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9-07 17:08:22

조웅천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 align=center><table width=320><table bordercolor=#131230>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11px-Doosan_Bears.svg.png 두산 베어스
2019 시즌 코칭스태프
}}} ||
{{{#!wiki style="color:#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1px; color:#000000"
'''70 김원형 · 71 이도형 · 72 조경택 · 73 정재훈 · 74 유지훤
· 75 조인성 · 76 장원진 · 77 조성환 · 78 최해명 · 79 김민재
· 80 김진수 · 81 강동우 · 82 권명철 · 83 이광우 · 84 조웅천
· 85 이용호 · 86 강석천 · 87 박철우 · 88 김태형 [[감독#s-1.1|
]] · 89 정경배 · 90 고영민
· 91 구강현 · 95 최경환 · 101 이병국 · 102 유태현 · 103 천종민'''
코칭스태프투수포수내야수외야수
다른 KBO 리그 팀 명단 보기
}}}}}}}}} ||
조웅천의 수상 이력 / 역대 등번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98 2000 2007 2008

파일:external/67.media.tumblr.com/tumblr_odywc2m8WK1sqk8veo4_r1_540.png
2005 사랑의 골든글러브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80px-KBO_League.svg.png
2000 KBO 리그 홀드왕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80px-KBO_League.svg.png
2003 KBO 리그 구원왕

태평양 돌핀스 등번호 40번
정현발(1988) 조웅천(1989~1990) 신상윤(1991~1993)
태평양 돌핀스 등번호 41번
최계훈(1989~1990) 조웅천(1991~1995) 팀 해체
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41번
팀 창단 조웅천(1996~2000) 황두성(2001~2007)
SK 와이번스 등번호 41번
송재익(2000) 조웅천(2001~2009) 박종훈(2010~2012)
}}}||
파일:external/imgnews.naver.net/0000256593_003_20170418060029634.jpg
두산 베어스 No.84
조웅천(曺雄天 / Woong-Ceon Cho)
생년월일 1971년 3월 17일 ([age(1971-03-17)]세)
출신지 광주광역시
학력 광주남초 - 무등중 - 순천상고
포지션 투수
투타 우언우타
프로입단 1989년 연습생 입단(태평양)[1]
소속팀 태평양 돌핀스 (1989~1995)
현대 유니콘스 (1996~2000)
SK 와이번스 (2001~2009)
지도자 SK 와이번스 2군 투수코치 (2011)
SK 와이번스 1군 투수코치[2] (2011~2014)
SK 와이번스 2군 투수코치 (2015)
SK 와이번스 1군 투수코치 (2015~2016)
두산 베어스 2군 투수코치 (2017~)

1. 개요2. 플레이 스타일3. 선수 경력
3.1. 아마추어 시절3.2. 태평양 돌핀스 시절3.3. 현대 유니콘스 시절3.4. SK 와이번스 시절
4. 평가5. 지도자 경력6. 여담

1. 개요

파일:조웅천.jpg

태평양 돌핀스-현대 유니콘스, SK 와이번스 소속의 투수. 現 두산 베어스 2군의 투수코치.

KBO 리그 역사상 최고의 불펜 투수 중 한 명이자 한용덕-김상진에 이은 또 다른 연습생 신화 중 하나였다.[3] 또한 인천 출신은 아니지만 현역 시절 전부를 인천에서 보냈기 때문에 박재홍과 함께 인천 야구의 영원한 프랜차이저로 인정받는다.

2. 플레이 스타일

조웅천의 공은 전성기에도 빠른 편은 아니었다. 전형적인 제구력으로 승부를 하는 선수로서 서클 체인지업이 주력구종이다. 싱커로 알려졌지만, 조웅천의 주구질은 팔을 역방향으로 틀어 부담이 되는 싱커가 아닌 팔에 부담이 거의 없는 체인지업이었다. 그 덕분에 롱런할 수 있었던 것.

3. 선수 경력

3.1. 아마추어 시절

야구를 처음 시작할 때는 유격수였고 키가 작다는 이유로[4] 광주상고로 진학하면서 퇴짜를 맞고 일반 학생으로 진학하였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고 결국 자퇴를 하게 되고 지인의 소개로 순천상고에서 1학년부터 새로 시작하게 된다. 이 때 학력 문제로 항의가 들어와 2학년 때 3학년으로 초고속 승급을 하게 되었다. 이런 문제 때문에 89년 고교 졸업이 된 것으로 보여진다. 현재의 효산고인 순천상고에는 딱 3년 동안만 야구부가 있었고 성적은 전부 1회전 탈락일 정도로 별 볼 일 없는 고등학교였다. 감독의 권유로 투수를 시작하면서 사이드암으로 방향을 잡고 나름 괜찮은 성적을 보였다.

하지만 3학년 때 슬라이딩 도중에 어깨를 다치면서 대학진학이 힘들어지고, 태평양에서 테스트를 받게 되었다. 테스트 후에 태평양에서는 연락이 없었으나 실업팀과의 2군경기에서 호투함으로서 태평양과 연봉 600만원에 연습생 계약을 하게 되었다. 중간계약이라 1년 동안 등번호가 없었다고 한다.

3.2. 태평양 돌핀스 시절

파일:external/dimg.donga.com/25949909.1.jpg
정식선수 전환이 되어 1990년에 프로 등판경험까지 얻게 되었으나, 2경기 3이닝 2실점에 그칠 정도로 별 의미는 없었다. 애당초에 프로라는 공간에 이 당시의 조웅천같이 2군을 전전하면서 1군에 가끔 얼굴을 내미는 선수는 수두룩했다.

1994년 시즌이 끝나고 정리대상에 올랐지만, 찬바람이 부는 쌀쌀한 봄과 가을에 성적이 좋아서 퇴출 보류. 구단직원이 "자를만 하면 잘 하냐"는 농담을 가슴에 품고 1995년에 80.2이닝을 던지면서 패전처리 투수로나마 자리를 잡게 되었다. 6월 15일 프로 첫 승을 올리기도 했다. 태평양의 투수들이 줄줄히 부상이어서 당시 정동진 태평양 감독이 기회를 많이 주기도 하였다.

여담으로 1994년 말 정리대상에 오르자, 채소 장사를 하시는 아버지를 돕기 위해 1종 보통면허를 땄다고 한다.[5] 일종의 배수진을 친 셈. 그러나 이듬해 1995년부터 기회를 얻기 시작했고, 1종 면허는 필요 없게 되었다고 한다.[6]

3.3. 현대 유니콘스 시절

파일:external/dimg.donga.com/6799971.1.jpg
1996년 태평양이 현대에 인수되고 나서부터 중간계투인 마당쇠로서 역할이 주어지기 시작하였다. 이광환 감독의 '신바람 야구'로 LG가 승승장구하면서 투수 분업화가 리그 전체의 경향으로 자리잡은 것과 연관된 것. 플로리다로 전지훈련을 가면서 당시 감독이던 김재박 감독이 가내영과 조웅천을 중간계투로 점찍었다. 전체 경기의 절반이 넘는 68경기에 출전[7], 방어율 2.11에 94이닝을 던지고 6승과 3세이브를 올리면서 팀이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하는 데 역할을 하였다.

한국시리즈 2차전 연장 10회말 무사 1,2루의 위기에서 마무리 투수였던 정명원을 구원 등판해 정회열을 스리번트아웃,김종국을 삼진으로 잡아내 패색이 짙은 경기를 원점으로 다시 돌려놓는 어마어마한 수훈을 세웠다. 조웅천은 결국 11회까지 2이닝을 무실점으로 역투, 현대와 자신의 한국시리즈 첫승을 기록하게 된다. 투수 조웅천의 진정한 진가를 알린 상징적인 경기.

1997년 ERA 2.84 55경기에 92이닝, 1998년 ERA 3.51에 52경기에서 51.1이닝, 99년 ERA 3.43에 51경기에서 44.2이닝을 던지면서 점차 소화이닝이 줄고 방어율이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전형적으로 찾아오는 투수들의 위기상황. 투수들은 이 위기를 제구를 다지거나 새로운 구종개발로 해결하곤 한다. 조웅천의 경우는 97년에 플로리다 마무리캠프를 갔을때 배운 서클 체인지업을 잘 써먹지 못하고 있다가, 1999년 김시진 당시 투수코치의 권유로 참가한 오릭스 가을 캠프에서 제대로 던지는 법을 익히게 되면서 재미를 보게 된다.

새로운 구종의 개발에 힘입어 2000년에 74경기 94.1이닝 소화에 홀드 1위(16개)와 8승 6패 8세이브로, 막강 현대의 다승왕 트리오(정민태, 김수경, 임선동)과 마무리 위재영을 잇는 허리로서 역할을 해내게 된다. 처음으로 신설된 홀드왕 부분에서 1위.

다만 그해 열린 2000년 한국시리즈에서 3차전까지 철벽피칭을 펼쳤으나 무리한 기용으로 지친 탓에 5차전 대놓고 노리고 온 두산타자들에게 난타를 당했다. 이날 두산 타자들은 조웅천의 공에 철저하게 대비하고 타석에 들어선 게 주효했다. 김인식 감독은 타자들에게 "조웅천의 싱커는 무조건 버리고 공이 변하기 전에 공략할 것“을 주문했다. 이에 타자들은 조웅천을 상대로 하나같이 타석 앞에 바짝 다가섰다. 3차전까지 호투로 내심 한국시리즈 MVP까지 노렸던 조웅천은 씁쓸한 표정으로 마운드에서 내려와야 했다.

3.4. SK 와이번스 시절

파일:/image/117/2005/08/18/200508181441000400_1.jpg파일:external/www.sksports.net/20080506205400_1.jpg

이런 활약을 하던 조웅천은 뜬금없이 조규제와 함께 2001년 시즌 전 SK 와이번스로 트레이드 되기에 이른다.[8] 2000년 창단한 SK의 전력을 보완하기 위해 전년도(2000) 우승팀에서 보호선수 20명 외 1명, 준우승팀에서 21명 외 1명을 현금 트레이드 할 수 있도록 선수지원책을 마련한 것에 따른 것이다. 이 트레이드를 통해 1년 만에 본인이 선수 생활을 시작한 인천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하지만 최종적인 트레이드 결정은 급작스러운 것으로서 미국 전지훈련 중인 2월 9일에 관계자로부터 말을 전해듣고 짐을 싸서 SK의 전지훈련지인 시드니로 합류할 정도였다. 당시의 트레이드는 선동열 당시 KBO 홍보위원의 적극적인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트레이드는 조웅천과 조규제를 SK가 받고, 현대가 15억을 받는 것.[9] 트레이드 이적 소식을 들었을 당시 조웅천은 자신의 스승격인 김시진 당시 투수코치를 껴안고 울었다고 한다.

이러한 트레이드의 충격 속에서 조웅천은 2001년에 방어율 5.63을 기록하며 프로생활 최악의 성적을 거둔다. 2002년 56경기 출장에 82.2이닝을 소화하면서 방어율 3.27에 9승 5패 6세이브 5홀드를 거두면서 성적을 회복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2003년 마무리 보직을 맡으면서 65경기 77.2이닝 소화에 평균자책점 1.97, 6승 5패 30세이브 2홀드를 기록하면서 구원왕에 오르는 등[10][11] 프로생활 최고의 성적을 거둔다. 마구마구에서도 이 해의 카드가 유일하게 레어카드이다.[12] 이러한 성적을 기반으로 SK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준우승을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커리어하이 시즌의 말미인 2003년 11월의 삿포로 아시아선수권 겸 2004 아테네 올림픽 아시아 예선에서 큰 실패를 겪게 된다. 대만전 9회말 4:2에서 심판의 석연찮은 판정으로 투수 임창용이 연달아 볼넷을 내주면서 조웅천을 마운드에 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천즈위안에게 동점 적시타를 맞기에 이르고, 10회말에 가오즈강에게 끝내기 안타마저 허용하였다. 일본전에서 좌완 투수 와다 츠요시에게 틀어막히면서 아테네 올림픽 진출은 무산되었다.

사실 애초에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된 것이 김재박 대표팀 감독이 갑작스럽게 심수창을 엔트리에서 제외하고 제주도에서 여행 중이었기에 연습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던 조웅천을 호출한 게 문제였다지만.. 인터뷰에서 밝히기로는 조웅천 개인에게 유일한 국가대표 경기이기도 했기에 가장 지우고 싶은 순간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2004년부터는 다시 중간계투로 복귀하여 계속 필승계투로 활약하였다. 하지만 점점 노쇠화 징후를 보이기 시작하였고, 2006년 4월 21일 수원 현대전에서는 부상으로 무너진 선발진을 대신하여 선발로 등판하기도 하였다.[13]

2007년 들어와서 김성근 감독의 부임 후 새롭게 일신하여 정대현과 더블 스토퍼로 나오면서 맹활약하였다. 64경기 74.2이닝에 방어율 1.57, 2승 3패 9세이브 16홀드를 거두면서 SK의 첫 페넌트레이스 우승과 첫 우승에 큰 역할을 하였다.
참고로 2007년 5월 23일 대구에서 열린 삼성과의 경기에서 김성근 감독이 8회말 4번타자 진갑용 타석 때 조웅천을 좌익수로 돌리고 가득염을 등판시켜 한 타자만 상대시키고 다시 조웅천을 투수로 교체해서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었다.
참고로 이 경기의 결과는 무승부였다.

2008년 8월 27일 800경기 등판을 달성하였다. 참고로 이날, 스퀴즈 번트로 생애 첫 타점도 기록하였다.

이 이전까지는 큰 부상 한 번 없었으나 2008년에는 오른 엄지손가락의 부상과 고질적인 어깨부상으로 제대로된 활약을 하지 못하였고 2009년에는 팔꿈치 통증으로 전지훈련에서 조기귀국하고 어깨통증에 시달리는 등의 복합부상으로 결국 은퇴를 결정하였다.

2010년 3월 28일 정경배와 함께 문학구장에서 은퇴식을 가졌다.

4. 평가

박재홍과 함께 인천 출신은 아니지만[14] 인천 야구의 프랜차이저이다. KBO 리그 역사상 최고급의 불펜 투수 중 하나이자 한용덕-김상진에 이은 또다른 연습생 신화 중 하나이다. 다만 앞의 두 선수들과 달리 조웅천은 2차례나 타이틀 홀더에 오른 바 있다. 한용덕과 김상진은 모두 현역 시절 무관의 제왕으로 유명했다. 둘다 선수로선 훌륭한 기록을 남겼지만, 팀 내 다른 선수들에 빛이 가려진 게 너무 컸다. 다행히 우승 반지는 있다. 13년 연속 50경기 출장 등의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한때 KBO 투수 최다경기 출장 (813경기)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KBO에 홀드 기록을 집계하기 시작한 것이 2000년이기에 선발이 아닌 계투, 그것도 세이브가 주어지는 마무리가 아닌 중간계투였던 조웅천의 기록은 누적 기록에서 특별한 것이 없다. 다만 813경기라는 출장경기 수(역대 2위)만이 그의 커리어를 말해 줄 뿐이다.[15] 만약 홀드 기록이 그 이전부터 있었다면 100개는 물론 그 이상을 넘어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야구 게임에서 현대 시절 조웅천은 2000년을 제외하면 살짝 애매한 스탯으로 나온다. 이게 다 홀드 집계가 늦어 내세울 기록이 적기 때문이다.

홀드 기록이 정말 잘 쌓이는 기록이라는 사실은 홀드 기록 집계 후 등장한 중간계투 전문 투수 정우람에게서 알 수 있다. 물론 정우람이 불을 지르지 않고 잘 막아내는 뛰어난 투수라지만 중간계투 6년만에 92홀드를 달성했으니. 마찬가지로 조웅천도 만약 2000년 이전부터 홀드 기록이 있었다면 200홀드를 바라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13년 연속 50경기 출장을 달성했을 정도로 꾸준한 중간계투였고, 2위인 류택현의 소화 이닝인 560이닝과는 두 배 이상 차이난다는 점[16]에서도 팀에 있어서는 공헌도가 컸던 편이다.

100세이브-100홀드를 달성하지 못한 게 아쉽다. 홀드는 11개 모자라고 세이브는 2개 모자란다.

5. 지도자 경력

5.1. SK 와이번스 시절

파일:external/www.sksports.net/20150921172055_1.jpg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 컵스에서 연수를 마치고 귀국해 2011 시즌부터 SK 와이번스의 코치로 활동했었다.

2013 시즌에는 불펜코치로서 꽤 좋은 평가를 얻었었는데, 1군 투수코치로 부임한 2014 시즌에 완전히 평이 뒤바뀌었다. 이만수의 마구잡이식 혹사를 수수방관하고 있고 혹은 일조했다는 것이 그 이유. 성준은 재활하던 김광현의 기용과 관련해서 이만수와 싸우기까지 하며 사태를 막아보려 했는데, 조웅천은 불펜투수들 퍼지는 동안 뭐 했냐는 식의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17]

진해수, 박정배, 전유수, 윤길현 등 자팀 불펜 투수과 관련된 논란이 거세지자 어쩔수 없다는 식의실드성 인터뷰를 했는데 이로인해 팬들의 집중 포화를 받았다.[18] 팀이 아래에 처진 상황이니 보직구분을 허물수 밖에 없었고 출장 경기수에 비해 이닝이 적으니 혹사가 아니라는 논리였는데, 이닝에 비해 저들의 투구수는 상당한 수준이었고 그 인터뷰를 한뒤 얼마 지나지 않아 박정배가 어깨 통증으로 2군에 내려갔기 때문에 혹사가 아니라는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게다가 위의 세명이 문제가 되는건 혹사도 혹사지만 자꾸 맞아 나감에도 많이 기용한다는 것에 이유가 있었다. 특히 진해수는 점수차 상관없이 좌타자가 나오면 출장하는 식이였는데 초반에 비해 진해수의 피안타율이 점점 상승하고 있고 7월 30일 현재 진해수의 좌타자 피안타율이 3할을 넘긴것을 보면 이것은 전혀 쓸모없는 좌우놀이에 불과하다. 진해수뿐 아니라 박정배, 전유수등도 자주 불을 지르고 자책점이 치솟고 있는 상황에도 보직 없이 빈번하게 출장시키며 안좋은 상황을 가속시키는 것은 분명한 문제라고 말할수 있다.

한편으로는 SK 투수교체의 전권을 이만수 감독이 가지고 있지만[19] 정작 이감독은 혹사에 대해서 일언반구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조웅천 코치가 총대를 메고 팀상황을 변호하며 욕을 먹은 터라 투수 파트와 관련된 모든 비난을 그에게 돌리는 것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2015 시즌 보직을 옮겨 2군 투수코치를 맡게 되었다. 빈 1군 투수코치 자리는 김용희 감독과 2군에서부터 호흡을 맞춘 김상진 투수코치에게 돌아갔다.

그러다가 김상진이 2군으로 내려가자 다시 1군으로 돌아갔다.

2016년 10월 28일 금요일, 한화 이글스의 투수코치로 합류할 예정이라는 기사가 떴다. 10월 29일 SK의 코칭스태프가 대대적으로 바뀔 예정이라는 보도에서도 한화행이 확정되었다고 언급되었으나 # SK나 한화 구단의 공식적인 발표는 아직 없다. 트레이 힐만 SK 감독이 투수코치를 직접 데려온다고 하니 최소한 SK를 떠나는 것은 확정적.

그러나 10월 31일 한화 수뇌부로부터 코치 부임이 거절당했다.[20]는 비보가 뜨면서 다른 팀을 구하지 않는 이상 2017년은 백수가 될 예정이다.

그리고 김경기 2군 감독과 다르게, SK 프런트로부터 재계약 불가 판정을 받은 게 아니라 본인이 먼저 김성근의 영입 요청을 받은 후 구단에 사표를 먼저 내고 SK를 기세 좋게 떠났으나, 한화 이글스 프런트에 무리한 계약 조건을 제시[21]하여 한화 프런트에서 최종적으로 거절한 것.

5.2. 두산 베어스 시절

2016년 12월 1일, 두산 베어스에서 김태형 감독의 부름을 받고 조웅천을 코치로 영입했다는 기사가 떴다.## 엠스플뉴스 인터뷰에서는 해태왕조 못지 않은 왕조를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두산에서는 박치국[22], 전용훈 등을 집중적으로 조련하면서 조용히 2군에서 투수 육성에 힘쓰고 있는 중이다. 언론 인터뷰 기사가 2018년 유희관을 언급하면서 잠깐 떴던 정도.

6. 여담

  • 선발이나 마무리보다 무시받는 중간계투의 처우에 대해 인식개선이 필요하다는 의사표현을 자주하였다. 선발과 마무리의 연결은 요즘 같은 분업 등판 속에서 중간계투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또한 등판일자가 고정되어 있는 선발이나 등판이닝이 고정되어 있는 마무리와 달리 중간계투는 언제, 어느 상황에 등판해야 할지 모른다는 점 등이다.

    이러한 의식 속에서 중간계투로 롱런하기 위해서는 소모되는 어깨의 보호를 위해 공 던지는 횟수를 줄이는 것이 중요함을 말하곤 하였다. 연습투구 하나하나를 허비하면 안 된다는 것. 추가적으로 부상을 줄이기 위해 트레이닝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고.
  • 조웅천 본인은 자신의 지론에 맞게 공 두 개를 던지면 몸이 풀리는, 중간계투로 특화된 신체이기도 하였다.


[1] 1990 신인지명 때 2차 5라운드로 태평양에 지명되며 정식선수가 되었다.[2] 1군과 2군을 여러번 오가는 모습이 보인다.[3] 다만 앞의 두 선수들과 달리 조웅천은 2차례나 타이틀 홀더에 오른 바 있다. 한용덕과 김상진은 모두 현역 시절 무관의 제왕으로 유명했다. 둘다 선수로선 훌륭한 기록을 남겼지만, 팀 내 다른 선수들에 빛이 가려진 게 너무 컸다. 다행히 우승 반지는 있다.[4] 아이러니하게 이 때 이후 키가 많이 자라 프로에 갈 땐 180이 훌쩍 넘었다.[5] 요즘은 2종 보통면허를 가지고도 4톤 트럭까지는 운전할 수 있다.[6] 단 차는 아직 수동변속기를 몬다. 1종 면허 딴 게 아까워서 자동변속기 대신 수동변속기를 몬다고.[7] 당시에는 장명부와 김용수의 최대출장기록인 60경기를 경신하는 신기록. 다만 김용수는 중무리 투수였기에 100이닝 전후였다. 그런데 장명부는 400이닝 가까이 소화했으니.[8] 공교롭게도 둘의 성씨가 같았다. 일명 조조 트레이드. 다른 예로 심정수-심재학, 마일영-마정길이 있다.[9] 이 15억과 정민태 임대료를 합쳐서 당시 모기업인 하이닉스가 사실상 빚쟁이들의 손에 들어간 2001년 현대 구단의 운영비로 사용했다.[10] 참고로 2003년까지는 구원승과 세이브를 합친 세이브포인트 순위로 구원왕을 책정했다. 이듬해부터는 구원왕 제도가 폐지되고 순수 세이브로만 세이브왕을 책정.[11] 이로 인해 조웅천은 KBO 최초이자 유일하게 홀드왕(2000년)과 구원왕(2003년)을 모두 달성한 선수가 되었다. 세이브왕 전환 후에는 정재훈이 2005년 세이브왕과 2010년 홀드왕을 달성하며 세이브왕과 홀드왕을 모두 해본 선수가 되었다.[12] 2013년 6월 26일 업데이트로 2000년에도 레어카드가 추가되면서 유일하다는 타이틀은 떼어놓게 되었다. 이후 재평가로 이 시즌의 엘리트카드까지 추가되었다.[13] 2006년 SK는 기존 선발 후보였던 이승호, 엄정욱, 신승현이 부상에 시달리고 김원형마저 부진하자 불펜 자원이었던 윤길현을(윤길현은 제대로 선발 투수로 보낸 시즌이 2002년 데뷔시즌이 유일) 급하게 선발 투수로 전향시키는 등 선발진에 구멍이 난 상태였고, 이는 결국 포스트시즌 탈락으로 이어졌다.[14] 둘 다 고향은 광주광역시이다.[15] 이 기록은 역대 출장경기 1위에 있다가 2012년 4월 13일 류택현에 의해 경신되었다. 류택현은 역대 출장경기 901경기로 지금도 출장경기 1위 타이틀을 차지.[16] 상기했듯이 출장 경기 수는 류택현이 더 많다! 아무래도 류택현은 좌완이다 보니 원 포인트 릴리프로 나선 것까지 고려해야 할 듯.[17] 주사를 맞아가며 던졌다던 박희수와 어깨 통증이 심했던 박정배의 경우 투수코치가 먼저 알고 휴식을 취하게끔 해줬어야 하는데 두 선수 모두 상태가 악화된 후에야 2군에 갔던 것을 보면 관리가 미흡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18] 대부분 SK팬들의 비난과 비판의 대상이 이만수 감독이었고 자팀출신 코치들에 대해서 대부분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는 것을 보면 이례적인 일이었다.[19] 이만수 감독은 인터뷰에서 코치들과 상의해서 투수교체를 한다고 말했지만 중계를 보면 전혀 아닌듯 하다. 심지어 투수교체를 하러 항상 마운드에 오르는 유일한 감독이기도 하다. 라디오볼에서도 이와 관련된 문제를 제기했었는데 정철우 기자는 이감독이 투수교체를 상의해서 한다고 맨날 말은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뉘앙스로 말을 하기도 했다.[20] 김성근 내지는 김정준이 조웅천을 부른 것으로 기사를 쓴 기자는 보고 있는데, 둘의 영향력이 한화 구단 내에서 점점 제로에 가까워지니 리젝 당한듯.[21] 김정준, 박상열, 이홍범같은 김성근 사단 코치들이 엄청난 연봉을 받는 것을 참고하여 꽤 쎄게 부른 듯.[22] 박치국은 인천 출신이라 조웅천의 팬이기도 하다.[23] 이후 재평가로 96,97,00,04,05,07년도까지 추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