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관문화훈장 수훈자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5px -13px" | 1987 손목인 작곡가 | 1988 이봉수 바이올리니스트 | 1988 정윤주 작곡가 | 1988 황문평 작곡가 | 1991 박창오[1] 가수 | ||||
1992 이경모 사진작가 | 1995 이미자 가수 | 1996 김혜자[2] 가수 | 1997 김덕용[3] 배우, 희극인 | 1997 임성기 언론인 | |||||
1998 코리아나 가수, 1988 서울 올림픽 주제가 《손에 손 잡고》를 부름 | 1999 김용걸 발레리노 | 1999 김지영 발레리나 | 1999 현동주[4] 가수 | 2000 한명숙 가수 | |||||
2001 강명보 문화원장 | 2001 김병학 문화원장 | 2001 문호근† 뮤지컬 연출가 | 2001 민형근 문화원장 | 2001 송해 희극인 | |||||
2001 장수봉 문화원장 | 2001 황용주 국악인 | 2002 김진원 문화원장 | 2002 박광태 극단대표 | 2002 백기현 오페라 단장 | |||||
2002 이은임[5] 한복 디자이너 | 2002 이창교 문화원장 | 2002 정호돈 문화원장 | 2002 최종규 문화원장 | 2002 허종성 문화원장 | |||||
2003 김영임 국악인 | 2003 노상준 문화원장 | 2003 변훈† 작곡가 | 2003 양중해 시인 | 2003 이영철 문화원장 | |||||
2003 이칠용 공예가 | 2003 정영삼 한국민속촌회장 | 2003 정지옥 문화원장 | 2004 김상희 가수 | 2004 김직승 출판가 | |||||
2004 김태환 한국영상박물관장 | 2004 서현석 지휘자 | 2004 송춘희 대중예술가 | 2004 신정교 문화원장 | 2004 윤수옥 문화원장 | |||||
2004 윤통웅 한국예술실연자단체연합회장 | 2004 이춘희 국악인 | 2004 최용문 문화원장 | 2005 남선우 문화원장 | 2005 신영희 국악인 | |||||
2005 정광태 코미디언, 가수 | 2005 정범태 사진작가 | 2005 조규돈 강릉문화원 사무국장 | 2005 홍성덕 국악인 | 2006 김세윤 문화원장 | |||||
2006 김인배 작곡가 | 2006 김인수[6] 국극배우 | 2006 서진길 사진작가 | 2006 이인숙 박물관장 | 2006 이춘화 출판가 | |||||
2006 임규흥[7] 무용인 | 2006 장영 문화원장 | 2006 장주원 공예가 | 2007 김성환 연기자 | 2007 김영섭 문화원장 | |||||
2007 류복현 문화원장 | 2007 이순희 한국음악재단 회장 | 2007 진태옥 패션디자이너 | 2007 최성준[8] 가수 | 2008 구자흥 안산 문화예술의전당 관장 | |||||
2008 김계담 문화원장 | 2008 김현 시각디자이너 | 2008 박공서 기업인 | 2008 박영수 청주문화원 고문 | 2008 배용준 배우 | |||||
2008 이영춘[9] 가수 | 2009 이케다 다이사쿠 창가학회 회장 | 2010 박두식†[10] 희극인 | 2017 임영주 문화원장 | 2018 강봉식 이와테 현립대학 교수, 일본한국어교육학회 설립 유공 | |||||
2018 방탄소년단[11] 가수 | 2018 천한봉 도예가 | 2020 장상호 전국문화원연합회 국장 | |||||||
<colbgcolor=#00004F><colcolor=#fff> 한국음악저작권협회 초대 회장 손목인 孫牧人 | Son Mok-in | |
본명 | 손득렬(孫得烈) |
출생 | 1913년 4월 13일 |
경상남도 진주군 | |
사망 | 1999년 1월 9일 (향년 85세) |
가족 | 아버지 손세영(孫世永) 배우자 오정심 |
종교 | 개신교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작곡가. 본명은 손득렬(孫得烈)이다. 종교는 개신교이다.2. 생애
1913년 경상남도 진주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경성으로 올라와 재동보통공립학교, 중동학교를 졸업했다. 재학 중 YMCA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서양음악을 접하게 되었다. 이후 도쿄 고등음악학원, 도쿄음악학교에 재학하였으나 두 학교 모두 중퇴하였다.첫 작품인 고복수의 타향(타향살이)가 크게 인기를 끌어 작곡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후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고복수의 짝사랑, 오기택의 아빠의 청춘 등을 작곡하며 인기를 끌었는데, 생전 작곡한 곡만 가요, 뮤지컬, 영화 음악 등을 합쳐 1,100여 곡 이상에 달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기 친일 가요를 작곡하기도 해 논란이 있는 편이다.
1964년 한국음악저작권협회 초대 회장을 지냈다. 1987년 화관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