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관문화훈장 수훈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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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이영춘[9] 가수 | 2009 이케다 다이사쿠 창가학회 회장 | 2010 박두식†[10] 희극인 | 2017 임영주 문화원장 | 2018 강봉식 이와테 현립대학 교수, 일본한국어교육학회 설립 유공 | |||||
2018 방탄소년단[11] 가수 | 2018 천한봉 도예가 | 2020 장상호 전국문화원연합회 국장 | |||||||
반야월 半夜月 | |
본명 | 박창오(朴昌吾) |
예명 | 반야월(半夜月), 진방남(秦芳男), 추미림(秋美林), 박남포(朴南蒲), 남궁려(南宮麗), 금동선(琴桐線), 고향초(高香草), 옥단춘(玉丹春), 백구몽(白鷗夢) , 허구(許久) |
출생 | 1917년 8월 1일 |
경상남도 마산부 (現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 |
사망 | 2012년 3월 26일 (향년 94세) |
서울특별시 양천구 이대목동병원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가수, 작사가, 작곡가 |
장르 | 트로트 |
데뷔 | 1939년 태평레코드社 콩쿠르 대회 |
가족 | 부인 윤경분, 슬하 2남 4녀[1] |
종교 | 불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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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후반 ~ 대한민국 정부수립 초창기에 활동한 한반도의 작사가/작곡가, 가수. 당시 대부분의 대중가요들은 이 사람의 손을 거쳐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중가요 역사의 레전드.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전쟁을 선동하는 가요를 만드는 친일행각을 저질렀다는 오명도 갖고 있으며 본인도 이를 평생 후회했다.2. 상세
어린 시절에는 집안이 제법 유복했으나, 고등학생 때 집안의 형편이 어려워져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양복점을 하는 숙부를 찾아가 제단 등을 배우며 생계를 유지해 나갔다.어린 시절에도 제법 가창력이 뛰어났는지 당시 청주 시내에서 '노래하는 양복쟁이'로 통했다고 한다.
당시 청주 지역에서 노래대회 등이 열리면 모조리 상을 휩쓸고 1939년에 조선일보와 태평레코드가 주최하는 '전국 콩쿠르 대회'에서 입상하여 가수로 데뷔하였다.
활동 시에 예명도 많이 보유하고 있었는데, 평소에는 반야월이라는 예명을 사용했고, 가수 활동 시에는 '진방남'이라는 예명을 사용하였다.
이 외에도 '추미림', '박남포', '남궁려', '금동선', '허구', '고향초', '옥단춘', '백구몽' 등 여러 예명들도 썼다. 예명을 여러개나 쓴 이유는 작사를 너무 독식하는 느낌을 피하려고 그랬다고 한다.
작사가 활동 시의 대표작들로는 소양강 처녀, 울고 넘는 박달재, 단장의 미아리 고개, 산장의 여인, 산유화, 만리포사랑, 무너진 사랑탑, 아빠의 청춘, 열아홉 순정 등이 있다. 가수 활동 시의 대표작들로는 불효자는 웁니다, 잘 있거라 항구야, 마상일기, 꽃마차 등이 있다.
일본 제국 시절에 작사한 것도 있긴 하나,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노래를 작사하고 가장 많은 히트곡을 낸 작사가이면서, 가장 많은 노래비를 보유한 작사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으며, 현재 청년층 사이에서도 이 사람이 제작하거나 직접 부른 멜로디나 노래 제목을 한 번 이상 쯤은 들어봤을 정도로 대중가요의 한 획을 그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2010년에는 일제강점기 일본군을 선전하는 가요를 만들었던 자신의 친일 행적에 대해 후회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 이 때문에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기도 했다.
3. 대표곡
- 단장의 미아리 고개 (반야월 작사 / 이재호 작곡)
이 노래는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서울특별시 성북구 미아동에 거주하던 반 씨가 인민군이 서울을 포위하자 단신으로 급히 피난을 떠났다가 9.28 수복으로 간신히 집으로 돌아왔지만 당시 5살이었던 반 씨의 딸이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아사되어 세상을 떠났는데 묘소까지 찾을 길이 없자 비통한 마음에 지은 노래라고 한다. 매년 6월이면 한국 전쟁과 함께 불려지는 노래다.
- 울고 넘는 박달재 (반야월 작사 / 김교성 작곡)
이 노래는 반 씨가 유랑극단을 이끌며 지방순회 공연을 다니던 도중 충주시에서 제천시으로 이동하려고 천등산 박달재를 넘어가던 중 저 멀리서 농부로 추정되는 부부가 헤어지는 모습을 보고 아내의 심정을 생각하며 지은 노래다.
- 불효자는 웁니다 (김영일 작사 / 이재호 작곡 / 진방남 노래)
이 노래는 1940년 업무차 일본을 방문한 반 씨가 음반 녹음 도중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게 되는데, 충격을 받아 당시의 심정을 어머니께 쓰는 편지로 김영일 작사가에 전달하여 울음 섞인 목소리로 녹음을 마친 노래다.
4. 여담
- 일제강점기 말기에 가수로 〈소년초〉, 〈조국의 아들〉 등을 불렀으며, 〈결전 태평양〉, 〈일억 총 진군〉와 같은 군국가요 작사에 참여한 경력이 있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음악 부문에 포함되었다.[2] 이에 대해 그는 2010년 6월 9일 친일행적에 대해 사과했다. 그는 "무슨 말을 해도 핑계다. 있었던 일은 인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
- 말년에는 지상파나 언론 인터뷰, 기사 등에 근근이 모습을 비추었다. 그러던 중 2012년 3월 26일 오후 3시 20분 경, 노환으로 인해 급작스럽게 사망하였으며, 빈소는 이대목동병원에 마련되었다.
[1] 이 중에 차남 박인호도 작곡가, 작사가, 가수, 기타 연주자, 프로듀서, 음악 평론가, 작가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 중이다. 참고로, 간혹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과 독도는 우리땅의 작사와 작곡을 맡은 박인호를 반야월의 아들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지만, 반야월의 아들 박인호와 그 박인호는 서로 전혀 다른 사람이다. 게다가 독도는 우리땅의 박인호는 본명이 박문영에 강원도 원주시 출신이며, 반야월의 아들 박인호는 박인호가 그대로 본명이다.[2] 당시 반야월은 백선엽 등과 함께 인명사전에 수록된 이들 중 생존해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