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6 13:53:34

목포의 눈물



1. 개요2. 특징3. 가사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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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35년에 발표된 노래로 민요풍의 가락과 구슬픈 곡조가 잘 살아있어 '남행열차' 와 함께 목포를 대표하는 노래이자 전라도를 대표하는 노래로 남아 있다. 지금도 매년 목포에서는 '이난영 가요제'를 열고 있다. 망국의 한을 표현하는 노래로, 이를 보여주는 '삼백년 원한 품은'이라는 가사가 조선총독부의 검열에 걸리자 '삼백련 원안풍은'으로 바꿔서 발음이 비슷하게 들리도록 바꾼 일화가 있다.

2. 특징

특히 1970-80년대에 상대적으로 차별받던 전라도 사람들의 설움을 달래줬고 전라도를 대표하는 야구팀 해태 타이거즈의 응원가로도 매우 유명했다.[1] 1980~1990년대에 리그를 지배했던 해태 타이거즈는 한국 시리즈에 진출하면 경기장 중립 규정 때문에 5~7차전을 잠실에서 치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2] 이 때 해태 팬들의 응원석 쪽에선 이 노래가 나오면 가히 종교집회를 연상케 하는 그 무엇이 응원석을 맴돌았는데 술에 거나하게 취해 혀가 꼬여서 노래 부르는 사람도 있었고 역전 홈런이나 안타, 삼진이라도 나오면 울면서[3] 이 노래를 불렀다. 전라도 출신의 아버지를 둔 1980년대[4]생이라면 이 주제를 가지고 한 번 물어보자. 상세하게 설명해주실 것이다. 한 마디로 전라도의 한(恨)이 담겨 있는 노래다.[5] 여기에 덧붙여 목포의 눈물을 완창한 뒤 야구와는 전혀 무관한 이름이었던 김대중을 관중석에서 연호하기도 했다.[6]

그러나 1990년대 중반까지 위세를 떨쳤던 해태 타이거즈1997년 외환 위기 이후 모기업인 해태그룹이 휘청이면서 약해졌으며 결국 2001년 기아자동차로 구단이 넘어갔으며 해태를 인수한 KIA 타이거즈는 해태 타이거즈의 색채를 빼기 위해 아예 이 노래를 의도적으로 응원가에서 빼버렸다.[7] 이후 팬덤의 교체와 프로야구의 스포테인먼트화를 거치면서 목포의 눈물은 점차 잊혀져 갔고 현재 타이거즈의 젊은 팬 중에서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지경에 이르렀다. 결정적으로 2009년 한국시리즈 6차전, 그리고 7차전 우승 확정 즈음 슬그머니 응원가로 복귀했는데, 하필이면 위에 서술된 대로 가사를 아는 사람이 드물어서 바로 호응이 끊겨버렸다. 이후에는 거의 불리지 않는다.

신안군 하의도 출신이지만 초등학교 시절부터 목포에서 자라나 목포를 정치적 고향으로 삼았던 김대중도 생전 이 노래를 즐겨 불렀는데 대통령 퇴임 후 목포에 내려올 때면 귀향 기념 행사 때 이 노래가 반드시 연주되기도 했다.

목포 유달산에 가면 노래비가 세워져 있으며 이난영과 목포의 눈물, 그리고 연이어 나온 목포는 항구다[8] 노래를 기리기 위해 매년 이난영 가요제를 개최한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의 오프닝 음악으로 쓰였다. 정작 영화의 배경은 부산광역시다.

원래 제목은 ‘목포의 노래’였는데 나중에 목포의 눈물로 바뀐 것이라고 한다

3. 가사

목포의 눈물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음

삼백 년 원한 품은[9]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깊은 밤 쪼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진[10]
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는 절개 목포의 사랑

4. 관련 문서



[1] 목포의 눈물이 처음 야구장에서 불려진 것은 해태 타이거즈가 두 번째로 우승했던 1986년부터였다고 당시 타이거즈 선수단 주치의로 활동했던 임채준 박사가 증언했다. 김응용 감독과 친하게 지냈던 임채준 박사는 충장로 제일극장 인근에 한일정형외과를 개업하여 원장으로 근무하며 타이거즈 선수단의 팀 닥터 역할을 오랫동안 했다.[2] 실제로 타이거즈의 한국시리즈 11회 우승 중 무등 야구장에서 우승을 확정 지은 것은 삼성 라이온즈와 맞붙었던 1987년 한국시리즈 뿐이었다. 즉, 한국시리즈의 우승을 결정짓는 11번의 경기 중 딱 한 번만 홈 구장에서 목포의 눈물을 불렀다는 얘기다.[3] 임채준 박사의 증언에 의하면 한국에 온 일본인 지인들과 1986년 한국시리즈를 보러 갔는데 우승 직후 관중들이 엉엉 울면서 이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매우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이에 임 박사가 배경 상황을 설명해줬다고 한다.[4] 전라도인의 한(恨) 정서가 극대화된 시기이기도 하다. 그 정서의 밑바탕에는 5.18 민주화운동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5] 넓게 보면 8.15 광복 이전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한(恨) 이 담긴 음악이다.[6] 여기에도 에피소드가 있는데 빙그레 이글스가 광주에서 원정 경기를 할 때 승패가 어느 정도 기운 뒤 김영덕 감독이 광주 팬들에 대한 서비스 차원에서 관중석에서 연호되는 이름의 선수를 등판시켜 주기도 했다고 술회한 바 있다.[7] 사실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부분인데 KIA 타이거즈 구단에서나 응원단에서도 중간중간에 부활했다가 없어지는 것을 반복하는 등 이 노래를 응원가로 다시 넣으려는 시도 자체는 꾸준히 했다. 2000년대 중후반에도 잠실 야구장에서 한 팬이 준 가사판을 김주일 응원단장이 받아서 가지고 다니면서, 첫 음을 높게 잡으면 삑사리가 나니 주의하라면서 7~8회 지고 있을 때는 목포의 눈물을, 이기고 있을 때는 남행열차를 부르곤 했다. 하지만 당시 올림픽 혹은 WBC 이후에 유입된 팬들이 많아서 가사판을 들고 다녀야 할 정도로 모르는 사람도 많았고 질 때 부르는 노래라는 인식이 강해서 호응이 좋지만은 않았다.[8] 목포의 눈물까지는 아니지만 이 곡 역시 이난영의 대표곡으로 지금까지 목포를 상징하는 노래로 남아 있다. 삼학도에 조성된 이난영 공원에는 이 곡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유달산의 노래비가 먼저 세워졌고 이후 삼학도에 이난영 공원이 조성되면서 목포는 항구다 노래비를 하나 더 세웠다.[9] 이 부분이 조선총독부의 검열에 걸려서 '삼백련(三栢淵) 원안풍(願安風)은'으로 고쳤다가 광복 후 환원시켰다.[10] 서남 방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