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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정보 | 구단 역사|역대 시즌|실업 현대|연고 이전 1994년 한국시리즈|1996년 한국시리즈|1998년 한국시리즈 (V1)|2000년 한국시리즈 (V2)|2003년 한국시리즈 (V3)|2004년 한국시리즈 (V4) 역대 감독|역대 주장|역대 1차 지명 선수|사건 사고 | 암흑기 | ||||
세부 정보 | 선수단|등번호|유니폼|재계 라이벌 시리즈 | ||||
경기장 | 숭의야구장(1996~1999)|수원종합운동장 야구장(2000~2007)|춘천공설운동장 야구장|원당 야구장(제2 홈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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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자이언츠 | 삼미 슈퍼스타즈[1] | 삼성 라이온즈 | |
해태 타이거즈[2] | MBC 청룡[3] | OB 베어스[4] | |
[1] 청보 핀토스-태평양 돌핀스-현대 유니콘스, 現 키움 히어로즈의 전신 [2] 現 KIA 타이거즈 [3] 現 LG 트윈스 [4] 現 두산 베어스 |
태평양 돌핀스 | |
Pacific Dolphins | |
<colbgcolor=#E9282B><colcolor=#131b66> 창단일 | 1982년 2월 5일[1] |
매각 | 1995년 9월 21일 ([age(1995-09-21)]주년) |
모기업 | 태평양 |
법인명 | (주)태평양돌핀스 |
연고지 | 인천광역시 (1982~1995) |
홈구장 | 숭의야구장 (1982~1995) 춘천공설운동장 야구장 (1982~1988)[2] 수원 야구장 (1989~1995) |
구단명 변천 | 삼미 슈퍼스타즈 (1982~1985) 청보 핀토스 (1985~1987) 태평양 돌핀스 (1988~1995) 현대 유니콘스 (1996~2007) |
포스트시즌 진출 (2회) | |
한국시리즈 | 1994년 |
플레이오프 | 1989년, 1994년 |
준플레이오프 | 198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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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천광역시[3]를 연고로 했던 KBO 리그의 옛 구단. 인천 연고팀으로는 삼미 슈퍼스타즈, 청보 핀토스의 뒤를 잇는 3번째 구단이었다. 1988년부터 1995년까지 총 8년동안 존속하여 역대 인천 연고 프로야구단 가운데 2번째로 긴 역사를 기록했다.[4]1988년 청보 핀토스를 50억원에 인수하여 팀명을 변경하여 탄생하고, 1995년 시즌을 끝으로 모기업인 태평양의 공격적인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현대그룹에 470억원에 매각[5]되어 현대 유니콘스로 팀명이 변경되면서 사라졌다.[6]
주 연고지는 인천이였다.[7] 모기업인 태평양화학(현 아모레퍼시픽)은 창단 당시만해도 야구에 큰 관심이 없던 여성들이 주 고객층인(...) 화장품 회사였다. 팀의 상징색은 원래 녹색/노란색이었으나
구단 역사를 통틀어 가을야구에 진출한 시즌은 고작 두 시즌 뿐이고 이 두 해를 빼면 늘 꼴찌 언저리를 맴돌았던 약체 팀이었지만 인천야구를 오랫동안 지켜본 팬들에게는 가장 뚜렷한 인상을 남긴 팀이자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팀이기도 하다. 허약한 전력과 눈물겨운 성적에도 이런 호평이 남아있는 이유는 태평양이 역대 인천 연고 시절의 삼청태현 라인 중에서 그나마 가장 오랫동안[8] 운영됐고 만년 꼴찌의 설움에 지쳤던 인천 팬들에게 상당한 희망을 심어준 팀이기에 이 팀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 팬들이 많다. 무엇보다 인천 연고팀 역사상 처음으로 포스트시즌 진출과 한국시리즈 진출의 성과를 냈고 전신팀인 삼미, 청보보다는 확실히 잘했기 때문이다.[9] 특히 2024년 기준으로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이 된 1980년대 초중반 출생자들 중 인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이라면 아련한 추억이 떠오르는 구단이다.[10]
공의식, 여태구, 원원근 등 다소 이름이 특이한 선수들이 많았던 구단이기도 하다.
2. 역사
1988~1993 엠블럼 | 1994~1995 엠블럼 |
2.1. 창단
▲ 1988년 3월 8일 인천시민회관에서 열린 태평양 돌핀스 창단식 |
태평양화학은 청보 핀토스를 인수하기 이전부터 프로야구단 창단을 추진한 적이 있다. 1984년 KBO가 7번째 구단에 대한 창단 신청을 받을 당시 태평양화학도 창단 신청서를 넣었던 것.[11] 이 당시에도 태평양의 희망 연고지는 이북5도였다. 태평양이 이북5도를 고집한 것은 태평양의 창업주이자 당시 회장이었던 서성환이 황해도 평산군에서 자란 실향민[12]이었고 서 회장의 어머니는 개성상인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1984년 이북5도 연고의 제7구단 창단을 추진할 당시 "야구를 통해 실향민들의 애환을 달래주겠다"는 거창한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그래서 NPB의 지바 롯데 마린스처럼 집시 롯데의 모습을 보여 주겠다라는 기사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KBO는 제7구단의 연고지로 OB 베어스의 서울 연고지 이전으로 자리가 빈 충청도 지역에 우선권을 주기로 내부 결정을 내렸고 결국 충청남도 연고 기업이던 한국화약그룹으로 프로야구단 창단 기회가 갔다. 이 때 창단된 팀이 바로 빙그레 이글스. 7구단 독자 창단 실패 이후 절치부심하던 태평양화학은 경영난으로 채권 은행에 야구단 매각 의사를 밝힌 청보식품과 잽싸게 매각 교섭에 착수했고 결국 청보 핀토스를 인수해 태평양 돌핀스 창단에 이르게 된다. 정확히는 태평양그룹 측이 동명의 신규 법인을 세워 핀토스를 인수한 것이다.
어쨌든 태평양화학이 청보 핀토스를 인수해 역대 세 번째 인천 연고팀을 창단하게 됐는데 팀명을 새로 정하는 과정에서부터 난항에 부딪혔다. 태평양 프런트는 당초 팀의 이름을 "태평양 아모레"로 지으려고 했다가 엄청난 반발에 부딪혀 공모를 통해 결국 돌핀스로 지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모레라는 이름을 포기한 이유는 너무 여성스럽다고. 게다가 너무 장삿속이란 이야기도 있었다. 알다시피 아모레는 당시 태평양화학이 판매했던 화장품 브랜드였고 훗날 이 브랜드가 회사의 공식 명칭이 된다. 당시 공모된 팀명도 제각각인데 돌핀, 허리케인, 죠스, 쾌남, 멍게(...), 해삼(...)
참고로 팀명인 돌핀스는 역대 KBO 리그 팀명 & 마스코트 중 유일하게 바다에서 사는 동물이다. 그러나 인천팀의 마스코트로 돌고래는 다소 부자연스럽다.[14]
당초 야구단에 사용하려 했던 브랜드명인 아모레는 후에 아모레퍼시픽이라는 이름으로 모기업의 원 이름인 태평양화학을 대신하게 된다.
2.2. 팀 컬러
예로부터 인천지역은 명투수 들이 샘솟듯 나오던 투수의 요람이었다.[15] 그 덕분에 팀의 투수력은 항상 리그 정상권에[16] 있었다. 한 보기로 팀 최초의 포스트시즌 진출이었던 1989년 리그 평균자책점 2, 3, 4위를 당시 신인이었던 박정현, 최창호, 정명원[17]의 '짠물 트리오'가 차지했을 정도.[18]투수 왕국이라는 별칭은 유명한 투수들을 연이어 배출했던 인천+경기+강원 연고에 힘입은 결과였다. 많은 사람들이 투수왕국 하면 해태를 떠올리지만[19], 선발에 비해 그럭 저럭이었던 불펜진을 가진 해태에 비해, 태평양은 선발부터 마무리까지 역사에 남을 수준급의 투수들을 거느렸다. 오히려 선발이 수준급이지만 불펜이 별로 였던 구단은 빙그레였다. 평균적인 선발레벨은 한희민, 이상군 등을 포함한 빙그레가 해태보다 나았지만 선동열, 조계현, 이강철, 이대진[20] 때문이다.
이렇듯 투수진은 남부럽지 않았지만 공격력은 역대 최악 수준으로 부진해[21] 번번이 팀의 상위권 진출에 걸림돌이 되었다. 위에 언급된 신인 짠물 트리오가 40승을 거뒀지만 1989년 팀의 승리는 62승에 그쳤으며,[22] 결국 그 해 삼성 라이온즈와의 준플레이오프는 박정현의 투혼으로 이겨냈으나[23], 어렵사리 진출한 플레이오프에서 해태 타이거즈에 1승도 못 건지고 탈락하고 말았다.
이런 공격력과 투수진 사이의 극심한 격차로 인해 붙은 팀 별명은 짠물야구. 더불어 인천 출신인 사람을 '인천 짠물' 또는 짠돌이로 부르던 당시의 지역드립도 영향을 미쳤다. 1루수 김경기[24]와 청보 핀토스에서의 활약을 이어나가 4번타자를 맡았던 포수 김동기[25], LG에 박준태를 내주며 데려온 좌익수 윤덕규 외에는 정말 공격을 맡아줄 타자가 없었다. 그나마 테이블세터진에서 1988~1990시즌까지 해태왕조 초기 핵심 인물인 김일권이 해태시절 해보지도 못한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인 3할의 타율이나(1988시즌), 40개 이상의 도루(1989시즌 62도루, 1990시즌 48도루)로 활약하거나, 그에 버금가는 활약했던 김일권의 후임 1번타자 이희성을 제외하면 6번타자 밑의 하위타선은 문자 그대로 암울했다. 1번타자를 보조할 확실한 2번타자가 없었던 것은 덤. 그나마 이희성도 1992, 1994시즌에 부상으로 빠졌었고, 이희성과 더불어 테이블세터 역할을 했던 여태구도 1992년에만 반짝한 정도였다. 여태구는 준주전 정도의 선수로 기억남을 뿐. 이 짠물 타선이 극에 달한 1993년에는 팀 출루율 .290, 팀 장타율 .299, 팀 OPS .589로 타격 지표에서만 KBO 역사상 최악의 기록을 세 개나 세우게 되며, 팀은 당연히 꼴찌를 하고 말았다.[26]
2.3. 초기 (1988시즌)
자세한 내용은 태평양 돌핀스/1988년 문서 참고하십시오.태평양그룹은 처음에 의욕적으로 프로야구에 뛰어들었는데 그룹 실세인 신동관 수석부회장[27]이 야구단 사장을 맡을 정도였다. 애초에 프로 원년 시절부터 꼴찌권에 맴돌던 만년 약체팀 청보 핀토스를 인수한 탓에 팀 전력은 절망 그 자체였는데, 이미 개막이 코앞으로 다가온 시점인 1988년 3월 9일에 팀을 공식 창단했던 만큼[28] 첫 시즌이었던 1988년 시즌은 어떠한 전력 변화도 없이 기존의 청보 핀토스의 선수진 및 코칭 스태프를 그대로 데리고 시즌에 임해야 했다.
하지만 연말에 코칭 스태프의 대대적인 교체가 예상되었던 만큼 현장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진 상태였고, 결국 시즌 초반 1승 14패라는 최악의 부진을 보였다.[29] 결국 초대 감독인 강태정 감독이 경질되고, 2군에서 투수코치로 있던 임신근 감독대행을 4월 22일 체제로 남은 시즌을 치렀다. 임신근 감독대행은 그래도 전기리그에서 MBC를 밀어내고 탈꼴찌에 성공하면서 나락으로 떨어진 팀분위기를 어느 정도 수습하였으나 하위권을 탈출하는 데에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시즌 종료와 동시에 경질되었다.
2.4. 김성근 시절 (1989~1990시즌)
자세한 내용은 태평양 돌핀스/1989년 문서 참고하십시오.첫 시즌을 그렇게 허무하게 날린 태평양은 시즌이 끝나면서 대대적인 투자와 함께 팀 개편에 들어갔다. OB에서 임기가 종료된 김성근을 신임 감독으로 영입했다. 김성근은 자신과 함께 몇몇 코치들을 함께 영입해줄 것을 요청[30]했는데, 어차피 기존의 청보 출신 코치들을 물갈이할 계획이었던 태평양 구단은 김성근의 요구를 받아들여 코치진까지 싹 물갈이 했다. 이어 태평양은 대대적인 전력 보강에 들어갔다. 비시즌 동안 이충우, 정영기, 천창호, 김한근, 이광길 등을 영입했고, 시즌이 시작된 후에도 적극적인 트레이드로 전력 보강을 이어나갔다. 이렇게 보강된 전력에 더해 투수 신인 트로이카(박정현-최창호-정명원)가 혜성처럼 나타나 맹활약했다. 한편 수원 야구장(현 수원 케이티 위즈 파크)이 완공되면서 기존의 춘천 구장 대신 제2구장으로 쓰이게 된다.
오대산 극기훈련을 통해 정신무장과 혹독한 훈련을 견디어 낸 태평양은 1989년 일대 파란을 몰고 갔다. 일단 전후기 시즌이 아닌 풀시즌으로 치른 성적으로 가을야구에 진출 할 수 있었다. 당시 신인 3인방은 팀의 62승 중 64.5%에 해당하는 40승을 합작하며[31] 정규시즌 평균자책점 2, 3, 4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들의 맹활약을 바탕으로 태평양은 7개 구단 중 3위를 기록하며 '''인천 연고팀 사상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정규시즌 3위로 준플레이오프에 오른 태평양은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2승 1패를 거두며[32]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당대 최강의 무적 해태 타이거즈를 넘지 못하고 결국 3전 전패로 무너지고 말았다.[33]
그러나 태평양의 돌풍은 다음 년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제일 큰 문제는 훈련 부족이었는데, 최창호, 정명원, 김동기 등 주축 선수들이 지루한 연봉 싸움으로 전지훈련에 참가하지 못했다. 김성근 감독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며 버텼지만 4강은 너무도 멀리 있었다. 5할에 가까운 승률(0.496)을 기록한게 기적에 가까울 정도였다. 또한 이 과정에서 모기업이 점차 팀을 외면하기 시작하면서, 팀은 점점 침체일로에 빠지고 있었다.
태평양 그룹의 실세였던 신동관 수석부회장은 프로야구가 그룹의 이미지 개선과 인지도 증가에 효과가 있다는 점을 깨닫고 야구단 창단에 의욕적으로 참여했고, 초기에는 야구단에게 많은 지원을 해줬다. 애초에 김성근 선임 과정에서 김성근의 21개조 요구 사항을 모두 들어준 것이 대표적. 그러나 1989년 오대산 극기훈련비 문제에서의 마찰, 1990년 선수들의 연봉 협상 분쟁, 임호균 각서 파동으로 불리는 김성근과의 갈등 등으로 오히려 이미지가 실추되면서 태평양 모기업의 야구에 대한 관심은 점차 식어갔고, 무엇보다 타 종목보다 자금력이 많이 필요했던 야구단은 태평양 정도의 기업에게는 지나치게 큰 부담이었다.
특히 제일 큰 문제는 관객층이었다. 태평양은 화장품 회사인 만큼 주 고객층이 여성이었던 반면 당시 야구판의 주요 관객은 남성이었고, 심지어 1990년대에는 남성 화장품 시장도 아직 형성되기 전이었다. 즉 들이는 돈에 비해 인지도나 이미지 개선에 썩 도움이 되는 상황도 아니었는데, 오히려 논란만 계속 일어나는 판국이었다. 그 결과 신동관은 야구단에 대한 관심을 점차 끊었고, 1990년대 초에 높아진 농구 열풍에 편승하여 원래 자신의 주력 분야였던 여자 농구 쪽에 다시금 집중하기 시작했다.[34]
결국 신동관은 아직 임기가 1년 남았던 김성근을 경질하고 후임 감독으로 국내 최고의 타격이론가였던 박영길을 영입했다.
2.4.1. 1989년 오대산 극기훈련과 첫 포스트시즌
태평양화학 식품사업부에서 제조한 인삼맛 음료 '고려왕'의 지면광고.[35]
[36]
태평양의 1989년 돌풍을 언급할 때면 빠지지 않는 에피소드가 바로 '오대산 극기훈련'이다. 인천야구 100년의 역사를 기술한 이종남 기자의 <종횡무진 인천야구>에도 이 에피소드가 자세히 나와있다.
1988년 말 태평양 감독으로 취임한 김성근은 당시 자신이 신봉하던 역술인이자 의료인(?)[37]이었던 변영호, 일명 변도사[38]의 추천으로 1989년 1월 선수단 전원을 이끌고 오대산으로 떠난다.
이 당시 태평양 선수단이 오대산에서 했던 훈련은 야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내용이었다. 얼음이 두껍게 얼어있던 산골 계곡 한가운데에 구멍을 파놓은 뒤 팬티까지 다 벗은 온몸을 차디찬 계곡물에 담그는 '냉탕 15초 입수[39]' 훈련을 비롯해 10㎞ 산악 구보!, 50㎞ 산악 행군?!, 맨발로 눈길 걷기!, 극기 체조!, 알몸 좌선(...???), 산에서 맨손으로 살아 있는 짐승 사냥하기(...???) 등 야구와는 전혀 관련 없는 훈련을 했다.[40]
일각에서는 이 훈련이 심각한 패배주의에 찌들어 있던[41] 선수단의 정신을 개조시키고 자신감을 고취시키는 효과를 창출했다고 서술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양승관이나 임호균 등 일부 선수들이 산악 행군 등의 여파로 크고 작은 부상을 입고 불만을 터뜨렸다는 증언[42]도 있으므로 오대산 극기훈련의 효과에 대해서는 가려서 볼 필요가 있다. 어쨌든 이 훈련 이후 태평양이 사상 처음으로 가을야구에 진출하자 이 당시 야구판 전체에 극기훈련이 대놓고 트렌드처럼 퍼졌다. 특히 김성근의 그림자가 남아 있던 OB 베어스나 구단 고위층이 우승에 목말랐던 삼성 라이온즈도 혹한기 극기훈련 내지는 겨울바다 입수 등의 훈련을 했지만 훈련 과정에서 장점보다 단점이 더 두드러지면서 극기훈련은 야구판에서 사라졌다.
2.5. 박영길 시절 (1991시즌)
1991시즌 후임으로 부임한 박영길 감독은 화끈한 공격야구인 즉, 빅볼 야구를 표방하여 주축 투수들이 모두 부상과 부진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타격 위주의 팀으로 체질 개편을 시도했으며,[43] 김성근이 7.5m로 높혀놓은 도원구장의 펜스를 5m로 내리도록 지시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었다. 그러나 김동기와 김경기를 제외하고 박영길 식의 타격 이론을 소화할 만한 선수가 태평양에는 없었고, 투수진 역시 김성근 시절의 혹사로 태평양 주력 투수 3인방(정명원, 최창호, 박정현)이 동시에 부상과 부진을 겪고 있었다. 게다가 구단의 지원도 비상식적이어서 1991년 스프링캠프는 롯데 2군 홈구장인 부산 구덕 야구장에서 더부살이하며 소화해야 했고, 코칭스태프는 본인의 의중에 따라 선발한 코치 하나 없이 잔존 김성근 사단 일색이었다.다만 그러한 요소들을 제외해도 박영길의 운영법은 타선에서의 향상을 도모했을 뿐, 이미 지쳐 있는 투수진에 대한 어떤 조치나 배려도 없이 김성근 이상의 혹사가 자행되었다. 1991년 최창호는 45경기 233 1/3이닝으로 김성근 시절의 기록을 뛰어넘는 혹사[44]를 당했으며, 박정현은 30경기 184이닝[45], 정명원은 49경기 132이닝[46]을 기록하며 김성근 시절과 다름없는 시즌을 보냈다. 즉 김성근이 시작한 혹사를 박영길이 완성한 꼴로 이어졌으며, 1992년 정동진 감독 시절 해당 선수들이 모조리 무너져내리면서 모두 수술대에 올랐다.
결국 그해 팀 성적 5위라는 그저 그런 성적을 기록하며 프런트와의 불화로 1년 만에 감독직에서 물러나 정동진에게 감독직을 넘겼다.[47] 사실 성적 5위면 태평양 신화를 썼다는 김성근 감독 2년차 성적과 동일한 것이고,[48] 5-8-8을 기록한 김용희나 선동열과 비교해도 크게 밀리는 건 없었지만, 그해 그 짧은 인천 도원구장에서 두 자릿수 홈런을 친 선수가 아무도 없었다.[49] 심지어 1991년 피홈런은 100개로 1990년 47개 대비 2배 이상 상승했으니, 사실상 남 좋은 일만 해준 셈이었다.
2.6. 정동진 시절 (1992~1995시즌)
1992시즌 부임[50]한 정동진 감독은 주축 투수들이 모두 혹사 후유증을 겪고 있는 것을 파악하고 박정현, 정명원, 최창호 등 주축 투수들을 전부 수술대로 보냈다. 그렇게 태평양은 사실상 주전 투수들이 모두 없는 상황에서 92, 93시즌을 보내며 6위, 8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부진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정동진 감독은 재활 투수들의 무리한 조기 투입을 지양하고,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기다리며 리빌딩에 나섰다.당시만 해도 선수단 리빌딩에 대한 관념이 부족하던 시절이었고 성적이 부진하면 일단 감독부터 자르고 보자는 풍조가 만연하던 시절이라 중도 퇴진이 예상됐지만 뜻밖에도 팀 수뇌부는 정 감독에게 마지막 기회를 줬다. 역대 인천 연고팀 감독 중 계약 기간을 채운 이가 단 한 명도 없는 점과 주전들의 잇따른 부상으로 전력 공백이 컸던 점을 고려한 것이다.
2.6.1. 영광의 1994년
돌풍 돌핀스! 태풍 태평양!
1994년 당시 구단 캐치프레이즈
1994년 당시 구단 캐치프레이즈
1994년 마침내 수술을 받은 선수들이 모두 복귀하면서 한동안 침묵하던 태평양은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전신인 삼미 슈퍼스타즈가 1982년 팀을 창단한 이후 역대 최고 성적인 준우승[51]을 거두며 정점을 찍게 된다. 최상덕(13승)-김홍집-최창호(이상 12승)-안병원(11승)이 모두 두 자릿 수의 승리를 달성하고[52] 부상 이후 길게 연투를 못하게 되자 전업 마무리로 전환한 정명원이[53] KBO 리그 최초이자 단일 시즌 최다 세이브 기록인 44세이브포인트(4구원승40세이브 거기다가 100이닝을 넘게 던졌다. 올스타전 MVP까지 받은건 덤 2023년 올스타전 기준으로 현재까지 올스타전에서 투수가 MVP를 받은 마지막 사례이다. 첫번째는 김시진)를 올리며[54] 환상적인 투수진을 구축했다.
타선에서는 인천야구 역사에서 사실상 처음으로 제대로 된 클린업 트리오가 가동된 해였는데 윤덕규의 정교한 타격, 김경기와 김동기의 강력한 한방을 앞세워 투수들의 짠물 피칭이 승리로 연결될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했다. 위 3명 외에도 염경엽, 김인호, 김용국 등도 각자의 자리에서 쏠쏠한 활약을 했고 신인으로 입단한 이숭용도 나름대로 존재감을 뽐내기 시작[55]했다. 양승관, 김진우 등 팀내 선수 1~2명의 타격에만 의존해야 했던 시절을 회상한다면 그야말로 천지개벽 수준의 변화인 셈이다.
그 결과 그해 페넌트레이스에서 2위를 거두고 플레이오프에 직행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한화 이글스를 상대로 김경기 등이 홈런 6방을 터뜨리며[56] 3연승으로 발라버린다. 그리고 인천팀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시리즈에 올라갔으나...하필 상대는 LG 트윈스.[57] 이상훈- 김태원-정삼흠으로 이루어진 15승 투수 3인방과 인현배 라는 10승의 신인투수도 있었다. 거기다가 유지현-서용빈-김재현의 신인 트로이카. 김기범-차동철-차명석-김용수의 막강 계투진으로 최강의 리즈 시절을 달리고 있던 팀이었다.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김홍집이 11이닝 141구를 던지고도
1994년 당시 숭의야구장과 수원 야구장을 찾은 관중수는 47만6,277명(1경기당 평균 7560명)으로 2007년 SK 와이번스가 65만6,426명의 관중을 동원하기 전까지 인천 연고팀 최다 관중 동원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당시 다른 팀에 비해 초라했던 성적, 낙후하고 협소한 시설[60] 등 태평양의 열악한 구단 인프라를 감안하면 이 해의 흥행 기록은 실로 대단했다고 볼 수 있다.
2.7. 매각
막강 마운드를 앞세워 계속될 것 같던 1994년의 영광은 일회성으로 끝났다. 1995년 시즌 대졸 신인 위재영이 입단해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전년도 좋은 성적을 보인 최창호, 신인 최상덕 등등 괜찮았던 투수진들이 다시 부진했고 전년도와 다를 바 없는 물방망이 타선이 이어지면서 7위로 추락했다. 게다가 구단운영에 어려움이 생기자 태평양은 결국 1995 시즌이 끝난 후, 어떻게든 야구판에 끼어들려 하던 현대그룹에 매각되어 현대 유니콘스가[61] 된다. 그리고 이 때 구축한 막강한 투수진은 현대 유니콘스의 1996년 한국시리즈 준우승, 1998년 한국시리즈 우승의 밑거름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로 태평양이 구단을 현대로 팔아넘길 때 무려 470억원을 받으면서 한국 프로야구 사상 유일하게 시세차익을 남기는 데 성공한 구단이 되었다.[62]이 470억원은 KBO 리그 구단 매각대금으로는 2021년 신세계의 SK 와이번스 인수(인수금액 1352억 8000만원) 전까지 무려 26년간 유지됐던 금액이다. 그 기간 동안의 물가상승률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태평양 돌핀스 매각액인 470억원이 시세차익을 더 남긴 셈. 이때 태평양그룹이 매각을 결정한 것은 그야말로 신의 한수라고 할만 한데, 이때 현대의 인수 제안을 거절했던 쌍방울 레이더스는 고작 6년 뒤 IMF 금융위기의 여파로 그룹 자체가 공중분해되었고, 인수할 기업이 없어 정부가 SK그룹을 대체기업으로 정해 참가를 종용한 결과 SK로부터 한 푼도 받지 못하고[63] 그대로 사라졌다. 태평양이 청보를 인수할 당시 인수 과정도 기가 막혔다. 청보 측에 줘야 할 인수대금을 현금으로 지불하지 않고 청보가 갖고 있던 50억원을 8년 거치-7년 분할상환 조건에 떠안는 방법으로 퉁쳤다. 그런데 거치기간이 끝나고 부채의 분할 상환이 개시되는 1996년 현대에 구단을 팔아버렸는데 이 당시 태평양은 당초 부채 50억원+8년간 이자 20억원, 총 70억원의 부채를 현대에 넘겼고 별도로 구단의 가치를 환산한 현금 400억원을 별도의 매각대금으로 받고 구단을 팔았다. 결국 돈 한 푼 안들이고 빚만 떠안는 조건으로 야구단을 헐값에 사왔다가 통큰 매수자에게 냅다 팔아버리고 대량의 현금을 먹으며 엄청난 시세 차익을 누린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현대그룹의 행동이 매우 무모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 당시 현대그룹은 엄청난 현금 동원력을 자랑하던 국내 제1의 재벌 기업이었기 때문에[64][65] 가능한 얘기였다(...).
1992년 이미 매각설이 제기된 적이 있었다. 이 당시 태평양그룹이 구조조정 차원에서 태평양증권을 매물로 내놨는데 선경그룹이 협상 대상자로 앉았다. 당시 태평양 측은 증권사와 야구단을 함께 가져가달라고 요청했지만 선경 측은 "증권사"만 가져가겠다고 해서 증권사만 매각됐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회사가 SK증권.[66] 위 기사는 1992년 시즌 시작전에 모 스포츠신문에 나온 것이다. 그리고 1991년 말 병역비리 사건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사실 이 사건은 스포츠계를 기웃거리며 이름값을 얻던 한의원 원장 박명득과 당시 태평양 돌핀스 단장이었던 강창호가 주축 인물이었다. 정민태를 비롯한 가내영, 김동기등 선수들에게 돈을 걷은 것은 단장 강창호였고, 돈을 받아 병무청 군의관들에게 전달한 것은 박명득이었다. 한마디로, 구단이 병역 브로커 역할을 하며 선수들의 병역 비리를 직접 주선한 대단히 질이 안 좋은 사건이었다. 이게 21세기에 일어난 사건이었다면 무조건 구단 해체각이었을 텐데, 때는 1992년으로 '병역 비리, 그까이꺼...' 라는 분위기였고 어차피 돌핀스 자체가 곧 선경에 팔리니 마니 하는 상황이었기에 결국 흐지부지 묻혔다.
그렇게 8년이 지나고 SK그룹도 야구팀을 창단[67]하는데 그게 SK 와이번스였다.
태평양 돌핀스 시절의 응원가는 "돌핀스~돌핀스~ 무적함대 돌핀스~"라는 가사를 썼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항목을 참고.
3. 역대 선수
- 연도에 관계 없이 가나다 순으로 선수 이름을 작성. 등번호가 확인되지 않은 선수들은 미/무 표기.
2011 시즌을 마지막으로 이숭용이 은퇴하며 태평양 유니폼을 입었던 선수들은 모두 은퇴했다. 태평양과 경기를 가져본 상대팀 선수중에서도 마지막 현역 선수였던 당시 해태의 임창용이 2019년 3월부로 은퇴를 하게 되어 태평양 돌핀스는 완전한 추억의 팀으로 남게 되었다.[68][69]
3.1. 투수
배번 | 이름 | 데뷔년도 | 소속기간 | 은퇴년도 | 비고 |
47 | 가내영 | 1990(태평양) | 1990[70]~1995 | 2003(KIA) | 인천 연수구유소년야구단[71] 감독 |
43 | 강민기 | 1990(롯데) | 1994~1995 | 1996(현대) | |
33 | 곽병찬 | 1994(태평양) | 1994~1995 | 1996(현대) | 울산 항운노조 단장회장[72] |
34 | 김경남[73] | 1987(OB) | 1988 | 1988(태평양) | |
39 | 김력 | 1990(태평양) | 1990~1992 | 1993(롯데) | |
67 | 김민범 | 1992(태평양) | 1994~1995 | 2007(현대) | 양주 레볼루션 투수코치 |
30 | 김민태 | 1991(태평양) | 1991~1994 | 1998(한화) | 부천고등학교 감독 |
68 | 김봉희 | 1992(태평양) | 1992 | 1992(태평양) | 대한야구협회 고교야구 심판 |
17 | 김신부 | 1982(난카이) | 1988~1989 | 1990(LG) | |
47 | 김수경(1969)[74] | 1988(태평양) | 1988 | 1988(태평양) | |
27 | 김억만 | 1995(태평양) | 1995 | 1996(현대) | |
19 | 김일부 | 1982(주니치) | 1988 | 1988(태평양) | |
65 | 김지용 | 1992(태평양) | 1992~1993 | 1993(태평양) | |
50 | 김홍만 | 1991(태평양) | 1991~1992 | 1992(태평양) | 동해시유소년야구단 감독 |
11 | 김홍집 | 1993(태평양) | 1993~1995 | 2003(한화) | 인천 부평구 리틀야구단 지도자 |
66 | 나성열[75] | 1992(태평양) | 1992~1994 | 1998(쌍방울) | |
18 | 노민승 | 1989(태평양) | 1989~1990 | 1990(태평양) | |
노종우 | 1992(LG) | 1993~1995 | 1997(현대) | [76] | |
57 | 노승욱 | 1993(태평양) | 1993~1995 | 2007(롯데) | 안산 중앙중학교 투수코치 |
38 | 문창환 | 1994(태평양) | 1994~1995 | 2001(현대) | 파주 챌린저스 코치 |
65 | 박병원 | 1995(태평양) | 1995 | 1996(현대) | |
45 | 박상범 | 1988(태평양) | 1988~1994 | 1994(태평양) | |
34 | 박진석 | 1994(태평양) | 1994~1995 | 1996(현대) | |
58 | 박은진[77] | 1989(태평양) | 1989~1995 | 1996(한화) | [78] |
21 | 박정현 | 1988(태평양) | 1988~1995 | 2000(SK) | |
26 | 배경환 | 1983(롯데) | 1988~1990 | 1990(태평양) | |
40 | 신상윤 | 1991(태평양) | 1991~1995 | 1997(현대) | |
19 | 신완근 | 1988(태평양) | 1988~1993 | 1993(태평양) | 사회인야구단 활동중 |
59 | 안병원 | 1992(태평양) | 1992~1995 | 2003(LG) | 경남대학교 투수코치 |
13 | 양상문 | 1985(롯데) | 1988~1993 | 1993(태평양) | 한화 이글스 1군 투수코치[79] |
50 | 양호용 | 1994(태평양) | 1994~1995 | 1995(태평양) | |
61 | 오한빈 | 1990(LG) | 1992~1995 | 1995(태평양) | |
18 | 위재영 | 1995(태평양) | 1995 | 2007(SK) | |
이기상 | 1994(태평양) | 1994 | 1994(태평양) | ||
57 | 이상구 | 1988(태평양) | 1988~1990 | 1991(롯데) | |
29 | 이충우 | 1985(롯데) | 1988 | 1988(태평양) | |
14 | 임호균 | 1983(삼미) | 1988~1990 | 1990(태평양) | |
14 | 전일수[80] | 1991(태평양) | 1991~1992 | 1994(LG) | KBO 리그 심판[81] |
64 | 전준호(1975) | 1994(태평양) | 1994~1995 | 2011(SK) | [82] |
28 | 정명원[83] | 1989(태평양) | 1989~1995 | 2000(현대) | 前 KIA 타이거즈 잔류군 투수코치 |
49 | 정명진 | 1989(태평양) | 1989~1992 | 1992(태평양) | |
20 | 정민태 | 1992(태평양) | 1992~1995 | 2008(KIA) | 삼성 라이온즈 1군 투수코치[84] |
47 | 조도연 | 1984(해태) | 1989 | 1989(태평양) | |
24 | 조병천 | 1986(청보) | 1988~1992 | 1992(태평양) | |
53 | 조영상 | 1990(태평양) | 1990~1992 | 1993(OB) | 인천 신흥중학교 감독 |
41 | 조웅천 | 1989(태평양) | 1989~1995 | 2009(SK) | 두산 베어스 1군 투수코치[85] |
45 | 지병호[86] | 1995(태평양) | 1995 | 1995(태평양) | 인천웨이브스 감독 |
18 | 천창호 | 1982(롯데) | 1989 | 1989(태평양) | |
41 | 최계훈 | 1984(삼미) | 1988~1990 | 1990(태평양) | |
33 | 최용철 | 1990(태평양) | 1990 | 1990(태평양) | |
30 | 최상덕 | 1994(태평양) | 1994~1995 | 2009(한화) | LG 트윈스 잔류군 투수코치[87] |
31 | 최창호[88] | 1987(청보) | 1988~1995 | 2002(LG) | [89] |
27 | 허정욱 | 1989(태평양) | 1989~1994 | 1994(태평양) | SSG 랜더스 스카우트[90] |
43 | 홍학석 | 1990(태평양) | 1990~1992 | 1992(태평양) |
3.2. 포수
배번 | 이름 | 데뷔년도 | 소속기간 | 은퇴년도 | 비고 |
12 | 김성태 | 1994(태평양) | 1994~1995 | 1998(현대) | |
22 | 금광옥 | 1982(삼미) | 1988 | 1988(태평양) | |
22 | 김경문 | 1982(OB) | 1990 | 1991(OB) | 한화 이글스 1군 감독[91] |
35 | 김동기 | 1986(청보) | 1988~1995 | 1996(현대) | 前 인천신흥초등학교 감독 |
62 | 김선우 | 1992(태평양) | 1992~1994 | 1994(태평양) | |
32 | 김진한 | 1989(태평양) | 1989~1992 | 1992(태평양) | |
24 | 도명진[92] | 1995(태평양) | 1995 | 1996(현대) | 부천고등학교 코치 |
62 | 박민규 | 1995(태평양) | 1995 | 1997(해태) | 제천시유소년야구단 감독[93] |
22 | 박상일 | 1995(태평양) | 1995 | 1996(현대) | |
37 | 이재주 | 1992(태평양) | 1992~1995 | 2009(KIA) | |
25 | 장광호 | 1992(태평양) | 1992~1995 | 2001(현대) | 덕적고등학교 감독 |
25 | 조경택 | 1989(태평양) | 1989 | 2003(한화) | 두산 베어스 잔류군/재활군 코치[94] |
23 | 최광천 | 1990(태평양) | 1990~1993 | 1993(태평양) | [95] |
25[96],23[97] | 최영환 | 1982(삼미) | 1988~1991 | 1991(태평양) | [98] |
3.3. 내야수
배번 | 이름 | 데뷔년도 | 소속기간 | 은퇴년도 | 비고 |
13 | 권두조 | 1982(롯데) | 1988[99] | 1988(태평양) | 거제BC 감독[100] |
55 | 권준헌 | 1990(태평양) | 1990~1995 | 2008(한화) | 인천 연수구리틀야구단 코치[101][102] |
37[103],00[104] | 김경기 | 1990(태평양) | 1990~1995 | 2001(SK) | 서울 구로구 우신고등학교 감독[105] |
52 | 김건우(1976) | 1995(태평양) | 1995 | 1995(태평양) | |
25 | 김바위 | 1982(MBC) | 1988~1989 | 1991(태평양) | 롯데 자이언츠 원정 전력분석원 |
2 | 김성갑 | 1985(삼성) | 1991~1995 | 1995(태평양) | 한화 이글스 잔류군 총괄 코치 [106] |
8 | 김용국 | 1985(삼성) | 1994~1995 | 1995(태평양) | TBC 드림FM 야구 해설위원[107] |
6 | 김인호 | 1989(롯데) | 1990~1995 | 2001(현대) | 광주진흥고 감독 |
36 | 김일환 | 1982(롯데) | 1988~1989 | 1989(태평양) | |
7 | 김재박 | 1982(MBC) | 1992 | 1992(태평양) | 연천 미라클 자문위원 |
38 | 김풍기 | 1989(태평양) | 1989~1991 | 1991(태평양) | KBO 리그 심판 [108] |
39 | 김한근 | 1982(삼성) | 1989~1990 | 1990(태평양) | |
9[109] | 백성진 | 1991(태평양) | 1991~1994 | 1997(현대) | LG 트윈스 스카우터팀 팀장 |
9 | 손차훈 | 1993(태평양) | 1993~1995 | 2001(SK) | 한화 이글스 전력 강화 코디네이터 |
44 | 송형석 | 1988(태평양) | 1988 | 1998(태평양) | |
42 | 신규한 | 1995(태평양) | 1995 | 1996(현대) | |
5[110] | 염경엽 | 1991(태평양) | 1991~1995 | 2000(현대) | LG 트윈스 1군 감독[111] |
1[112] | 원원근 | 1988(태평양) | 1988~1995 | 1995(태평양) | 남양주 스왈로스 선수[113] |
양회열 | 1990(태평양) | 1990 | 1997(해태) | ||
56 | 유동효 | 1988(태평양) | 1988~1989 | 1994(롯데) | 삼성 라이온즈 스카우트 팀장 |
7 | 유영환 | 1992(태평양) | 1992~1994 | 1995(태평양) | [114] |
34 | 윤성훈 | 1989(태평양) | 1990~1992 | 1993(쌍방울) | 서울 노원구 청원고등학교 감독 |
1 | 이광길 | 1983(삼미) | 1989~1990 | 1991(삼성) | KNN 파워FM 야구 해설위원 |
60 | 이경호 | 1992(태평양) | 1992~1995 | 1998(현대) | |
17 | 이근엽 | 1991(태평양) | 1991~1995 | 1999(쌍방울) | 인천중구 리틀야구단 감독 |
16 | 이선웅 | 1983(삼미) | 1988~1992 | 1992(태평양) | |
16 | 이용주 | 1995(태평양) | 1995 | 2002(현대) | |
46 | 이종호 | 1989(빙그레) | 1995[115] | 1996(현대) | |
57 | 임진수 | 1990(태평양) | 1990~1991 | 1991(태평양) | 前 넥센 히어로즈 잔류군 타격/수비코치 |
2 | 정영기 | 1982(MBC) | 1989 | 1990(태평양) | |
6 | 정진호 | 1983(삼성) | 1988~1990 | 1990(태평양) | |
33 | 주경업 | 1991(태평양) | 1991~1993 | 1993(태평양) | |
33 | 최인선 | 1994(태평양) | 1994~1995 | 1997(현대) | |
33 | 최용철 | 1990(태평양) | 1990 | 1990(태평양) | |
23 | 하득인 | 1994(태평양) | 1994~1995 | 1997(현대) | 한인 야구팀 코치 겸 고문[116] |
48 | 황윤성 | 1992(태평양) | 1992~1995 | 2006(두산) | 안산시 중앙중 감독 |
3.4. 외야수
배번 | 이름 | 데뷔년도 | 소속기간 | 은퇴년도 | 비고 |
9 | 강광회 | 1990(태평양) | 1990~1992 | 1994(쌍방울) | KBO 리그 심판 [117] |
44 | 강영수(1965)[118] | 1989(삼성) | 1995 | 1997(쌍방울) | |
36 | 공의식 | 1993(태평양) | 1993~1995 | 1997(쌍방울) | 유원대학교 감독 |
4 | 곽권희 | 1988(태평양) | 1988~1992 | 1992(태평양) | |
24 | 구윤 | 1986(삼성) | 1993~1994 | 1994(태평양) | |
39 | 계기범 | 1993(태평양) | 1993~1994 | 1997(현대) | 인천고등학교 감독 |
14 | 김갑중 | 1993(태평양) | 1993~1995 | 1999(쌍방울) | |
19 | 김병철 | 1995(태평양) | 1995 | 1997(현대) | |
10 | 김윤환(1957) | 1984(해태) | 1988~1991 | 1991(태평양) | 단월중학교 감독 |
7 | 김일권 | 1982(해태) | 1988~1990 | 1991(LG) | |
0[119] | 김재상 | 1982(롯데) | 1991 | 1991(태평양) | 前 부경고등학교 감독 |
36 | 김종희 | 1995(태평양) | 1995 | 1996(현대) | |
12 | 김진규 | 1988(태평양) | 1988~1993 | 1993(태평양) | |
23 | 김홍기 | 1991(태평양) | 1991~1993 | 1993(태평양) | [120] |
56 | 류관모 | 1989(태평양) | 1989~1991 | 1991(태평양) | |
11 | 박준태(1967) | 1989(태평양) | 1989~1992.6 | 1998(LG) | |
16 | 백성진 | 1991(태평양) | 1991~1994 | 1997(현대) | LG 트윈스 스카우트 팀장 |
29 | 서정민 | 1992(태평양) | 1992~1995 | 1995(태평양) | |
7 | 송재박 | 1975(다이헤이요) | 1991 | 1991(태평양) | 두산 베어스 2군 코디네이터 |
8 | 양승관 | 1982(삼미) | 1988~1989 | 1990(LG) | 파주 챌린저스 단장 |
40 | 여태구 | 1988(태평양) | 1988~1995 | 1995(태평양) | [121] |
38 | 오상욱 | 1992(태평양) | 1992 | 1992(태평양) | |
3 | 윤덕규 | 1985(MBC) | 1992~1995 | 1997(현대) | |
4 | 윤용하 | 1991(삼성) | 1994~1995 | 1995(태평양) | 인천 미추홀리그 위너스팀 감독 |
36 | 이광근 | 1986(청보) | 1988~1992 | 1992(태평양) | |
46 | 이상대 | 1989(태평양) | 1989~1990 | 1994(쌍방울) | 現 포항제철중 감독 |
10 | 이숭용[122] | 1994(태평양) | 1994~1995 | 2011(넥센) | SSG 랜더스 1군 감독 |
87 | 이해창[123] | 1982(MBC) | 1988~1989 | 1989(태평양) | |
51 | 이희성 | 1989(태평양) | 1989~1995 | 1997(삼성) | |
49 | 장용대 | 1993(태평양) | 1993~1999[124] | 2001(SK) | [125] |
10 | 장덕영 | 1992(태평양) | 1992~1993 | 1993(태평양) | 경북고69family 감독[126] |
8 | 정문언 | 1981(니혼햄) | 1991~1992 | 1992(태평양) | |
3 | 정상진 | 1987(빙그레) | 1990~1992 | 1992(태평양) | [127] |
1 | 정영진 | 1991(태평양) | 1991~1993 | 1993(태평양) | |
26 | 지화선 | 1993(빙그레) | 1995 | 1997(현대) | [128] |
56 | 최상진 | 1995(태평양) | 1995 | 1995(태평양) | |
0 | 최석(1968) | 1995(태평양) | 1995 | 1995(태평양) | [129] |
63 | 최승호[130] | 1991(태평양) | 1991~1992 | 1992(태평양) | [131] |
37 | 홍문종 | 1976(크라운라이터) | 1989~1990 | 1990(태평양) |
4. 역대 감독
5. 역대 성적
| 우승 |
| 준우승 |
| 포스트시즌 진출 |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
연도 | 정규시즌 순위 | 최종 순위 | 팀 이름 | 경기수 | 승 | 무 | 패 | 승률 |
1988 | 7위/7팀[132] | 7위 | 태평양 돌핀스 | 108 | 34 | 1 | 73 | 0.319 |
1989 | 3위/7팀 | 3위[133] | 120 | 62 | 4 | 54 | 0.533 | |
1990 | 5위/7팀 | 5위 | 120 | 58 | 3 | 59 | 0.496 | |
1991 | 5위/8팀 | 5위 | 126 | 55 | 2 | 69 | 0.444 | |
1992 | 6위/8팀 | 6위 | 126 | 56 | 3 | 67 | 0.456 | |
1993 | 8위/8팀 | 8위 | 126 | 34 | 10 | 82 | 0.310 | |
1994 | 2위/8팀 | 준우승[134] | 126 | 68 | 3 | 55 | 0.552 | |
1995 | 7위/8팀 | 7위 | 126 | 48 | 5 | 73 | 0.401 | |
KBO 리그 통산 8시즌 | 978 | 415 | 31 | 532 | 0.424 | |||
이후 역사는 현대 유니콘스로 |
6. 유니폼
현대 유니콘스/유니폼 문서 참조.7. 응원가
7.1. 공식 응원가
< 1절 > 젊음 하나로 뭉쳐진 우리 터지는 가슴으로 승리를 부른다 저 넓은 대양의 정기를 받은 태평양돌핀스 환희의 순간 위해 오늘을 사른다 승리의 순간 위해 내일을 사른다 아~ 아~ 돌핀스 그 이름에 명예를 건다 (후렴) 돌핀스 돌핀스 무적함대 돌핀스 돌핀스 돌핀스 태평양돌핀스 < 2절 > 투지 하나로 맺은 너와 나 피끓는 가슴으로 영광을 만든다 저 푸른 대양의 정기를 받은 태평양돌핀스 내일의 기쁨 위해 오늘을 사른다 승리의 기쁨 위해 내일을 사른다 아~ 아~ 돌핀스 그 이름에 사랑을 건다 (후렴구 4회 반복) |
7.2. 비공식 응원가
자세한 내용은 연안부두(노래) 문서 참고하십시오.연안부두 어쩌다 한번~ 오는 저 배는~ 무슨 사연 싣고 오길래~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마음마다 설레게 하나~ 부두에 꿈을 두고 떠나는 배야~ 갈매기 우는 마음 너는 알겠지~ 말해다오~ 말해다오~ 연안부두 떠나는 배야~ (빠라바라밤~ 빠바밤 빠라바라밤~ 빠바바밤~ 빠바바바바밤~) 바람이 불면~ 파도가 울고~ 배 떠나면 나도 운단다~ 안개 속에~ 가물가물~ 정든 사람 손을 흔드네~ 저무는 연안부두 외로운 불빛~ 홀로 선 이 마음을 달래주는데~ 말해다오~ 말해다오~ 연안부두 떠나는 배야~ |
8. 마스코트
9. 둘러보기
삼청태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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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 | 청보 핀토스 | |
1982년 2월 ~ 1985년 5월 | 1985년 5월 ~ 1987년 10월 | |
태평양 돌핀스 | 현대 유니콘스 | |
1987년 10월 ~ 1995년 9월 | 1995년 9월 ~ 2008년 1월 |
[1] 전신인 삼미 슈퍼스타즈의 창단일로 프랜차이즈 개시일이다.[2] 현재의 의암 야구장과는 다른 곳이다.[3] 당시에는 광역시가 아닌 직할시였었다. 다만 태평양 돌핀스가 매각되기 직전이던 1995년 3월 1일에 인천직할시가 인천광역시로 개칭되었기에 삼청태현중에서 인천이 직할시, 광역시이던 두 시대를 모두 겪은 구단이라 볼 수 있다.[4] 역대 인천 연고팀 중 최장수 구단은 2000년부터 2020년까지 팀을 운영했던 SK 와이번스. 2008년 SK에 의해 기록이 경신되기 이전까지는 인천 연고 최장수 구단이었다. 구단 자체로는 1996년 창단돼 2008년 초까지 구단이 운영된 돌핀스의 후신 현대 유니콘스가 12년이라는 역사를 지녔지만 인천에 터를 잡았던 역사는 1996년부터 1999년까지 불과 4년 뿐이다. 이유는 후술.[5] 당시에는 천문학적인 금액이라 일본에서도 보도 된 적이 있긴하다. 이후 2021년 초 SK 와이번스가 SSG 랜더스에게 매각할때 이 금액의 3배 가량 뛰어넘는 역사를 쓴다.[6] 야구단을 통해 상당한 시세차익을 누렸다. 자세한 사연은 아래에 후술하게 된다.[7] 다만 1989년부터는 기존의 춘천야구장 대신 수원야구장을 제2홈구장으로 쓰게 된다.[8] 삼미 3년 반, 청보 2년 반, 태평양 8년, 현대 4년.[9] 삼미는 괴력의 너구리 장명부가 하드캐리했던 한국프로야구/1983년년 한 해만 반짝으로 잘했을 뿐 1982년, 1984년에 꼴찌를 했고 1985년 팀의 간판이 바뀌기 직전까지는 무려 18연패의 치욕을 겪었다. 삼미의 뒤를 이은 청보는 1986년 신생팀 빙그레 이글스 덕에 꼴찌를 면했고 그래봤자 뒤에서 1등이라 빙그레 없었으면 자동 꼴찌인건 변함이 없었다. 1987년에는 그 빙그레에게도 뒤지며 꼴찌를 하는 등 구단 역사 내내 꼴찌 근처를 떠나지 못했다. 태평양도 하위권에 있던 해가 적지 않았지만 그래도 두 번이나 가을야구에 올랐고 한국시리즈까지도 진출한 성과를 냈다. 특히, 18연패의 기록은 2020년 한화 이글스가 똑같이 작성했었다. 한화 이글스/2020년을 참조.[10] 이 세대의 팬들 중 과거의 향수를 잊지 못하는 이들은 태평양 유니폼을 구매하는 경우도 꽤 있다. 이들이 새기는 마킹의 주인공도 태평양의 주역들인데 1994년 돌핀스 돌풍의 핵심이자 인천야구 최고의 슈퍼스타였던 김경기가 압도적으로 많고 김동기, 정명원, 김홍집, 최창호 등이 '돌핀스 키즈'가 주로 선택하는 이름들이다.[11] 이 당시 창단 신청서를 낸 기업들의 면면을 보면 꽤나 화려하다. 태평양화학을 비롯해 금성사, 한국화약, 국제그룹, 한양, 한일합섬, 농심, 한국야쿠르트, 쌍방울 등 9개 기업이다. 이 중에서 금성사, 한국화약, 쌍방울은 훗날 프로야구단 창단의 꿈을 이뤘다. 반면 한일합섬은 1989년 제8구단 창단 신청 때도 마산시를 중심으로 한 경남 연고 구단 창단을 신청했다가 쌍방울에 밀리면서 프로야구단 창단의 꿈을 접어야 했다. 그리고 당시 6위의 기업이었던 국제그룹은 전두환 정부에 의해 정치자금을 바치지 않았다고(...) 찍혀서 해체당했다. 저기서 농심 그룹은 본래 롯데그룹의 회장이자 신격호의 둘째 동생인 신준호 회장의 그룹이다.[12] 공교롭게도 후신인 현대 유니콘스의 관리인이자 부친인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이 실향민 출신이였다. 회장 자리에서도 내려올때 항상 고향 생각은 여전했다고 한다.[13] 나중에 데뷔하는 이숭용의 프로 초년병 시절 별명이 미스터 쾌남 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다만 이후 흑역사가 되었다. 이유는 매년 개막전이나 시즌 초반에만 화력 좋고 여름엔 타격이 식었다는 존재로...[14] 한반도에 돌고래가 서식하기는 하나 보통은 난류성 해상포유류이기에 주로 제주나 부산, 울산 등지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태평양에는 돌고래가 사니까 괜찮다.[15] 박현식, 서동준, 임호균, 최계훈, 정민태, 김홍집, 위재영, 김수경, 류현진 등 수많은 명투수들이 인천에서 탄생했다.[16] 위에 언급된 선수들 중 류현진만 2006년에 프로 데뷔를 하여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17] 박정현 2.15, 최창호 2.22, 정명원 2.45. 그해 평균자책점 1위는 1.17의 선동열.[18] 다만 위에 언급된 투수 3총사는 공교롭게도 모두 인천 출신이 아니다. 박정현만 태평양의 광역 연고지역이던 "수원시" 출신이며 최창호(대구)와 정명원(전북 군산)은 아예 다른 지역 출신이었다.[19] 여긴 투수왕국 이라고 불리지만 그런거 보다 보통 강팀 내지 왕조 또는 공포의 검빨 유니폼 이라고 불리는게 전통적이였다. 근데 KIA 타이거즈로 팀명이 바뀌고는 타이거즈 내지 그냥 부상병동, 종합병원, 고양이, 개그 팀으로 우스꽝스럽게 불린다. 이유는 해태시절 보다 못하는 성적을 기록하거나 틈만 나면 선수들이 다치거나 해서이다.[20] 다만, 이대진은 빙그레랑 접점이 없는 이유가 93년 데뷔할때 빙그레는 마지막으로 팀이름을 썼기 때문이다. 이듬해 팀명이 한화 이글스로 바뀐다. 자세한건 한화그룹 참조[21] 투수진이 무실점으로 상대 타선을 꽁꽁 묶어도 같은 팀 타자들까지 점수를 못 내서(...) 연장전에 가는 경우가 많았고 어찌저찌해서 3실점 아래로 막아내는 호투를 해도 타자들의 방망이가 헛돌아서 영패를 당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삼청태현 소속 투수들의 경우 평균자책점 등 세부 지표가 리그 최상위권을 달리고 있음에도 승수가 적고 패수가 많은 것을 볼 수 있는데 눈물이 앞을 가리는 희대의 투타 불균형 때문으로 볼 수 있다.[22] 각각 박정현 19승, 최창호 10승, 정명원 11승. 이는 1989 시즌 총 승수의 64.5%나 차지할 정도였다.[23] 준PO 1차전은 무려 14이닝 완투승을 기록했고 준PO 3차전에서 경기 도중 허리부상을 당해 앰뷸런스를 타고 병원에 실려갔다... 그것도 5회부터~9회까지 던지다가 그리 된 것이었다.[24] 김경기 이외에 1루수가 없었다. 그리고 태평양 팀 역대 개인홈런 1위 및 팀내 홈런 1위였다... 이건 쌍방울 레이더스의 김기태와 흡사하다. 거기다가 둘 다 1루수가 기본 포지션이고 서로 94년 리그 홈런왕 경쟁까지 갔었다. 승자는 김기태였다. 당시 좌타자 최초의 홈런왕 이라는 역사를 기록.[25] 김경기 이전 돌핀스의 유일무이한 주포.[26] 다만 팀타율은 .224로 역대 최하는 아니었다. 역대 타격 최약체는 1986년 이 팀의 전신인 청보 핀토스가 세운 .219.[27] 1922~2012. 구단 사장 취임과 함께 대대적인 투자를 단행했다.부고기사[28] 단 태평양화학이 프로야구단 창단을 선언한 것은 1987년 10월이었다. 참고로 이 팀의 후신인 현대 유니콘스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는데 태평양화학이 1995년 8월 구단 매각 방침을 밝혔고 1996년 3월 11일에 창단식을 진행했다. 다만 현대는 서울에서 창단식을 했다. 모 관계자는 애초에 현대가 인천에서 팀이 인천에 남는다는건 아니고 언젠간 서울로 빤쓰런 할 것 같다 라는 예감을 한적이 있다고 했는데 사실로 밝혀졌다고 한다. 다만 현대는 꿈에 그리던 서울 입성은 실패한다. 다만, 현대가 아니고 다른 팀이 입성한건 사실이나, 똑같은 서울인데 장소만 다른곳이다.[29] 문서 최상단에도 나와있지만 홈 개막전이 4월 5일 롯데전이었는데 이 날 경기는 6:0으로 끌려다니다가 8회에 5점을 냈으나 9회말 점수도 못내고 그대로 5:6으로 한점차 승부에서 아쉽게 패하고 말았었다. 시즌 첫 승은 개막한 지 일주일도 넘었던 4월 13일 잠실 MBC전에서 7:1로 승리하였다.[30] 소위 말하는 "xxx 사단" 이라는 핵심 인물들이다.[31] 박정현 19승, 정명원 11승, 최창호 10승.[32] 1989년 준플레이오프의 2승은 모두 공교롭게도 끝내기 승리였다. 1차전은 김동기의 끝내기 우중월 쓰리런 홈런, 3차전은 곽권희의 끝내기 중전 안타.[33] 마지막 3차전은 인천 홈구장에서 벌어졌는데, 경기 초반부터 불을 뿜은 해태 타선과 구원 등판한 선동열에게 타자 8명이 연속으로 탈삼진 당하면서[136] 무기력하게 졌다. 게다가 이날 실망한 인천 관중들의 소요까지[137] 일어나면서 더욱 씁쓸한 마무리가 되고 말았다.[34] 신동관 회장은 1982년부터 1983년 실업여자 농구연맹 회장직을 수행하는 등 본래부터 여자농구 쪽 활동에 주력하다가, 그 경험을 토대로 야구단 운영을 맡았던 케이스였다. 이후 신동관 부회장은 1995년 한국여자실업농구연맹 회장에 선출되었다.[35] 김성근 뒤에 안경낀 선수는 다름아닌 양상문(...), 그리고 줄 맨 끝엔 당시 에이스 였던 박정현이며, 박정현의 앞에서 세번째로 구보중인 선수가 돌핀스의 주전 포수 김동기다.[36] 1980년대 태평양의 광고모음. 0:55에 바로 위 지면광고의 고려왕 드링크가 나온다.[37] 1950년대 생으로 대만에서 동양의학 박사를 땄다고 주장한다. 90년대 수지침의 대가로 유명했다. 국내에서 정식 과정을 거쳐 의사가 된 것은 아니었다. 즉 무면허 진료를 했던 것. 90년대 박선진 선수도 부상회복을 위해 찾아갔다는 기사 실린적이 있다.[38] 김성근에게 변영호를 추천했던 사람은 김성근의 수제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계형철이다.[39] 일부 선수들이 계곡에 들어가자마자 '야 씹새꺄!하는 외마디비명과 함께 다시 뛰쳐나올정도로 고통스러웠고 정작 김성근 감독은 들어가지않아서(...) 선수들이 변도사를 꼬셔서 건강에 좋다는 얘기를 하자 김성근 감독도 그제야 냉탕에 들어갔다고 한다.[40] 그보다 옛날에는 해태 타이거즈와 삼성 라이온즈도 동물원에 가서 호랑이, 사자와 눈싸움(...?!) 대결을 훈련에 포함시켰다. - 2016년 1월 엠스플 구구절절 '스프링 캠프' 편 중. 그러나 김성한이 2021년 전설의 타이거즈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밝힌 일화로는 그 당시 동계훈련을 취재하러 온 기자들의 요청으로 동물과의 눈싸움 훈련은 연출된 장면이라고 밝혔다.[41] 인천 연고 구단들은 1982년 창단 이후부터 1988년까지 단 한 번도 가을야구에 나간 적이 없던 원년 6개구단 중 유일한 팀이었다. 그나마 장명부의 활약 속에 전기리그와 후기리그 모두 2위를 했던 1983년이 가장 잘했던 시즌이지만 전/후기리그 우승팀이 나가는 한국시리즈만 있었을 뿐 플레이오프 제도가 없었던 탓에 가을야구는 나가지 못했다. 89년도 페넌트레이스가 전후기 시즌이 아니라서 다행이지 저걸 계속 했다면 가을야구는 고사했을 것이다.[42] 일례로 태평양/삼성의 선수 중 하나가 찬물에 들어가기 싫어했는데 억지로 들어가 결국 화가 뻗쳐서 대놓고 김성근 개새끼 라고 했다.[43] 박영길 감독은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타격이론가 중의 한 명이었으며 그가 삼성 라이온즈에서 코치와 감독을 맡던 시절 삼성의 타선은 리그를 그야말로 씹어먹었던 핵타선[138]이었다. 태평양 구단 입장에서는 박 감독의 지도력이면 물타선이 금방 핵타선이 될 줄 알았겠지만...현실은 시궁창...[44] 1989년 38경기 223 1/3이닝, 1990년 40경기 196 2/3이닝[45] 1989년 38경기 242 2/3이닝, 1990년 35경기 191 2/3이닝[46] 1989년 38경기 139 1/3이닝, 1990년 15경기 27 1/3이닝[47] 원래 정동진은 미국 연수 중에 태평양 수석코치로 제의를 받았는데, 본인이 감독 출신임에도 박영길 밑이라면 코치를 마다하지 않겠다고 한국에 들어왔는데, 들어와보니 난데없이 박영길이 사퇴해서 감독직에 올랐다. 나중에 미안했다고 한다.[48] 다만 승률은 5푼 이상 떨어졌다.[49] 1992년 쌍방울의 형편없는 투수진이 140피홈런을 기록했는데, 거기에 비교적 준수했던 태평양의 투수진이 125피홈런을 기록한 것을 보면 인천이 얼마나 타자 친화적인 구장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 거기다 지금도 깨지지 않는 SK창단년도 195피홈런도 이 도원구장에서 나왔다 홈경기 115/원정 80으로 이거 빼도박도 못한다 한경기에 2개씩 맞은 셈[50] 박영길 감독의 전화로 정동진 감독은 귀국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박 감독이 경질 되었다는 소리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야말로 구단이 아무말 안했다가 정 감독이 아무런 사정도 모른채 스승이자 선배인데 어디가셨는지 몰라 궁금해서 물어본거다.[51] 8개 구단이 뛰던 페넌트레이스에서 2위를 했고 플레이오프에서 격돌한 한화 이글스를 침몰시키고 한국시리즈에 올라갔으나 빠따는 빠따대로 안터지고 투수는 투수대로 터지고 뜻하지 않는 에러까지 범하고 결국 경험 미숙으로 인한 LG와의 대결에서 4전 전패 준우승을 했다. 거기다가 LG의 결정적인 한국시리즈 우승 2회가 전부 정동진 감독에서 나온셈이다. 거기다가 한국시리즈 8전 전패 라는 오명이 있다. 이후 장장 30년 가까이 안나왔던 리그 1위와 한국시리즈 제패 세번째 우승을 제자 염경엽이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V3를 일궈냈다.[52] 태평양에서의 선수시절은 미미 했으나, 훗날 현대 왕조의 에이스가 되는 정민태는 1992년 억대 계약금을 받고 태평양에 입단했으나 병역비리와 부상에 휘말리며[139] 두 시즌동안 35.1이닝만 던지는데 그쳤고 1994년이 돼서야 레귤러 선발 로테이션의 한 축으로 활약했다. 이 시즌 정민태의 성적은 투고타저 였던 시즌이라 8승 9패. 라는 어느정도 괜찮은 성적을 찍었다.[53] 부상 이전인 1991년까지는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는 포지션에 있었지만 마무리 투수로 완벽하게 전업에 성공한 것은 1994년부터다.[54] 40세이브 기록은 6년 뒤인 2000년 진필중에 의해 깨지게 된다. 그러나 이닝수만 봐서는 확실히 차이점이 있다.[55] 첫해엔 그러나 빠따가 터지질 못해서 초반에만 선발일뿐 갈수록 대타로 등장하거나 대수비로 출전하는 일이 빈번했다.[56] 특히 김경기는 플레이오프 3경기에서 모두 홈런을 터뜨렸는데 대전 3차전에서 터진 결승 홈런이 최고의 하이라이트였다. 김경기는 플레이오프 3차전 연장 10회초 한화 구원투수 정민철에게 결승 솔로 홈런을 터뜨리며 팀을 한국시리즈로 견인했다. 지금으로 치면 당연히 플레이오프 MVP를 수상해야 하는 성적이지만 플레이오프에 MVP 시상 제도가 도입된 것은 한 해 뒤인 1995년부터다. 만약 1994년에 MVP 제도가 있었다면 당연히 김경기가 됐을것이다. 김경기와 비슷하게 류중일이 91년 준플레이오프에서 3경기 연속 홈런을 한적이 있다.[57] 유독 삼청태현 라인 팀들은 LG에 약했다. 1994년 정규시즌에서도 LG한테만은 자주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58] 이때까지만 해도 정명원에게 포스트시즌에서 활약은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96년 한국시리즈 4차전을 필두로 98년과 2000년 한국시리즈에서는 나름 잘 던지고 은퇴를 했다.[59] 1994년 이후 현대 유니콘스로 인수되고 나서는 짝수해에는 무조건 포스트시즌 진출 이상은 이뤄냈다.[60] 이 당시 각 팀당 홈경기가 63경기였고 숭의야구장의 관중석 수가 1만1,000석인 것을 감안하면 숭의야구장 홈경기가 전부 매진된다고 해도 홈 관중 수는 69만6,000명에 불과하다. 숭의야구장에서 치러야 할 일부 경기를 수원 야구장에서 옮겨 치르고 그 곳에서 만원이 됐다고 해도 80만명을 넘기기 어려울 정도로 시설이 열악했다. 비슷한 시기 LG 트윈스와 롯데 자이언츠는 3만석의 관중석을 갖춘 홈구장과 준수한 성적, 팬들의 뜨거운 애정이 한꺼번에 겹치며 단일 시즌 100만 관중 동원 기록을 쓰기도 했다.[61] 원래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과 일본프로야구처럼 양대리그를 결성하려고 했으나 야빠들과 각 기업의 창업주들이 안된다고 만류를 하자 결국 현대는 GG를 치고 태평양을 인수하는 것으로 기울였다고 한다.[62] 이 당시 돌핀스 구단의 매각 등 구조조정 작업을 주도했던 사람이 서성환 회장의 아들이자 현재 아모레퍼시픽 회장인 서경배다. 훗날 서경배 회장은 아모레퍼시픽 주식이 수직상승하면서 우리나라의 손꼽히는 주식 부자 대열에 이름을 올렸다.[63] 협상 테이블을 차리려 했으나 쌍방울이 가만히 놔두면 자동퇴출될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SK는 무응답으로 일관했고, 쌍방울 레이더스가 완전히 공중분해되자 선수단만 주워담는 식으로 자신들의 신생 구단을 창단했다.[64] 현대그룹이 왕자의 난을 겪은 2000년 이후 회사 규모가 중견기업 수준으로 쪼그라들었기 때문에 지금으로써는 상상이 가지 않지만, 이 당시만 해도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현대백화점, 현대건설 등 범현대가 계열사들이 분리되지 않고 같은 현대그룹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그 규모만 해도 공룡재벌이라고 불렸을 정도다.[65] 현대가 태평양을 막 인수했을 당시 고려대학교 야구부 진학이 거의 확정되어 있던인천고등학교 야구부 3학년 박진만을 어떻게든 스카웃하려고 작전을 펼쳤는데, 박진만 측이 귀찮다는 투로 "계약금으로 3억을 주면 생각해보겠다"는 말을 현대 스카우트에게 던지자 그 즉시 자동차 트렁크에서 3억원의 현금다발을 꺼내서 보여줬다는 일화가 있다. 그 정도로 돈빨 하나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거대 재벌이 현대그룹 이였다.[66] 1992년 당시에는 선경증권이라고 불렀다. 단, SK증권은 프로야구 중계 할때 심판 뒤에 항상 광고가 뜨고는 했었다.[67] 그 당시 문체부 장관으로 일하던 박지원이었는데 SK그룹에 가서 '야구단 하나 만들자' 라고 설득을 했었다.[68] 상대팀 선수 중에 태평양을 상대로 소소한 기록도 남긴 선수가 있다면 신인 첫 데뷔 당시 전 삼성의 이승엽은 1995시즌에 정민태를 상대로 프로 데뷔 첫 안타를 뽑아낸 바 있다, 당시 신인 첫 데뷔 당시의 롯데 마해영, 당시 전 LG의 심재학, 전 OB의 진필중, 당시 전 쌍방울 심성보, 당시 전 한화 우완 신재웅(1972년생 우완투수), 포수 강인권이 있었다. 이승엽과 정민태 실제로 둘 대결에서도 팽팽하다. 서로 골든글러브를 받았을때도 격려하던 사이이기도 했다.[69] 역대 은퇴한 선수 중에 출신 학교중에 이적이나 신인드래프트에 2차 지명 및 신고 육성으로 입단한 선수[140]중에서 휘문고를 나온 선수는 아무도 없었으며, 경기고를 나온 선수는 없었으나 1988년 김승국 지명했으나 포기했다..[70] 1군 경기는 1991년부터[71] (U-13)[72] 울산 북구 야구협회 산하 소속 리그[73] 야수로 활동한 김경남과 동명이인이다.[74] 후신 팀에서 데뷔한 투수와는 동명이인 이다. 이 사람이 원조 김수경 이라고 볼 수 있겠다.[75] KBO에서 역대 선수에서 우투우타라 표기되어 있으나, 좌투좌타가 맞다.[76]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소프트볼 국가대표 사령탑을 역임했다.[77] 2017년 사망.[78] 삼청태현 역사상 최초의 전천후 중무리 투수로 볼 수 있는 선수. KBO 리그 사상 보기 드문 도서지역 출생자이기도 하다. 무려 백령도 출신이며, 2017년 취침 도중 급사했다.[79] 2024년 7월 5일 ~ 부터 기준[80] 입단당시에는 외야수였다. 후에 투수로 전향.[81] 수원지역 유신고가 창단 이후 최초로 배출한 선수였으나, 오심으로 유명한 심판이다.[82] 현대그룹으로의 매각이 발표된 후 태평양 돌핀스라는 팀으로 치른 마지막 경기(1995년 9월 29일 광주 해태전 원정경기) 선발투수였으나 이날 원정팀 태평양이 홈팀 해태에 패배하면서 패전투수가 됐다.[83] 2살 아래인 정학원의 친형[84] 태평양 입단 당시 1억6000만원이라는 거액의 계약금을 받았다. 지명 후 방위복무로 구속되었다가 다음해 2월에 석방되어 이후 이는 삼청태현 역사상 최초의 신인 억대 계약 사례.[85] 2024~ 부터 기준[86] KBO 공식 홈페이지의 역대 선수검색에 나오지 않았다.[87] 2024 8월 29일~ 부터 기준[88] 6살 아래인 최승호의 친형[89] 선수 시절 우승 경력은 없이 준우승 경력은 1994년(태평양), 1996년(현대) 이적 후 1998년(LG)로 콩라인 가입되었으나 2002년 은퇴할때까지 같은팀에서 엔트리에 들지 못했다.[90] 제물포고등학교가 창단 이후 처음으로 배출한 프로야구 선수였다.[91] 2024년 6월 5일 ~[92] 1996년 현대 후신 이후 1군 경기 출전 못함[93] 1997년 5월까지 현대에서 선수생활하다가 해태로 트레이드되어 그 시즌에 은퇴하였다.[94] 2024년~[95] 25년 간 프로야구 아나운서와 기록원을 거쳐 인천시야구협회 간사로 활동 중인 부인 김은영 씨이다.[96] 1982~1984[97] 1988~1989[98] 2007년 이후 모교인 감독직에서 같은 학교 에서 일반 체육 교사로 2014년까지 계속 부임하였다. 안타깝게도 2016년 9월 16일 별세 했다.[99] 시즌 중[100] 2022년~[101] 이후 현대 유니콘스에서 1996년 ~ 1999년에 타자에서 2000년 ~ 2008년에 투수로 전환했다.[102] 태평양 돌핀스 최후의 3할타자였다.[103] 1990~1992[104] 1993~1995[105] KBO 리그 심판 김풍기의 사촌 동생[106] 2024년 ~ 부터 기준[107] 2023~[108] 김경기 前 야구선수의 사촌형[109] 이전 배번은 34번,16번이다.[110] 이전 배번은 17번, 1번이었다.[111] 고향인 광주광역시(동구 출신)출신으로 광주일고-고려대를 거친 이후 지금까지 단 한번도 광주 연고팀과 코치 및 감독을 한 경력이 없다.[112] 이전 배번은 5번, 29번이었다.[113] 1967년생의 프로필상 실제로는 1965년생인 것으로 보이며 정병규의 매제사이이다.[114] 이전 배번은 26번이었다.[115] 5.11 ~ 시즌 종료[116] 야구계를 떠나 미국으로 이민 가며 현재는 보스턴에서 세탁관련 사업을 한 적이 있다.[117] 야구선수 강진성의 아버지다.[118] 1965년 2월 10일 생[119] 이전 배번은 7번이었다.[120] 1991시즌 2군리그에서 8홈런으로 2군 홈런왕을 차지한 바탕으로 1992시즌부터 1군에 콜업되어 개막 직전에 실시했던 시범경기에서 홈런을 5개나 쏘아올리며 시범경기 홈런왕을 차지하였다. 그러므로 김경기, 김동기와 더불어 K-K-K타선을 이룰 것이라는 기대를 당시 정동진 감독이 했으나, 정규시즌에서는 62경기 0.239 3홈런 18타점의 기록으로 인하여 안타깝게도 실력의 한계를 드러내며, 데뷔 3년만에 은퇴를 하고, 이후엔 골프 강사로 활동중인데 아마추어 골프에서 인지도를 갖게 되어 스타 골프 강사로서 유명하다.[121] 동산고 졸업 후 인하대 시절 1년간 유급, 이전 배번은 54번이었다.[122] 서울용암초 단 1명의 출신 배출한 선수로,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삼청태현 돌핀스 출신 선수로 현대 유니콘스가 무너지고 넥센 히어로즈까지 활약하며 역대 최초로 이적없이 2000경기 출장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2003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한 후 같은 해 결혼하여 수원에서 신접살림을 차린 후 부인 김윤아 씨로, 팀은 해체 후 재창단 되었지만 선수 본인이 자의로 팀을 옮기지 않았기에 한팀에서를 뛴 것으로 간주.[123] 이준의 아버지이다.[124] 7.22 까지 95 1차지명한 쌍방울에서 지명권 양도한 강필선 보상선수로 이적함[125] '태평양의 장종훈'이라고 불리는것도 할수 있다.[126] 은퇴후 모교인 경북고 69년생~70년생 출신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127] 1992년 팬북에 나와있던 우투우타가 아니라 좌투좌타이다.[128] 빙그레 이글스 내야수 출신인 초등학교 교사로 전업한 지화동의 동생.[129] 재일교포 출신의 일본 오카야마현 출신의 前 야구선수였다.[130] 6살 아래 최창호의 친동생[131] 최악의 큰 족적을 남기지 못하고 은퇴. 현재는 회사원을 거쳐 야구 매니저로 근무했다.[132] 전기 6위, 후기 7위[133] 인천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2승 1패로 꺾었지만 플레이오프에서 해태 타이거즈에게 패했다.[134] 인천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이 해 플레이오프에 직행해 플레이오프에서 한화 이글스를 꺾었지만 한국시리즈에서는 LG 트윈스에 1승도 못 거둔채 스윕패를 당해 준우승을 차지했다.[135] 삼청태현 중 유일하게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스코트인 슈퍼맨과 원더우먼이 이날 행사에 등장하지 못했다. 저작권 때문에 해당 캐릭터를 무단으로 쓸 수 없어서 그런 것으로 추정된다. 삼미 야구단은 원작자의 허가 없이 슈퍼맨을 마스코트로 썼는데 그 시절은 저작권에 대해 서로 무지했던 시절이라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은 듯 하다. K리그에도 철완 아톰을 그대로 갖다쓴 포항제철 아톰즈가 있었다가 저작권 침해 우려 때문에 포항 스틸러스로 구단명을 고쳤다.
[136] 포스트시즌 연속 탈삼진 쇼가 이때의 시작이였다.[137] 그와중에 홈 관중 추락사 까지 터져서 난리가 났었다.[138] 이마양이 등장하기도 훨씬 타격 생산량이 높았던 선수들이였다.[139] 저 병역비리는 훗날 팀 후배 위재영과 한국시리즈 상대팀의 선수인 서용빈 및 몇몇의 선수들이 스포츠 신문에 실리기도 했었다. 정민태는 자신의 형님 엑스레이 사진을 들고가서 병역면제를 받은건지 방위병으로 받은건지 불분명하다.[140] 지역 연고 출신 고교 기준에 관계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