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0년대 에도의 지도 |
1. 개요
에도([ruby(江戸, ruby=えど)])는 도쿄도 구부 중앙부 지역의 옛 이름이다. 1603년부터 1868년까지 에도 시대의 일본을 다스리던 에도 막부가 위치한 도시였다. 언어로는 에도벤이 있다.2. 역사
원래는 무사시국(武蔵国) 도시마군(豊島郡)의 일부였으나[1] 에도 시대에 도시마군 남부지역(오늘날의 도쿄 도심지역)이 에도로 분리되었다.에도는 비교적 근세인 16세기 무렵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사의 변방 중 변방이었는데 이 일대에 약소하게나마 정치적 시설이 들어선게 오타 도칸이 15세기에 쌓은 에도성이었고 이마저도 도쿠가와 정권 이전까지는 일본 전역에 깔린 수많은 군사 거점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전근대 일본의 중심지는 오사카와 교토, 나라를 잇는 긴키(간사이) 지역이었고 간토는 비교적 변방이었는데 그 간토 내에서도 중심지는 가마쿠라 막부가 있었던 가마쿠라와 간토에서 가장 강대한 다이묘였던 후호조씨의 본거지인 오다와라였지 에도가 아니었다.
이 지역의 역사가 크게 바뀌게 된 계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미카와에서 간토로 전봉된 것이다. 이에야스는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에서 보여준 것처럼 당장의 군사력에서는 히데요시에 밀리지 않았으나 장기적인 전투 능력과 명분에서 밀려 히데요시에 복종했기에,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믿지 않았다. 그래도 히데요시에 일방적으로 밀리지는 않는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에 복종했으니 대우를 해줘야 할 필요는 있었다. 그 방법이 이에야스를 간토로 전봉시키고 고쿠다카를 크게 늘려주는 것이다. 당시 간토는 시골 동네인 데다가 후호조씨가 오랜 기간 다스린 곳이라 갑자기 넘어온 타지인인 이에야스가 이곳을 통제하기도 힘들 것으로 보였기에 이에야스를 보내서 힘을 약화시키기 위함이었다.
이에야스가 간토를 받았을 때 에도 일대는 오타 도칸이 만들었던 작은 성만 있는 촌구석에 불과했다. 염분기가 많은 수자원 탓에 넓은 평야에 비해 상대적으로 농업 생산량이 적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특히 기존 간토의 중심지인 사가미만 일대 대신[2] 도쿄만 깊숙이 위치한 에도 일대의 잠재력을 꿰뚫어보았다. 그리고 이에야스는 에도에 자리잡자마자 막대한 노력을 들여 이 일대를 개발했다. 간토평야 입구에 위치해 확장성이 떨어지는 가마쿠라, 오다와라보다 평야 한가운데에 위치한 에도가 중심지로서 적절했다. 또한 당시 일본 전역의 다이묘는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에 병력과 물자를 동원할 것을 강요받고 있었는데 단독으로는 히데요시보다도 높은 고쿠다카를 지니고 있던 이에야스 역시 수차례 출병할 것을 요청받았으나 이에야스는 에도의 개척 사업에 모든 역량을 동원하고 있었다는 핑계로 단 한명의 병사도 출전시키지 않고 버틸 명분을 얻었다. 이후 이 사안은 에도 막부가 창건된 후 조선과의 국교를 회복하는 데도 큰 효과를 보았다.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를 통해 일본 천하를 손에 넣은 이에야스는 자신의 근거지인 에도에 막부를 세웠다. 에도 시대에 막부가 위치한 에도는 일본 정치의 중심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에도 성은 쇼군의 거성(居城)으로, 에도는 막부 관청이 위치한 행정부의 주재지였다. 부요(武陽)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쇼군으로서는 한 번도 에도에 머무르지 않았다.[3]
에도 시대에 에도는 실질적 수도로서 막대한 번영을 누렸다. 인구가 무려 백만을 넘겨 최대 130만에 달했을 때도 있었다.[4] 이런 막대한 인구를 바탕으로 에도는 행정 중심지이자 전국의 물산을 소비하는 거대한 시장으로 기능하였다.[5] 한편 막부의 소재지로서 수많은 사무라이들이 쇼군을 보필하기 위해 거주한 특성상, 에도는 무사 계급의 비율이 두드러지며 상인들의 도시인 오사카, 공가 귀족들의 도시인 교토와 대비되는 무사들의 도시로서의 정체성이 자리잡혔다.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발표된 '에도를 일컬어 도쿄라 한다는 조서'[6]에 의해 '에도'는 '도쿄'[7]로 개칭되었고, 이어 천황의 도쿄 행차로 에도 성이 도쿄성(東京城)으로 잠시 개명된 후 현재의 고쿄로 이어진다. 이듬해 메이지 정부도 교토에서 도쿄로 옮겨져 행정수도격인 도시에서 일본의 사실상 공인 수도가 되었다.[8]
그러나 1923년의 간토 대지진과 1945년의 도쿄 대공습으로 도쿄는 두 번이나 쑥대밭이 되면서 고건축물의 대부분이 파손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도시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고도경제성장기과 맞물려 도쿄는 현대적인 건축물들이 절대다수를 이루는 도시로 재건되었으며, 결국 오늘날의 도쿄에서는 옛 에도의 분위기를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이러한 풍파에서 조금 빗겨나 있었던 도쿄 근교 지역에 에도 시대의 흔적이 더 많이 남아있다. 사이타마현의 카와고에시는 옛 에도의 분위기가 잘 보존되었다 하여 '작은 에도'라고 불리는데, 정작 진짜 에도였던 도쿄에는 이런 곳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3. 영역
'에도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도쿄'라고 하지만 메이지 시대 이후의 도쿄는 수도가 된 이후로 여러 차례에 걸쳐 근교 지역을 편입했기 때문에 에도와 지금의 도쿄의 범위가 일치하지는 않는다. 마치 지금의 '서울'과 조선시대 '한양'의 범위가 일치하지 않는 것과 같다.에도 시대 초기 에도의 범위는 지금의 치요다구와 그 주변으로, 에도 성 바깥 해자는 이를 둘러싸도록 만들어졌다. 메이레키 대화재 이후 시가지가 확대, 통칭 '808정'이라 불리게 된다. 1818년 '슈비키(朱引)'의 제정으로 인하여, 에도의 범위는 처음으로 정식으로 확정되었다. 현재 '오에도(大江戸)'라 불리는 곳은 일반적으로 이 범위이다.
당시 에도의 범위는 지금의 도쿄에 비해 좁다. 오늘날의 치요다구, 주오구, 미나토구, 분쿄구, 다이토구를 비롯하여 넓게 잡으면 고토구 일부, 스미다구 일부, 아라카와구 일부, 키타구 일부, 도시마구 및 이타바시구 일부, 시부야구 일부, 신주쿠구 일부, 시나가와구 일부까지 포함된다. 슈비키의 범위는 사리사방(四里四方)이라 불리며 동쪽은 히라이 주변, 서쪽은 요요기 주변, 남쪽은 시나가와 주변, 북쪽은 이타바시 주변까지다.
4. 기타
- 조선시대에는 한자를 그대로 읽어서 강호(江戶) 혹은 강호막부라고 불렀다. 중국에도 강호(江湖)라고 불리는 지역이 있으나 한자가 다르다.
- 일본에서는 에도 사람이 이기적이고 남을 배려하지 않는다라는 의미로 에돗코(江戸っ子)라는 표현이 있다. 한국으로 치면 '서울 깍쟁이'에 해당하는 표현.
- 도쿄의 옛 이름이라는 것에 착안해, 'I live in Tokyo.'를 과거형으로 쓰라고 했더니 'I live in Edo.'라고 썼다는 유머가 인터넷에 퍼져 있다.[9]
[1] 다만 현 도쿄 도심(미나토, 시부야, 지요다 일대) 일대는 원래는 에바라군 소속이었으나 이후에 도시마군에 편입되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긴 하다.[2] 북서쪽이 다름 아닌 후지산이 자리잡고 있는 산악지대라 개발 및 시가지 확장에 한계가 있었고 근처 해안은 수심이 얕아 해운에도 불리했다. 이미 가마쿠라 막부 시절에도 해상운송에 난항을 겪어 와카에지마(和賀江島)라는 인공섬을 만들어야 했을 정도.[3] 오랫동안 교토 니조성에 기거하고 있다가 에도로 돌아온 것은 보신전쟁의 도바 후시미 전투 이후의 일이었다.[4] 그 다음가는 도시로 에도와 함께 삼경(三京)으로 칭해진 오사카, 교토는 40만, 그 다음가는 도시인 가나자와, 나고야는 15만에 불과했다.[5] 오사카가 상업 중심지, 교토는 수공업의 중심지로서의 성격이 강했다면 에도는 오사카와 교토에서 온 물산을 소비하는 시장의 성격이 강했다.[6] 江戶ヲ稱シテ東京ト爲スノ詔書[7] 쿄(京)라는 명칭이 애초에 수도라는 뜻이기에, 동쪽에 있는 수도라는 뜻이다. 과거의 수도였던 교토보다 동쪽이니 동쪽으로 수도를 옮겼다는 뜻.[8] 극소수 논자들은 에도를 도쿄로 개칭했을 뿐 도쿄를 수도로 한다는 법령이나 조서는 없기 때문에 도쿄는 법적 수도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고쿄와 정부 기관, 외국 대사관이 도쿄에 상주하는 현실, 도쿄를 수도로 언급하는 수많은 법률을 보았을 때 이는 대단히 무리한 주장이다.[9] 한국으로 치면 '나는 서울에 산다'의 과거형으로 '나는 서울에 살았었다'가 아니라, '나는 한양에 산다'라고 대답한 것과 같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