고 이때의 인연으로 유키츠구도 요리후사의 가신으로서 미토 번에서 봉직하게 되었다.[8] 요리후사 입장에서는 3남, 장남 요리시게와 미츠쿠니 사이에는 일찍 요절한 차남 카메마루를 포함해 5명의 이복남매가 있었다.[9] 다만 명목상으로는 차남취급이었지만 이후 쇼군을 대리하여 덴노를 알현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으며 다른 고산케의 지번이 약 3~5만석 전후 규모였던 것에 비해 교통의 요지였던 시코쿠 사누키 지방의 타카마츠번 12만석을 영지로 수여받는 등 실질적으로는 거의 장남에 준하는 후한 대우를 받았다.[10] 심지어 이 시기엔 이미 자신의 친아들이 멀쩡히 있었다. 즉 그 아이를 뒤로 두고 형의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겠다는 것이다.[11] 사실 아무리 후계자로 확정되었다곤 해도 미토 번주가 멀쩡히 있는 시점에서 후계자 문제를 독단으로 처리하긴 힘들었을테니 현실적으로 보자면 권력을 계승받고 완전히 안정시킨 2년후가 오히려 후계자 문제를 거론하기도 알맞은 타이밍이었다. 이를 보면 하루아침에 나온 이야기도 아닐테니 실제로 비슷한 시점에 맹약을 나누긴 했고, 권력을 안정화시킨 뒤 그를 실천했다고 하면 야사와도 어느정도 말이 맞는다.[12] 생뚱맞게 왜 갑자기 명나라 인물이 나오나 싶겠지만, 당시 남명은 실시간으로 청나라에게 당하던 시점이었고, 주지유는 남명의 구원요청을 위한 사자로서 일본에 파견되어 온 것이었다. 다만 당시 일본은 에도 막부에 의해 전토가 통일된 지 40년도 채 안된 시기라서 내부 수습에 아직 집중해야할 시기라서 지원을 보내지 못했고 조선은 병자호란 직후라서, 서양 각국은 거리와 청나라의 위세탓에 쉽사리 도우려 할 수 없었고 결국 사절을 보낸 나라중 그 어느 곳도 지원을 보내지 못한다는 사실에 절망한 주지유는 남명의 미래가 끝났음을 느끼고 그대로 일본에 망명했다.[13] 특히 위에 TBS판이 대표작이다. 그리고 아래 주제곡도 대표적이다.[14] 보통은 악덕 상인이다.[15] 흔히 나오는 전형적인 아쿠다이칸[16] 원문 越後屋、おぬしも悪よのう / いえいえ、お代官様ほどでは...[17] 여행의 막바지에 모닥불 피워놓고 과거 이야기를 각자 할때 무겐이 이야기를한다. 대사만 들은 후우와 진은 설마하지만, 무겐이 당시를 회상하는 화면을 보면 100%[18] 다만, 상술했지만 원작인 미토 고몬에서도 매우 드물게 미토 고몬의 정체를 알고도 악당이 덤비는 경우도 있었다.[19] G1 스프링어의 일본명이 스프렁이다. 그런데 스프링어라는 캐릭터가 여러 작품에 등장했던 것도 아니고, G1 이후 십수년만에 나온 같은 이름의 캐릭터이다. 사실 신 시리즈에서 전작 오마쥬가 나온건 슈퍼 링크의 전전작 트랜스포머 카로봇부터다. 슈퍼 링크에는 트랜스포머 더 무비의 오마주가 많은데 스프렁도 그 중 하나인듯.[20] 마지막화에서 이에야스한테 이걸로 덜미가 잡혀서 가독을 못 물려받을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