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8:45:51

조웅천/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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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마추어 시절2. 프로 시절

1. 아마추어 시절

야구를 처음 시작할 때는 유격수였고 키가 작다는 이유로[1] 광주상고로 진학하면서 퇴짜를 맞고 일반 학생으로 진학하였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고 결국 자퇴를 하게 되고 지인의 소개로 순천상고에서 1학년부터 새로 시작하게 된다. 이 때 학력 문제로 항의가 들어와 2학년 때 3학년으로 초고속 승급을 하게 되었다. 이런 문제 때문에 89년 고교 졸업이 된 것으로 보여진다. 현재의 효산고인 순천상고에는 딱 3년 동안만 야구부가 있었고 성적은 전부 1회전 탈락일 정도로 별 볼 일 없는 고등학교였다. 감독의 권유로 투수를 시작하면서 사이드암으로 방향을 잡고 나름 괜찮은 성적을 보였다.

하지만 3학년 때 슬라이딩 도중에 어깨를 다치면서 대학진학이 힘들어지고, 태평양에서 테스트를 받게 되었다. 테스트 후에 태평양에서는 연락이 없었으나 실업팀과의 2군경기에서 호투함으로서 태평양과 연봉 600만원에 연습생 계약을 하게 되었다. 중간계약이라 1년 동안 등번호가 없었다고 한다.

2. 프로 시절

2.1. 태평양 돌핀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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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열린 1990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2차 5라운드 지명을 받고, 1990년부터 정식선수로 전환이 되었다. 정식선수 전환 후 첫 해인 1990년에 프로 등판경험까지 얻게 되었으나, 2경기 3이닝 2실점에 그칠 정도로 별 의미는 없었다. 애당초에 프로라는 공간에 이 당시의 조웅천같이 2군을 전전하면서 1군에 가끔 얼굴을 내미는 선수는 수두룩했다.

1994년 시즌이 끝나고 정리대상에 올랐지만, 봄과 가을에 성적이 좋아서 퇴출 보류. 구단 직원이 "자를 생각 하니까 왜 잘 던지냐"라는 농담을 하자 오기가 생겼는지 1995년에 80.2이닝을 던지면서 패전처리 투수로나마 자리를 잡게 되었다. 6월 15일 프로 첫 승을 올리기도 했다. 1994년 한국시리즈를 치룬 후폭풍으로 태평양의 투수들이 줄줄히 부상이어서 당시 정동진 태평양 감독이 기회를 많이 주기도 하였다.

여담으로 1994년 말 정리대상에 오르자 채소 장사를 하시는 아버지를 돕기 위해 1종 보통을 땄다고 한다.[2] 일종의 배수진을 친 셈. 그러나 이듬해 1995년부터 기회를 얻기 시작하면서 면허는 필요 없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면허 딴 게 아까워서 차는 수동으로 몰고 다닌다고.

2.2. 현대 유니콘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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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태평양이 현대에 인수되고부터 중간계투인 마당쇠로서 역할이 주어지기 시작하였다. 이광환 감독의 '신바람 야구'로 LG가 승승장구하면서 투수 분업화가 리그 전체의 경향으로 자리잡은 것과 연관된 것. 플로리다로 전지훈련을 가면서 당시 감독이던 김재박 감독이 가내영과 조웅천을 중간계투로 점찍었다. 전체 경기의 절반이 넘는 68경기에 출전,[3] 방어율 2.11에 94이닝을 던지고 6승과 3세이브를 올리면서 팀이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하는 데 역할을 하였다.

한국시리즈 2차전 연장 10회말 무사 1,2루의 위기에서 마무리 투수였던 정명원을 구원 등판해 정회열을 스리번트 아웃, 김종국을 삼진으로 잡아내 패색이 짙은 경기를 원점으로 다시 돌려놓는 어마어마한 수훈을 세웠다. 조웅천은 결국 11회까지 2이닝을 무실점으로 역투, 현대와 자신의 한국시리즈 첫승을 기록하게 된다. 투수 조웅천의 진정한 진가를 알린 상징적인 경기. 다만 6차전에서는 9회초 이종범에게 3루타를 허용했다.

1997년 ERA 2.84 55경기에 92이닝, 1998년 ERA 3.51에 52경기에서 51.1이닝, 99년 ERA 3.43에 51경기에서 44.2이닝을 던지면서 점차 소화이닝이 줄고 방어율이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전형적으로 찾아오는 투수들의 위기상황. 투수들은 이 위기를 제구를 다지거나 새로운 구종개발로 해결하곤 한다. 조웅천의 경우는 97년에 플로리다 마무리캠프를 갔을 때 배운 서클 체인지업을 잘 써먹지 못하고 있다가, 1999년 김시진 당시 투수코치의 권유로 참가한 오릭스 가을 캠프에서 제대로 던지는 법을 익히게 되면서 재미를 보게 된다.

새로운 구종의 개발에 힘입어 2000년에 74경기 94.1이닝 소화에 홀드 1위(16개)와 8승 6패 8세이브로, 막강 현대의 다승왕 트리오(정민태, 김수경, 임선동)과 마무리 위재영을 잇는 허리로서 역할을 해내게 된다. 처음으로 신설된 홀드왕 부분에서 1위.

다만 그해 열린 2000년 한국시리즈에서 3차전까지 철벽피칭을 펼쳤으나 무리한 기용으로 지친 탓에 5차전 대놓고 노리고 온 두산타자들에게 난타를 당했다. 이 날 두산 타자들은 조웅천의 공에 철저하게 대비하고 타석에 들어선 게 주효했다. 김인식 감독은 타자들에게 "조웅천의 싱커는 무조건 버리고 공이 변하기 전에 공략할 것“을 주문했다. 이에 타자들은 조웅천을 상대로 하나같이 타석 앞에 바짝 다가섰다. 3차전까지 호투로 내심 한국시리즈 MVP까지 노렸던 조웅천은 씁쓸한 표정으로 마운드에서 내려와야 했다.

2.3. SK 와이번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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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활약을 하던 조웅천은 뜬금없이 조규제와 함께 2001년 시즌 전 SK 와이번스로 트레이드 되기에 이른다.[4] 2000년 창단한 SK의 전력을 보완하기 위해 전년도(2000) 우승팀에서 보호선수 20명 외 1명, 준우승팀에서 21명 외 1명을 현금 트레이드 할 수 있도록 선수지원책을 마련한 것에 따른 것이다. 이 트레이드를 통해 1년 만에 본인이 선수 생활을 시작한 인천광역시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하지만 최종적인 트레이드 결정은 급작스러운 것으로서 미국 전지훈련 중인 2월 9일에 관계자로부터 말을 전해듣고 짐을 싸서 SK의 전지훈련지인 시드니로 합류할 정도였다. 당시의 트레이드는 선동열 당시 KBO 홍보위원의 적극적인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트레이드는 조웅천과 조규제를 SK 와이번스가 받고, 현대 유니콘스가 15억을 받는 것.[5] 트레이드 이적 소식을 들었을 당시 조웅천은 자신의 스승격인 김시진 당시 투수코치를 껴안고 울었다고 한다.

이러한 트레이드의 충격 속에서 조웅천은 2001년에 방어율 5.63을 기록하며 프로생활 최악의 성적을 거둔다. 2002년 56경기 출장에 82.2이닝을 소화하면서 방어율 3.27에 9승 5패 6세이브 5홀드를 거두면서 성적을 회복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2003년 마무리 보직을 맡으면서 65경기 77.2이닝 소화에 평균자책점 1.97, 6승 5패 30세이브 2홀드를 기록하면서 구원왕에 오르는 등[6][7] 프로생활 최고의 성적을 거둔다. 마구마구에서도 이 해의 카드가 유일하게 레어카드이다.[8] 이러한 성적을 기반으로 SK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준우승을 거두기도 하였다. 시즌 후 FA 자격을 얻은 뒤 SK와 4년 총 17억 5000만원에 재계약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커리어하이 시즌의 말미인 2003년 11월의 삿포로 아시아선수권 겸 2004 아테네 올림픽 아시아 예선에서 큰 실패를 겪게 된다. 대만전 9회말 4:2에서 심판의 석연찮은 판정으로 투수 임창용이 연달아 볼넷을 내주면서 조웅천을 마운드에 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천즈위안에게 동점 적시타를 맞기에 이르고, 10회말에 가오즈강에게 끝내기 안타마저 허용하였다. 일본전에서 좌완 투수 와다 츠요시에게 틀어막히면서 아테네 올림픽 진출은 무산되었다.

사실 애초에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된 것이 김재박 대표팀 감독이 갑작스럽게 심수창을 엔트리에서 제외하고 제주도에서 여행 중이었기에 연습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던 조웅천을 호출한 게 문제였다지만.. 인터뷰에서 밝히기로는 조웅천 개인에게 유일한 국가대표 경기이기도 했기에 가장 지우고 싶은 순간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2004년부터는 다시 중간계투로 복귀하여 계속 필승계투로 활약하였다. 하지만 점점 노쇠화 징후를 보이기 시작하였고, 2006년 4월 21일 수원 현대전에서는 부상으로 무너진 선발진을 대신하여 선발로 등판하기도 하였다.[9]

2007년 들어와서 김성근 감독의 부임 후 새롭게 일신하여 정대현과 더블 스토퍼로 나오면서 맹활약하였다. 64경기 74.2이닝에 방어율 1.57, 2승 3패 9세이브 16홀드를 거두면서 SK의 첫 페넌트레이스 우승과 첫 우승에 큰 역할을 하였다.

참고로 2007년 5월 23일 대구에서 열린 삼성과의 경기에서 김성근 감독이 8회말 4번타자 양준혁 타석 때 조웅천을 좌익수로 돌리고 가득염을 등판시켜 한 타자만 상대시키고 다시 조웅천을 투수로 교체해서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었다. 참고로 이 경기의 결과는 무승부였다.

2007년 시즌 종료 후 두 번째 FA 자격을 얻었고, SK와 우선협상이 결렬되어 SK를 떠나야 할 위기에 놓이기도 했으나,[10] 2년 총 8억원에 계약을 맺으며 극적으로 잔류했다.

2008년 8월 27일 800경기 등판을 달성하였다. 참고로 이날, 스퀴즈 번트로 생애 첫 타점도 기록하였다.

이 이전까지는 큰 부상 한 번 없었으나 2008년에는 오른 엄지손가락의 부상과 고질적인 어깨부상으로 제대로된 활약을 하지 못하였고 2009년에는 팔꿈치 통증으로 전지훈련에서 조기귀국하고 어깨통증에 시달리는 등의 복합부상으로 결국 은퇴를 결정하였다.

2010년 3월 28일 정경배와 함께 문학구장에서 은퇴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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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현역 시절 입었던 유니폼과 글러브가 인천 SSG 랜더스필드 안에 위치한 L's 갤러리[11] 레전드 플레이어 존에 진열되어 2022년 박물관이 폐관될 때까지 전시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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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이러니하게 이 때 이후 키가 많이 자라 프로에 갈 땐 180이 훌쩍 넘었다.[2] 2종 면허도 4톤 이하 트럭은 몰 수 있지만 이 당시 트럭은 자동변속기가 없었다. 2종 면허가 자동을 기본으로 하면서 1종 면허 취득은 곧 수동변속기 면허였던 셈.[3] 당시에는 장명부와 김용수의 최다 경기 출장 기록인 60경기를 경신하는 신기록. 다만 김용수는 중무리 투수였기에 100이닝 전후였다. 그런데 장명부는 400이닝 가까이 소화했으니.[4] 공교롭게도 둘의 성씨가 같았다. 일명 조조 트레이드. 다른 예로 심정수-심재학, 마일영-마정길이 있다.[5] 이 15억과 정민태 임대료를 합쳐서 당시 모기업인 하이닉스가 사실상 빚쟁이들의 손에 들어간 2001년 현대 유니콘스 구단의 운영비로 사용했다.[6] 참고로 2003년까지는 구원승과 세이브를 합친 세이브포인트 순위로 구원왕을 책정했다. 이듬해부터는 구원왕 제도가 폐지되고 순수 세이브로만 세이브왕을 책정.[7] 이로 인해 조웅천은 KBO 최초이자 유일하게 홀드왕(2000년)과 구원왕(2003년)을 모두 달성한 선수가 되었다. 세이브왕 전환 후에는 정재훈이 2005년 세이브왕과 2010년 홀드왕을 달성하며 세이브왕과 홀드왕을 모두 해본 선수가 되었고, 정우람도 SK 시절 홀드왕 2회에 이어 2018년 세이브왕에 오르며 이 대열에 합류했다.[8] 2013년 6월 26일 업데이트로 2000년에도 레어카드가 추가되면서 유일하다는 타이틀은 떼어놓게 되었다. 이후 재평가로 이 시즌의 엘리트카드까지 추가되었다.[9] 2006년 SK는 기존 선발 후보였던 이승호, 엄정욱, 신승현이 부상에 시달리고 김원형마저 부진하자 불펜 자원이었던 윤길현을(윤길현은 제대로 선발 투수로 보낸 시즌이 2002년 데뷔시즌이 유일) 급하게 선발 투수로 전향시키는 등 선발진에 구멍이 난 상태였고, 이는 결국 포스트시즌 탈락으로 이어졌다.[10] 이 때 SK가 조웅천과 협상이 결렬됐다는 소식이 나오자 LG 트윈스에서 영입설이 돌기도 했다. 실제로 김재박 감독도 불펜 보강이 필요하다며 조웅천을 영입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11] 전신팀인 SK 와이번스부터 이어저 오는 구단 역사관으로 인천야구의 변천사와 SK 와이번스 히스토리, 레전드 플레이어존 및 우승 트로피 등이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