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8-02 21:45:43

임선동

임선동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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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2000

LG 트윈스 등번호 33번
이광은(1990~1996) 임선동(1997~1998) 김상호(1999~2000)
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54번
김형남(1996~1997) 임선동(1999~2007) 팀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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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문고등학교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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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급시절이었던 LG 트윈스 시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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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잠깐이였지만 3년동안 전성기를 펼쳤던 현대 유니콘스 리즈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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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모습누..누구세요?박광덕씨?? 오른쪽은 조성현 연세대학교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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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모습 충격과 공포
이름 임선동(林仙東 / Sun-dong Lim)
생년월일 1973년 8월 4일 ([age(1973-08-04)]세)
국적 대한민국
학력 서울사당초 - 휘문중 - 휘문고 - 연세대 [2]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소속팀 LG 트윈스(1997~1998)
현대 유니콘스(1999~2007)
지도자 연세대학교 투수코치(2014~)
수상 기록
2000년 한국프로야구 골든글러브 투수 부문
2000년 한국프로야구 다승왕
2000년 한국프로야구 탈삼진왕

1. 소개2. 프로 입단 전3. 프로선수 시절4. 기타5. 연도별 주요 성적

1. 소개

LG 트윈스, 현대 유니콘스 소속 야구 선수. 한국프로야구계에서 풍운아로 일컬어지는 선수들 중 한 명이자 짧고 굵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선수.

2014년부터 연세대학교 야구부 투수코치로 활동하게 되었다. [3]

2. 프로 입단 전

휘문고 시절 신일고 조성민, 경기고 손경수와 함께 서울 의 초고교급 투수였고 대학 시절에는 3의 선두주자였다. 박찬호, 정민철,[4] 박재홍, 송지만, 김종국, 홍원기, 손혁 등과 함께 소위 황금의 92학번이라 일컬어지는 세대 중 한 명.

당대 최고의 유망주였던만큼 잠실 라이벌 OB 베어스LG 트윈스 양 팀 모두가 임선동을 노리고 있었는데, 1991년말 신인 지명 때 OB와 LG 중 주사위 던지기에서 이긴 LG가 결국 임선동을 1차 지명으로 뽑았다. 여담으로 이 때 조성민은 "나는 고려대학교를 갈 거니까 LG나 OB는 괜히 나를 지명해서 1차 지명권 날리지 마라"고 공식 선언한 상태였고, 결국 당장 투수가 급했던 OB는 손경수를 지명한다. 허나 당시 2억 원의 계약금을 제시했던 OB의 기대와 달리 손경수는 장학금을 제시한 홍익대학교에 입학해 버리고, 거기서도 가정사와 사생활 문제로 1993년 말 자퇴한 후 1995년 OB에 입단했다. 하지만 손경수는 간염 악화로 1군에 오르지 못한 채 입단 첫 해 시즌이 끝나고 임의탈퇴된 후 잊혀지고 만다.[5]

한편 임선동은 휘문고를 졸업하고 LG에 입단하는 대신 연세대학교에 진학했는데 연세대학교 4학년 시절 일본프로야구 다이에 호크스한국실업야구현대 피닉스, 지명권을 주장한 LG 트윈스 사이에 3중 계약 파문을 일으키며 마찰을 빚었다. [6]

결국 임선동은 직업 선택의 자유를 내세우며 LG 트윈스에 소송을 걸었고 2년간의 법정 공방을 통해 승소했으나 이 사이 다이에KBO 리그의 지명권을 존중한다면서 영입에 손을 뗀 상태였고[7] 현대 피닉스를 프로화하려던 현대그룹의 계획은 무산됐기에 현대그룹은 대신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해서 1996년 현대 유니콘스를 창단한 상태였다. 임선동은 울며 겨자먹기로 법원의 조정안에 따라 LG 트윈스에 입단했는데 당시의 조정안이 우선 지명권을 지닌 LG 트윈스에 입단 후 2년 뒤에 자신이 원하는 팀으로 트레이드시켜 주는 것이었다.

사실 임선동의 행위는 KBO 리그의 질서를 심각나게 어지럽히는 일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우선 프로의 기본이라고 볼 수 있는 계약관계를 무시했으며 전체적으로 전력이 평준화돼야 보는 즐거움도 있고 판 자체가 커지게 돼있는 프로스포츠에서 현대 유니콘스와 같은 방식으로 특정 팀에 대한 비정상적인 전력 집중이 일어나면 전체적인 흥미 자체가 떨어질 수 있다. 실제로 비정상적인 선수 수급으로 강해진 현대 유니콘스삼성 라이온즈가 프로야구판을 지배하던 2000년대 초중반은 KBO 리그 역사에서도 관중 동원력이 가장 떨어졌던 시기였다. 700만 관중을 돌파한 2012년의 반도 안 되는 300만도 못한 수준이었고 1995년에 500만관중을 돌파하면서 엄청난 붐을 일으켰던 상황에 비해서도 엄청난 관중 감소가 일어났다.[8] [9]

또한 임선동의 소송 자체가 KBO 리그 선수 전체의 권익 신장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본인의 사리사욕에 의한 성격이 훨씬 강하다. 이는 그가 3중계약 파문을 일으킨 과정을 지켜보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임선동이 법적으로 승소는 했지만 이 시기를 전후해서 LG 팬들로부터 도덕성 문제로 무수한 욕을 들어먹어야 했다.[10]

3. 프로선수 시절

1996년에는 소송 등을 겪으며 프로 입단이 미뤄졌다. 그래도 아마시절에 화려한 명성을 얻었고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국가대표팀에 선출될 정도로 선천적인 재능을 타고났기에 1997년 입단 첫 해에는 11승 7패 평균자책점 3.52를 기록하며 신인 투수로서도 나름 잘해줬다. 그러나 코시에서 탈탈 털렸고 다음 해에 갑자기 소포모어 징크스를 겪으면서 추락한다.[11]

1999년 1월 LG 측에서 안병원을 상대로 현대 유니콘스에 현금 트레이드된 후[12] 많은 기대를 받았지만 첫 해에는 별로 신통치 못한 성적 0승 1패, ERA 8.05을 찍으면서 팬들의 빈축을 샀다. 하지만 2000년에 갑자기 잠재력이 폭발하면서[13] 18승 4패 평균자책점 3.36 174개의 삼진을 기록하면서 다승왕, 탈삼진왕을 동시에 거둔다. 이 활약으로 KBO 골든글러브도 수상하고 2000 시드니 올림픽에도 출전해 동메달도 수상했다. [14]

2000년 시즌 후에 에이스 정민태일본에 진출함으로써 임선동은 팀내 실질적인 에이스로 급부상하게 된다. 2001년에는 14승 8패 방어율 4.40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임선동은 갑자기 허리 통증이 심해지기 시작해 이듬해 2002년에는 8승 6패[15] 4.51을 기록, 8월 말 시즌 중에 허리 통증이 심해지면서 시즌아웃되었다. 그래도 2002년까지는 나름대로 활약은 해줬지만 이후 부상이 심화됐고 훈련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 2003년 이후로는 팀의 전력에 보탬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는 더 이상 승수를 쌓지 못한 채 2007년 소속팀 현대에서 방출당하고 곧바로 은퇴했다.

결과적으로는 잠시 잘 나가기도 했지만 재능에 비해 롱런하지는 못했고 아마에서나 프로에서나 게으른 천재로만 남은 선수. 그래도 한 시즌이나마 골든글러브와 다승왕, 탈삼진왕을 거머쥐며 정상에 올랐던 점이 그의 넘치는 재능을 증명해 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임선동을 탈쥐효과 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가 애초에 역대급 재능을 지닌 선수였고 LG에서 1년차에 좋은 성적을 거뒀고 2년차가 사실상 태업이었음을 생각하면 그렇게 적절하진 않다.

어떤 의미로는 1990년대에 매년 대박을 거두던 LG의 1차지명 역사에 이정길 이상으로 찬물을 -빅 엿을 먹인- 끼얹은 케이스라고 할 수 있고 덕분에 1997년이 되면 조성민을 1차지명으로 얻고 임선동과 함께 원투펀치로 써서 도합 30승은 거둘 수 있을 거라고 꿈꾸던 LG 팬들은 쓰라린 좌절을 맛봐야 했다.

4. 기타

은퇴 후에는 부동산 중개업을 하면서 스튜어디스 출신 아내를 만나 잘 살고 있다고 하니 나름대로 승리자?[16] 결혼하기 전에는 방송인 절대동안박소현과 사귀었다.[17] 역시 풍운아답다.

응답하라 1994에서 잠시 언급되었다. 칠봉이의 설정과 같은 연세대학교 야구부 출신 거물 유망주였기 때문.

야구계에서 떠나 잠시의 휴식을 가진 뒤 덕수중학교 투수코치로 잠깐 있다가, 2014년 자신의 모교인 연세대학교 투수코치로 부임하였다. 근데 살이 정말 많이 쪘다. 임선뚱 2018년에는 휘문고-연세대 동기인 석주일이 진행하는 아프리카TV 방송에 간간이 출연하고 있다.

임선동열이라는 이름 말장난이 있다.(...) 실제로 잘 나가던 휘문고 시절에는 이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재미있게도 투수 트레이닝 교본 "김건우의 투수훈련법"에서는 임선동의 투구동작이 좋지 못한 투구동작의 표본으로 실려있는데, 대조되는 좋은 투구동작의 표본으로는 선동열이 실려 있다.

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ERA 세이브 홀드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1997 LG 트윈스 22 135⅔ 3.52 11 7 0 0 129 47 77
1998 15 59⅔ 6.94 1 6 0 0 71 27 29
년도 소속팀 경기 이닝 ERA 세이브 홀드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1999 현대 유니콘스 9 19 8.05 0 1 0 0 33 7 10
2000 29 195⅓
(3위)
3.36
(4위)
18
(1위)
4 0 0 177 68 174
(1위)
2001 24 159⅔ 4.40 14
(3위)
9 0 0 201 46 77
2002 21 105⅔ 4.51 8 6 1 0 118 31 61
2003 4 13⅓ 9.45 0 2 0 0 23 4 4
2004 2 3⅔ 17.18 0 0 0 0 9 6 1
2005 3 3⅔ 17.18 0 1 0 0 9 3 3
2006 1 1 0.00 0 0 0 0 1 1 1
통산 10시즌 130 696⅔ 4.50 52 36 1 0 771 239 436


[1] 자세한건 아래 프로시절 이야기에서 후술[2] 사회체육학과 (1992학번)[3] 조성현 연세대 감독의 제의로 모교 투수코치로 부임했다. 조성현 감독은 임선동에게 대학 선배이며, 덕수중 감독 시 임선동이 투수 인스트럭터로 근무했다.[4] 대학을 거치지 않고 고교졸업 후 프로에 입단했다. 동기생으로 구분될 뿐, 92학번으로 불릴수는 없다.[5] 당시 홍익대학교 야구부 감독이었던 박종회의 말에 따르면, 손경수는 야구부 숙소에서 있는 일수가 1년 중 100일이 안 될 정도로 자기관리가 굉장히 나빴다고 한다. 잦은 음주로 인해 홍익대학교 시절부터 간염이 발병했고, 음주폭행도 잦았다고 한다. 이미 군 면제를 받았는지라 임탈 이후 3년 간 방황하고 나서 1998년 OB 복귀를 위해 입단 테스트를 받았는데, 결국 불합격하여 완전히 은퇴한 듯.[6] 일본 다이에 호크스가 임선동에게 입단제의를 한 배경은 한국에서의 국가대표 경력도 경력이지만 결정적으로 1995년 일본에서 열린 아시아야구선수권 결승전에서 선발로 나와 묵직한 속구와 타자의 바깥쪽과 안쪽을 정확히 찔러넣는 역투를 펼쳐 일본관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것이 계기가 되었다.[7]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이 소식을 들은 임선동은 격분하여 주먹으로 벽을 내리치다가 상처를 입기까지 했다. 여기에 학점 미달로 연세대학교 졸업이 늦어졌고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야구 국가대표팀에 뽑혔을 때 이 문제로 논란을 빚었다.[8] 물론 현대와 삼성이 무자비하게 돈지랄을 한 것도 원인이긴 하지만 1997년 외환 위기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으로 야구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것도 영향을 끼쳤다.[9] 현대는 창단 초기에 무지막지한 재력을 이용해 박경완, 조규제, 전준호, 마일영 등의 선수들을 편법으로 긁어 모아 강해진 전력이 있다. 삼성도 이에 영향을 받고 쌍방울로부터 김기태, 김현욱 등을 털어먹었다.[10] 특히 LG에서의 2년차에 사실상 태업성 플레이를 했다는 의혹을 받았다.[11] 사실 2년차 징크스라기보단 다이에 호크스행을 무산시킨 소속팀 LG를 위해 열심히 뛸 의욕이 전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12] 전년도에 해태로부터 조계현을 데려왔으나 별 재미를 보지 못했던 삼성이 7억을 지르자 현대가 1억 더 얹은 8억을 불러 성사시킨 것.[13] 이 시기 때 투수코치였던 김시진이 임선동을 상당히 신경써서 관리한 영향이 크다. 러닝훈련을 직접 감독하고 야식 먹는 것까지 일일이 감시했을 정도였으니. 사실 임선동은 연세대 시절 병역면제 판정을 받기 위해 엄청나게 체중을 불린 일이 있고 그 뒤로 구위가 상당히 저하된 상태였다. 그걸 되돌려서 포텐셜을 터뜨리게 만들었으니 정말 ㅎㄷㄷ하다.[14] 한편, LG로 간 안병원은 4년간 추격조로 뛰다 은퇴했다.[15] 팀내 다승 3위, 1위는 12승 10패 ERA 4.88을 기록한 김수경[16] 은퇴 전 용인에 투자한 부동산이 대박이 나서 수백억원대의 수익을 거두었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이 때 돈을 왕창 번 탓에 더 이상 야구에 동기부여가 되지 않아 은퇴했을 거라는 설이 제기되기도...[17] 우리가 아는 그 유명한 방송인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