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11:44

최종준(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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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경력3. 저서4. 기타

1. 개요

1951년 경상북도 경산군에서 태어났다. 배재고등학교[1]성균관대학교 무역학과를 졸업하였다. 1977년 LG그룹 공채로 입사하였다. LG상사에서 근무하다가 1990년 LG스포츠로 발령받으면서 스포츠계와 인연을 맺게 된다.

LG 트윈스 창단 준비팀장과 운영부장을 6년간 역임하면서 상관이었던 어윤태 단장, 이광환 감독과 함께 신바람야구의 돌풍을 불러왔다. 1996년에는 단장으로 승진했고, 배구단 단장까지 겸하면서 1990년대 LG 트윈스의 전성기를 이끈 것으로 유명하다.[2][3]

야구(LG 트윈스 / SK 와이번스), 축구(안양 LG / 대구 FC), 배구(LG화재), 씨름(LG투자증권) 등 여러 스포츠 종목의 단장으로 일하면서, "직업이 단장"이라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이후 2001년을 끝으로 단장 직에서 물러나 씨름연맹으로 옮겼고 다시 2003년에 SK 와이번스 단장, 2006년에 대구 FC 단장으로 옮겼다.

2009년에는 대한체육회 사무총장 직을 맡게 되면서 제21회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제30회 2012 런던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등 체육계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후에는 가톨릭관동대학교 교수와 대한바둑협회 상임부회장, 스포츠 칼럼니스트로서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 경력

3. 저서

  • 최단장의 LG야구이야기 (2000년)
  • 굿모닝! GM - 칼럼 모음집 (2007년)
  • 스포츠코리아! 그 선진화의 여정 (2015년)

4. 기타

2008년 3월 대구 FC 단장 재직 시절 한 지역신문에 기고한 사설에서 축구는 조선인이 일본인을 압도하여 민족의 자긍심을 되찾고 나라를 잃은 울분을 토해 내는 것을 두려워해 축구통제령을 내리려고 했으며 경평축구를 할 때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자 일제가 문화탄압을 하는 원인이 된 반면 일제가 축구를 강제로 막기보다 야구를 널리 전파하고 보급하여 자국의 문화지배력을 높이고자 했다는 사실과 다른 왜곡된 주장을 썼었다. 하지만 야구는 이미 축구통제령을 내리기 2년 전인 1932년에 야구통제령이 시행되어 성인야구를 금지하고 학생야구만 존속케 하여 조선야구가 위축하게 만들었다. 한편 축구는 조선총독부가 아닌 중등학교체육연맹에 실시방침을 전달하고 통제를 위임하는 형태를 취해 야구에 비해 좀더 나은 상황이었다.



[1] 이광은, 노찬엽 등 배재고 출신들이 파벌을 만들었다는 소문이 있었다.[2] 1996년에는 현 LG 트윈스의 단장인 차명석 단장의 은퇴를 막고 선수 생활을 연장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96년 군 생활을 마치고 복귀한 차명석이 야구가 뜻대로 잘 안 되자 은퇴를 결심해 구단에 은퇴 의사를 밝혔는데, 이를 들은 최 단장이 2군 코치들을 대동하고 직접 차명석을 찾아가 돼지갈비를 사 주며 야구가 안 돼서 은퇴하겠다는 차명석의 말을 듣고는 그 자리에서 동석한 코치들에게 "당신들이 어떻게 가르쳤길래 선수가 스스로 그만둔다고 말을 하는 거요? 이 선수 그만 두면 당신들도 옷 벗을 각오 해."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자 코치들도 차명석을 설득했고 결국 차명석은 선수 생활을 이어가기로 결심한다.[3] 그리고 차명석은 1997년 순수 불펜으로만 120이닝을 소화, 11승에 WAR 3.51을 기록하며 커리어하이를 찍어버리며 불펜투수 최초 연봉 1억이라는 역사의 주인공이 된다.[4] 한국기원과는 별개의 단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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