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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의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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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낙수 (1986) | → | 김대중 (1987~1992) | → | 노장진 (19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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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金大中 | Kim Dae-Jung | |
출생 | 1963년 3월 16일 ([age(1963-03-16)]세) |
충청남도 천안시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북일고 - 동아대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사우타 |
프로 입단 | 1987년 1차 지명 (빙그레) |
소속팀 | 빙그레 이글스 (1987~1992) |
지도자 | 북일고등학교 야구부 투수코치 천안북중학교 야구부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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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前 빙그레 이글스의 우완 사이드암 투수. 등번호는 28번으로 1987년부터 1992년까지 6시즌 동안 35승 30패 4세이브, 평균자책 3.82의 성적을 거뒀다.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프로에 오는 선수가 다 그렇지만 중학교 시절부터 에이스로 유명했고 중학교 시절의 활약을 바탕으로 예나 지금이나 한화 이글스의 팜인 북일고로 스카우트됐다.[1] 참고로 북일고에서 1년 유급했다. 이후 동아대학교로 진학했지만 대학에서는 박동수나 오명록 등 이미 뛰어난 투수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 기회를 많이 받지 못해 대학시절의 활약은 미미했으나 그의 중, 고교 시절을 기억하고 있던 빙그레는 망설임 없이 그를 1차로 지명하였고 무난히 프로 무대를 밟았다.2.2. 빙그레 이글스
이후 1990년까지 선발투수로 나와 나름 나쁘지 않은 활약을 하며 이상군-한희민에 이은 3선발로 활약했다. 최전성기였던 1990년에는 10승으로 프로 시절의 유일한 두 자리 승수 기록까지 달성하기도 했다. 1991년에 중간계투로도 올라와 활약했으나 1992년 부진을 겪고 난 후 은퇴를 결정해 다소 이른 나이에 유니폼을 벗었다. 선수생활 당시에는 연속경기 무패기록을 세우기도 했다.3. 플레이 스타일
투구폼이 매우 독특했는데 사이드암과 스리쿼터의 중간인 각도, 높지만 옆으로 던지는 듯한 자세로 꽤나 강렬한 인상을 준 투수였다.1988년 해태와의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선발로 등판했을 때의 투구 모습[2]
직구 구속은 140~143Km/h를 형성했으며 최고 구속은 145Km/h까지 나왔다. 슬라이더와 서클체인지업을 주로 던졌고 간혹 슬로 커브를 결정구로 던져 삼진을 잡아냈다. 지금 기준으로는 평범한 구속이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사이드면서도 리그 최고 수준으로 구속이 빨랐는데 이는 보통 사이드보다 살짝 높은 팔각도가 그 비결이었다. 이처럼 높은 사이드암에서 나오는 빠른 공으로 타자들의 공략을 어렵게 만드는 기교파 투수가 임창용, 한현희 등이 있는데 이런 사이드암 강속구 투수들의 원조격 되는 셈이다.
4. 기타
- 성적만 놓고 보면 스타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고 프로 선수 생활도 당시 기준으로도 길지 않은 6시즌밖에 하지 않았지만 이 선수가 아직까지 가끔씩 그때 그런 선수도 있었지 하며 회자되는 이유는 동시대에 살았던 동명이인이 대한민국 현대사와 정치사에서 엄청난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름 덕(?)을 봐서였다. 참고로 이 문서도 김대중 문서의 하위 항목에 있었다가 독립되었다.
- 선수 시절 별명은 총재.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당시 야당이었던 평화민주당의 총재였다.
-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기반인 광주의 무등 야구장 원정을 가면 다른 지역 연고팀 선수 중에선 유일하게 등판할 때마다 해태 타이거즈 선수가 나올 때와 같은 수준으로 이름이 경기장 전체에서 연호되는 특급대우(?)를 받았다.[3]
- 한 팬이 위 상황에 대해 자세하게 회고한 적이 있었는데 빙그레가 광주 원정을 갔을 때 승패와 무관하게 큰 점수차로 판세가 기울어지면 팬들이 그를 등판시켜 달라는 뜻으로 김대중을 연호했고 가끔씩 상황이 맞으면 빙그레의 김영덕 감독도 이에 호응하면서(?) 팬 서비스 차원에서 진짜로 이 선수를 마운드에 올린 적도 있었다고 한다.
낭만야구# ##[4] - 심지어 한자까지 金大中으로 완벽한 동명이인이다.[5] 김대중 선수가 태어난 1963년은 이미 김대중 전 대통령이 국회의원을 역임하는 등 유명 정객으로 이름을 날리던 때인지라 김대중 선수의 부모가 작명할 때 어느 정도 참조했을수도 있다. 애초에 한자명조차 같단 점을 생각해 보자.
- 인터넷 문화가 발달한 21세기에는 보통 빙그레 슨상님이란 별명으로 회자되곤 한다. 항목을 보면 알다시피 슨상님은 온라인이나 호남 지역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인다.
- 마구마구 갤러리에서는 김대중 카드와 링컨 또는 케네디와 조합하는 것을 대통령 조합이라고 불렀다.
- 아들 김선호도 야구선수인데 천안북일고를 졸업하고 2014년 육성선수로 한화 이글스에 입단해 한화 이글스 2군에서 뛰고 있다. 타격에는 재능있다고 평가받지만 수비가 취약해 1루밖에 보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 은퇴 이후에는 아마야구 지도자로 활동중이다. 천안북일고 투수코치를 거쳐 2019년까지 천안북중학교 야구부 감독을 지냈다.
- 6시즌 뛰고 8보크로 역대 보크 통산 4위에 올라 있다. 정민철, 선동열, 레일리, 탈보트와 공동 4위. 2시즌만에 8보크를 기록한 탈보트 이전까지 뛴 기간대비 보크 1위였고 현재도 내국인 선수 중에서는 기간 대비 1위. 불펜으로 뛴 시즌도 있고 마지막 해는 고작 7경기 14이닝 뛴 걸 감안하면 국내 선수중 가장 보크가 잦았던 선수.
5.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1987 | 빙그레 | 13 | 75⅔ | 2 | 6 | 0 | 0 | 0.250 | 4.16 | 63 | 6 | 27 | 6 | 31 | 39 | 35 | 1.189 |
1988 | 23 | 119 | 7 | 7 | 1 | 0 | 0.500 | 3.86 | 131 | 9 | 34 | 13 | 36 | 54 | 51 | 1.387 | |
1989 | 25 | 93⅓ | 7 | 2 | 0 | 0 | 0.778 | 3.76 | 94 | 7 | 32 | 4 | 41 | 48 | 39 | 1.350 | |
1990 | 35 | 146 | 10 | 9 | 2 | 0 | 0.526 | 3.76 | 129 | 12 | 51 | 13 | 68 | 77 | 61 | 1.233 | |
1991 | 32 | 105 | 8 | 6 | 1 | 0 | 0.571 | 3.34 | 92 | 9 | 38 | 14 | 58 | 51 | 39 | 1.238 | |
1992 | 7 | 14⅓ | 1 | 0 | 0 | 0 | 1.000 | 6.28 | 15 | 1 | 9 | 4 | 2 | 11 | 10 | 1.674 | |
통산(6시즌) | 135 | 553⅓ | 35 | 30 | 4 | 0 | 0.538 | 3.82 | 524 | 44 | 191 | 54 | 236 | 280 | 235 | 1.292 |
6. 관련 문서
[1] 천안중 시절 주로 유격수였다. 1979년 이상군의 1년 후배로 북일고에 입학한 후 1980년에 다시 1학년으로 유급했다. 이상군의 졸업 이후 1980년 입학생 안성수와 원투펀치를 계획했으나 2학년에 진급한 1981년부터 시행된 유급생 출전제한으로 인해 고교 시절 기록은 거의 없다.[2] 해당 경기를 포함해서 1988 한국시리즈 당시 빙그레의 4패 중 2패가 김대중의 것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최종 6차전에서의 구원패.[3] 당시 해태 타이거즈는 단순한 프로야구단을 넘어 1980년대 정치·사회적 차별과 소외로 억눌렸던 호남지역 주민들의 자존심을 대변했던 팀이었다. 이 때문에 목포의 눈물을 응원가로 부른 뒤 어김없이 연호하던 이름이 호남의 상징적 정치인이었던 김대중이었다.[4] 선수 시절의 대부분을 선발투수로 활동했기 때문에 거짓일 가능성도 있으나 당시에는 선발투수도 불펜 알바를 뛰는 걸 당연하게 여기기도 했고 세이브 기록이나 불펜으로 등판한 기록도 꽤 있으니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5] 다만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번 개명을 한 적이 있다. 원래 이름은 金大仲이었으나 계속 낙선하는지라 지인의 권유로 仲을 中으로 바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