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6 10:34:37

빙그레 이글스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 align=center><table width=320><table bordercolor=#ff6600> 파일:HanwhaEagles_Brandlogo2.png 한화 이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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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시즌 한화 이글스/2019년 | 스토브리그 | 시범경기 | 3~4월 | 5월 | 6월 | 7월 | 8월 | 9월
2019 시즌 주요인물 한용덕 감독 | 이성열 주장 | 박종훈 단장
구단 기본 정보 한화그룹 | 한화 이글스 | 한화 이글스/2군 | 빙그레 이글스
구단 역사 정보 구단 역사 | 1999년 한국시리즈 | 역대 트레이드 | 사건·사고 | 암흑기
구단 주요 정보 팀 컬러 | 선수단 | 스타 플레이어 | 등번호 | 유니폼 | 한화 이글스 갤러리 | 팀 응원가 | 선수 응원가 | 응원단장 | 육성응원 | 구단 공식 SNS
경기장 관련 정보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 파크 | 청주종합운동장 야구장 | 서산 야구장 | 대전 베이스볼드림파크
지역 연고 학교 북일고등학교 | 대전제일고등학교 | 공주고등학교 | 광천고등학교 | 대전고등학교 | 세광고등학교 | 청주고등학교 | 강원고등학교 | 원주고등학교
기타 정보 행복수비 | 나는 행복합니다 | 김고추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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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그레 이글스
Binggrae Eagles
창단년도 1986년 3월 8일
명칭 변경년도 1993년 11월 1일
모기업 한국화약그룹[1]
연고지 충청남도 대전시대전직할시(1986~)[2]
충청남도·충청북도(1986~1999)[3]
홈구장 한밭 종합운동장 야구장(1986~)
청주 야구장(1986~)[4]
구단명 변천사 빙그레 이글스(1986~1993)
한화 이글스(1994~)

1. 소개2. 1986년 ~ 1987년: 기반을 세우다3. 1988년 ~ 1993년: 리그를 호령한 후발 주자4. 1994년~: 빙그레에서 한화로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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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군 리그 진입을 앞두고 충무체육관에서 치른 빙그레 이글스 창단식.[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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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3월 8일 1군 리그 진입 창단식을 마치고 대전시내에서 펼친 카 퍼레이드.
뒤에 배성서 초대 감독과 노진호[6] 단장이 보인다.[7]

대한민국 프로야구 사상 첫 번째 신생팀이자 신생팀의 전설

한화 이글스가 1993년까지 사용한 팀명이자 7구단 시대를 연 구단이다. 1986년에 대전, 충청권을 연고로 하는 7번째 구단으로 창단되었다. 사실 빙그레 이글스는 처음부터 한화그룹 소속의 프로 야구단으로서 창단되었으나 당시까지만 해도 한화그룹이 대중에 잘 알려져있지 않고, 아는 사람에게도 화약 제조 혹은 방위산업체 이미지가 강했으므로 일반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그룹 계열사 중 유일한 소비재(식품) 업체인 빙그레의 이름을 빌려 온 것이다.[8]

또한 구단 마스코트는 일반 팬을 대상으로 상금 700만원을 내걸고 공모한 끝에 독수리를 뜻하는 이글스로 결정됐다. 그리고 3월 8일에는 창단 사령탑으로 배성서 전 한양대 감독을 선임했다. 한때 MBC청룡 초대감독으로 거론되기도 했던 배성서 감독은 영남대와 한양대를 여러차레 우승으로 이끌며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한화그룹에서는 배성서 감독이 1974년 영남대 야구부 창단 감독을 맡아 단기간에 우승까지 이끈 경력을 높이 샀다.

문제는 선수 수급이었다. 애초 기존 6개 구단은 빙그레에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했지만 막상 창단 작업이 진행되다 하나같이 지원에 난색을 표한 것이다. 기존 구단들도 선수층이 두텁지 못한 실정인데다 신생구단에 대한 선수 지원이 강제가 아닌 권고 사항인 탓에 적극 협력의 필요성이 느끼지 못 한 것이다. 그 결과 1985년 4월말까지 빙그레가 확보한 선수는 고작 8명. 아마야구와의 마찰을 감수하고 영입한 신인 이상군, 민문식, 전대영과 삼성이 지명권을 양보해 데려온 이강돈, 강정길 그리고 롯데에서 트레이드해 온 이석규, 이광길, 김재열이 전부였다. 청백전은 커녕 경기를 위해 필요한 한 팀의 최소 인원 9명도 채우지 못한 것이다.

다급해진 빙그레는 5월 8일과 9일 대전구장에서 신인 선발대회라는 이름으로 공개선수 모집에 나섰다. 이를 통해 홍순만(해태), 김호인(삼미) 등의 프로 경력자를 포함한 10명의 선수를 추가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비교적 선수층이 두터운 편이었던 삼성으로부터 시즌 중 김한근과 박찬을 영입했고, 시즌이 끝난 뒤에는 김성갑, 성낙수, 황병일을 추가로 영입 할 수 있었다. 다른 구단도 여기에 동참해 롯데는 투수 천창호를, OB도 김우열과 김일중을 빙그레에 보냈다. 해태 역시 팀내에서 자리가 없어진 유승안과 김종윤을 트레이드 형식으로 빙그레에 지원했다.

청보에서 재계약협상에 실패한 너구리 장명부가 건너왔다. 그리고 그 해 신인 드래프트에서는 특급 잠수함 한희민과 대졸 포수 최대어인 김상국을 지명해 어렵사리 주황색 유니폼을 입히는데 성공 했다. 천신만고 끝에 1군무대에서 정상적인 최소한의 선수 구성이 완료 되면서 1986년 3월 8일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빙그레 이글스의 창단 행사가 열렸다. 프로야구 제7구단의 공식적인 첫 행보가 시작된 순간이다.

감독 배성서 코치 정연회 이재환 김윤겸
투수 영입 성낙수 김재열 천창호 임재준 오문현 장명부
신인 이상군 한희민 손문곤 김연철 민문식 유해덕 김일중 박태준 유해남 조호표 포수 영입 유승안 김성호 배원영 홍순만 신인 김상국 김종문 강규원
내야수 영입 황병일 김성갑 이석규 이광길 김한근 박재천 이근식
신인 강정길 전대영 김정태 임순태 김종수 김현택 이군노 송상진 이정은 김수길 임학빈 이영일 장종훈
외야수 영입 김우열 김종윤 박찬 김호인 이성수 고원부
신인 이강돈 장훈 윤홍식

2. 1986년 ~ 1987년: 기반을 세우다

1986년 4월 1일 대전구장에서 빙그레의 역사적인 첫경기가 열렸다. 상대는 MBC 청룡. 경기내용은 절망과 희망이 교차했다. 개막전 선발로 내보낸 장명부가 5이닝 6실점으로 무너진 것은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6회부터 나온 한희민의 호투는 앞으로를 기대 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빙그레 타자들은 하기룡, 김용수, 유종겸, 오영일, 김태원 등 주력 투수를 총동원 한 MBC를 상대로 막판 맹추격전을 벌었다. 빙그레로서는 7대8. 한 점 차까지 따라붙은 9회말 무사 2,3루에서 4,5번 타자 삼진과 범타로 물러난것이 아쉬웠다. 1사 2,3루에서 김상국이 날린 우익수플라이때 3루 주자 이군노가 홈에서 태그아웃되면 경기는 그대로 끝났다.

그 해 빙그레는 전기리그 에서 12승 42패 후기 19승 1무 34패를 기록하며 중합순위 최하위(31승1무 76패, 승률 .290)에 그쳤다. 경험부족과 세밀한 플레이 미숙으로 인해 29번이나 1점차 패배를 당한 게 뼈아팠다. 그나마 후기에는 청보를 제치고 7개 팀중에 6위를 차지한 것이 위안거리였다. 또 영건듀오 이상군(12승 17패 평균자책 2.43)과 한희민(9승 13패 평균자책 3.13)의 활약은 다음시즌을 기약할 수 있게 했다.
시즌 뒤 열린 신인 지명회의에서 빙그레는 2차 2번으로 대구상고-영남대 출신 외야수 이정훈을 얻는데 성공했다. 1987년 드레프트부터 1차 지명권이 팀 당 세장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에 지역 연고팀 삼성이 류중일, 강기웅, 장태수를 지명한 탓에 놓치게 된 이정훈을 빙그레가 지명한 것이다. 1987년 이정훈은 데뷔 첫 시즌부터 타격 3위에 해당하는 3할 3푼5리의 높은 타율에 20개의 도루를 기록하는 뛰어란 활약으로 신인왕에 올랐다. 또 마운드에서는 이상군이 18승 한희민이 13승을 따내며 첫해보다 한층 성숙한 투구를 선보였다. 그 결과 빙그레는 전기리그 24승 2무 28패로 청보에 한 계단 앞선 6위 후기에서도 23승 2무 29패로 청보와 공동 6위에 오르며 창단 2년 만에 탈꼴찌에 성공했다.

창단 두번째 시즌을 마친 빙그레는 3년 계약기간이 끝난 배성서 감독과 재계약을 포기하고 OB 삼성을 거친 김영덕 감독을 새 사령탑에 선임했다. 김영덕 감독은 프로야구 출범 이전에 천안북일고 감독을 지낸 인연이 감독 선임에 주요하게 작용했다. 여기에 1984년 롯데 우승을 일궈낸 강병철 감독이 타격코치로 가세했다. 각자 우승경험을 지닌 새 코치스태프는 동계훈련 기간동안 빙그레 선수들을 혹독하게 담금질했다. 특히 항상 지적 되던 약점인 수비력과 주루 플레이를 집중적으로 가다듬었다. 이재환코치는 김대중, 이동석, 한용덕, 장정순 등 신예급 투수들을 짧은 시간 안에 마운드의 주력으로 끌어올렸다.

3. 1988년 ~ 1993년: 리그를 호령한 후발 주자

초창기의 6개 구단에 비해 늦게 창단된 구단임에도 신인 선수들이나 타팀에서 전력보강 차원으로 영입한 선수들의 포텐셜이 폭발하면서 1988~1992년 5년동안 무려 4번이나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등 신흥 강호로 떠올랐다. 1993년과 94년에도 각각 승률 0.500과 0.524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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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올스타전에서 찍은 사진. 왼쪽부터 현역 시절의 유승안,
이강돈, 당시 신인이었던 송진우, 한희민.[출처]

빙그레는 창단 당시 6개 구단 보호선수 외 특별지명 선수들 중 삼성 라이온즈 출신의 선수들을 많이 지명했는데, 또 그걸 삼성이 웬만큼 다 수용했다. 그런만큼 삼성이 많이 줄 수 있던 여력이 있기도 했다. 경북고, 대구상고를 중심으로 한 대구 팜은 1970~1980년대에 고교대회에서 엄청난 성과를 냈었고, 그에 비례하여 좋은 기량을 가진 선수들이 많았다. 그리고 삼성에 워낙 선수들이 많다 보니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린 선수들이 빙그레에 왔던 거지. 이제나 저제나 삼성은 리그의 굇수 빙그레 초창기에 대구 출신 선수들이 많았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마침 단장도 그쪽 구단서 일한 데다 창단 감독도 그쪽 동네 사람이라(...). 그냥 저땐 삼성 2중대

특히 김영덕 감독의 지휘 아래 창단 2년 뒤인 1988년부터 1992년까지 1990년 시즌을 제외한 KBO 한국시리즈에 4번 진출하였으며 1989년, 1992년에 페넌트레이스 1위도 2번이나 차지했다. 순수 신생팀 기준 창단 이후 3시즌 만에 한국시리즈 진출은 KBO 신생팀 사상 최단 기간 한국시리즈 진출 기록이다. 그 다음이 창단 4시즌 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2003년의 SK 와이번스와 2016년의 NC 다이노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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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한국시리즈 이후 준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고 있는 송진우.
콩그레가 된 이유는 이게 다 해태 때문이다[출처]

허나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었던 상대가 의외로 강했기 때문에 결실은 맺지 못했다. 해태의 한국시리즈 우승 중 3번이 빙그레 상대였으며, 1992년에는 박동희염종석이 있던 롯데에 농락당했다. 사실 1992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염종석보다 박동희의 활약이 더 컸었다. 염종석장어 먹고 탈이나 4차전에서 강판당하기도 했다. 참고로 1992년 정규시즌의 81승 42패 2무, 팀승률 0.651은 당시 정규시즌 최다승 신기록이었으며[12], 당해 정규시즌 2위였던 71승 54패 1무의 해태 타이거즈와의 게임차는 10.5 경기였다. '92년 정규시즌 최종 순위표또는 1992년의 정규시즌 최종순위 참조.

그리고 빙그레 자체도 페넌트레이스 때와는 다르게 플레이오프에서는 약한 면모를 보였으며, 중요한 고비에서 치명적인 실책을 범하는 등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무너졌다. 예를 들면 1989년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장종훈의 알까기와 1991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송진우의 실책 같은 게 대표적이다. 그리고 2연속 준우승을 2번이나 달성한 팀이다. 그래서 최초의 한국시리즈 우승은 한화 이글스로 바뀐 후 1999년에 이루게 된다.

이강돈, 장종훈, 이정훈, 고원부, 강정길 등을 중심으로 하는 공격 야구를 펼쳤으며, 이는 한화그룹의 화약 제조업을 본뜬 다이너마이트 타선이라 불리며 빙그레 이글스의 상징이 되었다. 또한 이상군, 한용덕, 한희민, 송진우 등이 중심을 이루었던 투수진도 리그 상위권이었다. 한국시리즈 우승만 못했지, 사실상 이글스 프랜차이즈의 리즈 시절이다.

여담으로, 홈런왕 장종훈과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영향으로 해태 타이거즈와 함께 당대 어린이팬들이 많았던 팀이기도 했다. 소비재 라이벌??

4. 1994년~: 빙그레에서 한화로

파일:attachment/빙그레 이글스/91빙그레전화카드.png
1991년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출시된 빙그레 이글스 전화카드[13]

그러나 투수진이 1992년 정민철을 배출해내고 한용덕, 송진우의 기존 선수도 꿋꿋이 버티면서 고군분투했지만 결국 타선이 이렇다할 신인을 배출해내지 못하고 노쇠화가 점점 심각해지면서 1993년, 결국 몰락하게 된다. 이후 이글스는 1994년부터 한화 이글스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의 주역인 1996년 신인 4인방이 등장 때까지 이렇다 할 선수를 배출해내지 못했다.

그리고 몰락과 동시에 모기업인 한화그룹이 2세 오너 체제로 재편되면서 상속 분쟁으로 인해 빙그레한화그룹에서 이탈하여 자연스럽게 야구단 운영에서 손을 떼게 되었고 형제간의 재산분할로 인해 그룹인 한화는 장남 김승연에게, 빙그레는 차남 김호연에게, 그리고 제일화재(現 한화손해보험)는 장녀 김영혜 쪽으로 넘어가게 된다. 사실 2세 오너의 경영은 1980년대부터 이미 하고 있었다. 창업주 김종희 회장이 1981년에 갑작스럽게 타계했었기 때문. 이 시기의 재편은 그룹 구조의 재편이었다.

이후 1993년 시즌 종료 직후 11월 1일에 한화 이글스로 구단명이 변경되어 1994 시즌부터 한화 이글스라는 이름으로 리그에 참가하게 된다. 그 때 김영덕 감독도 물러나 강병철 감독으로 새롭게 출발하였다. 그리고 전설이 시작되었습니다. 좋은 의미로든, 안 좋은 의미로든.

이후 모든 역사에 대해서는 한화 이글스쪽을 참고할 것.


[1] 창단 당시부터 구단의 소유주는 한국화약그룹이었고 빙그레 역시 이 때는 한국화약그룹의 계열사였다. 옛 빙그레 유니폼에 '화약가족'이라는 패치가 붙은 것이 그 증거. 빙그레가 구단 명칭으로 등장한 이유는 아래 소개 부분에 서술돼있다. 공교롭게도 구단 명칭이 바뀐 시점에 모기업 명칭도 한국화약의 줄임말인 한화로 바뀌었다.[2] 1989년 대전직할시로 승격. 그 뒤, 1995년에 대전광역시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른다.[3] 이 당시에는 광역연고제가 적용되던 시절이었다.[4] 제2홈구장.[5] 출처 : 한화 이글스[6] 중앙일보 기자 출신으로 중앙일보 스포츠 담당 기자 중 최고참인 체육부장까지 지낸 인물. 한국체육언론인회 회장을 맡을 만큼 스포츠 담당 기자 중에서는 가장 큰 어른으로 꼽힌다. 1982년 삼성 라이온즈 창단 당시 부단장으로 부임했고 훗날 삼성 라이온즈 단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빙그레 이글스 창단 준비 과정에서 빙그레 초대 단장으로 부임했고 여러모로 유명한게 선수들 중 이정훈, 이강돈을 영입하며 또한 삼미와 청보에서 뛰던 장명부를 영입을 하는 등 선수보는 것도 탁월했다. 팀 명칭이 한화 이글스로 바뀌기 전까지 단장을 맡았다. 단장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한국스포츠TV의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7] 출처 : 스포츠서울[8] 두산그룹이 프로야구단 창단 당시 OB맥주의 인지도를 활용과 홍보를 위해 구단 명칭을 OB 베어스로 했던 것과 같은 이치다.[출처] 한화 이글스[10] MBC 청룡의 역사를 그대로 이어받았은 LG 트윈스가 1990년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우승까지 차지 했지만 한국야구에서 창단은 순수 창단 말고도 인수 때에도 창단이라고 하는 등 범위가 매우 넓다. 그래서 순수 신생팀이 아니었으므로 LG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출처] 한화 이글스[12] 현재 단일시즌 최다승 기록은 2016년 두산 베어스의 93승[13] 참고로 상대팀인 해태 타이거즈 전화카드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