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08 11:12:38

김홍집(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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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집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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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 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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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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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태
(1989~1992. 6. 29.)
김홍집
(1993~2001.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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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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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집
金弘集 | Hong-jep Kim
출생 1971년 1월 30일 ([age(1971-01-30)]세)
경기도 인천시 중구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축현초 - 상인천중 - 인천고 - 단국대[1]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 입단 1993년 1차 지명 (태평양)
소속팀 태평양 돌핀스-현대 유니콘스 (1993~2001)
한화 이글스 (2001~2003)
지도자 부평구 리틀야구단 감독 (2008~ )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4. 여담5. 연도별 주요 성적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야구인.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인천고를 거쳐 단국대 1학년부터 주전 투수로 활약했다. 1990년 대학 2학년시절에는 회장기 전국대학야구 춘계리그 우승과 백호기 우승을 이끌며 결승전 최우수투수가 됐으며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그해 IBA 회장배 국제야구대회에서 대만을 상대로 승리투수가 되는 등 활약했다. 1991년에는 바르셀로나 올림픽 예선전을 겸한 16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2] 1992년에는 대학리그 5승을 거두었으나 팀 성적은 예전에 비해 저조.

2.2. 태평양 돌핀스

1993년 고향팀 태평양 돌핀스의 1차 지명을 받아 계약금 1억 2천만원을 받고 입단했다. 국가대표 에이스 출신으로 당시 좌완으로서는 드문 최고 구속 140km 중반대의 속구를 던지는 투수였기 때문에[3] 구대성, 이상훈과 함께 '좌완 빅3'로 불리기도 했다. 대학 4학년때 30이닝 연속 탈삼진을 기록하며 제구력 또한 인정받아 일치감치 대어로 기대를 받았다.[4]

1993년의 태평양 돌핀스는 정규 시즌 성적을 최하위(8위)로 마감할 정도로 전력이 형편없었는데[5] 첫 해 116이닝을 던지며 전반기 7승 8패(4완투)2세이브를 거두며 분투했으나 1993년 6월 20일 LG전에서 연장 13회까지 187구를 던지며 16탈삼진 3실점으로 완투승을 끝으로 시즌을 마감했다.[6] 그러나 이 무렵부터 지긋지긋한 어깨 건초염 증상이 시작되었다.

2년차인 1994년에는 방위병으로 복무하면서 인천 홈구장에서만 등판했음에도 20경기에 등판하여 12승 3패(5완투) 3.20의 호성적으로 승률 1위에 오른다. 현역 생활 중 유일하게 따낸 개인 타이틀이고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 두자릿수 승리를 하였다. 팀의 좌완 에이스로서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1994년 한국시리즈 1차전 선발로 등판해 11회말 1사 동점 상황까지 3회 류지현의 희생플라이로 내준 1실점으로 호투하다가 141구째에 김선진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고 완투패를 당했다. 당시 동기생 이상훈과의 선발 맞대결에서 지지 않고 싶었다고 한다. 추운 날씨에도 최고구속 142km/h를 기록하며 11이닝을 지배하는 호투를 펼쳤으나 아쉽게도 분루를 삼켰다.[7][8][9]


3년차인 1995년은 어깨 건초염으로 고생하며 팀 이탈 등의 외유 등의 일로 기대보다 부진한 6승 7패로 마감했다.[10]

2.3. 현대 유니콘스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00216000001928.jpg
현대 유니콘스 현역 선수시절. (출처: 포토로)

이듬해인 1996년 팀이 현대 유니콘스로 바뀌면서 정민태와 원투펀치로 부활할 것으로 기대롤 모았으나 다시 어깨 부상으로 플레이오프가 되어서야 제대로 공을 던질 수 있었다. 1996년 플레이오프에서는 4경기 출장(선발 1경기) 1승 1패 11이닝 ERA 2.45의 호성적을 거두었으며 특히 플레이오프 4차전 때는 선발 정민태의 뒤를 잇는 중간투수로 등판해 호투를 펼쳐 4차전 승리를 이끌어 플레이오프 사상 첫 리버스 스윕에 결정적 공헌을 한다.[11]

그러나 매 해 어깨 부상의 악령을 떨치지 못한채 어느 한 해도 풀타임 시즌을 제대로 뛰지 못했다. 1998년과 1999년에는 좌완 원 포인트 릴리프 정도의 중간계투진 투수로 활약했다. 1998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면서 우승 반지를 얻기는 했으나 이미 선발에서는 멀어진 상황이었다.

2000년 현대의 91승 시기에 불과 6이닝을 던지며 계속 2군에 있다가 결국 2001년 6월에 최영필과 묶여 한화의 좌완투수인 이상열을 상대로 트레이드 되었다. 트레이드 조건은 이상열+현금↔김홍집+최영필.

2.4. 한화 이글스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10619200144583G.jpg
마지막이 되어버린 한화 이글스의 현역 선수시절. (출처: 포토로)

한화에서의 첫 시즌은 좌완 원 포인트 릴리프로 뛰면서 2.45라는 방어율을 찍고 부활한다는 기대를 심어주었다. 그러나 2002년 들어 방어율이 4점대로 올라가더니 결국 2003년 평균자책 10점대를 찍고 방출되어 그대로 은퇴했다.

한편 2003년 SK 와이번스에서 좌완 계투요원으로 활약하던 '가을까치' 김정수가 은퇴하자, 인천 야구 팬들은 김홍집을 영입해 달라고 구단 사이트에 호소한다.[12] 이에 김홍집은 입단 테스트를 치렀으나, 실제 입단은 아쉽게도 무산되었다.

3. 지도자 경력

현재는 부평구 삼산2동 유수지 공원에서 리틀야구단을 맡고 있다.

4. 여담

  •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는 달리 10승 이상을 거둔 것은 팀이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던 1994년 시즌이 유일하지만 인천야구를 본 사람, 특히 태평양 돌핀스를 기억하는 팬들에게는 인천야구의 과거 전통인 안경잡이 에이스로 남아있다.[13][14][15]
  • 오마이뉴스의 자유기고가인 김은식이 쓴 책 '야구의 추억' 1권의 부제인 '그의 141구는 아직도 내 마음을 날고 있다'는것은 바로 김홍집이 1994년 한국시리즈 1차전 때 던졌던 투구수를 의미한다.
  • 그는 단지 한국시리즈 한 경기에서 141구를 던진 선수 정도로만 기억되기에는 아까운 투수였다. 단국대 시절 빼어난 제구력을 앞세워 구대성, 이상훈과 함께 좌완 투수 3총사로 평가됐고[16] 프로 입단 첫 해에는 시즌 후반 부상으로 이탈하기 전까지 김상엽, 선동렬과 탈삼진 1위 경쟁을 펼쳤다. 입단 2년차에는 방위병 복무로 인천 홈경기에만 주로 나오면서 12승을 따는 활약을 보였다. 전문가 중에는 강속구를 던지는 이상훈보다 오히려 기교와 구속을 고루 갖춘 김홍집을 투수로서 한 수 위로 평가하는 이들도 많았다.[17] 그러나 이상훈이 95년 20승을 거두고 구대성이 96년 18승을 거둘 때 김홍집은 부상으로 제대로 된 활약을 하지 못한다.
  • 인천야구를 이끌 좌완 에이스로 주목받던 김홍집을 가로막은 건 고질적인 어깨 부상이었다. 1994년부터 방위병으로 복무하며 이틀에 한 번 꼴로 밤샘보초를 서는 생활을 했다. 그러면서도 인천 홈경기에 출전하고 휴가 때는 혼자 기차를 타고 지방 구장으로 이동해 원정경기에 등판했다.[18] 제대로 몸 관리를 하기 힘든 여건이었다.
  • 현대 시절 팀 동료였던 박재홍비야인드에 출연해 밝힌 바로는 현역 시절 별명이 '닭똥집'이였다고 한다. 김홍집이 등판하는 날엔 상대 팀 팬들이 '어이 닭똥집~ 똥집아~'거리면서 놀리기 일쑤였다고. 어떤 날은 진심으로 빡쳐서 경기 종료 후 자신을 놀리는 관중을 붙잡은 뒤 얘기를 나눴는데, 다신 그러지 말라며 박카스 한 병을 주고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골때리는 것은 다음 등판에도 그 관중이 경기장에 와서 똑같이 놀렸다고.
  • 2008년부터 인천 부평구에서 운영되는 리틀야구단의 감독을 맡고 있다. 지도자가 꽤 자주 바뀌는 어린이 야구 인프라를 고려한다면 지도자로서 상당히 장수하는 셈. KBO배 전국 리틀야구대회에서 우승도 몇 번 해냈고 리틀야구 월드시리즈 코칭스태프에도 선발되는 등 리틀야구 쪽에서는 지도력을 인정받고 있다.
* 2010년 은퇴 후의 김홍집을 만나 사진을 찍고, 싸인을 받은 분이 있다.[19]
  • 2015년까지 사회인 야구팀에서 활동했다. 2016년은 활동 기록이 없다.
  • 유튜브에 전성기 시절 활약을 알 수 있는 동영상이 있다.

94년 한국시리즈 1차전


96 플레이오프 4차전 1:20:00, 1:37:43 부분을 보면 그의 폭풍 삼진쇼를 볼 수 있다.

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3 태평양 21 116⅓ 7 8 2 0 0.467 3.64 113 5 60 109
(10위)
54 47 1.453
1994 20 126⅔ 12 3 0 0 0.800
(1위)
3.20 112 8 44 89 49 45 1.200
1995 16 94 6 7 0 0 0.462 3.64 80 7 49 56 40 38 1.351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6 현대 10 7 0 0 0 0 0.000 5.14 6 1 6 3 4 4 1.714
1997 8 29⅓ 1 4 0 0 0.2 6.14 32 3 19 19 24 20 1.636
1998 26 21⅓ 0 1 0 0 0.000 5.48 19 0 12 19 14 13 1.359
1999 59
(6위)
52 2 2 4 0 0.500 5.02 51 6 21 45 31 29 1.365
2000 13 6 0 0 0 1 0.000 9.00 12 0 6 7 9 6 3.000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1 한화 28 18⅓ 1 0 0 2 1.000 2.45 20 0 9 14 5 5 1.582
2002 39 26⅓ 0 0 1 4 0.000 4.44 30 4 15 17 15 13 1.481
2003 15 7⅔ 0 0 0 4 0.000 10.57 11 3 6 5 9 9 2.087
KBO 통산
(11시즌)
255 505 29 25 7 11 0.537 4.08 486 37 247 383 254 229 1.406
완투, 완봉 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93년 4완투 0완봉
1994년 5완투
(9위)
0완봉
1995년 1완투 0완봉
KBO 통산 10완투 0완봉

6. 관련 문서


[1] 1989학번[2] 당시 투수진은 정민태, 구대성, 김홍집, 위재영, 지연규, 문동환, 최한길, 김종신, 김도완[3] 상당히 공격적인 투구를 즐기던 스타일이었다. 이 때문에 탈삼진 능력이 탁월했지만 지나치게 정면 승부를 강조하다 보니 결정적인 순간 홈런을 맞는 경우도 꽤 있었다. 후술하게 될 1994년 한국시리즈 1차전의 끝내기 홈런도 그만의 공격적인 피칭 스타일 때문에 벌어진 일이기도 하다.[4] 대학 1학년 시절부터 국가대표로 활동한 구대성과 2, 3학년 내내 팀과 국가대표에서 뛴 김홍집에 비해 이상훈이 대학 4학년때 혜성처럼 등장해 주가를 높였다.[5] 정확히 얘기하면 투타의 조화가 역대급으로 안 좋았던 팀이다. 투수력은 전통적으로 매우 좋았는데 타력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투수진이 9이닝동안 상대 타선을 1실점으로 막았음에도 팀 타선이 1점도 못 뽑는 바람에 1:0 패배를 당한 경기가 허다했다.[6] 이날 경기가 끝난 후 인천고등학교 선배라는 사람이 100만 원짜리 수표가 든 봉투를 그에게 건네고 갔다고 한다.[7] 강속구의 이미지가 센 삼손 이상훈도 최고 구속 143km/h을 기록했으니 김홍집의 분투가 어느 정도 였는지 가늠이 간다.[8] 당시 영상을 보면 김홍집, 이상훈 두 선수의 속구 평균 구속은 138~140km/h 수준이다. 당시에는 140km/h만 넘어도 언론에서 강속구라 표현했었음을 보면 좌완 138~140km/h은 당시 리그에서 매우 빠른 구속으로 느껴졌을 것이다.[9] 도서 <넥센히어로즈 때문에 산다>에서는 11회까지만 던지게 하고 12회부터 정명원으로 교체하려 했다는 김시진 당시 투수코치의 이야기가 나오는걸 생각하면 야만없이지만 조금만 더 버텼더라면 경기의 결과가 다를수 있을지도 몰랐다.같은 도서에서 염경엽 당시 유격수가 1차전 경기에 따라 시리즈가 달렸기에 태평양 시절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선정한것을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이다.[10] 1995년 태평양 성적을 감안하면 선방한 것이긴 하다. 팀 최다승이 정민태의 8승(14패).[11] 다만 플레이오프 MVP는 3차전 호투의 주인공이었던 최창호에게 돌아갔다.[12] 팀에 좌완 계투요원이 부족하기도 했고 김경기 은퇴 이후 인천 출신 스타 플레이어도 적었던 구단 사정 등이 영향을 미쳤다. 결국 팀 전력과 역사가 일천했던 SK 구단에서도 전력을 보강하고 인천야구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취지도 고취시키는 차원에서 인천 출신 김홍집 영입을 추진하게 된다.[13] 임호균-양상문-박정현-김홍집-정민태-김수경. SK에서는 안경 쓴 에이스가 없다. 김광현이 가끔 안경을 썼는데 경기 중에는 쓰지 않는다. 대신 타자 쪽에 안경을 쓴 가을사나이가 있긴 했다.[14] 양상문은 부산고-롯데 출신이지만 태평양에서의 활동 이미지가 강하다.[15] 김홍집이 안경을 벗은 후 활약은 미미. 김수경도 마찬가지...[16] 30이닝 연속 탈삼진 기록. 1이닝당 1개이상을 의미[17] 막상 당시 영상을 보면 김홍집도 142까지 던지고 있으며 이상훈도 143까지 던지는 등 비슷하다. 속구 평속도 138~140 정도로 두 사람이 비슷.[18] 이종범, 이대진, 정민철, 염종석도 방위병으로 병역을 이행했고 홈경기에만 출전했다. 공익근무요원 제도 도입 후부터 프로야구 선수의 군복무 중 야구경기 출전이 금지되었다.[19] 간석역에서 만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