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2-13 19:14:30

구대성

구대성의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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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대성의 현역 시절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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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그레 이글스 시절[1][2] 한화 이글스 1기 시절[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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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릭스 블루웨이브 시절 뉴욕 메츠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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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이글스 2기 시절 시드니 블루삭스 아시아 시리즈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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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야구 대표팀의 좌완 에이스 2016년 4월 5일 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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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대성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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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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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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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KBO 리그 MVP

파일:5p4rcEr.png KBO 포스트시즌
1999 한국시리즈 M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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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2000 KBO 리그 최우수 평균자책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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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KBO 리그 다승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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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KBO 리그 구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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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KBO 리그 승률왕

보유 기록
1997~2000
2006~2007
7년 연속 20세이브[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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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대성의 역대 등번호 / 감독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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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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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 현재
1대
구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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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그램 로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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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그레 / 한화 이글스 등번호 15번
유해덕 구대성(1993~2000) 지승민(2001~2003)
이양기(2004~2005) 구대성(2006~2010) 유창식(201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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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구대성 시구.jpg
구대성 (具臺晟 / Dae-Sung Koo)
생년월일 1969년 8월 2일 ([age(1969-08-02)]세)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대전광역시 동구
가족 구대진
출신교 신흥초 - 충남중 - 대전고 - 한양대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6]
프로입단 1993년 1차지명 (빙그레 이글스)
소속팀 빙그레-한화 이글스 (1993~2000)
오릭스 블루웨이브 (2001~2004)
뉴욕 메츠 (2005)
한화 이글스 (2006~2010)
시드니 블루삭스 (2010~2015)[7]
질롱 코리아 (2019)[8]
지도자 경력 호주 U-15 야구대표팀 감독 (2016)
시드니 블루삭스 투수코치 (2016~2017)
질롱 코리아 감독 (2018~2019)

1. 개요2. 선수 경력3. 플레이 스타일4. 지도자 경력5. 연도별 성적6. 보유 기록들7. 여담

1. 개요

파일:2016040601000388000024781.jpg

전 야구선수이자 이글스의 레전드, 질롱 코리아의 전 감독.

대성불패, 혹은 일본 킬러라는 별명을 가진 선수로 투수 4관왕[9]을 달성한 3명중 한명. 그리고 빙그레 이글스의 마지막 유산 [10][11][12]

이승엽과 더불어서 합법적 병역 브로커로 불리는 선수로, 특히 일본과 치른 경기에서 강했으며 시드니 올림픽 일본전 154구 완투승은 아직도 회자되는 이야기다.

한국에서 은퇴 후 호주 리그에서 다시 한 번 위력을 가진 마무리로 대활약했다. 이상훈, 박찬호, 김병현, 임창용, 이대호, 오승환과 함께 한, 미, 일 야구를 모두 경험해 본 선수 중 한 명.

별명은 유명한 '대성불패'가 있으며, 이후 그에 버금가는 활약을 보인 창용불패 임창용과는 전성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커리어와[13] 역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불펜에서의 혹사, 한→일→미→한의 프로야구 커리어 등 은근히 공통점이 많다. 단 쿠옹의 한국 복귀 첫 해 성적에 비해 임창용은 첫 해 잘 나가나 했더니 제2의 임작가 혹은 대방화범이 되었다…

팬들 사이에서는 메이져 진출 시 성인 '구'를 영어로 표기하면 'Koo'라서, '쿠'+(한국 복귀 시 적지 않은 나이로)'옹'='쿠옹'이라는 호칭으로 유명하며, 덕분에 최훈의 프로야구 카툰에서는 쿠우 캐릭터로 나온다(…).

2. 선수 경력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구대성/선수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플레이 스타일

파일:구대성 투구폼.gif

상대 타자에게 등을 보인채로 와인드업해 공을 던지는 기묘한 폼[14]으로 투구한다. 즉, 디셉션(Deception)이 좋은 선수. 때문에 도루하기 매우 까다로우며[15] 공 릴리즈까지의 시간도 매우 짧아서 구종 파악에도 힘이 들며, 공을 치는 타자 역시 공을 볼 수 있는 시간이 매우 짧아서 치기 어려운 폼으로 정평났다. 이 때문에 투수의 투구시의 버릇(이른바 '쿠세') 등을 통해 구질을 파악하는 경향이 강한 일본 야구에 매우 강한 면모를 보인다. 메츠 시절 익힌 서클 체인지업과의 조합도 일품. 이 서클 체인지업은 훗날 류현진에게 전수하여 잘 써먹기도 했다.

보통 나이를 먹을수록 체력 문제 때문에 폼이 간결해지는데, 구대성은 나이를 먹을수록 등을 더 돌렸다. 국내 복귀 후 투구 폼은 아예 2루를 보고 선 수준이었다. 훗날 인터뷰에서는 나이를 먹으면서 구속이 떨어지자 타자들에게 최대한 공을 숨기고 싶었다고 밝혔다.[16]이 폼 때문에 왼쪽 무릎에 부상을 입어 KBO 은퇴를 하게 됐지만... 이 배배 꼬인 폼과 좌완이면서도 흔치 않은 사이드암에 가까운 쓰리쿼터형 투수이기 때문에 때문에 좌타자들에게는 거의 저승사자 수준으로 좌타자에게는 극강이었다. 합법 병역 브로커 타자 대표 이승엽은 "선수생활 내내 대성이 형 공은 제대로 맞힌 적도 없다."라고 할 정도.[17]

탈삼진 능력 또한 매우 뛰어난 투수로서 투수의 탈삼진 능력을 측정하는 K/9(9이닝동안 삼진을 몇 개나 잡는지 측정)수치가 통산 9.75이다. 쉽게 말해 통산으로 따졌을때도 이닝 당 한 명 이상의 타자를 기본 삼진으로 잡는다는 얘기. 이 수치는 한국 프로 야구 통산 1위다.[18] 또한 커리어하이인 1996년에 기록한 K/9가 11.85로 이는 규정이닝을 채운 투수들 중 단일시즌 역대 1위이기도 하다.

구속은 평균 140km/h 초중반, 최고구속은 대학시절 156km/h까지 나왔다고 한다.

프로 데뷔 이전부터 당한 혹사로 커리어 내내 구위가 계속 하락했지만, '투수라는 보직에 가장 적합한 마인드'로 평가받는 배짱과 승부근성은 그를 혹사에도 장수할 수 있게 했다. 일본전 때의 인터뷰 中 "저는 일본 선수들이 제 공을 제대로 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라고 한 것이 단적인 예다.[19]


4. 지도자 경력

은퇴후 호주에서 선수활동을 이어가던 구대성은 선수생활을 끝내고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다.

2016년에는 15세 이하 호주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역임했다.

2016년 ~ 2017년에는 시드니 블루삭스의 투수코치로서 활동했다.

2018년 7월, 호주 프로야구 리그질롱 코리아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관련기사 그러나 감독으로서의 역량은 부족한 것으로 보이는데, 2할대에 못미치는 승률을 내고 있다. 1982년 승률 0.188의 삼미 슈퍼스타즈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며, 주전을 모조리 팔아치웠던 승률 0.224의 99쌍방울과 35승 1무 97패, 승률 0.265를 찍은 백인천의 02롯데보다 더 성적이 안 나오고 있다. 물론 역량이 부족하다는 부분에 약간의 변론을 하자면, 현재 호주 프로야구의 수준은 구대성 감독이 세이브왕을 2년 연속 하던 때 보다는 확실히 올라간 것을 경기를 보면 충분히 알 수가 있다. 호주 프로야구 리그 문서에도 있다시피 최근에는 시속 150km를 던지는 호주 선수들도 점점 나오고 있으며, 피지컬 면에서 동양인보다 훨씬 우월한데다, 미국 마이너리그에서 온 선수들과 코치들에 의해 야구의 세밀한 부분까지 계속 흡수하면서 급격히 성장하고 있는 곳이 호주 야구리그이다.

이런 곳에 KBO에서 2군에서도 못 버티고 방출되어 나온 선수들, 아예 프로 입단을 하지 못하고 독립리그에서 뛰던 선수들, 고교 및 대학 졸업 직전의 선수들을 이끌고 시즌을 보냈으니 성적이 당연히 좋지 못한건 어느 정도 참작을 해야하는 부분으로 보인다. 다만 이런 모습을 2019/20시즌에도 보여준다면 이에 대한 감독으로서의 책임을 피하기는 힘들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비판은 구대성 감독과 박충식 단장이 섣불리 팀을 구성해서 팀이 계속 포기하는 모습이 보이자 네티즌들은 "호주리그를 우습게 봤다"는 지적이다. [20] 즉 팀 구성을 착실히 다진 후 리그에 나섰어야 했는데 성급하지 않았냐는 것.

한편, 2019년 1월 19일에는 보다못해 본인이 감독임에도 선수 대기명단에 이름을 올리다 직접 패전조로 등판(...)해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그야말로 답답해서 내가 던진다를 보여줬고 훌륭한 위기관리 능력을 발휘하였다. # 그러나 구대성의 등판은 실제로는 로스터 등록 착오로 인해 생긴 일종의 해프닝이었다.

이젠 2019-20 시즌은 팀을 제대로 만들어서 해야 된다. 리그 적응을 우선적으로 하는게 숙제.. 별차 없으면 있으나마나한 팀으로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 했는데 질롱 코리아가 19/20시즌 KBO 연합팀으로 구성되었고 신임 감독으로 MLB 출신 그램 로이드가 선임되면서 구대성은 1년만에 질롱 코리아 감독직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구대성이 감독직에서 내려 온 이유가 무엇인지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5. 연도별 성적

  • 통산 성적에서 순위(KBO)는 1,000이닝 이상 기록한 선수 중에서의 순위
역대기록
연도 소속 경기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3 빙그레 6 21⅓ 2 1 0 - 0.667 2.53 18 0 12 11 6 6 1.41
1994 한화 34 121 7 8 12
(5위)
- 0.467 2.60 89 8 62 128 42 35 1.22
1995 47
(4위)
155 4 14
(1위)
18
(5위)
- 0.222 3.54 127 18 83 161
(2위)
77 61 1.28
1996 55
(2위)
139 18
(1위)
3 24
(2위)
- 0.86
(1위)
1.88
(1위)
79 7 33 183
(3위)
32 29 0.76
(1위)
1997 47 102⅔ 8 8 25
(5위)
- 0.500 3.16 65 7 49 134
(5위)
38 36 1.03
1998 59 123⅔ 8 7 24
(3위)
- 0.533 2.55 87 5 57 129 45 35 1.12
1999 55 119⅓ 8 9 26
(3위)
- 0.471 3.09 95 13 53 138 44 41 1.20
2000 48 133⅓ 6 7 21
(5위)
0 0.462 2.77
(1위)
98 13 55 136
(5위)
47 41 1.09
(1위)
연도 소속 경기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1 오릭스 51 126⅓ 7 9 10 0 0.438 4.06 96 14 78 143 58 57 1.32
2002 22 146⅓ 5 7 0 0 0.417 2.52 122 13 51 144 45 41 1.16
2003 19 113⅔ 6 8 0 0 0.429 4.99 131 23 58 118 72 63 1.60
2004 18 116⅔ 6 10 0 0 0.375 4.32 105 24 52 99 65 56 1.28
연도 소속 경기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5 NYM 33 23 0 0 0 6 0.000 3.91 22 2 16 23 12 10 1.52
연도 소속 경기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6 한화 59 69⅓ 3 4 37
(4위)
1 0.429 1.82 56 4 23 76 17 14 1.07
2007 43 42⅓ 1 6 26
(4위)
0 0.143 3.19 41 3 12 37 17 15 1.25
2008 38 41⅓ 2 3 0 9 0.400 3.48 39 2 16 29 17 16 1.28
2009 71
(2위)
55⅔ 0 0 1 8 0.000 3.72 54 5 14 56 24 23 1.17
2010 7 4⅔ 0 1 0 0 0.000 9.64 7 2 3 3 6 5 2.14
연도 소속 경기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10
-11
블루
삭스
18 27 2 1 12
(1위)
0 0.667 1.00 14 0 11 30 4 3 0.82
2011
-12
14 16 0 3 8
(1위)
0 0.000 3.38 19 2 7 19 10 6 1.56
2012
-13
18 18⅔ 0 2 0 7 0.000 2.89 19 0 8 14 7 6 1.34
2013
-14
21 26 1 1 11
(1위)
0 0.500 2.08 20 1 13 23 6 6 1.19
2014
-15
15 17 0 1 4
(4위)
2 0.000 2.12 19 1 7 21 4 4 1.53
연도 소속 경기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18
-19
질롱 1 1 0 0 0 0 0.000 0.00 1 0 1 0 0 0 2.00
KBO 통산
(13시즌)
569 1128⅔ 67 71 214
(3위)
18 0.486 2.85
(5위)
855 87 472 1221 412 357 1.13
NPB 통산
(4시즌)
110 503 24 34 10 0 0.414 3.88 454 74 239 504 240 217 1.33
MLB 통산
(1시즌)
33 23 0 0 0 6 0.000 3.91 22 2 16 23 12 10 1.52
ABL 통산
(6시즌)
87 105⅔ 3 8 35
(2위)
9 0.272 2.13 92 5 46 107 31 25 1.24
타자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장타율 출루율
2005 NYM 33 2 .500 1 1 0 0 0 1 0 1.000 .500
MLB 통산
(1시즌)
33 2 .500 1 1 0 0 0 1 0 1.000 .500
완투, 완봉기록
년도 완투 완봉
1994년 2완투 0완봉
1995년 6완투 0완봉
1996년 1완투 0완봉
2001년 1완투 0완봉
2002년 1완투 0완봉
2004년 3완투 0완봉
KBO 통산 9완투 0완봉
NPB 통산 5완투 0완봉

6. 보유 기록들

  • 한국 첫번째 9년 연속 두 자릿수 세이브. [21]
  • 역대 마무리 투수 중 유일한 골든 글러브, MVP 수상자.[22]
  • 평균 자책점 1위를 두 번 이상 달성한 선수 다섯 명 중 한 명.[23]
  • 투수 4관왕 : 구원투수라는 이유 + 비인기 팀 + 몰지각한 기자들 때문에 요즘은 묻혔지만, 어쨌든 투수 4관왕을 달성한 투수 세 명[24] 중 한 명이다.
  • 다승왕-구원왕을 동시에 차지한 투수 세 명 중 한 명.[25][26]
  • 7년 연속 세 자릿수 삼진.[27]
  • 호주 프로야구 리그 초대 세이브 왕 및 통산 세이브 2위(2019년 2월 8일 기준 35개).[28]
  • 9회 2사에서 3점차를 뒤집는 만루홈런의 피해자.[29]

7. 여담

직접 들어보자(2분부터) 한미일 야구를 모두 경험해본 자의 간단한 평가.[30] 어? 한국이 제일 쉽다고요? 이분 디스 같은데?

젊었을 적엔 그 김병현과 비교될 정도로 독특한 일화가 많고 성격도 역시 사나이답게 쿨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풍운아로 유명한 최향남과 비교해도 꽤나 비범한 에피소드들을 가지고 있다.

담대하고 독특한 성격에 대한 대전고 동창의 증언으로는 원래 야구부가 1953년에 한 번 우승한 이후 팀 성적이 좋지 않아 폐부 위기에 처하자 당시 1,000만원(!)을 스카웃 비용으로 지불하면서 구대성을 데리고 왔다고 한다. 그리고 입학하자마자 휘문고와의 첫 친선 경기 때 팀이 스코어 2:1로 앞선 상황 9회에 마무리 투수로 마운드에 올라서서 1, 2, 3번 타자를 전부 볼넷으로 내보내 만루를 채우고 다음 3명의 타자를 전부 삼진으로 막았다고 한다.

경기가 끝나고 이유를 물어보니 "왜? 재밌잖아"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칰갤에서 한화투수가 볼질로 주자를 모은 뒤 해결하고 내려가면 이를 '쿠옹놀이'라고 한다. 문제는 한화투수들이 주자를 쌓는 것만 똑같고 못막는다는데 있다 실제 인터뷰에서 밝힌 바로는 마운드 위에서 위기 상황엔 "저녁식사를 뭘로 먹을까"를 생각한다고 한다.

다만 승부욕과 화끈한 성격이 겹치면서 빈볼지시를 내리는 프로로썬 해서는 안되는 일을 자주 벌인적이 있다, 예를 들어서 배영수에게 이치로를 맞히라고 시킨거나 안영명에게 김동수를 맞히라고 시키는등, 이는 후에 본인이 빈볼지시를 내렸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한화 이글스 홈피에서의 '좋아하는 연예인은?'에 대한 답은….

파일:KDS_3.jpg

우왕ㅋ굳ㅋ

사실 전성기 시절에도 핸드폰이 없었다고 한다. 뒤늦게 핸드폰을 가졌지만 그나마도 핸드폰 번호를 절대 남에게 알려 주지 않는다고 한다.참고.???: 응? 동료들과 지인들끼리 전화를 거는 것을 싫어해서 그런다고 한다. 가정적인 면도 있는데 가족을 정말 아낀다고 한다.

또한 꽤나 유명한 도박광으로 큰 돈을 걸진 않지만 여러 돈을 걸고 하는 게임을 즐긴다고 한다. 특히 도박에 승리할 때의 액션이 크기로 유명한데, 메츠 때 동료들이 표현하기를 미친 것 같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프로야구선수 인터넷 도박 파문이 터졌을 때 도박을 즐겨한다는 점 때문에 구대성의 이름이 거론되었으나 한화 팬들은 컴맹인 쿠옹이 그럴 리 없다고 반박하였다. 어느 수준이냐면 이메일도 제대로 못 쓴다고 한다.

박찬호의 증언에 따르면 100원짜리 동전을 쌓아놓고 오락실에 죽치고 앉아 있었다는 일화도 있다.

또한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서 그런지 돈에 대한 감각이 좀 떨어진다는 평이 있지만 밑의 일화들을 보면 남을 위해 잘 쓰고 본인에게 안 쓰는 대인배이기도 하다.

대학진학 당시에 빙그레에서 3,000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계약을 하고자 했으나 한양대에서 신장이 안 좋았던 아버지를 한양대학교에서 무료로 치료해준다는 조건과 친구들도 함께 진학한다는 조건에 승낙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으나, 사실 무료 치료가 아니라 구대성의 대학 진학을 바라는 아버지 뜻에 따라 친구들과 함께 진학한 것이라는 게 정설이다. 당시 강팀이었던 빙그레는 한국시리즈에 가기만 하면 물을 먹었는데, 구대성이 바로 입단했으면 빙그레 정규리그 우승시즌인 1989년이나 1992년 둘 중에 하나는 잡았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IMF 구제 금융기간이면서 선수협 창단 시절인 일본진출 초창기에 당시 선수협결성 초대회장이었던 송진우의 "후배들을 위해 도움을 줬으면 좋겠다"라는 이야기에 선뜻 1천만 원의 기탁금을 내놓았다.[31] 아무 연고도 없던 임수혁을 돕기위해 당시(2002년 12월) 일본에 있었으나 "외부에 알리지 말고 무조건 내 말대로 해달라"라며 한화 구단에게 2천만원을 송금해서 임수혁에게 전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여기 저기에 기탁금, 후원금을 알게 모르게 지원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오릭스로 진출하기 전까지 대전의 13평짜리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의 아내 또한 검소한 모습으로 다닌다고 한다. 왜 좋은 곳으로 이사를 안 가냐는 말에 쿠옹曰 "나는 여기가 편하다"라고.

대전고를 다녔던 어느 사람의 사연에 따르면 일반 교내 식당에서 밥을 배식받았는데 자리가 없어서 선수 전용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는데[32] 구대성이 아무 말 없이 반찬을 나눠 주었다고 한다.# 다만 이 에피소드는 운동부가 있는 학교에서 의례있을 법한 전설(?)을 각색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전고에 학생식당이 생긴 것은 2000년. 학생식당이 생긴 이전에도 야구부식당은 일반학생과 동선이 격리된 야구부 숙소 내에 있어서 식사시간에도 수업시간에도 보기 힘든 야구부원은 보기 힘들었다. 하물며 구대성 재학시절인 80년대에 학생식당에서 운동부원을 만났다는 에피소드는 영 못 미덥다.

IMF 시절 연봉 고과 1위인 구대성이 1억 원을 요구했으나 구단에서는 모기업사정을 고려하여 조정을 요구했다. 그것을 시원하게 응낙하여 동결하기로 했으나 이 이야기가 구단 수뇌부에 올라가면서 수뇌부에서 구단의 상징인 구대성의 연봉을 맞춰주라는 의견이 나왔고 우리 화끈한 회장님의 지시겠지? 구단이 1억 원을 제시하자 역으로 모기업의 어려움을 외면할 수 없다고 거절한 사례가 있다.

자존심 또한 대단했다. 후배인 안영명에게 김동수를 맞히라 지시한 적도 있고[33] , 배영수에게 이치로를 맞히라고 지시 한 적도 있다. 이에 대한 뒷이야기로 구대성이 배영수에게 "이치로 맞히면 1만엔(11만원) 줄게"라고 꼬셨고, 정말로 배영수가 이치로를 맞힌 뒤 마운드를 구대성에게 넘김과 동시에 실실 웃었다. 아싸~ 1만엔! ㅋㅋ 그리고 구대성은 완벽하게 일본 타선을 막아냈다.

또한 송진우, 정민철과 함께 엄청난 짬밥으로 인해 한화 이글스의 무적 벤클 치트키라고 불리기도 한다.


아예 벤치 클리어링을 할 엄두를 못 낸다
대표적으로 2006년 한국시리즈 당시 소위 꼰대질과 지나친 다혈질, 흥분을 일삼는 걸로 비판받는 진갑용이 구대성의 공에 몸을 맞자 성질을 내며 방망이를 그대로 들고 마운드로 올라가려고 하다가 구대성이 실투였는데 어쩔 거냐고 대응하자 군소리 못하고 얌전히 1루로 걸어나갔고, 진갑용이 1루에 도착한 뒤에도 진갑용을 꾸짖었다. 보통 힛바이피치가 나오면 투수가 욕을 먹는데 진갑용이 워낙 해놓은게 있어서 오히려 맞은 타자가 욕먹는 케이스.

진갑용의 벤치 클리어링 비교영상

신인 박지훈

고려대후배 이택근

자료 2
전설의 김동주 붕어빵 셔틀 짤방, 한화 치트키 사용 장면 동주야 포장마차 새로 생긴데가 맛있다더라.
2007년 두산과의 플레이오프 때 일어난 벤치 클리어링 때도 한화 선수들이 전전긍긍하자 느긋하게 등장해 김동주를 상대로 손 한 번 펴보이자 그 천하의 김동주가 조용히 벤치로 돌아가던 장면은 꼭 보자. 2018년 10월 13일에 방영된 엠스플 인터뷰에서 밝히길, 본인도 이 짤방과 붕어빵 드립을 알고 있다고. 제스처의 본래 의미는 '싸울거면 싸우고 아님 들어가라'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구대성의 친형도 프로야구 선수였다. 쌍방울 레이더스의 우완투수 구대진 선수가 구대성의 형. 대전 신흥초등학교 3학년 때 형을 따라 야구부에 들어갔다고 한다. 하지만 구대진은 1991년 7경기 12⅔이닝 1패 4자책점 평균자책점 2.84의 성적을 낸 뒤 재계약 불발로 1년만에 방출되어 은퇴했다. 현재는 2016년에 창단된 대전 지역 두번째 야구부인 대전제일고등학교 야구부의 감독을 맡고 있다. 그러나 엠스플의 취재로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2018년 2월 학생을 구타하여 사회봉사 40시간의 징계 처분을 받았던 전력이 드러났고, 이후 야구부 선배 학생이 후배를 폭행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구대진 감독이 은폐하려고 한 정황이 포착되었다.# 이래저래 동생 얼굴에 먹칠을 한 셈.

박찬호대한민국 최고의 좌완투수로 구대성을 꼽았다. 한화 이글스가 지역연고권을 가졌던 박찬호가 메이져리그로 진출하여 구대성과 박찬호가 한화이글스 같은 팀 선수로 뛰는 프로야구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으나 대성불패와 코리안특급이 한 팀에서 뛴 적은 있었다. 1992년 대학야구 한양대팀에 4학년 구대성 1학년 박찬호. 당시 한양대의 투수진은 원투펀치로 1학년 좌완 차명주 우완 박찬호 중무리로 4학년 구대성으로 운용한 경기가 많았다.

2015년 올스타전 종료 후 정민철 해설위원과 올스타전에서의 에피소드 해명을 위한 전화통화 장면이 방송되었으나 오래돼서 기억을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더불어 최근 근황이 함께 알려졌는데 팔 부상으로 잠시 쉰다고 한다. 문제는 부상당한 팔이 오른손(...) 쿠옹 : 아 왼팔은 너무 싱싱해서 탈이고 이러다 50세가 넘어서도 뛰겠다 <- 그리고 2019년 1월 19일, 질롱 코리아의 경기 중 3회에 등판해서 진짜 50세 넘어서도 현역에서 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5이닝짜리 선발 정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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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5일 한화이글스 홈 개막전 시구자로 나섰다. 현재 기준으로 팀 유일의 우승이었던 1999년 유니폼을 입고 시구했다. 경기 시작 3시간 전에 시구 소식이 깜짝 공개되어 타지역 한화팬들이 몹시 안타까워하였다. 시구 영상
2018년 기나긴 비밀번호를 끊고 한화가 포스트 시준에 진출하자 2차전에서 시구를 하였다.(2018년 10월 20일) 시구 영상

정민철이 발언한 바에 따르면[34] 굉장한 상남자라고 한다. 정민철이 '형, 저 타자가 몸쪽 높은 공을 잘 쳐!'하고 정보를 기껏 전달해 주면 대답이 '됐다 그랴~' 또한 이어서 정민철이 기인설을 말했는데, 운동할 때 여름철엔 파카를 입고 몸을 풀었으며, 겨울철엔 반팔을 입고 몸을 풀었다고.(...)


[1] 1993년 1년, 선발투수[2] 그리고 이 사진은 후에 안승민합성되기도 했다. 쓸데없이 감동적이다. 는 도박 혐의 이후에 링크에 있는 글은 비공개 처리 되었다.[3] 1999년 한국시리즈 당시 우승을 확정짓고 환호하는 모습이다.[4] 당시 퍼스 히트로 임대 트레이드[5] 손승락과 타이 기록이다[6] 본디 오른손잡이였지만 어렸을 적 사고로 오른팔이 부러져 왼팔로 공을 던지게 되었다.[7] 2012 아시아 시리즈 기간 한정으로 퍼스 히트로 일시적으로 트레이드[8] 2018/19시즌 부터 감독직을 역임하기는 했으나, 선수로 등록 및 출장한 것은 시즌 최종 라운드이다.[9] 다승, 승률, 평균자책점, 세이브포인트[10] 1996년 당시엔 구원승+세이브를 포인트로 합계해 세이브포인트로 구원투수를 평가했다.[11] 나머지 2명은 선동열윤석민인데, 이 둘은 트리플 크라운+승률 1위였다.[12] 탈삼진 타이틀이 없는 건 아쉽지만, 1996년에 구원 투수였음에도 불구하고 186탈삼진으로 탈삼진이 3위였다. 통산 이닝 대비 탈삼진 비율 1위의 기록과 더불어 그가 얼마나 굴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13] 단 임창용이 그의 커리어에 비해 상운이 없는 것에 비해 구대성은 챙길 땐 챙겼다.[14] 노모 히데오의 토네이도 투구법의 영향을 받았다고 은퇴 전 인터뷰에서 밝혔다.[15] 투구 준비 시 2루에서 1루까지 여유있게 구경 가능한 폼이다.[16] kbs n sports 'The 레전드' 대성불패 편 참조[17] 51타수 6안타, .118[18] 600이닝 이상 기준. 500이닝 이상 투수 중 구대성보다 더 뛰어난 탈삼진 능력을 가진 투수는 오승환이 있고, 510이닝 동안 K/9가 11.02나 된다.[19] 또 다른 일화가 있는데, 메츠 시절 투수코치가 "몸쪽 공을 던지다 상대 타자가 맞아 부상으로 실려 나갔다. 다시 몸쪽 공을 던질 수 있겠느냐?"라고 묻자 구대성은 그럴 수 있다고 답했다 한다. 투수코치는 "그렇다면 당신은 정말 뛰어난 투수다."라고 했다 한다.[20] 그도 그럴듯이 지난 퍼스 히트전 2018년 11월 25일 서스펜드 2차전때 선발이었던 2라운드때 김진우가 퇴장을 당한건 중계 영상에 이때 봤지만 퍼스히트 몇몇 선수들이 조롱을 하는 제스츄어를 취했다. 그걸 본 김진우가 순간 욱하다보니 몇몇 선수들에게 법규 시전을 날린게 사실..[21] 두번째는 손승락.[22] 당시 MVP 경쟁자가 한국 최초로 30-30을 달성한 신인 박재홍이었다. 참고로 선동열은 MVP를 받았을 때 선발 투수였다.[23] 다른 네 명은 선동열, 류현진, 윤석민, 그리고 양현종.[24] 다른 두 명은 선동열, 윤석민. 이 둘은 다승, 평균자책점, 탈삼진, 승률 4관왕이다.[25] 당시 구원왕의 기준은 세이브수가 아닌 구원승+세이브수인 세이브 포인트로 구원왕을 가리는 제도였다. 당대 18승 중 절대 다수가 구원승이었기 때문에 중무리를 하면서 구원왕이 가능했던 것.[26] 구대성 이전에 송진우가 달성한 것이 최초였고, 이후 신윤호가 2001년에 달성한 것이 마지막. 21세기부터는 마무리 개념이 제대로 잡혔고, 2004년부터는 세이브 포인트가 아닌 세이브 숫자로 구원왕을 가리게 되어 사실상 거의 달성할 수 없는 기록이 되었다.[27] 마무리 투수 중에서는 유일하다.[28] 리그자체가 2010년에 출범한 4년차 신생리그다. 따라서 누적 스탯이 적다.[29] 1995년 대 삼성전, 상대타자 이동수.[30] 다만 처음에만 쉬웠고, 타자들이 익숙해지고 난 뒤에는 똑같이 힘들어졌다고 말했다.[31] 당시 선수협에 기부한 선수는 회장인 송진우, 부회장인 양준혁과 일본에 진출한 구대성, 정민철, 미국에 있던 이상훈 뿐이었다.[32] 선수 전용 식당은 일반 구내식당에 비해 반찬이 좋았다고 한다.[33] 정작 구대성은 안영명이 초구에 맞힐 줄 알았는데 그 공이 뒤로 빠지고, 또 다시 공이 빠지자 안 맞히겠지 하고 라커룸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난리가 나자 후배를 보내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시키고, 그후로 늦게 그라운드에 나왔다....[34] 발언지는 엠스플에서 자체제작한 엠스플 텔레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