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1 05:35:46

요나미네 카나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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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도는 해당 선수가 4번 타자로 1경기 이상 출장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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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4.bp.blogspot.com/00%2BBBM%2B20th%2BBest%2B9%2BYonamine%2B93.jpg
이름 요나미네 카나메 (与那嶺 要, Wallace Kaname Yonamine)
출생 1925년 6월 24일
하와이 주 마우이 섬 올로왈루
사망 2011년 2월 28일 (향년 85세)
하와이 주 호놀룰루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75cm
포지션 러닝백
외야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47년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
1951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소속팀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 (1947)
요미우리 자이언츠 (1951~1960)
주니치 드래곤즈 (1961~1962)
지도자 주니치 드래곤즈 타격 코치 (1963~1966)
도쿄-롯데 오리온스 타격 코치 (1967~1969)
주니치 드래곤즈 1군 수석 코치 (1970~1971)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 (1972~1977)
요미우리 자이언츠 2군 작전·주루코치, 1군 타격코치 (1978~1979)
난카이 호크스 1군 수석 코치·타격 코치 (1981~1982)
세이부 라이온스 1군 타격 코치 (1983~1984)
닛폰햄 파이터즈 1군 수석 코치 (1985~1988)
1957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MVP
벳쇼 다케히코
(요미우리 자이언츠)
요나미네 카나메
(요미우리 자이언츠)
후지타 모토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주니치 드래곤즈 역대 감독
미즈하라 시게루
(1969 - 1971)
요나미네 카나메
(1972 - 1977)
나카 도시오
(1978 - 1980)

1. 개요2. 현역 시절3. 지도자 시절4. 말년5. 에피소드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与那嶺 要(1925.6.24~2011.2.28)

일본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미국 하와이 태생의 일본계 미국인 2세[1]로, 본명은 월리스 카나메 요나미네(Wallace Kaname Yonamine) 이며 애칭은 월리(Wally). 원래는 미식축구 선수 출신으로 1947년 NFL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에 입단, 동양인 최초의 NFL 선수로 플레이 하였지만 부상으로 인해 미식축구를 그만두고 1950년 야구선수로 전향, 마이너리그 트리플 A 팀에서 활동하였다.

2. 현역 시절

1951년 시즌 도중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첫해엔 규정타석 미달이었지만 3할 타율을 마크했고 이후 1952~1960년까지 요미우리의 1번 타자로 맹활약 했다. 치바 시게루와 당대 최고의 테이블 세터진을 구축하며 요미우리의 황금 시대를 이끌었으며 타격왕 3회, MVP 1회를 수상했다.

1961년 자유계약으로 주니치 드래곤즈에 이적했고, 2년간 선수로 뛴 후 1962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났다.

12년 간의 통산 성적은 타율 0.311, 82홈런, 482타점, 163도루.

파일:external/m.sponichi.co.jp/G20111230002338760_view.jpg

현역 시절 세이프티 번트에 상당히 능숙하여 일본 야구에 세이프티 번트를 처음으로 도입한 선구자 격 인물이며, 미국 스타일의 거친 슬라이딩과 태클, 수비수들의 얼을 빼는 주루플레이[2]를 선보이며 당시 스커트를 입은 아가씨 같은 야구라는 비아냥을 듣던 일본 야구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3. 지도자 시절

파일:external/www.jiji.com/ynm758-jlp01253044.jpg
주니치 감독 시절

은퇴 이후 풍부한 경험과 지도력을 발휘하여 30년 가까이 프로팀 지도자로 활약하였는데 그 경력을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연도 소속팀 직책
1963~1966 주니치 드래곤즈 1군 타격코치
1967~1969 도쿄 오리온즈[3] 1군 타격코치[4]
1970~1971 주니치 드래곤즈 1군 수석코치
1972~1977 주니치 드래곤즈 1군 감독[5]
1978~1980 요미우리 자이언츠 2군 외야수비 및 주루코치, 1군 타격코치
1981~1982 난카이 호크스 1군 수석코치 겸 타격코치
1983~1984 세이부 라이온즈 1군 타격코치[6]
1985~1988 닛폰햄 파이터즈 1군 수석코치

주니치 감독 당시 오랜 기간 활약한 호시노 센이치를 구원투수로 전향시켜 1974년 세이브왕 타이틀을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두 사람 모두 타도 거인이라는 공통적인 목표를 가지고 활약한 결과였다.

4. 말년

1988년을 끝으로 야구계를 떠나 고향인 하와이에서 조용히 살고 있던 중 2006년 마스터즈 리그에 초청받은 것을 계기로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다. 2009년 7월 16일 오릭스 버팔로즈치바 롯데 마린즈의 경기 때 오릭스의 초대로 시구자로 나오는 등 80이 넘은 고령임에도 건강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994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2011년 2월 28일,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지병인 전립선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85세.

5. 에피소드

  •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입단 계약을 맺을 때 자택에 수세식 화장실을 설치해 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당시 미국과는 달리 일본은 수세식 화장실이 지극히 드물었던 시대였는지라 구단 관계자는 굉장히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 한때 도쿄 롯폰기에서 아내와 진주 가게를 운영한 적이 있었다. 당시 롯폰기 땅값을 생각하면 요나미네가 야구선수로 얼마나 크게 성공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는 부분.
  • 함께 팀 동료로 뛰었던 카와카미 테츠하루와는 매년 수위타자 경쟁을 벌이며[7] 평생의 라이벌이자 적대적 의식을 가졌다고 한다. 특히 1960년 미즈하라 시게루의 후임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에 취임한 카와카미가 요나미네를 팀 전력에서 제외하여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하는 단초를 제공하게 되면서 이러한 감정이 더 커지게 되었는데[8], 주니치 감독에 취임한 후 선수들이나 코치들이 카와카미 테츠하루를 경칭인 "카와카미 씨"로 부르면 "카와카미 씨라고 부르지 마! 테츠(카와카미의 별명)로 충분해!"라고 일갈하며 존칭이 아닌 별명인 테츠로 부르게 하고 경기 전 미팅 때마다 그리 유창하진 않았던 일본어로 "테츠에겐 지지 마라!"라고 강조하거나 요미우리와의 경기에서 질 때면 "테츠 자식! 젠장!!"이라고 화를 내는 등 '타도 쿄진, 타도 카와카미'를 표방하며 요미우리와 카와카미에 대한 적대감을 유감 없이 표출했다. 1974년, 요나미네가 이끄는 주니치가 20년 만의 센트럴리그 우승을 달성해내며 요미우리의 10년 연속 센트럴 리그 제패를 저지하자, 요나미네는 "드디어 해냈어. 테츠를 무찔렀어. 행복해. 긴 시간 동안 일본에 있어서 (덕분에 테츠를 이기게 되었으니)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라며 현역 시절의 영광보다 카와카미를 이기고 주니치를 우승시킨 것을 훨씬 더 기뻐했다고 한다.
    주니치 감독에서 물러난 직후인 1978년에 친정팀 요미우리에 코치로 복귀했으나 1980년 시즌 종료 후 당시 감독이었던 나가시마 시게오가 물러나게 되자 자신도 함께 코치직에서 사퇴했는데, 당시 카와카미가 구단주에게 나가시마에 대한 부정적인 얘기를 흘려 퇴임에 영향을 발휘한 것으로 생각하여 심하게 반발하고 사표를 던졌다는 설이 있다. 그 후로도 요나미네는 카와카미가 연관된 요미우리 OB 행사엔 절대 참석하지 않을 정도로 카와카미에 대한 적대감을 유지하였으며 1996년 나고야 구장에서 개최된[9] 요미우리-주니치 OB전에서도 카와카미가 요미우리 OB 감독으로 참석할 때 요나미네는 주니치 OB 감독으로 참석했을 정도였다. 반면 카와카미와 전혀 관계없는 야구 행사엔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고 참석했다고 한다.
  • 오 사다하루의 친절한 팬서비스는 요나미네의 호의에 감명받은 것에서 비롯 되었다고 한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오 사다하루는 사인용 색지나 깔끔한 야구공조차 마련하기 힘들어서 장난감 고무공을 내밀며 요미우리 선수들에게 사인을 부탁했는데 다른 선수들은 매우 바빴던 것도 있고 조잡한 고무공 따위에 눈길이 가지도 않았기에 대부분 무시하고 지나갔으나 요나미네 혼자 미소를 지으며 흔쾌히 사인을 해주었고, 이를 계기로 큰 감동을 받은 오 사다하루는 자신이 훗날 프로 선수가 된다면 요나미네 처럼 모두에게 웃으면서 사인을 해주자고 맹세하면서 일본 최고의 타자로 성장한 후 팬서비스에 정성을 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뒷날 요나미네는 이 에피소드에 대해 "어째서 일본의 선수들은 사인을 해주지 않는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 꼬마가 오 군이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눈이 똘망똘망한 꼬마가 고무공을 내밀었는데 아무도 사인을 해주질 않아서 내가 해 줬던 건 기억난다."라고 언급했고, 요나미네가 2011년 타계할 당시 오 사다하루는 "초등학생 때 코라쿠엔 구장에서 처음 사인을 받았던 선수가 요나미네 씨였다. 그 분 덕분에 야구는 무엇인지 배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라고 요나미네를 추모하며 그를 팬 서비스의 스승으로 회고하였다.
  • 상술했듯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일본인일본계 미국인인데, 일본에서 현역 시절을 보낼 당시 야구에 전념하기 위해 일본어 공부에 시간을 많이 들이지 않았기 때문에[10] 일상 회화 자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읽고 쓰는 것은 거의 못하고[11], 섬세한 표현에 다소 서투른 모습을 보이는 등 일본어가 그다지 유창하지 못했다고 한다.[12]
    이 때문에 생긴 에피소드로, 주니치 감독 시절 원정을 나갔을 때 어떤 선수가 통금 시간을 어겨 숙소로 돌아오자 "오늘 밤은 자지 말고 반성해라!"라고 그 선수를 혼내려고 했으나 일본어가 유창하지 못한 요나미네는 이를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떠오르지 않아서 "곤방와!"만 계속 외치다가 결국 아무 말도 못하고 자기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는 해프닝이 있다. 당연하지만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왜 감독님이 혼을 내지 않고 저녁 인사를 하신 거지?"라고 황당해했다고.
  • 야구에 관해서는 꽤나 엄격했으나, 반대로 평소 일상에서는 부인을 매번 경기장에 부르는[13] 애처가에 선수들을 자주 집으로 초대해 다과를 대접하는 등 온화하고 친근한 성격이었다. 주니치 감독 시절 선수로 따랐던 호시노 센이치, 야자와 켄이치 등이 입을 모아 정말 좋으셨던 분이라고 인품을 칭찬했을 정도.
  • 다니엘 K. 이노우에 국제공항에 그의 모자와 유니폼이 전시되어 있다.
  • 부인 제인 이와시타와의 사이에서 슬하에 1남 2녀(에이미, 월리스, 폴)을 두었다. 그의 아들 폴 요나미네는 도쿄에서 태어나서 학창 시절을 보냈으며 현재 경영인 및 회계사로 활동하고 있다.

6. 관련 문서


[1] 아버지는 오키나와 현, 어머니는 히로시마 현 출신 이라고 한다. 실제로 그의 성인 요나미네는 일본 본토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오키나와 계 성씨이다.[2] 세이프티 번트로 출루한 후 다음 타자 타석 초구에 2루 도루, 2구에 3루 도루, 3구에 홈스틸을 연속으로 성공시키는 등, 당시로선 상상하지 못했던 수비수들의 허를 찌르는 주루의 대가였다.[3] 1969년 롯데 오리온즈로 팀명 변경.[4] 교타자 에노모토 키하치를 지도했다.[5] 1974년 친정팀 요미우리센트럴 리그 10연패를 저지하고 20년 만의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일본시리즈에선 카네다 마사이치 감독이 이끌던 롯데 오리온즈에게 패퇴하였다.[6] 1983년 일본시리즈에서 친정팀에게 시원한 뒷통수 한방으로 우승에 성공했다.[7] 공교롭게도 2명 모두 요미우리에서 함께 뛸 동안 수위타자를 3번씩 수상했다.(카와카미: 1951, 53, 55/요나미네: 1954, 56-57)[8] 카와카미 본인도 자신이 요나미네에게 원망받는 걸 잘 알고 있어서 훗날 요나미네의 방출에 대해 "(자신이 감독으로 취임할 당시의) 요나미네는 이미 선수로써의 기량이 현저하게 하락한 상태여서 전력에서 제외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요나미네는 일본어를 잘 못했기에 코치로 전임시켜 팀에 남게 하는 방법도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9] 이 경기는 주니치가 나고야 돔으로 홈구장을 옮기기 전 나고야 구장에서 치러진 마지막 경기였다.[10] 보통 이민 2세대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이다. 아이가 모국어 공부를 열심히 한다든지, 부모가 모국어 교육에 열성이 있지 않으면 보통 언어구사 능력은 말하기 듣기 수준만 유지하는 정도.[11] 주니치를 대표하는 응원가 타올라라 드래곤즈가 처음으로 나온 1974년도판 앨범 커버는 당시 주니치 선수단들의 사인이 원형으로 쓰여져 가운데의 구단 로고를 둘러싼 이미지로 나왔는데, 요나미네는 일본어를 쓰기 힘들어했기 때문에 혼자서 영어 사인을 적어놓았다.[12] 요나미네 본인도 자신의 서투른 일본어가 신경쓰여서 은퇴 후엔 주변 인물들에게 신문을 읽어달라고 부탁하여 기자들의 의견을 암기하는 등 일본어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13] 당시의 선수들은 가족들을 경기장으로 부르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