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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C9999><colcolor=#330000> 최진실 崔眞實|Choi Jin Sil | |
출생 | 1968년 12월 24일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現 서울특별시 은평구) | |
사망 | 2008년 10월 2일 (향년 39세) |
서울특별시 서초구 잠원동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본관 | 전주 최씨 (全州 崔氏) |
장지 |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 갑산공원 묘원[3] |
신체 | 162cm[4], B형 |
가족 | 아버지 최국현, 어머니 정옥숙 남동생 최진영, 6촌 최재성 |
배우자 | 조성민(2000년 결혼, 2004년 이혼) |
자녀 | 아들 최환희[5], 딸 최준희 |
학력 | 서울불광초등학교 (졸업) 동명여자중학교 (졸업) 선일여자고등학교 (졸업) |
종교 | 개신교 (침례회)[6] |
데뷔 | 1988년 삼성전자 TV CF |
별명 | 깨순이[7], 최수제비[8], 또자[9], 또순이[10], 최트루[11]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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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배우.1988년 광고 모델로 연예계에 데뷔해, 20년 동안 국민적인 인기를 누렸던 인물이다. 기사
2. 생애
자세한 내용은 최진실/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위상, 그리고 인기
신인 때부터 사망할 때까지 20년 동안 범국민적인 인기를 누렸던 스타였다. 드라마, 영화, 광고, 예능 등을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고 귀여운 외모와 친근한 성격, 성실함과 겸손함이 갖춰진 이미지로 국민 배우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전 연령층을 폭넓게 아우르는 인지도와 인기가 굉장했으며 특히 그녀의 전성기였던 1990년대 당시의 위상은 현재까지도 그와 비견되는 인물을 찾기 힘들 정도로 높았다.[12][13]“제가 역사적으로 남을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를 꼭 기억해주세요. 감사합니다.” - 1994년 11월 29일 서울 1000년 타임캡슐에 담긴 영상 인터뷰 내용 |
특히 TV 쪽 배우로는 김희애, 채시라와 함께 한국 TV 드라마의 상징적인 배우 중 1명. <질투>, <별은 내 가슴에>, <그대 그리고 나>, <장밋빛 인생>,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 등 거의 모든 드라마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으며 최진실의 커리어 중 드라마 쪽 작품은 시청률에서 실패한 사례가 거의 없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14] 영화 쪽에서도 <남부군>,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마누라 죽이기>, <편지> 등 여러 작품을 히트시키며 티켓파워에 강점을 보이는 충무로의 스타로 거듭났다. 강수연, 심혜진 등과 더불어 한국 영화사에서 가장 높은 티켓파워와 인기를 자랑했던 여배우로 평가받기도 한다. 2000년대 이후로는 드라마 쪽에서만 활동해서 젊은 세대에게는 영화 커리어가 묻히는 경우도 있는데, 드라마 못지않게 영화판에서 최진실이 가졌던 파워도 대단했다.
생전 수백여편의 광고에 출연하며 한 때 광고모델 중 역대 최고 개런티를 받었을만큼 광고업계에서 사랑받는 인물이었다. 높은 스타성 때문에 매년 섭외 1순위를 기록했고 장기적으로 모델을 맡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KT(한국통신)의 경우 1990년대부터 2002년까지 모델로 활동하여 현재도 최진실의 얼굴이 들어간 포스터나 공중전화 카드를 종종 찾을 수 있다.
예능에 엄청 자주 출연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유머감각이 매우 좋아서 출연하면 나름의 활약을 해주던 인물이었다. 2007년 방송된 무릎팍도사를 보면 알겠지만, 컨셉상 거칠게 진행하는 강호동과 유세윤이 최진실 앞에서 거의 맥을 못 쓸 정도로 프로그램의 분위기를 휘어잡는 모습을 보여주었다.[15] 말년이었던 2008년에는 김구라와 함께 OBS에서 <진실과 구라> 의 메인 MC를 맡기도 했다.
이처럼 최진실은 1990년대부터 길게는 2002년까지 한국에서 최정상급 여배우로 엄청난 인기를 누린 인물이었다. 그러나 2003년부터 조성민과 이혼 다툼을 시작하면서 슬럼프가 찾아왔고, 이미지가 많이 하락하면서 잠시 슬럼프를 가지기도 했다.[16]
2004년 9월 조성민과 최종 합의 이혼을 하고, 이듬 해인 2005년 KBS <장밋빛 인생> 으로 화려하게 부활에 성공하면서 배우로서 재기했다. 최진실 연기 커리어의 후반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백상예술대상에서 TV부문 여자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하였다. 재기에 성공한 뒤 다시 이전과 같이 여러 작품에 출연하며 건재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지만, 2008년 10월 2일 지속된 우울증으로 자신의 자택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면서 커리어를 끝냈다. 최진실과 동년배인 김희애, 채시라, 김혜수 등이 현재까지도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 볼 때 더욱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세상을 떠난지 15년이 넘은 현재에도 최진실의 영향력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녀의 자녀들인 최환희, 최준희가 엄마의 사후 여러 방송에 출연하여 시청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최환희는 2020년 지플렛으로 가요계에 정식 데뷔했으며, 최준희 역시 인플루언서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17]
3.1. 세부적인 기록
- 해외에서 대한민국 연예인, 배우로서 종합적인 인지도 또 한 단연 톱이었다. 2010년 8월 중국 '한류 드라마 속 미녀 여자 주인공 TOP 10' 조사에서 1위에 오르는 등 아시아권에서의 파워를 보여 주었기도 하였다.#
- 각종 언론과 기관에서 주관한 호감도 여론조사에서 1위를 석권했다. 그렇게 호감도가 높으니 2,30대 남성이 뽑은 1등 신부감, 가장 보고 싶은(적합한) CF 모델, 가장 예쁜 얼굴 등 다양한 조사에서 대다수 1위를 차지했다. 여러 조사 중 근검절약형 연예인에선 항상 1위를 차지하며 '저축왕 이미지'를 유지했다. 그러다가 한국이 1997년 외환 위기를 겪으면서 소비의 중요성이 공유되자 최진실도 전향적 태도를 취했다.
- 1990년에 부활한 스포츠조선의 청룡영화상에서 1990년 이래 1996년과 1999년을 제외하고 8번이나 독자•관객들이 뽑는 인기스타상을 수상하며 1990년대에 영화배우로서 큰 인기를 얻었다.
- 최진실은 자신이 연예인으로서 그렇게 뛰어난 외모의 소유자는 아니라는 말을 틈나는 대로 대중을 향해 직접 하면서 엄청난 인기가 주는 높은 긴장도를 낮추는 행동을 한다.
- 최진실은 배우가 방송사 분장실을 사용하던 관행을 깨고 개인 메이크업아티스트 시대를 열었다. 아는 대한민국 연예계에서 연예인의 자율성이 신장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때 최진실과 함께 했던 메이크업아티스트가 김선진이다.#
- 1993년까지 MBC에서 활동하던 최진실은 톱스타답게 1994년 2월 SBS로 스카우트될 때 최고 대우인 '회당 300만 원에 드라마 출연 100회' 전속 계약을 맺었다. 즉 드라마 100회 출연을 하면 매회 300만 원씩을 받아 총 수입이 3억 원이 된다는 것. MBC에서 활동할 때에는 방송사 자체 출연등급표에 따라 출연료를 받았다.[18] 이에 비해 신생 방송사 SBS는 거물 연예인들을 확보하기 위해 거액의 출연료를 제시하기로 방송계에서 유명했는데[19], 최진실도 방송사 이동으로 한순간에 역대 최고의 출연료를 받게 되었다. 이후 SBS에서 2년간 드라마 사랑의 향기•아스팔트 사나이•째즈 등에 출연하면서 SBS 인지도 상승에 기여한다. 하지만 100회를 다 채우지 못한 상태에서 1995년 MBC에서 드라마 출연 제의가 들어오고 최진실은 MBC 주말연속극 아파트에 출연하게 된다. <아파트> 출연은 MBC 특채 배우로서 최진실 스스로 MBC를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MBC가 SBS 전속 배우 최진실을 다시 출연시켰다는 점, SBS와 전속 계약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SBS가 기꺼이 타방송사 출연 그것도 방송사들의 간판 드라마인 주말극에 출연하는 것을 허용해준 점에서 최진실의 위상을 또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최진실이 <아파트>에 출연 중인 상황에서 1996년 3월 SBS는 최진실과 전속 계약을 다시 맺었다. 이후 SBS는 여러 번 최진실에게 드라마 출연을 제안하게 되는데 최진실은 영화배우•CF모델이기도 했기에 영화 촬영 등을 이유로 모두 고사하게 되면서 출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1년이 지난 무렵인 1997년 MBC에서 드라마 출연 제의가 들어오고 최진실은 MBC 미니시리즈 별은 내 가슴에 출연을 결정하게 된다. <별은 내 가슴에> 출연에 대해서 SBS는 1995년때와는 달리 계약대로 최진실에게 위약금을 요구했고 MBC는 그 위약금을 대신 지급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최진실은 SBS 전속 배우에서 MBC 전속 배우가 된다. 즉 방송사 간에 최진실 쟁탈전이 그만큼 치열했다는 의미다.
- 1994년말에 MBC <신(新)인간시대>에서 신년 특집으로 '앞서가는 한국인 50인'이라는 제목으로 분야 별 스타를 조사했는데 최진실은 여자 연기자 부문 1위에 선정되었다. 1994년 11월 29일 서울시는 1394년 서울을 수도로 정한 지 600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기 위해 타임캡슐을 파묻는 행사를 하고 '역사적으로 남을 사람이 되고 싶다'는 최진실의 인터뷰도 거기에 담겼다. 이 타임캡슐은 400년 후인 2394년에 개봉된다.#
- 최진실은 특히 데뷔 10년차인 1997년에 브라운관과 스크린에서 모두 최대 흥행작들을 양산했다. 일단 3월에 MBC 트렌디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에 의상디자이너 '이연이'로 출연해 연예계 입문 10년차에도 여전히 발랄한 이미지를 선보이며 신세대들의 사랑을 받았다. 7개월 후인 10월에는 MBC 주말연속극 그대 그리고 나에서 성숙한 커리어우먼과 똑똑한 기혼자 역할을 맡아 58회 동안 극의 중심을 안정적으로 이끌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그대 그리고 나> 출연은 최진실의 주말드라마 징크스도 완전히 깨버리는 동시에 선배 배우들로부터도 높이 평가받는 계기가 된다. 즉 명실상부 연예계 내외부에서 무게감 있는 배우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대 그리고 나>는 평균 시청률 42.5%를 기록하게 되면서 최진실 최대 흥행 드라마로 남았다. <별은 내 가슴에>도 평균 시청률 40.2%였다. 스크린에서도 11월에 개봉한 영화 편지에 국문학과 대학원생 '정인'으로 출연해 서울에서만 72만 명의 관객을을 모으며[20] 그해 한국영화 중 흥행 1위를 기록했고, 이는 최진실 역대 필모그래피 중 최고 흥행 영화였다. <편지>는 러시아 유학파 배우 박신양과 호흡을 맞췄고 좋은 하모니를 보여주었다.
- 1997년 야망을 이룬 유명인 조사에서 정치인 1위 김영삼, 경제인 1위 정주영, 스포츠인 1위 박찬호와 함께 연예인 1위는 최진실이 선정되었다.# 1997년 삼성경제연구소가 '한국 영화스타의 스타파워 분석' 보고서를 냈고 최진실은 최민수와 함께 관객동원력이 가장 뛰어난 배우로 꼽혔다.#
- 1992년 '저축의 날'에 대통령 표창장을 받았다. 대통령 노태우는 저축유공자 최진실을 청와대 오찬에 초대했다.
- 1992년 KBO 한국시리즈에서 시구를 했다. 한국시리즈 연예인 시구는 최진실이 최초였다.
- 김영삼 대통령의 긴급명령으로 1993년 8월 금융실명제가 전격 실시되었다. 최진실은 금융실명제 홍보 모델로 발탁되어 투명한 금융 흐름이 가능해졌음을 전 국민에게 알렸다. 금융실명제 정착에 기여한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1994년 김영삼은 최진실을 청와대 오찬에 초대했다.
- 인기 스펙트럼이 넓어 거의 모든 연령대의 유권자들한테 호감형이었기 때문에 서민 이미지가 아쉬웠던 여당 신한국당에서 1996년 최진실을 자당 광고 모델로 발탁했다. 대한민국 최초로 연예인으로서 정당의 광고 모델이 된 것이다. 이로써 정치가 최진실을 타고 일상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가 생활 정치가 도래하게 되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라는 직업 군인 출신 대통령 시절에는 권위주의가 팽배했는데 문민정부를 표방하며 들어선 '김영삼 정부'는 그 시절과 선을 그을 필요가 있었고 최진실이라는 캐릭터가 그 문제를 한방에 해결하는 묘수였던 셈이다. 신한국당에서는 "권위주의 시대 정치를 탈피하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하며 "최진실의 인기에 누가 되지 않도록 우리 당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고, 최진실도 "모델로서 인연을 맺은 것일 뿐이다, 정당에 입당할 생각은 없다."고 말하였다.
- 19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을 인터뷰하러 가기도 했다. 이듬해 8월엔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국가홍보 CF에도 출연[21]하였고, 김대중 대통령은 최진실을 대한민국 최고 국민배우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 1998년에는 건국 50주년을 맞이해 MBC가 한국갤럽에 의뢰한 '건국 50년 최고 연예인' 조사[22][23]에서 그대 그리고 나 등으로 정상의 인기를 여전히 누린 덕분에 탤런트·영화 배우 부문에서 전 연령층을 합쳐 전체 1위를 차지했다. 연령별로는 신세대층(11~24세)에서 3위(40명), 청장년층(25~39세)에서 2위(44명), 중년층(40~59세)에서 5위(26명)를 기록하며 전 연령층에서 고른 인기를 얻어 기존과 당대의 최고 인기 배우들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한 것이다. 본 조사가 '건국 50년 최고 연예인' 조사이기 때문에 연예계 전 부문을 합쳐 지난 50년간의 연예인들을 대상으로도 국민들의 의견을 구했는데, 최진실은 신세대층에서 공동 11위(13명), 청장년층에서 4위(26명), 중장년층에서 6위(19명)를 기록하며 역시 비교적 모든 연령층에서 고른 인기를 얻어 전체 연예인 중 5위를 차지했다.[24] 이를 통해 1990년대 전 기간 동안 최진실이 연예계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였고 그 영향력과 파급력을 짐작할 수 있다.
- 2000년 하반기에 2000년대까지 공신력 있는 조사기관이었던 <리스피아르>에서 진행한 연예인 인기도 조사에서 여자탤런트 부문 1위를 차지했다.#[25] 그리고 이런 까닭에 MBC와 전속계약을 다시 맺었다.
- 2002년 1월 오랜만에 예능에 출연하였다. KBS <서세원쇼>에 최진영과 함께 출연했고 홍진경, 정선희 등도 코너를 장식해 내용을 풍성하게 해주면서 이 회차 시청률이 28%로 대폭 상승해 주간 시청률 5위를 기록하는 등 여전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4. 외모
인터뷰 |
백상예술대상 시상식[26] |
일상 사진 |
프로필 |
최진실이 털털하고 수수한 모습과 친근한 이미지가 부각되어 정석적인 미녀 배우[27]는 아니라는 평가가 일부에서도 있긴 했지만 일반적인 여론으로는 1990년대 후배 여배우 심은하와 김희선과 함께 미녀의 대명사였으며 TV와 영화 혹은 도서에서 이쁜 여자를 칭할 때 최진실처럼 이쁘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선한 눈매와 귀여운 이미지를 대표격으로 깜찍하고 발랄한 이미지, 고급진 걸크러쉬 이미지, 유니크한 이미지까지 동시에 공존하는 여러가지 다채로운 매력으로 대중을 사로잡았던 배우이다. 귀여운 외모와 대조를 이룬 슬픈 눈, 서사와 한이 담겨있는 듯한 눈빛, 반짝이는 눈동자, 반달 모양의 눈매, 하트 모양의 도톰한 입술, 웃을 때 시원시원한 입매와 눈웃음, 가지런한 치아, 앞에서 보면 계란형 얼굴과 옆에서 보면 귀족턱[28]이 특징이며 눈밑 진한 다크서클과 특유의 활짝 펼쳐진 큰 귀[29]가 배우를 상징하는 대표 트레이드 마크[30]이다.
5. 연기력
광고 모델로 배우에 입문하여 연기력으로 주목받은 케이스는 아니었으나 자연스러운 말투, 연기 스타일과 뛰어난 화면 장악력으로 처음부터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았다가 1991년 영화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을 통해 여우주연상에 첫 노미네이트되면서 연기력을 인정 받았다. 높은 스타성으로 연기력이 연기파 동년배 트로이카 여배우들에게 약간 가려진감이 있었지만 꾸준한 노력으로 드라마와 영화를 오가며 연기, 작품, 캐릭터의 폭을 넓혀갔고 30대에 접어들면서 더욱 성숙한 연기를 선보여주어 스펙트럼 넓은 연기파 배우로 인정 받았다.1990년대, 또래 배우들이 얼굴 믿고 연기는 안 한다는 비판이 많던 때에 '최진실 보고 배워라' 는 식의 논조의 사설이 올라온 적도 있었다. 실제로도 다작을 하는 배우로 유명했고 역할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배우였다. 청순가련 캔디부터 비련의 여주인공, 잘나가는 커리어 우먼, 싹싹한 대가족 딸 역할 등 못하는 배역이 없었다. 특히 주말 드라마나 일일 드라마를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연기를 배울 좋을 기회라며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걸로 유명했다. 일일드라마나 주말드라마는 배우들이 대부분 대선배들인데다가 스케쥴도 살인적이라 어린 배우들은 대체로 꺼리는 경우가 많은데, 최진실은 대선배를 접할 좋은 기회라며 후배들에게도 적극적으로 권한 적도 있었을 정도. 덕분에 선배들에게도 평판이 좋았으며 밝고 경쾌한 연기부터 인간의 깊은 내면을 드러내는 연기까지 장르 상관없이 모두 잘 소화해내는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였다.
최진실은 김혜자, 고두심, 최불암, 안성기와 같은 오랫동안 꾸준히 사랑받는 국민 배우의 길을 걸어가고자 하여 연기에 열정과 갈망이 컸다. "저는 할줄 아는게 연기 밖에 없다. 연기를 오래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연기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 하였고 연예계 종사자와 동료 배우들은 일관적으로 "최진실은 손에서 대본을 놓은적이 없다." 평가 하였으며 배우 이병헌은 "촬영장에서 농담 걸을 새도 없이 대본을 보면서 그렇게 열심히 연기 공부를 하신다."고 하였다.
6. 성격
데뷔 전에는 느긋하고 무던한 성격이었으나 데뷔 후 연예계 생활을 하며 '빨리빨리'가 습관화되면서 예민한 성격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타고난 밝고 긍정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에 주변 친구들과 동료들은 최진실이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는지 전혀 몰랐었다고 하며[31] 감수성과 섬세함이 남다르게 풍부하여서 대중들의 평가에 상당히 예민했으며 이에 따른 불안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32][33]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촬영 현장 |
애교가 많았으며 친한 동료들과 같이 있을 때는 어린아이처럼 장난치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는 등. 엉뚱한 면이 많았고 매사에 성실하고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악바리 기질이 있었으며 굉장히 여리고 눈물이 많았다. '강강약약', '외강내유'였으며 솔직하고 털털했고, 카리스마 있는 여장부, 걸크러쉬 성격이기도 했다. 특히 각자의 분야에서 한가닥하는 사단 연예인들을 중재하고 이끄는 카리스마와 리더십이 타고 났으며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했다.[34]
최진실은 대중들에게 선하고 착한 이미지였지만 당시 여배우에게 금기시되는 음주와 흡연 여부를 숨기지 않고 공개했고 굉장히 영리하고 똑부러지는 면이 있었으며 터무니없는 루머들로 고통을 받을 때마다 당당하고 똑소리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또, 유머감각과 똑부러지고 센스있게 말을 잘하고 친화적인 성격으로 유명했지만 실제로는 말주변이 없고 부끄러움을 꽤 타는 편이었다.[35]
인간적인 면모와 포용력으로 인품이 훌륭했던 것으로도 유명해 미담이 끊임없이 많은 편이다. 소탈하고 겸손했으며 모든이들에게 친절, 친근하고 예의 바르며 인사성이 밝았다. 베풀며 선행하는 것을 좋아했고 언론에 알리지 않고 남몰래 선행하기도 했다. 이로인해 착한 이미지[36]의 대표격이었다.
7. 대인 관계
7.1. 최진실 사단
최진실을 주축으로 이루어진 모임이다. '자뻑 클럽'이 대표 이름이었으나 언론에서 '최진실 사단'으로 네이밍을 붙혔다. 최진실은 최진실 사단이라는 네이밍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37]1991년 봄 소년소녀 가장돕기 '최진실 사랑 나누기' 자선무대에서 MBC 합창단원으로서 백코러스를 맡은 엄정화와 처음 만났다. 엄정화의 용모가 최진실의 우상인 배우 강수연과 상당히 비슷하여 호감이 생겼고 엄정화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엄정화의 가정형편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의자매를 맺는다.
1992년 예능에서 이영자와 처음 만났다. 사석 뒤풀이 회식에서 "친구 먹자"고 하면서 친해졌는데 실제로는 이영자가 최진실보다 한 살 위인 1967년생이다.
이영자가 홍진경과 정선희를 최진실에게 소개시키며 모임에 합류하였고 이어 이소라(모델), 최화정, 메이크업 아티스트 조성아가 합류했다. 이영자와 조성아는 최진실 사후 최진실 재단을 추진한다.
1995년 SBS 모래시계에서 기자 역을 맡은 이승연의 외모와 스타일을 마음에 들어한 최진실이 먼저 이승연에게 친구를 맺자고 제의하여 이승연이 모임에 합류했다.[38]
이외에 배우 고소영, 김희선, 송윤아, 신애도 최진실이 주도한 모임에 합류했으며 코미디언 이경규, 배우 김지호, 배우 김남주, 방송인 백지연, 가수 김혜림, 개그맨 이휘재 등과도 친했다고 한다.
1999년 6월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예능 출발 드림팀에 최진실 사단 특집으로 출연하였다.
출발 드림팀 Ⅰ |
출발 드림팀 Ⅱ |
7.2. 배우 인연
고소영 - 최진실이 1990년대에 친한 연예인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으면 항상 엄정화와 함께 고소영을 언급했다. 1998년 즈음 최진실과 고소영이 가라오케에서 술을 먹다가 남자 배우 이야기를 나누다가 대판 싸웠다는 크게 과장 된 루머가 떠돌았었는데 최진실과 고소영이 섹션TV에 출연해 우스갯소리로 "지금 제일 피해자는 남자 배우씨다" 라며 유쾌하게 직접 루머 해명 인터뷰까지 했을 정도.김희선 - 최진실이 상당히 아끼고 이뻐한 후배이다. "내 후계자는 희선이가 됐으면 좋겠다"고 하기도 했었고 김희선이 비공개로 결혼식을 올리며 가까운 지인들만 초대했었는데 최진실과 이영자도 참석했다. 최진실은 "우리가 가까운 지인들 중에 선택이 됐다는 게 정말 행복해요. 희선이한테 고맙고...", "희선이가 우리를 특별하게 생각을 해줬구나. 그걸 많이 느껴서 더 울컥했던 것 같다"며 눈물을 글썽거렸고, 결혼식 도중 '희선이가 너무 이뻤다'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2007년 MBC 무릎팍 도사에 출연해 외모적으로 가장 완벽한 후배라고 칭찬하며 "이 프로그램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희선이가 브라운관에 모습을 자주 보여줬으면 좋겠고 작품을 많이 남겼으면 좋겠다."고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지만 안타깝게도 최진실의 마지막은 김희선과는 함께하지 못했다. 김희선이 임신 6개월차였기 때문이다. 김희선은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했으나 주변의 만류로 참석하지 못하고 싸이월드 개인 미니홈피에 추모 글을 올리며 애도를 표했다.
김희애 - 김희애와는 1988년 광고에서 주연과 보조 모델로 처음 만났으며 1989년 드라마 당신의 축배와 1993년 드라마 폭풍의 계절에 동반 출연하였다. 1990년대 초반 최진실과 김희애와 사이가 안 좋다는 루머가 떠돌았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기자들이 최진실과 김희애가 드라마 폭풍의 계절 동반 출연 당시 타이틀롤로 기싸움을 했다는 뇌피셜 기사를 쓰기도 했으나 역시나 터무니없는 루머이며 최진실이 자서전을 통해서 "희애 언니와 루머 관련 이야기를 나누며 한바탕 웃어넘겼다."고 강력히 해명하였고 최진실은 폭풍의 계절에서 김희애와 가장 많은 호흡을 맞추며 김희애에게 연기를 많이 배웠다고 존경심을 드러냈었고 존경하는 선배로 김혜자, 강수연과 함께 김희애를 언급했다.
김혜자 - 최진실과 특별한 사이로 유명했다. 유독 동반출연한 작품이 많고 칸 영화제에 같이 참석하자는 약속도 했다고 한다. 허나 최진실의 사망으로 이 약속은 무산되었고 김혜자는 2009년 영화 '마더'로 배우 원빈과 영화감독 봉준호와 함께 제62회 칸 영화제에 참석했다. 김혜자는 훗날 평생 잊히지 않는 배우로 최진실을 꼽으며 최진실을 애도하였다.
남궁민 - 2002년 광고에서 주연 모델와 보조 모델로 만났다. 매니저와 소속사 없이 활동하던 무명 연예인 남궁민을 매니지먼트사와 연결시켜주어 배우로 성장하도록 도와주고 드라마 장밋빛 인생에도 동반 출연하였다.
심은하 - 최진실이 아끼던 후배 중 한 명이었다. 최진실은 심은하의 은퇴 소식에 심은하를 직접 만나 설득하기도 했으며 인터뷰를 통해 "은하는 독보적인 여배우다. 하루 빨리 브라운관과 스크린에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굉장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안재욱 -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에 안재욱을 직접 캐스팅하고 강민 캐릭터의 트레이드 마크인 머리 스타일을 직접 제안하였다.
이미연 - 2007년 인터뷰에서 '또래 연기자들 중 누구와 친한가요?' 라는 질문에 "미연이요. 미연이가 주연한 드라마 첫회 보고 문자메시지 보내줬어요. 정말 기대하던 드라마였어요"라고 대답하였다. 인연이 굉장히 오래된 듯하다.
정선경 - 영화 배우로만 활동하던 정선경에게 텔레비전 배우로도 활동해야 배우 생명이 오래 간다고 조언하며 방송계로 적극적으로 이끌었다.
정준호 - 드라마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에 직접 캐스팅했다.
채시라 - 1968년생 동갑내기 친구로 작품 여러개를 같이 했지만 언론에서 라이벌 대결 구도로 몰아가는 바람에 깊게 친해지진 못했다고 훗날 아쉬워 했다.
박원숙 -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 시즌3 2023년 3월 21일자 방송에서 최진실과의 일화를 밝힌 적이 있다. 그때 게스트로 나왔던 방은희가 "'겨울새' 촬영할 당시 새벽에 술 마시다 갑자기 김수현 작가에게 새벽 3시 40분에 메시지를 보낸 적이 있다.[39]"고 고백했는데, 다행히 김수현 작가는 "작가 생활 하다하다 새벽 3시 40분에 문자 온 건 네가 처음이다. 그래도 네가 살 만 하다니 다행이다. 그 마음으로 계속 열심히 살아라"라고 대답했고, 방은희는 이에 대해 김수현 작가에게 감사함을 표했는데, 이때에 박원숙이 들려준 일화로, 예전 최진실이 절친 이영자의 토크쇼 택시에 게스트로 출연해서 새벽 2시에 박원숙에게 전화를 했는데, 박원숙은 신경질이 확 나서 "지금이 몇 시냐?"라고 물었고, 최진실은 "우리 생활이 그렇잖아요. 죄송해요"라고 대답했고 박원숙은 "나중에 전화해"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게 최진실이 자살하기 한 달 전의 일이었다. 박원숙은 이를 고백하며 "걔는 자기 절친이 하는 토크쇼에 나를 초대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누군가와 대화가 하고 싶었을 텐데, 누군가와 얘기를 하고, 힘든 걸 잡아줬으면 싶어서 연락했을 텐데"라며 미안함을 드러냈다. #
7.3. 기타 인연
영화감독 강우석 - 영화 미스터 맘마, 마누라 죽이기,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 홀리데이 인 서울 등 여러 영화를 함께 하면서 의남매가 된다.기자 김재우 - 자신의 사후 여론조작에 대비해 김재우 기자에게 비망록을 남긴다. 2003년부터 최진실과 김재우 기자는 의남매가 되어 서로의 직업에 대해 응원해주며 우애를 나눈다.
개그맨, MC 유재석 - 무명 생활을 오래 하다가 KBS <서세원쇼>를 통해 조금씩 인지도를 쌓아가던 패널 전문 개그맨 유재석을 2000년 스타 서바이벌 동거동락 MC로 추천하였다.[40] 최진실은 유재석과 친분이 없던 사이였는데 단지 <서세원쇼>에 출연한 유재석의 모습을 보고 "메뚜기라고 재밌는 친구가 있는데 한번 써보라"며 친분이 있던 PD에게 추천했다고 한다. 훗날 유재석은 <해피투게더 시즌 3>와 <놀면 뭐하니?> 통해 최진실에게 고마움을 전했고, 최진실의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가수 이효리 - 간접 인연이다. 2000년대 역대급 신드롬을 누리던 이효리를 지켜보며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최진실은 한 인터뷰에서 "이효리는 천의 재목이다. 효리 친구가 드라마가 잘 안 된 후에 연기를 안 하고 있는데 포기하지 말고 계속 도전해 봤으면 한다."라고 언급했다. 최진실 사후 이효리는 빈소에 조문을 가고 싶었지만 친분이 없어 망설이다 결국 못 갔다고 한다. 대신 이소라와 엄정화의 부탁으로 최진영의 집을 방문에 아이들을 위로하고 돌봐줬다. 이효리가 학창시절에 최진실과 많이 닮아 '리틀 최진실'이 별명이었다고 한다.
가수 MC몽 - 사망 전날 홍진경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친구 MC몽의 'I love you oh thank you'를 신청했다. # 다음해인 2009년 MC몽은 정규 5집 〈Humanimal〉에 '진실은 천국에서라도'라는 추모곡을 수록하였다.[41] 최진실은 MC몽의 노래를 좋아했고 평소 MC몽에게 자신에 관한 노래를 만들어 달라고 했었는데 그게 이뤄진 거다. #
최진실은 연예계 마당발로 위에 언급한 인물들 외에 탈렌트, 영화 배우, 개그맨, 개그우먼, 가수 모든 분야에서 친분이 많았다.
8. Right of Publicity
최진실은 계약 기간보다 5년을 더 자신의 초상을 사용한 제약업체를 대상으로 5억 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낸다. 사법부는 2000년 이 제약업체에 4,0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한다. 최진실은 이 재판을 통해 연예인 퍼블리시티권의 초석을 다진다.8.1. 공익 활동 1
- 1991년 5월에 소년소녀가장 돕기 자선 공연 열어 공연 수익금 3천만 원을 소년소녀 가장들을 돕는 데 사용한다.
- 2002년 6월 7일 재정이 어려운 대학교들에 컴퓨터 등 IT 학습기자재를 지원한다. 김대중 정부의 '사이버 코리아 21' 정책과도 통하는 행보라 거버넌스의 좋은 사례에 해당된다. 통신사 KT와 연대한 활동이라 시너지 효과가 있었다. 최진실에게는 자신을 변함없이 최고 대우로 광고 모델로 기용해 준 KT와의 우정을 표시하는 일이라 의미가 있었다. KT는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공식 파트너이기도 했다. 관련영상
- 2002년 6월 12일 한동대학교에 5천만 원을 기부하고 한동대학교에는 '최진실 장학금'이 생긴다.
- 2004년 12월에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 피해자들에게 후원금을 지급한다.
8.2. 공익 활동 2
- 1993년 금융실명제 광고에 무료로 출연한다.
- 1997년 외환 위기 시기에 도산 위기에 처한 기아자동차 광고에 무료로 출연한다.
- 2004년 10월에 갈 곳 없는 노숙인들과 보육원의 원생들을 돌봐 주었다.
- 2004년 12월에 자신의 범죄 피해 경험을 사회적으로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면서 자신의 사회적 영향력을 공익에 부합되게 사용하였는데, 범죄 현장을 언론에 공개했다는 이유로 피해자인 광고 모델에게 손해배상금을 청구하는 광고주의 행동에서 사회적 모순을 목격하게 되고 사회가 가정폭력을 인권의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변호사 강지원 등 여성운동계와 연대한다.
- 2006년 4월에 굿네이버스 친선대사가 된다.
- 2007년 7월에 저소득층 아동들을 돌본다.
- 2008년 3월에 <최진실의 진실과 구라>에서 동성애를 다루고 싶다고 한다. #
- 2008년 4월에 남자 MC 일색 예능계에 일침을 가한다. #
- 2008년 3월에 최진영에게 베트남 봉사활동을 권하고 최진실은 드라마 촬영 중이라 2009년에 갈 계획을 세운다. 최진영은 최진실 사망으로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2008년 11월에 베트남 봉사활동을 다녀온다.
- 2008년 5월 29일 미국산 소고기 수입과 관련하여 2008년 촛불집회와 뜻을 함께 한다. #
- 2008년 7월 13일 연예계 내의 승자독식구조에 대해 성찰한다. #
- 2008년 10월 1일 북측 아동들을 위한 자선사업,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고 한다. # 1989년 영화 '남부군'(1990년)을 찍으면서 남측 반공교육의 문제점을 인식한다. 같은 날, 아프리카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고 한다.
9. 사건사고
자세한 내용은 최진실/사건사고 문서 참고하십시오.10. 사망
자세한 내용은 최진실 사망 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11. 묘소
최진실-진영 남매의 묘소 |
최진실은 장례식 이후 화장되어 경기도 양평군에 있는 갑산공원 납골묘지에 안장되었다.[42] 최진실이 생전 다녔던 강남중앙침례교회가 매입한 성도 전용 묘역으로, 최진실을 포함해 18명의 신도들이 이 곳에 안장되어있다. 2010년 최진영이 사망한 뒤에는 누나와 함께 합장되어 묘역의 크기가 훨씬 넓어졌고, 2018년 10주기 때까지 매년 추도식이 이 곳에서 열리기도 하였다. 최진실이 이 곳에 안장된 뒤 인기가 높아져 이 곳에 분양을 받으려면 1달 이상 기다려야 할 정도로 대기자가 몰렸다고 한다. #
최진실의 묘비에는 "만인의 연인, 사랑스러운 그녀! 이 곳에 잠들다."라는 묘비명과 함께 그녀의 흉상이 세겨져있고, 옆에 안치된 최진영의 묘비에는 그의 히트곡 영원의 가사가 적혀있다. 옆에는 최진실의 생전 출연작 포스터와 팬들의 팬레터가 보관된 우체통이 설치되어 있다. 납골묘 크기가 넓기 때문에 묘역보다는 하나의 공원처럼 느껴질 정도다.
안장 초창기에는 현재와 같은 넓은 크기의 납골묘가 아니라 그냥 일반적인 평수의 납골묘였다. 그러나 참배객들의 인원이 워낙 많아 묘역 관리가 힘들어졌고, 또 2009년 8월 발생한 유골함 도난사건 때문에 보안이 강화될 필요가 있어 최진실의 1주기에 맞춰 현재의 모습으로 리모델링하였다.
12. 여담
- 1989년 봄 삼성전자 전속 광고모델로 잘 나갈 시기에 예능 프로그램 출연 차 방송사에 들렀다가 배병수가 먼저 말을 걸며 동업을 제의하면서 서로 안면을 튼다. 최진실의 거절에도 배병수가 집까지 알아내 찾아와서 동업을 간청하지만 계속 미심쩍어하다가 사업 계획을 들어보니 비전이 있어 보여 일을 맡겨보기로 하고 1989년부터 1993년까지 매니지먼트 계약을 맺었다. 언제든 구두로 파기할 수 있도록 계약서도 안썼다. 배병수한테 일을 맡긴 후 첫 성과가 영화 <남부군> 출연이다. 4년이라는 기간 동안에 출연료를 멋대로 받아간다든가, 출연 협상 자리에 안나타난다든가 하면서 중간에 계약 파기 위기가 몇 번 있었지만 배병수가 정중하게 사과를 해와 동업 관계를 이어가곤 했다. 하지만 배병수가 예능 출연을 빈번히 하면서 점점 연예인이 돼 가고 머리 질끈 동여매고 빨간색 양복을 입고 다니는 너무도 강한 이미지를 만들어가자 최진실은 그게 너무 짐스러워 기자회견을 통해 동업 관계를 청산한다.
- 영화 데뷔작 남부군의 정지영 감독에 따르면 신인이었던 최진실을 만났는데 인터뷰 때 당당했던 모습이 기억에 남았다고 한다. 또 이 영화를 찍는 도중 최진실이 출연한 CF가 대박이 나 스타가 되는 바람에 고마운 점도 있었다고. #
- 1989년 KBS 제2라디오 <밤을 잊은 그대에게>에서 변진섭과 처음 만난다. 변진섭은 진행자였고 최진실은 게스트. 최진실의 매니저 배병수와 변진섭의 형이자 매니저 변요섭은 친구사이였다.
- 1990년 청룡영화제 인기상을 황신혜와 함께 공동 수상했었는데 당시 황신혜의 매니저였던 현 대한민국의 음반 기획자이자 MBK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자 포켓돌스튜디오의 총괄 프로듀서인 김광수 대표가 1000만원 돈을 들여 언론사 신문 7만부(대형 트럭 5대분)를 사고 아르바이트까지 고용해서 엽서 투표를 했지만 최진실이 1~2만부 차이로 이겼다고 한다. ##
- 1990년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에서 흡연 연기를 하면서 담배를 처음 피웠다. 이 때는 구토를 할 정도로 힘든 촬영이었지만 이후 실제로 흡연가가 된다. 7년 후인 1997년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에서도 1인 2역 중 사진작가 '소피아'를 연기할 때 흡연 연기를 보여주게 되는데 그러면서 여성 흡연 금기 사회에서 '흡연' 이미지를 과감하게 입는다. 1998년 자서전에도 자신이 흡연가라는 걸 밝혀 둔다.
- 2001년 임신 중에 4월에는 남양유업과 광고 계약을 맺을 뻔 했고 출산이 임박한 7월에는 삼성전자 가전제품 광고를 찍었다. 남양유업 광고료가 고가로 잘못 알려져서 소비자의 분노를 샀고 급기야 인터넷에 '안티 남양', '안티 최진실' 카페가 만들어지기에 이른다.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된 최진실은 남양유업 광고 제의를 거절했다.
- 2002년 6월 유아복 브랜드 '미아오'를 내놓고 패션업계에 진출한다. 유아복업체 <아비또>와 공동 투자한 '미아오'는 기획홍보 이사 최진실이 상품 기획을 총괄한 브랜드로 '고양이 울음소리'에서 힌트를 얻은 브랜드 이름도 최진실이 직접 작명했다. 아비또 측은 "신규브랜드를 내놓을 때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이 유통망 확보인데 '미아오'는 롯데와 현대 등 대형백화점 측에서 먼저 입점 제의를 해오는 등 최진실의 유명세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고 말한다.# 롯데백화점과 현대백화점은 각각 한국 백화점업계 빅3 중 하나로 최진실은 롯데백화점과 광고모델로서 인연이 있고 현대와는 현대해상 광고모델로 인연이 있던 터였다.
- 현대해상은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공식 보험이라 최진실은 여러 버전 광고를 찍는다.관련영상관련영상 이 해 월드컵은 대한민국이 4위라는 기염을 토해 응원팀 붉은 악마뿐 아니라 나라 전체가 온통 축제 분위기라 광고에도 그런 열기가 반영된다.
- 2004년 12월 인권변호사 강지원[43]을 찾아간다. 범죄 피해자한테 감히 손해배상금을 청구하는 기업의 행태가 우리 사회의 잘못된 사회통념 때문이라는 걸 간파하고 사회적 연대를 모색한 것. 강지원을 통해 최진실은 대표적인 여성학자 오한숙희와도 네트워킹을 이룬다. 유감스럽게도 의뢰인 최진실 면전에다가 여론조작범들이나 떠들 이야기를 한 강지원을 최진실이 끝까지 안고 간 건 이런 사회적 의미가 더 중요했기 때문일테고. # 유엔여성차별철폐위원회 부위원장 신혜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여성복지위원장 진선미[44],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 정춘숙[45]도 최진실과 연대한다. ##
- 2008년 1월에 개정된 친권법이 시행되자 그 달에 바로 자녀들이 자신의 성인 '최'를 따르도록 가정법원에 자녀성본변경 신청을 한다. 이를 지상파 메인 뉴스에서도 관심있게 다루면서 자녀가 어머니의 성을 따를 수 있다는 사실이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다. # 이로써 대한민국 친족법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자리매김 한다. 자녀들의 성을 변경할 때 딸의 이름을 '준희'로 바꾼다.[46] 이 건으로 악플러가 들러붙자 2008년 9월 4일 자녀 공개 자제 입장을 취했다.
- 드라마 집필을 꾀하고 드라마 가제 <사노라면>을 기획했다. 이 드라마에 배우 천정명 등을 캐스팅하고 싶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드라마 작가로 입봉도 못한 채 사망하면서 드라마 시놉시스만 남기고 이 시도는 미완인 채로 남았다.
- 2008년 9월경 최진실은 사진관 '쌍마스튜디오' 사장에게 '그동안 찍은 사진을 전부 앨범으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고 한다.[47]
쌍마스튜디오에 전시된 사진[48] |
- 최진실의 5촌 당숙 최상현은 박경삼과 동양방송 시절부터 친구였다.
- 사망 전에는 인터넷에서 "사실이냐?"는 뜻으로 "최진실?" 혹은 "최트루?"라는 식의 문장이 유행하며 널리 쓰였었다. 하지만 사망 이후[49] '허참', '트루' 등으로 대체되어 쓰이다가 '레알'이라는 단어로 완전히 대체된 상태이다.
- MBC 공무원이란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유독 MBC에서 많은 작품을 찍었다.[50]
- 예능 진행을 한 적이 있다. OBS경인TV <최진실의 진실과 구라>(2008년)다. '진실과 구라'로 알려졌지만 정식 명칭은 앞에 '최진실의'가 붙는다. 즉 메인은 최진실이었고 김구라는 주로 드립에 집중했는데 이들의 호흡이 잘 맞아 흥행에 성공했다.[51] 예능인 만큼 티저 이미지로 제작한 사진도 대중의 폭소를 유발하는 컨셉. 전국구 방송이 아님에도 큰 인기를 누려 시즌2까지 기획될 뻔한 프로그램이다.[52]
- 2010년 11월 20일 방영된 <그것이 알고싶다 - 연예인 자살, 누구도 말하지 못한 이야기>에서 불면증 치료에 주로 사용되는 '졸피뎀'의 부작용 위험성을 알리면서 최진실, 최진영의 죽음도 거론이 되었지만 이들의 죽음과 치료약의 인과관계가 입증된 건 없다. 이후 식약처가 '졸피뎀' 복약지도를 강화하는 조치를 내리는 것으로 마무리가 된다. 언론이 사람을 죽인다는 문제가 시대 화두가 되어 2021년에는 '가짜뉴스 피해 구제법'이라는 언론중재법 개정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 자서전 <그래, 오늘 하루도 진실하게 살자>에서 먼 훗날 사망할 시 전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고 싶다고 하였고, 이혼 후 우울증으로 힘들어할 때 아이를 입양해서 사랑으로 키우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으며, 연예계를 은퇴하고 오드리 헵번처럼 말년을 봉사하면서 살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친 적이 있다. 그러나 집안의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유일한 가장이자 어머니의 반대로 이와 같은 의견들은 무산된 것으로 보인다. 최진실의 재산은 법에 따라 자식들에게 상속되었다.
- 29살때까지 손톱을 물어 뜯는 버릇이 있었다. 유년시절 부모님이 서로 고성을 오고가며 부부싸움을 하면 두려움에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방구석에서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 버릇은 커서도 오랫동안 고쳐지지 않았다고 한다.[53]
- 걸어다니는 대기업이라는 별명이 생기고 토크쇼와 인터뷰 단골 질문에는 재산 관련이 빠지지 않았는데 최진실은 늘 한결같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저 그렇게 돈 많지 않다"라고 대답했다. 재테크를 할 줄 몰라 번 돈을 은행에 차곡차곡 저금만 했고 재산 관리를 전부 어머니가 하여 최진실은 어머니께 용돈을 타서 썼다고 한다. 신용카드도 1995년 SBS 드라마 <아스팔트 사나이> 당시 미국 로케 촬영을 하여 신용카드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처음 만들었다고. 최진실은 사망할 때까지도 어머니가 재산 관리를 하여 본인 재산이 정확히 어느 정도 있었는지를 몰랐다고 한다.
- 마른 체형의 비결로 평소 군것질을 안 좋아했다고 한다.[54] 대신 밥과 밀가루[55]가 주식이었는데 1995년 SBS 드라마 '아스팔트 사나이' 미국 로케 촬영 당시에는 전기밥통을 들고 갔다고 한다.
- 2000년대에 가수 출신 배우들의 선입견이 심했을 때 이를 언급하며 "주눅들지말라", "간혹 실망스런 연기를 보여줬더라도 기회의 싹을 자르지 말았으면 좋겠다", "언론과 인터넷이 도와줘야 한다. '지구를 떠나라'는 식으로 그들에게 상처를 주면 그들은 겉으론 내색하지 않지만 속으로는 엄청난 좌절감을 맛보게 될 것"이라고 언급한 적 있다.
- 결혼식을 취재하러 온 안면식 있는 기자에게 "나 정말 잘 하는 거 맞냐"고 물어봤다는 일화가 있다.
- 유재석은 최진실에게 고마웠던 일화를 공개했는데 일면식도 없는 유재석을 예능 MC로 꽂아줬다고 한다. 그 프로그램이 바로 스타 서바이벌 동거동락 이다. #
- 2005년 배우로 복귀하면서 싸이월드에 가입해 미니홈피를 만들었는데, 네티즌들 사이에서 높은 방문자수를 기록하며 화제를 모았다. 팬들이 일촌평을 달면 직접 답장해주기도 했었다. 최진실이 사망한 뒤에도 싸이월드가 서비스를 종료할 때까지 팬들이 방문 및 추모글 작성이 끊이지 않았다. 최진실의 딸인 최준희도 미니홈피를 어린 나이부터 사용했었는데, 엄마의 미니홈피에 직접 추모 일촌평을 남겨 팬들을 가슴 아프게 하기도 했다.
13. 출연 작품
13.1. TV드라마
<rowcolor=#330000> 연도 | 방송사 | 제목 | 배역 | 시청률 |
1989년 | 조선왕조 오백년 - 한중록[59] | 장미 | ||
MBC 베스트셀러극장 - 시진읍[60] | 팔푼 | |||
잠들지 않는 나무 | 찬주 | |||
조선왕조 오백년 - 파문 | 박선아 | |||
제5열 | 대통령 후보의 딸 | |||
당신의 축배 | 김범경 | |||
서울 시나위 | 희수[61] | |||
1990년 | 각시방에 사랑 열렸네 | 오도희 | ||
두 권의 일기 | 양해리 | |||
추억여행 | 심미리 | |||
우리들의 천국 | 승미 | |||
1992년 | 약속 | 정인 | 평균 34.8% 최고 41.5% | |
질투 | 유하경 | 평균 40.1% (역대 14위) 최고 56.1% | ||
매혹 | 이지훈 | 시청률 왕 최진실의 드라마 중 시청률 집계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존재감이 미미했던 드라마 | ||
1993년 | 폭풍의 계절 | 이진희 | 평균 34.2% 최고 52.1% | |
1994년 | 사랑의 향기 | 신영진 | 평균 27.7% (방영 당시 전체 프로그램 시청률 순위 4위) | |
1995년 | 아스팔트 사나이 | 오화련 | 최고 32.9% | |
째즈 | 채송화 | 평균 15.5% | ||
아파트 | 차나리 | 평균 24.7% | ||
1997년 | 별은 내 가슴에 | 이연이, 소피아 | 평균 40.2% (역대 13위) 최고 49.3% | |
그대 그리고 나 | 윤수경 | 평균 42.4% (역대 10위) 최고 62.4% | ||
1998년 | 추억 | 서인영 | 평균 28.3% 최고 38.4% | |
1999년 | 장미와 콩나물 | 손미나 | 평균 32.7% 최고 44.1% | |
2002년 | 그대를 알고부터 | 이옥화 | 평균 16.5% | |
2004년 | 장미의 전쟁 | 오미연 | 평균 12.5% | |
2005년 | 장밋빛 인생 | 맹순이 | 평균 30.9% 최고 47.0% (TNmS) | |
2007년 | 나쁜여자 착한여자 | 이세영 | 최고 24.6% | |
2008년 |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 | 홍선희 | 평균 15.8% |
13.2. 영화
<rowcolor=#330000> 연도 | 제목 | 배역 | 관객수 |
1990년 | 남부군 | 박민자 | |
꼭지딴 | 혜지 | ||
나의 사랑 나의 신부 | 미영 | ||
1991년 | 있잖아요 비밀이에요 2 | 다혜 | |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 | 수잔 브링크 | ||
1992년 | 미스터 맘마 | 영주 | 227,294명[62] |
숲속의 방 | 소양 | ||
1993년 | 사랑하고 싶은 여자 & 결혼하고 싶은 여자 | 유라 | 69,743명 |
1994년 |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63] | 강민주 | |
마누라 죽이기[64] | 장소영 | 344,900명 | |
1995년 |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 | 은재 | |
누가 나를 미치게 하는가 | 주영 | ||
1996년 | 고스트 맘마 | 차인주 | 257,688명 |
1997년 | 홀리데이 인 서울 | 호텔 전화 교환수 | |
베이비 세일 | 지현 | ||
편지[65] | 이정인 | 724,747명[66] | |
1999년 | 마요네즈 | 아정 | 95,875명[67] |
2000년 | 단적비연수[68] | 비 | 616,349명[69] |
13.3. 광고
- 삼성전자
- 일동제약 아로나민 씨플러스, 메디폼, 메디터치
- 캐리어에어컨
- 이롬 황성주생식
- 한화L&C
- 현대해상 하이카
- 대상 감칠맛 나는 미원
- 롯데칠성음료 2% 부족할때
- 미래에셋생명
- KT
- 롯데백화점
- 옥시
- GS칼텍스 시그마6
- 한라건설 한라비발디II
- 나드리화장품
- 진미식품 참그루
- 하나금융투자
- 샤몽화장품
- 네슈라화장품
- 쥬리아화장품
- 삼성시계
- 신원
- 한일약품
- 한미약품
- 롯데제과
- 보루네오가구
- 기아 타우너
14. 수상 경력
<rowcolor=#330000> 연도 | 시상식명 | 수상 부문 | 작품 |
1990년 | 제11회 청룡영화상 | 신인여우상 | 남부군 |
인기스타상 | |||
1991년 | 제15회 황금촬영상 | 신인여우상 | 나의 사랑, 나의 신부 |
제29회 대종상 | |||
제12회 청룡영화상 | 인기스타상 |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 | |
1992년 | 제28회 백상예술대상 | 영화 부문 인기상 | |
제13회 청룡영화상 | 인기스타상 | 미스터 맘마 | |
TV저널 올해의 시상식 | 탤런트 부문 최우수상 | 질투 | |
MBC 연기대상 | 여자 최우수 연기상 | ||
1993년 | 제29회 백상예술대상 | TV 부문 인기상 | |
제31회 대종상 | 여자 인기상 | 미스터 맘마 | |
제14회 청룡영화상 | 인기스타상 | 숲속의 방 | |
TV저널 올해의 시상식 | 탤런트 부문 우수상 | 폭풍의 계절 | |
MBC 연기대상 | 여자 최우수 연기상 | ||
1994년 | 제30회 백상예술대상 | 영화 부문 여자 최우수 연기상 |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
제32회 대종상 | 여자 인기상 | ||
제18회 황금촬영상 | 인기여우상 | ||
제15회 청룡영화상 | 인기스타상 | ||
SBS 연기대상 | 여자 최우수 연기상 | 사랑의 향기 | |
1995년 | 제31회 백상예술대상 | 영화 부문 인기상 | 마누라 죽이기 |
제33회 대종상 | 여우주연상 | ||
제16회 청룡영화상 | 인기스타상 | ||
SBS 연기대상 | 여자 최우수 연기상 | 째즈, 아스팔트 사나이 | |
1997년 | 제33회 백상예술대상 | 영화 부문 인기상 | 고스트 맘마 |
제18회 청룡영화상 | 인기스타상 | ||
MBC 연기대상 | 베스트 커플상 (with 안재욱) | 별은 내가슴에 | |
대상 | 별은 내가슴에, 그대 그리고 나 | ||
1998년 | 그리메상시상식 | 최우수 여자 연기자상 | 그대 그리고 나 |
제25회 한국방송대상 | 여자 탤런트상 | ||
제19회 청룡영화상 | 인기스타상 | 편지 | |
1999년 | 제35회 백상예술대상 | 영화 부문 인기상 | 마요네즈 |
2005년 | KBS 연기대상 | 베스트 커플상 (with 손현주) | 장밋빛 인생 |
여자 네티즌상 | |||
여자 최우수 연기상 | |||
2006년 | 제42회 백상예술대상 | TV 부문 여자 최우수 연기상 | |
2008년 | 제29회 청룡영화상 | 명예 인기스타상[70] | |
MBC 연기대상 | 공로상 | ||
2014년 | 제3회 에이판 스타 어워즈 |
[1] 2006년도에는 조사 결과가 없다.[2] 틀:올해를 빛낸 탤런트 1위 참고.[3] 2010년 최진영과 합장되었다.[4] 프로필상 키는 164cm였다. 현재의 한국 여성 평균보다도 큰 키다. 최진실의 귀여운 이미지 때문에 작게 보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제로는 작은 키는 아니었다.[5] 2020년 11월 20일 가수로 데뷔했다. #[6] 사망할 당시 온 가족이 강남중앙침례교회에 출석하였다.[7] 어렸을 적 얼굴에 주근깨가 많아 붙여진 별명이다.[8] 유년 시절 가정형편으로 쌀이 아닌 수제비가 주식이 되어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이다.[9] 잠이 많아 어머니가 붙여준 별명이다.[10] 연예계 데뷔 후 미디어 언론에서 불린 별명[11] 진실=True[12] 1990년대 당시에는 김국진, H.O.T. 등과 함께 시대의 아이콘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실제 1998년 광복 50주년을 기념해 실시된 설문조사에서 최진실은 여자 탤런트 부문 2위를 차지했다. 참고로 1위는 김희선.[13] 현재는 국민MC로 불리는 유재석이 연예계 최정상의 위치를 유지하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이미 알려진 일화지만 무명이었던 유재석을 MBC 스타 서바이벌 동거동락의 메인 MC로 추천했던 인물이 바로 최진실이었다.[14] 그나마 실패했던 작품은 2004년 MBC에서 방송된 장미의 전쟁이었는데, 당시 조성민과 이혼 다툼을 하고 있던 시기라 인기가 하락해 시청자들이 드라마를 외면했다.[15] 물론 메인 MC 3명(강호동, 유세윤, 올라이즈 밴드)보다 연예계 데뷔가 훨씬 선배이기에 조심스러워했던 면도 있었다.[16]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이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남아있을 때였다. 특히 여자 연예인들이 이혼을 하면 이에 따른 여파로 상당기간 공백기를 가지는 일이 흔했을 정도. 이전 시대인 1970년대~1980년대까지는 여배우가 이혼하면 아예 은퇴를 고민해야 할 정도로 부정적이게 받아들여졌다.[17] 환희, 준희가 한 개인으로서는 연예계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건 없지만, 여전히 높은 인지도와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는 바탕은 최진실의 엄청난 영향력 때문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 없다.[18] 채시라, 김희애 등 역시 그랬는데, 주 수입을 CF모델료로 채워넣었기 때문이다.[19] 지역민방이 생긴 1995년 전까지만 해도 수도권 한정 신생 민영방송이었기 때문에 배우들에게 거액의 출연료를 제시함으로써 전국 방송 제한에 따른 손해(CF 계약 만료 등)를 메꿔주었다. 즉 MBC나 KBS는 전 지역으로 송출이 되나 SBS는 수도권만 송출이 돼 광고 효과가 떨어져 광고주 입장에서 SBS 출연 배우는 광고 모델로서 메리트가 떨어졌다.[20] 전국 관객수는 약 200만 명으로 추정[21] 최불암, 조용필, 채시라, 심은하, 배용준, H.O.T., S.E.S. 등 여러 스타들과 함께 출연했다.[22] '해방 이후 지난 50년간 활동한 우리나라 모든 연예인 중에서 누구를 가장 좋아하십니까?'라는 질문으로 응답자에게 최대 3명을 요구함.[23] 출처는 갤럽DB[24] 1위는 1995년 이후 연예계 역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코미디언 김국진이, 2위는 흑백TV 시절부터 국민적 인기를 누린 20세기 한국 최고의 연기자 최불암이 차지했고, 엄청난 가창력으로 신드롬급 인기를 오랫동안 유지하며 1980년대 연예계를 리드한 조용필이 3위, 1990년대 말 최고의 인기를 누린 시대의 아이콘 김희선이 4위였다.[25] 2000년 상반기엔 해당 조사에서 4위였다.[26] 1996년 영화《고스트 맘마》로 영화부문 인기상을 수상했다.[27] 정윤희-황신혜-김희선-김태희가 대한민국 정석 원탑 미녀 계열이다.[28] 귀여우면서 분위기 있는[29] 일명 당나귀 귀, 요정 귀, 원숭이 귀[30] 아들의 귀 모양이 최진실의 아들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볼 정도로 최진실 귀 모양과 닮았다.[31] 유작 드라마 '내 생에 마지막 스캔들'에서 함께 호흡을 맞췄던 배우 정준호는 최진실 사망 후 인터뷰를 통해 "당시 드라마를 촬영하며 최진실을 가까이서 지켜 본 한 사람으로서 그녀는 평소 우울증 같은 게 없었다."라고 언급했었다.[32] 데뷔 후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최정상에 올랐을 때 하루아침에 밑바닥으로 떨어져 사람들에게 비난받는 꿈을 자주 꿨고, 이후 국민배우로 안정기에 들어섰음에도 안 좋은 기사가 하나라도 나면 모든 대한민국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 잠을 설쳤다고 한다. 때문에 1990년대부터 수면제를 복용했다. 신경성 위염도 심해서 스케줄 도중 헛구역질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33] 최진실과 친오누이처럼 가까이 지냈던 배우 박중훈은 최진실에 대해 "인간관계를 맺을 때 뒷생각을 잘 못하는 편이었고 있는 그대로 사람을 대하는 쪽이었다"라고 언급했다.[34] 절친 이영자가 진행하는 예능 프로그램인 MBC <지피지기>와 tvn 현장토크쇼 <현장토크쇼 TAXI>에 게스트로 출연하였으며, 홍진경이 최진실에게 뜸들이며 “김치 사업 홍보에 필요한 인터뷰가 필요한데...”라고 어렵게 말을 꺼내자 비속어를 섞어가며[71] “카메라 들고 당장 안 오냐”고 했던 일화는 홍진경이 <힐링캠프>에서 말한 바 있다. 그 外, 친구가 하는 사업에 노개런티로 홍보모델 했던 경험도 있으며 영화 감독, 드라마 감독, 드라마 작가와의 의리로 출연했던 작품들이 꽤 있다.[35] 결혼 전 MC 진행자의 질문에 말끝을 얼버무리며 장난스레 옆에 있는 동료에게 대답을 떠넘기는 모습을 꽤 볼 수 있으며, 시상식에 참석할 때 안정제를 먹은 적이 있다. 그 시절 톱여배우들이라면 대부분 거치는 MC, 사회를 진행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가 2008년에 첫 토크쇼를 진행했다.[36] 현재 유재석, 이승기와 같은 이미지라고 보면 된다.[37] 연예계에서 사단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인맥이 넓었던 인물로는 김을동이 있다. 김을동은 후배 배우들의 연기 지도를 주로 도맡았고 유동근, 박상원 등 그녀에게 연기를 배운 배우들이 모두 A급 배우로 성장하면서 김을동 사단 소리를 들었다.[38] 최진실은 이승연과 성향이 잘 맞아 영화나 드라마에서 만나 연기 합을 맞춰보고 싶어했다. 특히 <델마와 루이스> 류의 워맨스 영화에 같이 출연하고 싶다고 했다. 한국 연예계(드라마, 영화, 예능 등)에서는 2010년대부터 워맨스, 브로맨스 소재가 대거 등장. <델마와 루이스>(1991년)는 대표적인 워맨스 영화로 워맨스, 브로맨스 영화의 시조새쯤 된다.[39] 두 번째 결혼하고 사실 그때 굉장히 마음이 안 좋았었다고.[40] 정확히는 최진실이 방송에 나온 유재석을 보고 재능있는 코미디언이라 생각하여 친분이 있던 PD에게 목표달성 토요일의 코너 <스타 챔피언>의 MC 자리에 유재석을 적극 추천해서 유재석이 진행을 맡았는데 이게 의외로 반응이 좋아서 유재석이 스타 서바이벌 동거동락 MC를 맡게 된 것.[41] <진실은 천국에서라도> 피처링 김희선은 동명이인으로 배우 김희선이 아니라 보컬 트레이너 김희선이다.[42] 원래 유가족들은 매장을 계획했지만, 중간에 부검이 실시되면서 화장장으로 바꿨다.[43] 제18대 대통령 선거에 기호 6번으로 출마했다. 하지만 당시 박근혜와 문재인의 양강구도에만 세간의 초점이 맞춰져 별로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0.17%를 득표하여 3위를 기록했는데, 이는 해당 선거에서 양강구도가 극심했음을 방증한다. 부인은 김영란 전 대법관인데 '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소위 김영란법)'을 입안한 그 분 맞다.[44] 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문재인 정부 여성가족부 장관을 역임했다.[45] 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46] 애당초 최진실은 아들 '환희'와 운을 맞추어 딸의 이름도 '신희'로 지으려고 했으나 조성민의 의견을 받아들여 '수민'으로 정했었다.[47] 여의도에 위치한 '쌍마스튜디오'는 연예인들의 증명사진 단골집으로 유명했다고 한다.[48] 1999년 모습으로 추정된다.[49] 사망 초기에도 그대로 사용하다가 고인드립 취급받기도...[50] 텔레비전 드라마 데뷔작 <조선왕조 오백년 한중록>(1988년), 출세작 <질투>(1992년), 연기 대상작 <그대 그리고 나>(1997년), 마지막 작품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2008년) 등 작품 대부분이 그러하다. 1990년대에 MBC와 전속 계약을 맺는다. 배우가 매니지먼트사가 아니라 방송사와 전속 계약을 맺은 거다. MBC를 드라마 왕국으로 이끈 주역이다. 애초에 MBC 특채 출신이다.[51] 김구라는 2002년 10월 19일 '홍대 쌈지 스페이스'에서 '한국을 조진 100인의 개새끼들'을 부르면서 임신 6개월차 최진실을 살인교사범으로 모함한 자. 대중은 최진실이 대인배라는 걸 목격하며 최진실을 응원함.[52] 이 프로그램은 경기도, 인천광역시에서만 송출되는 지상파 방송. 서울특별시는 케이블 방송사를 통해 방영.[53] 대본을 외울 때, 무서운 영화를 볼 때, 촬영에 들어가기 전 긴장할 때 자신도 모르게 물어뜯었다고 했다.[54] 못 먹으면서 자라 소화 능력이 안 좋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빵이나 돈가스 같은 음식을 먹으면 하루 종일 속이 더부룩한 채로 트름하며 다닌다고.[55] 특히 면종류[56] 최진실의 화장기 전혀 없는 맨얼굴이 강아지상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시고르자브종과 말티즈를 닮았다.[57] 정치색은 밝힌 적이 전혀 없고 중립 입장이었다. 다만 신한국당 홍보모델로 잠시 활동하기도 했으며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당시 정몽준이 창당한 국민통합21의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린 적은 있다.[58] 특히 추리소설을 좋아했다.[59] TV드라마 첫 출연작[60] 박범신 작가의 동명의 중편소설이 원작이며, TV드라마 첫 주연작.[61] 특별 출연[62] 1992년 한국 영화 흥행 순위 2위[63]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제30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영화 부문 연기상을 수상한 작품[64] 대종상 여우주연상 수상작. 인기상만 주야장천 받다가 드디어 주연상 획득.[65] 청룡영화제 최다 관객상 수상작[66] 1997-98년 한국 영화 흥행 1위[67] 전국 관객 약 25만 명 추정. 기혼 여성 관객들에게 인기를 얻은 작품. 1999년 설 연휴 기간 쉬리의 흥행 속에서 나름 선전.[68] 영화 은행나무 침대(1996년) 속편[69] 전국 관객 약 177만 명. 손익분기점 상회.[70] 1990년대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후보에 거의 매년 올랐었지만 인기상만 주구장창 타갔었다. 2000년대에는 결혼 전 개봉한 <단적비연수> 이후 영화를 아예 찍지 않았으며 결국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은 받지 못한 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