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라 히바리 관련 틀 | |||||||||||||||||||||||||||||||||||||||||||||||||||||||||||||||||||||||||||||||||||||||||||||||||||||||||||||||||||||||||||||||||||||||||||||||||||||||||||||||||||||||||||||||||||||||||||||||||||||||||||||||||||||||||||||||||||||||||||||||||||||||||||||||||||||||||||||||||||||||||||||||||||||||||||||||||||||||||||||||||||||||||||||||||||||||||||||||||||||||||||||||||||||||||||||||||||||||||||||||||||||||||||||||||||||||||||||||||||||||||||||||||||||||||||||||||||||||||||||||||||||||||||||||||||||||||||||||||||||||||||||||||||||||||||||||||||||||||||||||||||||||||||||||||||||||||||||||||||||||||||||||||||||||||||||||||||||||||||||||||||||||||||||||||||||||||||||||||||||||||||||||||||||||||||||||||||||||||||||||||||||||||||||||||||||||||||||||||||||||||||||||||||||||||||||||||||||||||||||||||||||||||||||||||||||||||||||||||||||||||||||||||||||||||||||||||||||||||||||||||||||||||||||||||||||||||||||||||||||||||||||||||||||||||||||||||||||||||||||||||||||||||||||||||||||||||||||||||||||||
|
<colbgcolor=#A08F94,#010101><colcolor=#FEF7DA,#DDD> 미소라 히바리 [ruby(美空, ruby=みそら)]ひばり | Hibari Misora | |
| |
본명 | 카토 카즈에([ruby(加藤和枝, ruby=かとうかずえ)]) |
출생 | 1937년 5월 29일 |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이소고구 | |
사망 | 1989년 6월 24일 (향년 52세) |
도쿄도 분쿄구 준텐도대학 의학부 부속 준텐도병원 | |
국적 |
|
신체 | 147cm, O형 |
가족 | 아버지 카토 마스키치(加藤增吉) 어머니 카토 키미에(加藤喜美枝) 여동생 사토 세츠코(佐藤勢津子) 남동생 카토 테츠야(かとう哲也), 카야마 타케히코(香山武彦) |
자녀 | 양자 카토 카즈야(加藤和也) |
학력 | 세이카 학원 고등부 (졸업) |
소속사 | 히바리 프로덕션 |
데뷔 | 1949년 1집 앨범 '河童ブギウギ' |
활동기간 | 1949년~1989년 |
서명 | |
링크 |
1. 개요
미소라 히바리([ruby(美空, ruby=みそら)]ひばり, 1937년 5월 29일 ~ 1989년 6월 24일)는 일본의 가수이자 배우이다.쇼와(昭和)의 가희(歌姫)로 불릴 정도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국민 가수이며, 일본인들에게는 쇼와 시대를 통째로 상징하는 인물로 여겨질 정도이다. 데뷔 때부터 타계하는 1989년까지 약 45년 동안 대단한 인기를 구가하였으며, 현재까지도 일본인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일본 엔카 가수 중 가장 유명한 가수로, 지금도 일본에서 엔카 가수라 하면 미소라 히바리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누적 음반 레코드 판매량 8,000만장 이상. 비공식 일본 가수 음반 판매량 1위다.
2. 생애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미소라 히바리/생애#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미소라 히바리/생애#|]] 부분을
참고하십시오.3. 일본 음악계 내의 위상
일본 가요계의 레전드. 음악계를 넘어, 사망 후 국민장급으로 치러질 정도로, 일개 가수가 아닌 일본 현대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로 위상이 높다.사후에 일본 정부로부터 여성 최초로 국민영예상(1989년 7호)을 수상했다. 또한 히바리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부른 〈川の流れのように〉(강물의 흐름처럼)은 NHK에서 조사한 일본의 명곡에서 1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나중에 우리나라에서도 이건우 작사, 가수 이화숙이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번안해서 불렀다.
여담으로 미소라 히바리 사후, 얼마되지 않아 일본의 버블경제가 무너지면서, 그녀의 위상은 단순히 국민가수를 넘어 일본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쇼와 시대 자체를 대표하는 위상을 지니고 있다. 전성기를 구가한 시기가 일본의 전성기와 묘하게 일치하면서, 그녀를 향한 그리움에 화려했던 쇼와 시대에 대한 그리움까지 합쳐진 것이다. 여러모로 그녀의 타계와 함께 일본이란 나라의 한 페이지가 넘어갔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미소라 히바리는 타계한 지 [age(1989-06-24)]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많은 일본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일본 가요계에서는 전설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사카모토 후유미, 고바야시 사치코 같은 거물급 엔카 가수들은 물론이고, 김연자나 계은숙도 미소라 히바리의 곡을 자주 부른다. 미국에서 비슷한 위상을 지닌 가수는 엘비스 프레슬리 정도이다.
4. 한국계 루머
오래 전부터 한국계 루머가 끊이지 않는 일본의 유명인 중 한 명이며 한국, 특히 재일 한국인들 중에는 미소라 히바리가 재일교포 2세 출신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다.하지만 미소라 히바리 본인이 생전에 "나는 한국계다."라는 말을 한 적은 한번도 없다. 일본에서 활동하다가 한국으로 돌아왔던 작곡가 손목인이 어느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미소라 히바리, 미야코 하루미 등의 유명 엔카 가수가 한국계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주장했던 적이 있고, 우에다 타케히코(植田剛彦)라는 저널리스트가 쓴 《재일(在日) 한국인의 실력》에도 미소라 히바리가 한국계라는 주장이 있지만, 두 사람 모두 본인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확실한 근거를 제시한 적은 없다. 또한 미소라 히바리의 어머니와 이웃에 살았고, 미소라의 한국 공연을 추진한 스즈키 마사부미(鈴木正文)는, "미소라는 아버지의 고향 한국에서 노래하는 것이 소원이었고,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것에 대해 애통해했다"고 증언한 적도 있다. 반대로 미소라 히바리의 아버지 카토 마스키츠(加藤增吉)가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김해 출신 재조선일본인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일제강점기 혹은 구한말에 조선으로 이주하여 정착, 거주하던 일본인이었다는 것이다. 두 가지 다 확실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한편 1989년에는 일본의 주간지 《주간문춘》(週刊文春)에서 미소라 히바리에 대한 재일 루머에 대해 관계자 인터뷰 등 심층조사 후 "재일설은 근거없는 낭설"이라는 기사를 내기도 했다. 덧붙여서 일본 현지에서는 《주간문춘》의 기사와는 별개로, 미소라 히바리에 대한 재일 루머를 한국 언론과 재일 교포 등이 만든 도시전설 내지는 근거없는 루머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미소라 히바리에 대한 수많은 재일설 모두 주장만 있을 뿐 확실한 증거가 없고, 전술한 대로 미소라 히바리 본인이 한국계라고 밝힌 적도 없으며, 결정적으로 일본 관보에 귀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5. 여담
- 한국에서도 잘 알려져 있는 일본의 엔카 가수이다. 다만 미조라 히바리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틀린 것이다. 미소라 히바리가 맞다.
- 도쿄에서 발행되는 재일 교포 월간지 《아리랑》에 따르면, 미소라 히바리가 어린 시절 일본인 작곡가 코가 마사오 앞에서 〈아리랑〉을 불렀고, 사후에 나온 〈히바리 세계의 노래를 부르다〉 앨범에 〈도라지 타령〉이 수록되어 있으며, 후렴 부분인 '에헤야'는 또렷한 한국어로 수록되어 있다. 단, 미소라 히바리는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리메이크했는데, 이 곡에서도 부산항이란 단어는 일본어로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부산항'이라고 불렀고, 후렴부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역시 한국어로 부른 적이 있다. 이것은 이 노래를 일본어로 번안한 작사가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일본 가수들이 부른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가사도 대부분 '부산항'과 '돌아와요 부산항에' 부분은 한국어 그대로 불렀다. 단 이 곡을 일본에서 제일 먼저 리메이크한 것은 1979년 도노사마 킹스의 〈泪の波止場〉(눈물의 부둣가)다. 가사 내용은 원곡과 거의 같으나 부산항이라는 단어가 다른 단어로 대체되어 있다. 1983년에 아츠미 지로가 발표한 〈釜山港へ帰れ〉에 처음으로 '부산항'이라는 단어가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미소라 히바리가 부른 곡은 아츠미 지로 버전의 커버곡이다.
- 교토 아라시야마에 미소라 히바리를 기념하는 기념관인 미소라 히바리관이 있었으나 현재는 폐업한 상태다.
- TBS 테레비 방송 50주년 특별 기획으로 미소라 히바리의 일생을 그린 드라마 〈美空ひばり誕生物語〉(미소라 히바리 탄생 이야기)가 제작되었다. 그녀의 역은 일본의 유명 가수이자 배우인 우에토 아야가 맡았다.
- 마츠우라 아야의 〈草原の人〉(초원의 사람)는 생전에 미소라 히바리가 작사한 가사에 음을 덧붙여 만들어진 곡이다.
- 생전에 가수 패티김의 팬으로 잘 알려졌으며 패티김은 미소라 히바리 3주기 추모 공연에 단독가수로는 유일하게 공식 초청되었다.
- 마지막 곡이자, 명곡으로 추앙받는 〈川の流れのように〉(강물의 흐름처럼)는 인생을 돌아보는 듯한 아름다운 가사와 더불어 마침 이 노래가 히바리의 생전에 마지막 곡이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잊혀지지 않는 전설의 명곡으로 남아 있다. 히바리는 이 노래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더더욱 큰 여운을 주었고, 현재까지도 기성가수들은 물론 발라드, 성악 등으로도 불리고 있으며, 젊은 가수들까지 자주 방송에서 부르는 명곡 중의 명곡이다. 작사는 AKB48 그룹으로 유명한 아키모토 야스시. 한편, 인생을 주제로 한다는 점에서는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와 비슷하다. 시나트라 옹도 이 노래를 발표할 당시 50대였다. 다만 시나트라 옹은 이후로도 30년 이상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 15살 때의 모습. 영화 〈悲しき小鳩〉에서의 한 장면이다. 부르는 노래는 〈東京キッド〉이다. 그녀의 대표적인 히트곡 중 하나로, 김연자가 리메이크하여 취입하기도 했다.
- 1957년 1월 13일 국제극장에서 공연 도중 동갑내기 여성 극성팬에게 염산테러를 당했으나, 다행히 얼굴에 큰 상처는 입지 않았다. 범행을 저지른 여성 팬은 이전에도 미소라 히바리의 집에 찾아가거나 전화를 걸었으며, 공연 대기실에도 들어가려고 했으나 제지당한 적이 있었다. 범행 이유는,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 미소라 히바리가 미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2주 정도의 치료 후 1월 29일 다시 무대로 복귀할 수 있었다.
- 1962년 영화배우 코바야시 아키라와 결혼했지만 2년 만에 이혼했다. 다만 혼인신고는 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미혼이다. 아키라는 히바리가 연예활동을 하지 않고 가정에 충실하길 원했지만, 히바리는 연예활동에 미련이 많았기 때문에 불화가 시작되었다. 거기다가 히바리의 어머니나 매니저 등 주변 사람들도 부부관계에 개입을 많이 했고, 아키라가 마음대로 빚을 지는 등의 문제를 일으켜 결국 이혼하게 되었다. 이혼 기자회견에서 아키라는 "이혼하기 싫다"고 징징댔으나, 이혼을 원하는 히바리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 출산 경험은 없다. 다만 남동생 카토 테츠야의 아들인 카토 카즈야(加藤和也)를 입양했다. 히바리의 사후, 양자인 카즈야가 저작권과 관련된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카토 카즈야는 다키마쿠라의 창시자 챵코 마스다가 출연한 방송에서 테이블에 앉은 이들 가운데 노란머리를 하고 있는 양키풍의 사람이다. "금수저인 주제에 뭘 믿고 나와서 잘난 척 하느냐"는 악플세례를 항상 받는다. 카즈야는 기타노 다케시의 팬인데, 카즈야가 아직 어렸던 1980년대 초반 히바리는 다케시와 TV에서 함께 공연했던 적이 있었다. 이때 히바리는 "내 아들이 널 만나고 싶어해."라며 다케시를 억지로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 카즈야와 만나게 해줬다는 일화가 있다.
- 형제, 자매들도 모두 배우, 가수로 활동했다. 바로 1살 아래 여동생인 사토 세츠코(佐藤勢津子)는 언니 사후 뒤늦게 50대의 나이에 1993년에 엔카 가수로 데뷔하여 활동하고 있다. 남동생 테츠야도 배우였고, 히바리의 대표곡 중 하나인 〈人生一路〉(인생일로)를 작곡하기도 했다. 막내동생 카야마 타케히코(香山武彦)[본명 카토 타케히코(加藤武彦)]도 배우로 활동하다가 연예계를 은퇴하고 음식점을 경영했는데, 1986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따라서 미소라 히바리의 형제, 자매들 중에서 현재 사토 세츠코만이 유일하게 생존해 있다.
- 남동생 테츠야는 도박, 폭행, 권총소지, 권총밀수 등의 혐의로 여러 차례 체포되고 야쿠자와 연루되는 등의 사고만 쳐 히바리의 골칫거리였다. 그 때문에 "미소라 히바리도 야쿠자와 연루되어 있다"는 의심을 사서 공연이 취소되기도 하는 등, 히바리는 크게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미소라 히바리의 소속사 사장이자 후견인인 다오카 카즈오는 악명 높은 야쿠자로, 야마구치구미의 제3대 두목이기도 했다. 다만 다오카는 연예기획사를 경영하는데 있어서 '야쿠자성'을 배제하고, 소속 연예인들에게 잘해줬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동생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동생과 우애가 좋았다. 테츠야는 1983년 42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 미소라 히바리의 데뷔 전인 태평양 전쟁 시기에 이미 '미소라 히바리'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던 여배우가 있었다. 이 여배우의 본명은 타카기 후쿠코(결혼 후에는 야마모토 후쿠코), 1923년생이던 그녀는 1943년 20살까지 단 3편의 영화에만 출연했던 배우였고, 결혼과 동시에 일찍 은퇴했다. 그렇기 때문에 후쿠코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고, 당사자였던 미소라 히바리와 심지어 그녀의 소속사인 히바리 프로덕션에서도 타카기 후쿠코의 존재를 알지 못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소라 히바리'라는 예명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후쿠코에게 아무런 양해를 구하지 않고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후 히바리 사후인 2010년 도쿄신문에서 타카기 후쿠코를 찾아가 인터뷰를 한 기사에 따르면, 정작 후쿠코는 그저 우연의 일치였을 뿐이며, 오히려 미소라 히바리를 배려하여 자신이 미소라 히바리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에게 전혀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그녀가 활동을 시작하던 때가 1937년으로, 미소라 히바리가 태어난 해였으며, 후쿠코가 결혼과 동시에 은퇴하던 1943년에는 히바리는 겨우 6살이었으니, 당연히 두 사람이 서로 만날 수 있는 접점이 없었을 것이다. 2016년에는 가나가와현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고 하는데, 이 사람이 지금도 살아 있다면, 2024년 기점으로 101세를 맞이하게 된다.
- 1999년과 2016년에도 미발표곡이 발견되어서 앨범화 되기도 했으며, 타계 30년이 되는 2019년 9월 NHK 스페셜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보컬로이드 방식으로 작업해 새로운 곡을 선보였다.# 음성 복원은 VOCALOID 시리즈를 만든 야마하가 맡았다. 여기서 나온 곡은 2019년 12월 18일 그녀의 곡을 판매해 왔던, 일본 컬럼비아에서 발매되었다.
- 2019년 연말 NHK 방송에서 그녀의 생전 육성을 AI로 딥러닝한 그녀의 목소리와 모습을 재현하여 무대에 등장시켰다. 비록 홀로그램이지만 그녀의 모습을 보며 추억에 잠긴 듯 눈물 흘리는 관객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영상 3분 37초부터는 관객들 중에서 아키모토 야스시도 등장한다.
- 2020년 1월, 조카이자 양자인 카토 카즈야가 사업을 하다가 실패해서 미소라 히바리의 생전 저택 겸 기념관이 매각될 위기에 처해있다고 한다. 일본 언론에선 "성지가 사라진다"고 안타까워 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