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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낙수

성낙수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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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삼성 라이온즈 우승 엠블럼 V1.svg
KBO 리그
우승반지
1985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4번
팀 창단 성낙수
(1982~1983)
신준옥
(1984)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36번
유백만
(1983.6.27.~1983)
성낙수
(1984~1985)
이주헌
(1988~1991)
빙그레 이글스 등번호 28번
팀 창단 성낙수
(1986)
김대중
(1887~1992)
}}} ||
파일:external/www.ihalla.com/03430187.jpg
성낙수
成洛洙 | Sung Nak-soo
출생 1957년 8월 12일 ([age(1957-08-12)]세)
경상북도 대구시
국적
[[대한민국|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학력 경북고 - 경희대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82년 삼성 라이온즈 창단멤버
소속팀 포항제철 야구단
삼성 라이온즈 (1982~1985)
빙그레 이글스 (1986)
지도자 영남대학교 야구부 투수코치 (1986~1991)
대구성광중학교 야구부 감독 (1993~2004)
제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05~2017)
한려대학교 야구부 감독 (2021)
구미대학교 야구부 감독 (2022~2023)

1. 개요2. 선수 경력
2.1. 연도별 성적
3. 지도자 경력4. 논란 및 사건사고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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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 야구 선수. 삼성 라이온즈의 창단 멤버.

2. 선수 경력

사이드암 투수로, 경북고 시절에는 팀의 에이스로 1975년 팀의 청룡기, 봉황대기 우승을 이끌었고 대회 최우수투수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대통령배 결승에서 김윤환에게 3연타석 홈런을 맞은 걸로 더 유명하다. 고교 졸업 후 경희대학교에 진학했고 대학 졸업 후에 한국실업야구포항제철에 입단했다. 1981년 14승으로 다승 1위를 차지했다. 이듬해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며 연고팀인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했다.

파일:external/image2.gamechosun.co.kr/844447_1365936188.jpg
당시 삼성에는 황규봉, 이선희, 권영호 같은 당대의 에이스가 3명이나 있었지만 반면에 대학 진학 후 포항제철에 있던 1년을 제외하면 별다른 활약이 없었던 성낙수는 이 3명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맡았다.[1] 1986년 신생 팀 빙그레 이글스의 전력보강 선수로 지명받아 이적했고, 그 해 은퇴했다.

2.1. 연도별 성적

  • 붉은 글씨는 리그 1위 기록. 진한 표시는 리그 5위 내 기록.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2 삼성 28 125 8 3 2 0.727
(3위)
2.81 119 15 29 56 44 39 1.13
1983 19 55 3 2 0 0.600 4.91 63 10 18 21 33 30 1.38
1984 6 15⅓ 0 2 0 0.000 4.11 21 0 6 4 10 7 1.70
1985 3 4⅓ 0 0 0 - 4.15 6 1 1 2 2 2 1.62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6 빙그레 15 42⅓ 0 4 0 0.000 4.04 39 3 10 20 22 19 1.13
KBO 통산
(5시즌)
71 242 11 11 2 0.500 3.61 248 29 64 103 111 97 1.24
완투, 완봉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82년 5완투 0완봉
KBO 통산 5완투 0완봉

3. 지도자 경력

은퇴 후 영남대학교에서 코치를, 1993년부터 대구 성광중학교에서 감독을 맡았고[2] , 성광중 야구부가 해체하자 2005년 3월 제주관광산업고등학교(현 제주고) 야구부의 감독을 맡았다. 대구고 투수 김성현과 김해고 투수 김수완, 용마고 투수 임지섭 등을 데려와 키우는 등 야구 불모지라 할 수 있는 제주특별자치도에서 야구 전파에 힘썼다. 2017년을 끝으로 제주고 감독직에서 물러났고 2021년 한려대 야구부 감독으로 현장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한려대의 폐교 결정에 따라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됐고 곧바로 구미대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과정에서 한려대에서 뛰었던 선수 5명을 데리고 갔다.

4. 논란 및 사건사고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VN19912204-00_01381816.jpg
  • 영남대학교에서 코치를 하던 1991년 5월, 선수 시절 필로폰을 상습적으로 투여한 것이 발각되어 박찬, 장명부 등과 함께 구속되었다가 징역 8개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출소한 흑역사가 있다. 영남대 코치(정확히는 비공식 인스트럭터)[3] 시절 이태일 등을 키우며 잘 나가다가 갑자기 해임된 것도 이 사건 때문.
  • 제주고등학교 감독을 맡고 있던 2014년 7월 7일, 오라구장에서 열린 제주고와 포철고 경기에서 경기 조작 논란이 일었다. 7월 6일 태풍 너구리의 북상으로 인해 제주고-포철고 경기가 하루 미뤄졌고, 그 때문에 두 팀은 다른 팀들의 득·실점을 알 수 있는 상태에서 경기가 열렸다. 때마침 포철고가 제주고를 1대0으로 이기면 두 팀 모두 청룡기에 진출할 수 있었는데, 정말로 포철고가 1대0으로 이기면서 제주고와 포철고 모두 청룡기에 진출하게 됐다. 문제는 이 경기가 겨우 1시간 26분만에 끝났는데, 전날 마산고경북고 경기는 강우콜드로 5회만에 끝났음에도 1시간 12분이나 걸렸단 거다. 결국 이를 두고 경기 조작 의혹이 나오면서 진상조사위원회가 열렸다. 포철고 감독인 백운섭에게는 엄중 경고로 끝났지만, 불성실한 플레이로 고의 패배란 물의를 일으킨 성낙수에게는 3개월의 자격정지 징계가 내려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성낙수는 대한야구협회 이사직과 고교감독자협의회 회장직에서도 사퇴했다.

5. 관련 문서




[1] 그래도 당시 삼성 감독이 고교 시절 은사였던 서영무였던지라 서영무 감독이 꽤나 아끼며 배려했다고.[2] 프로 출신에게 아마추어 야구 지도자 자리가 완전히 개방된 1997년부터 정식 감독.[3] 당시 대한야구협회에서 프로에 몸 담았던 사람들은 아마추어 야구와 관련한 일에 종사하지 못하도록 막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