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14 03:55:49

나가시마 시게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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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나가시마 시게오(長嶋 茂雄)
생년월일 1936년 2월 20일 ([age(1936-02-20)]세)
국적 파일:일본 국기.png 일본
출생지 지바현 인바 군 우스이 정[1]
학력 사쿠라 제1 고등학교(현 사쿠라 고등학교)-릿쿄대학
투타 우투우타
포지션 3루수
선수 경력 요미우리 자이언츠(1958~1974)
지도자 경력 요미우리 자이언츠 플레잉코치(1972~1974)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1975~1980, 1993~2001)
1958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신인왕
후지타 모토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와타 다케시
(다이요 웨일스)
1961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MVP
아키야마 노보루
(다이요 훼일스)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무라야마 미노루
(한신 타이거스)
1963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MVP
무라야마 미노루
(한신 타이거스)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1966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MVP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1968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MVP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1971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MVP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1963년 일본시리즈 MVP
도바시 마사유키
다네모 마사유키
(도에이 플라이어스)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조 스탠카
(난카이 호크스)
1965년 일본시리즈 MVP
조 스탠카
(난카이 호크스)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바타 이사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1969,70년 일본시리즈 MVP
다카다 시게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스에츠구 다미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역대 감독
카와카미 테츠하루
(1961~1974)
나가시마 시게오
(1975~1980)
후지타 모토시
(1981~1983)
후지타 모토시
(1989~1992)
나가시마 시게오
(1993~2001)
하라 다쓰노리
(2002~2003)
올림픽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역대 감독
오타가키 고조[2]
(2000 시드니)
나가시마 시게오
(2004 아테네 예선)
나카하타 키요시
(2004 아테네 본선)[3]

요미우리 자이언츠 영구결번
1 3 4 14 16 34
오 사다하루 나가시마 시게오 쿠로사와 토시오 사와무라 에이지 카와카미 테츠하루 카네다 마사이치


1. 소개2. 선수 시절3. 은퇴 이후4. 트리비아5. 가족관계6. 관련 문서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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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B 역대 최고의 스타이자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상징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前 야구 선수 겸 감독. 팀 동료이자 잠재적 라이벌이었던 오 사다하루, 카와카미 테츠하루와 함께 일본 야구를 대표하는 불멸의 대스타로 평가받는 인물. 그의 대중적 인기는 놀라울 정도여서 선수 시절부터 지금까지 일본의 국민적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다. 그의 등 번호 3번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영구결번.[4] 통산 성적은 왕정치, 장훈, 노무라 카츠야등에게 밀리지만 최고 명문팀의 중심타자로 그들을 능가하는 인기를 누렸고 비교적 빠른[5] 은퇴를 했다는 점에서 조 디마지오와 비슷한 점이 많다.

소년 선데이의 창간호 표지를 장식하였다.

별명은 미스터 베이스볼. 위 별명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전설, 스탠 뮤지얼의 별명이기도 하다. 또는 미스터 자이언츠. 이 별명은 요미우리 사상 최고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그를 기념하는 말이다.

1958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해 데뷔 첫해에 153안타, 29홈런, 92타점으로 타격 3관왕에 오르며 신인왕을 수상. 스타덤에 올랐다. 그의 3루 수비는 발군이었고, 1974년까지 타격왕 6회, 홈런왕 2회, 타점왕 5회, 베스트 나인(한국으로 따지면 골든글러브) 17회를 수상했다. 베스트 나인 17회도 대단한 기록이지만,[6] 타격왕 6회는 충격과 공포다. 한국에서 타격의 신으로 통하는 장효조와 양준혁이 4회, 이대호가 3회인 것에 비교하면 대단한 기록. 그러나 장훈이 7회, 특히 이치로가 7년 연속 타격왕을 달성하면서 위치가 미묘해졌다. (물론 장훈과 이치로는 홈런왕은 한 번도 없다.)

2. 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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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시절X맨.. 물론 다리가[7][8]

대학 졸업 후 동기이자 언더핸드 스로 투수로 유명한 스기우라 타다시와 당초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할 예정이었으나 결국 나가시마 혼자만 교진군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는 릿쿄 대학의 합숙소 식당에서 스기우라의 난카이 입단 제의에 거절했다는 것을 고백하기도 하였다. 이후 스기우라는 그대로 난카이에 입단했고, 나가시마는 시범경기 도중 난카이의 감독인 츠루오카 카즈토에게 직접 찾아가 난카이 입단을 거부한 것에 대해 사과했다. 이에 츠루오카 감독은 "간토 출신 사람은 간토 지방 연고팀에 들어가야지" 라고 웃으며 쿨하게 사과를 받아들였다. 대학 졸업한 해인 1957년 11월 20일부로 요미우리에 전격으로 입단하면서 등번호는 치바 시게루가 달았던 3번으로 배정을 받았고, 계약금은 당시 최고 금액이었던 1,800만엔이었다.

도쿄 6대학 리그에서의 맹활약했던 것을 발판 삼아 입단 당시부터 골든 보이(ゴールデンボーイ), 또는 허리케인(ハリケーン)이라는 별명이 붙여지는 등 많은 기대를 받았다. 1958년 4월 5일, 개막전인 고쿠테츠 스왈로즈와의 경기에서 3번 타자로 선발 출장해 개막전 데뷔를 완수하였지만 고쿠테쓰의 에이스 투수인 가네다 마사이치로부터 4타석 연속 삼진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고[9] 다음날의 경기에서도 역시 상대 투수였던 가네다에게 삼진을 당했다. 그러나 2일 후인 4월 7일 고쿠테쓰전에서 첫 안타를 기록하는 것을 시작으로 4월 10일의 다이요 웨일스전에서 첫 홈런을 기록하여 본래의 힘을 발휘했다. 시즌 도중부터 현역 시절 4번 타자로 활약하면서 감독으로 지휘봉을 잡은 가와카미 데쓰하루를 대신하는 4번 타자가 되면서 팀의 리그 우승에 공헌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19일에 행해진 히로시마 카프전에서 신인 신기록(당시)이 되는 28호 홈런을 때렸지만, 1루 베이스를 실수로 밟지 않은 바람에 결국 홈런이 취소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당시 기록은 투수 땅볼이었음). 만약 1루 베이스를 밟았다면 신인으로서의「트리플 스리(타율 3할, 홈런 30개, 30 도루)」의 기록이 달성될 수 있었다. 덧붙여 나가시마는 다음 9월 20일에 있은 오사카 타이거스전에서 28호 홈런을 기록하여 신인 신기록을 달성했다.[10][11]

이로써 데뷔 첫 해인 1958년 시즌의 타격 성적은 홈런 29개, 92타점, 3할 5리의 타율과 153안타였다. 타격왕 타이틀 자리를 놓고 오사카 타이거스의 다미야 겐지로와 경쟁을 하였지만, 다미야가 시즌 종반에 결장하는 동안 전 경기 출장을 계속하던 나가시마는 타율이 떨어지면서 최종적으로 타격 2위인 3할 5리에 그쳤다. 그러나 나가시마는 시즌 최다 안타를 기록하는 한편 도루 부문에서도 리그 2위인 37개를 기록하여 신인왕 타이틀을 석권했다. 153안타는 2019년 한신 타이거즈의 신인 외야수 치카모토 코지가 159안타로 갱신하기 전까지 반세기 넘게 센트럴리그 신인 최다안타 기록이었다.

1962년에는 팀 내 절친한 사이이자 동고동락을 하며 지내온 오 사다하루가 홈런왕과 타점왕 등 연거푸 타이틀을 기록하여 오 사다하루와 함께 팀 타선의 주축이 된 일명 ON포(오 사다하루와 나가시마의 영문 이니셜)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로 인해 메이저 리그인 뉴욕 양키스의 미키 맨틀로저 매리스가 MM포에 비유되기도 했다. 나가시마는 이 애칭의 표현대로 요미우리의 간판 4번 타자로 맹활약을 했다. 1965년~1973년에는 오 사다하루, 다카다 시게루, 시바타 이사오, 가네다 마사이치, 호리우치 츠네오, 모리 마사히코 등과 함께 팀의 일본 시리즈를 9년 연속 우승(일명 V9) 하는 쾌거를 이루어내 팀의 우승 멤버 중 한 명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1971년에 통산 6번째의 타격왕 타이틀을 획득한 이후 이듬해인 1972년에 갑작스런 타격 부진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타석수를 늘리는 등 부진을 극복하려고 생각한 카와카미 감독은 나가시마의 타순을 1번으로 하는 등 특단의 대책을 세웠지만 결과적으로 타격 21위인 2할 6푼 6리의 타율과 27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또, 14년간 팀의 감독을 맡은 카와카미의 후계자로서의 기대가 커지면서 코치를 겸임하는 등 현역 은퇴 후의 진로가 정해졌다.[12] 1972년~1973년에는 2년 연속 골든 글러브 상을 수상했고, 프로 선수로서의 나가시마는 타격 뿐만 아니라 3루수로서의 수비도 큰 주목을 받았다.

1974년 10월 12일, 주니치 드래곤즈가 리그 우승을 제패하면서 팀은 10년 연속 리그 우승과 더불어 일본시리즈 진출-우승에 실패했지만 나가시마는 현역 은퇴를 표명했다.[13] 그 후 10월 14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리그 우승팀 주니치와의 더블헤더 1차전에서 홈런을 기록, 이것이 자신의 현역 생활 마지막 홈런(통산 444호)이었다. 은퇴 기념식에서 "저는 오늘 은퇴하지만 우리 자이언츠는 영원히 불멸입니다!(私は今日引退をいたしますがわが巨人軍は永久に不滅です)"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또, 대졸 출신으로서의 통산 2471안타는 일본 최다 기록을 수립해 개인 통산 2186경기 출장, 2471안타, 444홈런, 1522타점, 타율 3할 5리의 통산 성적을 기록해 선수 생활을 은퇴하여 가와카미 감독의 사임으로 차기 감독으로 취임했다. 선수 시절 센트럴 리그 최우수 선수(MVP)를 5차례 석권한 것을 포함해 1959년~1961년에는 센트럴 리그 타이 기록인 3년 연속 타격왕에 등극하는 위업을 달성, 일본 시리즈 MVP를 일본 프로 야구 사상 4차례를 석권하는 등 요미우리의 대표적인 간판 타자로서의 숱한 대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3. 은퇴 이후

1974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뒤, 이듬해인 1975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감독으로 취임해 두 차례에 걸쳐 감독을 지냈고 5번의 센트럴 리그 우승과 2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끈 뒤 2001년 용퇴했다. 이 후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다가 2004년 3월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야구계를 떠났다.

다만 1970년대의 1기 감독 시절 땐 각각 6-1-1-2-5-3의 성적을 찍었는데 그 V9으로 대표되는 자이언츠의 전성기에 비하면 그닥 좋다곤 볼 수 없었다. 특히나 취임 첫해인 1975년의 리그 꼴찌는(그것도 창단이래 최초였다!) 그야말로 나가시마에겐 빼도박도 못하는 흑역사. 덤으로 이 해 10월 15일엔 홈구장에서 4-0으로 떡실신당하며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첫 리그 우승을 허용한다.[14]] 이게 어느정도나면 1975년 말 일본 언론사들이 꼽은 올해의 10대 뉴스에서 압도적 1위를 차지하셨다. 사이공 함락, 킬링필드의 시작, 지명타자 제도 도입, 한큐 브레이브스일본시리즈 V1, 히로시마 도요 카프센트럴리그 V1를 모두 묻어버린 나가시마의 위엄.[15] 참고로 교진이 최하위를 한 해는 이 해(1975년)가 유일하다! 즉 나가시마는 교진의 역대 감독 중 유일하게 최하위를 찍은 감독인 것이다(...)[16] 심지어 이 최하위는 간사이의 경쟁팀이자 안죽이고 못 사는 앙숙관계인 한신 타이거스보다도 더 먼저였다!(...)[17] 그 덕택에 이해엔 여러모로 안 좋은 기록을 많이 찍었다. 양대리그 이래 구단 역사상 최악의 승률이자 유일한 3할 승률인 .382와, 구단 사상 최고기록인 우승팀과의(이해는 상술했다시피 히로시마 도요 카프) 게임차 27게임, 무엇보다도 이해 찍은 팀 안타 987안타현재까지 마지막 일본프로야구의 3자릿수 팀안타 기록이다(...).

그래도 다음해와 다다음해인 1976~1977년 2년 연속으로 리그 우승을 달성했으나, 문제는 일본시리즈에서 과거 V9 시절 5차례나(67~69, 71~72) 일본시리즈 우승의 제물로 삼았던 한큐 브레이브스에게 2년 연속으로 깨졌다(...) 그 뒤론 재임기간 내내 한번도 리그 우승을 하지 못하고, 거기다가 지휘력에 관한 논란과 여러 구설수까지 나오게 되며 결국 나가시마는 1980년에 해임된다.[18]

그 뒤 해설가 등으로 일하다가[19] 1993년 다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감독이 되었다. 그 뒤 사임하는 2001년까지 리그 3-1-3-1-4-3-2-1-2위[20]의 준수한 성적을 기록하며 1997년을 제외한 나머지 연도 때 팀을 전부 A클래스로 올려놨다. 거기다 1994년, 2000년엔 1기 감독 시절 이루지 못한 일본시리즈 우승도 했다.[21][22][23]

1975~1980 1기 감독 시절에는 등번호로 90번,[24] 1993년부터의 2기 감독 시절에는 자신의 현역 시절 영구결번 3번이 두 개 들어간 33번을 사용했다.[25] 2000년부터는 히로시마에서 강타자 에토 아키라를 영입할 때 그가 히로시마에서 쓰던 33번을 넘겨주고 자신은 현역 시절의 3번을 사용했다. 스프링 캠프에서 현역 시절과 똑같은 3번이 박힌 유니폼을 점퍼 속에 최대한 숨기다가 3번 유니폼을 입은 모습이 보고 싶다는 여론이 고조될 때 '짠~' 하고 공개를 해서 당시 전 일본이 장안의 화제였다. 나가시마의 현역 시절을 기억하고 있던 올드 팬들에게는 그야말로 감격 두 배의 순간. [26]

2001년까지 감독생활 후 은퇴함과 동시에 종신 명예 감독으로 승진했고, 수석코치로 후계자 수업을 받은 하라 타츠노리가 나가시마로부터 감독을 물려받아 2002년부터 2003년, 2006년부터 2015년, 2019년부터 현재까지 감독을 맡고 있다[27] 2016년 시즌부터 2018년 시즌까지 타카하시 요시노부가 교진군의 감독을 맡았고 나가시마 1기 시절을 연상시키는 불안한 경기운영으로 팀을 전투력 측정기로 전락해버렸다.

2013년, 제자인 마쓰이 히데키와 함께 일본 최대의 영예인 국민영예상을 수상했다.

실명으로 타이거 마스크 II세에 등장한 적이 있다. 어? 또한 사무라이 자이언츠에도 가와카미 감독과 왕정치 그리고 가네다 마사이치와 더불어 등장한 적이 있다.

4. 트리비아

현역 시절 한신 타이거즈에이스 무라야마 미노루 와는 불꽃튀는 라이벌 관계로 유명했다. 나가시마는 무라야마를 상대로 통산 302타수 85안타, 타율 0.281, 21홈런, 39삼진을 기록했는데, 무라야마 에게 프로 통산 1500 탈삼진(1966년 6월 8일), 2000 탈삼진(1969년 8월 1일)을 헌납하기도 했다(...). 사실 이 라이벌 관계는 무라야마가 고교 졸업 후 릿쿄 대학이 자신의 영입을 거부한 것에 대해 원한을 품은 것을 릿쿄대의 스타인 나가시마에게 발산한 것에서 비롯된 것인데, 정작 나가시마는 당초 무라야마에게 아무런 해코지를 한 적이 없었으니... 이뭐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화풀이도 아니고 그러나 나가시마와 무라야마는 인간적으론 서로 호감을 넘어서 존경하는 사이였고, 무라야마는 평소에 나가시마를 언급할 때 언제나 이름에 "상(さん)"을 붙이며 예우 하였으며, 나가시마 또한 무라야마에 대해 "그는 나에게 한번도 빈볼이나 위협구를 던진 적이 없다. 무조건 정면 승부였다" 라면서 대놓고 그의 인간성을 칭찬하길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1998년 8월 22일, 무라야마가 직장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나가시마는 원정 경기 중임에도 먼 길을 마다않고 빈소를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고인을 애도한 바 있다.

요미우리뿐만 아니라 프로야구계에서 큰 형님 격이다 보니 선수들부터 코칭스태프까지 물론 무슨 고민이 생기면 나가시마에게 먼저 조언을 구하는 경우가 많다. 나가시마가 하는 말이 거의 맞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호시노 센이치에게 일본프로야구 인기 상승을 위하여 한신 감독 자리를 권유한 사람이 바로 나가시마 시게오.

나가시마 등장 이후 일본 만화나 게임에서 3루=슬러거 클리셰가 되었다.대표적인 예로 터치닛타H2히데오.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 2016의 파워페스모드에서도 체감 할 수 있다. 3루 강타자는 오오조라, 반도, 토죠, 후쿠야, 라이고우, 사장 등등 무수하게 나오지만 1루 강타자는 결승전인 서강대학에 나오는 키요모토와 타키모토밖에 없다. 그마저도 이 둘의 서브포지션의 3루수... 1루자원의 부족은 후속작인 2018에서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

야구 선수 외적으로도 독특한 캐릭터성으로 유명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건망증과 기상천외한 언어 생활, 그리고 4차원적인 성격을 꼽을 수 있다. 건장한 체격, 남자다운 외모와는 달리 하이톤의 목소리로 여자같이 사근사근하게 말하는 것 자체도 웃긴데, 말의 내용도 정체불명의 의성어의태어, 상황에 맞지 않는 외국어의 남용, 앞뒤 안 맞는 문장들로 범벅되었기 때문에 그의 언어는 예능 프로그램의 소재로 이용되곤 했다. 그의 기행들을 몇 가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비싼 돈 주고 BMW 승용차를 구입했지만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지 않고 '핸들이 무거운데?'라고 생각하며 달리다 엔진에 불이 붙어 열흘도 안 돼 폐차!
  • 위의 사건 이후 구단에서 선수 보호 차원으로 나가시마에게 운전을 금지시키고, 선배의 차를 타고 출퇴근할 것을 지시. 그러던 어느 날, 선배의 차를 타고 귀가하던 나가시마는 집에 도착하자 운전을 해준 선배를 보며 말했다. "얼마에요?"
  • 경기를 마치고 집으로 가야 하는데 자기 집을 몰라서 당황한 나머지 공중전화로 자기 집에 걸어 가정부에게 말했다. "저희 집이 어디였죠?" 그나마 자기 집 전화번호는 기억하고 있군
  • 후배에게 만 엔짜리를 주고 음료수를 사오라고 하고, 후배가 음료수를 사오고 거스름돈을 주자 놀란 눈으로 물어보며 하는 말. "어? 잔돈이 있었어? 내가 천 엔짜리 주지 않았던가?"
  • 팬과의 대화를 하다가 한 열혈 팬이 '저는 나가시마 선수와 생일이 똑같습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생일이 몇월 며칠이신데요?'
  • 생일날 홈런을 친 동료 선수에게 '난 생일날 홈런를 친 적이 없어'라며 부러워했다. 위 프로필에 나와있듯 나가시마의 생일은 비시즌기간인 2월. 그러니 생일날 경기에서 홈런을 칠 일이 있을 리 만무했다.
  • 경기 중 타임을 요청하고 '대타 고토!'라고 외쳤지만, 고토[28]는 이미 루상에 나와 있는 주자였다.
  • 성적 부진으로 해임된 뒤 12년 뒤 다시 앉은 요미우리 감독에 올랐을 때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한 말. "나는 12년 간 누전하고 있었습니다."
  •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예선 때 일본 대표팀 감독임에도 한국 대표팀 선수들의 타격을 봐 준 적이 있다. 나가시마의 건망증 탓에 팀을 혼동해서 한국 팀 선수들을 가르쳤다는 얘기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우스갯소리이고 애초에 나가시마는 자기 팀이건 다른 팀이건 가리지 않고 타격에 대해 가르쳐 주는 것을 좋아하는 야구인이다. 어째 이 양반과 캐릭터가 겹치는 듯 싶다?[29] 타격 지도 시에는 매우 열성적으로 가르치지만 알 수 없는 의성어를 써 가며 가르치기 때문에 지도받는 타자는 뭔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 불펜에서 투수에게 몸을 풀라고 하고는 경기가 끝날 때까지 투수교체를 하지 않아, 불펜에 있는 투수는 주구장창 연습볼만 던지다 어깨에 과부하가 걸려 실신. 나가시마는 그제서야 자기가 투수교체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됨.[30]
  • 투수에게 "포크야 포크!"라고 고래고래 소리지름. 당연히 홈런 맞음. 홈런 맞은 후엔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후일담이(...).
  • 번트하는 흉내를 내며 "대타! 우에다!" 당연히 실패. 나가시마는 경악, "사인이 읽히고 있는 건가!"
  • 대타를 내세우면서 "번트! 도이!"라고 외침.
  • 타격 지도에 관한 지론: "공이 '븃' 하고 날아오면 '바싱' 하고 친다." → 한국식으로 번역하면 코치를 하면서 선수에게 "공이 '휙' 날아오면 '딱'하고 때리면 돼"라고 말하는 식이다. 이러니 당연히 못 알아들을 수밖에 없다.[31]
  • 아테네 올림픽 감독 중 일본 팀이 위기에 처하자 투수 교체를 시도. 누가 나갈까 코치들에게 물어보며 덕아웃을 둘러보던 중 오노 유타카가 눈에 띄자 "음, 오노, 오노 나가라!"고 외침. 그런데 오노 유타카는 대표팀의 투수코치였다. 뭐지 이건...
  • 위의 아테네 올림픽에서 이어지는 에피소드. 등판 지시를 받은 오노 코치는 당연히 "감독님, 전 던질 수 없습니다."라 대답. 이를 들은 나가시마는 "에, 오노 (웜업 아직) 되지 않은 거냐?" 라고 대답해 버렸다... 간신히 정줄을 잡고 있던 오노가 다시 "미스터(실제로 이렇게 불렀다. 위의 미스터 베이스볼의 줄임말), 저는 코치라서..."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나가시마 왈 "코치는 못 던지는 거야??" 오노 유타카 의문의 플레잉코치 선임[32]
  • 대학교에서 영어 시험을 보는데 "I live in Tokyo(나는 도쿄에 살고 있다.)"를 과거형으로 바꾸는 문제가 있었다. 나가시마가 쓴 답은 "I live in Edo(나는 에도에 살고 있다.)[35]
  • 1973년 골든 위크경기장에 아들 카즈시게를 데리고 갔는데, 집에 와 보니 아내가 카즈시게는 어딨어요? 라고 물었다. 즉 아들을 데려온 것을 잊어먹고 경기장에 두고 온 것!(...)[36] 경기장으로 돌아가 보니 아들은 다행히 심판실에서 보호를 받고 있었다는 후문.
  • 매일 가던 사우나를 아침 8시에 감. 참고로 그 사우나의 개점시간은 오전 11시. 근데 일단 들어가긴 한 듯하다(...).
  • 사우나 가서 샤워하는데 거품 씻는 걸 잊고 그대로 욕탕에 들어갔다. 당연히 욕탕은 거품범벅.
  • 1기 감독 시절 원정경기를 하러 우에노역에 차를 타고 갔는데, 차 시동을 끄지도 않고 내려서 그대로 가버렸다!!! 거기다가 집에 올 때도 차를 타지 않고 돌아왔다!!(...) 근데 집에 돌아오고 나서 나가시마는 차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근데 나가시마는 "내 차 없는데..?" 라고 아내에게 말하고.. 아내가 나가시마가 차를 끌고 갔다고 일깨워주자 나가시마는 "증말?" 이라 하며 의아해했다는 후문. 아니 이 양반, 아니 거인이(...).
  • 여러 의성어, 외래어를 남발하는 걸로 유명했지만, 그 중 유명한 건 하나(ひとつ)[37]라는 단어를 수도 없이 남발한 걸로 유명하다(...). 나가시마의 말의 대부분엔 무조건 들어가 있었을 정도. 덕분에 질문 시간 때 어떤 꼬마에게 "그거 말버릇이냐" 며 일침을 당했다(...) 그리고 나가시마는 "제 흉내를 내는 분이 계시네요. 그 분의 하나의(ひとつの)"라고 화답(?)했고 좌중이 웃음바다가 되었다는 훈훈한(?) 후문.
  • 위에 나온 마키하라 히로미가 1993년 시즌 오프 때 고향에 있는 주니치 드래곤즈로의 이적을 염두에 두고 FA를 선언하자[38] 나가시마가 직접 장미꽃 20송이를 들고 찾아가 잔류를 부탁하여[39] 결국 마키하라는 교진에 남았는데, 이게 뭐가 문제냐면 주니치 드래곤즈의 에이스 투수 등번호가 다름아닌 20번이라는 것(...) 물론 일부러 그러진 않았겠지만..
  • 가장 압권인건 본인이름을 나가시마 시게루라고 하질 않나

그 외 다양한 일화는 이곳을 참조. 대체 이렇게 맹한 사람이 어떻게 감독으로서 우승까지 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 생길 정도의 일화들이 많다. 이제 곧 여든을 바라보는데 치매 생기시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음반 레코딩에 참여한 적이 있다. 1993년에 발매된 ZYYG, REV, ZARD&WANDS의 싱글 果てしない夢を에 게스트 보컬로 참여한 것. 후반부의 후렴구를 반 소절 정도 부른 게 전부지만 임팩트는 강렬하다(...) 싱글 앞표지 구석에도 조그맣게 사진이 실렸는데, 레코딩 중에 찍었는지 마이크 앞에서 헤드폰도 착실히 끼고 있다(...).

5.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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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는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인 나가시마 카즈시게(長嶋一茂)[40]도 야구선수였다. 릿쿄대를 졸업하고[41] 1987년 신인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지명되었으나 영 좋지 않은 컨택능력과 불성실한 훈련태도로 노무라 카츠야 감독에게 찍혀[42] 1993년 아버지가 감독으로 다시 부임한 요미우리에 트레이드되었다. 그러나 요미우리에서도 활약이 미미했고[43] 1996년 수비 코치였던 도이 쇼죠[44]에게 폭언을 하는 등 아버지 이름에 먹칠만 하다가 결국 1996년 방출, 그대로 은퇴했다.

은퇴 후엔 야구평론가 및 배우로 활동 중이다. 특이사항으로 한신 타이거즈를 소재로 한 영화에서 주인공으로 출연한 적이 있는데, 2002년 3월 23일에 개봉한 미스터 루키(ミスター・ルーキー)라는 영화가 그것. 또 다른 사건은 2012년 12월에 터졌는데(2014년 8월말 주간문춘에 의해 공개), 카즈시게의 딸이 여배우 에스미 마키코 (江角マキコ)의 딸과 불화가 있어 마키코가 매니저에게 지시해 휴가를 간 카즈시게의 집에 온통 낙서를 하게 한 일이 있다. 이 일은 이전에도 구설수로 말이 많았던 마키코의 몰락에 결정타가 된다.

MAGIC KAITO 11화에 출연해 홈런을 때려낸 일이 있다.

차남인 마사오키는 환경문제 연구가, 딸인 미나는 스포츠 캐스터를 맡고 있다.

자녀들간의 불화가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폐렴, 황달로 입원한 아버지를 두고, 장남인 카즈시게(52세)와 차녀 미나(50세)의 대립이다. 미나가 병실을 지킬 동안 카즈시게는 한 번도 병문안을 오지 않았으며 아버지의 건강 상태를 주변인으로부터 듣고 회복됐다고 판단하여 하와이로 출국했다고 한다. 남매의 대립이 표면화된 것은 2009년으로 아버지의 기념품과 추억의 물건들을 카즈시게가 마음대로 매각한 것에 미나가 격노했고 카즈시게가 대표를 맡고 있는 회사에서 '나가시마 시게오' 상표권을 가족 몰래 등록했던 것이 발각되었다. 남매의 관계는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됐으며 이런 소동이 일어난 뒤 미나는 "내가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나가시마 집은 안된다"며 변호사를 선임했다고 한다. 카즈시게는 "원래 우리 집은 제각각입니다. 저는 중학교 때부터 집에서 살지 않았고 동생도 미국으로 갔습니다. 동생의 행방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동생(장녀)도 1년에 한 번 만날 뿐입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는 제각각이므로 원래의 가족과는 단절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말이야 방구야 라고 말했다.

여담이지만 카즈시게는 가키노츠카이라는 심야예능의 연말 특집에 등장해 2020년을 앞두고 큰 웃음을 주었는데 이때 어떻게 등장했는지만을 보더라도 상당히 빵터질것이다(...) 사람이 어쩜 망가져도... 게다가 본인 딸과의 낙서 에피소드를 개그소재로 써 셀프디스를 하기도...

6. 관련 문서




[1] 현재의 지바현 사쿠라시. 정작 사쿠라시는 닛폰햄의 2군 구장인 카마가야 파이터즈 스타디움과 가깝다.[2] 사회인야구 도시바 감독. 이 때까지만 해도 일본야구계은 아직 프로와 아마추어 간의 감정의 골이 깊고 서로의 영역에서 철밥통을 지키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을 때였다. 대표팀과 올림픽 출전을 주관하는 것은 아마추어 쪽인 일본야구협회 쪽이었고 프로는 일본 야구계의 숙원인 올림픽 금메달 획득을 위해서 일종의 조력자로서 선수들을 파견하는 형태로 대표팀이 구성되었기 때문에 감독은 아마추어 쪽에서 선발했다. 그러나 사회인 야구 중심에 선수차출을 거부한 센트럴리그를 제외하고 퍼시픽 리그 6팀 중에서 1명씩 차출해서 어정쩡하게 프로아마 혼성팀을 구성해서 출전했던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금메달은 커녕 에이스라고 믿었던 마쓰자카 다이스케이승엽에게 역전타를 맞는 등 프로 주도로 대표팀을 구성한 한국 대표팀에게조차 패하면서 노메달에 그치자 다음 대회부터 대표팀 구성체계를 일신하고 완전히 프로 주도로 대표팀을 구성하게 된다.[3] 일본 국내에서는 여전히 나카하타는 감독대행 취급이고 나가시마 시게오를 감독으로 간주하고 있다.[4] 흥미롭게도 미국 메이저리그 최고의 스타 베이브 루스의 등번호이기도 하다.[5] 은퇴 당시 나이가 39세로, 보통 스포츠 선수들이 30대에 접어들면서 노쇠화가 찾아오며 30대 후반~40대 초반을 기점으로 은퇴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그렇게 빠르다고 보긴 힘들겠지만, 선수 말년의 그의 성적이나 기량은 젊은 선수들 사이에서도 충분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다.[6] 그것도 현역이었던 17년의 기간 동안 매년(!!!) 획득한 것이다. 데뷔 때부터 은퇴 때까지 전부 베스트나인을 수상한 건 나가시마가 유일하다.[7] 풀스윙하다 헛스윙 후 스텝이 꼬인 모습이다.[8] 굉장히 유명한 사진으로, 이 사진을 모티브로 한 스태츄도 발매된 바 있다. 파일:attachment/nagashima.jpg모자는 뭐지 클리어 부품으로 고정시키고 찍은후 포토샵으로 지운거다.[9] 가네다 마사이치는 귀화한 재일교포 선수인데, 당시 언론에서 '가네다도 나가시마에게는 상대가 안 될 것'이라며 나가시마를 띄워준 데 열받아서 '그런 애송이한테 당하면 이 가네다의 이름이 운다. 전 타석 삼진으로 때려잡아 프로의 매운 맛을 보여 주겠다.'라고 말했고... 그의 호언 그대로 그대로 나가시마는 자신의 프로 데뷔전을 4연타석 삼진으로 즈려밟혔다. 가네다는 경기 전 인터뷰에서 직구만으로 나가시마를 상대해주겠다고 해 놓고 경기에선 커브로 삼진을 낚는 약간의 꼼수를 부리기는 했다. Welcome to NPB[10] 현재 NPB 신인 홈런 기록은 1959년의 쿠와다 다케시와 1986년 기요하라 가즈히로가 각각 기록한 31개.[11] 나가시마 이후 현재까지 센트럴 리그에서 30개 미만의 홈런을 쳐서 홈런왕을 수상한 선수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12] 다만 메인 타격코치는 야마우치 카즈히로. 87년에 다시 재부임해서 89년 일본시리즈 역스윕에 일조한다.[13] 같은 해 포수 모리 마사히코도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14] 참고로 이 날 패전투수는 다름아닌 니우라 히사오(김일융)였다.(사실 이 날 성적은 5.2이닝 1실점으로 꽤 호투했지만 물방망이 타선 때문에 결국..)[15] 뭐 굳이 최하위에 대해 이해를 해주자면 당시 거인은 나가시마 본인과 명포수 모리 마사히코, 유격수 구로에 히로유키의 은퇴로 인해 내야진이 오 사다하루를 제외하고 모두 물갈이가 불가피했는데, V9으로 인한 드래프트 하위 순번 배치+"유구치 사건"(상세 내용은 카와카미 테츠하루 항목에 기재) 등으로 인해 내야진이 급속도로 헐거워졌다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10년 선수 제도의 폐지도 교진의 내야진 악화에 일조했다고 이전 문서에 적혀있었지만, 10년 선수 제도가 폐지된 건 1976년부터이고, 이 제도로 교진이 선수를 영입한 사례는 가네다 마사이치가 유일한 데다, 성적을 보면 10년 선수제도 폐지 이후가 오히려 더 좋다.[16] 그리고 메이크 드라마를 찍은 1996년 시즌의 다음 해인 1997년, 제대로 폭망하면서 8월말까지 최하위를 찍었다가 9월 이후 분전하면서 주니치, 한신을 제치고 간신히 4위로 올라섰는데 이때 감독도 나가시마였다(...) 하마터면 구단 역사상 최하위 두번찍은 유일한 감독 될뻔했다.[17] 한신은 1978년 고토 츠구오 감독이 41승 80패 9무 승률 .339를 찍으며 구단사상 최초로 최하위로 전락했다. 그러나 한신은 이후 1987년~2002년까지 암흑기를 겪으면서 이 기간동안 10번이나 최하위를 찍으며 안될 팀은 안된다는 것을 보여줬다(...) 참고로 마지막 3년연속 최하위는 교진을 죽도록 디스하는 거로 유명한 N모 독설가 할배께서 찍었다[18] 이것은 모회사인 요미우리 신문에 위기를 불러온다.나가시마의 해임에 격분한 팬들이 요미우리와 스포츠호치를 불매하는 운동을 벌였기 때문.아래서 설명할 종신 명예 감독직은 이 때 학을 뗀 요미우리가 고심 끝에 내린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19] 이 시기에 요코하마 다이요 훼일즈, 세이부 라이온즈, 야쿠르트 스왈로즈, 치바 롯데 마린즈간토 지역 구단의 감독직 제의를 한 차례씩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였다.[20] 굵은 글씨 1은 일본시리즈 우승년도의 성적.[21] 1994년 일본시리즈 우승은 주니치 드래곤즈와 리그 우승을 걸고 치룬 10.8 결전이 유명하다.[22] 특히 2000년 일본시리즈 우승은 오 사다하루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를 4승2패로 무찌르고 달성했는데, 이 일본시리즈는 나가시마와 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식전에서 감독으로 맞붙은 것으로(교류전은 2005년부터 도입되었고, 나가시마는 2001년 은퇴) 일본 대중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일명 ON 시리즈.[23] 그러나 1996년엔 스즈키 이치로, 다구치 소, 히라이 마사후미 등을 필두로 한 오릭스 블루웨이브에게 4승1패로 깨지며 우승 실패. 참고로 오릭스 블루웨이브는 바로 한큐 브레이브스가 오릭스에게 팔린 뒤 바뀐 이름. 어째 한큐-오릭스만 만나면 탈탈 털린다[24] 현역 때 3번을 단 3번 타자 3루수로서 이 숫자를 모두 더하고 0을 붙인 것으로 아들인 나가시마 가즈시게의 아이디어로 달았다고 한다.[25] 이승엽이 제70대 4번타자 시절때 백넘버이기도 하다.[26] 하지만 안티 거인 팬들로부터는 스프링 캠프에서 선수들의 모습은 안 전하고 매일같이 "오늘은 벗을 것인가 아닐 것인가"에만 촉각을 곤두세우는 미디어들을 겨냥하여 "벗나 안 벗나가 뉴스 거리라니 무슨 포르노 배우냐?(...)"라면서 비아냥 대기도 했다. 하기사, 그 미스터 베이스볼이라 해도 저렇게까지 지나치게 주목받는 건 타팀 팬들이 싫어하겠지[27] 2003년 물러난 후, 호리우치 츠네오가 2년간 감독을 맡으면서 교진을 밑바닥으로 몰았고, 호리우치가 물러난짤린 2006년부터 다시 감독을 맡았다.[28] 고토 코지(後藤孝志)라는 선수로 내야와 외야를 오가던 백업선수였다. 기요하라 군단이라 불렸던 기요하라 카즈히로 파벌의 앞잡이 혹은 피해자라는 의혹이 있으며 2018년엔 두산 베어스에서 코치로 활동하다가 친정으로 복귀했다.[29] 실제로 선수 말년때 한솥밥을 먹은 적이 있다. 사실 감독수업시절(선수겸 타격보조코치) 타격코칭 스타일에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30] 이 일화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도 소개되었다.[31] 근데 히로시마마에다 토모노리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를 했는지 타격부진 탈출에 성공했다(...). 뭐야 그거 뭐야 무서워 나카지마 히로유키 항목에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32] 당장에 오노는 한국 나이로 50세였다(...).[33] 남의 홈구장에서 경기하는 게 이상하겠지만, NPB는 가끔씩 다른 팀 홈구장에서 홈경기를 갖기도 한다.[34] 다행히, 마키하라는 그 날 퍼펙트 게임을 기록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퍼펙트 게임 기록이 현재 일본 프로야구 마지막 퍼펙트 게임 기록이다.[35] live의 과거형인 lived를 써야 하는데, 도쿄의 과거형인 에도를 썼다(...) 한국식으로 하자면 I live in Seoul을 I live in Hanyang으로 쓴 셈이다.[36] 그것도 어린이날에 벌어진 일! 참고로 나가시마는 그 해 시즌 중 퇴근길에 납치될 뻔 했었다.하지만 평소 가지 않은 길을 이용했고,범인들 중 한 사람이 마음에 변화가 생겨 경찰에 자수하여 납치는 없던 일이 되어 버렸다고.[37] 발음은 히토츠[38] 이 해 최초로 제도가 신설되었다.[39] 이게 마키하라의 등번호인 17송이를 들고 찾아갖다고 하기도 하는데 본인 말론 20송이라고 한다.[40] 위의 일화에서 나가시마 시게오가 야구장에 두고 갔던(...) 그 카즈시게 맞다.[41] 릿교대 시절에는 엄청난 거포였다. 문제는 이때부터 공갈포 기질이 있었다.[42] 노무라가 라쿠텐 감독 퇴임 후인 2011년 자신의 감독 시절 현역이던 선수들 사진을 보고 누군지 맞추는 TV프로에 나온 적 있는데, 이때 나온 선수 중에 카즈시게가 나오자 대놓고 야쿠르트의 짐 이라고 깠다(...) 심지어 다른 선수들은 다 이름 정도만 부르는 정도였는데 나가시마 카즈시게는 "슈퍼스타의 아들 나가시마 카즈시게", "아버지도 자길 싫어하니까 집에 가서 내 험담 실컷 했을 걸" 이라고 강조할 정도(...) 이쯤이면 찍혀도 단단히 찍힌듯.[43] 그나마 있는 활약이라면 세리그 3만호 홈런을 쳤다는 것.[44] 土井正三. 선수 시절엔 이적없이 요미우리에만 활동했고 은퇴 후 요미우리의 수비주루 코치를 맡았으나 요미우리 감독 자리엔 오르지 못하고 1991~1993 시즌에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감독을 역임했다.(근데 이때 스즈키 이치로의 특유의 타법을 맘에 안들어해 그를 후임감독이 부임할 때까지 계속 2군에만 처박히게 했다.. 지금 그의 위상을 생각하면 병크라고밖엔..) 오릭스 퇴임 후 다시 요미우리에서 1996~1998년까지 코치를 역임. 2009년 9월 25일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